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논문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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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尹致昊, 일본식 이름: 伊東 致昊:いとう ちこう), 1865년 1월 23일 ~ 1945년 양력 12월 9일)는 조선, 대한제국의 개혁, 민권운동가·문신이자 외교관·언론인·교육자, 한국의 정치가·교육자·사상가·언론인·종교가이며 기독교운동가였다. 구한말에는 갑신정변으로 피신했다가 귀국, 독립협회 활동, 독립신문 발행인과 제2대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 사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만민공동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강연, 계몽활동과 민권운동과 민중의 참정권 요구 운동·개혁운동에 참여했고, 서재필이 강제추방된 이후 독립협회와 반청계몽운동 활동을 지도했으나, 후에 친일 인사로 변절하였다.

그러나 민중의 호응 미진, 정부와 황국협회 등의 탄압으로 독립협회의 실패 이후, 민중 역시 그를 황제에게 불충하는 인물로 보면서 실망, 그는 민중을 계몽의 대상에서 개조, 훈련의 대상으로 시각을 바꾸고, 실력 양성론을 주장한다. 이후 관직에 투신하여 덕원감리사부윤, 삼화감리, 외무부 협판,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관하고 귀국하면서 서구 문물을 통한 계몽, 변화를 확신한다. 이후 한영서원,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활동하다 경술국치 뒤에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

교육활동으로는 한영서원을 창설하여 지도하고, 송도고보로 고쳐 재단 이사장과 초대 교장을 역임하고 사립학교의 재단이사로도 참여, 연희전문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의 재단 이사로 활동했다. 노동을 경시하는 사회분위기를 지적, 농·공업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한영서원의 학생들에게 농업, 목축 등의 실업교육을 지도했다.

사회활동으로는 YMCA 청년회 총무·회장, 1925년 11월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 회장, 1929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개최된 제3회 범태평양회의에 한민족 대표자로 참석하였고, 1931년 재만주한인동포위문사절단 단원으로 만주에 다녀온 뒤 흥업구락부 회장을 역임했고, 1928년부터 1937년까지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 제9대 회장을 역임했다.

1945년 2월 광복 직전에는 귀족원 의원에 선임되었다. 조선인 최초의 영어 통역관이기도 하였다.[1] 한국인 스스로 자치능력이 부족하다 판단한 그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지원을 해주면서도 일정 부분 거리를 두었다. 이솝 우화걸리버 여행기를 국내에 처음 번역해서 소개하였다. 또한 윤치호는 한국에서 최초로 자신의 노비를 전원 석방시켰다.

1930년 모교인 에모리 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박사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 선조때의 영의정 윤두수의 둘째 아들 윤흔의 8대손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초기 개화파 정치인 윤웅렬전주 이씨의 아들이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군의관 윤치왕, 사업가 겸 외교관 윤치창의 이복 형이며, 윤치소, 윤치오, 윤치영의 사촌이며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자 정치인인 윤보선(尹潽善)의 5촌 당숙이었다. 박규수(朴珪壽)와 어윤중(魚允中)의 문인이다. 본관은 해평(海平), 자(字)는 성흠(聖欽) 또는 성흠(成欽), (號)는 좌옹(佐翁)이다.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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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화화 추천 역사 속 인물] 오슬로국립대 교수 박노자가 추천하는 윤치호 씨네21 2008년 12월 0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