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rd: 기록

hoonhyeok
Admin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12월 9일 (목) 22:16 판 (Record_(3): 문집)
이동: 둘러보기, 검색

Record_(1): 실록

gwms:id dcterms:title gwms:recordDate gwms:originalText gwms:translatedText gwms:source gwms:infoUrl
Rec-0001 선조실록_56권_1594_1017_09 15941017 備邊司啓曰: "凡戰功, 無大將獨成之理。 故古之祠宇像設之處, 必使當時行陣褊裨之屬, 同在左右。 如關王廟, 周倉、關平輩, 亦預其中。 況三大將, 旣爲傳神以來, 今若不爲, 則有似失信, 亦爲未安。 臣等之意, 幷爲畫像, 分掛左右, 其於報功之意, 過厚而不至有害。 敢稟。" 答曰: "此事, 前聞論議不一, 熟議處之。" 비변사가 아뢰기를, "대체로 전공(戰功)이란 대장(大將)이 혼자서 이루는 이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사당에 상(像)을 설치하는 곳에는 반드시 당시에 같이 출전한 부장(副將) 등을 좌우(左右)에 함께 두었습니다. 이를테면, 관왕묘(關王廟)에 주창(周倉)이나 관평(關平)의 무리도 그 중에 참여한 것과 같습니다. 더구나 세 대장(大將)은 이미 신위(神位)를 전하여 왔는데 이제 만일 같이 설위(設位)하지 않는다면 신의를 잃은 듯하여 역시 미안하니, 신들의 생각으로는 아울러 화상을 만들어 좌우에다 나누어 거는 것이, 공에 대한 보답의 뜻으로는 지나치게 후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해로움이 있기까지는 않을 것이라 여겨져 감히 계품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일은 전에 논의가 귀일되지 못하였다고 들었다. 숙의(熟議)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10017_009
Rec-0002 선조실록_99권_1598_0425_04 15980425 政院以陳遊擊接伴官李忔書啓, 啓曰: "前日陳遊擊於下處後園上, 仍舊家, 立關王廟, 設塑像, 功役則時未完了矣。 卽者遊擊招謂臣曰: ‘俺昨日拜楊老爺, 稟以立廟之意, 則楊爺稱善, 卽爲來見曰: 「廟殿甚爲卑隘, 當改構新殿, 左右設長(廟)〔廊〕 , 前庭立重門, 以爲永遠之圖, 不可如是草草。」 仍給報施銀五十兩而去。 麻爺今日亦送五十兩, 邢軍門、陳御史、梁按察, 亦必依此送之矣。’ 且曰: ‘他餘功役, 當以我軍使喚, 至於木手、泥匠等, 則必得貴國善手者用之。 此事非爲我也, 正爲貴國大事。 此意國王不可不知’ 云。 大槪遊擊於立廟一事, 極其誠悃, 親自監董, 多言關王靈驗之事, 而涉於虛誕, 不敢一一陳達矣, 觀其意, 則蓋欲自上如經理所爲者, 而但不明言之爾。 且前日都監郞廳董役之時, 稍有器具, 事可易就, 今則都監啓請, 令繕工次知, 非但凡具板蕩, 次知官朴尙謹, 除授外任, 厥後略不顧見, 工匠亦多散走, 故遊擊於昨日經理來時, 面陳此弊, 請得工匠, 亦已許之云, 其於事體, 甚爲未安。 敢啓。" 傳曰: "付之都監, 別定都監官, 一依分付, 不輕爲之。" 정원이 진 유격(陳遊擊) 접반관 이흘(李忔)의 서계(書啓)로 아뢰기를, "전일에 진 유격이 하처(下處) 후원(後園) 위의 구가(舊家)를 그대로 이용하여 관왕묘(關王廟)를 세우고 소상(塑像)을 설치하였는데 공역(功役)은 아직 완료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 유격이 신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어제 양 노야(楊老爺)를 뵙고 사당 건립 문제를 여쭈었더니 양 노야가 좋다고 하면서 즉시와 보고는 하는 말이 「묘전(廟殿)이 너무 낮고 좁으니 전각을 새로 짓고 좌우에 장묘(長廟)를 세울 것이며, 앞 뜰에는 중문(重門)을 세워 영원히 존속되도록 해야지 이렇게 초초(草草)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 」 하면서, 이어 보시(報施)로 은(銀) 50냥을 내놓고 갔다. 마야(麻爺)도 오늘 50냥을 보내왔고, 형 군문(邢軍門)·진 어사(陳御史)·양 안찰(梁按察)도 필시 그 정도로 보내올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다른 나머지 공역들이야 의당 우리 군사들을 시킬 것이나 목수(木手)·이장(泥匠) 등은 귀국의 솜씨 좋은 자들을 불러 써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우리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귀국의 대사(大事)를 위하여 한 것이므로 그 뜻을 국왕께서도 꼭 아셔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유격이 사당을 건립하는 일에 매우 열성이고 감독도 친히 하면서 관왕(關王)의 영험에 대한 말을 많이 하였는데, 말이 너무 허황되어 낱낱이 아뢸 수는 없으나 그의 뜻은 대개 상께서도 경리가 하는 것처럼 좀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인데 말만 분명히 하지 않은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일에 도감 낭청이 공역 감독을 할 때는 기구도 꽤 갖추어져 일이 쉽게 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도감이 계청하여 선공감(繕工監)이 담당하기 때문에 모든 기구가 형편없을 뿐만 아니라 담당 관원 박상근(朴尙謹)마저 외임(外任)에 제수된 후로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상태이고 장인들까지도 뿔뿔이 흩어져 버렸으므로, 어제 경리가 왔을 때 유격이 그 폐단에 관하여 직접 의사 개진을 하여 장인을 얻어 쓸 수 있도록 이미 허락을 받았다고 하니, 사체로 보아 매우 미안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도감에 맡겨 도감관(都監官)을 별도로 정하여 모든 것을 한결같이 분부에 따라 소홀히 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104025_004
Rec-0003 선조실록_100권_1598_0512_06 15980512 備邊司啓曰: "關王廟行禮事, 我國前者未有此等禮節。 且明日則太爲急迫, 難依天將所言施行。 唯慮經理、提督先到, 而請主上則似爲難處。 然以奠儀未備, 禮節未講, 又不曾致慮, 不敢輕詣廟下之意答之, 而令禮官, 博考可據之儀, 講定施行, 恐爲無妨。 但中朝則必以明日生辰爲重, 而是日行禮。 若天將等固請, 則無辭再拒, 極知苟簡, 而勢似不可已矣。 或以爲: ‘明日自上不必親臨, 另差重臣, 行禮爲便’ 云。 但皇上遣官致祭, 而我國又有遣官之擧, 則天將等必以等尊爲怒, 此亦不可不慮。 今日臣德馨議于唐官, 則彭中軍等以爲: ‘諸老爺必行四拜禮, 國王看他行禮何樣, 一樣行之爲可’ 云。 此則不可一遵其禮。 黃應陽等以爲: ‘關王是假王, 雖有尊神之義, 國王平時則不必親拜, 差大臣行禮爲得體。 但今當板蕩奔遑之時, 中朝小官來此者, 國王亦禮貌之, 爲朝鮮新立之廟, 國王一番降屈, 未爲不可云云。’ 天將等牢請, 則固辭亦難, 急令禮官, 只講燒香致敬之儀, 觀勢而進退之如何?" 傳曰: "依啓。" 비변사가 아뢰기를, "관왕묘(關王廟)에 행례(行禮)하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에 전에는 이런 예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일 행례하는 것은 너무 급박하니, 중국 장수가 말한 대로 시행하기는 어렵습니다. 걱정이 되는 것은 경리·제독이 먼저 도착하여 주상(主上)을 청할 경우에는 난처할 듯 싶습니다. 그러나 전의(奠儀)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고 예절을 강정(講定)하지 못하였음은 물론 또 일찍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관계로 감히 경솔히 관왕묘에 나아갈 수 없다는 뜻으로 답변하소서. 그리고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준거할 만한 의식을 널리 상고해 강정하여 시행케 하는 것이 무방할 듯싶습니다. 그러나 중조(中朝)에서는 틀림없이 내일이 생신임을 중히 여겨 이날 행례할 것입니다. 만약 중국 장수들이 굳이 청한다면 다시 거절할 만한 말이 없으니 매우 구간(苟簡)스러운 줄은 압니다만 형편이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일은 위에서 친림할 필요가 없으니 특별히 중신(重臣)을 차견하여 예식을 행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황상께서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또 관원을 보내어 거행하면 중국 장수들이 틀림없이 등존(等尊)한다 하여 노여워 할 것이니, 이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신 이덕형(李德馨)이 중국 관원과 의논한 바 팽 중군(彭中軍) 등이, ‘여러 노야(老爺)들이 반드시 사배례(四拜禮)를 행할 것이니 국왕께서는 그들이 예를 어떻게 행하는지 보시고서 똑같이 행하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들이 행례하는 것과 똑같이 따라서 할 수는 없습니다. 황응양(黃應陽) 등은, ‘관왕은 가왕(假王)이니 신(神)을 존중하는 의의는 있다고 하더라도 평시에는 국왕께서 친히 배례할 필요가 없고 대신을 보내어 예식을 행하는 것이 체통에 맞는다. 그러나 지금은 난리를 당하여 어지러운 시국이어서 이곳에 온 중국의 소관(小官)에게도 국왕께서 예절을 차리는 실정이니, 조선을 위해 새로 세운 사당에 국왕께서 한 번 왕림하시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중국 장수들이 굳이 행례하시기를 청하면 자꾸 거절하기도 어려우니, 속히 예관으로 하여금 분향하고 경의를 표하는 의식을 강정(講定)하게 하였다가 형편을 보아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105012_006
Rec-0004 선조실록_100권_1598_0512_07 15980512 禮曹啓曰: "關王廟致祭之儀, 我國前所未有, 而禮節未講, 固難率爾處之。 但天將固請, 則勢不得已, 姑依備邊司啓辭, 只行焚香致敬之儀何如?" 傳曰: "依啓。" 예조가 아뢰기를, "관왕묘에 치제하는 의식은 우리 나라에서는 전에 없던 것으로 예절을 아직 강정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경솔하게 조처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중국 장수가 굳이 요청하면 형편상 그만둘 수 없으니 우선 비변사의 계사(啓辭)대로 분향하고 경의를 표하는 의식만 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105012_007
Rec-0005 선조실록_100권_1598_0512_08 15980512 弘文館啓曰: "關王廟行禮, 博考事傳敎矣。 歷考諸書, 往昔群祀之類, 他無所據, 唯宋祖開寶三年, 令有司, 品第前代功臣、烈士以聞, 而關羽亦在其中。 所謂關王廟者, 不待皇明, 而已有其祀矣。 至於天將, 則極其尊敬, 四孟歲暮及其生辰, 皆遣官致祭, 載在《會典》 《增祀神祇》之首。 此經理諸公, 所以趨廟燒香, 而又欲自上行禮也。 但以我國言之, 無此等祀禮, 雖欲求其近似相倣之規, 而亦未得考。 旣非應祀, 而率爾處之, 則恐未合於典祀之宜。" 傳曰: "依啓。" 홍문관이 아뢰기를, "관왕묘에 행례하는 일에 대해 널리 상고하라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서적을 두루 상고하였으나 옛날 여러 가지 제사를 지낸 유(類)에서는 준거할 만한 것이 없었고, 오직 송조(宋祖) 개보(開寶) 3년에 유사(有司)로 하여금 전대 공신(功臣)과 열사(烈士)의 등급을 품제(品第)하여 아뢰게 하였는데, 관우(關羽)도 그 속에 들어 있으니, 소위 관왕묘라는 것은 명나라 이전에 이미 제사지낸 일이 있습니다. 중국 장수들은 매우 존경하여 사맹삭(四孟朔)과 세모(歲暮) 및 그의 생신에는 모두 관원을 보내어 치제한 사실이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증사신기편(增祀神祇篇) 첫머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래서 경리를 비롯한 제공(諸公)들이 관왕묘에 나아가 분향하고 또 상께서도 예식을 행하시도록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로 말하면 이런 제사는 없었고 엇비슷하여 모방할 만한 규칙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역시 상고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응당 행해야 할 제사가 아닌데 경솔하게 조처하면 올바른 제사의 의식에 합당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105012_008
Rec-0006 선조실록_100권_1598_0513_03 15980513 今日, 乃關王生辰也。 乃成塑像諸具致祭, 請上亦幸祭之。 此廟中國有之, 而我國則無之。 非祀典所載, 而經理强之, 上不得已將往焚香, 而乘輿已駕, 大雨暴下, 停行。 오늘은 관왕(關王)의 생신이다. 소상(塑像)과 제구를 갖추어 치제하였는데, 상도 행행하여 치제하도록 요청했다. 이 관왕묘는 중국에는 있으나 우리 나라에는 없어서 그 의식이 사전(祀典)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경리가 강요하므로 상이 할 수 없이 가서 분향(焚香)하려고 대가(大駕)를 차비하였는데 갑자기 큰비가 내려 행행을 중지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105013_003
Rec-0007 선조실록_100권_1598_0514_02 15980514 上親祭于關王廟。 上進跪焚香, 連奠三爵。 上前後各行再拜禮。 禮畢, 遊擊設庭戲, 邀上共賞。 司諫院啓曰: "接見至嚴之地, 設以優倡雜戲, 自上親臨, 極爲未安。 此雖出於唐將之所自爲, 而爲政院者, 固當歷階周旋, 措辭請告曰: ‘國君相見之際, 不當設(排優)〔俳優〕 。 小邦上下, 沈痛在身, 不忍見此娛戲。 且事神之所, 如是褻慢, 亦非尊敬關王之意’ 云云, 則天將未必不從。 不然則辭以禮畢, 速請還宮, 未爲不可, 而不能周旋, 致有此事, 極爲非矣。 請都承旨、色承旨, 竝命推考, 速爲還宮。" 答曰: "天將前措辭, 不可如是爲之。 任其所爲, 豈爲大段?" 상이 관왕묘에 친제(親祭)하였다. 상이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끓고 앉아서 분향한 다음 계속하여 술 석 잔을 올렸다. 상이 전후로 각각 재배(再拜)하는 예식을 거행했다. 예를 마치니, 유격이 뜰에서 광대놀이를 베풀고 상을 맞이하여 함께 관람하였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지엄하신 분을 접견하는 자리에 배우의 잡희(雜戲)를 베풀고 상께서 친림하게 하니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이것은 중국 장수가 스스로 하는 일이기는 하나 정원에서는 마땅히 두루 주선하면서 조사(措辭)하여 청하기를, ‘국왕을 뵙는 자리에 배우의 잡희를 베푸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소방은 상하가 침통하여 차마 이런 유희는 구경할 수 없다. 그리고 신(神)을 섬기는 장소에서 이처럼 설만히 하는 것도 관왕을 존경하는 뜻이 아니다.’라고 하면, 중국 장수가 반드시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절이 끝났다고 핑계하고 속히 환궁(還宮)하도록 요청하였으면 불가할 것이 없었는데 제대로 주선하지 못하여 이런 일이 있게 만들었으니, 매우 잘못 되었습니다. 도승지와 색승지를 모두 추고하시고 속히 환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중국 장수에게 하는 조사(措辭)를 그렇게 할 수가 없어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둔 것이니, 무어 그리 대단한 잘못인가."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105014_002
Rec-0008 선조실록_100권_1598_0514_03 15980514 持平宋應洵等來啓曰: "關王廟行禮, 雖不得已, 幕次前設雜戲之事, 則似涉戲玩, 非人君所可觀也。 請接見後, 以權辭周旋, 速爲還宮。" 答曰: "雜戲則未安, 而天朝所爲之事, 周旋止之爲難。 酒禮自此請撤, 事勢亦難, 不得從。" 지평 송응순(宋應洵) 등이 와서 아뢰기를, "관왕묘에 행례하신 것은 부득이해서였다고 하더라도 막차(幕次) 앞에 잡희를 베푼 일은 희롱하는 것인 듯하니, 상께서 관람하실 것이 못됩니다. 접견하신 후에 권사(權辭)로 주선하시고 속히 환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잡희를 관람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그러나 중국 조정에서 하는 일을 중지시키라고 주선하기는 어렵다. 주례(酒禮)를 이로부터 거두도록 요청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니 따를 수 없다."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105014_003
Rec-0009 선조실록_103권_1598_0816_04 15980816 邢軍門接伴使金命元啓曰: "昨日軍門與兩按察、三提督, 詣關王廟, 會盟書一帖, 大槪同心戮力, 南北相和, 期於勦滅倭奴。 否者同死於此, 不得歸家。 軍門以下入於卓前, 先行四拜, 軍門詣香案前, 燒香, 連進三獻, 使葉靖國讀祝文, 仍行四拜。 贊者執白鷄, 宰殺取血, 和於溫酒, 軍門親讀誓帖, 仍飮血盞訖, 按察以下讀誓飮血, 一如軍門。 禮訖, 軍門以下一拜, 三叩頭而出。" 형 군문(邢軍門)의 접반사 김명원(金命元)이 아뢰었다. "어제 군문이 안찰사(按察使) 두 사람과 제독(提督) 세 사람을 데리고 관왕묘(關王廟)에 나아가 회맹(回盟)하고 첩문(帖文) 한 통을 작성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개 ‘마음과 힘을 합하고 남과 북이 서로 화합하여 기필코 왜노(倭奴)를 섬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에서 함께 죽고 집에 돌아가지 않기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군문 이하가 탁자 앞으로 나아가 먼저 4배를 행하고 군문이 향안(香案) 앞으로 나아가 향을 피우고서 잇달아 삼헌(三獻)을 올린 뒤 섭정국(葉靖國)으로 하여금 축문을 읽게 하고 인하여 4배를 행하였습니다. 찬자(贊者)가 흰 닭을 잡자 재인(宰人)이 죽여 피를 뽑아 따뜻한 술에 섞었는데 군문이 몸소 서첩(誓帖)을 읽고는 인하여 피를 탄 술을 다 마셨으며, 안찰(按察) 이하 모두가 서첩을 읽고는 피를 탄 술을 마시기를 군문처럼 하였습니다. 예가 끝나자 군문 이하가 한 번 절하고 머리를 세 번 조아린 뒤 나왔습니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108016_004
Rec-0010 선조실록_105권_1598_1028_05 15981028 午, 上幸南大門外, 俄而給事出來。 上遣承旨, 持拜帖邀於道傍曰: "國王方在待勘之中, 不得出入, 今聞老爺南下, 不敢退在, 祇候道左矣。" 給事曰: "雨勢如此, 今日則不爲下去。 卽以關王廟焚香事進去, 罷還時入謁矣。" 오시(午時)에 상이 남대문(南大門) 밖에 나아갔는데, 조금 지나서 급사(給事)가 나왔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배첩(拜帖)을 가지고 길가에서 맞이하며, "국왕(國王)이 현재 사감을 기다리는 중에 있어 출입할 수 없는데, 지금 노야(老爺)께서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감히 물러나 있지 못하고 길 한쪽에서 삼가 기다립니다." 하니, 급사가 말하기를, "이처럼 비가 오니 오늘은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관왕묘(關王廟)에 분향(焚香)하러 가는 길이니, 돌아올 때에 들어가 뵙겠습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110028_005
Rec-0011 선조실록_110권_1599_0307_01 15990307 丙戌/上幸黎通判民化館。 【管糧通判, 爲人溫雅, 比他將稍優焉。"】 通判曰: "前見國王辨本, 其意甚好。 且關王廟泣告神言, 信有之乎? 今之賊退, 皇上甚爲喜悅, 而丁、徐二人, 及覆構捏。 至於剃眉一事, 給事所自爲, 而反欲歸之於撫臺, 以此邢軍門, 亦上本辨之, 旨意時未降矣。 徐給事今當回來, 而以被參, 故方駐遼陽, 稱病云矣。" 上曰: "小國以外藩, 天朝通報, 無路得見。 頃見上司, 始聞聖上, 敍功告廟, 主事亦令回籍, 信乎明見萬里也。 關廟揭榜事, 小國安有是事?" 通判曰: "倭子十名, 出來釜營言: ‘陳提督 露梁戰捷時, 倭奴死者一萬三千, 劉提督所殺, 亦千餘矣。 行長, 淸正, 已爲撤回原鎭, 平義智方在對馬島, 有再犯之計’ 云矣。 且天兵之在釜山者, 王指揮主管糧餉, 而今方缺乏云。 願王速爲搬運。" 上曰: "曾聞倭子出來, 而其間曲折, 全未得聞, 今者大人說及之, 不勝幸甚。 其書契可以得見乎?" 通判曰: "其書在劉大人衙門。 書中多有悖慢之語。 初以王子、陪臣爲約, 而何不送之乎? 當再犯云云。" 通判曰: "貴國戰船, 其制甚好。 必須及時多造, 列置海邊, 賊有來探者, 逐一厮殺。 今之所急, 莫如糧餉, 亦須快速搬〔運〕 , 無令戰士乏食。 天朝軍馬, 今方次第撤還, 而劉督部則已有聖旨, 往征楊應龍。 應龍 播州劇賊也。 前日邢軍門誘而降之, 今又再叛, 雲南、貴州之間, 殺掠甚多云矣。" 酒訖, 上再揖而出。 상이 통판(通判) 여민화(黎民化)의 관소에 거둥하였다. 【관량 통판(管糧通判)으로 위인이 온화하고 단아하여 다른 장수에 비하여 조금 관대하였다. 】 통판이 말하기를, "전일에 국왕의 변무 주본(辨誣奏本)을 보니 그 뜻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리고 관왕묘(關王廟)의 신에게 울며 고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이번에 적이 물러간 일로 황상께서 매우 기뻐하고 계시는데 정(丁)·서(徐) 두 사람이 계속 사실을 날조하고 있습니다. 눈썹을 깎은 일에 있어서는 서 급사(徐給事)가 자신이 한 일인데 도리어 그 책임을 무대(撫臺)에 돌리려고 하니 이 때문에 형 군문(邢軍門)도 주본을 올려 변명하였으나 황지(皇旨)는 아직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서 급사는 이번에 돌아올 것인데 탄핵을 입었기 때문에 지금 요양(遼陽)에 머물러 병을 칭탁하고 있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외번(外藩)으로 중국의 통보를 얻어볼 길이 없소이다. 저번에 상사(上司)를 만나 비로소 성상께서 공로를 포상하고 종묘에 고한 것과 정 주사(丁主事)에 대해서도 관적(官籍)을 회수하게 하셨다는 말을 들었으니, 참으로 만리 앞을 내다보시는 식견이외다. 관왕묘에 방(榜)을 걸었다는 일은 우리 나라로서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소이까." 하였다. 통판이 말하기를, "왜자(倭子) 10명이 부산의 적진에서 나와 말하기를 ‘진 제독(陳提督)이 노량(露梁)의 전투에서 승첩을 거둘 때 왜노의 죽은 자가 1만 3천 명이고 유 제독이 죽인 것도 1천여 명이었다. 행장과 청정은 이미 본진(本鎭)으로 철수하여 돌아갔으나 평의지(平義智)는 지금 대마도에 있으면서 다시 침범할 계획을 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산에 있는 중국군은 왕 지휘(王指揮)가 그들의 군량을 주관하는데 지금 바닥이 났다고 하니, 국왕께서는 빨리 운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왜자가 나온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간의 내막을 전혀 듣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대인께서 언급해주시니 다행함이 그지없소이다. 그들의 서계(書契)를 볼 수 있겠소이까?" 하였다. 통판이 말하기를, "그 글은 유 대인(劉大人)의 아문에 있습니다. 그 글 속에 패만(悖慢)한 말이 많이 있는데 주로 ‘당초에 왕자와 배신을 보내겠다고 약속하고서 왜 보내지 않느냐? 다시 침범하겠다.’ 하였습니다." 하고, 통판이 다시 말하기를, "귀국의 전선(戰船)은 그 제도가 매우 좋으니 반드시 미리 많이 제조하여 해변에 배치해 두고 몰래 와서 정탐하는 적이 있으면 낱낱이 죽여 없애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시급한 것은 군량만한 것이 없으니 빨리 운반하여 전사(戰士)가 먹을 것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중국의 군마는 지금 차례대로 철수할 것으로 유 독부(劉督部)에게는 이미 성지가 내려 돌아가 양응룡(楊應龍)을 정벌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양응룡은 파주(播州)의 강한 비적(匪賊)으로 전일 형 군문이 회유하여 항복을 시켰는데 이제 또 다시 배반하여 운남(雲南)과 귀주(貴州) 지방에서 살인과 노략질을 매우 심하게 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주례가 끝나자 상이 두 번 읍하고 나왔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03007_001
Rec-0012 선조실록_111권_1599_0417_05 15990417 許遊擊國威, 來時御所請見, 上出中門外迎入, 行酒禮 【國威 福建人, 人物輕佻, 崇信佛學。】 上曰: "不穀不閑文學, 聞大人文章甚高。 若以一言相贈, 則小國之寶也。" 國威曰: "貴國, 文獻之邦。 以俺玩文弄墨, 何敢有作乎? 俺前在南中, 南中儒士, 有以頌言相贈者, 俺看了卽破。 諸將則皆鋟梓而來, 將爲誇示之計, 足賭一笑也。" 國威曰: "關王廟甚多靈異, 國王須加尊敬。" 上曰: "關王, 某時有神助之功, 某時封協天大帝乎?" 國威曰: "太祖朝有陰助之力, 故封武安王; 萬曆十三年, 封協天大帝也。" 上曰: "大人學貫天人, 無書不讀云。 道之浩浩, 何處下手? 聖賢千言萬語, 何從可入? 願安承敎。" 國威曰: "道不在遠, 只在心裏。 事事得宜之謂道。 萬物莫不有當然之道, 如飮酒食肉皆道也。 心裏少有所慊, 則皆非道也。 道者, 猶道也, 正正平平之謂也。 躬行心得, 是著得工夫也。 人君之道無他, 在淸心寡慾擧賢愛民八字上。 僕本武人, 焉知道哉? 王按察是好人知道者也。" 且曰: "道本無, 無他, 生來死去四字若明白, 則天地間無非要了。 至於喜怒哀樂, 先有定見, 則皆是道也。" 【蓋王按察亦崇信陸學者, 故國威言好人。】 夜一更漏下, 國威醉酒欲起, 上呈禮單, 受之而去。 유격 허국위(許國威)가 시어소(時御所)에 와서 뵙기를 청하자, 상이 중문(中門) 밖에 나아가 맞아 들이고 주례를 행하였다. 【 국위는 복건(福建) 사람으로 인물이 경망스럽고 불학(佛學)을 숭신(崇信)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불곡(不穀)은 문학이 익숙하지 못하오. 그런데 듣자니 대인(大人)은 문장이 매우 높다고 하니 한 말씀을 써서 준다면 소국(小國)의 보배가 될 것입니다." 하니, 허국위가 말하기를, "귀국은 문헌(文獻)의 나라입니다. 문구나 짓고 글씨나 쓸 줄 아는 저로서 어떻게 감히 글을 짓겠습니까. 제가 전일 남중(南中)에 있을 때 남쪽 지방의 선비들이 송축하는 시를 지어 서로 주기로 한 적이 있었는데, 저는 그들이 지은 것을 보고 즉시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장수들은 모두 나름대로 지어가지고와서 과시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한바탕 웃을 일이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관왕묘(關王廟)는 영이(靈異)한 일이 심히 많으니, 국왕께서도 모름지기 더욱 존경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왕은 어느 때에 신조(神助)의 공이 있었고, 어느 때에 협천 대제(協天大帝)로 봉해졌소이까?" 하니, 국위가 말하기를, "태조(太祖) 때에 음조(陰助)의 공이 있었기 때문에 무안왕(武安王)에 봉하였고 만력(萬歷) 13년에 협천 대제로 봉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인은 학문이 천인(天人)을 통하고 읽지 않은 책이 없다고 하는데 넓고 넓은 도(道)를 어디부터 착수해야 합니까? 성현의 천언만어(千言萬語)를 어디로 말미암아 들어갈 수 있는지, 가르침을 받고 싶소이다." 하니, 국위가 말하기를, "도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마음 속에 있습니다. 일마다 마땅함을 얻는 것을 도라고 합니다. 만물에는 당연한 도가 모두 있는 것으로서 예컨대 술 마시고 고기 먹는 것도 모두가 도이고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있다면 모두 도가 아닙니다. 도라는 것은 길과 같은데 바르고 평평(平平)한 것을 이릅니다. 몸소 실행하여 마음 속에 얻어지게 함이 바로 공부(工夫)하는 방법입니다. 인군의 도란 다른 것이 아니라 청심과욕 거현애민(淸心寡慾擧賢愛民) 여덟 글자에 있습니다. 저는 본시 무인(武人)일 뿐이니 어찌 도를 알겠습니까. 왕 안찰(王按察)은 도를 잘 아는 호인(好人)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도란 본래 무(無)인 것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생래사거(生來死去) 네 글자를 명백히 알게 되면 천지 사이에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에 대해 먼저 정견(定見)을 갖게 되면 이 모두가 도입니다." 하였다. 【왕 안찰 역시 육상산(陸象山)의 학문을 숭신(崇信)하는 자였기 때문에 허국위가 호인(好人)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 밤 1경이 지나 허국위(許國威)가 술에 취하여 일어나려고 하자, 상이 예단(禮單)을 주니, 받아 가지고 갔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04017_005
Rec-0013 선조실록_111권_1599_0429_03 15990429 以秘密, 傳于政院曰: "關王廟設立事, 前日使之周旋, 令設於興仁門外造山近處, 而今使設於南大門外。 前日之敎, 不能圖之乎? 何無黑白耶? 南大門外旣有關王廟, 不宜疊建。 須於東大門外爲之。 其所以然者, 有微意。 予曾聞天朝人之言矣。 今次卜地, 初出於葉靖國, 若圖之於靖國, 則事或可就。 卿不能圖之, 則靖國, 海平知之, 若令海平, 往見靖國, 善爲辭說, 令於東大門外, 設立如何? 倘東大門外爲不可, 則訓鍊院近處可矣。 本院乃鍊習武士之地, 而設立關王廟於其處, 卽古者立武成王廟之遺意也。 旣以東方爲吉, 則城內城外, 竝爲參商議啓。 言于禮曹。" 비밀로 정원에 전교하였다. "관왕묘(關王廟)의 건립에 관한 일을 전일 주선하도록 하여 흥인문(興仁門) 밖의 조산(造山) 근처에 설립하게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남대문(南大門) 밖에 설립하겠다고 하니, 전일의 하교대로 도모할 수 없어서인가, 어찌하여 분명하게 못하는가? 남대문 밖에는 이미 관왕묘가 있으니, 또 세우는 것은 합당치 않다. 모름지기 동대문 밖에 세워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생각이 있어서이다. 일찍이 중국 사람에게 들은 말이 있다. 지금 다시 세울 곳을 고르는 일은 애초 섭정국(葉靖國)으로부터 나왔으니, 만일 정국에게 이 일을 꾀한다면 일이 혹 될 듯도 싶다. 경이 꾀할 수 없다면 정국(靖國)을 해평(海平)이 알고 있으니 만일 해평으로 하여금 정국을 찾아가 만나 잘 설득하여 동대문 밖에 설립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혹시라도 동대문 밖이 불가할 경우에는 훈련원(訓鍊院) 근처가 좋겠다. 본원은 바로 무사(武士)들을 연습시키는 곳이니, 관왕묘를 그곳에 설립하는 것은 곧 옛날 무성왕묘(武成王廟)를 설립하였던 유지(遺志)이다. 동방(東方)이 길(吉)한 곳이라고 하니 성안이나 성밖이나 아울러 헤아려 의논하여 아뢰도록 예조에 이르라."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04029_003
Rec-0014 선조실록_112권_1599_윤0407_01 15990407 乙酉/上幸慕華館, 延慰賈郞中惟約。 海平府院君 尹根壽, 以關王廟議建事入啓, 上於幕次引見。 上曰: "關王廟何以更建乎?" 根壽曰: "未知其意。" 上曰: "軍門上本, 奉聖旨云, 然耶?" 根壽曰: "未聞之矣。" 上曰: "一門之外, 欲建二廟, 於事體如何?" 根壽曰: "天朝以建立廟堂爲事, 各司皆有廟堂之稱。 今於玉門館, 又新創云。 以此觀之, 不獨設於一處。 其意已定, 似難動矣。" 上曰: "然則未可止之乎? 一設之後, 不可復改。 今當商量爲之。 前見劉黃裳, 則我國都城, 東邊似虛, 建立屋宇, 深鑿池溝, 以鎭地脈云。 此言與我國所言相合。 若不得已而設之, 則設於東門之外可矣。 卿言于張摠兵, 早爲周旋。" 午時, 惟約至。 上曰: "大人前以小邦事到安州, 而是時事急, 未得相見, 至于今未忘於心。 今又遠來, 不勝喜幸。" 惟約曰: "俺以都院相見事出來, 而一路多有貽弊之事, 未安未安。" 茶、酒訖, 上呈禮單, 惟約曰: "來時已再領, 今不敢領。" 上曰: "古者相見, 必有禮物。 薄産不足爲儀, 只表誠耳。" 惟約曰: "多謝。"領之而出。 상이 모화관에 행행하여 낭중(郞中) 가유약(賈惟約)을 맞아 위문하였다. 해평 부원군 윤근수(尹根壽)가 관왕묘(關王廟) 건립에 대해 의논한 일을 입계하니, 상이 막차(幕次)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왕묘를 무엇 때문에 다시 세우는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문이 상본(上本)하여 성지(聖旨)를 받들었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 문 밖에 두 개의 묘(廟)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 사체에 어떠한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중국 조정에서는 묘당 건립을 일삼기 때문에 각사(各司)마다 묘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옥문관(玉門館)에 또 새로 짓는다고 하니, 이로 보면 한 곳에만 설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변동시키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중지시킬 수 없겠는가? 일단 설립한 뒤에는 다시 고치지 못할 것이니, 지금 잘 헤아려 해야 한다. 전에 유황상(劉黃裳)이 우리 나라는 도성 동편이 허한 듯하니 건물을 세우고 못을 깊이 파 지맥(地脈)을 진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우리 나라에서 말한 것과 서로 부합하니, 만약 부득이 설립해야 한다면 동문 밖에 세워야 한다. 경이 장 총병(張總兵)에게 말하여 속히 주선하도록 하라." 하였다. 오시에 가유약이 도착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이 전에 소방(小邦)의 일로 안주(安州)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일이 급하여 상견하지 못했으므로 지금까지 마음 속으로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또 멀리 오시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유약이 말하기를, "제가 도원(都院)과 상견할 일로 나왔는데 일로에 폐를 끼친 일이 많아 미안스럽습니다." 하였다. 차와 술을 마신 뒤 상이 예물 단자를 증정하니, 유약이 말하기를, "지난번 왔을 때 이미 두 번이나 받았으니, 지금은 감히 받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상견할 때에는 반드시 예물이 있었습니다. 박한 물건이라서 예물이 못되지만 성의를 표할 따름입니다." 하니, 유약이 감사하다고 하고, 받아 가지고 나갔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04107_001
Rec-0015 선조실록_112권_1599_윤0413_04 15990413 陳奏使右議政李恒福、副使同知中樞府事李廷龜復命, 上御別殿引見之。 上曰: "卿萬里奉使, 良苦良苦。 前見聖旨, 被誣一事, 似已昭雪, 但不別降皇勑, 而於他會議之末, 兼下聖旨, 是可欠也。" 恒福曰: "臣等之意, 亦以爲未快, 而蕭尙書以爲: ‘天朝文書躰格, 自來如是’ 云。 臣等欲申請降勑, 而適軍門題本有關王廟貼榜之事, 聖批以爲: ‘朝鮮軍民泣告神言, 殊爲駭異。’ 臣等未知皇上之意, 不敢復請而來。" 上曰: "此事, 予亦深以爲怪。 觀其文辭, 則似是我國人所爲。" 恒福曰: "臣在玉河館, 聞此事, 以爲: ‘中朝人, 作事多無理, 必其做出無疑。’ 及見其文辭, 則似是我國人所爲。" 上曰: "卿言正合予意。" 恒福曰: "唐人於楊經理時, 亦嘗作歌掛之於東大門矣。" 廷龜曰: "皇上見辨本, 卽下九卿、六部會議, 皆言本國忠順大槪。 天朝方以應泰爲非, 群議攻之。 臣行適値此會, 故快爲昭雪。 但他日, 萬一應泰得志, 則甚可慮也。" 上曰: "在我理直, 雖使予對應泰論辨, 少無可畏。 其中尊號一事, 果爲僭越, 而已先直告, 他無理屈之事矣。" 恒福曰: "臣持《五禮儀》, 見之蕭尙書曰: ‘小國事大儀節, 都在此書矣。’ 尙書見而大喜以爲: ‘此書, 可遍見於諸老爺’ 云。" 上曰: "太監出來云, 然耶?" 恒福曰: "玉河館夫言: ‘太監當往汝國, 我亦欲隨去’ 云。 以此見之, 出來無疑。" 廷龜曰: "聞太監後臣行二三日云。 以日月計之, 則今已渡江, 而尙無的報, 未知何故。" 上曰: "十三省, 已爲開礦云耶?" 恒福曰: "不獨十三省, 太監分出天下, 言利之道大開。 臣行一路, 處處設皇店, 榜曰: ‘奉諭聖旨, 徵收國助。’ 雖一蔬一菜, 亦皆有稅, 道路之人, 爭相怨詈曰: ‘皇上愛錢不愛民。 未有如此而享國長久之理。 我等不久, 亦將流離如汝等’ 云。 且遼左大役方興。 傳言李成樑於壬辰前, 請築舊遼陽城, 聖旨準下, 而適有東征之役, 未就而止, 今則倭賊已退, 故都御史李植請築之, 已爲始役云。 遼左卽唐 太宗班師之處, 其右曰遼右, 是爲廣寧。 其上流爲(混)〔渾〕 河, 其上爲太子河, 合而爲三汊河。 三汊之外有舊遼陽城, 未知何時所築, 而至今遺址尙在。 其地草樹茂密, 土地廣闊, 卽胡人牧馬之處。 若築城于此, 則胡人必爭云矣。" 上曰: "李如松屍身得之乎?" 恒福曰: "未得云矣。" 上爲之斂容歎息。 上曰: "㺚子聲息如何?" 恒福曰: "臣來時聞㺚子來犯遼陽近地, 男女多有奔遑之色。" 上曰: "老胡聲息何如?" 恒福曰: "我 國之所畏者老胡, 而中朝則以老胡, 爲不足憂, 其所甚怕者, 㺚子也。 上曰: "石尙書、沈惟敬未釋耶?" 恒福曰: "未釋云矣。" 上曰: "乾淸、坤寧之役未畢乎?" 恒福曰:"皇極殿材木尙未鳩聚, 畢役無期云。 聞之道路之言, 則以沈檀爲屑, 和龍腦以飾壁云矣。" 上曰: "天將來此, 雖有作弊之事, 其氣象渾厚老實, 非我國人所及。" 恒福曰: "地之所生, 致使然矣。 中朝人非但稟賦甚厚, 其文章地步廣闊, 行文則論兩漢以上, 詩律則稱蘇武、李陵, 宋朝之學, 置而不論。 其首倡者, 李夢陽也。 夢陽爲尙古之學, 爲一代大儒。 其後王世貞輩和之, 風習大易。 又有號爲處士者, 如策士、相公之類。 以高談、大言, 取名一世, 人皆折節下之。 其中有兪承宗者, 其名最著。 此輩雖不事功名, 而坐致富貴。 所謂春秋時處士橫議者也。" 上曰: "此如東漢節義之流乎?" 廷龜曰: "此輩名雖處士, 節義掃地, 豈敢與東漢之士比乎?" 恒福曰: "蕭尙書辟人謂臣曰: ‘爾國須多備方物助工’ 云。 大槪中朝私獻之路大開, 欲以此悅皇上也。" 上曰: "皇太子冊封之說, 未聞之乎?" 恒福曰: "婚事則已定, 而冊封則未之聞也。" 上曰: "倭退之事, 天朝議論如何?" 恒福曰: "皇上以爲: ‘七年屯據之賊, 豈以五千兩銀, 可使之退去乎?’ 以此群下揣知上意, 攻應泰者, 紛紜而起矣。" 上曰: "皇上豈知此間曲折? 諺曰: ‘欲哭之兒, 杖之使哭。’ 欲退之倭, 又得厚賂, 不退何爲? 此後必有難處之患, 卿等勉之。 此則大臣之憂也。" 恒福等起出, 上曰: "至冤極痛, 賴卿等伸雪, 予甚嘉焉。" 진주사(陳奏使) 우의정 이항복(李恒福)과 부사(副使) 동지중추부사 이정구(李廷龜)가 복명하니, 상이 별전에 나아가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만리길에 사신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노고가 무척 많았다. 전에 성지를 보니 무고당한 일은 이미 설원된 듯하다. 다만 칙서를 따로 내리지 않고 다른 회의의 끝에 성지를 겸해 내린 것이 유감이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신들의 뜻에도 쾌하게 여겨지지 않았는데 소 상서(蕭尙書)는 중국 조정의 문서 체제가 본디 그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칙서를 내려달라고 다시 청하려고 했습니다만 마침 군문이 제본한 중에 관왕묘에 방을 붙인 일이 있었는데, 성비(聖批)에 ‘조선의 군사와 백성이 신(神)에게 울며 고했다는 말은 매우 해괴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황제의 뜻을 알지 못하여 감히 다시 청하지 못하고 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나도 매우 해괴하게 여긴다. 그 글을 보면 우리 나라 사람이 지은 것 같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신이 옥하관(玉河館)에 있으면서 이 일에 대해 듣고는 ‘중국인이 무리하게 일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으니 그들이 조작한 것이 틀림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글을 보고 나니 우리 나라 사람이 지은 것 같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바로 나의 뜻과 부합된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중국인이 양 경리 시절에도 노래를 지어 동대문에 걸었었습니다." 하고, 정구가 아뢰기를, "황제가 변론하는 주본(奏本)을 보고 즉시 구경(九卿)과 육부(六部)에 내려 회의하게 하니, 모두들 본국의 충순(忠順)함을 말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중국에서 정응태를 그르다 하며 뭇 의논이 공격하는 판에 신의 사행이 마침 이 기회를 만났기 때문에 시원하게 설원한 것입니다. 다만 뒷날에 만일 응태가 득세한다면 매우 우려할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가 사리상 옳으니, 나더러 응태와 변론하라고 해도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중에 존호(尊號)에 대한 문제는 과연 참람하긴 하나 이미 먼저 바른대로 고하였으니 이치상 달리 꿀릴 일은 없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신이 《오례의(五禮儀)》를 가지고 소 상서에게 보이며 ‘소국의 사대하는 예절이 모두 이 책에 실려 있다.’ 하니, 상서가 보고서 크게 기뻐하며 ‘이 책을 여러 노야(老爺)에게 두루 보이겠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태감이 나온다던데 그러한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옥하관의 관부가 말하기를 ‘태감이 당신 나라에 갈 것인데 나도 따라가려고 한다.’ 하였으니, 이로 본다면 나올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고, 이정구가 아뢰기를, "태감이 신들보다 2∼3일 뒤늦게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날짜를 따져보면 지금쯤은 이미 강을 건넜을 것인데, 아직까지도 확실한 보고가 없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13성(省)에 이미 개광(開礦)하였다고 하던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13성만이 아니라 태감이 천하에 나누어 나갔으니 이익을 취하는 길이 크게 열렸다고 하겠습니다. 신이 지나온 일로(一路)의 곳곳마다 황점(皇店)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방(榜)에 ‘성지를 받들어 국가의 부조금을 징수한다.’고 써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채소 하나라도 반드시 세금을 거두므로 길에 오가는 사람들이 서로 원망하기를 ‘황제는 돈만 사랑하지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러고서도 나라가 오래간 적이 없으니, 우리들도 머지 않아 당신들처럼 유리(流離)하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좌(遼左)에 큰 공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전하는 말로는, 이성량(李成樑)이 임진년 전에 옛 요양성(遼陽城)을 쌓기를 청하여 성지의 윤허를 받았었는데, 마침 동정(東征)하는 일이 있어 착공하지 못하고 중지했다가 이제 왜적이 이미 물러갔으므로 도어사(都御史) 이식(李植)이 축성을 청하여 이미 착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요좌는 곧 당 태종(唐太宗)이 회군한 곳이고 그 오른쪽을 요우(遼右)라 하니 이곳이 광녕(廣寧)입니다. 그 상류는 혼하(渾河)이고 그 위는 태자하(太子河)인데 이것이 합류하여 삼차하(三汊河)가 됩니다. 삼차하 밖에 옛 요양성이 있는데 어느 때 축조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유지(遺址)가 남아 있습니다. 그 지역은 풀과 나무가 울창하고 토지가 광활한데 바로 오랑캐들이 목축하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에 축성할 경우 오랑캐들이 필시 다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여송(李如松)의 시신을 찾았다고 하던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숙연한 표정으로 탄식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달자(㺚子)의 소식은 어떠한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신이 올 때 들으니 달자가 요양 근처에 침입하였다 하는데 남녀가 대부분 정신없이 오가는 기색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노호(老胡)의 소식은 어떠한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두려워하는 것은 노호인데, 중국의 경우는 노호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고 4달자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석 상서(石尙書)와 심유경(沈惟敬)은 석방되지 않았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아직 석방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건청궁(乾淸宮)과 곤녕궁(坤寧宮)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황극전(皇極殿)의 재목을 아직까지도 모으지 못하여 공사가 끝날 기약이 없다고 합니다. 길에 떠도는 말을 들으니, 침단(沈檀)을 가루로 만들어 용뇌(龍腦)와 섞어서 벽을 바른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장수가 여기에 와서 작폐한 일이 있긴 하지만 그 기상을 보면 혼후(渾厚)하고 노건(老健)하니, 우리 나라 사람은 미치지 못한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지역에 따라 태어난 인물이 본시 그러한 것입니다. 중국 사람은 품성이 심후할 뿐 아니라 그 문장도 규모가 광활하여 작문에 있어선 양한(兩漢) 이상을 논하고 시율(詩律)은 소무(蘇武)와 이능(李陵)을 일컫는데 송(宋)나라 학문은 도외시하고 논하지도 않습니다. 그 수창자는 이몽양(李夢陽)인데 몽양은 상고(尙古)의 학문을 하여 한 시대의 대유(大儒)가 되었습니다. 그 뒤로 왕세정(王世貞)의 무리가 호응하여 풍습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또 처사(處士)라는 호칭이 있는데 책사(策士)니 상공(相公)이니 하는 부류와 같습니다. 고담 준론으로 한 세상에 명성을 떨쳐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는데, 그 중에 유승종(兪承宗)이란 자가 가장 저명합니다. 이들은 공명(功名)을 일삼지 않으나 앉아서 부귀를 얻으니 이른바 춘추 시대에 멋대로 자기 의논을 펼친 처사와 같다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동한(東漢)의 절의파(節義派)와 같은 유인가?" 하니, 정구가 아뢰기를, "이들이 명색은 처사이지만 절의는 전혀 없으니, 어찌 감히 동한의 선비와 비교되겠습니까." 하고, 항복은 아뢰기를, "소 상서가 사람을 물리고 신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는 모름지기 방물을 많이 갖추어 공사를 도우라.’ 하였는데, 대개 중국에는 사사로이 바치는 길이 크게 열려 있으므로 황제를 기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태자를 책봉했다는 말을 못들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혼사는 이미 결정했으나 책봉에 대해서는 못 들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이 물러난 일에 대해 중국의 의논은 어떠하던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황제가 ‘7년이나 주둔해 있던 왜적을 어찌 5천 냥 은으로 물러가게 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으므로, 신하들이 상의 뜻을 헤아려 알고 정응태를 어지러이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황제가 어찌 그 사이의 곡절을 알겠는가. 속담에 ‘울려는 아이 때려서 울린다.’ 하였으니, 물러가려는 왜적이 많은 뇌물까지 받았으니 물러가지 않고 뭐 하겠는가. 앞으로 반드시 난처한 환난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힘써야 할 것이다. 이는 대신이 근심해야 될 문제이다." 하였다. 이항복 등이 일어나 나가는데, 상이 이르기를, "지극히 원통한 일을 경들 덕택에 씻어버리게 되었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04113_004
