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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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7일 ~ 1951년 1월 5일, 미국 귀화명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은 조선무신,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자 미국 국적의 한국 독립운동가, 의사였다. 미국에서 병리학자, 의사,시인, 소설가로 활동하였다. 본관은 대구이고, 자(字)는 윤경(允卿), 는 송재(松齋)·쌍경(雙慶)이다. 필립 제이슨 또는 피제손으로 표기하였다.

서재필


이는 그의 이름 서재필의 글자 순서를 거꾸로 한 필재서를 음역한 것이다. 또는 제이슨(Philip Jason)이라고도 자칭했다. 1900년대 당시 조선에서는 이를 다시 제선(堤仙) 또는 피제선(皮堤仙)으로 음역하였다. 필명은 오시아(N. H. Osia)[1] 전라도 보성군에서 태어났다.[2] 김성근(金聲根),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이다.

1879년 초시에 합격 이후 1882년(고종 20년) 증광시에 급제해 교서관부정자(校書館副正字)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 훈련원부봉사를 거쳐 1883년 일본으로 유학, 게이오 의숙토야마 육군하사관학교의 단기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귀국했다.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천하로 끝났다.[3] 그는 일본을 경유, 미국으로 망명했다. 1890년 6월 10일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1895년 김홍집 내각에서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되어 귀국하였다.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그해 7월 독립 협회를 설립했다. 이후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 상소 활동, 집회 및 시위 등을 주도했고, 민주주의참정권(參政權)을 소개하고, 신문물 견학을 위한 외국 유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개화사상을 견제하던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추방된 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경술국치 이후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재미 한국인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자신이 운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이 파산할 만큼 생계 곤란을 겪던 그는 독립운동과 동시에 의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중에는 징병검사관으로 봉사하였다.

광복 직후 미군정 사령장관 존 하지 등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미군정과도정부의 고문 역을 하였다. 한때 그를 대통령 후보자로 추대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1948년 미국으로 출국하여 1951년 후두암방광암, 과로의 합병증으로 병사하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9E%AC%ED%95%84
  1. 의사-언론인 서재필, 소설가이기도 했다, 코메디닷컴, 2010년 12월 2일.
  2. 본가는 충청남도 논산에 있었고 논산대전에서 성장했으므로 충남 출신으로도 간주된다. 전라도 동복군 문덕면 출생이며 충청도 논산군 논산면충청도 회덕군 대전면경상도 달성군 현풍면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이후 전라도 보성군 용문면에서 성장하였다.
  3. 갑신정변의 주동자라 하여 그의 두 형과 부모는 자결했고, 옥에 갇힌 그의 배우자 역시 자결했다. 당시 군대에 있던 그의 동생 서재창 역시 처형되었다. 그때 그의 맏형 서재춘의 아들 중 살아남은 조카들과 동생 서재창의 유복자, 서재우의 아들 등이 혈통을 이어 그 후손이 현존하고 있다. 또한 결혼한 큰누나와 누군가에 의해 구출된 여동생 서기석 등은 겨우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