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관왕묘

hoonhye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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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왕묘
(東關王廟)
명칭 동관왕묘
한문명칭 東關王廟
유형 관왕묘
건립일 1601년
건립 기록 『선조실록』, 『임하필기』, 『성호사설』 등.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난계로27길 84
위도 37.573154
경도 127.018215
문화재 지정 보물 142호
웹사이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7987



개요

동관왕묘는 1599년 임진왜란에 참전하기 위해 조선에 입국한 명나라 장수 만세덕(萬世德)의 추진에 의해 건립되어 1601년에 완공되었다. 몇 년 앞서 건립된 남관왕묘와 더불어 서울 인근에 건립된 두 관왕묘 중 하나로서 작지 않은 정치적 의미를 부여받았고, 이 때문에 숙종 이래 많은 국왕들이 능행 과정에서 관왕묘에 친림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역사에 동원된 인력과 물자의 소모로 인해 원성을 받았고, 이 때문에 건립 유공자들을 표창하는 여부의 문제에 관해 선조와 관원들이 갈등을 빚기도 했다. 대부분의 관왕묘들이 그러했듯 명나라 장수들이 귀국한 후 동관왕묘는 최소한의 관리만 이루어졌으며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다만 인조 대에는 이인거의 난 때 어영군을 주둔시킬 장소로 고려되거나, 병자호란 중에는 조선을 침공한 홍타이지가 자신의 막사를 동관왕묘에 두는 등 군사적인 성격을 갖는 사건이 있었다.

동관왕묘가 본격적으로 조선 왕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숙종 대부터였다. 관우로부터 정치적 가치를 발견한 숙종은 직접 동관왕묘의 유지 보수를 명하였으며 이전의 국왕들에 비해 친림 횟수가 잦았다. 또한 기존에 행했던 예를 읍례에서 배례로 바꾸는 등 의도적으로 관왕묘의 위상을 상승시켰고, 이에 따라 동관왕묘의 정치적 위상은 높아졌다. 영조 역시 숙종과 마찬가지로 자주 동관왕묘에 친림하고, 현판을 사액하였으며 아직 즉위 이전인 세손 시절의 정조에게도 관왕묘를 방문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즉위 이후에도 정조는 관왕묘 의례에 큰 관심을 보였다. 숙종, 영조, 장조, 그리고 자신이 쓴 비문을 적은 비석을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 세우도록 지시하고 비문을 가사로 활용하여 관왕묘 악장을 직접 지었다.

이후 고종 대에 북관왕묘가 건립되자 그 의식을 동, 남 두 관왕묘에서 따르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국가 의례보다는 민간의 기복신앙에 가까운 고종 대의 관왕묘 의례 형태로 인해 관왕묘의 정치적 의미와 가치는 적잖이 퇴색되었고, 일제에 의해 국가 의례가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향사가 중지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훼철되거나 소실된 다른 관왕묘들에 비해 동관왕묘는 살아남은 것은 물론 소실된 북관왕묘와 숭의묘 등에 있었던 유물들을 대신 소장하게 된 장소로서 국내 관왕묘 중에는 비교적 높은 가치를 갖고 보존될 수 있었다.

현황

보물 제142호로서 국내의 중요 유형문화재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조선 시대에도 남관왕묘와 더불어 국내 관왕묘 의례의 핵심이었고, 현재로서는 서울 소재 관왕묘 중에는 유일하게 건축물이 보존되고 있어 그 중요성이 높다.

2020년 11월에 어도, 어막대, 중삼문, 외삼문 등을 대상으로 한 복원 및 보수공사를 시작하였으나 2021년 10월 기준 현재까지도 준공이 지체되고 있어 1년 가까이 일반 관람객의 입장이 제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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