Rec-0016 선조실록_113권_1599_0513_01 15990513 庚申/政院啓曰: "關王廟天朝將官, 皆已焚香, 茅遊擊如是言之。 今日遣禮曹官員, 焚香爲當。" 傳曰: "依啓。" 정원이 아뢰기를, "관왕묘에 중국의 장관(將官)들이 모두 분향하였다고 모 유격(茅遊擊)이 말했습니다. 오늘 예조의 관원을 보내어 분향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05013_001
Rec-0017 선조실록_114권_1599_0622_03 15990622 經理都監堂上尹根壽 【爲人輕薄, 餘無足觀, 所長者文藻而已。】 啓曰: "關王廟已定於東大門外永渡橋傍。 請令兵曹, 多定軍人, 及期赴役何如?" 傳曰: "依啓。" 【史臣曰: "關廟之役, 大是虛誕, 一之已非, 而不能禁, 又於東郊, 大興土役, 孑遺之民, 安得以爲生乎? 吁!"】 경리 도감 당상(經理都監堂上) 윤근수(尹根壽)가 【사람됨이 경박하여 다른 것은 볼 것도 없는데 문장 하나는 잘했다. 】 아뢰기를, "관왕묘(關王廟)를 동대문 밖 영도교(永渡橋) 곁에 정했으니, 병조로 하여금 군인(軍人)을 다수 배정해서 기일에 맞춰 부역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관왕묘의 역사는 매우 허탄(虛誕)한 일로 한번 짓는 것도 그릇된 일인데 금지하지 못하였고 이제 또 동교(東郊)에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키니, 전쟁으로 인해 살아 남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06022_003
Rec-0018 선조실록_115권_1599_0703_02 15990703 正言李好義 【素爲士流所輕, 竟以奔走, 得躋淸列。】 來啓曰: "關王廟造成之役, 雖曰浩大, 該曹自有推移充定之路, 而至徵江原道之軍, 非但道路險遠, 當此農月, 裹糧遠來, 窮民之怨咨, 不可忍言。 其公事, 請命勿爲擧行。 校書館正字李景益, 奪占民田, 怯辱土主, 打破獄門, 擅出囚奴, 其罪狀極重, 而今因經赦, 倖而得免, 物情無不痛憤。 如此悖戾之人, 不可齒在衣冠之列。 請命削去仕版。 文川郡守李頤亨, 人物驕妄, 加以泛濫, 到任之後, 專事貪虐, 官庫空虛, 吏民流散。 請命罷職。" 答曰: "竝依啓。" 정언 이호의(李好義)가 【평소 사류(士流)에게 경시당했었는데, 끝내 분주하게 뛰어다녀 청열(淸列)에 오르게 되었다. 】 와서 아뢰기를, "관왕묘(關王廟)를 조성하는 역사(役事)가 거창하다고 하나 해조(該曹)에서 스스로 변통해 충정(充定)할 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강원도 군사를 징발하기까지 한다면 도로가 험원(險遠)할 뿐 아니라 농사철을 당하여 양식을 싸가지고 멀리 오게 하는 것이 되니 궁한 백성들의 원성이 차마 형언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 공사는 거행하지 말도록 하소서.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 이경익(李景益)은 백성의 토지를 강점하고 토지 주인을 위협하는가 하면, 옥문(獄門)을 부수고 멋대로 갖힌 노비를 놓아 주어 그 죄상이 극히 중한데 지금 사면을 받고 요행히 면하게 되었으므로 물의가 모두 통분해 합니다. 이처럼 패려한 사람을 의관(衣冠)의 반열에 둘 수 없으니, 사판(仕版)에서 제명시키도록 하소서. 문천 군수(文川郡守) 이이형(李頣亨)은 인물이 오만하고 망령된 데다가 범람하기까지 하여 도임한 후 오로지 탐학(貪虐)만을 일삼았으므로 관고(官庫)가 텅 비고 이민(吏民)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07003_002
Rec-0019 선조실록_117권_1599_0917_02 15990917 政院啓曰: "經理都監郞廳來言: ‘經理明日關王廟, 欲爲水陸齋, 芙蓉香六柄入之’ 云。 敢啓。" 傳曰: "送之。" 【史臣曰: "雲長非佛也, 而華人設道場於關廟, 其荒誕謬妄, 如是夫!"】 정원이 아뢰기를, "경리 도감 낭청이 와서 ‘경리가 내일 관왕묘(關王廟)에서 수륙재(水陸齋)를 올리려 하여 부용향(芙蓉香) 6병을 들이라고 하였다.’ 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보내라고 전교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운장(雲長)은 부처가 아닌데, 중국인이 관왕묘에 도량(道場)을 설치하니 그 황탄하고 망령됨이 이와 같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09017_002
Rec-0020 선조실록_118권_1599_1008_06 15991008 以鄭榮國上疏, 傳于政院曰: "省箚, 予不知爾是何如人也, 今見所陳, 爾是自英之後, 而朝臣亦多有親族之人, 則果非門微之人也。 臺諫所論, 雖不知其意, 而爾亦何嫌? 若其結黨不端之輩, 壞亂朝廷, 厚將自崩。 且爾受關王廟之命, 不可不盡心奉行。 蓋前日, 予與陳遊擊面約, 旣去之後, 若不依彼之言, 而盡吾之誠, 則是予當面而約, 背面而背也。 爾其更加體予意, 或力有所不足, 事有所妨礙者, 則或具由陳達, 以待予裁處。" 정영국의 상소를 정원에 전교하였다. "차자는 살펴보았다. 나는 네가 어떠한 사람인지 몰랐었는데 이번에 진달한 것을 보니 네가 정자영(鄭自英)의 후손이고 조정의 신하들 중에도 또한 친족이 많이 있으니 과연 문벌이 한미한 사람은 아니다. 대간이 논한 바는 비록 그 뜻은 모르겠으나 너 역시 무엇을 혐의스럽게 여기는가. 만약 부정한 무리들이 당파를 지어 조정을 어지럽힌다면 저절로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너는 관왕묘(關王廟)의 명(命)을 받았으니 마음을 다하여 봉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난날에 내가 유격(遊擊) 진잠(陳蠶)과 대면하여 약속하였는데 그가 떠난 뒤에 그의 말대로 나의 정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이는 내가 마주 대해서는 약속하고 돌아서서는 배반하는 것이 된다. 너는 다시 나의 뜻을 체득하되, 힘에 부족한 것이 있거나 일에 방애되는 것이 있으면 사유를 갖추어 진달하여 나의 재결을 기다리도록 하라."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10008_006
Rec-0021 선조실록_121권_1600_0113_04 16000113 兵曹啓曰: "關王廟造成軍人, 每月二百名赴役, 而上番軍士數少。 不得已京畿、江原、忠淸等道, 再三啓請致用矣。 今則日數將準, 而他無繼用之策, 極爲悶慮。 三道之軍, 勢難更徵, 黃海道二百名, 依前例, 各裹一月糧, 急急來替事, 下諭何如?" 傳曰: "關王廟始役累月, 而何不畢役? 當此農時, 外方軍徵來, 未便。" 병조가 아뢰기를, "관왕묘(關王廟)를 축조하는 공사에는 매달 2백 명의 군인(軍人)이 부역(赴役)하고 있는데 상번 군사(上番軍士)의 숫자가 적어서 부득이 경기·강원·충청 등도의 군사를 데려다 쓰도록 재삼 계청(啓請)하였습니다. 지금 일수(日數)가 차가는데도 달리 계속해서 데려다 쓸 방책이 없어 매우 안타깝습니다. 3도(道)의 군사는 사세상 다시 부르기가 어려우니 황해도에 전례에 따라 각기 1개월 양식을 싸가지고 2백 명을 급급히 보내어 교체시키게 할 것으로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관왕묘는 역사를 시작한 지가 여러 달인데도 어찌하여 역사를 마치지 못하는 것인가? 이러한 농사철을 당하여 외방 군사를 불러오는 것은 온편하지 못하다."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1013_004
Rec-0022 선조실록_121권_1600_0118_03 16000118 以關王廟造成軍徵用事, 回啓, 傳曰: "民怨極, 則不可徵役, 農時値, 則不可違奪, 春汛至, 則不可他用。 予意, 關廟之役, 不如姑請停止。 抑且經始已久, 而告成尙遠, 徵來之軍, 得毋歸於虛處乎? 更與備邊司議處。" 관왕묘(關王廟)를 축조할 군인을 징용(徵用)할 일에 대해 회계하니, 전교하였다. "민원(民願)이 극도에 이르면 징발하여 역사시킬 수 없는 것이고 농시(農時)를 당하면 그 시기를 어기게 할 수 없는 것이며, 춘신(春汛) 때가 되면 다른 데 쓸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의견으로는 관왕묘의 역사를 우선 정지하는 것이 상책으로 여겨진다. 도대체 축조하기 시작한 지가 이미 오래인데도 준공이 아직도 멀었다니, 그렇다면 불러온 군인들은 아무 쓸모없이 되었단 말인가? 다시 비변사와 의논하여 조처하라."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1018_003
Rec-0023 선조실록_121권_1600_0129_01 16000129 山海曰: "關王廟之役甚鉅。" 上曰: "關廟, 何至今未成乎?" 熙緖曰: "工役甚鉅故也。" 上曰: "工役如南關王廟乎?" 熙緖曰: "比之南役, 尤爲浩大。 農作近, 不如且止。" 上曰: "衙門不許, 則難止矣。 南廟, 則予見之後, 聞之, 則毁塑像, 更爲之云。 何也?" 恒福曰: "像小, 故改爲云。" 山海曰: "停役事, 不可不請。" 上曰: "武將不必言, 經理亦不謁聖。" 恒福曰: "天兵, 止宿於鄕校殿中, 人或問之, 則曰 "兵戈中, 故如是云’ 矣。" 上曰: "端川送人事, 大臣知之乎?" 恒福曰: "聞之。" 上曰: "流弊至於端川。 搪塞則必怒。" 熙緖曰: "經理差官貽弊, 故欲以我國人差送。" 上曰: "大臣, 當知曲折。 黃玉作盞, 本是不關。 且端川出玉, 彼何以知之? 予過慮, 則端川産銀, 天下知之, 無乃欲尋銀鑛耶? 若朝廷聞之, 則必責餉銀於我邦, 且遣太監採鍊, 若前朝設局之爲, 則奈何? 無乃搪塞之爲可乎。" 恒福曰: "托以伐玉採銀, 則姑未可知, 若去則必知銀出。" 上曰: "然則奈何?" 山海曰: "接伴使情意相通, 令接伴使, 周旋爲之。" 上曰: "左相好往來。 勳業垂竹帛, 在此行, 好往來。" 산해가 아뢰기를, "관왕묘(關王廟)의 역사(役事)가 매우 거창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왕묘는 어찌하여 아직껏 완성하지 못하였는가?" 하였다. 희서가 아뢰기를, "공역이 너무 거창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역이 남관왕묘(南關王廟)와 같은가?" 하였다. 희서가 아뢰기를, "남묘(南廟)의 역사에 비해 훨씬 거창합니다. 농사철이 다가왔으니 중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문(衙門)에서 허락하지 않으니 중지하기는 어렵다. 남묘는 내가 가보았는데, 뒤에 들으니 소상(塑像)을 헐고 다시 만든다고 했다. 무슨 이유인가?" 하자, 항복이 아뢰기를, "소상이 작기 때문에 다시 고쳐 만든다고 합니다." 하고, 산해는 아뢰기를, "역사를 정지시킬 것을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장(武將)은 말할 것도 없고 경리(經理)도 알성(謁聖)을 하지 않는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중국군이 향교(鄕校)의 전중(殿中)에서 유숙하고 있으므로 어떤 사람이 힐문하니 ‘전쟁 중이라서 그러는 것이다.’ 하였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단천(端川)에 사람을 보내는 일을 대신은 알고 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들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폐(流弊)가 단천에까지 이르렀는데 저지시키면 반드시 노할 것이다." 하니, 희서가 아뢰기를, "경리의 차관(差官)은 폐단을 끼치니, 우리 나라 사람을 차송(差送)하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은 곡절을 알아야 한다. 황옥(黃玉)으로 술잔을 만드는 것이야 본래 관계가 없지만 단천에서 옥이 난다는 것을 저들이 어떻게 알았는가. 나의 지나친 생각인지 모르지만 단천에서 은이 생산되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아는 일이니 은광(銀鑛)을 찾으려는 것은 아닌가? 중국 조정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반드시 우리 나라에 은향(銀餉)을 독책할 것이다. 그리고 태감(太監)을 보내어 전조(前朝) 때처럼 국(局)을 설치하고 채련(採鍊)하게 하면 어찌하겠는가. 막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옥을 캔다고 칭탁하면서 은을 캘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가게 되면 반드시 은이 생산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니, 산해가 아뢰기를, "접반사(接伴使)는 정의(情意)가 서로 통하니 접반사로 하여금 주선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상은 잘 갔다오라. 훈업(勳業)을 죽백(竹帛)에 전하는 것이 이번 걸음에 달려 있으니 잘 갔다오라."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1029_001
Rec-0024 선조실록_123권_1600_0329_01 16000329 上行到桃渚洞, 聞提督徑入南關王廟設酌, 乃止輦回避, 由靑坡路還宮。 상이 도저동(桃渚洞)에 이르러 제독이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들어가 작헌례(酌獻禮)를 한다는 말을 듣고 연을 정지시켰다. 그리고는 그곳을 피하여 청파로(靑坡路)를 거쳐 환궁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3029_001
Rec-0025 선조실록_123권_1600_0329_03 16000329 司憲府啓曰: "今日江上擧動後還宮時, 該曹所當先探天將動止, 俾無臨時窘迫之患, 而陶通判已到關王廟, 了莫聞知, 大駕久駐中道, 蒼黃窘迫, 竟由抄路, 極爲未安。 請兵曹堂上推考, 色郞廳罷職。 政院, 居喉舌之地, 全不檢飭, 致令如此, 所失亦大。 請色承旨推考。" 答曰: "道路之事, 出於意外。 以此何至於罷推乎?" 사헌부가 아뢰기를, "오를 강가에 거둥하였다가 환궁하실 적에 해조(該曹)에서는 마땅히 먼저 중국 장수의 동정을 수탐하여 임시하여 군색한 걱정이 없게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도 통판(陶通判)이 관왕묘(關王廟)에 도착하도록 전연 모르고 있었으므로 대가(大駕)가 중도에 오래 머무르게 되어 창황하고 군색한 상황을 야기시켰고 마침내는 다른 길로 오게 하였으니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병조의 당상은 추고하고 색낭청은 파직시키소서. 정원은 후설(喉舌)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전혀 검칙하지 않아서 이와 같이 만들었으니 잘못한 것이 또한 큽니다. 색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도로에서의 일은 뜻밖에 생긴 일이다. 이것 때문에 어떻게 파추(罷推)까지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3029_003
Rec-0026 선조실록_124권_1600_0405_02 16000405 上幸崇禮門外, 迎慰韓同知。 【初命】 午時, 韓徑入關王廟, 與孫中軍會飮, 申末, 始到御幕次。 상이 숭례문(崇禮門) 밖에 나아가 한 동지(韓同知)를 【초명. 】 영위(迎慰)하였다. 오시(午時)에 한동지가 바로 관왕묘(關王廟)로 가서 손 중군(孫中軍)과 회음(會飮)하다가 신시(申時) 말에야 비로소 어막(御幕)에 도착했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4005_002
Rec-0027 선조실록_127권_1600_0714_01 16000714 乙卯/總護使李憲國啓曰: "伏承備忘下敎, 葉靖國詳於風水事, 臣則未知, 因他宰相得聞之矣。 但從前定山, 皆出於我國術官, 不借於異國之人, 而葉靖國今適來此, 令相知宰列之人, 承上敎請之, 似或無妨, 至於自上致書, 則未安。 敢稟。" 答曰: "依啓。 此人曾於關廟造作時, 海平府院君亦知之矣, 能漢語, 然後可以問答。 且所請之曲折, 招海平府院君, 議而爲之。" 총호사(摠護使) 이헌국(李憲國)이 아뢰기를, "삼가 비망기의 하교를 받았습니다. 섭정국(葉靖國)이 풍수(風水)에 밝다는 것을 신은 알지 못하고 다른 재상을 통하여 들었습니다. 다만 종전에 산자리를 정할 때 모두 우리 나라의 술관(術官)들이 하였고 외국 사람의 손을 빌지 않았으나, 섭정국이 지금 마침 우리 나라에 왔으니 서로 아는 재상으로 하여금 성상의 하교를 받들어 청하게 하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서신을 보내는 일은 미안한 일이므로 감히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 사람은 일찍이 관왕묘(關王廟)의 축조를 계기로 하여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이 또한 알고 있다. 한어(漢語)에 능숙해야 문답할 수 있고, 또 청하는 바의 곡절에 대해서는 해평 부원군을 불러 의논하여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7014_001
Rec-0028 선조실록_130권_1600_1019_05 16001019 以禮曹南關王廟守直公事, 傳曰: "天朝尙三足尊, 故猶可以釋子守之, 我國則異於是, 以髡首守直, 非但事體未穩, 殘僧氣力, 其能守護? 必尋春者朝夕焉, 牧羊者踐踏焉, 其流必至於作爲迎神淫褻之所。 陳將軍經始之意, 左矣, 而關雲長磊磊落落之靈, 必不屑於此。 終不過靑嶂綠樹間, 巋然一廢廟, 甚可慮也。 可倣纛所例式, 定訓鍊院官, 率軍士若干, 相遞守直, 圖所以永遠之規事, 更爲議啓。" 예조의 남관왕묘(南關王廟) 수직(守直)에 대한 공사(公事)로써 전교하였다. "중국에서는 불교를 숭상하고 있는 까닭에 중을 시켜 수직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그들과는 차이가 있으니, 중으로 수직시키는 것은 비단 사체에만 온당치 못할 뿐만이 아니라 별 힘이 없는 중의 수완으로 능히 수호해 낼 수가 있겠는가. 반드시 봄나들이 하는 자들이 아침 저녁으로 드나들 것이고, 가축을 치는 자들이 마구 짓밟고 다닐 것이며, 결국은 필시 귀신을 맞이하거나 하는 외설스런 데가 되고 말 것이니, 진 장군(陳將軍)이 당초 조처한 뜻과 어긋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관운장(關雲長)의 늠름한 영혼이 반드시 이것을 좋게 여기지 않아 마침내는 푸른 산 우거진 숲 사이에 높다란 하나의 폐묘(廢廟)가 되어버릴 것이니, 매우 염려스러운 일이다. 둑소(纛所)의 식을 모방하여 훈련원의 관원이 군사 약간 명을 거느리고 돌아가며 수직하여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도모하도록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10019_005
Rec-0029 선조실록_130권_1600_1020_02 16001020 備忘記曰: "關廟, 以訓鍊院官守直事, 傳敎矣, 更思, 控弦矒學之輩, 必不知了然於神, 可敬而不可慢, 或至於隳其職。 不如差出參奉, 以奉香火。 此雖事係新立, 廟旣肇建, 守護之官。 不得不隨之而添設。 言于禮曹, 竝議。" 비망기로 일렀다. "전에 관왕묘(關王廟)를 훈련원 관원으로 수직시키라는 뜻으로 전교하였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활이나 당기는 무식한 무리들이 틀림없이 신(神)에게는 공경하여야 하고 만홀한 마음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지 못해 혹 그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듯하니 참봉(參奉)을 뽑아 향화(香火)를 받들게 하는 것만 못할 듯하다. 이 일이 비록 새로 시작하는 것이 되지만 사당을 이미 창건했으니 수호할 관원도 부득불 그에 따라 세워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예조에 말하여 아울러 의논하도록 하라."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10020_002
Rec-0030 선조실록_130권_1600_1020_03 16001020 戶曹啓曰: "當初陳遊擊所送, 關廟助役銀子二百兩內, 工役軍人賞與及彩色貿易雜物之價, 則猶可以(湍川)〔端川〕 銀子題給, 至於赴京之行, 唐物貿易, 則必以唐銀, 方可貿之云, 故自前推移換用。 目今本曹銀子, 尙有九百八十餘兩。 道士僧人二名, 各十兩, 擇品好唐銀, 卽已題給。 敢啓。" 傳曰: "此僧道盤纏, 則雖以某金給之何害? 但遊擊, 前日送白金幾兩于予, 約爲之買土田, 以供香火。 此金, 卽遊擊之金, 非該曹所敢覬覦者也。 夫受人之財, 許人以諾, 而不唯不成其志踐其言, 乃反私用之, 此匹夫之所深恥。 況堂堂帝王乎? 不圖有司, 乃爲此細人之行, 甚可辱也。 設令遊擊聞之, 其謂我國何如哉? 斯速以他金充其數, 速買田畓, 屬于關王廟, 以供其香火。" 호조가 아뢰기를, "당초 진 유격(陳遊擊)이 관왕묘의 역사를 돕기 위해 보낸 은(銀) 2백 냥 중에서 일하는 군인들에게 내리는 상과 물감 및 잡물 등을 사들이는 값은 단천(端川)의 은으로 대신 지급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경(燕京)으로 사신 가서 중국 물품을 사들일 때에는 반드시 중국의 은이라야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전부터 형편에 따라 바꾸어 사용하여 왔습니다. 현재 본조에는 아직 9백 80여 냥의 은이 있으며, 도사(道士)와 승려 두 사람에게는 각각 10냥씩 품질이 좋은 중국은을 가려 이미 나누어 주었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승려와 도사의 여비는 비록 아무 은으로 주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다만 유격이 전날 백금(白金) 몇 냥을 나에게 보내왔기에 전답을 사들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금은 곧 유격의 금이니 해조에서 감히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릇 남의 재물을 받으면서 그 사람에게 약속하고서 그 사람과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사사로이 써버리는 일은 필부도 심히 부끄럽게 여기는 바인데, 더구나 당당한 제왕이겠는가. 뜻밖에 유사들이 이처럼 소인 같은 행동을 하였으니, 심히 수치심을 느낀다. 가령 유격이 그 소문을 듣게 되면 우리 나라를 어떻다고 하겠는가. 속히 다른 금으로 그 숫자를 채우고 전답을 속히 사들여서 관왕묘에 소속시켜 제사에 이바지하게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10020_003
Rec-0031 선조실록_133권_1601_0103_10 16010103 尹安性啓曰: "自院中, 定譯官宋業男探問, 則卽者業男來言, 葛委官則艱得走脫, 李委官則諸逃兵, 結縛往東大門外關王廟內, 韓守備斌處, 騎逃兵二十餘名圍立, 又與若干人, 明火相應, 韓守備開諭諸逃兵, 一邊使家丁, 邀請葉都司, 相和以解。 業男遇葉都司於東大門內, 則葉曰: ‘俺欲饋酒以解之。 爾國若聚軍以臨之, 則李委官必逢其害。 待解縳後, 處之爲當。’ 云。" 傳曰: "逃兵雖出門外, 旣聚之軍, 不可輕易罷陣, 待明日有罷陣之命, 然後罷陣。" 윤안성이 아뢰기를, "승정원에서 역관(譯官) 송업남(宋業男)을 시켜 탐문하게 하였더니 금방 송업남이 와서 말하기를, ‘갈 위관은 간신히 빠져 도망쳐 나왔고, 이 위관은 도망병들이 결박하여 동대문 밖 관왕묘(關王廟) 안의 수비(守備) 한빈(韓斌)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갔는데, 거기에는 20여 명의 말 탄 도망병들이 포위를 하고 서 있었고, 또 약간 명은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한 수비가 여러 도망병들을 타이르고 한편으론 가정을 섭 도사에게 보내 맞이하여 풀어주도록 교섭하려고 했다. 송업남이 섭 도사를 동대문 안에서 만났는데, 섭정국이 「내가 지금 그들에게 술을 먹여 풀어주도록 하려고 하는데 그대 나라에서 만약 군대를 집합시켜 이곳으로 몰려온다면 이 위관은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니 그가 결박으로부터 풀려나기를 기다렸다가 조치를 취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 하였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도망병이 비록 문 밖으로 나갔더라도 이미 모인 군대를 쉽게 파진(罷陣)시킬 수 없다. 내일까지 기다렸다가 파진하라는 명령이 있은 뒤에 파진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1003_010
Rec-0032 선조실록_133권_1601_0104_07 16010104 逃兵陳天陰等十一名招內, "今之作亂, 別無他意, 李委官, 非經理差官, 乃陶通判陳票所持冒濫之人也。 逃兵處馬二匹, 銀十七兩奪取, 欲爲還推, 則只給銀二兩, 三升布二匹, 餘不肯還。 吾等結縛李、葛兩委官, 只爲講和, 關王廟前, 欲爲成誓而罷云云。" 又曰: "李委官, 侵責萬端, 僞稱逃兵, 或棍打囚禁, 或徵銀子, 至於朝鮮太守處, 亦索銀兩, 不勝痛憤云云。" 도망병 진천음(陳天陰) 등 11명의 공초(供招)에, "이번에 난을 일으킨 것은 별로 딴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 위관은 경리의 차관(差官)도 아니고 바로 도 통판(陶通判)의 진표(陳票)를 불법으로 가지고 있는 외람된 사람으로서 우리들에게 말 2필과 은(銀) 17냥을 빼앗아갔으므로 그것을 돌려달라고 하였더니 은 2냥과 삼승포(三升布) 2필만을 주고 나머지는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승총(李承寵)과 갈시방(葛時芳) 두 위관을 결박한 것입니다. 다만 그들과 강화(講和)를 위하여 관왕묘(關王廟) 앞에 가서 서로 맹세를 하고 파하려던 것이었습니다." 하고, 또 "이 위관은 갖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침책(侵責)하여 도망병이라 누명을 씌워 곤장을 쳐 가두기도 하고 은자(銀子)를 받아내기도 하며, 심지어 조선 태수들에게까지도 은냥을 토색질하였으니, 통분하기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1004_007
Rec-0033 선조실록_133권_1601_0105_09 16010105 訓鍊都監啓曰: "大將邊良傑, 今朝進兵於關王廟前, 縛擒逃兵二十五名, 而逃兵無一名脫漏, 我軍無一名致傷云云。 令大將, 率其所捉逃兵, 開東大門入來, 諸處軍兵, 則大將入來後, 同議罷陣何如?" 傳曰: "依啓。" 仍傳曰: "天朝, 非但以我國, 隱匿逃兵爲言, 以事情量之, 逃兵隨其捕捉解送, 當發明我國情理矣。 前者有司, 捕捉逃兵, 不卽解送, 而囚之於典獄, 甚爲非矣。 此逃兵, 差定譯官, 一路多定軍人, 卽移咨解送于遼東。" 훈련 도감이 아뢰기를, "대장 변양걸(邊良傑)이 오늘 아침 관왕묘 앞으로 진군하여 도망병 25명을 사로잡아 묶었는데 도망병은 한 명도 빠져나간 자가 없었고 아군도 한 명의 부상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대장으로 하여금 붙잡은 도명병을 이끌고 동대문을 열고 들어오게 하고 다른 곳의 군병들은 대장이 들어온 후 함께 파진(罷陣)을 의논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가 도망병을 숨겼다고 중국에서 말할 뿐만이 아니라 일의 사정으로 헤아려보더라도 도망병은 그를 잡는 대로 그 쪽으로 해송(解送)하여 우리 나라 입장을 밝혔어야 했다. 전에 유사(有司)들이 붙잡은 도망병을 즉시 해송하지 아니하고 전옥(典獄)에다 가두어두었으니 매우 그르다. 이번 도망병은 역관을 차정하고 일로(一路)에 군인을 많이 정한 뒤 곧 요동(遼東)에 이자(移咨)하여 해송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1005_009
Rec-0034 선조실록_133권_1601_0107_05 16010107 東關王廟造成廳啓曰: "韓守備斌言內, 頃日逃兵等, 措辦酒食, 多般開諭, 解其兵器, 空手之人, 縛取非難, 而軍人闌入下處, 至於發矢, 炊飯家丁, 中脅卽死, 俺亦爲亂兵所迫, 面上致傷云云。 似當別爲致問, 以慰其心, 殞命家丁, 斂葬諸具, 令備邊司急速備給何如?" 傳曰: "允。" 동관왕묘 조성청(東關王廟造成廳)이 아뢰기를, "수비(守備) 한빈(韓斌)이 ‘지난날 도망병들에게 술과 밥을 먹이고 여러모로 타일러서 무장을 해제시켰다. 빈손인 그들을 묶어가면 될 것인데 군인들이 무작정 들이닥쳐 활을 쏘는 바람에 밥 짓던 가정(家丁)이 옆구리를 맞아 즉사하고 나도 난병(亂兵)에게 핍박을 당하여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마땅히 그에게는 별도로 위문을 하여 마음이 풀리도록 하고 죽은 가정에게는 염장(殮葬) 용품을 비변사로 하여금 서둘러 갖추어 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1007_005
Rec-0035 선조실록_135권_1601_0307_01 16010307 乙巳/司諫院上箚。 其略曰:臣等伏見, 近來天文告警, 赤氛連霄, 地道失寧, 山岳震撼, 其他星流蛙戰之變, 疊見層出, 可驚可駭。 加以訛言屢興, 中外洶洶, 憂危之端, 不一而足。 竊念災不虛生, 必有所召。 致此之由, 豈無其咎? 頃年大賊壓境, 天兵滿國, 防戌之苦, 輸輓之勢, 有不可勝言。 及乎賊退兵撤之後, 瘡痍之民, 訖可少休, 而徭役之繁, 無異前日, 至於焚其室廬, 流離失所, 顚死溝壑者, 不知其幾。 以十年垂盡之命, 應內外無窮之役, 民安得不怨乎? 納粟之輩, 怨於失信; 軍功之徒, 怨於廢棄, 冤枉怨於滯獄; 市井怨於貿易, 諸宮奪人臧獲而民怨; 戶部漸復貢物而民怨, 關廟役軍, 年年徵發而民怨; 砲手保丁, 許令據定而民怨。 至於山陵之役, 量田之擧, 誠所不可廢之事, 而無知小民, 猶且怨咨, 則今之民心, 槪可見矣。 伏願殿下, 上畏天譴, 下畏民(巖)〔嚴〕 , 躬先儉約, 輕徭薄賦, 凡病民之政, 一切痛革, 如救焚〔拯〕 溺, 毋循文具。 且當今救民之策, 莫急於修正貢案。 都監之役, 已經累月, 而任事之臣, 悠泛度日, 可無所爲, 赤子嗷嗷, 莫肯動念。 伏願申飭該官, 速令釐正, 損益得宜, 倒懸之民, 庶有再(坐)〔生〕 之望矣。" 答曰: "天變疊現, 至爲兢惕。 省箚, 良用嘉焉。 當留念。" 사간원이 상차하였다. 그 대략에, "신들이 삼가 보건대 근래에 천문(天文)이 경고(警告)하여 붉은 기운이 하늘에 잇따라 나타나고, 지도(地道)가 편안치 못하여 산악이 진동하며, 그 이외에도 별이 떨어지고 개구리가 싸우는 등의 변괴가 갖가지로 겹쳐 일어나니, 경악스럽습니다. 게다가 유언 비어가 자주 일어나 중외(中外)가 흉흉하니, 걱정스럽고 위험스러운 단서가 한둘이 아닙니다. 삼가 생각건대 재변은 공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까닭이 있는 것이니, 이러한 변괴를 불러일으킨 원인이 된 잘못이 어찌 없겠습니까. 몇 년간 대적(大賊)이 나라를 짓밟아 명나라 군대가 나라에 가득하여, 방수(防戍)하는 고통과 군량 조달의 형세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적이 물러가고 중국군이 철수한 뒤에는 만신창이가 된 백성들이 조금 쉴 사이도 없이 요역(徭役)이 전일과 다름없이 많아, 심지어 집을 불지르고 떠돌아다니다가 아무 데서나 죽어간 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10년 동안 겨우 부지해 온 목숨으로 안팎의 끝없는 요역에 시달리자니 백성들이 어찌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곡식을 바쳤던 무리는 나라가 신의를 저버린 데 대해 원망하고, 전쟁에서 공을 세운 무리는 상격이 폐기된 데 대해 원망하며, 억울한 죄수들은 적체된 옥사에 대하여 원망하고, 시정(市井)에서는 무역에 대하여 원망하며, 여러 궁가(宮家)에서 남의 노비를 빼앗으므로 백성들이 원망하고, 호부(戶部)에서 공물을 점점 부활시키므로 백성들이 원망하고, 관왕묘(關王廟)의 역군을 해마다 징발해서 백성들이 원망하고, 포수(砲手)의 보정(保丁)을 억지로 정하는 것을 허락하여 백성들이 원망하며, 심지어 산릉(山陵)의 역사와 양전(量田)에 관한 일 등 참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일까지도 무지한 어린 백성들은 오히려 원망하는 실정이니, 지금의 민심을 대강은 알 수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위로는 하늘의 꾸짖음을 두려워하시고 아래로는 민정(民情)의 험함을 두렵게 여기시어, 몸소 먼저 검약하시어 요역과 부세를 줄이고 백성을 괴롭히는 모든 정사는 통렬히 개혁하여 수화(水火) 중에 빠진 자를 구원하듯 하고 형식에만 그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백성을 구제하는 방책으로 공안(貢案)을 수정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이 없습니다. 도감(都監)의 공역은 이미 여러 달이 지났는데도 일을 맡은 신하는 그럭저럭 날만 보내면서 별로 한 일이 없고, 백성들이 아우성인데도 마음을 쓰려 하지 않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해당 관원을 신칙하여 속히 바로잡아 적절하게 조절함으로써 거꾸로 매달린 듯 고통스런 백성들이 다시 편히 살 수 있는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천변(天變)이 거듭 나타나 매우 두렵다. 차자의 내용을 살펴보니 참으로 가상하다. 유념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3007_001
Rec-0036 선조실록_138권_1601_0619_02 16010619 憲府啓曰: "東關王廟之作, 出於天朝分付, 斯乃不得已之擧, 而始役於己亥八月, 于今二十餘朔, 一朔役軍, 至於二百餘名。 其間或有若干未及到者, 而該計各朔之軍, 則其數凡幾何? 至如材木鐵物等, 應入雜物, 分定之數, 罔有其極, 而旣已營造, 間架無多, 呼耶載路, 尙未告落。 天兵去後, 民生之猶不息肩, 騷動怨咨者, 皆在於此也。 前後監董之官, 其於調用軍人, 處置材料之際, 率多汎濫麤鄙之事, 每以推托於天將, 故爲遲延, 引以時月, 功役之訖, 了無其期。 人言藉甚, 有心者之憤惋久矣。 當此民力竭盡之時, 一軍之發, 一石一木之運, 皆出於民之膏血, 爲人任官事者, 何敢務私蔑公、欺國、蠧民, 至於斯乎? 若諉以已遞其任, 而不爲施罰, 則無以懲後人, 而戒將來。 今年以後, 則日字淺少, 庚子以前, 郞廳監役官, 請命罷職。 都廳堂上, 亦不無不能檢飭之失, 竝命推考。 市廛之民, 亂後甫集, 一困於天將之誅求, 二困於國恤之需應, 至如進獻苧布及一應公貿易之事, 無不爲之, 材力竭耗, 生理甚艱。 平市署官員, 理宜撫摩優恤之不暇, 而敢於各色市廛, 逐朔收捧無名之米, 以爲私濫之用, 怨號盈路, 極爲駭愕。 請掌務官直長宋希聖罷職, 令尹起禎推考。 廣興倉主簿梁成海, 人物庸劣, 目不知書, 不合米麪之任。 請命遞差。" 答曰: "東關王廟事, 徐當發落。" 仍傳曰: "應罷人員, 書啓。 餘竝依啓。" 헌부가 아뢰기를, "동관왕묘(東關王廟)를 건립하는 일은 중국의 분부에서 나왔으니, 이는 부득이한 거조였습니다. 역사를 기해년 8월에 시작하여 지금 20개월이 되었는데, 한 달 동안의 역군(役軍)이 2백여 명에 달합니다. 그 동안에 약간명이 미처 도착하지 않은 적도 있지만 매월의 역군을 합하면 그 숫자가 과연 얼마이겠습니까. 목재와 철물 등 소용되는 잡물(雜物)을 분정(分定)한 숫자가 한이 없는데도 지금까지 지은 간수가 많지 않고 역사가 한창이어서 아직도 준공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군들이 철수한 후에도 백성들이 쉬지 못하니, 소동과 원망이 이는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전후 감독관이 군인들을 부리고 재료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외람되고 추잡한 일이 많았는데 항상 중국 장수를 핑계하면서 일부러 지연시켜 세월만 끌고 있으므로 공사가 끝날 기일이 전혀 없는 채 사람들의 말만 많으니, 뜻 있는 사람들이 분통해 한 지 오래입니다. 이처럼 백성들의 힘이 탕갈된 때에 군사 하나를 내고 돌 하나, 나무 하나를 운반하는 것이 모두 백성들의 고혈에서 나오는 것인데, 관의 일을 맡은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에만 힘을 쓰고 공(公)은 돌보지 않음으로써 나라를 속이고 백성을 해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미 그 직임에서 체직되었다 하여 벌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뒷사람들을 경계하고 장래를 경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금년 이후에 맡은 사람은 날짜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경자년 이전의 낭청(郞廳)과 감역관(監役官)은 파직을 명하소서. 도청 당상(都廳堂上) 역시 검칙을 잘못한 과실이 없지 않으니, 아울러 추고를 명하소서. 시전(市廛)의 백성들이 난후에 겨우 모였는데 첫째로는 중국 장수들의 가렴주구에 곤란을 겪었고 두 번째로는 국휼(國恤)의 수요에 응하느라 곤란을 겪었는데, 심지어는 저포(苧布)를 바치고 일체 공무역(公貿易)의 일까지 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재력이 탕갈되어 살아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니 평시서(平市署)의 관원은 사리상 무마하여 너그럽게 돌보기에 여념이 없어야 하는데도 감히 각색(各色) 시전에서 매달 명목없는 쌀을 거두어 사적으로 쓰기 때문에 원성이 자자하니 매우 놀랍습니다. 장무관(掌務官) 직장(直長) 송희성(宋希聖)은 파직시키고 영(令) 윤기정(尹起禎)은 추고하소서.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 양성해(梁成海)는 인물이 용렬하고 글을 몰라 양곡을 관리하는 직임에 맞지 않으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동관왕묘의 일은 서서히 결정하겠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응당 파직해야 할 인원은 서계(書啓)하고 나머지는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6019_002
Rec-0037 선조실록_138권_1601_0621_04 16010621 諫院啓曰: "正言尹安國, 以憲府啓辭, 東關王廟前後監董之官, 率多汎濫麤鄙之事, 庚子以前郞廳監役官, 請罷職, 堂上都廳, 亦不無不能檢飭之失, 竝請推考。’ 臣亦自上年十一月, 至今年四月, 以兵曹郞官, 爲關王廟都監都廳, 方在應推之中, 不可靦然仍冒其職,’ 引嫌而退。 臣等取考關王廟都監堂上啓辭及兵曹軍夫定送記, 則自上年十一月初一日停役, 至今年二月, 更爲起役。 尹安國之爲都監都廳, 乃在十一月停役之後。 且憲府所啓, 只論庚子以前官員, 則尹安國, 不在應推之中, 別無可避之嫌。 請正言尹安國出仕。 順天以濱海雄邑, 素稱難治, 兵火之後, 久爲賊窟, 蕩敗尤甚, 必得勤幹字惠留意民事者, 然後可以收拾成形矣。 新府使李應彪, 雖有討賊馳突之勞, 而曾爲守令, 不知撫恤之爲何事, 不久而敗。 況此南邊巨邑, 蘇殘安集之責, 決不可付諸此人之手。 李應彪, 請命遞差, 其代, 別擇聲績素著人以遣。 武兼宣傳官魚起瀛, 爲人愚妄, 又多鄙悖之行, 不可側諸侍衛之列。 請命罷職。" 答曰: "依啓。" 【朴燁, 爲人浮薄, 多有悖妄之行, 以門庇立登顯道, 時論不與。】 간원이 아뢰기를, "정언 윤안국(尹安國)이 헌부의 계사(啓辭)에 ‘동관왕묘(東關王廟)의 전후 감독관이 거개 참람되고 비루한 일이 많았으니, 경자년 이전의 낭청(郞廳)과 감역관(監役官)을 파직시키고 당상(堂上) 또한 검칙하지 못한 잘못이 없지 않으니, 아울러 추고하라.’고 하였으므로 그는 ‘신 역시 작년 11월부터 금년 4월까지 병조 낭관으로 관왕묘 도감 도청(都監都廳)으로 있었으니 추고받아야 할 사람이다. 뻔뻔스레 그대로 직을 무릅쓰고 있을 수 없다.’ 하여, 인혐(引嫌)하고는 물러갔습니다. 신들이 관왕묘 도감 당상의 계사 및 병조의 군부정송기(軍夫定送記)를 상고해 보니, 작년 11월 1일부터 역사를 정지했다가 금년 2월에 이르러서야 다시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윤안국이 도감 도청이 된 것은 11월 역사를 중지한 후이고 또 헌부에서 아뢴 바는 단지 경자년 이전의 관원을 논한 것이니, 윤안국은 추고할 사람 가운데 들지 않아 별로 피혐할 것이 없습니다. 정언 윤안국을 출사(出仕)하도록 하소서. 순천(順天)은 바닷가의 큰 고을로 평소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어졌습니다. 전후에는 오랫동안 적의 소굴이 되어 탕패가 더욱 심하니, 반드시 근간(勤幹)하고 자애스러워 백성들의 일을 돌봐주는 유념하는 자를 얻은 다음에야 수습하여 모양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신임 부사(府使) 이응표(李應彪)는 적과 싸운 공로는 있지만 수령으로 있을 적에 백성을 무마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몰랐으므로 오래지 않아 낭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 남쪽 변방의 큰 고을인 데이겠습니까. 잔폐함을 소생시키고 백성을 안집(安集)시키는 책임을 결코 이런 사람의 손에 맡길 수는 없습니다. 이응표는 체차(遞差)를 명하시고 그 대임자는 특별히 치적이 평소에 드러난 자를 가려 뽑아 보내소서. 무겸 선전관(武兼宣傳官) 어기영(魚起瀛)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망령된 데다가 또 패려하고 비루한 행실이 많아 시위(侍衛)의 반열에 둘 수가 없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박엽(朴燁)은 사람됨이 경박하고 패망된 행실이 많았는데 문비(門庇)로 현달의 길에 올랐으므로 시론(時論)이 허여하지 않았다. 】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6021_004
