후쿠자와유키치

논문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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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1835년 1월 10일 ~ 1901년 2월 3일 일본 개화기의 계몽사상가, 교육가, 저술가이다. 1860년대부터 개항과 개화를 주장하고 자유주의, 공리주의적인 가치관을 확립, 막부 철폐와 구습 타파 등을 주장하고, 부국강병론과 국가 중심의 평등론을 역설하였다. 1868년 도쿠가와 막부 가문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메이지 유신을 세우는데 영향을 미쳤다. 게이오기주쿠(게이오기주쿠 대학)과 지지신보(산케이신문의 전신)의 창설자이다.

후쿠자와는 소년 시절 학문에 뜻을 두고 봉건적이고 계급적 질서의 근거로 비판받았던 한학 등에 반발하여 나가사키와 오사카에서 난학(네덜란드학) 공부에 몰두하였다.[1] 20대 중반에 도쿄에 가서 당시 세계의 중심이 네덜란드가 아니라 영국 미국 등 영어권이라는 사실에 놀라 학문의 방향을 영학(英學)으로 바꾸었다.[1]

1858년 도쿄에도(江戶)에 네덜란드어 어학교인 난학숙(蘭學塾)을 열고, 1860년 네덜란드 선박 함장의 수행원으로 미국에 건너간 뒤 막부의 구미지역 견외사절단으로 프랑스, 영국, 독일, 아프리카 등을 방문하고 귀국, 자신의 견문을 알리고 개항을 주장하였다. 메이지 유신 기간 중 메이지 천황의 입각 제의를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계몽 사상 교육, 토론 교육과 언론 활동 등 정부 밖에서 메이지 유신의 이론적 토대와 개화 청년 양성에 주력하였다. 서구사상과 문물의 일본 도입을 위해 앞장섰고 그가 평소 강조한 것처럼 재야에서 일본의 힘과 독립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는 근대 일본복식부기 개념과 보험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다.

1984년 ~ 2004년의 일본은행권 D호 1만 엔권, 2004년부터의 E호 1만 엔권에 초상화가 쓰여 ‘유키치’라는 말이 1만 엔권의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게이오 대학교를 설립하여 게이오법인소속의 대학교이하 학교에서는 경의를 표하여 ‘후쿠자와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다른 교수나 교원에게는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는다. 또한 조선 개화기의 사상가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유길준(兪吉濬), 윤치호(尹致昊), 서재필(徐載弼), 서광범(徐光範)의 스승이자 한국 개화파에 영향을 준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오사카에서 태어나고 도쿄에서 사망하였다. 외삼촌 나카무라 쓰히로의 양자였으므로 나카무라 유키치(中村諭吉)로도 알려져 있다. 호는 삼십일곡인(三十一谷人:さんじゅういっこくじん)이고, 자는 자위(子囲), 시호는 “범”(範:はん)으로 범공(範公)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B%84%EC%BF%A0%EC%9E%90%EC%99%80_%EC%9C%A0%ED%82%A4%EC%B9%98
  1. 1.0 1.1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4>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동아일보 2007.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