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忠臣(충신) 沙川伯(사천백) 南乙珍公(남을진공)은 고려가 망하니까
同志(동지) 72인과 같이 산에 들어가서 나오지 안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이분들을 杜門洞(두문동) 72인이라고 하여
그들의 忠誠(충성)을 높이 評價(평가)하고 있다.
南乙珍公(남을진공)은 그 후 積城(적성)골의 紺嶽山(감악산)의 남쪽에 있는 석굴에 숨어서 살으셨다.
南乙珍公(남을진공)에게는 조카가 둘이 있었는데 이 조카 둘은 모두 李朝(이조)에 나가서 벼슬을 했다.
李太祖(이태조)는 이 두 사람을 시켜서 南乙珍公(남을진공)을 李朝(이조)로 불러들이려 했으나
公(공)은 忠臣(충신)은 不仕二君(불사이군)이라 하고 李太祖(이태조)의 권유를 돌아보지 안했다.
그래서 李太祖(이태조)는 자기가 친히 그곳에 가서 말이나 해 볼가 하고 사신을 보내여
그 뜻을 전하게 했는데 사신이 그 석굴 있는 데로 올라가려 하니까
갑재기 구름과 안개가 일어나 사방을 가리여 天地(천지)가 캄캄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얼마 후에 하늘이 맑아지고 구름과 안개도 거두어져서 그 석굴에 들어가 보니 公(공)은 어디로 가셨는지
계시지 않아서 사신은 그대로 돌아와서 李太祖(이태조)에게 그대로 復命(복명)했다.
李太祖(이태조)는 使臣(사신)의 이러한 復命(복명)을 들으시고 크게 개탄하시고
公(공)은 아마도 羽化而登仙(우화이등선)하신 것이라 하시고
公(공)이 계시던 석굴에다 南仙窟(남선굴)이라는 大書特刻(대서특각)한 額을 下賜(하사)하시고
그 굴 앞에 있는 山林(산림)을 그 子孫(자손)에게 주시고
閑山里(한산리)라는 동네에다가 旌節祠(정절사)라는 祠黨(사당)을 지어 春秋(춘추)로 祭祀(제사) 지내게 하셨다.
석굴에는 지금도 南仙窟(남선굴)이라고 새겨진 글자가 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