Rec-0038 선조실록_139권_1601_0705_01 16010705 庚子/大司憲鄭賜湖、執義趙希輔、持平金悌男ㆍ李志完等避嫌。 初, 東關王廟, 郞廳、監役官等作弊, 憲府論啓, 罷其造成郞廳等官, 推考堂上。 至是堂上沈喜壽, 緘辭有曰: "首尾三年, 限之以庚子以前, 實所未曉。" 又曰: "郞廳勤慢煩簡, 非全然不知, 而不早糾正, 至於末稍, 等蒙譴罰。" 又曰: "至於務私蔑公, 欺國蠹民等語, 人臣之極惡大罪, 不止於簠簋不飾, 下官不職之比。 身忝宰臣, 受國厚恩, 極爲冤枉云云。" 臺諫啓曰: "關王廟郞廳作弊之狀, 行路之人, 莫不痛惋。 臣等職忝言官, 耳聞目覩, 遂爲論啓。 辛丑以後之人, 不知庚子以前之汎濫, 故不爲幷論。 今觀沈喜壽緘辭, 不以竝罷辛丑以後之人爲非, 實所未曉。 且郞廳煩簡, 堂上自當或褒或糾, 而邈然不爲動念, 至於臺諫論啓之後, 乃以等蒙譴罰爲言, 務私蔑公等語, 專指郞廳堂上, 以不檢飭, 請推而已。 今喜壽多費辭說, 橫加譏詆。 以此觀之, 則位高重臣, 爲某司堂上, 則其司之郞廳, 雖有罪犯, 而使人畏其堂上。 而不敢言也。 臺官風采, 到此銷落, 請命罷斥臣等之職。" 答曰: "勿辭。" 退待物論。 【史臣曰: "東關王廟, 興不緊之役, 糜不貲之費。 況郞廳, 又從而因緣作弊, 則臺官之論啓宜矣, 而至於分別庚子、辛丑之人, 則似爲失體。 宜乎有以來喜壽之譏歟! 抑喜壽不存大體, 多費辭說, 有若爭辨者然, 胥失之矣。"】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집의 조희보(趙希輔), 지평 김제남(金悌男)·이지완(李志完) 등이 피혐하였다. 처음에 동관왕묘(東關王廟)의 낭청 감역관 등이 작폐한 일을 헌부(憲府)가 논계하여 그 조성 낭청(造成郞廳) 등의 관원을 파직하고 당상(堂上)을 추고하였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당상 심희수(沈喜壽)가 함사(緘辭)하기를 ‘시종 3년 동안에 걸친 일인데 경자년 이전의 일로 한정시킨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하고, 또 ‘낭청의 근만(勤慢)이나 번간(煩簡)을 전연 몰랐던 것은 아니나 일찍이 규정(糾正)하지 않았다고 해서 끝에 가서 똑같이 견벌(譴罰)을 당했다.’ 하고, 또 ‘「사욕만 채우려 하고 공도(公道)는 무시했으니, 나라를 속이고 백성을 해쳤다. 」고 하였는데, 이는 인신으로서는 극악의 대죄(大罪)에 해당된다. 그러니 제기를 제대로 장만하지 못하고 하관(下官)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정도의 잘못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재신(宰臣)의 신분으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고 있는데 이런 견벌을 당했으니 너무도 억울하다.’ 하였다. 이에 대간이 아뢰기를, "관왕묘 낭청이 작폐한 정상에 대해서는 행인들조차 모두 통분해 하고 있었으므로 신들의 직책이 언관인 이상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사실을 마침내 논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축년134) 이후의 사람은 경자년 이전의 범람한 정상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울러 논하지 않았던 것인데, 이제 심희수의 함사(緘辭)를 보건대 신축년 이후의 사람을 함께 파직하지 않은 것은 그릇된 일이라고 하였으니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낭청의 번간에 대해서는 당상이 알아서 포상(褒賞)하기도 하고 규정하기도 해야 하는데, 막연히 마음을 두고 있지 않다가 대간이 논계한 뒤에야 ‘똑같이 견벌을 받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사욕만 채우려 하고 공도는 무시했다.’는 말은 오로지 낭청을 가리켜 한 말로서 당상은 검칙(檢飭)하지 못한 것으로 추고만 청했을 뿐인데 지금 심희수는 많은 말을 늘어 놓으면서 마구 헐뜯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지위가 높은 중신(重臣)이 어떤 사(司)의 당상이 되면 그 사의 낭청이 죄를 범하더라도 사람들이 그 당상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대관(臺官)의 풍채가 이에 이르러 전락되고 말았으니, 신들의 직을 파척(罷斥)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신은 논한다. 동관왕묘(東關王廟)는 긴요하지 않은 역사(役事)를 일으켜서 적지 않은 비용을 낭비한 결과를 빚었다. 더구나 낭청이 덩달아 기회로 삼고 작폐하였으니 대관이 논계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경자년과 신축년의 사람을 분별한 것은 체모를 잃은 듯하니, 심희수가 비난한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심희수도 대체(大體)를 생각하지 않고 많은 말을 하여 마치 쟁변하듯 하였으니 서로 잘못되었다 하겠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7005_001
Rec-0039 선조실록_139권_1601_0706_02 16010706 正言尹安國啓曰: "臣自年前十一月, 至今年四月, 爲關王廟都廳。 今見沈喜壽緘辭, 有限之以前年, 實所未曉。 且有網漏等語。 其意實有指斥, 不可在職。 請命遞差。" 答曰: "勿辭。" 退待物論。 정언 윤안국(尹安國)이 아뢰기를, "신은 전년 11월부터 금년 4월까지 관왕묘(關王廟) 도청(都廳)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심희수(沈喜壽)의 함사(緘辭)를 보건대 ‘전년까지로 한정을 지은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하고, 또 ‘빠진 자가 있다.’는 등의 말이 있으니, 그 의도를 보면 실로 지적해서 배척하는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신은 직에 그대로 있을 수 없으니,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7006_002
Rec-0040 선조실록_140권_1601_0827_01 16010827 壬辰/憲府啓曰: "亂離以來, 恩賞太濫, 小有微勞, 官秩輒加, 名器混淆, 體統不嚴。 臣等伏見關王廟造成賞賜之 命, 或加資、或陞職、或除職、或賜物, 恩典太優, 莫不駭異。 關王廟, 初因天將分付, 有所營造, 而掌役之員, 不自謹愼, 築怨三年, 玩(揭)〔愒〕 度日, 公論顯發, 或罷或推。 辛丑以下之官幸免, 亦已足矣。 豈可反施之賞乎? 恩命一下, 物情憤鬱。 請還收成命。" 答曰: "雖不可濫施於不當施之處, 而亦不可不施於當施之人。 關王廟, 築室三年, 雖似緩緩, 而然不無其勞。 至於經理請陞之人, 則旣以依敎答之, 尤不可言出, 而反呑之。 不須論。 不允。" 헌부가 아뢰기를, "난리 이래로 은상이 과람하여 약간의 노고만 있어도 관질(官秩)을 문득 더해주니, 명기(名器)가 뒤섞이고 체통이 엄하지 못합니다. 신들이 관왕묘(關王廟) 조성(造成)에 대한 상사(賞賜)의 명을 보건대, 가자하거나 승직하거나 혹은 물건을 하사하였는데, 은전이 너무 지나쳐 모두들 괴이하게 여깁니다. 관왕묘는 처음에 중국 장수의 분부로 영조(營造)하기 시작하였는데, 역사를 맡은 관원이 근신하지 않아 3년 동안 원성(怨聲)을 쌓으며 그럭저럭 세월만 허비해 공론이 현저하게 일어나 파직당하거나 혹은 추고당하였습니다. 신축년 이후의 관원은 요행히 면한 것만도 천만 다행인데, 어찌 도리어 상을 줄 수 있겠습니까. 은명이 내리자 여론이 울분해 하니, 성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주어서는 안 될 곳에 주어서도 안 되지만, 역시 주어야 할 사람에게 안 주어서도 안 된다. 관왕묘를 3년 동안 지은 것이 비록 완만하기는 하였으나 그 노고가 없지 않다. 경리(經理)가 승직시키기를 청한 사람에 대해서는 이미 지시대로 하겠다고 답하였으니 식언할 수는 없다. 논할 것이 없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8027_001
Rec-0041 선조실록_140권_1601_0827_02 16010827 諫院啓曰: "近來恩賞太濫, 名器不重, 宰秩崇班, 超越無難, 朝家命德之具, 混淆已極, 識者之寒心久矣。 今此關王廟造成, 本無關係國事, 監董之官, 淹延時月, 浪費民力, 甚至憑公作弊, 重被臺評。 前後之員, 均有厥咎。 當初限年施罰, 己爲苟且, 而加資、賞物、陞職、除職之命, 遽及於無功有過之人。 國家勸懲之方, 顚倒至此, 不但濫觴之爲未安而已。 大扺重其賞者, 所以重其事也。 前日太廟營繕之賞, 亦不過此, 則何可比而同之? 揆以事體, 尤爲未安。 請關王廟造成論賞承傳, 勿爲擧行。 臣等取考戶曹反庫文書, 則各該司逐年無面之數, 極多, 或有沒數無面者, 或有過半無面者, 或有元數三分, 而無面一分者。 此由近來, 官不擇人, 率多苟充, 雜類下賤, 亦廁其間, 職事不理, 吏僕不畏, 馴致典守不謹, 偸竊自恣, 而該曹又不爲留意照管, 常加檢飭, 解由之際, 亦不能明白査覈, 陞遷去官, 略無拘礙, 未聞有一人, 因此罷免者。 紀綱之解弛, 據此可知。 請各該司, 無面雜物, 幷令該曹, 一一査出, 該掌官吏, 勿拘按月之法, 別立事目, 刻期分徵, 其中在職日久, 無面最多者, 先罷後推, 其餘勿論輕重, 雖已遷輔者, 幷改解由, 未畢徵前越等例, 不許受祿遷官, 不檢擧該曹堂上色郞廳, 竝推考。" 答曰: "允。 論賞事, 答府同。" 간원이 아뢰기를, "근래에 은상이 너무 지나쳐 명기가 중하지 못해 재질(宰秩)인 숭반(崇班)에 오르기가 어렵지 않은 바, 나라의 명덕(命德)의 도구가 뒤섞이는 것이 극도에 달해 식자들이 한심스럽게 여긴 지 오래입니다. 이번 관왕묘의 조성은 본래 나랏일과 관계되지 않은 데다 감독하는 관원이 세월만 끌면서 백성들의 힘을 낭비하였고, 심지어는 공사(公事)를 빙자해 폐단을 일으켜 대간의 중한 비난을 입기까지 하였으니, 전후의 관원 모두에게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당초에 연한(年限)을 정하여 벌을 준 것도 구차한 것인데, 가자하거나 물건으로 상을 주거나 승직하거나 제직하라는 명이 갑자기 공은 없고 허물만 있는 사람들에게 내렸습니다. 국가에서 권징(勸懲)하는 방도가 이렇게까지 전도되었으니 폐단이 일어나는 시초가 될 뿐만 아니라 온당치 못한 일이기도 합니다. 대저 중하게 상을 주는 것은 그 일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전에 태묘(太廟)를 영선(營繕)하고 내린 상도 그 정도에 불과하였는데, 어떻게 거기에다 비교하여 같게 하겠습니까. 사체로 헤아려 보아도 더욱 온당치 못하니, 관왕묘 조성에 다른 논상의 승전을 거행하지 말게 하소서. 신들이 호조에서 번고(反庫)한 문서를 취고(取考)해 보니, 각 해사의 매년 무면(無面)141) 숫자가 매우 많은데, 전수가 무면인 것도 있고, 과반이 무면인 것도 있으며, 혹은 원수(元數)의 3분의 1이 무면인 것도 있었습니다. 이는 근래에 적임자의 관원을 얻지 못하고 거의가 구차하게 충당하여 잡류(雜類)와 하천(下賤)들 역시 그 사이에 끼게 됨으로써 직무가 다스려지지 않고 이복(吏僕)들이 두려워하지 않아 법을 지키지 않고 마음대로 훔치는 습관에 젖은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해조에서는 유의해 관리하며 항상 검칙하지 않고 해유(解由)하는 즈음에도 역시 명백하게 사핵(査覈)하지 못하여 승천(陞遷)하고 거관(去官)하는데 조금도 구애됨이 없게 되어 한 사람도 이로 인하여 파면당한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기강이 해이되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각 해사의 무면잡물(無面雜物)을 해조로 하여금 낱낱이 조사해내게 하고 담당 관리는 안월법(按月法)에 구애받지 말고 별도로 사목을 만들어 기일을 정해 분징(分徵)하게 하며, 그 가운데 재직한 날짜가 오래이고 무면이 가장 많은 자는 우선 파직한 후에 추고하게 하소서. 그리고 그 나머지는 경중을 논하지 말고 비록 이미 천전(遷轉)한 자라도 모두 ‘다 징수하기 전에는 녹봉을 감한다. [未畢徵前越等]’는 예를 적용해 해유를 고치어 복을 받고 관직을 옮기지 못하게 하며,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해조의 당상과 색낭청은 아울러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한다. 논상에 대한 일은 헌부에 답한 것과 같다."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8027_002
Rec-0042 선조실록_140권_1601_0828_02 16010828 講畢, 大司諫黃愼進曰: "關王廟造成官員, 非徒無功勞, 當此蕩竭之時, 不惜財力, 三年興役, 淹延時月, 甚者至於軍人調發, 財料處置之際, 亦多有失, 外議狼藉。 前者限年施罰, 至今以爲非, 今復加賞, 物情莫不憤鬱。 請從速還收成命。" 掌令李軫賓曰: "關王廟, 官員泛濫之事極多。 當初論啓之時, 以辛丑以後, 不至如庚子以前, 故不爲幷論, 非謂無罪也。 今不加罰, 而反施賞, 不得不還收成命, 請早快從。" 上曰: "論賞, 未爲不可, 似難改之。" 강을 마치자 대사간 황신(黃愼)이 나와 아뢰기를, "관왕묘를 조성한 관원은 비단 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처럼 탕갈한 때를 당하여 재력을 아끼지 않고 3년 동안 역사를 일으켜 세월만 끌었으며, 심한 자는 군인을 조발하고 재료(財料)를 처리하는 즈음에 잘못함이 많아 밖의 의논이 많습니다. 전번에 연한(年限)을 정해 벌을 준 것을 지금까지도 잘못이라고 하는데, 이제 다시 상을 주니 여론이 모두 울분해 하고 있습니다. 속히 성명을 환수하소서." 하고, 장령 이진빈(李軫賓)은 아뢰기를, "관왕묘 조성 관원들은 범람한 일이 매우 많습니다. 당초 논계할 때에, 신축년 이후에는 경자년 이전과 같은 지경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울러 논하지 않은 것이지 죄가 없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벌은 가하지 않고 도리어 상을 주니. 성명을 환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속히 통쾌하게 따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논상하는 것은 안 될것이 없으니, 개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8028_002
Rec-0043 선조실록_140권_1601_0828_03 16010828 諫院啓曰: "關王廟論賞承傳, 幷勿擧行。" 答曰: "已諭不允。 勿煩似當。" 간원이 아뢰기를, "관왕묘의 조성에 대해 논상한 승전을 거행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유시했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8028_003
Rec-0044 선조실록_140권_1601_0828_04 16010828 憲府啓曰: "關王廟論賞, 請還收成命。" 答曰: "不可還收。" 헌부가 아뢰기를, "관왕묘의 조성에 대해 논상한 성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도로 거둘 수 없다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8028_004
Rec-0045 선조실록_140권_1601_0829_01 16010829 甲午/憲府啓曰: "朝家命德之具, 豈可因經理一時之言, 濫加於不當施之人哉? 請關王廟造成官論賞承傳, 幷勿擧行。" 答曰: "監董之官, 豈皆盡然乎? 已爲參酌論賞, 今不可改之, 勿爲煩擾。 不允。" 헌부가 아뢰기를, "나라에서 덕있는 이에게 명하는 도구를 어찌 경리(經理)의 한때의 말로 인하여 시행해서는 안 될 사람에게 함부로 줄 수 있겠습니까. 관왕묘를 조성한 관원에 대해 논상한 승전을 거행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감독한 관원이 어찌 다 그렇겠는가. 이미 참작하여 논상한 것이니, 이제 개정하는 것은 불가하다. 시끄럽게 하지 말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8029_001
Rec-0046 선조실록_140권_1601_0829_02 16010829 諫院啓曰: "不可必循經理之請, 而施此僭賞也。 兪音不下, 物情愈激。 請關王廟造成論賞承傳, 幷勿擧行。" 答曰: "府同。" 간원이 아뢰기를, "경리의 청을 따라 이처럼 참람한 상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유음(兪音)이 내리지 않아 여론이 더욱 격해지고 있으니, 관왕묘를 조성한 관원에 대해 논상한 승전을 거행하지 마소서." 하니, 헌부에 답한 것과 같다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8029_002
Rec-0047 선조실록_141권_1601_0901_02 16010901 憲府啓曰: "臣等將關王廟論賞一事, 論列已盡, 兪音尙閟, 臣等未知聖意之所在也。 請勿留難, 還收成命。" 答曰: "所論過矣。 不須煩。 不允。"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관왕묘(關王廟)의 논상(論賞) 문제를 가지고 더할 나위없이 논열했는데도 아직까지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들은 성상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망설이지 마시고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한 것이 지나치다.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9001_002
Rec-0048 선조실록_141권_1601_0901_03 16010901 諫院啓曰: "請關〔王〕 廟造成論賞承傳, 竝勿擧行。 (判敦寧府使)〔判敦寧府事〕 李軸, 以元勳之故, 屢蒙恩擢, 得躋正卿之列, 國家寵待之意, 已云極矣, 而玆者崇班除命, 出於人望之外。 一品重秩, 是何等職名, 而無故濫施於不當施之人乎? 物情莫不駭異。 請命改正。 渭原郡守李, 年齡衰老, 別無可稱之才, 不合關防重地。 請命罷職, 其代以武弁中名望最著者, 十分擇遣。 金山郡守禹拜善, 尸居不職, 政委下吏, 賦役不均, 民不勝其苦, 流亡相繼, 怨咨盈路。 請命罷職。" 答曰: "李軸, 元勳之人, 久在二品, 故陞授一品。 李, 無故論罷, 近來守令, 爲臺諫日課之資, 不得安意察任。 病民生隳國事, 甚不可也。 禹拜善如此, 則都體察、巡察使, 亦必有耳目, 姑任其黜陟。 竝不允。" 간원이 아뢰기를, "관왕묘 조성에 관한 일로 논상하라고 승전을 받든 일은 거행하지 말게 하소서. 판돈녕부사 이축(李軸)은 원훈이라는 이유만으로 여러 번 발탁되어 정경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니, 국가에서 극진히 대접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숭품(崇品)으로 승진시키라는 명이 인망과는 동떨어지게 내려졌습니다. 1품의 중질(重秩)이 어떤 직명인데 주어서는 안 될 사람에게 이유없이 함부로 준단 말입니까. 모두들 놀라고 이상히 여기니, 개정을 명하소서. 위원 군수(渭原郡守) 이원(李)은 노쇠할 뿐만 아니라 별로 이렇다 할 재능도 없으니 국경을 방어하는 중한 자리에는 알맞지 않습니다. 파직을 명하시고 그 후임자로 명망이 있는 무관을 신중히 뽑아 보내소서. 금산 군수(金山郡守) 우배선(禹拜善)은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서 직책은 수행하지 않고 하리(下吏)들에게 정사를 맡겨 부역이 고르지 못하므로 백성들이 고통을 참지 못하여 잇따라 떠나가고 있는데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합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축은 원훈으로 오랫동안 2품(二品)에 머물렀으므로 1품에 승진시킨 것이다. 이원은 파직을 논할 이유가 없다. 요즈음 수령들이 대간의 논박만 받고 있으므로 안심하고 직책을 돌볼 수가 없어 민생이 병들고 국사가 그릇되고 있으니 매우 옳지 못하다. 우배선이 그러하다면 도체찰사나 순찰사도 필시 듣고 보아 알 터이니, 우선은 그들이 출척(黜陟)하도록 하라.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9001_003
Rec-0049 선조실록_141권_1601_0903_01 16010903 丁酉/憲府啓曰: "關廟之役, 初非關係國事, 築怨三年, 成此一廟, 有何可紀之功, 而獲此無名之賞乎? 請勿留難, 還收成命。" 答曰: "論賞參酌已施, 今不可改。 況不謹郞廳, 已在不賞之中? 近日賞令之下, 不揆事體輒論, 亦非所宜, 不允。" 헌부가 아뢰기를, "관묘(關廟)를 조성하는 일은 애초 국사(國事)와는 관계없는 일이고 3년 동안 원망을 사면서 이 묘 하나를 이루었는데, 무슨 기록할 만한 공이 있다고 이처럼 명분없는 상을 받는단 말입니까. 망설이지 마시고 성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상은 참작해서 결정한 것이니 지금 와서 고칠 수 없다. 더구나 삼가지 않은 낭청(郞廳)에게는 이미 상을 주지 않기로 했는데 이겠는가. 요즈음 시상(施賞)하라는 명이 내려지면 사체(事體)를 헤아려보지도 않고 곧장 논하는데, 이 또한 온당한 일이 못 된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9003_001
Rec-0050 선조실록_141권_1601_0903_02 16010903 諫院啓曰: "臣等將關廟論賞一事, 久瀆天聽, 而未蒙兪允, 臣等竊惑焉。 無功而僭賞, 亦云不可。 況於有罪而反賞之乎? 請論賞承傳, 勿爲擧行。 判敦寧府事李軸, 蒙恩超擢, 位躋正卿。 豈可以一品爵秩, 爲勳臣例陞之資? 請亟命改正。 渭原郡守李, 衰鈍無能之狀, 人所共知。 素以泛濫不謹, 【 , 曾爲守令, 以私獻被駁。】 重被臺評。 臣等之請罷, 實非無故, 而好爲彈論也。 請亟命罷職。 金山郡守禹拜善, 到任之後, 不治官事, 唯以善事營門軍官下人爲事, 以爲要譽之資。 一日在官, 重貽民弊。 言官, 隨所聞糾劾, 乃其職也。 何待本道之黜陟乎? 請亟命罷職。" 答曰: "論賞事, 答府同。 李軸, 元勳之人, 陞授何不可? 守令黜陟, 自有主者。 況體察大臣在? 當任其黜陟, 不須越俎。 竝不允。" 간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관묘의 논상 문제를 가지고 오래도록 천청(天聽)을 번독케 했는데도 아직까지 윤허를 얻지 못했으므로 신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아무 공이 없이 외람되게 상을 받는 것도 안 될 일인데 더구나 죄진 자에게 도리어 상을 준단 말입니까. 논상할 것으로 승전을 받든 일은 거행하지 말게 하소서. 판돈녕부사 이축은 성은을 입어 정경(正卿)의 반열에까지 뛰어 올랐는데 어찌 1품의 작위를 훈신에게 주는 관례로 올려 줄 수 있겠습니까. 속히 개정을 명하소서. 위원 군수 이원이 노쇠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정상은 모두들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본래부터 범람하고 삼가지 아니하여 【이원이 일찍이 수령으로 있을 때에 뇌물을 바쳐 논박을 받았었다. 】 대간의 비판까지 중하게 받았으며 신들이 그의 파직을 요청한 것은 실로 까닭없이 탄핵하고 논박하기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속히 파직을 명하소서. 금산 군수 우배선은 도임한 뒤로 관청의 일은 돌보지 않고 오로지 영문(營門)의 군관(軍官)이나 하인(下人)들의 비위나 맞추며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만 하고 있으니, 그가 관직에 있으면 있을수록 그만큼 백성에게 폐를 끼칠 것입니다. 언관은 들은 대로 규정(糾正)하고 탄핵하는 것이 본래의 임무인데 어찌 본도(本道)에서 출척하기를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속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상 문제는 헌부에 답한 것과 같다. 이축은 원훈(元勳)이니 승진시키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 수령들의 출척은 주관하는 곳이 따로 있다. 더구나 체찰 대신(體察大臣)이 있으니 그에게 출척을 맡겨야 하고 남의 권한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9003_002
Rec-0051 선조실록_141권_1601_0904_01 16010904 戊戌/憲府啓曰: "臣等昨日, 伏承聖批, 彷徨踧踖,不勝悶鬱焉。 臣等之意, 只恐殿下賞罰之不當, 而不免有後世之譏矣。 臣等所重者, 體統也; 所惜者, 政體也。 區區事體, 恐不暇顧矣。 請勿留難, 還收成命。" 答曰: "不允。 經理所請之郞廳, 仍爲論賞, 其餘郞廳, 勿爲論賞。"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성상의 비답을 받들고 이리저리 서성이며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신들의 의도는 전하께서 부당하게 상벌을 내리시어 후세에 비난을 받으실까 염려해서였습니다. 신들이 중하게 여기는 것은 체통(體統)이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정체(政體)이니, 자질구레한 사체(事體)같은 것은 돌아볼 겨를도 없습니다. 망설이지 마시고 성명을 도록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경리(經理)가 추천한 낭청(郞廳)은 그대로 논상하고 나머지 낭청은 논상하지 말라."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9004_001
Rec-0052 선조실록_141권_1601_0904_02 16010904 諫院啓曰: "臣等於前後賞命之下, 論執累日, 不避煩瀆者, 非區區靳惜於一資一級之濫施也, 誠恐此路一開, 其弊濫觴, 馴致於朝著混濁, 而危亂隨之。 雖然, 逆獄推鞫, 國之重事, 經書纂集, 意在儒雅。 縱有恩賞之或過, 猶之可也, 臣等之三啓而止者, 有見於此也。 至於關廟之役, 則本非關係國事。 監董之官, 無功而有罪者乎? 請造成官員論賞承傳, 亟命還收。 判敦寧府事李軸, 請勿留難, 亟命改正。 渭原郡守李、金山郡守禹拜善, 請亟命罷職。" 答曰: "竝不允。 論賞事, 府同。" 간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전후로 논상하는 명이 내리자 여러 날 동안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논집한 것은 한 품계나 한 자급을 주는 것이 아까와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실로 이런 길이 한 번 열리게 되면 이를 시초로 폐단이 발생하여 조정을 혼탁하게 만들고 위란(危亂)이 뒤따르게 될까 두려워서였습니다. 그렇지만 역적에 대한 옥사를 추국(推鞫)하는 일은 국가의 중대사이고 경서(經書)를 찬집(纂集)하는 일 또한 풍속을 우아하게 하는데 그 의도가 있으므로 설령 은상(恩賞)이 지나칠 경우가 있다 해도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에 대해서는 신들이 세 차례 아뢰고 그만둔 것도 바로 이런 견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관묘(關廟)를 조성한 경우는 원래 국사와 관계가 없을 뿐더러 이를 감독하는 관리 또한 공은 커녕 죄만 졌는데 이겠습니까. 조성한 관원에 대해 논상하라는 승전을 속히 환수하도록 명하소서. 그리고 판돈녕부사 이축은 망설이지 마시고 속히 개정을 명하소서. 위원 군수 이원과 금산 군수 우배선은 속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논상에 대한 일은 헌부에 답한 것과 같다."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9004_002
Rec-0053 선조실록_141권_1601_0905_01 16010905 己亥/憲府啓曰: "臣等將關王廟論賞一事, 論列已盡, 兪音尙閟, 臣等不勝悶鬱焉。 請勿留難, 還收成命。" 答曰: "已諭。 似煩。 勿擾。"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관왕묘 조성에 따른 논상 문제로 이미 극진히 논열(論列)했는데도 아직까지 윤허하지 않으시므로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망설이지 마시고 성명(成命)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유시하였다. 번거로운 듯하니 소요스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9005_001
Rec-0054 선조실록_141권_1601_0905_02 16010905 諫院啓曰: "關廟造成前後郞僚, 或施譴罰、或命勿賞。 其無功有罪之狀, 聖明旣已洞燭, 此則以請而蒙賞, 彼則無請而獲罪, 政體之苟且, 莫甚於此。 請勿留難, 還收論賞之命。 判敦寧府事李軸, 屢蒙恩擢, 位躋正卿之列。 豈可以一品崇班, 復加於不當施之人耶? 請亟命改正。 恭城副令 洽爲人狂妄, 所行悖戾, 至於宗族群會之中, (歐)〔敺〕 辱尊行。 傷敗彝倫, 莫此爲甚。 請命罷職不敍。 宗簿寺, 專掌糾撿宗室, 而如此等事, 專不致察, 不職甚矣。 請當該官員, 竝命推考。" 答曰: "與府同。 罷推事, 依啓。" 간원이 아뢰기를, "관묘 조성에 관여하였던 전후 낭료(郞僚)에 대해 혹은 견책이나 벌을 받을 자도 있고 상을 주지 못하게 한 자도 있으니, 이로써 공은 없고 죄만 있다는 것을 상께서도 이미 분명히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쪽은 주청을 받았다고 해서 상을 받고 저쪽은 주청이 없다고 해서 죄를 받는다면 정체(政體)가 이보다 더 심하게 구차해질 수가 없습니다. 망설이지 마시고 논상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판돈녕부사 이축(李軸)은 여러 번 은총을 입어 정경(正卿)의 반열에까지 올랐는데 어찌 주어서는 안 될 사람에게 다시 1품(一品)의 숭반(崇班)을 더해줄 수 있겠습니까. 속히 개정을 명하소서. 공성 부령(恭城副令) 이흡(李洽)은 위인이 경망스럽고 행동이 패려하여 종족들이 모인 장소에서 항렬이 높은 사람을 구타하고 욕보였으니 이보다 심한 패륜이 없습니다. 파직을 명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종부시(宗簿寺)는 종실에 대한 규검(糾檢)을 전담하는 곳인데 이런 일을 전혀 살피지 못했으니 너무도 직무 수행을 태만히 하였습니다. 해당 관원을 아울러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헌부에 내린 답과 같다. 파직시키고 추고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9005_002
Rec-0055 선조실록_141권_1601_0906_01 16010906 庚子/卯正, 上御別殿, 講《周易》。 侍講官尹義立, 進講《無妄卦》, 自序卦, 止不爲私焉。 講畢, 持平金悌男進曰: "關王廟堂上、郞廳論賞事, 累日啓辭, 而未蒙天聽。 堂上則與郞僚有間, 然不能檢飭, 遷延時月, 病民傷財。 雖有天將之請, 豈可以官爵, 反施於不當施之地哉? 其論賞承傳, 不可不還收也。" 正言尹煌曰: "關廟一事, 自上已爲洞察, 不須多言。 但經理所請之人, 仍爲論賞, 此甚不可。 爵者, 命德之器, 豈可濫施哉? 今者不謹郞廳, 盡皆譴罰, 而以天將之請, 此輩獨爲論賞, 政體之虧, 莫此爲甚。 請命還收。" 上曰: "不可改。" 尹煌曰: "判敦寧李軸, 以元勳之故, 已至正卿, 豈可復加乎? 請從速改正。" 上曰: "此亦不可改。" 尹煌曰: "前日渭原郡守李, 衰鈍無能, 金山郡守禹拜善, 政委下吏之故,屢度論啓, 而未得蒙允。 以細微之事, 每煩天聽, 似爲未安, 故已爲停啓矣, 但上敎有越俎之語。 臺諫, 爲人主耳目, 有聞輒言。 豈可以侵官越職, 有所嫌避耶? 此敎極爲未安矣。" 領事尹承勳曰: "昨見體察使狀啓, 零賊竊發於邊上, 至捉邊民, 盤問我國之事云。 雖未知所言者何事, 無奈今番賊使來時, 聚逃兵行計之事, 亦爲說出耶? 如此機事或透, 則邊方之事, 益可憂。 各別申飭可也。" 同知事李廷龜曰: "亂後學校廢弛, 倫紀不明, (歐)〔敺〕 兄敺父, 口不可道之惡行, 閭閻間比比有之, 而恬不爲怪。 此由敎導之不明而然。 如《小學》等書, 不可不頒布中外, 使人知尊兄敬長之義也。 且呂氏鄕約, 前日曾已行之, 而但法立而弊生, 武斷鄕曲之人, 托此爲非, 故未免停止矣, 由是鄕曲之間, 雖有惡行, 無由糾檢。 必須復設此法, 禁止其作弊之路, 申明行之, 有善則報之, 有惡則治之, 可也。 且前日則京中士子多聚, 故赴館赴學, 而學問禮讓, 相爲講磨人才培養, 士習振起, 皆由於此。 一自經亂, 士子流離, 盡爲田野之農夫, 人才何自而出乎? 此極寒心。 聚士而使之激勵, 莫如科擧。 平時則館學多有製述之事, 而亂後此法盡廢。 須先爲科擧, 使士子聚集, 而如輪次人日等事, 亦復設行, 時爲賞格, 令競勸可也。 且帳戶籍一事, 平時則例以三年一爲者, 欲知版籍故也。 今則廢之, 故生齒多寡, 未知幾許。 昔蕭何入關, 先收版籍。 國不知此而何爲乎? 此事非如軍籍之比, 似可易成。 依前例行之可也。" 辰時罷黜。 묘시 정각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주역》을 강(講)하였다. 시강관(侍講官) 윤의립(尹義立)이 무망괘(無妄卦)의 서괘(序卦)에서부터 ‘불위사언(不爲私焉)’까지 진강(進講)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평 김제남(金悌男)이 나아가 아뢰기를, "관왕묘의 조성에 관여하였던 당상 낭청에 대한 논상 문제로 여러 날 동안 아뢰었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당상은 낭료(郞僚)와 차이가 있기는 하나 제대로 감독하고 단속하지 못하여 공사 기간만 지연시킴으로써 백성을 병들게 하고 재물을 손상시켰습니다. 아무리 중국 장수의 요청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주어서는 안되는 사람에게 오히려 관작을 줄 수 있겠습니까. 논상하라는 승전은 환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정언 윤황(尹煌)은 아뢰기를, "관묘 문제에 대해서는 상께서 이미 환하게 알고 계시니 많은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단지 경리가 요청한 사람이라 하여 논상을 한다면 이는 매우 옳지 못한 일입니다. 관작이라는 것은 덕있는 사람에게 주어야 하는데 함부로 주어서야 되겠습니까. 이번에 근실하게 하지 못한 낭청은 모두 벌을 받았는데, 유독 이 무리들에게만 논상을 한다면 이보다 심하게 정체(政體)가 손상될 수 없습니다.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칠 수 없다." 하였다. 윤황이 아뢰기를, "판돈녕 이축은 원훈(元勳)이라는 이유로 이미 정경(正卿)에 올랐는데 어떻게 더 품계를 올려줄 수 있겠습니까. 속히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일도 고칠 수 없다." 하였다. 윤황이 아뢰기를, "전일 위원 군수(渭原郡守) 이원(李)의 노쇠하고 무능한 정상과 금산 군수(金山郡守) 우배선(禹拜善)이 하리(下吏)에게 정사를 맡긴 일로 여러 번 논계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기에 자질구레한 일로 매번 상을 괴롭히기가 미안한 듯하여 이미 정계(停啓)하였습니다. 다만 상의 전교 중에 ‘남의 권한을 침해한다.’라는 말씀이 계셨는데, 대간은 임금의 이목(耳目)으로서 들으면 곧바로 말을 해야 합니다. 남의 직임을 침해한다고 하여 피해서야 되겠습니까. 그 말씀만은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하고, 영사(領事) 윤승훈(尹承勳)은 아뢰기를, "어제 체찰사의 장계를 보니, 하찮은 왜적이 국경에 몰래 침범하여 우리 백성을 잡아다가 우리 국내의 사정을 탐문하기까지 했다 합니다. 말한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적사(賊使)가 올 때에 도망병을 모아 계책을 실행할 일까지 발설하지나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기밀이 혹시라도 누설되면 변방의 일이 더욱 근심스러워질 것이니 각별히 신칙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동지사 이정구(李廷龜)는 아뢰기를, "난이 일어난 뒤에 학교가 폐지되고 인륜과 기강이 밝혀지지 못했으므로 형이나 아비를 구타하는 등 입에 담지 못할 악행이 여염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저 그러려니 하여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교도(敎導)를 잘못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따라서 《소학(小學)》같은 책들을 중외에 반포하여 사람들에게 형을 존대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의리를 알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전에 시행해 보았지만 법을 세우자 폐단이 생기게 되어 지방 세도가들이 이를 핑계로 주민들을 억압하며 비행을 저질렀으므로 정지되고 말았었습니다. 이 때문에 지방에서 악행을 저질러도 단속할 방법이 없게 되었으니, 다시 이 법을 설치하여 폐단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다시 밝혀 시행함으로써 착한 일은 권장하고 악한 일은 처벌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에는 서울에 선비들이 많이 모여서 성균관과 사학(四學)에 들어가 학문을 닦고 예절을 익히며 서로 강마(講磨)하였으니, 인재가 배양되고 사습(士習)이 진작된 것은 모두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난리를 한 번 겪고 난 뒤로는 선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전야(田野)의 농부가 되어 버렸으니 인재가 어디로부터 나올 수 있겠습니까.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선비들을 모아 격려하는 것은 과거만한 것이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관학(館學)142) 에서 제술(製述)하는 일을 많이 하였는데 난리가 일어난 뒤로는 이 법이 모두 폐지되었습니다. 우선 과거를 실시하여 선비들을 모으는 한편, 윤차제수(輪次除授)하는 것과 인일제(人日製)를 보이는 일 등도 다시 시행하고 때로 시상도 하여 경쟁하며 권면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평시에는 3년에 한 번씩 으레 호적을 정리하였는데 이는 판적(版籍)의 변동 상황을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폐지하였으므로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옛날 소하(蕭何)가 관중(關中)에 들어가서 맨 먼저 수습한 것도 판적이었으니 국가에서 이것을 모르고서야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 일은 군적(軍籍)을 정리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으로 달리 작성하기가 쉬울 듯하니 전례대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진시(辰時)에 파하고 나갔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9006_001
Rec-0056 선조실록_141권_1601_0907_01 16010907 辛丑/憲府啓曰: "臣等將關王廟論賞一事, 論列已盡, 兪音尙閟。 請勿留難, 亟賜一兪。" 答曰: "提調等, 亦豈無其勞? 且以千乘之君, 對天朝大官, 固無食言自肥之理。 不揆事體, 屑屑苟論, 隘狹如此, 不允。"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관왕묘 조성의 논상 문제를 가지고 이미 극진히 논열하였는데도 아직까지 윤허하지 않고 계십니다. 망설이지 마시고 속히 윤허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제조(提調) 등이 또한 어찌 노고가 없었겠는가. 그리고 천승(千乘)의 임금으로서 중국의 대관을 상대하며 자기 입장만 생각해 식언(食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체를 헤아리지 않고 구차하게 논하기만 하니 정말 소견이 좁기도 하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9007_001
Rec-0057 선조실록_141권_1601_0907_02 16010907 諫院啓曰: "臣等將關王廟造成論賞, 不可不還收之意, 論列已盡, 兪音尙閟。 臣等非不知聖上重天將之請, 有難改之意, 然區區爲國, 愛惜名器, 愼重賞罰之心, 尤有甚焉。 所以彌旬固爭, 不知止耳。 請勿留難, 亟賜一兪。" 答曰: "府同。 李軸亦不可改。" 간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관왕묘 조성에 대한 논상 문제를 가지고 명을 환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이미 극진히 논했는데도 아직까지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신들 역시 성상께서 중국 장수의 요청을 중히 여긴 나머지 고치기 어려워하시는 뜻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국가를 위해 명기(名器)을 아끼고 상벌을 신중히 해야 된다는 마음이 더욱 절실하므로 열흘이 넘도록 간쟁하며 그만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망설이지 마시고 속히 윤허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헌부에 내린 답과 같다. 이축도 개정할 수 없다." 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9007_002
Rec-0058 선조실록_141권_1601_0909_01 16010909 癸卯/諫院啓曰: "臣等將關王廟造成論賞, 不可不還收之意, 論列已盡, 兪音尙閟, 聖批益峻, 臣等不勝憫鬱焉。 請勿留難, 亟賜一兪。 金溝縣令延忠輔, 【忠輔, 變初聞其親死, 而不卽發喪者也。】 本院三度越署經。 請命遞差。" 答曰: "幷依啓。" 간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관왕묘 조성에 대한 논상 문제를 가지고 그 명을 환수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이미 극진히 논의하였는데도 아직 윤허하시지 않을 뿐더러 성상의 비답이 더욱 준엄하시니 신들은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망설이지 마시고 속히 윤허해 주소서. 금구 현령(金溝縣令) 연충보(延忠輔)는 【충보는 난리 초기에 어버이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곧바로 초상을 치르지 않은 자이다. 】 본원(本院)에서 세 차례나 서경(署經)을 넘겼으니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9009_001
Rec-0059 선조실록_141권_1601_0909_02 16010909 憲府啓曰: "臣等將關王廟論賞, 不可不還收成命事, 累日論列, 而聖批有曰: ‘屑屑苟論, 隘狹如此。’ 臣等聞命兢惶, 罔知攸措。 臣等之懇懇論列者, 只爲重慶賞、惜名器也。 豈可不揆事體, 區區妄陳哉? 請勿留難, 亟賜一兪。 國家設立左右捕盜廳者, 所以禁暴亂、備盜寇也, 而近來爲大將者, 專不察任, 巡邏緝捕等事, 置之相忘之地, 致令殺越于貨之變, 比比有之, 凡在視聽, 駭愕者久矣。 今月初五日, 宮城至近之地, 疊有殺人可駭之變, 而捕盜廳不能登時措捕, 終使殺人者, 得以逃躱, 極爲駭愕。 請其邊大將推考, 從事官罷職, 其夜本廳上直部將及巡伏部將, 竝命拿鞫。" 答曰: "幷依啓。"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관왕묘 논상에 대한 성명(成命)을 환수하셔야 된다는 뜻으로 여러 날 동안 논의하였는데도 성비(聖批)에 ‘사소한 일로 구차하게 논하기만 하니 정말 소견이 좁기도 하다.’ 하셨으므로 신들은 명을 듣고는 너무도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들이 간곡히 논했던 이유는 상주는 것을 신중히 하고 벼슬자리를 아끼라는 뜻에서였습니다. 어찌 사체를 헤아리지도 못하고 구구히 함부로 말씀드린 것이겠습니까. 망설이지 마시고 속히 윤허하소서. 국가(國家)에서 좌우 포도청을 설립한 것은 포악한 자와 도둑을 방비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근래 대장(大將)된 자가 임무를 전혀 살피지 않고 순라(巡羅)와 도둑잡는 일 등을 등한시하여 살인과 강도의 사건이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있으므로 보고 듣는 이들이 놀랍고 해괴하게 생각해온 지 오래입니다. 이 달 5일 궁성과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놀랄 만한 살인 사건이 거듭 발생했는데도 포도청에서는 즉시 범인을 체포하지 못하고 살인자로 하여금 도망칠 수 있게 하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해당 대장을 추고하고 종사관(從事官)은 파직시키며, 그 날 밤의 본청 상직 부장 및 순복 부장은 모두 나국(拿鞫)을 명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9009_002
Rec-0060 광해군일기중초본_3권_1608_0428_03 16080428 推鞫廳啓曰: "孝一烙刑, 不服, 病勢極重, 恐難遽爲加刑。 河大謙屢被重刑, 而曾無一言, 及遭烙刑, 如是供招。 臨死胡亂之說, 雖未必盡實, 而所言極爲兇慘, 辭連裵興立拿問宜當。 所謂朴震男妹男全羅都事, 則似是尹守謙。 今方因事上京, 亦爲拿問何如? 金遵階、李純信、成允文、韓龍等, 皆出於此人之招, 可謂端緖之已現。 成允文、韓龍似當刑訊。 南關王廟金遵階、李純信會議之說, 則大謙聞之於種伊從等云, 種伊從等前日之招, 與河大謙之招多不相同, 種伊從等更爲一處憑閱後, 處置爲當。 敢啓。" 答曰: "依啓。 河大謙與臨海作爲一心, 凡事萬無不知之理, 到今窮問, 然後始發其端。 而詳觀其供辭, 則每言必以聞於他人爲辭, 渠則有若不相與知者然。 其兇詐莫甚, 實非臨死亂言也。 不宜每每面質以傷獄體。 李純信、金遵階等姑除面質, 以大謙所供更爲推問, 其辭連之人, 竝卽拿鞫。 金天遇、喚御史等, 京中則捕盜廳, 外方則分遣都事于各道監司處, 使之同議, 密爲聞見, 期於必捕。 大槪逃躱罪人喚御史、尹金伊、末叱致等, 至今不捕, 國無紀綱, 於此可知。 更加申飭。 成允文前後辭連, 別無異同, 姑爲除刑仍囚; 大謙別置他處, 勿使諸賊混處可矣。 且此外文臣武將, 不無出入謀議者, 更加詳盡鉤問于河賊以啓。" 추국청이 아뢰기를, "효일은 낙형을 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는데, 병세가 극히 중해 서둘러 형장을 더하기에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하대겸(河大謙)은 여러번 중한 형벌을 하여도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었는데, 낙형을 하자 이와 같이 공초하였습니다. 죽음에 이르러 어지럽게 한 말들은 비록 반드시 다 사실일 수는 없으나 말들이 극히 흉칙하니, 말이 미친 배흥립은 나문해야 하겠습니다. 이른바 박진남(朴震南)의 매부(妹夫) 전라도사는 윤수겸(尹守謙)인 듯합니다. 지금 무슨 일로 서울에 올라와 있는 중이니, 이도 잡아다 문초하면 어떻겠습니까. 김준계(金遵階)·이순신(李純信)·성윤문(成允文)·한룡(韓龍) 등은 모두 이 사람의 공초에서 나왔는데 단서가 이미 드러났다고 할 만합니다. 성윤문·한룡은 형벌로 심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남쪽 관왕묘(關王廟)에서 김준계와 이순신이 모이어 의논했다는 말은 대겸이 종이종 등에게 들었다고 하였는데 전일 종이종 등의 공초는 하대겸의 공초와 대부분 서로 같지 않으니, 종이종 등을 다시금 한 곳에서 대질한 뒤 처치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대겸은 임해(臨海)와 한 마음이 되었으니, 여러 일에 대해 단연코 모를 리 없을 것인데, 끝까지 캐물은 뒤에야 비로소 단서를 내놓았다. 그러나 자상하게 공초를 살펴보면 말마다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고 하고, 저는 같이 참여하지 않은 것처럼 하였다. 흉악한 속임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실로 죽음에 이르러 난잡하게 한 말들이 아니다. 매번 면질만 시켜 옥사의 체모를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이순신·김준계 등은 잠시 면질을 시키지 말고 대겸의 공초로 다시금 추문(推問)하되, 그의 말에 관련된 사람들은 아울러 즉시 잡아다 국문하라. 김천우(金天遇)·환어사(喚御史) 등은 서울에서는 포도청이 주동이 되고 각 지방에서는 도사를 각도 관찰사에게 보내어 그들과 함께 상의하여 비밀리 수소문하여 기어이 잡도록 하라. 대개 도망다니는 죄인 환어사·윤금이·말질치 등을 지금까지 잡지 못하니 나라에 기강이 없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 만하다. 다시 더욱 신칙하라. 성윤문의 앞뒤 사연은 별로 다름이 없으니, 잠시 형장을 멈추어 그대로 가둬두고 대겸은 별도로 다른 곳에 두어 여러 도적들과 섞여 있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이 밖에 문신과 무신들로서 드나들며 모의한 자가 없지 않을 것이니, 다시금 더 자상하게 하가(河哥) 도적놈을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광해군중초본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004028_003
Rec-0061 광해군일기중초본_54권_1612_0601_02 16120601 (傳于禮曹曰: "東南關王廟摘奸, 闕直人拿推。 且擇定守直武士, 滿三十朔, 遷轉六品, 以爲激勸, 而有毁汚處, 使守直官報該曹處置。 且焚香禮則行之矣, 自先朝別無遣官行祭之例乎?" 又傳曰: "關王廟不設則已, 天朝大官, 旣爲創建, 在我之道, 似不必至於慢神。 其壁書處、壞汚處, 竝令修治, 物像折破處, 亦令修葺, 使之嚴守。" 回啓曰: "關廟祭禮則依纛所例, 每年春秋驚蟄、霜降日, 遣官設行矣。 守直官計朔遷轉事, 已有事目, 令該曹申明擧行, 雨漏頹毁處、壁書汚壞處、物像折破處, 竝令該司速爲修治, 守直軍士, 令兵曹依事目定送, 守直官員, 不離看護, 如有雜人闌入者, 這這報本曹治罪事, 捧承傳施行何如?" 傳曰: "允。 今後自該曹時時擲奸, 現捉者從重科罪。") 예조에 전교하기를, "동·남관왕묘(東南關王廟)를 적간(摘奸)하여 궐직(闕直)한 사람은 잡아다 추고하라. 또 선정된 수직 무사로서 30삭(朔)이 된 자는 6품으로 승진시켜 격려하도록 하고, 훼손되고 오염된 곳이 있거든 수직관으로 하여금 해조에 보고하여 조처하게 하라. 그리고 분향례는 행할 것이지만, 선조(先朝)에서 특별히 관원을 보내 제사하던 전례는 없는가?" 하고 또 전교하기를, "관왕묘를 설치하지 않았으면 모르겠지만 천조의 대관이 이미 창건하였으니, 우리로서는 반드시 그 신(神)을 모독하는 데까지 이를 것은 없을 듯하다. 낙서된 벽과 파괴되고 오염된 곳은 모두 수리하고, 물상(物像)이 파괴된 곳 또한 수리하게 하고서 엄히 수호하도록 하라." 하니 회계하기를, "관왕묘의 제례는 둑소(纛所)의 예에 의하여 매년 봄 가을 경칩일(驚蟄日)과 상강일(霜降日)에 관원을 보내 거행합니다. 수직관을 달수를 따져 승진시키는 일은 이미 사목(事目)이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거듭 밝혀서 거행하게 하고, 빗물이 새고 무너진 곳, 낙서되고 오염된 곳, 물상이 파괴된 곳은 모두 해사로 하여금 속히 수리하게 하고, 수직 군사는 병조로 하여금 사목에 의해 선정하여 보내게 하고, 수직 관원은 이탈하지 말고 수호하여 만약 잡인이 문란하게 출입할 경우 하나하나 본조에 보고하여 치죄할 일로 전교를 받들어 시행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지금부터는 해조가 때때로 적간하여 잡히는 자는 무거운 쪽으로 죄를 매기라." 하였다. 광해군중초본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406001_002
Rec-0062 광해군일기중초본_57권_1612_0903_15 16120903 李德馨啓曰: "黃指揮昨日南下時, 歷拜於關王廟。 臣家在其傍, 往見而問之, 則以爲: ‘浙江邊將, 張皇倭情, 咨報於按院, 使鎭江游擊, 遣人探聽。 而游擊適不在鎭, 故中軍劉一瓛, 發送渠家丁王委官而來。 俺今往釜山看審, 還路當由全羅, 然後可以無倭戶等事, 辨明於楊都爺及按院’云, 其歸也必遲矣。" 王曰: "新按院何人爲之耶?" 李德馨啓曰: "姓名未及問之矣。" 王曰: "黃指揮, 中朝何官耶?" 李德馨啓曰: "指揮無實官, 爲軍職, 若我朝司正、司果之類也。" 王曰: "在何地居住耶?" 李德馨啓曰: "本浙江人也。 初隨宋經略出來, 而與楊經理最切, 故經理常置諸幕下矣。 及其撤回, 留住北京時, 訪經理於河南, 蓋以意氣相許者也。 此人乃永樂間太學士黃淮之後, 亦是閥閱, 故搢紳間多有知之者矣。" 이덕형이 아뢰기를, "황응양 지휘가 어제 내려갈 때 관왕묘(關王廟)에 일일이 배례(拜禮)하였는데, 신의 집이 그 근방에 있어서 가서 만나보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절강(浙江)의 변장이 왜정(倭情)을 장황하게 떠벌리면서 안원(按院)에 자문을 보내어 보고하였는데, 진강(鎭江)의 유격(遊擊)으로 하여금 사람을 보내어 탐지하게 하였다. 그런데 유격이 마침 진에 없었으므로 중군(中軍) 유일헌(劉一瓛)이 그의 가정(家丁)인 왕 위관(王委官)을 보내왔다. 나는 지금 부산(釜山)으로 내려가 살펴볼 것인데, 돌아오는 길에는 전라도를 경유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왜호(倭戶)가 없다는 등의 일을 양 도야(楊都爺)와 안원(按院)에게 분명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가 돌아오는 것이 반드시 더딜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새 안원(按院)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성명은 미처 물어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황 지휘는 중국 조정에서 무슨 관직에 있는가?"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지휘는 실관(實官)이 없는 군직(軍職)으로, 우리 나라의 사정(司正)이나 사과(司果)와 같은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어느 곳에서 살고 있는가?"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본디 절강 사람입니다. 당초에는 송 경략(宋經略)을 따라 나왔었는데, 양 경리(楊經理)와 아주 절친한 까닭에 경리가 항상 막하(幕下)에다 두었습니다. 그가 철수해 돌아가 북경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남(河南)으로 양 경리를 방문하였으니, 이는 대개 의기가 서로 통한 자인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바로 영락(永樂) 연간의 태학사(太學士)인 황회(黃淮)의 후손으로 또한 벌족(閥族)이므로 관원들 중에 그를 아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하였다. 광해군중초본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409003_015
Rec-0063 광해군일기중초본_75권_1614_0219_02 16140219 傳曰: "關王廟圖形, 若有於該司, 入之, 若無則圖畫以入。" 전교하였다. "관왕묘(關王廟)의 도형이 만약 해당 관사에 있으면 들여보내도록 하라." 광해군중초본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602019_002
Rec-0064 광해군일기중초본_79권_1614_0612_04 16140612 以備忘記, 傳于李好義曰: "南別宮、太平館、關王廟、宣武祠、楊御史碑閣, 唐官出來時, 例必修理, 回還則破陋無形。 今後令該司申飭嚴守。 且關王廟常時堅鎖, 使外人不得出入, 只焚香時開門, 而所守人門外造家, 入接堅守, 嚴禁雜人, 則似無慢褻神明之弊。 令該曹參酌議處。" 비망기로 이호의(李好義)에게 전교하였다. "남별궁(南別宮), 태평관(太平館), 관왕묘(關王廟), 선무사(宣武祠), 양 어사 비각(楊御史碑閣)은 중국의 관원이 나올 때에는 으레 반드시 수리하는데, 돌아가고 나면 깨지고 더러워져 형편없이 된다. 지금 이후로는 해사로 하여금 신칙하여 엄히 지키도록 하라. 그리고 또 관왕묘는 평소에는 굳게 자물쇠를 채워서 바깥사람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분향할 때에만 문을 열되, 지키는 사람이 문밖에다 집을 짓고 살면서 굳게 지켜 잡인을 엄히 금한다면 신명에게 무람없이 하는 폐단이 없을 듯하다. 해조로 하여금 참작해서 의논해 처리하게 하라." 광해군중초본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606012_004
Rec-0065 광해군일기중초본_87권_1615_0225_01 16150225 乙卯二月二十五日壬寅知成均館事李爾瞻啓曰: "書院事議于大臣, 則領議政奇自獻以爲: ‘臣頃見武溪書院役需(出)扶助回文, 且嘉多士尊師之美意, 不復致念於他, 伏覩聖敎, 始覺其果然, 而亦不敢知其何如也。 或以爲: 「都城至近地, 如僧人菴子, 亦或有之, 此亦何妨?」 云云, 亦不敢知其何如也。’ 判府事沈喜壽、右議政鄭昌衍以爲: ‘臣頃見搢紳間所出回文, 乃武溪書院役需(出)扶助事也。 事係多士尊師之擧, 且嘉其意, 未及(思)他念, 伏覩聖敎, 始覺其果然, 而臣等亦不敢知其何如也。 伏惟上裁。’ 大臣之意如此, 而殊無一定之言。 多士尊賢、衛道之誠, 將因此而中廢耶? 先正臣曺植道德, 輕重淺深, 非後學所可窺測, 而扶綱常、闡義理, 雖至于今日, 而一脈正氣, 尙不泯滅者, 皆此人之力也。 其爲士子者, 景仰遺縱 蹤, 營建祠宇, 欲爲藏修依歸之地者, 蓋出於此也。 若以都城近地, 建立書院, 謂無前例云, 則其 甚不然。 我國之人尊尙儒先, 反不如緇徒雜類, 崇信其業, 淨土、香林、僧伽、道成菴等刹, 連甍接逕於城外十里之內, 曾無一人封章抗疏, 毁寺焚佛, 而獨於儒賢俎豆香火之所, 量其地步遠近, 而防塞之耶? 非但此也, 關王兩廟, 逼在城底東南, 安逸、慈壽、仁壽, 亦皆奉佛之宇而布列都城內外, 豈可以地之遠近, 停此斯文之盛擧也? 所謂武溪, 在北城外造紙署上, 而所卜之地則乃僧伽寺近處, 去京城殆過七八里, 而恐或猶以地近爲言, 今將改卜於十里之外矣。 物力則依道峯書院舊例, 通京外出回文, 搢紳、韋布各隨其力, 以助工需, 又豈有貽弊於公家, 有害於時屈乎? 設令國儲有裕, 則如此營建, 似可勸助, 而多士自辦所爲, 又從而止之耶? 況自上垂問, 固出於徵懲前例, 慮財力之盛意, 則不宜所答, 失其所問, 以孤多士之顒望, 而疵尙儒之聖治也。 臣等區區所見, 不得不啓, 亟下聖兪, 以慰群情何如?" 答曰: "建立處所, 更爲定奪, 後勿爲例。" 【曺南冥 植以(鄭)仁弘 (爲弟子之故)師, 爲兇徒所宗 尊, 至(於)建(立)書院, (死者有知, 則魂亦慙憤而走矣。 自獻之議以爲: "都城至近地, 如僧人菴子, 亦或有之。" 云者, 此甚辱之之言, 而爾瞻不覺, 反擧淨土、僧伽、安逸、慈壽等處以實之, 亦見其小狡而大暗也。) 於京城至近之地, 以爲廣聚徒黨之地, 王疑其有弊端, 命議大臣處之, 故有此啓。】 지성균관사 이이첨이 아뢰기를, "서원(書院)의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니, 영의정 기자헌은 의논드리기를 ‘신이 앞서 무계 서원(武溪書院) 건립 비용의 부조회문(扶助回文)을 보고 스승을 존모하는 여러 선비들의 아름다운 뜻을 가상히 여겨 다시 달리 생각한 일이 없었는데, 삼가 성상의 하교를 보고 비로소 과연 그러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도성과 가까운 곳에 중들의 암자도 있는데 이 또한 무엇이 방해되겠는가.」 라고 말하나 이것 역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판부사 심희수와 우의정 정창연은 의논드리기를 ‘신이 앞서 사대부들에게서 나온 회문을 보니 이는 곧 무계 서원 건립 비용의 부조를 내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많은 선비들이 스승을 존모하는 일에 관계되고 또 그 뜻을 가상히 여겼기 때문에 미처 달리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삼가 성상의 하교를 보고서야 비로소 과연 그러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신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오직 성상의 재량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고 하였습니다. 대신의 뜻이 이와 같을 뿐, 자못 일정한 말이 없었습니다. 어진이를 높이고 도를 지키려는 많은 선비들의 정성이 장차 이로 인해 중지되어야 하겠습니까. 선정신(先正臣) 조식(曺植)의 도덕에 대해 그 경중과 천심을 후학들이 헤아릴 바는 아닙니다마는 강상(綱常)을 부지하고 의리(義理)를 천명하여 비록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일맥정기(一脈正氣)가 오히려 마멸되지 않은 것은 모두 이분의 힘입니다. 선비들이 이분이 남긴 자취를 추앙해서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조용히 수양하며 귀의할 곳을 삼고자 하는 것은 대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 도성 근처에 서원을 건립하는 것을 전례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매우 불가한 일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유선(儒先) 숭배하는 것은 도리어 승려들의 잡배가 그의 술업을 숭신하는 것만도 못하여, 정토(淨土)·향림(香林)·승가(僧伽)·도성암(道成菴) 등의 사찰은 도성밖 10리 이내에 연접하였으되 일찍이 한 사람도 이에 항거하는 글을 올려 그 사찰을 헐거나 부처를 불사르는 일이 없었는데, 유독 유현(儒賢)의 향화를 받드는 곳에 대해서만 그 거리의 원근을 따져서 저지하려 든단 말입니까. 비단 이것뿐만 아닙니다. 두 관왕묘(關王廟)는 도성 밑 동쪽과 남쪽에 인접해 있고, 안일(安逸)·자수(慈壽)·인수(仁壽)도 모두 부처를 받드는 사찰인데도 도성 내외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어찌 지역의 원근으로 사문(斯文)의 성대한 거사를 멈출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무계는 북성(北城) 밖 조지서(造紙署) 위에 있는데, 지정한 곳은 승가사(僧伽寺) 근처로서 도성과의 거리가 자못 7, 8리가 넘습니다만 혹시라도 가깝다고 말할까 염려되어 지금 10리 밖으로 개정하려 합니다. 물력(物力)에 대해서는 도봉 서원(道峯書院)의 전례에 의하여 경외(京外)에 회문(回文)을 내어 사대부와 선비들이 각각 능력에 따라 공역의 비용을 돕게 한다면 어찌 공가(公家)에 폐를 끼칠 일이 되겠으며 어려움이 많은 시기에 해를 끼칠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국가의 저축에 여유가 있다면 이와 같은 건립에는 권장하여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여러 선비들이 스스로 판출하여 하는 일을 또한 쫓아가 말린단 말입니까. 더구나 성상께서 하문하신 것이 실로 전례를 경계하고 재력을 염려하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대답하신 말씀이 하문하신 것과 달라 많은 선비들의 큰 기대를 저버리고 유도를 숭상하는 성치(聖治)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신들의 구구한 소견을 아뢰지 않을 수 없으니, 속히 너그러운 허락을 내려 중외를 위로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건립할 곳을 다시 정하도록 하고 뒤에는 준례로 삼지 말게 하라." 하였다. 【조식(曺植)이 정인홍으로 〈제자를 삼았기 때문에〉 그 스승이 흉도(兇徒)의 추존하는 바가 되어 서원을 건립하기에까지 이르렀는데, 〈죽은 자가 지각이 있다면 그 혼백 또한 수치스럽고 분개하여 도망칠 것이다. 자헌의 의논에 "도성과 매우 가까운 곳에 중들의 암자 같은 것도 있다."고 한 말은 몹시 모욕하는 말인데도 이첨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정토·승가·안일·자수 등의 사찰을 들어 증거로 삼으니, 또한 그 약간 영리하고 크게 혼암한 것을 볼 수 있겠다.〉 도성과 매우 가까운 곳에 무리들을 널리 취합하는 곳을 만들려 하자, 왕이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이 때문에 이 계사가 있었다. 】 광해군중초본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702025_001
Rec-0066 광해군일기중초본_134권_1618_1104_05 16181104 營建都監啓: "弘政、光政兩殿所蓋靑瓦及雜像, 有剝落處。 靑黃瓦燔造之法, 經亂之後, 失其眞方, 頃日惟一朴龍守掇拾兒時聞見而製造, 猶不得其法。 自龍守死後, 新學之人, 尤不諳熟, 徒費許多材料, 僅得成形。 及此寒沍之日, 雨雪沾濕, 則乃有脫落靑色之患。 若此不已, 深恐終至於盡變爲赤而無靑色矣, 深可憂慮。 此雖非郞廳、監造官等, 不愼監造之罪, 而係是生事於殿閣蓋覆, 體面重大。 請燔瓦所郞廳、監役, 竝爲推考, 靑瓦邊手 編首匠人, 囚禁治罪爲當。" 傳曰: "迎恩門、關王廟皆以靑瓦, 燔造蓋覆, 別無脫落變赤之事。 今此新宮鷲頭、龍頭、雜像, 盡爲脫落變赤, 極爲可怪。 待明春, 改造蓋覆, 而今姑勿爲推考、囚禁。" 영건 도감이 아뢰기를, "홍정전(弘政殿)과 광정전(光政殿)의 청와(靑瓦)와 잡상(雜象) 가운데 벗겨지고 떨어져 나간 곳이 있습니다. 청황와(靑黃瓦)를 굽는 법은 난리를 겪은 뒤 그 진방(眞方)을 잃어 버렸는데, 지난날 유일하게 박용수(朴龍守)가 어렸을 때 보고 들은 것을 주워 모아 만들었지만 그래도 원래 방법을 터득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용수가 죽은 뒤로 새로 배운 사람들은 더욱 그 방법에 익숙하지 못해서 한갓 허다한 재료만을 허비하면서 겨우 모양만을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추위가 극심한 날을 당해 비와 눈마저 스며든다면 청색이 벗겨질 걱정이 있는데, 이와 같이 계속된다면 마침내는 모조리 변해서 적색이 되어버리고 청색은 없어지게 될 것이니, 매우 걱정입니다. 이것이 비록 낭청과 감조관 등이 감조를 삼가지 않은 죄는 아닙니다만, 전각의 지붕에 일이 생긴 데에 관계되니 체면이 중대합니다. 번와소(燔瓦所)의 낭청과 감역관을 아울러 추고하고, 청와를 굽는 편수 장인(編首匠人)을 가두어 죄를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영은문(迎恩門)과 관왕묘(關王廟)는 모두 청와를 구워 만들어 지붕을 덮었지만 벗겨져 적색으로 변한 일이 별로 없는데, 지금 이 새로 지은 궁궐의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象)은 모두 벗겨져 적색으로 변했으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 내년 봄을 기다려 다시 만들어 덮도록 하고 지금은 우선 추고하거나 가두지 말라." 하였다. 광해군중초본 http://sillok.history.go.kr/id/koa_11011004_005
Rec-0067 광해군일기중초본_134권_1618_1118_03 16181118 傳曰: "劉都督差官上來, 東關王廟及楊經歷略碑閣, 急急擲奸, 修理以待。 而凡接待等事, 着令該曹, 預爲議處。" 전교하였다. "유 도독(劉都督)의 차관이 올라오니, 동쪽의 관왕묘(關王廟)와 양 경략(楊經略)의 비각을 서둘러 점검하고 수리하여 기다리도록 하라. 그리고 접대하는 등의 일을 해조로 하여금 미리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광해군중초본 http://sillok.history.go.kr/id/koa_11011018_003
Rec-0068 광해군일기정초본_3권_1608_0428_02 16080428 推鞫廳啓曰: "孝一烙刑不服, 病勢極重, 恐難遽爲加刑。 河大謙屢被重刑, 而曾無一言, 及遭烙刑, 如是供招。 臨死胡亂之說, 雖未必盡實, 而所言極爲兇慘, 辭連裵興立, 拿問宜當。 所謂朴震男妹男全羅都事, 則似是尹守謙。 今方因事上京, 亦爲拿問何如? 金遵階、李純信、成允文、韓龍等, 皆出於此人之招, 可謂端緖之已現。 成允文、韓龍, 似當刑訊。 南關王廟, 金遵階、李純信會議之說, 則大謙聞之於種伊從等云, 種伊從等前日之招, 與河大謙之招, 多不相同, 種伊從等, 更爲一處憑閱後, 處置爲當。 敢啓。" 答曰: "依啓。 河大謙與臨海, 作爲一心, 凡事萬無不知之理, 到今窮問, 然後始發其端。 而詳觀其供辭, 則每言必以聞於他人爲辭, 渠則有若不相與知者然。 其兇詐莫甚, 實非臨死亂言也。 不宜每每面質, 以傷獄體。 李純信、金遵階等, 姑除面質, 以大謙所供, 更爲推問, 其辭連之人, 竝卽拿鞫。 金天遇、喚御史等, 京中則捕盜廳, 外方則分遣都事于各道監司處, 使之同議, 密爲聞見, 期於必捕。 大槪逃躱罪人喚御史、尹金伊、末叱致等, 至今不捕, 國無紀綱, 於此可知。 更加申飭。 成允文前後辭連, 別無異同, 姑爲除刑仍囚, 大謙別置他處, 勿使諸賊混處可矣。 且此外文臣武將, 不無出入謀議者, 更加詳盡, 鉤問于河賊以啓。" 추국청이 아뢰기를, "효일은 낙형을 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는데, 병세가 극히 중해 서둘러 형장을 더하기에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하대겸(河大謙)은 여러번 중한 형벌을 하여도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었는데, 낙형을 하자 이와 같이 공초하였습니다. 죽음에 이르러 어지럽게 한 말들은 비록 반드시 다 사실일 수는 없으나 말들이 극히 흉칙하니, 말이 미친 배흥립은 나문해야 하겠습니다. 이른바 박진남(朴震南)의 매부(妹夫) 전라도사는 윤수겸(尹守謙)인 듯합니다. 지금 무슨 일로 서울에 올라와 있는 중이니, 이도 잡아다 문초하면 어떻겠습니까. 김준계(金遵階)·이순신(李純信)·성윤문(成允文)·한룡(韓龍) 등은 모두 이 사람의 공초에서 나왔는데 단서가 이미 드러났다고 할 만합니다. 성윤문·한룡은 형벌로 심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남쪽 관왕묘(關王廟)에서 김준계와 이순신이 모이어 의논했다는 말은 대겸이 종이종 등에게 들었다고 하였는데 전일 종이종 등의 공초는 하대겸의 공초와 대부분 서로 같지 않으니, 종이종 등을 다시금 한 곳에서 대질한 뒤 처치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대겸은 임해(臨海)와 한 마음이 되었으니, 여러 일에 대해 단연코 모를 리 없을 것인데, 끝까지 캐물은 뒤에야 비로소 단서를 내놓았다. 그러나 자상하게 공초를 살펴보면 말마다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고 하고, 저는 같이 참여하지 않은 것처럼 하였다. 흉악한 속임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실로 죽음에 이르러 난잡하게 한 말들이 아니다. 매번 면질만 시켜 옥사의 체모를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이순신·김준계 등은 잠시 면질을 시키지 말고 대겸의 공초로 다시금 추문(推問)하되, 그의 말에 관련된 사람들은 아울러 즉시 잡아다 국문하라. 김천우(金天遇)·환어사(喚御史) 등은 서울에서는 포도청이 주동이 되고 각 지방에서는 도사를 각도 관찰사에게 보내어 그들과 함께 상의하여 비밀리 수소문하여 기어이 잡도록 하라. 대개 도망다니는 죄인 환어사·윤금이·말질치 등을 지금까지 잡지 못하니 나라에 기강이 없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 만하다. 다시 더욱 신칙하라. 성윤문의 앞뒤 사연은 별로 다름이 없으니, 잠시 형장을 멈추어 그대로 가둬두고 대겸은 별도로 다른 곳에 두어 여러 도적들과 섞여 있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이 밖에 문신과 무신들로서 드나들며 모의한 자가 없지 않을 것이니, 다시금 더 자상하게 하가(河哥) 도적놈을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광해군정초본 http://sillok.history.go.kr/id/kob_10004028_002
Rec-0069 광해군일기정초본_57권_1612_0903_14 16120903 李德馨啓曰: "黃指揮昨日南下時, 歷拜於關王廟。 臣家在其傍, 往見而問之, 則以爲: ‘浙江邊將, 張皇倭情, 咨報於按院, 使鎭江游擊, 遣人探聽。 而淤擊適不在鎭, 故中軍劉一瓛, 發送渠家丁王委官而來。 俺今往釜山看審, 還路當由全羅, 然後可以無倭戶等事, 辨明於楊都爺及按院。’ 云, 其歸也必遲矣。" 王曰: "新按院何人爲之耶?" 李德馨啓曰: "姓名未及問之矣。" 王曰: "黃指揮, 中朝何官耶?" 李德馨啓曰: "指揮無實官, 爲軍職, 若我朝司正、司果之類也。" 王曰: "在何地居住耶?" 李德馨啓曰: "本浙江人也。 初隨宋經略出來, 而與楊經理最切, 故經理常置諸幕下矣。 及其撤回, 留住北京時, 訪經理於河南, 蓋以意氣相許者也。 此人乃永樂間太學士黃淮之後, 亦是閥閱, 故搢紳間多有知之者矣。" 이덕형이 아뢰기를, "황응양 지휘가 어제 내려갈 때 관왕묘(關王廟)에 일일이 배례(拜禮)하였는데, 신의 집이 그 근방에 있어서 가서 만나보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절강(浙江)의 변장이 왜정(倭情)을 장황하게 떠벌리면서 안원(按院)에 자문을 보내어 보고하였는데, 진강(鎭江)의 유격(遊擊)으로 하여금 사람을 보내어 탐지하게 하였다. 그런데 유격이 마침 에 없었으므로 중군(中軍) 유일헌(劉一瓛)이 그의 가정(家丁)인 왕 위관(王委官)을 보내왔다. 나는 지금 부산(釜山)으로 내려가 살펴볼 것인데, 돌아오는 길에는 전라도를 경유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왜호(倭戶)가 없다는 등의 일을 양 도야(楊都爺)와 안원(按院)에게 분명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가 돌아오는 것이 반드시 더딜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새 안원(按院)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성명은 미처 물어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황 지휘는 중국 조정에서 무슨 관직에 있는가?"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지휘는 실관(實官)이 없는 군직(軍職)으로, 우리 나라의 사정(司正)이나 사과(司果)와 같은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어느 곳에서 살고 있는가?"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본디 절강 사람입니다. 당초에는 송 경략(宋經略)을 따라 나왔었는데, 양 경리(楊經理)와 아주 절친한 까닭에 경리가 항상 막하(幕下)에다 두었습니다. 그가 철수해 돌아가 북경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남(河南)으로 양 경리를 방문하였으니, 이는 대개 의기가 서로 통한 자인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바로 영락(永樂) 연간의 태학사(太學士)인 황회(黃淮)의 후손으로 또한 벌족(閥族)이므로 관원들 중에 그를 아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하였다. 광해군정초본 http://sillok.history.go.kr/id/kob_10409003_014
Rec-0070 광해군일기정초본_75권_1614_0219_02 16140219 傳曰: "關王廟圖形, 若有於該司, 入之, 若無, 圖畫以入。" 전교하였다. "관왕묘(關王廟)의 도형이 만약 해당 관사에 있으면 들여보내도록 하라." 광해군정초본 http://sillok.history.go.kr/id/kob_10602019_002
Rec-0071 광해군일기정초본_87권_1615_0225_01 16150225 壬寅/知成均館事李爾瞻啓曰: "書院事議于大臣則領議政奇自獻以爲: ‘臣頃見武溪書院役需扶助回文, 且嘉多士尊師之美意, 不復致念於他, 伏覩聖敎, 始覺其果然, 而亦不敢知其何如也。 或以爲: 「都城至近之地, 如僧人菴子, 亦或有之, 此亦何妨?」 云云, 亦不敢知其何如也。’ 判府事沈喜壽、右議政鄭昌衍以爲: ‘臣頃見搢紳間所出回文, 乃武溪書院役需扶助事也。 事係多士尊師之擧, 且嘉其意, 未及他念, 伏覩聖敎, 始覺其果然。 而臣等亦不敢知其何如也。 伏惟上裁。’ 大臣之意如此, 而殊無一定之言。 多士尊賢衛道之誠, 將因此而中廢耶? 先正臣曺植道德, 輕重淺深, 非後學所可窺測, 而扶綱常、闡義理, 雖至于今日, 而一脈正氣, 尙不泯滅者, 皆此人之力也。 其爲士子者, 景仰遺蹤, 營建祠宇, 欲爲藏修依歸之地者, 蓋出於此也。 若以都城近地, 建立書院, 謂無前例云, 則甚不然。 我國之人尊尙儒先, 反不如緇徒雜類, 崇信其業, 淨土、香林、僧伽、道成菴等刹, 連甍接逕於城外十里之內, 曾無一人封章抗疏, 毁寺焚佛, 而獨於儒賢俎豆香火之所, 量其地步遠近, 而防塞之耶? 非但此也, 關王兩廟, 逼在城底東南, 安逸、慈壽、仁壽, 亦皆奉佛之宇, 而布列都城內外。 豈可以地之遠近, 停此斯文之盛擧也? 所謂武溪, 在北城外造紙署上, 而所卜之地, 則乃僧伽寺近處, 去京城殆過七八里, 而恐或猶以地近爲言, 今將改卜於十里之外矣。 物力則依道峰書院舊例, 通京外出回文, 搢紳韋布各隨其力, 以助工需, 又豈有貽弊於公家; 有害於時屈乎? 設令國儲有裕, 則如此營建, 似可勸助, 而多士自辦所爲, 又從而止之耶? 況自上垂問, 固出於懲前例, 慮財力之盛意, 則不宜所答, 失其所問, 以孤多士之顒望, 而疵尙儒之聖治也。 臣等區區所見, 不得不啓, 亟下聖兪, 以慰群情何如?" 答曰: "建立處所, 更爲定奪, 後勿爲例。" 【曺植以仁弘師, 爲兇徒所尊, 至建書院於京城至近之地, 以爲廣聚徒黨之地, 王疑其有弊端, 命議大臣處之, 故有此啓。】 지성균관사 이이첨이 아뢰기를, "서원(書院)의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니, 영의정 기자헌은 의논드리기를 ‘신이 앞서 무계 서원(武溪書院) 건립 비용의 부조회문(扶助回文)을 보고 스승을 존모하는 여러 선비들의 아름다운 뜻을 가상히 여겨 다시 달리 생각한 일이 없었는데, 삼가 성상의 하교를 보고 비로소 과연 그러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도성과 가까운 곳에 중들의 암자도 있는데 이 또한 무엇이 방해되겠는가.」 라고 말하나 이것 역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판부사 심희수와 우의정 정창연은 의논드리기를 ‘신이 앞서 사대부들에게서 나온 회문을 보니 이는 곧 무계 서원 건립 비용의 부조를 내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많은 선비들이 스승을 존모하는 일에 관계되고 또 그 뜻을 가상히 여겼기 때문에 미처 달리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삼가 성상의 하교를 보고서야 비로소 과연 그러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신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오직 성상의 재량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고 하였습니다. 대신의 뜻이 이와 같을 뿐, 자못 일정한 말이 없었습니다. 어진이를 높이고 도를 지키려는 많은 선비들의 정성이 장차 이로 인해 중지되어야 하겠습니까. 선정신(先正臣) 조식(曺植)의 도덕에 대해 그 경중과 천심을 후학들이 헤아릴 바는 아닙니다마는 강상(綱常)을 부지하고 의리(義理)를 천명하여 비록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일맥정기(一脈正氣)가 오히려 마멸되지 않은 것은 모두 이분의 힘입니다. 선비들이 이분이 남긴 자취를 추앙해서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조용히 수양하며 귀의할 곳을 삼고자 하는 것은 대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 도성 근처에 서원을 건립하는 것을 전례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매우 불가한 일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유선(儒先) 숭배하는 것은 도리어 승려들의 잡배가 그의 술업을 숭신하는 것만도 못하여, 정토(淨土)·향림(香林)·승가(僧伽)·도성암(道成菴) 등의 사찰은 도성밖 10리 이내에 연접하였으되 일찍이 한 사람도 이에 항거하는 글을 올려 그 사찰을 헐거나 부처를 불사르는 일이 없었는데, 유독 유현(儒賢)의 향화를 받드는 곳에 대해서만 그 거리의 원근을 따져서 저지하려 든단 말입니까. 비단 이것뿐만 아닙니다. 두 관왕묘(關王廟)는 도성 밑 동쪽과 남쪽에 인접해 있고, 안일(安逸)·자수(慈壽)·인수(仁壽)도 모두 부처를 받드는 사찰인데도 도성 내외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어찌 지역의 원근으로 사문(斯文)의 성대한 거사를 멈출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무계는 북성(北城) 밖 조지서(造紙署) 에 있는데, 지정한 곳은 승가사(僧伽寺) 근처로서 도성과의 거리가 자못 7, 8리가 넘습니다만 혹시라도 가깝다고 말할까 염려되어 지금 10리 밖으로 개정하려 합니다. 물력(物力)에 대해서는 도봉 서원(道峯書院)의 전례에 의하여 경외(京外)에 회문(回文)을 내어 사대부와 선비들이 각각 능력에 따라 공역의 비용을 돕게 한다면 어찌 공가(公家)에 폐를 끼칠 일이 되겠으며 어려움이 많은 시기에 해를 끼칠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국가의 저축에 여유가 있다면 이와 같은 건립에는 권장하여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여러 선비들이 스스로 판출하여 하는 일을 또한 쫓아가 말린단 말입니까. 더구나 성상께서 하문하신 것이 실로 전례를 경계하고 재력을 염려하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대답하신 말씀이 하문하신 것과 달라 많은 선비들의 큰 기대를 저버리고 유도를 숭상하는 성치(聖治)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신들의 구구한 소견을 아뢰지 않을 수 없으니, 속히 너그러운 허락을 내려 중외를 위로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건립할 곳을 다시 정하도록 하고 뒤에는 준례로 삼지 말게 하라." 하였다. 【조식(曺植)이 정인홍에게 스승이 되어 흉도(兇徒)의 추존하는 바가 되어 서원을 건립하기에까지 이르렀는데, 도성과 매우 가까운 곳에 무리들을 널리 취합하는 곳을 만들려 하자, 왕이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이 때문에 이 계사가 있었다.】 광해군정초본 http://sillok.history.go.kr/id/kob_10702025_001
Rec-0072 광해군일기정초본_134권_1618_1104_04 16181104 營建都監啓: "弘政ㆍ光政兩殿所蓋靑瓦及雜像, 有剝落處。 靑黃瓦燔造之法, 經亂之後, 失其眞方, 頃日惟一朴龍守, 掇拾兒時聞見、而製造, 猶不得其法。 自龍守死後, 新學之人, 尤不諳熟, 徒費許多材料, 僅得成形。 及此寒沍之日, 雨雪沾濕, 則乃有脫落靑色之患, 若此不已, 深恐終至於盡變, 爲赤而無靑色矣, 深可憂慮。 此雖非郞廳ㆍ監造官等, 不愼監造之罪, 而係是生事於殿閣蓋覆, 體面重大。 請燔瓦所郞廳ㆍ監役, 竝爲推考, 靑瓦編首匠人, 囚禁治罪, 爲當。" 傳曰: "迎恩門ㆍ關王廟, 皆以靑瓦, 燔造蓋覆, 別無脫落變赤之事, 今此新宮鷲頭ㆍ龍頭ㆍ雜像, 盡爲脫落變赤, 極爲可怪。 待明春, 改造蓋覆, 而今姑勿爲推考囚禁。" 영건 도감이 아뢰기를, "홍정전(弘政殿)과 광정전(光政殿)의 청와(靑瓦)와 잡상(雜象) 가운데 벗겨지고 떨어져 나간 곳이 있습니다. 청황와(靑黃瓦)를 굽는 법은 난리를 겪은 뒤 그 진방(眞方)을 잃어 버렸는데, 지난날 유일하게 박용수(朴龍守)가 어렸을 때 보고 들은 것을 주워 모아 만들었지만 그래도 원래 방법을 터득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용수가 죽은 뒤로 새로 배운 사람들은 더욱 그 방법에 익숙하지 못해서 한갓 허다한 재료만을 허비하면서 겨우 모양만을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추위가 극심한 날을 당해 비와 눈마저 스며든다면 청색이 벗겨질 걱정이 있는데, 이와 같이 계속된다면 마침내는 모조리 변해서 적색이 되어버리고 청색은 없어지게 될 것이니, 매우 걱정입니다. 이것이 비록 낭청과 감조관 등이 감조를 삼가지 않은 죄는 아닙니다만, 전각의 지붕에 일이 생긴 데에 관계되니 체면이 중대합니다. 번와소(燔瓦所)의 낭청과 감역관을 아울러 추고하고, 청와를 굽는 편수 장인(編首匠人)을 가두어 죄를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영은문(迎恩門)과 관왕묘(關王廟)는 모두 청와를 구워 만들어 지붕을 덮었지만 벗겨져 적색으로 변한 일이 별로 없는데, 지금 이 새로 지은 궁궐의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象)은 모두 벗겨져 적색으로 변했으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 내년 봄을 기다려 다시 만들어 덮도록 하고 지금은 우선 추고하거나 가두지 말라." 하였다. 광해군정초본 http://sillok.history.go.kr/id/kob_11011004_004
Rec-0073 광해군일기정초본_134권_1618_1118_03 16181118 傳曰: "劉都督差官上來東關王廟及楊經畧碑閣急急摘奸, 修理以待。 而凡接待等事, 着令該曹, 預爲議處。" 전교하였다. "유 도독(劉都督)의 차관이 올라오니, 동쪽의 관왕묘(關王廟)와 양 경략(楊經略)의 비각을 서둘러 점검하고 수리하여 기다리도록 하라. 그리고 접대하는 등의 일을 해조로 하여금 미리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광해군정초본 http://sillok.history.go.kr/id/kob_11011018_003
Rec-0074 인조실록_4권_1624_0209_01 16240209 癸巳/平明, 上猶在舟中, 東陽尉 申翊聖奉慈殿, 追到上謁。 上命去胡床, 平坐引見。 初翊聖奉中殿, 行到關王廟前, 始知慈殿誤取楊花之路, 承中殿下敎, 追謁於蚕頭江上, 遂奉還大妃殿渡江, 御駕於沙上。 上先遣中使, 問安曰: "從官等誤爲引路, 以致顚倒, 不審, 聖候何如? 不勝憂慮。" 答曰: "予則平安。 但恐玉候有傷, 以是爲慮耳。" 上下舟, 問安于大妃殿及啓運宮。 평명(平明)에 상이 아직 배 안에 있었는데,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자전(慈殿)을 모시고 뒤쫓아 와서 뵈니, 상이 호상(胡床)을 치우라고 명하고 평좌(平坐)하여 인견하였다. 애초에 신익성이 중전(中殿)을 모시고 관왕묘(關王廟)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전이 양화의 길을 잘못 잡은 것을 알고서 중전의 하교를 받아 잠두(蠶頭) 강가에 뒤쫓아 가서 뵈고 드디어 대비전을 모시고 돌아와 강을 건너 모래 위에 가마를 내렸다. 상이 먼저 중사(中使)를 보내어 문안하기를, "수행하는 관원들이 길을 잘못 인도하여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성후(聖侯)가 어떠하신지 몰라 몹시 걱정스러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는 편안합니다마는 옥후(玉侯)에 손상이 있을 듯싶으니, 이 때문에 염려될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배에서 내려 대비전과 계운궁(啓運宮)에게 문안하였다. 인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2009_001
Rec-0075 인조실록_16권_1627_0702_06 16270702 上命給關王廟留置漢人等糧饌, 又賜酒肉、衣資。 상이 관왕묘(關王廟)에 머물러 있는 한인들에게 식량과 반찬을 주고, 또 술과 고기, 옷감을 주게 하였다. 인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507002_006
Rec-0076 인조실록_17권_1627_1001_03 16271001 備局啓曰: "城中守衛, 不可不嚴密。 令扈衛大將, 皆會於闕外門, 各率軍官直宿。 且東大門外, 當置一陣, 以爲城中聲勢, 令宋英望領御營軍, 結陣於東關王廟爲當。 自橫城至京城, 僅數日程。 以扈衛大將軍官等, 除出二三十名, 站站發送, 如傳語之例, 探得賊情, 使之馳報宜當。" 又啓曰: "申景禋、柳琳、李一元, 俱以討捕使發去, 道內守令, 皆令節制, 如有違誤軍機者, 一依軍律從事。" 又啓曰: "崔晛踈緩之報, 只再次入來。 其處事無狀, 措語無形, 不忍見聞。 申景禋今已下去, 新監司亦將辭朝, 如有馳啓之事, 不可無擺撥。 請下諭于京畿、江原等道觀察使, 使之立撥飛傳。" 上皆從之。 비국이 아뢰기를, "성 안의 수위(守衛)를 엄밀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호위 대장(扈衛大將)으로 하여금 모두 궐문(闕門) 밖에 모이게 하여 각기 군관(軍官)을 거느리고 직숙(直宿)하게 해야 합니다. 또 동대문(東大門)밖에다 1진(陣)을 두어 성 안의 성세(聲勢)로 삼아야 하니, 송영망(宋英望)으로 하여금 어영군을 거느리고 동 관왕묘(東關王廟)에 진을 치게 해야 합니다. 횡성에서 서울까지는 겨우 며칠간의 거리이니, 호위 대장의 군관 가운데서 20,30명을 차출하여 참(站)마다 파견해서 상황을 전달하도록 하는 전례에 의하여 적정(賊情)을 탐지하고 치보(馳報)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경인·유림(柳琳)·이일원(李一元)이 모두 토포사로서 출발하였으니, 도내의 수령(守令)을 모두 지휘하게 하고 만일 군기를 그르친 자가 있으면 모두 군율대로 처리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최현은 엉성한 보고를 단지 두 번 들여보냈으니, 그 일 처리가 형편없는 데다 말투가 꼴이 아니어서 차마 보고 들을 수가 없습니다. 신경인이 이미 내려갔고, 새 감사도 곧 떠나려 하는데, 만일 치계할 일이 있으면 파발(擺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기와 강원 등의 관찰사에게 하유하여 발마(撥馬)를 세워 신속하게 전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인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510001_003
Rec-0077 인조실록_27권_1632_1023_02 16321023 大臣二品以上啓曰: "自上違豫已久, 中外遑遑。 今聞宮中有詛呪之變, 凶穢之物, 狼藉云。 此莫大之變。 不可令內宦一二人治之, 請命出付外庭, 嚴鞫得情。" 臺諫亦合司論啓累日, 乃命設鞫廳於禁府以鞫之。 因下敎曰: "宮人玉只等三四人, 每夜半閉戶, 潛往僻處, 設祭祈禱。 慈殿初喪, 有以此言之者, 故本殿尙宮朱淑、白淑等, 亦不敢全諱, 稱以爲本房設祭。 近聞埋置凶物之後, 乃知祈祝之祭, 亦爲詛呪而設也。 若爲本房祈禱, 則似無鎖門諱人之理, 其夜祭, 必有曲折。 慈殿昇遐第三日, 末叱香之無故飮毒而死, 亦不無其由, 竝加鉤問。" 【本房, 指延興夫人也。】 玉只供稱曰: "自宣祖大王朝, 選入宮中, 癸丑以後, 與朱尙宮同侍慈殿, 得至癸亥, 復見天日矣。 癸丑以詛呪之事, 內人多死, 故詛呪之語, 人皆掩耳而不忍聽。 況今兩殿和合, 豈懷如此之心乎? 本房多病, 故設祭祈禱, 凡祈禱之法, 例設於靜處。 若謀詛呪, 則朱、白兩人, 旣與同處, 亦當知之。 此豈吾與末叱香、歸希等三人所爲者乎? 且末叱香之死, 聞以病死。 若與同謀, 則吾當同死。 豈令末叱香獨死乎? 設祭之時, 寢殿之人, 無不知之, 此非隱諱之事也。 且慈殿爲老親祈壽, 每曰: ‘吾生之日, 欲盡誠孝而已。’ 旣聞此敎, 何敢厭憚於祈祝之事乎?" 訊問歸希婢德介, 供稱: "內人愛丹爲燃燈, 出往關王廟, 每與歸希密議。 前年八月, 愛丹之同生李長風, 覓給白猫頭, 置於廚房。 愛丹又持一裹物, 長不滿尺者, 與歸希相語而辟左右人, 故不得聞其語。 又裁作僧巾數十, 或盛之以笥, 或裹之以袱, 使吾置之於大妃殿寢室高欄, 愛丹持兒頭, 使埋於長保門問安之路矣。" 鞫廳啓曰: "德介旣已承服, 請使之指示埋置處, 然後正刑。" 其後德介終不能指示。 訊問玉只婢得花, 供稱: "庚午夏間, 愛丹每每出去, 必持異常之物而來, 形如麥屑, 而微有靑色。 納于尹昭媛 【卽歸希。】 之際, 適得見之。 日暮, 愛丹持此物, 直往大殿寢室。 前年七月, 不知其爲某祭, 而玉只夜間沐浴、齋戒, 改着潔衣而去矣。" 鞫廳請鞫歸希, 兩司亦啓請, 始命出付鞫廳。 歸希供稱: "吾非歸希, 乃尹希也。 宣祖朝以十一歲兒, 選入宮中, 大王昇遐之時, 遺敎于慈殿, 使之錫爵垂恤矣。 癸丑之變, 延興及大君, 一時被禍, 凡巫卜之事, 一皆拒絶, 慈殿昇遐之時, 亦無問卜之事。 德介承服之事, 全不得知, 所謂白猫頭及所裹之物, 皆是無形之言。 僧巾裁作, 此乃闕內之風, 凡諸內人, 亦豈無爲此者乎? 長保門底埋置兒頭之說, 出於虛誣, 夜半設祭者, 本房有病患, 故有時祈祝, 愛丹之出往關王廟者, 亦此類也。" 愛丹供稱: "長在廚房, 不任他事。 旣不出往關王廟, 寧有燃燈之事乎? 至於埋置兒頭, 尤所不知。" 李長風供稱: "與愛丹雖是同生, 而內外嚴截, 不得相見, 一年一度, 只通安否。 且長在鄕曲, 絶無與知之事矣。" 鞫廳請訊問歸希、玉只兩人, 上以宣祖朝宮人, 終不聽。 大臣以爲: "祖宗朝亦有此等罪人賜死之例, 請依此施行。" 上乃從之。 歸希、玉只賜死, 德介伏誅, 得花未及正刑而斃。 其餘愛丹、義淑等諸內人辭連者, 歸希、玉只所率婢及長風, 皆斃於杖下。 初, 仁穆王后之喪, 得帛書三幅於宮中, 有若頒告、奏聞, 爲廢立之擧者。 上出以示戚屬, 尋取其書而燒之。 或云, 后幽西宮時所書, 而外人莫知其然否。 대신 2품 이상이 아뢰기를, "상께서 편찮으신 지가 이미 오래되니 조정과 외부가 뒤숭숭합니다. 지금 듣건대 궁중에서 저주(詛呪)하는 변고가 있어 흉측한 물건이 낭자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막대한 변고를 내환(內宦) 한두 사람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할 수 없으니, 외정(外庭)으로 내보내 엄하게 국문하여 진상을 파악하도록 명하소서." 하고, 대간(臺諫) 역시 합사(合司)하여 논계하기를 여러 날 동안 하니, 이에 금부에 국청을 설치하여 국문하도록 명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옥지(玉只) 등 3, 4명이 밤중마다 문을 닫고 몰래 궁벽한 곳으로 가 제사를 지내며 기도하였다고, 자전(慈殿)의 초상(初喪)에 이 일로써 말한 사람이 있었다. 때문에 본전(本殿)의 상궁(尙宮) 주숙(朱淑)·백숙(白淑) 등도 감히 전부 숨기지 못하고 본방(本房)을 위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는데, 요사이 흉측한 물건을 묻었다는 말을 들은 뒤에야 비로소 기도한 제사 역시 저주를 위하여 지낸 줄을 알았다. 만약 본방을 위하여 기도하였다면 문을 잠가 놓고 남에게 숨길 리가 없을 것 같으니, 그 밤에 제사지낸 것이 필시 곡절이 있는 성싶다. 자전이 승하하신 지 3일 만에 말질향(末叱香)이 까닭없이 독약을 마시고 죽은 것도 그 이유가 없지 않을 터이니, 모두 구속하여 신문하라." 하였다. 【 본방(本房)은 연흥 부인(延興夫人)을 지칭한 것이다.】 옥지(玉只)가 공초하기를, "선조 대왕 때부터 궁중에 뽑혀 들어와 계축년 이후로 주 상궁(朱尙宮)과 자전을 함께 모시다가, 계해년 에 이르러 천일(天日)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계축년에 저주한 일로써 나인(內人)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저주에 대한 말은 사람들이 모두 귀를 가리고서 차마 듣지 못합니다. 더구나 지금 양전(兩殿)께서 화합하시는데 어찌 이와 같은 마음을 품겠습니까. 본방(本房)이 병환이 많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며 기도하였는데, 무릇 기도하는 방법은 으레 조용한 곳에서 하는 것입니다. 만약 저주를 꾀하였다면 주숙·백숙 두 사람들이 이미 함께 거처하였으니, 또한 마땅히 그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나와 말질향(末叱香)·윤귀희(尹歸希) 등 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말질향이 죽은 것은 병으로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함께 도모하였다면 나도 마땅히 함께 죽어야 되는데, 어찌 말질향 혼자만 죽도록 하였겠습니까. 제사를 지낼 때에 침전(寢殿)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 이것은 숨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자전이 노친(老親)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항상 이르기를 ‘내가 살았을 때 효성을 다하고 싶을 뿐이다.’고 하셨는데, 이미 이런 말씀을 듣고 어찌 감히 기도하는 일을 꺼리겠습니까." 하였다. 귀희(歸希)의 계집종 덕개(德介)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나인(內人) 이애단(李愛丹)이 연등(燃燈)하기 위하여 관왕묘(關王廟)에 나가게 되면, 언제나 귀희와 더불어 비밀히 의논하였습니다. 지난해 8월에 애단의 동생 이장풍(李長風)이 흰 고양이 머리를 가져다 주어 주방(廚房)에 놓아두었으며, 애단이 또 길이가 한 자가 채 못 되는 하나의 싸매진 물건을 가지고서, 귀희와 서로 말하였는데, 좌우 사람들을 물리쳤기 때문에 그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또 승건(僧巾) 수십 개를 만들어 혹은 상자에 담기도 하고 혹은 보자기로 싸기도 하여, 나로 하여금 대비전 침실의 높은 난간에다 그것을 놓아두도록 하였으며, 애단이 아이의 머리를 가지고 와 장보문(長保門)에 문안드리러 다니는 길에 묻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국청이 아뢰기를, "덕개(德介)가 이미 승복하였으니, 그로 하여금 묻어놓은 곳을 지적하도록 한 뒤에 사형에 처하소서." 하였는데, 그 뒤에 덕개가 끝내 지적하지 못했다. 옥지(玉只)의 계집종 득화(得花)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경오년 여름 동안에 애단이 번번이 나갈 적마다 반드시 이상한 물건을 가지고 들어오곤 하였는데, 모양이 보릿가루와 같으면서 약간 푸른빛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윤 소원(尹昭媛) 【 바로 귀희(歸希)이다.】 에게 바칠 즈음에 마침 보게 되었는데, 날이 저물자 애단이 이 물건을 가지고 바로 대전(大殿)의 침실로 갔었습니다. 지난해 7월에 무슨 제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옥지가 밤에 목욕 재계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고서 갔었습니다." 하였다. 국청이 귀희를 국문할 것을 청하고 양사도 계청하니, 비로소 국청에 내보내도록 명하였다. 귀희가 공초하기를, "나는 귀희가 아니라 바로 윤희(尹希)입니다. 선조(宣祖) 시대에 11세 아이로서 궁중에 뽑혀 들어와 대왕(大王)이 승하하실 때에 자전(慈殿)에게 유언하여 작위(爵位)를 주어 보살피도록 하였습니다. 계축년 변고에 연흥(延興) 및 대군이 일시에 화를 당하였기에, 무릇 무당과 점장이에 관한 일을 일체 모두 거절하였으며, 자전이 승차하실 때에도 점쳐본 일이 없었습니다. 덕개가 승복한 일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며, 이른바 흰 고양이 머리 및 싸매진 물건이라는 것도 모두 근거없는 말입니다. 승건(僧巾)을 만드는 것은 궐내의 풍습인데, 무릇 여러 내인(內人)들 중에 역시 어찌 이것을 만드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장보문 밑에 아이의 머리를 묻어놓았다는 말은 거짓에서 나온 것이며, 밤중에 제사를 지낸 것은 본방(本房)이 병환이 있었기 때문에 가끔 기도드린 적이 있었는데, 애단이 관왕묘에 나간 것 역시 이런 종류일 것입니다." 하고, 애단이 공초하기를 "오랫동안 주방(廚房)에 있으면서 다른 일을 맡지 아니하여 이미 관왕묘에 나가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연등(燃燈)하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아이의 머리를 묻어 놓았다는 말에 있어서는 더욱 모르는 바입니다." 하고 이장풍(李長風)이 공초하기를, "애단은 비록 동생이지만 내외가 엄절하여 서로 만나볼 수 없고 1년에 한 번씩 안부만을 통하였으며, 또 줄곧 시골에 있었으므로 절대로 참여하여 아는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국청이 귀희·옥지 두 사람을 신문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선조(宣祖) 때의 궁인(宮人)이라는 이유로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도 이런 죄인에게 사사(賜死)한 예가 있었으니, 이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귀희와 옥지에게는 사사하고 덕개는 처형당하였으며 득화는 미처 처형당하기 전에 죽었다. 그 이외의 애단·의숙(義淑) 등 여러 내인으로서 관련된 사람들과 귀희·옥지가 거느렸던 계집종 및 이장풍은 모두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당초에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초상(初喪)에 백서(帛書) 3폭을 궁중에서 발견하였는데, 반고(頒告)나 주문(奏聞)에 임금을 폐하고 세우는 내용처럼 되어 있었다. 상이 꺼내어 척속(戚屬)들에게 보여주고 얼마 후에 그 글을 가져다가 불살라버렸다. 어떤 사람은 왕후가 서궁(西宮)에 유폐당하였을 때 쓴 것이라고 말하지만, 외부 사람으로는 그것이 그러한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인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010023_002
Rec-0078 현종실록_1권_1659_1028_01 16591028 乙卯/行大行大王發靷。 寅時自內覓入竹瀝薑汁于藥房。時左相沈之源以摠護使在仁和門外, 因中使知慈殿哀過氣塞, 遂啓曰: "發靷時已迫, 而聞慈殿未寧, 病憂如此, 請暫退時刻。" 上從之。 俄而之源又啓: "慈候若此, 郊外 擧動, 決不可爲。 群議皆以殿下拜辭於闕門之外爲當, 須早下敎, 然後有分付擧行之事矣。" 上曰: "慈殿氣候, 暫似差歇, 發靷時刻, 依前爲之。" 罷漏後, 奉梓宮就大轝, 仍進發。 上乘小轝, 自仁和門出, 哭不絶聲, 侍衛諸臣, 莫不痛哭。 至仁政門外。 上降輿乘輦, 百官皆步行以從。出興仁門, 至東關王廟後路祭所, 奉安大轝于幄次, 上亦降輦入幕次。 議政府忠勳府行路祭畢, 大轝進發。 上出就奉辭位, 東向四拜, 痛哭擗踊, 百官無不失聲。 大轝旣遠, 上還宮。 대행 대왕의 발인을 행하였다. 인시에 대내에서 죽력(竹瀝)과 강즙(薑汁)을 가져와 약방으로 들여보냈다. 이때 좌상 심지원이 총호사로서 인화문(仁和門) 밖에 있다가 중사를 통하여 자전이 너무 슬퍼하다가 기절한 것을 알고 아뢰기를, "발인 시각이 임박하였으나 자전께서 편찮으시어 병환이 이와 같다 하니, 시각을 잠시 물리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조금 후 지원이 또 아뢰기를, "자전의 체후가 그러하오니 교외까지의 거둥은 결코 해서 안 됩니다. 뭇 논의들은 모두 전하께서도 궐문 밖에서 배사(拜辭)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데, 모름지기 일찍 하교를 하셔야 거행하도록 분부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의 증후가 잠시 차도가 있는 듯하니 발인 시각을 종전대로 하라." 하였다. 파루(罷漏) 후에 재궁(梓宮)을 받들어 대여(大轝)에다 모시고 이어 출발하였다. 상은 소여를 타고 인화문으로 나갔는데 곡성이 끊이지 않았으며, 시위(侍衛)하는 신하들도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인정문 밖에 이르러 상은 소여에서 내려 연(輦)으로 바꿔 탔고 백관들은 모두 걸어서 뒤를 따랐다. 흥인문을 나와 동쪽 관왕묘 뒤 노제소에 이르러 대여를 악차(幄次)에다 봉안하고, 상도 연에서 내려 막차로 들어갔다. 의정부·충훈부가 노제를 모시고 난 후 대여가 떠났다. 상이 봉사위(奉辭位)에 나가아 동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는 통곡하며 가슴을 치고 뛰었고, 백관들도 모두 통곡하였다. 대여가 멀어지자 상이 환궁하였다. 현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ra_10010028_001
Rec-0079 현종실록_1권_1659_1029_01 16591029 丙辰/葬寧陵。 辰時下玄宮, 上出就熙政堂前庭, 行望哭禮, 午時, 上乘輦出興仁門, 至關王廟後, 入幕次, 以俟返虞。 俄而虞主至, 上出次就位以迎之, 且哭且拜, 侍衛百官皆哭。 虞主旣過, 上乘輦以隨, 由弘化門以入, 奉安虞主于文政殿, 上親行初虞祭。 영릉(寧陵)에 장례를 모셨다. 진시에 현궁을 내렸는데, 상은 희정당 앞뜰에 나아가 망곡례(望哭禮)를 행하고 오시에 상이 연을 타고 흥인문을 나와 관왕묘 뒤의 막차로 들어가서 반우(返虞)를 기다렸다. 조금 후 우주(虞主)가 이르자 상이 막차에서 나와 자리에 나아가서 우주를 맞으면서 곡하고 절하였는데, 시위한 백관들도 모두 곡하였다. 우주가 지나간 후 상은 연을 타고 뒤를 따라 홍화문을 거쳐 들어와 문정전(文政殿)에 우주를 봉안하고, 상이 친히 초우제를 모셨다. 현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ra_10010029_001
Rec-0080 현종실록_91권_1671_1017_01 16711017 乙未/南關王塑像, 水氣潤濕, 有流下之痕。 京城民爭傳血淚流下云。 남관왕묘(南關王廟)의 소상(塑像)에 물기가 젖어 흘러내린 자국이 있었다. 서울 백성이, 피눈물이 흘러내렸다고 앞다투어 전하였다. 현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ra_11210017_001
Rec-0081 현종개수실록_1권_1659_1028_01 16591028 大行梓宮發靷。 子時, 行遣奠。 寅時, 自內覓入竹瀝薑汁于藥房。 時左相沈之源, 以摠護使在仁和門, 因中使聞慈殿過哀氣塞, 遂啓曰: "發靷時刻已迫, 而伏聞慈殿, 有未寧之候。 請暫退時刻。" 上從之。 俄而, 之源又啓曰: "慈候若此, 郊外擧動, 決不可爲。 群議皆以殿下拜辭於闕門之外爲當。 須早下敎然後, 有分付擧行之事矣。" 上曰: "慈殿氣候, 暫似差歇, 發靷時刻, 依前爲之。" 罷漏後, 奉梓宮就大轝, 仍進發。 上乘小轝, 自仁和門出, 哭不絶聲。 至仁政門外, 上降轝乘輦, 百官皆步行以從。 出興仁門, 至東關王廟後路祭所, 奉安大轝于幄次。 上亦降輦, 入幕次。 議政府、忠勳府, 行路祭畢, 大轝進發。 上出就奉辭位, 東向四拜, 痛哭擗踊。 大轝旣遠, 上還宮。 대행 대왕의 재궁(梓宮)을 발인(發靷)하였다. 자시(子時)에 견전례(遣奠禮)를 행하였는데, 인시(寅時)에 내전에서 약방에 죽력(竹瀝)과 생강즙을 구해 들이도록 하였다. 이 때 좌상 심지원이 총호사로서 인화문(仁和門)에 있었는데, 중사(中使)를 통해 자전이 너무 슬퍼한 나머지 기절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아뢰기를, "발인할 시각이 이미 박두했는데, 삼가 듣건대 자전께서 편찮으시다 하니, 잠시 시각을 물리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얼마 뒤에 지원이 또 아뢰기를, "자전께서 이와 같으니, 교외에 거동하시는 일은 결단코 해서는 안 됩니다. 뭇 의논도 모두 전하께서 궐문 밖에서 배사(拜辭)함이 마땅하다고들 합니다. 모름지기 빨리 하교하셔야만 일을 분부하고 거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의 기후(氣候)가 조금 차도가 있는 듯하니, 발인하는 시각은 그대로 하라." 하였다. 파루(罷漏) 후에 재궁(梓宮)을 받들어 대여(大轝)에 올리고 이어 출발하였다. 상이 소여(小轝)를 타고 인화문(仁和門)으로 나왔는데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인정문(仁政門) 밖에 이르러 상이 여(轝)에서 내려 연(輦)을 탔는데, 백관은 모두 걸어서 수행하였다. 흥인문(興仁門)을 나와 동관왕묘(東關王廟) 뒤쪽 노제(路祭) 지내는 곳에 이르러 대여를 악차(幄次)에 봉안하였는데, 상도 연에서 내려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의정부와 충훈부가 노제를 끝마치자 대여가 출발하였다. 상이 막차에서 나와 봉사위(奉辭位)로 나아가 동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통곡하며 가슴을 쳤다. 대여가 멀어지자 상이 환궁하였다. 현종개수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rb_10010028_001
Rec-0082 현종개수실록_2권_1659_1029_01 16591029 葬寧陵。 辰時, 下玄宮, 上出就熙政堂前庭, 行望哭禮。 午時, 上乘輦出興仁門, 至關王廟後, 入幕次, 以竢返虞。 俄而虞主至, 上出次就位以迎之。 且哭且拜。 虞主旣過, 上乘輦以隨。 由弘化門以入, 奉安虞主于文政殿。 上親行初虞祭。 上, 下敎政院曰: "雖非禮文所載, 今纔返虞, 異於常時, 欲爲問安於魂殿何如?" 政院啓: "以旣是禮文所無, 且卽當親行虞祭, 臣等不敢臆斷以對。" 上曰: "禮固緣情而生。 予欲自內行之耳。" 政院又啓: "以禮文不載之事, 則當問於大臣、儒臣而行之矣。" 上曰: "今日急遽, 未及問議而行之。 此後行祭時, 依朝哭例, 欲爲問安, 問于大臣、儒臣以定。" 翌日禮曹議于大臣、儒臣, 領敦寧李景奭、左相沈之源、領中樞元斗杓、右相鄭維城、吏曹判書宋浚吉, 皆以爲: "古禮、時制無可稽, 恐不可任情創行。" 領相鄭太和以爲: "宗廟親祭時, 先行展謁之禮, 今於親詣齋殿之日, 先爲展謁哭臨, 似或無妨。" 左參贊宋時烈以爲: "朝夕之哭, 雖以《五禮儀》言之, 未見其必止於葬後也。 雖非行禮之日, 小祥前, 自當依葬前行之, 而但不以問安爲名, 則宜矣。 雖曰, 事亡如事存, 禮旣無文, 且有之死而致生之嫌, 請令禮官更攷《五禮儀》, 俾盡情文。" 上命依領相、左參贊議, 施行。 영릉(寧陵)에 장사지내었다. 진시(辰時)에 하현궁(下玄宮)하였는데, 상이 희정당(熙政堂) 앞뜰로 나아가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오시(午時)에 상이 연(輦)을 타고 흥인문을 나와 관왕묘에 이른 뒤 막차로 들어가 반우(返虞)를 기다렸다. 얼마 뒤에 우주(虞主)가 도착하니, 상이 막차에서 나와 자리로 나아가 영접하고 곡하면서 절하였다. 우주가 통과한 뒤에 상이 연을 타고 수행하여 홍화문(弘化門)을 통해 들어왔다. 우주를 문정전(文政殿)에 봉안하고, 상이 초우제(初虞祭)를 직접 거행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예문(禮文)에 기재되어 있지는 않지만, 지금은 막 반우(返虞)하여 보통 때와 다르니, 혼전(魂殿)에 문안드리고 싶은데, 어떻겠는가?"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이미 예문에도 없는데다가 또 바로 우제를 몸소 거행하셔야 하니, 신들로서는 감히 억측으로 단정을 내려 답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禮)란 것도 본디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생겨난 것이다. 나는 안에서 행했으면 할 뿐이다." 하니, 정원이 또 아뢰기를, "예문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일은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물어 행함이 마땅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오늘은 황급하니 미처 물어 의논해 행하지 못하겠다. 이 뒤로 제사를 거행할 때에는 조곡(朝哭)하는 규례에 의거하여 문안드리고 싶으니, 대신과 유신에게 물어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튿날 예조가 대신과 유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영돈녕 이경석, 좌상 심지원, 영중추 원두표, 우상 정유성, 이조 판서 송준길은 모두 의논드리기를, "옛적의 예제(禮制)를 상고할 수는 없으나, 하고 싶다고 하여 없는 제도를 만들어 시행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고, 영상 정태화는 의논드리기를, "종묘에 친제(親祭)를 드릴 때 먼저 전알(展謁)하는 예를 행하는데, 이번에 재전(齋殿)에 직접 나아가시는 날 먼저 전알하고 곡림(哭臨)한다 해도 무방할 듯싶습니다." 하고, 좌참찬 송시열은 의논드리기를, "《오례의》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장례를 지낸 후에 조석으로 곡하는 것을 꼭 중지해야 한다고 한 기록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를 행하는 날이 아니라 하더라도 소상(小祥) 전에는 장례 이전에 했던 대로 행하는 것이 본래 마땅한데, 다만 문안이라고 이름하지 않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아 계실 때처럼 섬겨야 한다고는 하지만, 일단 예문(禮文)이 없는데다가, 또 죽은 이로 대우한 마당에 생환하기를 바라는 듯한 혐의도 있을 수 있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오례의》를 다시 상고하여 내용과 형식을 극진히 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영상과 좌참찬의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현종개수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rb_10010029_001
Rec-0083 현종개수실록_4권_1660_0827_01 16600827 上幸寧陵。 五更動駕, 至東關王廟降輦, 乘兩馬轎, 晝停于松溪之東。 辰時, 到陵所幕次, 少頃, 上具衰服, 乘小轎出幕次, 詣紅門外, 行拜陵禮於門內。 且哭且行, 進詣陵上, 至石闌干底, 手攀闌干石, 以首頓石柱慟哭, 哀動左右。 都承旨吳挺一進前, 請勿任情過哀, 上哭不止。 右副承旨兪棨進曰: "請召大臣、禮官, 速行奉審。" 上可之。 假注書李叔達出招大臣及禮官, 領議政鄭太和、禮曹判書尹絳、參判金壽恒、參議姜栢年來詣。 上環省陵上, 指辰方裳石之罅隙處曰: "此所謂空缺處乎?" 太和對曰: "此其處也。" 上曰: "連縫有隙, 且似不正矣。" 又曰: "所謂竹石補短, 指何處乎?" 太和對曰: "卯地竹石罅隙㝡大, 果以石片補短, 且塗油灰矣。 裳石之隙, 誠爲未安, 而乃在退壙處, 恐是解凍地陷而然也。" 上曰: "冬月築土之役, 不無此患。 若其石色之不齊, 似非大段欠處也。 且竹石則改之非難, 駕石、屛風石, 雖有罅隙, 不至闊大, 可以塡補。" 且曰: "裳石可以仍修補乎?" 太和對曰: "此乃下玄宮後所排之石, 仍修補不難矣。" 上曰: "以予所見, 改封陵, 非但事體重大, 亦不必因此而爲之矣。" 太和曰: "聖敎至當。 今此奉審, 事體至重, 右議政元斗杓、留都原任李景奭ㆍ鄭〈維〉城差祭他陵, 六卿及三司, 則不可不命召廣詢矣。" 上頷之。 假注書朴信圭, 出招吏曹判書洪命夏、刑曹判書趙珩、大司諫李正英、持平郭齊華、校理李敏叙等來詣。 上令各陳所見, 命夏曰: "臣於春間, 以祭官來此, 目覩而陳達於筵中矣, 今又奉審, 果爲未安。 而臣嘗以禮官奉審長陵, 亦有些少生隙處。 且往在己酉年間, 穆陵屛風石傾陷, 故至有改築之規。 今此裳石、竹石, 與屛風石有間, 不必改封, 聖敎至矣。" 珩曰: "今此所見, 果爲未安。 而臣曾忝京畿監司, 奉審諸陵, 亦或有石物生隙處, 似不必以此而改封也。" 尹絳、李正英, 亦對以改封重難之意。 李敏叙曰: "改封陵, 誠是重難, 而午地竹石, 不可不改矣。" 郭齊華曰: "以石灰塗隙處觀之, 則似是當初元有罅隙, 而非到今生隙處也。" 鄭太和曰: "不改封陵, 今已稟定於上前, 而辰地裳石, 卯地竹石修改外, 其他可改處, 都監自當啓稟而爲之矣。" 上曰: "不改封陵, 旣已停當矣。" 仍問尹絳曰: "所謂通望處、補〔土〕 處, 何方也。" 對曰: "山勢前豁, 故謂之通望, 而不至於越見山脈。 東邊地勢少瘦, 故略加補土矣。" 巳時, 上自陵上, 下至丁字閣東邊, 問蓋瓦雨洗處, 吳挺一詳陳雨洗後無黃色之狀, 上曰, 唯唯。 仍下敎曰: "雨水後莎草, 例有傷損之患, 禮判與都承旨, 落後仔細奉審可也。" 上仍入小次, 俄行酌獻禮。 禮畢, 還小次, 少頃, 又詣紅門內, 行辭陵禮。 乘小轎, 還幕次, 命賜京畿監司兪撤, 豹皮一令, 楊州牧使權大運, 弓箭一部。 午時動駕, 還次晝停所, 未時, 到關王廟, 乘輦, 申時, 還宮。 仍設修改都監, 以尹絳、呂爾載、李曼爲堂上。 謹按寧陵石物之罅隙, 出於人事之未盡, 則當初任事之臣, 固不得無罪矣。 及此諸臣, 累次奉審之後, 仍補與改築, 群議未定, 由是上親自奉審, 與諸臣商確, 遂以修補定議。 蓋終以改築爲未安而然也。 厥後罅隙低陷處, 歲修而不止。 靈林令 翼秀, 潛往圖形, 陳疏以聞, 終至於遷陵。 若用宋時烈當初獻議, 追加封築, 雖曰未安, 尙愈於因以補葺, 不能安久之爲尤未安之說, 則又安有遷陵之擧也? 翼秀輩, 以此爲傾陷朝臣之計。 然壙中無故, 而輕毁十五年安厝之所, 未及一朞, 大喪繼出。 國人之心, 不能無致疑於遷陵, 可勝痛哉? 상이 영릉(寧陵)에 행행하였다. 5경(更)에 동가(動駕)하였는데 동관왕묘(東關王廟)에 이르러서는 연(輦)에서 내려 양마교(兩馬轎)를 탔으며 송계(松溪)의 동쪽에서 주정(晝停)하였다. 진시(辰時)에 능소(陵所)의 막차(幕次)에 이르렀는데 조금 있다가 상이 최복(衰服)을 갖추고 소교(小轎)를 타고서 막차를 나아와서 홍문(紅門) 밖으로 나아갔으며 문안에서 배릉례(拜陵禮)를 행하였다. 곡(哭)을 하면서 행보하여 능위로 나아가 돌난간 밑에 이르러서는 손으로 돌난간을 어루만지며 머리를 석주(石柱)에 조아리고 통곡하니, 좌우가 감동하여 슬퍼하였다. 도승지 오정일(吳挺一)이 앞으로 나아가 내키는 대로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곡을 그치지 않았다. 우부승지 유계(兪棨)가 나아가 아뢰기를, "대신(大臣)과 예관(禮官)을 불러 속히 봉심(奉審)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가주서(假注書) 이숙달(李叔達)이 나아가 대신과 예관을 부르니,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예조 판서 윤강(尹絳), 참판 김수항(金壽恒), 참의 강백년(姜栢年)이 나아왔다. 상이 능위를 빙둘러 살펴보고 나서 진방(辰方)의 상석(裳石)에 틈이 난 곳을 가리키면서 이르기를, "이것이 이른바 틈이 벌어졌다고 하는 곳인가?" 하니, 태화가 대답하기를, "이곳이 그곳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어진 곳에 틈이 있고 또 똑바르지도 않은 것 같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이른바 짧은 것을 보충했다는 죽석(竹石)은 어느 부분을 가리키는 것인가?" 하니, 태화가 대답하기를, "묘지(卯地)의 죽석에 틈이 난 것이 가장 큰데 과연 돌 조각으로 짧은 것을 보충했고 또 유회(油灰)를 발랐습니다. 상석의 틈은 진실로 미안스럽습니다만, 바로 퇴광처(退壙處)에 있으니 아마도 해동(解凍)이 되면서 땅이 꺼져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겨울에 흙을 쌓는 역사(役事)는 이렇게 될 걱정이 없지 않다. 돌의 색깔이 고르지 않은 것 같은 것은 대단한 흠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죽석은 고치기가 어렵지 않고 가석(駕石)과 병풍석(屛風石)은 틈이 있기는 하지만 넓게 벌어지는 데 이르지는 않았으니, 메워서 보수해도 되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상석은 이전 것을 그대로 수보(修補)해도 되겠는가?" 하니, 태화가 대답하기를, "이는 바로 하현궁(下玄宮)한 뒤에 배치한 돌이기 때문에 그대로 수보해도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소견으로는 능(陵)을 개봉(改封)하는 것은 사체가 중대할 뿐만이 아니라 또한 이를 인하여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지금 이 봉심(奉審)은 사체가 지극히 중대한데 우의정 원두표(元斗杓), 유도(留都) 원임(原任) 이경석(李景奭)·정유성(鄭維城)은 다른 능(陵)의 제관(祭官)에 차임되었으니, 육경(六卿)과 삼사(三司)를 명소(命召)하여 널리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주서 박신규(朴信圭)가 나아가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 형조 판서 조형(趙珩), 대사간 이정영(李正英), 지평 곽제화(郭齊華), 교리 이민서(李敏叙) 등을 불러 나아오게 하였다. 상이 각기 소견을 진달하게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신이 봄에 제관(祭官)으로 여기에 왔을 적에 목도하고서 연석(筵席)에서 진달했었습니다만, 지금 또 봉심하니 과연 미안스럽습니다. 신이 일찍이 예관(禮官)으로서 장릉(長陵)을 봉심한 적이 있었는데 또한 사소한 틈이 생긴 곳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과거 기유년에 목릉(穆陵)의 병풍석(屛風石)이 기울어 주저앉았기 때문에 개축한 규례가 있습니다. 지금 상석과 죽석은 병풍석과는 차이가 있으니, 개봉(改封)할 필요가 없다는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하고, 조형은 아뢰기를, "지금 이렇게 보니 과연 미안스럽습니다. 신이 경기 감사로 있을 적에 여러 능을 봉심했었는데 역시 석물(石物)에 틈이 벌어진 곳이 있기도 했으니, 이 때문에 개봉(改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윤강·이정영도 개봉하는 것은 중난(重難)하다는 뜻으로 대답하였다. 이민서가 아뢰기를, "능을 개봉하는 것은 진실로 중난한 일입니다만 오지(午地)의 죽석은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곽제화는 아뢰기를, "석회로 틈을 바른 곳을 살펴보니 당초에 틈이 있었던 것으로 지금 와서 틈이 벌어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고, 정태화는 아뢰기를, "능을 개봉하지 않는 것은 이제 이미 상의 앞에서 품정(稟定)했습니다만, 진지(辰地)의 상석과 묘지(卯地)의 죽석을 수개하는 이외에 고쳐야 할 다른 데에 대해서는 도감에서 스스로 계품하여 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능을 개봉하지 않는 것은 이미 정당(停當)한 것이다." 하였다. 이어 윤강에게 하문하기를, "이른바 통망처(通望處)와 보토처(補土處)라고 한 것은 어느 방향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산세(山勢)가 앞이 탁 트였기 때문에 통망이라고 한 것이지만 건너편 산맥(山脈)이 보이는 데에는 이르지 않습니다. 또 동쪽의 지세가 조금 야윈 상태이므로 대략 보토를 한 것입니다." 하였다. 사시(巳時)에 상이 능 위에서 내려와 정자각 동쪽에 이르러 기와가 비에 씻긴 곳을 하문하니, 비에 씻긴 뒤에는 누런 빛이 없어졌다는 것을 오정일이 상세히 진달하자 상이 그러냐고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빗물이 진 뒤에는 사초(莎草)가 으레 손상을 당하는 걱정이 있게 마련이니 예판(禮判)은 도승지와 함께 뒤에 남아서 상세히 봉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어 소차(小次)로 들어갔고 좀 있다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예를 끝내고 소차로 돌아왔는데 조금 있다가 또 홍문(紅門) 안으로 나아가 사릉례(辭陵禮)를 행하였다. 그리고 나서 소교(小轎)를 타고 막차로 돌아와서 경기 감사 유철(兪㯙)에게 표피(豹皮) 한 벌을, 양주 목사(楊州牧使) 권대운(權大運)에게는 궁전(弓箭) 한 벌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오시(午時)에 동가(動駕)하여 돌아오다가 주정소(晝停所)에 머물렀으며 미시(未時)에 관왕묘(關王廟)에 이르러서는 연(輦)을 타고 신시(申時)에 환궁하였다. 이어 수개 도감(修改都監)을 설치하고 윤강(尹絳)·여이재(呂爾載)·이만(李曼)을 당상으로 삼았다. 삼가 살피건대 영릉(寧陵) 석물에 틈이 벌어진 것은 사람이 일을 극진하게 하지 않은 데서 나온 것이니, 당초 일을 맡았던 신하들은 진실로 죄가 없을 수 없다. 이번에 여러 신하가 누차 봉심한 뒤에 보수할 것인가 개축할 것인가에 대한 뭇 의론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이 직접 봉심하여 신하들과 상의한 다음 드디어 보수할 것으로 의논을 결정하였다. 끝내 개축하는 것은 미안스럽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뒤 틈이 벌어지고 낮게 꺼진 곳은 해마다 수보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이에 영림령(靈林令) 익수(翼秀)가 몰래 가서 그림으로 그려다가 소장을 올려 아뢰어 결국은 천릉(遷陵)하기에 이르렀다. 만약 ‘추가(追加)로 봉축(封築)함이 미안스럽기는 하지만 그대로 보즙(補葺)하여 오래도록 편안하지 못한 것이 더욱 미안스러운 것이 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낫다.’는 송시열의 당초 헌의(獻議)를 채용했더라면 또 어찌 천릉(遷陵)하는 거조가 있었겠는가. 익수의 무리는 이것을 가지고 조신(朝臣)을 경함(傾陷)시킬 계책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광중(壙中)에 아무 탈이 없는 상태에서 경솔하게 15년 동안 평안히 모셨던 곳을 헐어버리자 채 1년도 못 되어 대상(大喪)이 잇따라 났다. 이에 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천릉(遷陵)에 대한 의심이 없을 수 없게 되었으니, 통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현종개수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rb_10108027_001
Rec-0084 현종개수실록_11권_1664_0915_01 16640915 上幸光陵。 以領中樞府事李景奭留都, 領扈衛三廳軍官, 大駕出宮時, 結陣於備邊司前, 晝則移陣於敦化門外。 留都軍兵, 則以摠戎廳所屬畿甸軍兵之輪回入衛者, 結陣於鐘樓。 平明, 上戎服乘馬而出, 到東關王廟, 乘馬轎, 日午, 到陵所。 少憩齋室, 詣丁字閤行祭。 上行初獻, 領議政鄭太和爲亞獻, 淸風府院君 金佑明爲三獻。 祭畢, 太和啓曰: "上久立行禮, 今又奉審山陵, 則陵上峻急, 登陟之際, 恐致添傷。 請令大臣代行。" 上初甚難之, 政院屢請代行, 上以爲: "身在幕次, 使之代行, 固不可, 而奉審時還就齋室, 亦未安。" 使承旨往問於大臣。 大臣以爲: "上坐兩陵間階上, 使大臣代行奉審, 則似無未安之事。" 上許之。 旣奉審, 上曰: "明日當早爲還宮, 今日辭陵, 於禮如何?" 大臣皆以爲可。 上仍出至紅門外, 行辭陵禮。 상이 광릉(光陵)으로 행행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유도 대장(留都大將)으로서 호위(扈衛) 3청의 군관을 거느리고 대가(大駕)가 궁중을 떠날 때는 비변사 앞에서 진을 치고 낮에는 돈화문(敦化門) 밖으로 진을 옮겼다. 이때 유도 군병은 총융청(摠戎廳) 소속으로서 경기 군병 가운데 윤번으로 입위(入衛)한 자들인데, 종루(鐘樓)에 진을 치고 있었다. 평명에 상이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타고 나갔는데, 동관왕묘(東關王廟)에 이르러 마교(馬轎)로 갈아 타고서 정오가 되어 능소에 도착하였다. 잠깐 재실(齋室)에서 쉬었다가 정자각(丁字閣)으로 나아가 제사를 거행하였다. 상이 초헌(初獻)을 한 다음, 영의정 정태화가 아헌(亞獻)을, 청풍 부원군(淸豊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삼헌(三獻)을 하였다. 제사가 끝나자, 태화가 아뢰기를, "상께서 오랫동안 서서 예를 거행하셨는데, 이제 또 산릉을 봉심(奉審)하신다면 능이 있는 곳은 높고 급하므로 올라가실 적에 다칠까 염려스럽습니다. 대신으로 하여금 대행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처음에는 매우 거북하게 여겼는데, 정원이 여러 차례 대행시킬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자신은 막차(幕次)에 있으면서 대행케 하는 것은 참으로 안 될 일이거니와, 봉심할 때 재실로 돌아가는 것 역시 온당치 못한 일이다." 하고, 승지를 시켜 대신에게 묻도록 하였다. 대신이 의논드리기를, "상께서 두 능 사이의 뜰 위에 앉아 계시고 대신으로 하여금 봉심을 대행하게 하면 온당치 못한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봉심이 끝나자, 상이 이르기를, "내일은 일찍 환궁해야 하니, 오늘 능을 하직하면 예로 보아 어떠하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모두 괜찮다고 하였다. 상이 이어 나오다가 홍문(紅門) 밖에 이르러 능을 하직하는 예를 거행하였다. 현종개수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rb_10509015_001
Rec-0085 현종개수실록_18권_1668_0218_04 16680218 政院啓曰: "以刑官榻前所啓請文宣王釋采, 社稷、風雲、雷雨、雩祀、三角山、漢江、先農、先蠶及宗廟、永寧殿、南別殿修改時, 先告事由, 春秋各陵修改時, 先告事由, 及此外無時別祭祝文中, 凡受押御諱之祭, 至於祈雨祭, 事體俱重, 祭日不宜用刑。 其餘木覔山、宣武祠、纛祭、東南關王廟、厲祭、城隍發告、中霤、開氷司寒等節祭, 則祝文中, 不書御諱, 比右差輕, 似當罷祭後用刑。 以此分輕重酌定。" 上曰: "今此分別, 頗似明白。 禁刑與否, 依此擧行。 而其中外方修改等祭, 雖有受押之規, 不必盡拘矣。" 정원이 아뢰기를, "형관(刑官)이 탑전에서 계청한 바, 문선왕(文宣王) 석채(釋采)와 사직(社稷)·풍운(風雲)·뇌우(雷雨)·우사(雩祀)·삼각산(三角山)·한강(漢江)·선농(先農)·선잠(先蠶) 및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남별전(南別殿)을 수개(修改)할 때 먼저 사유를 고하는 것과, 춘추로 각 능을 수개할 때 먼제 사유를 고하는 것 및 이외에 수시로 지내는 별제(別祭)의 축문(祝文) 가운데 어압(御押)을 받는 제사와 기우제(祈雨祭)에 이르러서는, 사체가 모두 중하니 제사지내는 날에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 나머지 목멱산(木覓山)·선무사(宣武祠) ·둑제(纛祭)·동남관왕묘(東南關王廟)·여제(厲祭)·성황 발고(城隍發告)·중류(中霤) ·개빙 사한(開氷司寒)007) 등의 절제(節祭)는 축문에 어휘(御諱)를 쓰지 않으니 앞의 제사에 비해 가벼운 제사를 지낸 후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상과 같이 경중을 나누어서 정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분간해 나눈 것이 자못 명백한 듯하다. 형벌을 시행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그리고 그 가운데 외방에서 수개(修改)한 곳 등에 지내는 제사에는 비록 수압(受押)하는 규정이 있더라도 반드시 다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하였다. 현종개수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rb_10902018_004
Rec-0086 현종개수실록_24권_1671_1017_01 16711017 關王廟塑像, 水氣潤濕, 有流下之痕, 京城民爭傳血淚流下云。 관왕묘(關王廟)의 소상(塑像)에 물기가 젖어 흘러내린 자국이 있었다. 서울 백성이 피눈물이 흘러내렸다고 앞다투어 전하였다. 현종개수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rb_11210017_001
Rec-0087 숙종실록_23권_1691_0103_01 16910103 引見大臣備局諸臣。 領議政權大運曰: "鄭重萬之妻, 憑藉上旨, 矯作御札, 做出虛罔之言, 傳說外間, 罪不可容貸。 而自上屈法伸恩, 終不重處, 此後宜加惕慮, 一切嚴禁, 使外言不入, 內言不出, 則宮禁嚴肅矣。" 上曰: "重萬妻, 予憐其慘禍餘生, 時有賜與, 或與之相接, 其爲人浮濫, 矜誇過實, 以至於此, 良可慨也。" 右議政金德遠曰: "閭巷婦女, 多信巫覡之言。 宮中亦多女人, 安知其必無此事? 此輩出入之際, 多泄內間事, 是可慮也。" 上答以留心。 大運。 德遠, 以三南凶歉, 請減尤甚邑田稅大同。 上從之。 大運曰: "危疑之際, 當選武將。 而鎭服軍情, 亦在於重其名位也。 其意蓋在於陞擢訓鍊大將李鏶。" 上可之。 時世子年幼, 尙未接宮僚。 左議政睦來善, 請使宮官, 有時入見, 上許令待春和輪替入見。 來善又請於歲首, 百歲及過九十老人, 令該曺訪問, 特施優老之典。 上可之。 大運以前承旨朴廷薛, 頗有廉稱而年今八十, 請加資, 來善又以故府尹黃一皓, 死於國事, 其妻自先朝特給月廩。 而今聞身死, 無以返葬, 請給喪需擔軍。 竝從之。 大運曰: "新生大君不幸後, 其折受田地, 移屬於義宮。 而楊根邑內田結, 亦入其中, 近畿殘邑, 失此無以成樣, 宜速還給。 此外折受處, 無論遠近, 竝令諸道, 査啓出給, 則非但除民弊, 實光聖德。" 來善、德遠繼陳之, 上始許之。 德遠陳奢侈之弊, 仍曰: "臣聞宣廟未寧時, 諸臣入侍, 則設木綿染色帳, 至着木綿袴, 以此諸臣朝服, 不敢如今日之鮮明, 宦寺輩則不敢着錦叚云。 癸卯, 臣爲假注書, 偕內官摘奸祈雨祭所, 歸路入關王廟修啓時, 見其內官, 姓名卽强義忠也。 打話間, 問內帑多寡, 義忠以爲。 ‘仁祖大王起自閭閻, 洞知民事之艱難, 躬儉節用。 故內司所儲, 陳陳相仍。 孝宗大王塞外風霜, 備嘗艱苦, 故凡事務從簡約, 不至罄乏。 至今上朝, 生長深宮, 節用之道, 不如兩朝。 卽今內藏, 頗匱竭云。’ 其言誠切實, 願益加儉約, 以務節用之道。" 上初頗開納, 及聞義忠之言, 遽怒曰: "《書》云: ‘爾有嘉謨嘉猷, 入告爾后于內。’ 今以義忠言爲嘉謨而陳達乎? 朝臣宦官, 固不當與之酬酢。 而況敢評論先朝事者乎? 古人云: ‘當用宦官宮妾不知名者。’ 身爲大臣, 敢以義忠凶慘之言, 告達, 殊極駭然。" 仍敎入侍宦官曰: "先朝雖有此事, 義忠宜不敢評論。 況以先朝所無之事, 肆然傳說於外朝? 論其心跡, 極爲凶慘。 渠雖死, 其姓名亟去內侍案, 其子、壻、弟、姪竝削名。 此後若有如此事, 則予當梟示。" 大運爲德遠陳暴其本心無他。 上終不霽怒。 德遠趨出, 上卽命罷職。 大運、來善及入侍諸臣, 相繼陳達, 以爲: "一言妄發, 遽爾譴斥, 非待大臣之體。" 上曰: "雖於敵以下, 不敢對其子弟而說父兄事, 爲臣子者, 豈敢以先朝事, 肆然陳達, 語犯先朝? 不可以大臣而寬恕也。" 大司諫睦林一、持平金文夏, 俱發德遠罷職還收之請, 皆不從。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제신(諸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권대운(權大運)이 말하기를, "정중만(鄭重萬)의 아내가 상지(上旨)를 빙자하여 어찰(御札)을 속여 만들고 거짓말을 만들어 내서 바깥에 퍼뜨렸으므로, 죄를 용서할 수 없는데, 성상께서는 법을 굽히고 은혜를 베풀어 마침내 엄중히 처치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뒤로는 더 염려하고 일체 엄금하여, 밖의 말이 들어오지 못하고 안의 말이 나가지 못하게 하시면, 궁금(宮禁)이 엄숙하여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중만의 아내는 내가 그 참화(慘禍)끝에 살아남은 것을 가엾게 여겨서 때로 물건을 내려 주고 더러 만나 보기도 하였는데, 그 사람됨이 경박하고 외람되어 진실보다 불려서 뽐내어 이렇게 되었으니, 참으로 개탄할 만하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덕원(金德遠)이 말하기를, "여염의 부녀자는 흔히 무당의 말을 믿는데, 궁중에도 여인이 많으니, 이런 일이 반드시 없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이들이 드나들 즈음에 안의 일을 누설하는 것이 많으니, 이것이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유의하겠다." 하였다. 권대운·김덕원이 말하기를, "삼남(三南)에 흉년이 들었으니, 가장 심한 고을의 전세(田稅)·대동(大同)을 감면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권대운이 말하기를, "위의(危疑)할 때에는 무장(武將)을 선택하여야 하며, 군정(軍政)을 진압하여 복종시키는 것도 그 명위(名位)를 중하게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그 뜻은 대개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집(李鏶)을 발탁하려는 데에 있었는데,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때 세자(世子)는 나이가 어려서 아직 궁료(宮僚)를 만나 보지 않았는데, 좌의정(左議政) 목내선(睦來善)이 말하기를, "궁관(宮官)을 시켜 때때로 들어가 만나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봄날이 화창하여지거든 번갈아 들어가 만나보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목내선이 또 말하기를, "세수(歲首)에 1백 세 또는 90세가 넘은 늙은이를 해조(該曹)를 시켜 찾아서 늙은이를 우대하는 은전(恩典)을 특별히 베푸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권대운이 말하기를, "전 승지(承旨) 박정설(朴廷薜)은 자못 청렴하다고 일컬어지는데, 나이가 80세이니, 가자(加資)하소서." 하고, 목내선이 또 말하기를, "고(故) 부윤(府尹) 황일호(黃一皓)는 나라의 일을 하다가 죽었으므로, 그 아내에게 선조(先朝)에서 특별히 월름(月廩)을 주었는데, 이제 듣건대, 죽었으나 고향에 돌아가 묻힐 수 없다 합니다. 청컨대, 상수(喪需)와 담군(擔軍)을 주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권대운이 말하기를, "새로 태어난 대군(大君)이 불행하게 된 뒤 절수(折受)하였던 전지(田地)는 어의궁(於義宮)에 이속(移屬)하였는데, 양근(楊根) 읍내의 전결(田結)도 그 가운데에 들어 있습니다. 근기(近畿)의 잔읍(殘邑)이 그 땅을 잃어서 모양을 이룰 수 없으니, 빨리 돌려 주어야 하겠습니다. 이 밖의 절수하였던 곳도 멀고 가까운 것을 논할 것 없이 모두 본도(本道)를 시켜 살펴서 아뢰게 하여 내어 주면, 민폐를 덜 뿐더러 참으로 성덕(聖德)을 빛낼 것입니다." 하였는데, 목내선·김덕원이 잇달아 아뢰니, 임금이 비로소 윤허하였다. 김덕원이 사치의 폐단을 아뢰고, 이어서 말하기를, "신(臣)이 듣건대, 선묘(宣廟)께서 편찮으실 때에 신하들이 입시(入侍)하였더니 무명에 물들인 포장을 치고 무명 바지를 입으시기까지 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신하들의 조복(朝服)이 감히 오늘날처럼 고울 수 없었고, 환시(宦侍)들은 감히 비단옷을 입지 못하였다 합니다. 계묘년 신이 가주서(假注書)였을 때에 내관(內官)과 함께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곳에 가서 적간(摘奸)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관왕묘(關王廟)에 들어가서 계사(啓辭)를 쓸 때에 강의충(强義忠)이라는 그 내관을 보고 이야기하는 사이에 내탕(內帑)의 다과(多寡)를 물었더니, 강의충이 말하기를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는 여염에서 사셔서 백성의 일이 어려움을 환히 아시므로, 몸소 검소하여 절약해서 쓰셨으므로 내사(內司)의 저축이 계속 풍부했었습니다.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는 변방 밖의 풍상(風霜)에 괴로움을 고루 겪으셨으므로, 모든 일에 힘써 간약(簡約)하게 하셔서 저축이 모자라지는 않았습니다. 금상(今上)의 조정에 이르러서는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 자라셨으므로, 절약하여 쓰는 방도가 두 조정만 못하여 지금은 내장(內藏)이 자못 비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참으로 절실하니, 더욱 검약(儉約)하여 절약해서 쓰는 방도에 힘쓰소서." 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자못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다가, 강의충의 말을 듣게 되어서는 문득 분노하여 말하기를, "《서경(書經)》에 ‘그대에게 좋은 계책이 있거든 안에 들어가 그대의 임금에게 고하라.’ 하였는데, 이제 강의충의 말을 좋은 계책이라고 여겨서 아뢰었는가? 조신(朝臣)과 환관(宦官)은 본디 함께 수작하지 않아야 마땅한데, 더구나 감히 선조(先朝)의 일을 평론하는 것이었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환관·궁첩(宮妾)은 이름을 모르는 자를 써야 한다.’ 하였는데, 자신이 대신이면서 감히 강의충의 흉참(凶慘)한 말을 아뢰니, 지극히 놀랍다." 하고, 이어서 입시한 환관에게 분부하기를, "선조에 비록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강의충이 감히 평론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더구나 선조에 없었던 일을 방자하게 외조(外朝)에 퍼뜨렸으니, 그 마음 쓴 자취를 논하면 지극히 흉참하다. 그가 죽었을망정 그 성명을 내시안(內侍案)에서 빨리 없애고, 그 아들·사위·아우·조카도 모두 이름을 삭제하라. 이 뒤로 이러한 일이 있으면, 내가 효시(梟示)하겠다." 하였다. 권대운이 김덕원을 위하여 그 본심에 다른 뜻이 없었다고 아뢰었으나, 임금이 끝내 분노를 풀지 않았다. 김덕원이 종종걸음으로 달려 나가니, 임금이 곧 파직(罷職)하라고 명하였다. 권대운·목내선과 입시한 신하들이 한 마디 망발하였다 하여 문득 꾸짖어 내치는 것은 대신을 대우하는 예(禮)가 아니라고 서로 잇달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등 이하일지라도 감히 그 자제에게 부형의 일을 말하지 못하는데, 신하로서 어찌 감히 선조의 일을 방자하게 아뢸 수 있는가? 말이 선조를 범하였으니, 대신이라 하여 용서할 수 없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목임일(睦林一)·지평(持平) 김문하(金文夏)가 다 김덕원의 파직을 도로 거두어 달라는 청을 냈으나, 다 따르지 않았다. 숙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701003_001
Rec-0088 숙종실록_23권_1691_0226_01 16910226 上詣貞陵展謁後, 行酌獻禮, 還至沙河里, 登壇閱武。 仍命牽來太僕馬三匹, 分賜三大將。 上引宋 太祖歷謁武成王故事, 將於回鑾之路, 駐駕武安王廟, 入瞻遺像, 令諸大臣講定節目。 左議政睦來善以爲: "宜倣周王式商容之閭, 行式禮。" 右議政閔黯則以爲: "不宜拜, 且不宜式, 當擧手楫。" 上從黯議。 三司請對, 以無國朝前例, 請停歷入之擧。 上曰: "武安王萬古忠義, 素所嘉歎。 旣過其門, 油然興感, 入瞻何妨?" 不從。 임금이 정릉(貞陵)에 가서 전알(展謁)하고 나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돌아오다가 사하리(沙河里)에 이르러 단(壇)에 올라 열무(閱武)하고, 이어서 태복마(太僕馬) 세 필을 끌어오도록 명하여 세 대장(大將)에게 나누어 주었다. 임금이 송 태조(宋太祖)가 무성왕(武成王)의 사당에 들어 전알한 옛일을 따라 장차 돌아가는 길에 무안왕(武安王)의 사당에서 대가(大駕)를 멈추고 들어가 유상(遺像)을 보려고 대신들을 시켜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게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목내선(睦來善)은 주 무왕(周武王)이 상용(商容)의 여문(閭門)에서 식례(式禮)를 거행한 것을 본떠서 거행해야 한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민암(閔黯)은 배례(拜禮)하지 말아야 하고 식례를 거행하지도 말아야 하며 손을 들어 읍례(揖禮)하여야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민암의 의논을 따랐다.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국조(國朝)의 전례가 없다 하여 들르는 일을 멈추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무안왕의 만고(萬古)의 충의(忠義)는 평소에 아름답게 여겨 감탄하는 바이다. 이미 그 문을 지나니 새롭게 느낌이 일어나는데, 들어가 본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고, 따르지 않았다. 숙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jsessionid=1BB27ED304D7524681F8E4B703B30643id/WSA_11702026_001
Rec-0089 숙종실록_23권_1691_0227_01 16910227 上, 下備忘記曰: "噫! 武安王之忠義, 實千古所罕。 今玆一瞻遺像, 實出於曠世相感之意, 亦所以激勸武士, 本非取快一時之遊觀。 咨! 爾諸將士, 須體此意, 益勵忠義, 捍衛王室, 是所望也。 且東南關王廟宇破傷處, 令該曺一體修改, 遣官致祭。 祭文中備述予遐想夐歎之意。"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아! 무안왕(武安王)의 충의(忠義)는 참으로 천고(千古)에 드문 것이다. 이제 한번 들러서 유상(遺像)을 본 것은 참으로 세상에 드물게 서로 느끼는 뜻에서 나왔고, 또한 무사(武士)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니, 본디 한때의 유관(游觀)을 쾌하게 하려는 뜻이 아니었다. 아아, 너희 장사(將士)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몸받아 충의를 더욱 면려(勉勵)하여 왕실(王室)을 지키도록 하라. 이것이 바라는 것이다. 또 동쪽과 남쪽에 관왕묘(關王廟)가 파손[破傷]된 곳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한결같이 고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되, 제문(祭文) 가운데에 내가 멀리 생각하고 경탄하는 뜻을 갖추도록 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702027_001
Rec-0090 숙종실록_23권_1691_0304_02 16910304 上, 下備忘曰: "頃日瞻觀武安王遺像, 美髯顯有剪短之形, 事甚未安。 此等處一新修補, 仍念祖宗朝建祠崇奉, 實出景仰忠節之盛意, 而不禁雜人, 致有此事。 其他傷汚處亦多, 使肅淸之廟宇, 作一行人褻玩之所。 若不別樣禁斷, 則今日修改, 明日傷破, 殊無致敬之本意。 今後若又有如此之患, 見發於摘奸時, 則當該守直官從重論罪之意, 各別嚴飭。"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지난번에 무안왕(武安王)의 유상(遺像)을 보니, 아름다운 수염을 잘라서 짧게 한 형적이 뚜렷이 있었다. 매우 미안한 일이니, 이러한 곳들을 모두 새롭게 보수하라. 이어서 생각한건대, 조종(祖宗) 때에 사당을 세워 숭봉(崇奉)한 것은 참으로 충절(忠節)을 우러르는 성의(盛意)에서 나온 것인데, 잡인(雜人)을 금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있게 하였다. 그 밖에 손상되고 더러워진 곳도 많아서, 숙청(肅淸)한 사당을 한낱 행인이 버릇없이 구경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만약에 특별히 금단(禁斷)하지 않으면, 오늘 고치고 내일 파손하여 공경하는 본의가 아주 없어질 것이니, 이 뒤로 또 이러한 근심이 적간(摘奸)할 때에 나타나면 당해 수직관(守直官)을 엄중히 논죄(論罪)할 것이라는 뜻으로 각별히 엄하게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703004_002
Rec-0091 숙종실록_24권_1692_0915_01 16920915 上自製二首詩, 以御筆鏤板以下曰: "一卽曾題武安王廟者, 一卽歷入武安廟有感而作者也。 其令分揭于東南關王廟, 以表予敬慕之意。 詩曰: ‘生平我慕壽亭公, 節義精忠萬古崇。 志勞匡復身先逝, 烈士千秋涕滿胸。 有事東郊歷古廟, 入瞻遺像肅然淸。 今辰致敬思愈切, 願佑東方萬世寧。’" 임금이 시(詩) 2수(首)를 지어 어필(御筆)로 써서 목판(木板)에 새겨 내리면서 이르기를, "하나는 일찍이 무안왕(武安王)의 사당을 글제로 한 것이고, 하나는 무안왕의 사당을 지나가다가 느끼는 바가 있어 지은 것이다. 나누어서 동쪽과 남쪽의 관왕묘(關王廟)에 걸어 두어, 나의 경모(敬慕)하는 뜻을 표하라." 하였다. 그 시에 이르기를, "평소에 내가 수정공을 사모함은 절의와 정충이 만고에 높아서이네. 광복에 마음 쓰다 몸이 먼저 갔기에 천추토록 열사들 가슴에 눈물 그득하네" 하고, 또 이르기를, "동쪽 교외에 일 있어 고묘 지나다가 들러보니 맑은 유상 숙연했도다. 이번은 공경하는 마음 더욱 간절해지며 우리 동방 만세토록 편케 해주기 소원이로다." 하였다. 숙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809015_001
Rec-0092 숙종실록_32권_1698_0824_01 16980824 上謁健元陵, 行酌獻禮, 次謁顯陵、穆陵、徽陵, 詣崇陵行酌獻禮。 還到沙河里習陣場, 軍兵逗留, 駕前塡咽, 大駕不得前行, 上擧鞭促行。 挾輦軍妄揣上意欲閱武, 遽向陣場。 上駐蹕路次, 待其還伍。 駕後近臣莫知其由, 諸承旨駕前請對曰: "軍行如是停留, 仍向陣場, 誠未知其故也。" 上曰: "軍兵誤認有閱武之意, 徑向陣場, 分付促進可也。" 承旨趙泰采請査問處之, 上可之。 掌令金德基請對, 請訓鍊大將申汝哲從重推考, 上曰: "當査覈處置。" 承旨南致熏曰: "主將之罪, 豈止推考乎? 臺體殊未妥當。" 德基引避。 玉堂又請: "不待還宮査處, 直以軍律處之。" 上曰: "到遞馬所, 當處分矣。" 大駕到關王廟遞馬所, 上殿坐幕次, 出給信箭於宣傳官, 命拿入申汝哲, 又命拿入挾輦將官, 命承旨問其由。 承旨李思永請挾輦把摠一體拿入, 上從之。 仍命哨官、把摠, 竝決掍三十。 修撰閔震炯請姑待訓將拿入, 一時處決, 上可之。 致熏曰: "自上路次殿坐, 而侍衛將士尙不來待, 摘發推考爲宜。" 上可之。 都承旨嚴緝, 請招諸大臣入侍, 領議政柳尙運、左議政尹趾善、右議政李世白等入對。 上曰: "申汝哲在前, 必不知此事, 而平日不能申明紀律, 致有此患, 故纔令拿入矣。" 尙運曰: "汝哲平日不立紀律, 固不得辭其罪, 而旣是累朝宿將, 且非身所自犯, 宜有參酌處分之道。" 趾善以領相言爲是。 世白曰: "旣送信箭, 拿入之擧, 不可中止矣。" 宣傳官持信箭還來告曰: "申汝哲方拿來。" 尙運曰: "不爲拿來, 先納信箭, 殊乖軍法。 宣傳官宜拿問。" 上可之。 申汝哲拿入, 對以: "挾輦軍之先向陣場, 雖非小臣所知, 平日不立紀律之罪, 實無所逃。" 上曰: "此非汝哲之罪, 汝哲拿推, 把摠、哨官決掍何如?" 尙運等曰: "汝哲任使旣久, 年紀且老, 而旣已拿入, 渠又引罪, 雖不更爲拿推, 足以嚴紀律勵士卒。 然臣等亦不敢直請其放釋矣。" 上曰: "申汝哲削職。" 震炯進曰: "軍中失伍, 責在主將, 削職之罰, 似非當律。" 上曰: "七十老將, 若施棍罰, 死亡可慮矣。" 泰采持信箭, 分付中軍, 領軍把摠、哨官, 各決棍三十。 校理南正重曰: "掌令金德基以問備薄罰, 草草陳請, 損失臺體大矣。 宜遞差。" 上從之。 大司諫尹世紀、執義金時傑、司諫李敏英請對, 合辭請當該兩將校, 竝依律處斷, 上曰: "棍罰足以懲勵。 梟示則過矣。" 上命都提調, 兼察訓將之任, 而訓將姑勿出代。 임금이 건원릉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다음으로 현릉·목릉·휘릉을 알현하고, 숭릉으로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였다. 돌아오다 사하리(沙河里) 습진장(習陣場)에 이르니, 군사들이 머뭇거리며 나가지 않은 채 대가(大駕) 앞을 메우고 막으므로, 대가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자 임금이 채찍을 들어 길을 재촉했다. 이에 협련군(挾輦軍)이 임금이 의중에 열무(閱武)하려 한다고 망령되게 헤아리고 갑자기 습진장으로 향했다. 임금이 노차(路次)에서 대가를 멈추고 그 대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대가 뒤의 근신(近臣)들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하여, 여러 승지들이 대가 앞에서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군사의 행진을 이와 같이 정지시켜 머무르게 하고 이내 훈련장으로 향하니, 진실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병(軍兵)들이 내가 열무할 뜻이 있는 줄로 잘못 알고 곧바로 습진장으로 향했으니, 분부하여 전진을 재촉함이 좋겠다." 했다. 승지 조태채(趙泰采)가 조사해 물어 처리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장령 김덕기(金德基)가 청대하여 말하기를, "훈련대장(訓鍊大將) 신여철(申汝哲)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조사해 밝혀 처치해야 할 것이다." 했다. 승지 남치훈(南致熏)이 말하기를, "주장(主將)의 죄가 어찌 추고에 그치겠습니까? 대간(臺諫)의 사체가 자못 타당하지 못합니다." 하니, 김덕기가 인피(引避)하였다. 옥당(玉堂)에서 또 청하기를, "환궁(還宮)하여 조사해 처리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곧바로 군율(軍律)로 처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체마소(遞馬所)에 이르러 마땅히 처분하겠다." 하였다 대가가 관왕묘(關王廟) 체마소에 이르자, 임금이 막차(幕次)에 전좌(殿坐)하고 신전(信箭)을 선전관에게 내주며 신여철(申汝哲)을 잡아들이라 명하고, 또 협련 장관(挾輦將官)을 잡아들이라 명하였으며, 승지에게 그 연유를 물으라 명했다. 승지 이사영(李思永)이 협련 파종(挾輦把摠)도 함께 잡아들일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이내 초관(哨官)·파총에게 모두 곤장 30대를 시행하도록 명했다. 이에 수찬(修撰) 민진형(閔震炯)이 잠시 훈련 대장을 잡아들여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처결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남치훈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노차(路次)에서 전좌하고 계신데도 시위(侍衛)하는 장사(壯士)가 아직도 와서 대기하지 않으니, 그들을 적발하여 추고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도승지 엄집(嚴緝)이 모든 대신들을 불러 입시(入侍)시킬 것을 청하니,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좌의정 윤지선(尹趾善)·우의정 이세백(李世白) 등이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여철이 앞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 일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 기율(紀律)을 잘 밝히지 못해 이런 우환이 있게 되었을 것이므로, 지금 막 잡아들이게 하였다." 하니, 유상운이 말하기를, "신여철이 평소에 기율을 세우지 못함은 진실로 그 죄를 면할 수 없겠으나, 이미 여러 조정의 노숙한 장수인데다가, 또 자신이 스스로 범한 바 아니니, 의당 참작하여 처분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윤지선도 영상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이세백이 말하기를, "이미 신전을 보냈으니, 잡아들이는 조치는 중지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선전관이 신전을 가지고 돌아와 보고하기를, "신여철이 방금 잡혀오고 있습니다." 하였다. 유상운이 말하기를, "잡아오지 않고서 먼저 신전을 들이니, 이는 매우 군법(軍法)에 어긋납니다. 마땅히 선전관을 나문(拿問)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신여철이 잡혀 들어와서 대답하기를, "협련군이 먼저 습진장으로 향한 것을 비록 소신이 안 바는 아니나, 평소 기율을 세우지 못한 죄는 실로 면할 수가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신여철의 죄가 아니니, 신여철은 나추(拿推)하고, 파총·초관은 곤장형(棍杖刑)으로 처결함이 어떠한가?" 하였다. 유상운 등이 말하기를, "신여철은 신임하여 부린 지 이미 오래 되었고, 나이 또한 늙었는데 이미 잡아들였고, 저도 또한 죄를 끌어 사죄하였으니, 비록 다시 나추하지 않더라도 족히 기율을 엄숙히 하고 군졸을 면려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 등은 감히 곧바로 그 석방을 청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여철을 삭직(削職)하라." 하였다. 민진형이 나아가 말하기를, "군중(軍中)에서 대오(隊伍)를 잃음은 그 책임이 주장(主將)에게 있는데, 삭직의 벌은 타당한 율이 아닌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70세의 노장(老將)에게 만약 곤장의 형벌을 시행한다면 죽을까 염려스럽다." 하였다. 조태채가 신전을 가지고 중군(中軍)에게 명령하여, 군대를 영솔한 파총·초관에게 각각 곤장형 30대를 시행했다. 교리(校理) 남정중(南正重)이 말하기를, "장령 김덕기는 박벌(薄罰)로 문비(問備)하여 구차하고 간략하게 진청(陳請)했으니, 대간(臺諫)의 체통을 손실함이 큽니다. 의당 체차(遞差)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윤세기(尹世紀)·집의 김시걸(金時傑)·사간 이민영(李敏英)이 청대하고, 합사(合辭)하여 당해 두 장교를 모두 율에 따라 처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곤장의 형벌로 족히 징계하여 면려할 수 있다. 효시(梟始)는 지나치다." 하고, 임금이 도제조(都提調)에게 명하여 훈련 대장의 임무를 겸임하여 살피게 하고, 훈련 대장은 아직 대임(代任)을 내지 말게 하였다. 숙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2408024_001
Rec-0093 숙종실록_38권_1703_0618_02 17030618 上下敎曰: "關武安王精忠大義, 昭如日星。 皇明 太祖皇帝, 肇創壽亭候廟, 天下都邑, 莫不立祠, 崇奉之意, 槪可想矣。 我國崇禮門外, 卽壬辰遊擊陳璘所建也。 其時我國, 出財力以助之, 廟成, 宣廟亦嘗親幸。 予於頃年拜陵時, 歷入東廟, 蓋其忠義之氣, 令人感慨於千載之下。 宣廟臨幸, 予之歷見, 皆非出於遊觀之意也。 聞南廟安生像。 明日擧動歸路, 欲歷過。 其令禮曹稟處。 禮曹請依辛未年例, 以擧手揖, 定儀註, 從之。 上又曰: "楊經理 宣武祠, 在於崇禮門內。 宣廟親書再造藩邦四字揭之。 我國家賴神宗皇帝之德, 得至今日, 實有生死肉骨之恩, 而天地翻覆, 事異今日。 昔予於迎勑往來之路, 顧瞻遺祠, 感慨于中。 其別遣官致祭。" 校理李觀命、李晩成, 上箚曰: 伏聞明日回鑾之路, 有歷臨關廟之敎。 竊覵殿下曠世相感之意, 出尋常萬萬也。 關王之精忠大義, 昭揭日星。 其灑恥除凶之意, 炳然如昨, 千載之下, 有足興起。 矧今纔餞北客, 路過遺廟, 顧瞻興嗟, 聖念可想, 第惟人君一動一靜, 不可不愼, 而禮無前據, 率爾行之, 遠外驟聞, 妄相忖度, 以爲或出於遊觀之擧, 則衆人之惑, 無以解之。 且於入廟之際, 儀節有礙。 頃年擧手行揖, 出於倉卒權行。 今乃不復講究, 倣以行之, 未知於禮, 果如何? 臣愚以謂, 宣武祠致祭, 亦係盛擧, 今若一體遣官, 奠之芬苾, 則禮意事體, 兩得而不悖矣。答曰: "今玆歷臨之敎, 意非偶然, 決不可已也。" 임금이 하교하기를, "관무안왕(關武安王)은 정충대의(精忠大義)가 해와 별처럼 밝아서 명(明)나라 태조 황제(太祖皇帝)가 처음으로 수정후(壽亭侯)의 묘(廟)를 창건하여 천하의 도읍(都邑)에 모두 사당(祠堂)을 세웠으니, 숭배하여 받드는 뜻을 대개 생각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 묘(廟)는 바로 임진년에 유격장(游擊將) 진인(陳璘)이 세운 바이다. 그때 우리 나라에서 재력(財力)을 내어 도왔는데, 묘(廟)가 완성되자 선조(宣祖)께서도 일찍이 친히 허둥하셨고, 나는 지나간 해 능(陵)에 참배할 때에 동묘(東廟)를 지나 들어갔는데, 대개 충의(忠義)의 기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천년 후에까지 감개(感慨)하게 하였다. 선조께서 거둥하신 것과 내가 두루 본 것은 모두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듣건대 남묘(南廟)에는 생상(生像)을 안치하였다고 하는데 내일 돌아오는 길에 거쳐서 가려고 하니 예조(禮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니, 예조에서 신미년의 예(例)에 의하여 손을 들어 읍(揖)하는 것으로 의주(儀註)를 정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양 경리(楊經理)의 선무사(宣武祠)가 숭례문 안에 있는데, 선조(宣祖)께서 ‘재조번방(再造藩邦)’이란 네 글자를 친히 써서 걸었었다. 우리 나라가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덕을 힙입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진실로 생사육골(生死肉骨)421) 의 은혜가 있었는데, 천지가 번복(翻覆)되어 일이 오늘날과 다르다. 예전에 내가 칙사(勅使)를 맞이하러 왕래하는 길에 유사(遺祠)를 돌아보며 마음속에 감개하였으니, 별도로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하였다. 교리(校理) 이관명(李觀命)과 이만성(李晩成)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삼가 듣건대, 내일 회가(回駕)하시는 길에 관왕묘(關王廟)에 들어가서 관람하신다는 하교가 계셨다 합니다. 그윽이 보건대, 전하께서 먼 세대에 서로 감동(感動)하는 뜻이 보통의 만 배에 뛰어나십니다. 관왕(關王)의 정충 대의(精忠大義)는 해와 별처럼 환하게 게양(揭揚)되어 그 수치를 씻고 흉악한 무리를 제거하는 뜻이 어제처럼 빛나니 천년 후에도 족히 충의(忠義)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데, 하물며 이제 가까스로 북사(北使)를 전송하고 길이 유묘(遺廟)에 지나가게 되니 돌아보고 감탄을 일으키는 성상의 생각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군주의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머무는 것은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예전의 의거할 예(禮)가 없는데도 경솔하게 행하면 먼 외방에서 갑자기 듣고는 망녕되게 서로 추측하며 혹시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일에서 나왔다.’고 여길 것이니, 여러 사람의 의혹을 풀 수가 없으며, 또 묘(廟)에 들어가실 즈음에 의식 절차도 구애됨이 있습니다. 지나간 해에 손을 들어 읍(揖)한 것은 창졸간에 임시변통으로 행한 것인데, 지금 다시 강구(講究)하지 않고서 이를 모방하여 행하면 예(禮)에 과연 어떠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선무사(宣武祠)에 치제(致祭)하는 것 또한 성대한 행사에 관계되니, 이제 만약 똑같이 관원을 보내어 제물을 올리게 하면 예(禮)의 뜻과 사체(事體) 두 가지가 적당하게 되어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금 관왕묘에 거쳐 간다는 하교는 우연한 것이 아니니, 결단코 그만 둘 수 없다." 하였다. 숙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2906018_002
Rec-0094 숙종실록_38권_1703_0619_02 17030619 乘輿將發, 都承旨兪集一進曰: "歷臨關廟之敎, 孰不聳動? 玉堂之箚, 似不識聖意所存, 而以義理言之, 吉凶不可同禮, 歌哭不可竝行。 何必於今日, 行此盛擧乎? 且天氣盛熱, 請退行。" 上不聽。 遂歷過南關王廟, 揖而立顧近侍曰: "此是生像, 比東廟塑像, 大有生氣矣。" 指西壁隅僧像曰: "此何爲以設也?" 近侍對曰: "俗稱普淨長老也。" 上頷之。 上又曰: "武安精忠大節, 萬古昭昭, 予之所嘗深慕, 而送勑之後, 歷入遺廟, 瞻揖塑像, 曠感尤深, 令人怒髮衝冠矣。" 兪集一曰: "聖上一念尊周, 辭旨激切, 可以鼓忠臣、義士之氣。 然此亦近於文具, 惟願益勉修攘之策也。" 上曰: "卿言然矣。" 集一請禁廟中淫祀, 從之。 仍命依辛未例, 致祭於東廟。 승여(乘輿)가 장차 떠나려고 하니, 도승지(都承旨) 유집일(兪集一)이 아뢰기를, "관왕묘(關王廟)를 거쳐 가신다는 하교는 누군들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옥당(玉堂)의 차자(箚子)는 성상의 뜻 둔 바를 알지 못한 듯합니다. 하지만 의리로써 말하면 길흉(吉凶)의 예(禮)를 같이 할 수 없고 노래하고 곡(哭)하는 것을 아울러 행할 수 없는데, 하필 오늘날에 이 거룩한 행사를 하십니까? 또 날씨가 몹시 더우니 시일을 물려서 행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마침내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지나며 들어가서 읍(揖)하고 서서 근시(近侍)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것은 생상(生像)인데 동묘(東廟)의 소상(塑像)에 비하여 아주 생기(生氣)가 있다." 하고, 서쪽 벽의 승상(僧像)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는 무엇을 위하여 설치하였는가?" 하자, 근시가 대답하기를, "세속에서 일컫는 보정 장로(普淨長老)입니다." 하니, 임금이 머리를 끄덕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무안(武安)의 정충 대절(精忠大節)은 만고에 환하게 빛나므로 내가 일찍이 깊이 사모하는 바였다. 칙사를 보낸 뒤에 유묘(遺廟)에 지나며 들어와서 소상(塑像)을 보고 읍(揖)하니, 세상에 드문 느낌이 더욱 깊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곤두선 머리털이 갓을 치켜올리게 한다." 하니, 유집일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한결같은 생각으로 존주(尊周)하시어 말씀의 뜻이 격렬하고 간절하시니 충신(忠臣)·의사(義士)의 기운을 고취(鼓吹)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형식에 가까우니, 다만 내정(內政)을 다스리고 외적(外敵)을 물리치는 계책에 더욱 힘쓰시기를 원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말이 옳다." 하였다. 유집일이 묘(廟)안에 음사(淫祀)를 금지시키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인하여 신미년의 예(例)에 의하여 동묘(東廟)에 치제(致祭)하기를 명하였다. 숙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2906019_002
Rec-0095 숙종실록_48권_1710_0302_02 17100302 左議政徐宗泰、判府事李頣命, 請對入侍。 宗泰曰: "殿下春秋, 恰滿半百, 而患候平復, 亦莫大之慶。 春宮之稱觴上壽, 情禮所不可已, 豈可一向牢拒乎?" 頣命曰: "閭巷間親年五十, 大病新瘳者, 其子必具酒盃, 以速親族。 世子至情, 恐不可牢塞也。" 上曰: "向者世子, 欲以此陳請, 構示疏草, 予已禁抑之。 目今艱虞溢目, 決不可行。" 宗泰、頣命, 又縷縷苦請, 上乃勉從之, 命宴需, 視前從略。 上仍語諸臣曰: "頃年駕幸東關王廟, 倉卒未及講禮, 不拜而揖, 其後南關王廟, 亦行揖禮。 此雖遂事而必以爲例。 揖之果無失於禮否?" 頣命曰: "帝王廟, 自有古事之可據者矣。" 上曰: "宣廟朝天將出來時, 親祭關王廟, 必不行揖禮也。" 宗泰曰: "其時則天將同往設祭, 或行拜禮, 今不必永遵。 關王忠勇間世, 而自是異代名將, 與先聖、先師有間, 親臨行拜, 似過。 行揖之外, 無他禮矣。" 上曰: "號爲武安王, 香室祝文, 亦曰敢昭告于武安王云云矣。" 頣命曰: "王爵乃追封, 本爵則侯, 雖使生存, 當抗禮矣。" 上曰: "令儒臣, 博攷古事, 酌定禮節。" 是後, 弘文館言曰: "《會典》群祀條, 洪武六年, 始建帝王廟于京師, 以祀三代以上帝王, 及漢、唐、宋創業之君, 而後以周文王服事殷, 勿設主, 止祀於其陵廟。 七年親祭於帝王廟, 而《儀註》不著。 嘉靖十一年, 定親祭儀, 有兩拜之禮。 惟此一段, 庶或傍照於今日之事, 而第止祀文王於陵廟, 未有親臨拜祭之文者, 蓋以追尊之故, 則顧此關公王爵, 亦出追封, 以皇朝之禮推之, 自上親臨行拜, 似爲過當。 且考《五禮儀》賓禮宴朝廷使條, 殿下揖使者, 使者答揖云云。 設令關王奉使而來, 不過以賓主之禮相接, 有揖無拜而已。 以此言之, 聖上行揖, 固爲得中。 關廟創建初, 禮節雖未知如何, 而固與天將, 同行其祭, 則雖或有優禮致謹之事, 此特出於一時權宜, 恐不當援以爲式。" 上命後日實錄曝曬時, 宣廟親祭儀節, 考出以來。 좌의정 서종태(徐宗泰)·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는데, 서종태가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춘추(春秋)가 반백(半百)에 찼고, 환후(患候)가 평복되신 것도 또한 더할 수 없이 큰 경사이니, 춘궁(春宮)께서 잔을 올려 헌수[上壽]하는 것은 정례(情禮)에 그만둘 수 없는 바인데, 어찌 한결같이 굳이 거절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이명은 말하기를, "여항(閭巷)에서도 어버이의 나이가 50이 되어 크게 병들었다가 나은 사람은, 그의 아들이 반드시 주배(酒盃)를 갖추고 친족(親族)을 부르니, 세자의 지극한 정리(情理)를 아마도 막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세자가 이를 진청(陳請)하려고 소초(疏草)를 지어 보이기에 내가 이미 금지시켰다. 현재의 고생스럽고 근심스러운 형편을 이루 다 볼 수 없으니, 결코 거행할 수가 없다." 하였다. 서종태·이이명이 또 누누이 간절하게 청하니, 임금이 억지로 따르면서 연수(宴需)는 전보다 간략히 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인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지난해 어가(御駕)가 갑자기 동관왕묘(東關王廟)에 거둥하느라 미처 의례(儀禮)를 강(講)하지 못하여 절하지 아니하고 읍(揖)을 하였고, 그 후 남관왕묘(南關王廟)에서도 또한 읍례(揖禮)를 행하였다. 이것이 비록 이미 이루어진 일이기는 하였더라도 후일에 반드시 규례가 될 것이니, 읍한 것이 과연 예(禮)에 벗어남이 없겠는가?" 하였는데, 이이명이 말하기를, "제왕묘(帝王廟)는 고사(古事)에서 의거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조(宣祖朝)에 명(明)나라 장수가 나왔을 때 관왕묘에 몸소 제사하되 반드시 읍례(揖禮)로 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니, 서종태가 말하기를, "그 때에는 명나라 장수가 함께 가서 제사를 베풀었으므로 더러 배례(拜禮)를 행하였으나, 이제 영구히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관왕(關王)의 충성과 용맹이 세상에 드물다 하나, 이는 옛날의 명장(名將)으로서 선성(先聖)·선사(先師)와 차이가 있으니, 친림(親臨)하여 배례를 행하는 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읍례를 행하는 것 외에 다른 예(禮)가 없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무안왕(武安王)이라고 부르고 향실(香室)의 축문(祝文)에도 또한 ‘감히 무안왕께 밝게 고합니다.…[敢昭告于武安王云云]’ 하였다." 하자, 이이명이 말하기를, "왕작(王爵)은 곧 추봉(追封)한 것이고 본작(本爵)은 후(侯)였으니, 비록 살아 있다 하더라도 항례(抗禮)가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널리 고사(古事)를 상고하여 예절을 작정(酌定)케 하라." 하였다. 이후 홍문관(弘文館)에서 말하기를, "《회전(會典)》 군사조(群祀條)에는, ‘홍무(洪武) 6년에 비로소 경사(京師)에 제왕묘(帝王廟)를 창건하고, 삼대(三代) 이상의 제왕(帝王)과 한(漢)나라·당(唐)나라·송(宋)나라를 창업(創業)한 임금을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후에 주(周) 문왕(文王)은 은(殷)나라를 복사(服事) 했다 하여 신주(神主)를 설치하지 아니하고, 단지 그 능묘(陵廟)에서 제사지내는 데에 그치다가, 홍무 7년에 제왕묘(帝王廟)에다 몸소 제사지냈다.’ 하였으나, 《의주(儀註)》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정(嘉靖) 11년에 정한 친제의(親祭儀)에는 두 번 절하는 예(禮)가 있었으니, 오직 이 일단은 거의 오늘날의 일에 더러 방조(傍照)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문왕을 능묘(陵廟)에서 제사지내는 데에 그치고, 친림(親臨)하여 배제(拜祭)하였다는 글이 없는 것은 대개 추존(追尊)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돌아보건대 관공(關公)의 왕작(王爵)도 또한 추봉에서 나왔으니, 황조(皇朝)의 예(禮)를 미루어 보아 성상께서 친림하여 배례(拜禮)를 행하시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듯합니다. 또 《오례의(五禮儀)》 빈례(賓禮) 연조정사조(宴朝廷使條)에, ‘전하께서 사자(使者)에게 읍(揖)을 하면 사자가 읍하여 답한다.…’ 하였습니다. 설령 관왕이 사명을 받들어 왔다 하더라도 손님과 주인의 예로 상접(相接)함에 불과하니, 읍례는 있되 배례는 없어도 그만일 것입니다. 이로써 말하건대 성상께서는 읍례를 행함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관왕묘를 창건한 초기에는 예절이 비록 어떠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진실로 명나라 장수와 함께 가서 제사를 행하였을 때에는, 비록 혹 후한 예(禮)로 섬김을 다하는 일이 있었다 하나, 이는 특별히 한때의 권의(權宜)에서 나왔으니, 아마도 이를 끌어대어 법식(法式)으로 삼는 것은 마땅치 못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훗날 실록(實錄)을 포쇄(曝曬)할 때 선조(宣祖)께서 몸소 제사 지내신 의절(儀節)을 상고해 내도록 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3603002_002
Rec-0096 숙종실록_49권_1710_1217_02 17101217 禮曹啓言: "大臣於前秋, 以全羅道 古今島, 陳都督璘及忠武公 李舜臣祠宇賜額事, 陳達蒙允, 追聞陳都督, 創建關王廟, 其後追享陳都督及李舜臣於東廡, 而與關廟, 地勢逼近, 不可限以垣墻。 今若賜額, 則便是關廟額號也。 關王當與至尊, 分庭抗禮之人, 不當賜額於其廟, 陳都督亦天朝奉命之將, 我朝不可以臣禮待之。 且與李舜臣, 同享致祭, 節目多妨礙, 請議于大臣。" 判府事李濡以爲: "若用宣武、武烈祠之例, 只揭美稱於關廟, 且去宣額二字, 似得宜, 祭禮亦依宣武儀式, 而至於李舜臣, 旣與都督, 竝享一室, 則所重在焉。 又其忠勞特異, 凡係崇報之典, 不必拘於常格。 差官行祀之際, 仍令一體行之, 恐無損於國體。" 左議政徐宗泰以爲: "新廟果非別建, 而享於廡宇, 則一廟之內, 揭額於廡宇, 事甚不便。 只當以關王廟, 擧其大而爲稱, 至於祭禮, 則都督祭式降香祝辭, 官員、執事, 當遵武烈祠、宣武祠之例。 李舜臣則我朝人, 賜額祠院, 常時祀享, 本無朝廷遣官之規, 只當依他祠廟之例, 以儒、校生行之。 雖在一室之內, 此出於事有降殺而致然, 恐無所妨。" 右議政金昌集以爲: "若以美稱之, 包得兩廟之義者, 宣額于關廟, 而去其賜額二字, 則未見其爲害義。 李舜臣雖是我朝人, 仍令僉使, 一體行之, 亦恐無妨。" 判府事李頣命以爲: "箕子之禮, 庶推於關廟, 都督之位, 可班於石、李諸公, 稱廟而揭額, 不爲無所據矣, 但不可謂之宣額耳。 文廟從享, 亦多我國之賢, 而春秋釋菜, 差官而祭, 蓋其所重, 在於聖廟也。 二品以上常調武臣之卒, 朝廷亦猶遣官致祭, 李舜臣之功, 國朝以來所未有, 雖祠廟常祀, 歲再遣官, 崇報之道, 未或過矣。" 命用左相議。 禮曹又奏, 京中關王廟祭日, 用驚蟄、霜降, 春秋各以此日設行之意, 亦爲知委。 饌品一依宣武祠, 香、祝則當自京下送, 而雖以聖廟規例言之, 東、西廡, 無別爲祝告之事, 關廟祝文末端, 添入陳都督、李舜臣配食之意, 似當。" 上從之。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지난 가을에 대신(大臣)들이 전라도(全羅道) 고금도(古今島)의 진인(陳璘) 도독(都督)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사우(祠宇)에 사액(賜額)하는 일을 진달(陳達)하여 윤허받았는데, 나중에 듣건대 진 도독(陳都督)은 관왕묘(關王廟)를 창건하였고, 그후에 진 도독과 이순신을 동무(東廡)에 추향(追享)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관왕묘와 지세가 너무 가까와서 담장으로 경계를 구획(區劃)할 수가 없으니, 지금 만약 사액(賜額)한다면, 곧 관묘(關廟)의 액호(額號)가 되는 것입니다. 관왕은 당연히 지존(至尊)과 함께 뜰을 나누어 대등한 예절을 갖추어야 할 사람이니, 그 묘우(廟宇)에 사액함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진 도독 또한 중국의 사명을 받들었던 장수이므로, 우리 조정에서 신하로 예대(禮待)할 수는 없습니다. 이순신과 함께 향사(享祠)하고 치제(致祭)하는 것은 방애(妨碍)됨이 많으니, 청컨대 대신(大臣)들에게 의논하소서." 하고,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는 말하기를, "만약 선무사(宣武祠) ·무열사(武烈祠)의 예를 쓴다면, 단지 관묘(關廟)에 아름다운 칭호(稱號)를 게시하고, 또 ‘선액(宣額)’이라는 두 글자를 빼는 것이 마땅할 듯하며, 제례(祭禮) 또한 선무사(宣武祠)의 의식(儀式)에 의거해야 합니다. 이순신에 이르러서는 이미 도독(都督)과 한 실(室)에 병향(並享)하였으니, 소중하게 여기는 뜻이 있습니다. 또 충성(忠誠)과 노고(勞苦)가 특이하여, 무릇 숭배하여 보답하는 데 관계된 은전(恩典)은 상격(常格)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으니, 관원(官員)을 차견(差遣)하여 제사를 지낼 즈음에 일체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아마도 국체(國體)에 손상됨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서종태(徐宗泰)는 말하기를, "새로운 묘우(廟宇)는 따로 세운 것이 아니고, 무우(廡宇)에서 향사(享祠)하는 것이라면, 한 묘우(廟宇) 안에서 무우에 편액(扁額)을 걸어두는 것은 일이 매우 불편할 것이니, 단지 관왕묘에만 큰 것을 걸어 일컫게 함이 마땅합니다. 제례(祭禮)에 이르러서는 도독의 제식(祭式)에는 향(香) 및 축사(祝辭)를 내리는 것과, 관원과 집사(執事)를 무열사·선무사의 예에 의하여 준행(遵行)함이 마땅합니다. 이순신(李舜臣)은 우리 나라 사람의 사액(賜額)한 사원(祠院)에 평소 향사(享祀)할 때에, 본래 조정에서 관원을 보낸 규례(規例)가 없으니, 단지 다른 사묘(祠廟)의 예에 의거하여 유생(儒生)·교생(校生)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비록 한 실(室) 안에 있다 하더라도 이는 후(厚)함과 박(薄)함의 차이가 있는 데에서 나온 소치이니, 아마도 방애됨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김창집(金昌集)은 말하기를, "만약 아름다운 칭호(稱號)를 하여 두 묘우(廟宇)의 뜻을 포괄하게 하려면, 관묘에 편액(扁額)을 내리면서 ‘사액(賜額)’ 두 글자를 빼버려도 그 뜻에 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이순신이 비록 우리 나라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첨사(僉使)로 하여금 일체로 거행하게 하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고,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은 말하기를, "기자(箕子)의 예(禮)를 관묘에 준용(準用)함이 거의 옳을 것이요, 도독의 지위(地位)는 석성(石星)·이여송(李如松) 등 여러 공(公)의 반열(班列)에 참여할 수 있으므로, 묘우를 일컬어 편액(扁額)을 거는 것은 근거할 바가 없지 않으나, 단지 선액(宣額)이라 일컬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문묘(文廟)에도 우리 나라의 선현(先賢)들을 많이 종향(從享)하였는데, 봄·가을의 석전(釋奠)에 관원을 차견(差遣)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은, 대개 그 소중함이 성묘(聖廟)에 있기 때문입니다. 2품 이상의 무신(武臣)으로 조용(調用)되었다가 졸(卒)하였을 경우, 조정에서 또한 오히려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는데, 이순신의 공로(功勞)는 국조(國朝) 이래로 없던 것이었으니, 비록 사묘(祠廟)에서 거행하는 향사(享祀)라 하더라도, 해마다 두 번 관원을 보내는 것이 숭배하여 보은(報恩)하는 도리에 지나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좌상(左相)의 의논을 쓰도록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또 아뢰기를, "경중(京中)에서는 관왕묘의 제일(祭日)을 경칩(驚蟄)과 상강(霜降)을 쓰니, 봄·가을에 각각 이날로 설행(設行)한다는 뜻을 또한 지위(知委)하소서. 그리고 찬품(饌品)은 한결같이 선무사(宣武祠)의 규례에 의거할 것이며, 향(香)가 축문(祝文)은 경중(京中)에서 내려보냄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비록 성묘(聖廟)의 규례로 말하더라도,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따로 축문(祝文)을 고하는 일은 없었으니, 관묘(關廟)의 축문(祝文) 말단(末端)에 진 도독과 이순신을 배식(配食)한다는 뜻을 첨입(添入)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숙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3612017_002
Rec-0097 숙종실록_50권_1711_0103_03 17110103 日前, 上以古今島關王廟香祝齎去單子, 問于政院曰: "星州、安東兩邑關王廟享祀, 亦依古今島享祀事, 曾令本道, 定式擧行, 今入馬牌單子, 只是古今島一處者, 何也?" 政院招問禮曹郞廳, 對以安東、星州關王廟現存形止, 未能詳知, 當發問於本道後擧行。 上敎以癸未年駕次南關廟時, 令兩邑關王廟現存形止, 査問本道後, 因本道狀聞, 禮曹覆啓, 已令勿爲廢置, 另加修補。 今該曹之更欲發問於本道者, 似未詳其時曲折也。 政院請推禮曹堂郞, 仍令與古今島, 一體擧行, 從之。 至是, 禮曹更定節目以入, 仍啓曰: "聖意旣感其精忠義烈, 且爲中朝將士東征時所建, 愾然有《匪風》、《下泉》之思, 則成命之下, 何敢容議? 安東關廟, 萬曆戊戌, 眞定營都司薛虎臣所建, 有石像。 初在府城內北山之頂, 立碑以記東征之役, 丙午移安西岳寺東臺。 碑文漫漶, 而碑陰諸將名號俱存, 廟去寺三四間許, 廟前地亦三四間許, 而有層階, 欠平坦。 星州關廟在東門外, 萬曆丁酉, 天將茅國器所建, 有塑像。 廟宇三間, 庭廣二間許云。 安東之中間移設, 未知其故, 而今旣自朝家享祀, 則事體異於前, 不可附置僧舍之側, 且其地形, 不得平坦, 則恐難行祀。 星州廟庭, 只二間許, 則亦狹窄, 過今番享祀後, 竝令從容看審, 啓聞變通。" 從之。 其節目, 一依東、南關廟例, 祭日用驚蟄、霜降, 祭羞用籩豆, 而獻官以本邑營將或堂上武守令差遣, 配位則差堂下武官, 諸執事用鄕將官。 일전에 임금이 고금도(古今島)관왕묘(關王廟)013) 에 쓸 향축(香祝)을 가지고 가는 단자(單子) 때문에 정원(政院)에 묻기를, "성주(星州)·안동(安東) 양읍의 관왕묘(關王廟)의 향사(享祀)도 또한 고금도의 향사하는 예에 의하여 하도록 일찍이 본도(本道)로 하여금 정식(定式)으로 거행하게 하였는데, 이제 마패 단자(馬牌單子)를 들인 것은 단지 이 고금도 한 곳뿐이니, 어째서이냐?" 하니, 정원에서 예조 낭청(禮曹郞廳)을 불러 물어서 대답하기를, "안동(安東)·성주(星州)의 관왕묘(關王廟)는 현존하고 있다고 하나 형편을 상세히 알 수 없으니, 마땅히 본도에 발문(發問)한 뒤에 거행하여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계미년에 거가(車駕)가 남관묘(南關廟)에 머물렀을 때, 양읍(兩邑)의 관왕묘가 현존하고 있는 형편을 본도로 하여금 사문(査問)케 한 뒤에 본도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예조(禮曹)에서 복계(覆啓)하기에 이미 폐치(廢置)하지 말고 별도로 보수(補修)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이제 해조(該曹)에서 다시 본도에 발문(發問)하려는 것은 그 당시의 곡절(曲折)을 상세히 알지 못해서인 것 같다." 하니, 정원(政院)에서 예조 당랑(禮曹堂郞)을 추고하기를 청하고, 이내 "고금도(古今島)와 더불어 일체(一體)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에 이르러 예조에서 다시 절목(節目)을 정하여 들이고, 이어서 아뢰기를, "성의(聖意)가 이미 그 정충(精忠)과 의열(義烈)에 감동하셨고, 또 중국의 장사(將士)가 동정(東征)하였을 때 세운 바라, 개연(愾然)히 비풍(匪風)·하천(下泉)의 생각이 있었으니, 성명(成命)의 아래에서 어찌 감히 의논을 용납하겠습니까? 안동(安東)의 관묘(關廟)는 만력(萬曆) 무술년에 진정영 도사(眞定營都司) 설호신(薛虎臣)이 세운 것으로, 석상(石像)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성(府城) 내의 북산(北山) 정상(頂上)에 있었으며, 비(碑)를 세워 동정(東征)한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병오년에 서악사(西岳寺)의 동대(東臺)로 옮겨 모셨습니다. 비문(碑文)은 많이 마멸되었으나 비음(碑陰)에 제장(諸將)의 명호(名號)는 모두 있으며, 묘(廟)는 절에서 3, 4칸[間] 남짓 떨어져 있고 묘 앞 땅도 3, 4칸 남짓한데 층계(層堦)가 있어 평탄하지 못합니다. 성주(星州)의 관묘(關廟)는 동문(東門) 밖에 있으며, 만력(萬曆)정유년에 중국 장수 모국기(茅國器)가 세운 것으로 소상(塑像)이 있습니다. 묘우(廟宇)는 3칸[間]이고, 뜰의 넓이는 2칸[間] 남짓하다고 하며, 안동(安東)의 중간에 옮겨 세웠는데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이제 이미 조가(朝家)로부터 향사(享祀)한다면 사체(事體)가 전과 다르니 승사(僧舍)의 곁에 붙여둘 수 없으며, 또 그 지형(地形)이 평탄하지 못하다면 아마도 행사(行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성주의 묘정(廟庭)이 단지 2칸 남짓하다면 또한 협착(狹窄)하니, 이번 향사가 지난 뒤에 아울러 조용히 살펴보고 계문(啓聞)하여 변통(變通)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 절목(節目)은 한결같이 동관묘(東關廟)·남관묘(南關廟)의 예(例)에 의하여 제일(祭日)은 경칩(驚蟄)과 상강(霜降)을 쓰고, 제수(祭羞)는 변두(籩豆)를 사용하며, 헌관(獻官)은 본읍 영장(本邑營將)이나 혹은 당상(堂上)의 무관 수령(武官守令)을 뽑아서 보내고, 배위(配位)에는 당하 무관(堂下武官)을 뽑아 쓰며, 제집사(諸執事)는 향장관(鄕將官)을 임용하게 하였다. 숙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3701003_003
Rec-0098 숙종실록_50권_1711_0512_02 17110512 以慶尙觀察使狀啓, 安東關王廟則命仍舊, 而恢拓庭階, 星州關王廟, 移建改塑像。 【安東廟則結構頗精, 且施丹靑, 而庭階恢拓, 則可以平坦故也。】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안동 관왕묘(安東關王廟)는 옛날 그대로 두되 정계(庭階)만 넓히고, 성주 관왕묘(星州關王廟)는 딴 곳으로 이건(移建)하고 소상(塑像)도 개조(改造)하도록 명하였다. 【안동묘(安東廟)는 구성한 짜임새가 자못 정교(精巧)하고 또 단청(丹靑)을 시행하였는데, 정계(庭階)만 넓히면 평탄(平坦)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숙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3705012_002
Rec-0099 숙종실록_50권_1711_0625_02 17110625 上頃年, 幸關王廟, 拜揖當否, 未及考據, 只行揖禮, 命考出宣廟朝舊禮於實錄曝曬時。 史官書啓以爲, 宣廟行再拜, 上命今後依此行拜禮。 임금이 지난해에 관왕묘(關王廟)에 거둥하여 배읍(拜揖)해야 하는지의 당부(當否)를 미처 상고하지 못하여 단지 읍례(揖禮)만을 행하고, 명하여 선묘조(宣廟朝)의 구례(舊禮)를 《실록(實錄)》을 포쇄(曝曬)할 때에 상고하여 내라고 하였다. 사관(史官)이 서계(書啓)하여 이르기를, "선묘(宣廟)께서는 재배(再拜)를 행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이 뒤로는 이에 의하여 배례(拜禮)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숙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3706025_002
Rec-0100 경종실록_7권_1722_0413_02 17220413 逆望物故。 望被拿, 初拈虎龍招以鞫之, 供曰: "身以不文, 故交虎龍以借文, 累年從行。 虎龍嘗言: ‘以汝人物可惜, 欲敎文字。 麻田隱士鄭麟重, 性疎善詩律, 不擇貴賤, 有來訪吾家園林之約, 汝可來見。’ 一日見邀, 與麟重相交, 尋常往來。 虎龍又言: ‘龍澤端雅可交’, 故與之交, 就其家, 論文而已, 無一言及勇力。 至於多人相交、急手劉備ㆍ丸藥ㆍ掌書等說, 今始聞之。 內人所言, 皆從之云, 尤無據, 而所從來則有之。 延礽君宅出居房子二英, 身蓄之, 故龍澤每每詼諧。 至於全兵軍官之說, 渠臨去時, 自詑能文, 結交得幕裨, 身則生來不踏平安道地, 尤無可答" 云云。 下款托以虎龍言, 攙入小論、南人謀害世弟之說, 鞫廳更推虎龍, 對曰: "白望窮凶極惡之情, 貫盈天地。 已知其必死, 故游辭亂說, 使治獄諸臣不安, 以緩其獄, 尤爲巧惡。 與龍澤等相交, 無飮酒謀議之事云者, 未滿一哂。 己、庚兩年之間, 日飮酒團欒, 言言無非弑君。 至於劉備之說、掌中書養字者, 乃渠與龍澤等, 初見日說話。 厥後身與白望, 偕見諸賊時所言, 則大且重於斯言者, 不知其幾千萬言也。 言各有根, 證各有人, 仔細査得, 則終難掩覆。 龍澤給寶劍事, 寶劍方在於房中, 多結內人云者, 望之所自言, 而名字多不盡記, 賊輩已各厭聞。 至於大急手、小急手、平地手云者, 俱是白望所創之言, 丸藥價五百金等說, 賊中諸人, 皆知之。 白望所以反噬矣身者, 欲巧而反拙。 身於東宮邸下, 多蒙恩德, 仰之如天, 其所言萬不近理。 至於二十五日相見說話, 果有曲折。 白望非但有謀國弑君之罪, 亦嘗白地陷人, 殺於毒杖之下, 故其情窮極, 則或恐反爲告變之擧, 身誘以他說, 以觀俯仰。 其杖殺者, 湖中人陸德明, 而自謂陸玄, 與白望相交。 其人明於術數, 故望也多謀議隱密。 其後玄移接於內司庫直孫萬家, 與白望相失。 望以陸之陰事, 告於龍澤曰: ‘玄與武人趙儼、金重器, 私通換局事於孫萬之女內人’ 云云, 故龍澤傳於民澤, 嗾李弘述, 捉入捕廳後, 白望謂諸賊曰: ‘玄若亂言, 累必及吾, 不如陰殺滅口也。’ 諸賊大恐, 累及於白望, 而綻露其同謀深節, 爲白望殺玄矣。 今乃發覺, 有究問弘述之事, 身言於望曰: ‘汝言: 「曾與玄相交時, 卜於關王廟, 則課云: 『孫、龐之交。』」 其占已驗矣。 汝旣斷陸足, 陸必殺汝矣。’ 白望曰: ‘吾與吳瑞鍾締結南人, 皆以換局功, 歸於吾, 而汝多毁我於南人, 故南人不信之。 此獄若出, 吾名難免矣, 然瑞鍾言: 「多以好意緩頰。」 云。 判義禁似不深治吾事, 而如或深治, 則吾當盡籠南、小諸人, 使不得治吾獄也。’ 身答以此獄不過爲陸玄一事, 則不必深慮云, 而又恐賊反荷杖, 二十五日朝, 往覘動靜, 則白望指其妻娚李重伊曰: ‘此人自瑞鍾所來傳曰: 「汝以吾之所犯, 漏通於南人, 故柳慶裕憂其所爲事歸虛, 多般毁言。」 云云。’ 其所云身於南人中橫行等說, 待先來圖謀云者, 不近理之事也。 又所謂元哥、張哥等說, 諸人名字, 旣出於身之口, 千萬夢寐不到之事也。 望言: ‘吾雖使瑞鍾, 圖謀於沈判書, 而其中金叅判 一鏡, 當局按獄, 吾若一入, 似難脫出。 如以刑加之, 吾必構誣金叅判, 此有可生之道’ 云云。 此其妖賊緩獄之計也。 此獄係是宗社、生民, 則幺麿賊人之亂說, 不足多辨。 先究問其弑君一節, 銀貨用處然後, 逐條盤問, 則前後事狀, 班班可知。" 云云。 及面質, 虎龍曰: "取銀之事, 汝終不知耶?" 曰: "太一石、錢五兩, 自汝兄取去之外, 銀則不知也。" 虎龍曰: "龍澤若直招給劍之事, 汝何以發明?" 曰: "與龍澤面質則可知矣。" 虎龍曰: "汝之給銀於池尙宮時, 有某某人之說, 汝終不記得乎?" 曰: "汝入於尙宮家, 故吾仍汝得聞, 尙宮則無可知之路。 其養子昌貴與之相親, 故屢往其家, 翫其園林, 則尙宮以酒食饋之, 且以履給汝矣。" 虎龍曰: "尙宮亦以履給汝矣。" 曰: "汝則與尙宮, 坐房中密語何耶?" 虎龍曰: "吾與尙宮相見時, 汝亦不爲同參耶?" 曰: "此則萬萬無據。" 虎龍曰: "汝與陸玄, 同往關王廟占之, 得六六卦, 此乃孫、龐之交云云矣。 今則陸玄已死, 吾占果驗。 汝將奈何?" 曰: "虎龍以陸玄亂杖而死, 故欲令其事近似, 作爲此說矣。" 鞫廳, 以白望一無辨破之端, 言言見敗, 請刑。 刑問四次後, 一向抵賴, 而龍澤贈劍事, 其招有曰: "身雖不佩來, 龍澤旣送於身, 寶劍自身所搜出, 此則不爲發明" 云云。 更推問目曰: "龍澤贈劍一款, 旣已自服, 聚銀事, 亦不敢隱諱, 而銀貨所從來, 吳哥一人外, 終不指名現告。 二英族屬之爲內人, 不能詳知云, 而內人墨世招曰: ‘再次往見二英, 而與白望相見, 有所酬酢’ 云。 前後誣飾之狀, 節節敗露" 云云, 刑問第八次, 終始忍杖而斃。 望以兇逆謀主, 竟不輸情, 人情咸憤, 追加磔屍、孥戮之典。 역적 백망(白望)이 물고(物故)되었다. 백망이 잡혀오자, 처음에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를 점출(拈出)하여 국문(鞫問)하니, 공초(供招)하기를, "저는 글을 모르기 때문에 목호룡과 교유하여 글을 빌면서 여러 해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목호룡이 일찍이 말하기를, ‘너의 인물이 아까와 문자(文字)를 가르치려고 한다. 마전(麻田)에 사는 은사(隱士) 정인중(鄭麟重)은 성격이 소탈하고 시율(詩律)을 잘하며 귀천(貴賤)을 가리지 아니하는데, 우리 집 원림(園林)에 찾아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으니, 네가 와서 만날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불려가 정인중과 서로 사귀고 심상하게 왕래하였던 것입니다. 목호룡이 또 말하기를, ‘김용택(金龍澤)은 단아(端雅)하여 사귈 만하다.’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사귀었고, 그 집에 가서 글을 논하였을 뿐이었으니, 한 마디도 용력(勇力)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며, ‘여러 사람과 서로 사귀었다.’든가, ‘유비(劉備)·환약(丸藥)·손바닥의 글씨’ 따위의 말은 지금에야 비로소 들었습니다. ‘나인[內人]이 말한 바를 모두 따랐다.’고 하는 것은 더욱 근거가 없으나 지난 내력은 있으니, 연잉군(延礽君) 댁(宅)에 나가 사는 방자(房子)인 이영(二英)을 제가 첩(妾)으로 삼았으므로, 김용택이 언제나 농담을 하였던 것입니다. ‘전병 군관(全兵軍官)’이란 말에 이르러서는 그가 떠날 때에 스스로 속이기를, ‘글을 잘하였으므로 결교(結交)하여 막비(幕裨)를 얻을 수 있었다.’ 하였던 것이고, 저는 태어난 이래 평안도 땅을 밟은 적이 없으니, 더욱 대답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고, 아랫조항에다 목호룡의 말을 핑계대며 ‘소론(小論)과 남인(南人)이 세제(世弟)를 모해(謀害)하려 했다.’는 말을 끼워 넣었다. 국청에서 다시 목호룡을 추문(推問)하니, 대답하기를, "백망의 지극히 흉악한 실정은 천지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미 반드시 죽을 것을 알았으므로, 근거 없는 말과 어지러운 말로 옥사(獄事)를 다스리던 여러 신하들을 불안하게 하여 그 옥사를 늦추고자 했던 것이니, 더욱 간교하고 흉악합니다. 김용택 등과 서로 사귀며 술을 마시거나 모의(謀議)한 일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한 번 웃을 거리도 되지 못합니다. 기해년 ·경자년 두 해 사이에 날마다 술을 마시며 친밀하게 지내면서 매번 시군(弑君)에 대해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유비(劉備)란 말과 손바닥에 ‘양(養)’자를 쓴 것에 이르러서는 바로 그가 김용택 등과 처음 만난 날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후 제가 백망과 함께 여러 적(賊)들을 만났을 때 말한 바는 이 말보다 중대한 것이 몇 천 몇 만 마디의 말인지 알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말에는 각각 근거가 있고 증거에는 각각 사람이 있으니, 자세하게 조사해 낸다면 끝내 가리어 숨기지 못할 것입니다. 김용택이 보검(寶劒)을 준 일은 보검이 그때 방 가운데 있었고, 나인[內人]과 많이 결탁했다고 하는 것은 백망이 스스로 말한 바이며, 이름은 죄다 기억하지 못하나 적배(賊輩)들은 이미 각각 실컷 들었습니다.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평지수(平地手)’라고 말하는 데 이르러서는 모두 백망이 만들어낸 말이고, ‘환약(丸藥) 값 5백 금(金)’ 등의 말은 적(賊)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니, 백망이 도리어 저를 물어뜯으려는 것은 교묘하게 하려다가 도리어 잡쳐 놓은 꼴입니다. 저는 동궁(東宮) 저하(邸下)께 많은 은덕(恩德)을 입어 하늘처럼 우러러보고 있으니, 그 말한바는 너무나도 이치에 가깝지 않습니다. 25일에 서로 만나 이야기한 데에 이르러서는 과연 곡절이 있습니다. 백망은 다만 나라를 도모하고 군상(君上)을 시해(弑害)하려 한 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찍이 까닭없이 사람을 무함(誣陷)하여 독장(毒杖) 아래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정상이 막바지에 이르면 혹은 도리어 고변(告變)하는 짓을 할까 두려워 제가 다른 말로 달래며 행동거지를 살폈던 것입니다. 그 장살(杖殺)당한 자는 호중(湖中) 사람 육덕명(陸德明)인데, 스스로 육현(陸玄)이라고 하며 백망과 서로 사귀었습니다. 그 사람은 술수(術數)에 밝았으므로 백망이 은밀한 일을 많이 모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육현은 내수사의 고지기[庫直]인 손만(孫萬)의 집으로 옮겨가 지내며 백망과는 서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백망이 육현의 음사(陰事)를 김용택(金龍澤)에게 알리기를, ‘육현이 무인(武人) 조엄(趙儼)·김중기(金重器)와 환국(換局)에 관한 일을 손만의 딸인 나인[內人]에게 사통(私通)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용택이 김민택(金民澤)에게 전하여 이홍술(李弘述)을 사주해 포청(捕廳)으로 잡아들이게 한 뒤, 백망이 여러 적(賊)들에게 말하기를, ‘육현이 만약 난언(亂言)하면 누(累)가 반드시 나에게 미칠 것이니, 몰래 죽여 입을 막는 것이 좋겠다.’ 하자, 여러 적들이 누(累)가 백망에게 미쳐서 그 동모(同謀)한 정절(情節)이 탄로날까 크게 두려워하여 백망을 위해 육현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발각이 되어 이홍술을 구문(究問)하는 일이 있게 되었으므로, 제가 백망에게 ‘네가 말하기를, 「일찍이 육현과 서로 사귈 때 관왕묘(關王廟)에서 점을 쳤더니, 그 결과, 『손(孫 방(龐)의 사귐 』이라고 하였다.」 하였는데, 그 점(占)이 이미 징험이 되었다. 네가 이미 육현의 발을 잘랐으니, 육현은 반드시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백망이, ‘나와 오서종(吳瑞鍾)이 남인(南人)과 체결(締結)하자 모두 환국(換局)의 공(功)을 나에게 돌렸는데, 네가 남인들에게 나를 많이 헐뜯었으므로 남인들이 믿지 않는다. 이 옥사(獄事)가 만약 일어나면 나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나, 오서종이 「많은 이들이 호의(好意)를 가지고 완협(緩頰)하게 할 것이다.」고 하였고, 판의금(判義禁)도 나의 일을 엄하게 다스릴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만약 혹 엄하게 다스린다면 나는 마땅히 남인(南人)·소론(小論)의 여러 사람들을 죄다 싸잡아 넣어 나의 옥사를 다스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옥사는 육현에 관한 한 가지 일에 불과하니 깊이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답하였으나, 또 적반하장(賊反荷杖)일 것을 두려워하여 25일 아침에 가서 동정(動靜)을 엿보았더니, 백망이 그의 처남(妻娚)인 이중이(李重伊)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오서종에게서 와서 전하기를, 「네가 우리들이 범(犯)한 바를 남인에게 누설하였으므로, 유경유(柳慶裕)는 하려고 하던 일이 허망한 데로 돌아가게 될 것을 염려하여 여러 가지로 헐뜯어 말하였다.」고 하였다.’ 하였는데, 그 이른바 제가 남인(南人)들 중에 횡행(橫行)하였다는 따위의 말과 선래(先來)가 오기를 기다려 도모(圖謀)한다고 한 것은 이치에 가깝지 않은 일입니다. 또 이른바 원가(元哥)·장가(張哥) 등의 말과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이미 제 입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은 절대 꿈속에서도 이르지 아니한 일입니다. 그리고 백망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오서종으로 하여금 심 판서(沈判書)에게 도모하게 하였으나, 그 중에서 참판 김일경(金一鏡)이 담당하여 옥사를 안치(按治)하고 있으니, 내가 만약 한 번 잡혀들어가면 벗어나기 어려울 듯하다. 그리고 만약 형신(刑訊)을 가한다면, 나는 반드시 김 참판(金參判)을 구무(講誣)할 것인데, 이에서 살아날 수 있는 방도가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그 요악(妖惡)한 적(賊)이 옥사를 늦추려는 계책입니다. 이 옥사는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에 관계된 것이니, 보잘것없는 적인(賊人)의 어지러운 말은 여러 가지로 변석(辨析)할 것이 못됩니다. 먼저 군상(君上)을 시해(弑害)하려 한 한 가지 일과 은화(銀貨)의 사용처에 대해 구문(究問)한 뒤에 조목마다 캐묻는다면 전후의 사상(事狀)을 환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면질(面質)함에 이르러 목호룡이 말하기를, "은(銀)을 가진 일을 너는 끝내 알지 못하느냐?" 하니, 말하기를, "콩 1석(石)과 돈 다섯 냥을 너의 형으로부터 가져간 것 이외에 은(銀)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김용택(金龍澤)이 만약 칼을 준 일을 바른대로 공초(供招)한다면 네가 어찌 발명(發明)할 수 있겠느냐?" 하니, 말하기를, "김용택과 면질시켜 준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네가 은을 지 상궁(池尙宮)에게 주었을 때 아무아무 사람에 대한 말이 있었는데, 너는 끝내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하니, 말하기를, "네가 상궁의 집에 들어갔기 때문에 나는 너를 통해서 들을 수 있었고, 상궁은 알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양자(養子)인 창귀(昌貴)와 더불어 서로 친하였기 때문에 여러 차례 그 집에 가서 그 원림(園林)을 구경하였더니, 상궁이 주식(酒食)을 대접하였고, 또 신발을 너에게 주었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상궁이 또한 신발을 너에게도 주었다." 하니, 말하기를, "너는 상궁과 함께 방안에 앉아서 비밀한 이야기를 했는데, 무슨 말이었느냐?"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내가 상궁과 서로 만나고 있을 때 너도 또한 같이 참석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말하기를, "이것은 절대로 근거가 없는 말이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너는 육현(陸玄)과 함께 같이 관왕묘(關王廟)에 가서 점을 쳐서 육륙괘(六六卦)를 얻었는데, ‘이것은 곧 손(孫) 방(龐)의 사귐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육현이 이미 죽었으니, 내 점이 과연 징험되었다." 하니, 말하기를, "목호룡은, 육현이 난장(亂杖)을 맞고 죽었기 때문에 그 일을 근사(近似)하게 만들려고 이런 말을 지어내는 것입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백망은 한 마디도 변파(辨破)하는 단서가 없고 하는 말마다 실패하였다 하여 형문(刑問)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형문이 네 차례 행해진 뒤에도 한결같이 저뢰(抵賴)160) 하였으나, 김용택이 칼을 준 일에 대해서는 그 공초에 이르기를, "제가 비록 차고 오지는 않았으나 김용택이 이미 저에게 보냈고, 보검(寶劒)을 저의 거처에서 수색해 내었으니, 이것은 발명(發明)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다시 추문(推問)하는 문목(問目)에 이르기를, "김용택이 칼을 준 한 가지 조항을 이미 자복(自服)하였으니 은을 모은 일 또한 감히 은휘(隱諱)할 수가 없는데, 은화(銀貨)에 대한 내력을 오가(吳哥) 한 사람 외에는 끝내 이름을 지적하여 현고(現告)하지 않았으며, 이영(二英)의 족속(族屬)으로서 나인[內人]이 된 자를 상세히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인 묵세(墨世)가 공초(供招)하기를, ‘재차 가서 이영(二英)을 만났고 백망과 서로 만나 수작한 바가 있었다.’고 하였으니, 전후로 거짓말을 하며 꾸민 정상이 조목마다 탄로되었다." 하였는데, 형문(刑問)이 여덟 차례에 이르렀지만 시종일관 형장(刑杖)을 참고 맞다가 죽었다. 백망은 흉역(兇逆)의 주모자로서 끝내 사실을 털어놓지 아니하여 인정(人情)이 모두 분개하였으므로, 책시(磔屍)·노륙(孥戮)의 법을 추가로 시행하였다. 경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204013_002
Rec-0101 영조실록_4권_1725_0324_01 17250324 遣官致祭于關王廟及宣武祠。 上於送勅路上, 望見關王廟, 敎曰: "予於昔年, 歷見東郊武安王廟, 今又南廟當路。 遣官致祭, 以表予慕忠欽義之意。 宣武祠別爲致祭, 以示予仰體聖祖尊周大義。" 관원을 관왕묘(關王廟) 및 선무사(宣武祠)에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임금이 칙사(勅使)를 전송하는 노상(路上)에서 관왕묘를 바라보고 전교하기를, "내가 지난해에 동교(東郊)의 무안왕묘(武安王廟)를 두루 보았는데 이제 또 남묘(南廟)가 길에서 마주 보이니,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여 내가 충의(忠義)를 흠모(欽慕)하는 뜻을 표하도록 하라. 그리고 선무사(宣武祠)에도 별도로 치제(致祭)하여 내가 성조(聖祖)의 존주대의(尊周大義)를 우러러 본받음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103024_001
Rec-0102 영조실록_6권_1725_0610_06 17250610 命修改武安王塑像、服色。 무안왕(武安王)의 소상(塑像)과 복색(服色)을 고치도록 명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106010_006
Rec-0103 영조실록_11권_1727_0202_02 17270202 上閱武于箭川之野。 先是, 領府事閔鎭遠以爲, 三年甫畢, 不可觀武, 引先朝大臣, 請寢陵幸時閱武事, 微達其意。 上取覽日記, 先朝戊辰, 果有大臣所奏, 而其後陵幸, 多有閱武之擧。 上以鎭遠所奏不審, 有嚴敎。 至是遂親閱, 賜廐馬於三將臣, 仍歷臨關王廟。 禮曹判書申思喆奏曰: "考見日記, 則宣廟幸關王廟, 行再拜禮, 先朝行揖禮矣。" 上行再拜。 임금이 전천(箭川) 들에서 열무(閱武)하였다. 이에 앞서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삼년상(三年喪)을 겨우 마쳤으므로 관무(觀武)를 할 수 없다고 여겨 선왕조(先王朝)에 대신이 능(陵)에 행행(幸行) 때의 열무를 정지하기를 청했던 일을 들어 넌지시 그런 뜻으로 진달하니, 임금이 일기(日記)를 가져다보자, 선왕조 무진년에 과연 대신이 아뢴 바가 있었기는 하나, 그 뒤의 능 행차에 열무를 한 일이 많이 있었으므로, 임금이 민진원의 아뢴 말이 잘 살피지 못한 것임을 들어 준엄한 분부가 있었다. 이에 이르러 드디어 친히 열무하고서 세 장신(將臣)에게 내구마(內廐馬)를 내리고, 이어 지나오다가 관왕묘(關王廟)에 임하게 되었는데,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이 아뢰기를, "일기(日記)를 고찰해 보건대, 선조(宣祖)께서는 관왕묘(關王廟)에 행차하여 재배(再拜)하는 예를 거행하셨고, 선왕조(先王朝)에는 읍(揖)을 하는 예만 거행하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재배하는 예를 거행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302002_002
Rec-0104 영조실록_28권_1730_1020_03 17301020 午時, 上從協陽門進發, 到關王廟前迎哭, 神輦陪從, 由弘化門至明政殿月臺, 下輦。 神輦由明政殿內, 從建福門, 入文政殿內, 上步從於殿內, 與內侍, 奉出神位, 安於神榻上, 親行再虞祭。 禮畢, 敎曰: "我國法令不嚴, 士夫家下人, 當服靑衣, 時以白衣入闕, 當服白衣時, 以靑衣入闕。 卽今在下者, 雖是朞年服, 而在上者服衰三年, 事當從上服白衣, 而今日擧動吏隷輩入闕者, 靑白相雜, 事甚可駭。 各司吏隷服靑衣者, 該官員推考, 朝士傔從, 則各其官員, 一體推考。 오시(午時)에 임금이 협양문(協陽門)에서 출발하여 관왕묘(關王廟) 앞에 이르러 신연(神輦)을 곡하며 맞아 배종(陪從)하여 홍화문(弘化門)을 거쳐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이르러 연(輦)에서 내렸다. 신연은 명정전의 안뜰을 거쳐 건복문(建福門)을 지나 문정전(文政殿) 위에 이르렀는데, 임금이 보행으로 전 안에 따라들어와 내시와 함께 신위(神位)를 모셔내어 신탑(神榻) 위에 안치하고 친히 재우제(再虞祭)를 지냈다. 예를 마치고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는 법령이 엄하지 않아서 사대부(士大夫) 집의 하인들이 마땅히 청의(靑衣)를 입어야 할 때에는 백의(白衣) 차림으로 대궐에 들어오고 백의를 입어야 할 때에는 청의 차림으로 대궐에 들어오고 있다. 지금 재하자(在下者)는 비록 기년복(朞年服)이지만 윗사람이 3년 상복을 입으면 마땅히 윗사람을 따라 백의를 입어야 함에도 오늘의 거동에 이례배(吏隷輩)의 대궐에 들어온 자는 청의와 백의가 뒤섞였으니, 일이 매우 해괴하다. 각사(各司)의 이례로 청의를 입은 자는 해당 관원을 추고(推考)하고 조사(朝士)의 겸종(傔從)은 각각 그 관원을 일체로 추고하라." 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610020_003
Rec-0105 영조실록_32권_1732_0816_01 17320816 上詣明陵行祭。 祭訖, 歷謁敬陵、翼陵。 遣大臣攝祭于昌陵、敬陵、翼陵, 遣官致祭于順懷墓。 到晝停所, 引見京畿監司尹陽來及差員守令。 將幸南關王廟, 三司及藥院之臣迭進力諫, 請寢成命, 上不從。 到廟將行拜禮, 右承旨趙命臣曰: "似當行揖禮。" 左承旨趙明翼曰: "昔肅廟初行揖禮, 後因收議, 以再拜定式矣。" 上遂行再拜禮。 임금이 명릉(明陵)에 나아가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마치고 나서 경릉(敬陵)·익릉(翼陵)을 두루 배알(拜謁)하였다. 그리고 대신(大臣)을 창릉(昌陵)·경릉(敬陵)·익릉(翼陵)에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순회묘(順懷墓)에는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 경기 감사 윤양래(尹陽來)와 차원(差員)·수령(守令)을 인견하였다. 장차 남관왕묘(南關王廟)로 행행(幸行)하려 하니, 삼사(三司)와 약원(藥院)의 신하들이 교대로 극력 간하면서 성명(成命)을 정지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남관왕묘에 이르러 장차 배례(拜禮)를 행하려 하니, 우승지 조명신(趙命臣)이 아뢰기를, "읍례(揖禮)를 행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고, 좌승지 조명익(趙明翼)은 아뢰기를, "옛날 숙묘(肅廟)께서도 처음에는 읍례(揖禮)를 행하였다가 뒤에 수의(收議)로 인하여 재배(再拜)하는 것을 법식으로 정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808016_001
Rec-0106 영조실록_49권_1739_0529_01 17390529 上行雩壇祭。 禮畢還宮, 歷幸關王廟, 行再拜禮, 命改製神像龍袍。 임금이 우단제(雩壇祭)를 행하였다. 예가 끝나고 환궁할 때에 관왕묘(關王廟)에 들러 재배례(再拜禮)를 행하고, 신상(神像)의 용포(龍袍)를 고쳐 지으라고 명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1505029_001
Rec-0107 영조실록_49권_1739_0609_01 17390609 重修東南關王廟, 遣官致祭。 동관왕묘(東關王廟)를 중수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1506009_001
Rec-0108 영조실록_58권_1743_0820_01 17430820 上詣貞陵, 奉審, 仍行酌獻禮。 禮畢, 上召問本陵參奉柳聖躋曰: "惠愼翁主墓, 在何處乎?" 聖躋曰: "彼紅箭門內樹密處是也。" 上曰: "墓碣其長幾何?" 聖躋曰: "其長不過外邑之善政碑也。" 上曰: "惠愼翁主, 不知爲何時翁主, 而《璿源譜略》旣無所載, 博考於封陵時儀軌及私家文字, 前頭實錄曝曬時, 亦令史官考出也。" 回鑾時, 到沙里坪, 御將臺閱武。 召副摠管尹光莘敎曰: "素知汝勇力, 予欲一試。 汝須突入訓局陣內, 抽來令箭。" 光莘承命而出, 欲突入訓局陣, 訓局陣拒而不納, 馬兵及別武士, 自左右門翼擊之, 光莘幾爲所圍。 上召內乘李章吾敎曰: "汝可往助之也。" 章吾承命而往。 俄而光莘奪取五六介箭及一箇鐵打子而來, 章吾亦奪取一箇鐵打子來。 上屢加稱歎, 賞光莘太僕馬, 章吾豹皮。 又以軍容頗整, 陣法不紊, 各賜馬于訓、御兩大將。 召見京畿監司及各務差員, 下詢被霜後農形失稔之狀。 廣州府尹徐命珩, 以本州下七面, 距府城頗遠, 請設外倉, 上曰: "不務城內之儲穀, 反請外倉之別設, 適足爲齎盜糧之資也。" 特命重推。 是日歷臨關王廟, 行再拜禮, 仍次肅廟 關王廟御製七絶, 命卽刊揭, 南關王廟亦令擇日致祭。 還御興仁門樓, 巡覽城堞, 召大臣諸宰, 問築城便否。 時有都城增築之議, 而人有以東城地勢平易, 宜設雉增埤爲言者, 故上親自登覽。 上之自敎場向關王廟也, 兩司臺臣請對於道中, 上駐馬召之, 諸臺未卽趨進, 上怒其遲, 命竝遞差。 至關王廟, 上曰: "是必諫吾登城也。" 遂寢前命。 又命賜祭于廣平大君之廟, 廟在輦之傍, 而廣平卽世宗朝大君也。 임금이 정릉(貞陵)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이어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작헌례를 마치자, 본릉의 참봉 유성제(柳聖躋)를 불러 묻기를, "혜신 옹주(惠愼翁主)의 묘(墓)는 어느 곳에 있는가?" 하니, 유성제가 말하기를, "저 홍살문[紅箭門] 안의 나무가 무성한 곳이 바로 묘소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묘갈(墓碣)의 길이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유성제가 말하기를, "그 길이는 외방 고을의 선정비(善政碑)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혜신 옹주는 어느 때 옹주인지 알지 못하는데 《선원보략(璿源譜略)》에도 이미 실려 있지 않으니, 봉릉(封陵)하였을 때의 의궤(儀軌)와 사가(私家)의 문자를 널리 상고하고, 앞으로 실록(實錄)을 포쇄(曝曬)할 때에 또한 사관으로 하여금 상고해 내도록 하라." 하였다. 회가(回駕)할 때에 사리평(沙里坪)에 이르자, 장대(將臺)에 나아가 열무(閱武)하였다. 부총관 윤광신(尹光莘)을 불러 하교하기를, "평소에 너의 용력(勇力)을 알고 있었는데, 내가 한 번 시험하고자 한다. 네가 훈국의 진영(陳營) 안에 돌입하여 영전(令箭)을 뽑아 오도록 하라." 하였다. 윤광신이 명을 받고 나가 훈국의 진영에 돌입하려고 하였는데, 훈국의 진영에서 굳게 막고 받아들이지 않고 마병(馬兵)과 별무사(別武士)가 좌우의 문 날개에서 공격(攻擊)하니, 윤광신이 거의 에워싸이게 되었다. 임금이 내승(內乘) 이장오(李章吾)를 불러 하교하기를, "네가 가서 도와주도록 하라." 하니, 이장오가 명을 받들고 나아갔다. 조금 후에 윤광신이 영전 56개와 철타자(鐵打子) 1개를 빼앗아 가지고 오고, 이장오도 철타자 1개를 빼앗아 가지고 왔다. 임금이 여러 차례 칭찬하고 윤광신에게 태복마(太僕馬)를 상주고 이장오에게 표피(豹皮)를 내려 주었다. 또 군용(軍容)이 자못 정제되고 진법(陣法)이 문란하지 않았다 하여 훈련 대장과 어영 대장에게 각기 말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경기 감사와 각무 차사원(各務差使員)을 불러 보고, 서리가 내린 후에 곡식이 여물지 않은 상황을 하문(下問)하였다. 광주 부윤(廣州府尹) 서명형(徐命珩)이 본주 아래편에 있는 7면(面)은 부성(府城)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 외창(外倉)을 설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성 안에 곡식을 저축하는 데 힘쓰지 않고 도리어 따로 외창을 설치할 것을 청하니, 이는 한갓 도둑에게 양식을 갖다 주는 바탕이 될 뿐이다." 하고, 특별히 중차하도록 명하였다. 이날 관왕묘(關王廟)에 두루 임어하여 재배례(再拜禮)를 행하고, 이어 숙종(肅宗)이 관왕묘를 두고 지은 칠언 절구(七言絶句)를 차운(次韻)하고, 〈편액(扁額)에〉 새겨 걸도록 명하였으며, 남 관왕묘(南關王廟)에도 날을 가려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돌아와서 흥인문(興仁門)의 누각에 임어하여 성첩(城堞)을 두루 살펴보고 대신과 여러 재신들을 불러 축성(築城)에 대한 편의 여부를 물었다. 이때 도성을 중축하고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혹자는 ‘동성(東城)의 지형이 낮으니 치첨(雉堞)을 설치하고 여장(女牆)을 증축함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므로 임금이 친히 성첩에 올라가 살펴본 것이다. 임금이 교장(敎場)에서 관왕묘로 향할 즈음에 양사(兩司)의 대신(臺臣)들이 도중에서 청대(請對)하자, 임금이 말을 멈추고 불렀는데, 여러 대신들이 미처 추창(趨蹌)해 나가지 못하니 임금이 그 지체되는 데 노하여 모두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관왕묘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청대한 것은 반드시 나에게 성첩에 오를 것을 간(諫)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앞서의 명을 정지하였다. 또 광평 대군(廣平大君)의 사당에 치제하라고 명하였으니, 그 사당이 연로(輦路)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평은 곧 세종조(世宗朝)의 대군(大君)이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1908020_001
Rec-0109 영조실록_64권_1746_0810_01 17460810 上謁宣陵、靖陵, 親祭如儀。 是日, 大駕至西氷湖, 軍馬以船小不卽渡, 命猝入工曹郞廳申景閔, 下嚴敎曰: "乘船放砲後, 軍若未濟, 則當斬汝以徇, 工判當決棍矣。" 仍歷臨南關王廟, 行拜禮, 如梨峴宮, 少憩還宮。 遣承旨, 致祭于東、南關王廟, 龍袍及左右塑像及墻垣, 幷令修補。 임금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알현하고 친제(親祭)를 의식과 같이 행하였다. 이날 대가(大駕)가 서빙호(西氷湖)에 이르렀을 무렵 배가 작아서 군마(軍馬)가 곧장 건너가지 못하자, 공조 낭청 신경민(申景閔)을 잡아들이도록 명하고 엄교(嚴敎)를 내리기를, "배를 타고 포를 쏜 뒤에도 군사가 아직 건너지 못할 것 같으면 네 목을 베어 조리를 돌리고 공조 판서는 곤장을 치리라." 하였다. 이어서 지나는 길에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들려 배례를 행하였고, 이현궁(梨峴宮)에 가서 조금 쉬었다가 환궁하였다. 그리고 승지를 동관왕묘·남관왕묘에 보내어 치제(致祭)를 하고 용포(龍袍)와 좌우 소상(塑像) 및 담장을 모두 보수하라고 명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208010_001
Rec-0110 영조실록_64권_1746_0822_04 17460822 上以鳳輝事, 謂領議政金在魯曰: "左相若在, 欲諭予意, 而不幸已矣。" 在魯曰: "左相在時, 亦無他意, 而未嘗不嚴於懲討也。 右相所謂將功補過云者, 卽擊去沈檀事也。 其罪是何等罪惡, 而欲將功贖之耶?" 上曰: "沈檀別無摸捉, 而於泰耉則無足爲功矣。" 在魯曰: "聖時等皆參沈檀啓辭, 然則六賊亦可謂有功乎?" 上仍問耉、輝有罪與否於諸史官, 皆對以不可不討也。 上召禮曹郞官, 問拜關王廟服色儀註, 對曰: "當用袞龍袍矣。" 右參贊元景夏曰: "以武成王爲號者, 如文宣王之義, 皆出於唐時矣。 今旣命修東、南廟, 安東、星州、古今島三處關王廟, 亦宜一體修改。" 上從之。 景夏曰: "洪字定嶺南節士也。 當丙子亂後, 隱於太白山中, 累除職不仕, 嶺南人士, 至今稱之爲崇禎處士。 其節義甚卓異, 宜有褒奬之道。" 上曰: "聞甚可佳。 令該曹贈職, 錄用其子孫。" 景夏又奏曰: "榮川故參判金玏家, 有神宗皇帝御賜《大學衍義》一部, 而卷首安二寶, 一曰廣運之寶, 一曰欽文之璽, 而紫泥尙新。 宣廟時, 神宗皇帝頒賜幞頭、襴衫二襲, 一在太學, 一在安東鄕校, 而其在太學者已燹於壬辰, 其在安東者至今完善。 嘉靖庚子, 中廟設賞花宴於慶會樓下, 故贊成權橃沈醉退出之際, 袖中墜《近思錄》一卷, 中廟取覽, 此在兵曹佐郞權萬家矣。" 上命嶺營, 進《大學衍義》、襴衫、幞頭, 而令權萬進《近思錄》。 임금이 유봉휘(柳鳳輝)의 일을 가지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말하기를, "만약 좌상이 있다면 나의 뜻을 개유하고 싶은데 불행스러울 뿐이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좌상이 있을 적에도 다른 뜻은 없었고, 일찍이 징토(懲討)하는 데 엄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우상이 이른바 ‘공을 가지고 허물을 보충한다.’는 말은 곧 심단(沈檀)을 공격하여 물리치는 일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의 죄가 어떠한 죄악인데 공을 가지고 속죄시키려 한단 말입니까?"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심단은 모색한 것이 별로 없으니, 조태구에게 비한다면 공이라 할 것이 없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윤성시(尹聖時) 등이 모두 심단의 계사에 참여하였는데 그렇다면 육적(六賊)도 공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어 조태구·유봉휘에게 죄가 있는지의 여부를 여러 사관(史官)에게 물으니, 모두가 토죄(討罪)하지 않을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예조의 낭관(郞官)을 불러서 관왕묘를 배알할 때의 복색(服色)과 의주(儀註)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마땅히 곤룡포를 사용해야 합니다." 하였다. 우참찬 원경하가 말하기를, "무성왕(武成王)이라는 호를 붙인 것은 공자를 문선왕(文宣王)이라고 한 것과 같은 의리로, 모두가 당(唐)나라 때에 나온 것입니다. 지금 이미 동관왕묘·남관왕묘를 보수하도록 명한 이상, 안동(安東)·성주(星州)·고금도(古今島) 세 곳의 관왕묘도 일체 보수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홍우정(洪宇定)은 영남의 절사(節士)입니다. 병자 호란을 당한 이후 태백산 속에 은거하여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하여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으므로, 영남의 인사(人士)가 오늘날까지도 ‘숭정 처사(崇禎處士)’라 일컫고 있습니다. 그의 절의는 매우 탁이(卓異)하니, 포장하는 도리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듣고 보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증직을 내리고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경하가 또 아뢰기를, "영천(榮川) 고(故) 참판 김늑(金玏)의 집에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하사한 《대학연의(大學衍義)》 한 부(部)가 있는데, 권수(券首)에 두 개의 옥새가 찍혀 있어 하나는 ‘광운지보(廣運之寶)’, 하나는 ‘흠문지새(欽文之璽)’로, 인주가 아직 선명합니다. 선조 때 신종 황제가 하사한 복두(幞頭)·난삼(欄衫) 두 벌(櫳)이 한 벌은 태학에 있었고 한 벌은 안동 향교에 있었는데, 태학에 있던 것은 이미 임진 왜란 때 불타버렸고, 안동에 있는 것은 지금까지 완전합니다. 가정(嘉靖) 경자년에 중묘(中廟)께서 경회루 아래에서 상화연(賞花宴)을 베풀었는데, 고 찬성 권벌(權橃)이 술이 취하여 물러나는 순간 소매 속에서 《근사록(近思錄)》 한 권을 떨어뜨린 것을 중묘께서 취해서 보신 일이 있는데, 이 책이 지금 병조 좌랑 권만(權萬)의 집에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영남 감영으로 하여금 《대학연의》와 난삼·복두를 올려 바치도록 하고, 권만으로 하여금 《근사록》을 올려 바치도록 명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208022_004
Rec-0111 영조실록_64권_1746_0828_01 17460828 上如南關王廟, 具袞龍袍、翼善冠, 行再拜禮, 又臨東關王廟如初。 임금이 남관왕묘에 가서 곤룡포와 익선관을 갖추고 재배례를 행하고, 또 동관왕묘에 임어하여서도 처음과 같이 행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208028_001
Rec-0112 영조실록_65권_1747_0517_02 17470517 回駕時, 歷人關王廟。 어가(御駕)가 돌아올 때에 관왕묘(關王廟)에 들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305017_002
Rec-0113 영조실록_72권_1750_0820_02 17500820 上回駕, 歷臨關王廟。 承旨曹命采曰: "臣以信使回還時歷入星州, 星州亦有關王廟, 而塑像、廟宇俱甚剝落, 所見可憫矣。" 上命分付道臣, 卽爲修改。 임금이 돌아오면서 관왕묘(關王廟)를 거쳐 왔다. 승지 조명채가 말하기를, "신이 통신사(通信使)로 돌아올 때 성주(星州)를 거쳤는데, 성주에도 관왕묘가 있었으나 소상(塑像)과 사당(祠堂)이 모두 매우 헐어서 보기에 매우 민망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도신에게 분부하여 즉시 수리하게 하라." 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608020_002
Rec-0114 영조실록_79권_1753_0213_05 17530213 歷臨東關王廟。 命東南廟, 一例致祭。 命戶曹判書趙榮國推考, 以廟中御製紗籠色渝不改也。 동관왕묘(東關王廟)를 들렀다. 동남묘(東南廟)에도 일례(一例)로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 조영국(趙榮國)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는데, 왕묘에 있는 어제(御製)를 싼 사롱(紗籠)의 색깔이 바랬는데도 고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902013_005
Rec-0115 영조실록_79권_1753_0310_01 17530310 上幸懿昭墓。 上戎服出宮, 改具翼善冠、黲袍、烏犀帶上墓, 命御將同上墓。 上哭臨移時, 命承旨讀碑文, 上流涕不已。 命致祭故忠臣吳達濟、尹集、洪翼漢。 上輦過翼漢家, 見旌閭幷賜祭, 錄用其子孫。 又命致祭故完春君 李遂良, 錄其後。 遂良有戊申軍功, 而家在輦路傍也。 還宮時, 歷臨關王廟。 上曰: "有能擧靑龍刀者乎?" 別軍職李義培拔出再揮。 上曰: "壯士也。" 命僉使除授。 임금이 의소묘(懿昭墓)에 거둥하였다. 임금이 융복(戎服) 차림으로 출궁(出宮)하여 다시 익선관에 참포·오서대로 갖추고 묘소로 올라갔는데 어장(御將)에게 함께 묘소로 올라가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한참 동안 곡림(哭臨)하고 나서 승지에게 비문(碑文)을 읽게 했는데 임금의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고 충신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임금이 연(輦)을 타고 홍익한의 집앞을 지나다가 정려(旌閭)를 보고 치제하게 하고 그 자손들을 녹용하게 하였다. 또 고 완춘군(完春君) 이수량(李隧良)에게 치제하고 그의 후손을 녹용하라고 명하였다. 이수량은 무신년에 군공(軍功)을 세웠는데 집이 연(輦)이 지나는 길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환궁할 때 관왕묘(關王廟)에 역림(歷臨)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청룡도(靑龍刀)를 들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니, 별군직(別軍職) 이의배(李義培)가 빼어가지고 나와서 두 번 휘둘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장사로다." 하고, 첨사(僉使)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903010_001
Rec-0116 영조실록_85권_1755_0804_01 17550804 上幸順康園, 親祭。 上曰: "慶嬪墓旣在咫尺, 當歷臨。" 遂以步輿, 上墓展禮。 是日還宮, 閱武于東郊, 歷入關王廟。 임금이 순강원(順康園)에 거둥하여 친히 제사(祭祀)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빈(慶嬪)의 묘(墓)가 가까이에 있으니, 마땅히 들러 다녀가야 한다." 하고, 드디어 보여(步輿)로 묘에 올라가 전례(展禮)하였다. 이날에 환궁하여 동교(東郊)에서 열무(閱武)하고, 관왕묘(關王廟)에 들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108004_001
Rec-0117 영조실록_85권_1755_0827_01 17550827 上送淸使于慕華館, 行宴禮。 訖, 上曰: "我國使於彼國, 班行座次何如?" 承旨蔡濟恭對曰: "我使居外國班首矣。 昔在皇朝以我使在僧人、道士之下矣, 文忠公 柳成龍奉使時言, ‘朝鮮卽禮義之國, 使臣不當立於僧、道之下’, 爭之甚力, 皇朝從其言, 命我使遂居其上。 先正臣李滉聞其事, 貽書贊歎之, 此語載其文集矣。" 回駕時, 歷臨關王廟。 임금이 청나라 사신을 모화관(慕華館)에서 전송하면서 연례(宴禮)를 행하였다. 마치고 나서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신이 피국(彼國)에 가면 반행(班行)의 좌석 차례가 어떠한가?" 하니, 승지 채제공(蔡濟恭)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 사신은 외국 반열의 첫자리입니다. 옛날 명(明)나라에서는 우리 나라 사신을 승려와 도사(道士) 아래에 두었는데,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이 사신으로 갔을 때 말하기를, ‘조선(朝鮮)은 예의(禮義)의 나라이니 사신을 승려와 도사 아래에 두어서는 부당하다.’고 힘껏 다투어 명나라에서 그의 말을 따라 우리 나라 사신을 마침내 그들 위에 있게 하였습니다. 선정신 이황(李滉)이 그 일을 듣고는 편지를 보내 찬탄(贊嘆)하였는데, 이 말은 그의 문집에 실려 있습니다." 하였다. 돌아올 때에 관왕묘(關王廟)를 들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108027_001
Rec-0118 영조실록_89권_1757_0202_01 17570202 上臨宣武祠, 行酌獻禮, 仍幸懿昭墓, 歷臨南關王廟。 上至宣武祠行揖禮酌獻畢, 命取首位爵, 上先飮, 仍賜承旨, 侍衛諸臣, 以次飮。 又命取副位爵, 賜忠臣後孫及皇朝人後孫, 上愀然曰: "黃河不淸世人皆濁, 以今日祭酒, 欲洗其心耳。" 임금이 선무사(宣武祠)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이어서 의소묘(懿昭墓)에 거둥하고, 지나는 길에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갔다. 임금이 선무사에 이르러 읍례(揖禮)와 작헌례를 행하고, 이를 마치자 수위(首位)의 술잔을 가져다 임금이 먼저 마시고, 이어서 승지와 시위한 여러 신하들에게 내려 주어 차례로 마시도록 하였다. 또 부위(副位)의 술잔을 가져 오게 하여 충신(忠臣)의 후손 및 명(明)나라 사람의 후손에게 내려 주도록 명하고, 임금이 수심에 잠겨 말하기를, "황하(黃河)가 맑지 못하여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흐리니, 오늘 제주(祭酒)로 그런 마음을 씻으려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302002_001
Rec-0119 영조실록_89권_1757_0202_02 17570202 命致祭于至德祠。 至德祠, 卽讓寧大君廟也, 在關王廟前, 回鑾時聞知, 敎曰: "是我東泰伯也, 所以得至德之名。" 遣承旨審其祠, 及還宮, 卽親製關王廟及至德祠祭文, 不卜日致祭, 又命修葺其祠, 調用後孫。 지덕사(至德祠)에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지덕사는 바로 양녕 대군묘(讓寧大君廟)로서, 남관왕묘(南關王廟) 앞에 있는데, 환궁할 때 듣고서 알고 하교하기를, "양녕 대군은 우리 동방의 태백(太伯)으로, 지덕의 이름을 얻게 된 까닭이다." 하고, 승지를 보내어 그 사우(祠宇)를 살펴보게 하고, 대궐에 돌아오기에 이르러서는 곧바로 관왕묘와 지덕사의 제문(祭文)을 친히 지어서 날짜를 정하지 말고 치제하도록 하였으며, 또 그 사우를 수리하고 후손을 조용(調用)하도록 명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302002_002
Rec-0120 영조실록_94권_1759_0930_02 17590930 上歷臨關王廟。 임금이 관왕묘(關王廟)를 역림(歷臨)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509030_002
Rec-0121 영조실록_94권_1759_1113_02 17591113 大司憲黃景源以所懷陳勉, 優批。 又曰: "臣頃於晝講入侍時, 以陵幸時乘馬事, 有所陳戒矣。 其後懿陵展拜時, 殿下歷臨關王廟, 以甲冑行軍禮而還, 方內無警急之憂, 而人主躬擐甲冑, 非所以身敎東宮也。 俄者以重宰禁推, 不可示元良爲敎。 嗚呼! 聖子神孫, 以殿下一動一靜爲儀則, 而殿下不自愼重, 乃喜爲軍旅事, 至御甲冑而馳驟之, 何以示東宮世孫也? 且關羽雖有忠義, 而其位不過漢諸侯耳, 雖使羽親見殿下, 固當用賓主之禮, 則殿下何可具甲冑行軍禮於羽之前乎? 伊時三司諸臣, 無一人論其不可者, 臣誠不勝其慨然也。 且日昨歷臨宗親府, 逕路至狹, 侍衛不能成列, 宜令該部淸道而後行可也。 豈宜以至狹之路, 倉卒歷臨乎? 近年以來, 聖心暴發, 甚於前日, 雖朝廷大事, 往往有不問大臣而直行者, 固知殿下聖學高明, 閱天下之義理, 亦已多矣。 然《仲虺之誥》曰, ‘以義制事, 以禮制心, 垂裕後昆’, 凡聖心所發, 必制之以禮, 然後動靜云爲之間, 無一不合於道, 而可以垂裕於後昆矣。 上曰: "所陳是矣。 當留心惕慮焉。" 대사헌 황경원(黃景源)이 소회(所懷)로써 진면(陳勉)하자,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말하기를, "신이 며칠 전 주강(晝講)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능(陵)에 행행(幸行)했을 적에 말을 타신 일로 진계(陳戒)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 뒤에 의릉(懿陵)을 전배(展拜)할 때에 전하께서 관왕묘(關王廟)에 들려 갑주(甲胄)를 갖추어 군례(軍禮)를 행하고 돌아왔는데, 바야흐로 안으로 위급함을 알리는 경보(警報)가 없거늘, 인주(人主)가 몸소 갑주를 입은 것은 친히 실천하여 동궁(東宮)을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중신(重臣)과 재신(宰臣)을 의금부(義禁府)에서 추문(推問)하도록 한 것을 원량(元良)에게 보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으로 하교하였습니다. 아! 성자 신손(聖子神孫)이 전하의 일동 일정(一動一靜)으로 의칙(儀則)을 삼는데, 전하께서 스스로 신중을 기하지 아니하고 군려(軍旅)에 종사(從事)함을 기뻐하여 심지어는 갑주를 입고 말을 달리니, 무엇으로 동궁과 세손(世孫)에게 〈모범을〉 보이겠습니까? 또 관우(關羽)가 아무리 충의(忠義)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지위가 한(漢)나라 제후(諸侯)에 지나지 않으니, 비록 관우로 하여금 친히 전하를 뵈옵는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빈주(賓主)의 예(禮)를 쓰는 것이 합당할 터인데, 전하께서 어찌하여 갑주를 갖추어 입고 관 우 앞에서 군례를 행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당시에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가 한 사람도 그것을 불가하다고 의논한 자가 없었으니, 신은 진실로 개연(慨然)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일전에 종친부(宗親府)에 들렸을 적에 지나는 길이 아주 좁아서 시위(侍衛)가 제대로 대열(隊列)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마땅히 해부(該部)로 하여금 길을 깨끗이 치우게 한 뒤에 행행(幸行)을 하였어야 옳았습니다. 어찌 지극히 좁은 길로 갑자기 들른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근년(近年) 이래로 성상의 마음이 폭발(暴發)하는 것이 전날보다 더 심하고, 또 아무리 중대한 조정(朝廷)의 대사라 하더라도 대신들에게 물어 보지도 아니하고 곧바로 행하는 일이 왕왕 있으니, 진실로 전하께서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여 천하의 의리(義理)를 열력한 것이 역시 이미 많은 줄로 압니다. 그러나 〈《서전》 상서(商書)의〉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이르기를, ‘의(義)로써 일을 재제(裁制)하고 예(禮)로써 마음을 재제해야 후손(後孫)들에게 남겨 줄 복이 넉넉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무릇 성심(聖心)이 발하는 바를 반드시 예로써 재제한 뒤에야 움직이고 고요하며 말하고 일하는 사이에 하나도 도(道)에 합당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후손들에게 남겨 줄 것이 넉넉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가 옳다. 마땅히 마음에 두고 척려(惕慮)하겠다." 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511013_002
Rec-0122 영조실록_95권_1760_0529_01 17600529 親祭後還宮, 歷入關王廟, 行再拜禮, 詣太常寺, 奉審神室, 行再拜禮, 見皇明征東陳亡官軍神位板, 命移置宣武祠, 敎曰: "嗚呼! 何見之晩也? 丙丁越二年見此, 予心一倍。 彼官軍隨皇將而來, 戰亡於我東, 尤切愴然。 明日設壇於露梁, 以李泰祥爲獻官致祭, 大祝以李萱爲之。" 泰祥卽忠武公 舜臣之孫, 萱卽李提督廷樑之後也。 敎曰: "豈意幾百年後, 見東援官軍位板於太常神室乎? 事非偶然, 甲申與頃日有司之不奏, 可謂貿貿。 予意則欲配食宣武祠, 而不然建一間宇於宣武祠庭東, 宣武祠祭日, 一體行祭, 一則繼述先志, 一則不忘皇恩。 配食與建宇, 令宗伯, 問于在京時任大臣以奏。 宣武祠卽東援將士之所腏食處也。 친제를 거행한 뒤 환궁할 적에 관왕묘(關王廟)에 들러서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으며, 태상시(太常寺)에 나아가서 신실(神室)을 봉심하고 재배례를 행하였다. 이어 원병(援兵)으로 나왔다가 전사한 명(明)나라 관군의 신위판(神位板)을 보고서 선무사(宣武祠)로 옮기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아! 어찌하여 이처럼 보기가 늦었던가? 병자년 ·정축년에서 2년을 넘어서야 이것을 보니, 나의 마음이 갑절 더 감개스럽다. 저 관군은 명장(明將)을 따라서 나왔다가 우리 나라에서 전사하였으니, 한결 더 슬프다. 내일 노량진에 제단을 설치하여 이태상(李泰祥)으로 헌관을 삼아서 치제(致祭)하되, 대축은 이훤(李萱)으로 하라." 하였다. 이태상은 바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손자이고, 이훤은 바로 〈명나라〉 제독(提督)의 후손이었다. 하교하기를, "몇 백년 뒤에 원병으로 나왔던 관군의 위판을 태상시의 신실에서 볼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니, 갑신년과 지난날에 유사가 아뢰지 않은 것은 너무 무식한 소치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생각인즉 선무사에 배식(配食)시키거나, 아니면 선무사의 동쪽 뜰에다 사우(祠宇) 한 칸을 세워서 선무사의 제삿날에 일체로 제사를 거행하였으면 하는데, 한편으로는 선왕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 되고 한편으로는 황제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된다. 배식하는 것과 사우를 세우는 일을 예조 판서로 하여금 서울에 있는 시임 대신에게 문의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선무사는 바로 임진 왜란 때 원병나왔던 장사(將士)들을 제사하는 곳이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605029_001
Rec-0123 영조실록_95권_1760_0614_01 17600614 回駕時, 歷臨宣武祠拜禮當否, 問于大臣, 則當揖云, 故循例而行, 終涉不然。 長揖不拜, 禮之慢也, 於敵以下, 旣有答而拜焉, 則送使拜門, 禮之當也。 于今更無拜皇華之路, 而兩公之祠, 猶在靑丘, 入其祠而不拜, 是豈思皇恩待皇華之道乎? 遵昔年拜關廟之聖意, 自今日行再拜禮。 近者御帖, 獨於兩公, 不書, 於禮何? 亦非《匪風》ㆍ《下泉》之意。 此後祝文中, 書御諱。 歲月寢久, 不若此, 尊周之義, 將晦於靑丘。 今者二事, 意蓋深也。" 선무사(宣武祠)에 들러서 윤음을 내리기를, "회가(回駕) 때에 선무사(宣武祠)에 들러서 배례를 하는 것이 옳을지의 여부를 대신에게 물은 바, 읍(揖)만 하는 것이 옳다고 하기에 전례에 따라 하였으나, 끝내 생각해 보니 그렇지 않다. 읍만 하고 절을 하지 않는 것은 만례(慢禮)인데, 적(敵) 이하에게도 이미 답례의 절이 있었으니, 사신을 보낼 적에 문에 절하는 것은 당연한 예의이다. 이제 황화(皇華)에게 절할 길은 다시 없으나 양공(兩公)의 사당이 그래도 우리 나라에 있는데, 그 사당에 들어가서 절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황은(皇恩)을 생각하고 황화를 대접하는 도리라 하겠는가? 지난날 관왕묘(關王廟)에 절을 한 선왕의 뜻을 따라서라도 오늘부터는 재배례(再拜禮)를 행하겠다. 근자에 어첩(御帖)을 유독 양공에게만 쓰지 않았는데, 예의에 있어 어떠하겠는가? 또한 비풍(匪風)·하천(下泉)의 뜻이 아니다. 이 뒤로는 축문에 어휘(御諱)를 쓰라. 세월이 오래 되었다 하여 이같이 하지 않는다면 존주(尊周)의 의리가 장차 우리 나라에서 흐려지게 될 것이다. 이번의 두 가지 일은 깊은 뜻이 있어서이다." 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606014_001
Rec-0124 영조실록_98권_1761_0825_02 17610825 上歷臨東關王廟, 命致祭東南廟, 御筆萬古忠節, 千秋義烈, 命揭兩廟。 임금이 동관왕묘(東關王廟)에 임어(臨御)하여 동묘(東廟)와 남묘(南廟)에 치제(致祭)할 것을 명하고, 어필(御筆)로 만고 충절(萬古忠節)·천추 의열(千秋義烈)이라고 써서 동묘(東廟)와 남묘(南廟)에 게시(揭示)할 것을 명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708025_002
Rec-0125 영조실록_98권_1761_1213_03 17611213 上命近來東南關王廟, 便成淫祠, 特爲申飭禁斷焉。 임금이 근래에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남관왕묘(南關王廟)가 문득 음사(淫祠)를 이루고 있으므로 특별히 신칙하여 금단(禁斷)할 것을 명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712013_003
Rec-0126 영조실록_99권_1762_0611_01 17620611 回鑾時, 歷臨關王廟, 行再拜禮, 至惠政橋, 拿入金吾秋曹輕囚罪人, 幷放釋。 어가가 돌아올 때에 관왕묘(關王廟)를 들러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다. 혜정교(惠政橋)에 이르러 금오(金吾)와 추조(秋曹)에서 잡아들인 가벼운 죄수를 아울러 석방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806011_001
Rec-0127 영조실록_100권_1762_0723_01 17620723 上幸思悼墓, 是日卽思悼世子葬日也。 上親自臨視, 上命拿入京畿監司洪啓禧, 上見畿邑民人之上來, 故有是命。 上入丁字閣哭臨, 上曰: "上墓何時。" 左議政洪鳳漢曰: "未時上墓, 而下玄室申初一刻矣。" 上曰: "十三日事。 以事關宗社也。 其時始聞呼父聲, 今日欲報呼父之心矣。 一則予欲終二十年父子之恩而來, 一則予欲親自題主。 予若親題, 則他日必無埋主之議矣。 他日事, 雖卿等, 亦豈知之乎? 予欲參啓殯奠, 大祝以玉堂爲之, 奉爵以承旨爲之。" 鳳漢曰: "臣等亦參哭禮乎?" 上曰: "爲之。 百官亦爲之。" 神輿上墓, 奉玄室于退壙, 洪駿漢ㆍ洪樂信ㆍ樂任等引柩索。 上親自題主, 還宮時歷臨關王廟。 임금이 사도 세자(思悼世子) 묘에 거둥하였는데, 이 날은 사도 세자의 장례일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친히 가서 둘러 보고, 경기 감사(京畿監司) 홍계희(洪啓禧)를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는데, 경기 고을의 백성들이 올라오는 것을 본 까닭에 이런 명이 있었다. 임금이 정자각(丁字閣)에 들어가 곡림(哭臨)하고 나서 임금이 말하기를, "상묘(上墓)는 언제인가?" 하니, 좌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미시(未時)에 상묘하고 현실(玄室)을 내리는 것은 신시(申時) 초 일각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13일의 일은 종사에 관계된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아버지라 부르는 소리를 들었으니, 오늘은 아버지를 부르는 마음에 보답하려 한다. 하나는 내가 20년 부자지은(父子之恩)을 마치려 온 것이고 하나는 내가 친히 제주(題主)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친히 제주하면 다른날에 반드시 신주를 묻어버리자는 논의가 없을 것이다. 뒷일은 비록 경들이라 해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내가 계빈전(啓殯奠)에 참여하고자 하니, 대축(大祝)은 옥당(玉堂)에서 하고 봉작(奉爵)은 승지가 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신들도 또한 곡하는 예에 참여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참여하라. 또한 백관도 참여하라." 하였다. 신여(神輿)가 묘 위에 오르자 현실(玄室)을 퇴광(退壙)에 받들었고, 홍준한(洪駿漢)·홍낙신(洪樂信)·홍낙임(洪樂任) 등이 관의 줄을 끌었다. 임금이 친히 제주(題主)하고, 환궁할 때에 관왕묘(關王廟)를 들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807023_001
Rec-0128 영조실록_103권_1764_0517_01 17640517 上乘步輿, 屛去繖, 蓋親禱雨于南壇, 翌日還宮, 仍歷臨南關王廟, 行再拜禮。 임금이 보여(步輿)를 타고 산개(繖盖)를 물리쳐 버렸으며 친히 남단(南壇)에서 비를 빌고 이튿날 환궁하였는데, 이어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들러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4005017_001
Rec-0129 영조실록_103권_1764_0610_01 17640610 上具冕服, 親祭如儀。 召玉堂官李命植 金魯鎭, 問宋 仁宗悶旱禱雨, 却逍遙輦故事。 罷享, 猶俯伏默禱。 仍命減膳停樂。 朝還宮, 命伸權叙經ㆍ柳徠ㆍ朴趾文之冤。 復徠官。 三人於戊申庚戌, 爲賊所援引, 名在丹書, 而其子若孫, 俱訴冤駕前, 有是命。 仍臨東關王廟, 行再拜禮, 還御景賢堂, 行晝講。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친제(親祭)를 의식대로 거행하였다. 옥당관(玉堂官) 이명식(李命植)과 김노진(金魯鎭)을 불러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가뭄을 걱정하여 비를 빌면서 소요연(逍遙輦)을 물리친 고사(故事)에 대하여 묻고 제향이 끝난 뒤에도 그대로 부복하여 묵도하였으며, 이어 감선(減膳)과 정악(停樂)을 명하였다. 아침에 환궁하여 권서경(權敍經)·유래(柳徠)·박지문(朴趾文)을 신원(伸冤)하도록 명하고 유래의 관작을 회복하여 주었다. 세 사람은 무신년과 경술년에 적(賊)에게 원인(援引)한 바 되어 이름이 단서(丹書)에 올라 있었는데, 그 아들과 손자가 어가 앞에서 소원(訴冤)하여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이어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러 재배례(再拜禮)를 행하고 경현당(景賢堂)에 돌아와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4006010_001
Rec-0130 영조실록_108권_1767_0228_01 17670228 上幸南壇省耕, 王世孫隨駕。 命備堂侍立, 召見農民, 下詢農糧之有無。 命世孫進田畔看審, 仍命春坊官員入侍, 下詢曰: "世孫召見農民乎?" 文學李奎緯對曰: "王世孫親問農作之節, 勞苦之狀矣。" 仍行賓對於幕次。 左議政韓翼謩以民間農牛甚貴, 貧民有牛者少, 請使有牛者許借, 使之通功易事, 有無相濟, 右議政金尙喆, 請嚴禁中外役民之弊, 隨現論罪, 幷允之。 大司憲安允行申前啓, 不允。 司諫李迪輔申前啓, 不允。 命大司憲安允行、大司諫沈墢, 司諫李迪輔罷職, 以允行ㆍ迪輔, 謄傳故紙, 墢昨參今不參也。 還宮時, 命校理趙㻐廉察果川, 歷臨南關王廟, 敎曰: "平生我愛壽亭公, 仰覩昔年御詩也。" 命致祭東南廟, 新備東南廟龍袍。 임금이 남단(南壇)에 행행하여 성경(省耕)하니, 왕세손이 수가(隨駕)하였다. 비국 당상에게 시립(侍立)을 명하고 농민을 불러보고 농사 지을 양식이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 세손에게 밭두렁에 가서 살펴보라고 명하고, 이어서 춘방(春坊) 관원의 입시를 명하여 하문하기를, "세손이 농민을 불러서 보았는가?" 하니, 문학(文學) 이규위(李奎緯)가 대답하기를, "왕세손께서 친히 농사짓는 절기와 노고의 정상을 물으셨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막차에서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민간의 농우(農牛)가 매우 귀하여 가난한 백성으로 소를 가진 자가 매우 적으니, 소를 가진 자로 하여금 빌려 주어 통공(通功)하는 것으로 품앗이를 하여 있고 없고 간에 서로 돕게 하기를 청하고, 우의정 김상철이 중외의 백성을 부리는 폐단을 엄금하여 드러나는 대로 논죄할 것을 청하였는데, 모두 윤허하였다. 대사헌 안윤행(安允行)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 이적보(李迪輔)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헌 안윤행, 대사간 심발(沈墢), 사간 이적보를 파직하라 명하였는데, 안윤행과 이적보는 고지(故紙)를 베껴서 전해 주었고, 심발은 어제는 참석했다가 오늘은 불참하였기 때문이었다. 환궁할 때에 교리(校理) 조준(趙㻐)에게 과천(果川)을 염찰(廉察)하라 명하고, 남관왕묘(南關王廟)를 지나는 길에 들려 하교하기를, "‘평생에 내가 수정공(壽亭公)을 사랑하였네.[平生我愛壽亭公]’라는 옛날 어시(御詩)를 우러러보는구나." 하고,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 치제(致祭)하고, 동관왕묘·남관왕묘에 용포(龍袍)를 새로 비치(備置)하라고 명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4302028_001
Rec-0131 영조실록_110권_1768_0322_02 17680322 命致祭于廣平大君墓, 故相李濡墓, 輦路所經也。 辭陵禮後回鑾。 命承旨招問牟麥豐歉於道傍農人。 詣晝諪所, 命旗鼓迎接。 歷臨東關王廟, 行拜禮, 命訓局御營軍挾輦軍挾輿軍, 令本營試放, 以示體昔年愛恤軍兵之德意。 入崇政門, 駐輿月臺, 命書傳敎, 戒飭臣工, 有滌心廣津之敎。 광평 대군(廣平大君)의 묘소와 고 정승 이유(李濡)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는데, 어가가 지나는 길이었다. 능에 하직하는 예를 거행한 뒤에 어가를 돌렸다. 승지에게 명하여 길가의 농부에게 모맥(牟麥)의 작황을 물어보게 하였다. 주정소(晝停所)에 나아갔는데, 군기(軍旗)와 북을 가지고 영접하라고 명하였다.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려 배례(拜禮)를 거행하고 나서 훈련 도감에 명하여 어영군(御營軍)·협련군(挾輦軍)·협여군(挾輿軍)을 본영으로 하여금 시방(試放)하게 하여 옛날 〈선왕이〉 군병(軍兵)을 아끼었던 뜻을 몸받는 것을 보이라고 명하였다. 숭정문에 들어가 월대에서 가마를 멈추고 나서 전교(傳敎)를 쓰라고 명하여 신료들을 경계하고 신칙하였는데, 광진(廣津)에서 마음을 〈깨끗이〉 씻게 한다는 하교가 있었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4403022_002
Rec-0132 영조실록_111권_1768_0710_01 17680710 上, 幸石隅觀稼。 命畿伯率農民入侍, 各詢農形, 皆以豐年仰對。 還宮時, 歷臨南關王廟。 上以暑氣, 有未寧候, 逮鐘時命藥房入診, 上曰: "自今以後, 予不爲過中之擧矣。" 都提調徐志修曰: "悔者, 吉之幾也。 史官當書而記之。" 旣而連進香橘茶茹藿湯, 向晨始復常。 天明退出。 임금이 친히 석우(石隅)에 나아가 농사를 보았다. 기백(畿伯)에게 명하여 농민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게 하여 각각 농사 형편을 물으니, 모두 풍년이라고 대답하였다. 환궁(還宮)할 때에 남관 왕묘(南關王廟)에 들렀다. 임금이 더위 때문에 편치 못한 증세가 있어 종을 칠 때에 이르러 약방에 입진(入診)하도록 명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내가 지나친 거둥은 하지 않겠다." 하니, 도제조 서지수가 말하기를, "뉘우치는 것은 길(吉)한 기미(機微)입니다. 사관(史官)이 써서 기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얼마 후에 향귤다(香橘茶), 여곽탕(茹藿湯)을 연달아 올리니, 새벽이 되자 비로소 평상을 회복하였다. 날이 밝아서야 물러나갔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4407010_001
Rec-0133 영조실록_115권_1770_0702_01 17700702 上幸石隅, 觀農形, 石隅南郊也。 回駕歷臨關王廟行再拜, 出廟門時, 上曰: "曾聞至德祠在此, 相距爲幾何?" 都承旨李重祜曰: "不遠矣。" 仍敎曰: "子曰: ‘泰伯, 其至德也。’ 夫我國讓寧大君, 周之泰伯也。 故昔年建祠, 命名至德, 猗歟盛矣。 今聞其祠版, 在於其孫任所。 令道臣, 定祭官致祭。" 仍幸彰義宮經宿。 임금이 석우(石隅)에 거둥하여 농사 형편을 살펴보았다. 석우는 바로 남교(南郊)이다. 돌아오면서 관왕묘(關王廟)에 들러 절을 두 번 하고 묘문을 나올 적에,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지덕사(至德祠)가 여기에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도승지 이중호(李重祜)가 말하기를, "멀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이어 하교하기를,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태백(泰伯)은 지극히 높은 덕(德)을 지녔도다.’ 하였는데, 무릇 우리 나라의 양녕 대군(讓寧大君)은 주(周)나라의 태백이다. 때문에 지난날에 사당을 세워 지덕사라고 명명하였으니, 아! 거룩하도다. 지금 듣건대 그 위판(位版)이 후손의 임소(任所)에 있다고 한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제관을 차정하여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창의궁에 거둥하여 밤을 지냈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4607002_001
Rec-0134 영조실록_116권_1771_0513_01 17710513 上幸石隅, 王世孫隨駕, 爲雨後觀稼也。 先詣追慕洞, 行四拜禮於追慕碑前, 王世孫同爲行禮, 召見閔台烈, 使之錄用。 次詣武安廟, 與世孫行再拜禮, 親製祭文, 使明日受香, 竝祭東南廟, 仍詣觀稼臺, 召見時原任大臣畿伯。 임금이 석우(石隅)에 거둥하니 왕세손(王世孫)이 수가(隨駕)하였는데, 비가 내린 뒤에 관가(觀稼)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추모동(追慕洞)에 나아가 추모비(追慕碑) 앞에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는데 왕세손도 같이 행례(行禮)하였으며, 민태열(閔台烈)을 소견(召見)하고 그를 녹용(錄用)하도록 하였다. 다음에는 무안묘(武安廟)에 나아가 왕세손과 같이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으며, 친히 제문(祭文)를 지어 내일 향(香)을 받게 하고, 아울러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인하여 관가대(觀稼臺)에 나아가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그리고 기백(畿伯)을 소견(召見)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4705013_001
Rec-0135 영조실록_117권_1771_0803_01 17710803 上親臨義禁府, 敎曰: "予(子)不必至於斯, 而有誤之者, 此臣下之過也。" 親問儀之等 敎曰: "今者沈儀之其所不道, 甚於韓鍮。 鍮則猶隻立之人, 不擇言猶可也, 今者儀之所謂木器, 殿下豈不知之云? 此眞箇逆賊也。 亟施逆律。" 又敎曰: "今者沈儀之萬萬陰慘, 故雖施逆律, 此與關係大逆者有間, 應坐人特除一律, 爲奴竄配。" 上問道燦曰: "汝與韓鍮相知於何年, 儀之亦知於何年乎?" 供: "初不知韓鍮, 因儀之, 去月晦始知之。 儀之則自前相親矣。" 上曰: "韓鍮事何如?" 道燦曰: "奇特矣。" 上曰: "初見於何處乎?" 道燦曰: "逢於南關王廟, 而沈儀之要來, 故往見矣。" 上曰: "獻一物三字, 汝知之乎?" 供: "未能知矣。" 上曰: "未能知則何爲生怯乎?" 供: "聞其逆賊鳳漢云, 故心寒矣。 鳳漢之貪權誤國, 實可斬, 故以鍮言爲是矣。" 上曰: "洪奉朝賀, 何憎於汝, 而斥其姓名乎?" 供: "貪權誤國, 擧世皆惡之, 故臣亦切痛矣。 臣之未能言, 鍮之所言者, 一有侵斥, 將不免粉骨碎首, 有父母者, 畏而不敢言矣。" 上曰: "此則薄物細故。 直招其二字。" 命施訊杖, 道燦終始發明。 上曰: "汝心果以韓鍮爲奇特乎?" 道燦曰: "臣本畏於刑杖, 故未能爲之, 若不畏刑杖, 則何讓於韓鍮乎?" 上曰: "二字斯速直告。" 道燦曰: "此則實無之矣。" 上命蒙頭, 敎曰: "二字雖不知, 與奉朝賀有何怨乎? 前者鍮及儀之特爲減死, 而今又若是, 生置於覆載之間, 後復如是。 殺之何惜?" 更加刑訉訊, 黑山島限己身充軍。 임금이 의금부(義禁府)에 친림(親臨)하여 하교하기를, "내가 반드시 이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인데, 잘못이 있었을 경우 신하들의 잘못이다." 하고, 심의지(沈儀之) 등에게 친히 묻고, 하교하기를, "지금 심의지의 부도(不道)한 바는 한유(韓鍮)보다 심하다. 한유는 그래도 도와 주는 사람 없이 홀로 선 사람이므로 말을 가리지 않아도 오히려 가(可)하겠지만, 지금 심의지가 이른바 목기(木器)에 대해,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것을 모르십니까?’ 한 이것은 진실로 역적이다. 빨리 역률(逆律)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지금 심의지가 몹시 음참(陰慘)하므로, 비록 역률을 시행하지만, 이는 대역(大逆)에 관계되는 것과 차이가 있으니, 응당 연좌시킬 사람들은 특별히 일률(一律)을 제하여 종을 삼아 찬배(竄配)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이도찬에게 묻기를, "너는 한유와 어느 해부터 알았으며, 심의지 또한 어느 해부터 알았느냐?" 하니, 공초하기를, "애초에 한유는 알지 못하였는데, 지난달 그믐에 심의지로 인하여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의지는 전부터 서로 친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유의 일은 어떠한가?" 하니, 이도찬이 말하기를, "기특(奇特)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 어느 곳에서 보았는가?" 하니, 이도찬이 말하기를, "남관왕묘(南關王廟)에서 만났는데, 심의지가 오기를 요구하므로 가서 보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물을 바쳤다[獻一物]’는 세 글자에 대해 너는 알고 있었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알지 못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겁을 내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역적 홍봉한(洪鳳漢)이라고 한 말을 들었으므로, 마음이 서늘해졌습니다. 홍봉한은 권세를 탐하여 나라를 그르쳤으므로, 진실로 참(斬)할 만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한유의 말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홍 봉조하가 무엇 때문에 너에게 미움받아 그 성명(姓名)을 배척하였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권세를 탐하여 나라를 그르친 것은 세상에서 모두 미워하므로, 신 또한 매우 통분하게 여겼습니다. 신이 말할 수 없었고 한유가 말한 바는 한번 침척(侵斥)하는 일이 있으면, 장차 뼈가 가루가 되고 머리가 바스러지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부모가 있는 자는 두려워서 감히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자질구레한 일들이다. 그 두 자에 대해 정직하게 공초하도록 하라." 하고, 신장(訊杖)을 베풀도록 명하였는데, 이도찬이 처음부터 끝까지 발명(發明)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마음속으로 과연 한유를 기특하다고 생각하였느냐?" 하니, 이도찬이 말하기를, "신은 본래 형장(刑杖)을 두려워하므로 할 수 없었지만, 만약 형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한유에게 양보하였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두 글자에 대해 속히 정직하게 고하도록 하라." 하니, 이도찬이 말하기를, "이것은 진실로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몽두(蒙頭)를 씌우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두 자는 비록 모른다고 하더라도 봉조하와 무슨 원한이 있느냐? 전에 한유와 심의지를 특별히 감사(減死)하게 하였었는데 이제 또 이와 같으니, 천지 사이에 살려 둔다면 훗날 다시 이와 같을 것이다. 죽인들 어찌 애석하겠는가?" 하고, 다시 형신(刑訊)을 가하여 흑산도(黑山島)에 자신에 한해서 충군(充軍)하도록 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4708003_001
Rec-0136 영조실록_117권_1771_0828_02 17710828 上 命建閣于淨業舊基立碑, 御書淨業院舊基五字以下。 院在興仁門外山谷中, 南距東關王廟不遠, 卽燕尾汀洞, 而端宗大王王后宋氏遜位後所住舊基也。 임금이 정업원(淨業院)의 옛터에 누각(樓閣)을 세우고 비석을 세우도록 명하고,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다섯 자를 써서 내렸다. 정업원은 흥인문(興仁門) 밖 산골짜기 가운데에 있는데, 남쪽으로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멀지 않았으며, 곧 연미정동(燕尾汀洞)으로, 단종 대왕(端宗大王)의 왕후 송씨(宋氏)가 손위(遜位)한 후 거주하던 옛터이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4708028_002
Rec-0137 영조실록_117권_1771_0906_01 17710906 上率王世孫, 詣昌德宮, 仍詣淨業院。 是時, 上因思陵陵役, 訪問思陵舊事, 承旨任希敎以前參判鄭運維詳知其事蹟仰對, 上命運維來待於淨業院入侍。 上曰: " 聖后何時來住此地?" 對曰: "年紀無可徵文字。 而其時光廟憐定順王后孤孑無依, 欲賜第於京中, 后願得東門外望東地居之, 命賜材木造成, 卽淨業院基址。 而師兄尹氏名惠誾處衿得者, 今其文案, 尙在臣家, 故知之。 文書中, 有祠堂三間, 熟設廳二間之文, 聖后之親行端廟祭祀於此處明矣。 以臣先祖名眉壽, 定侍養, 後移御臣祖家, 蓋未定侍養之前, 稱淨業院住持魯山君夫人, 此非崇信佛氏也。" 上曰: "卿祖於聖后, 爲何親?" 對曰: "臣先祖, 卽文廟外孫, 而敬惠公主子也。 是故, 聖后以臣祖定侍養, 而禮陟於臣家矣。" 上曰: "其時卿家, 在於何處?" 對曰: "卽今光恩副尉 金斗性家也。" 上仍命鄭運維加資。 先是, 上聞凈業院遺址之在此, 故竪碑識之。 及碑成, 上先詣昌德宮, 口奏竪碑事於眞殿, 仍幸淨業遺址, 奉審碑閣, 行四拜禮於閣前, 曰: " 聖后陟降之靈, 今日必臨於此矣。" 親書東望峰三字, 命鐫於院之對案峰石上, 峰卽定順王后登臨望寧越之處也。 回鑾時, 歷臨東關王廟及光恩副尉 金斗性家。 仍詣毓祥宮。 上之歷臨主第時, 以前後廂之不爲留駐, 侍衛之直過洞口前, 特罷兵曹判書具善行, 以趙曮代之。 竝遞諸承旨, 以鄭運維ㆍ金致讓ㆍ李壽鳳ㆍ申尙權ㆍ呂善德ㆍ申大顯代之, 善德, 時以通禮, 陪駕故也。 임금이 왕세손을 거느리고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갔다가, 이어서 정업원(淨業院)에 나아갔다. 이때 임금이 사릉(思陵)의 능역(陵役)으로 인하여 사릉의 옛일에 대해 물었는데, 승지 임희교(任希敎)가 전 참판 정운유(鄭運維)가 그 사적(事蹟)을 자세히 알고 있다고 우러러 대답하니, 임금이 정운유에게 명하여 정업원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입시토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후(聖后)께서 언제 이곳에 와서 거주하셨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느 해인지 징험할 만한 문자가 없습니다. 그 당시 광묘(光廟)께서 정순 왕후(定順王后)가 외롭게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경중(京中)에 집을 내려 주고자 하였으나, 왕후께서 동문(東門) 밖의 동쪽 땅이 바라보이는 곳에 살기를 원하니, 재목을 내려 주어 짓도록 명하였는데, 이것이 곧 정업원 기지(基址)입니다. 그런데 사형(師兄) 윤씨로 이름이 혜은(惠誾)인 사람 처소의 금득(衿得)이라는 자에 대해 지금 그 문안(文案)이 아직도 신의 집에 있으므로 알고 있습니다. 문서(文書) 가운데 사당(祠堂) 3간, 숙설청(熟設廳) 2간이라는 글이 있었으니, 성후(聖后)께서 친히 이곳에서 단묘(端廟)의 제사를 행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신의 선조 정미수(鄭眉壽)로 하여금 시양(侍養)하도록 정한 후 신의 선조 집으로 이어(移御)하셨는데, 대개 시양을 정하기 전에 정업원 주지 노산군 부인(魯山君夫人)이라고 일컬었으나, 이것은 불씨(佛氏)를 숭신(崇信)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선조는 성후와 어떤 친척이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선조는 곧 문묘(文廟)의 외손(外孫)이고, 경혜 공주(敬惠公主)의 아들입니다. 이 때문에 성후께서 신의 선조로 하여금 시양하게 하셨고, 신의 집에서 예척(禮陟)하셨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당시 경의 집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광은 부위(光恩副尉) 김두성(金斗性)의 집입니다." 하였다. 인하여 임금이 정운유에게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정업원의 유지(遺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비석을 세워 표지(表識)하게 하였다. 비석이 완성되자 임금이 먼저 창덕궁에 나아가 진전(眞殿)에 비석 세운 일을 직접 아뢰고, 이어서 정업원 유지에 거둥하여 비각(碑閣)을 봉심(奉審)하고, 비각 앞에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한 다음 말하기를, "오르내리시는 성후의 영령(英靈)께서 오늘 반드시 이곳에 임어하셨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친히 ‘동망봉(東望峰)’ 세 글자를 쓰고 원(院)과 마주 대하고 있는 봉우리 바위에 새기도록 명하였는데, 곧 정순 왕후가 올라가서 영월(寧越) 쪽을 바라다보던 곳이다. 환궁[回鑾]할 때 동관왕묘(東關王廟)와 광은 부위 김두성의 집에 두루 임어하였다. 이어서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 임금이 공주의 집을 두루 임어할 때 전상(前廂)·후상(後廂)이 머물지 않음으로써 시위(侍衛)가 동구(洞口) 앞을 곧바로 지나쳤다 하여 특별히 병조 판서 구선행(具善行)을 파직하고 조엄(趙曮)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여러 승지들을 아울러 체차(遞差)하고 정운유(鄭運維)·김치양(金致讓)·이수봉(李壽鳳)·신상권(申尙權)·여선덕(呂善德)·신대현(申大顯)으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여선덕은 당시에 통례(通禮)로서 어가(御駕)를 배종(陪從)한 때문이었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4709006_001
Rec-0138 영조실록_117권_1771_1022_01 17711022 是日, 肇慶廟位版, 奉往全州。 上詣資政殿, 行酌獻禮, 乘輿陪神輦, 到西氷庫津頭, 奉安神輦于龍舟後, 四拜以辭, 俯伏沙場, 哽咽良久。 回駕, 歷臨關王廟, 親製祭文, 使之致祭。 【史臣曰: 今此司空廟之肇設於全州, 在千有餘年之後, 而六日資政, 朝朝展拜, 無異晨省, 非聖孝出天, 豈如是哉?】 이날 조경묘의 위판을 받들어 전주(全州)로 갔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여(輿)를 타고 신련(神輦)을 배종(陪從)하여 서빙고(西氷庫) 나루에 도착하자, 신련을 용주(龍舟)에 봉안(奉安)한 후 네 번 절하여 하직하고는 사장(沙場)에 부복(俯伏)한 채 오랫동안 목이 메어 울었다. 어가(御駕)를 돌려 관왕묘(關王廟)에 두루 임어하여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지금 사공(司空)의 묘우(廟宇)를 전주(全州)에 처음으로 설치하는 일은 1천여 년 후에 있게 되었는데, 6일 동안 자정전(資政殿)에 아침마다 전배(展拜)하여 신성(晨省)하는 것과 다름없이 하였으니, 하늘에서 타고나신 성효(聖孝)가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4710022_001
Rec-0139 영조실록_118권_1772_0405_01 17720405 上詣流霞亭, 只備堂隨駕。 回鑾時歷臨關王廟, 又詣儲慶宮展拜。 임금이 유하정(流霞亭)에 나아갔는데, 단지 비국 당상만 어가(御駕)를 수종(隨從)하였다. 회란(回鑾)할 때 관왕묘(關王廟)에 들렀고, 또 저경궁(儲慶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4804005_001
Rec-0140 영조실록_119권_1772_0804_03 17720804 上曰: "啓聖祠無拜禮, 故取讀己卯日記, 果再拜於關王廟, 古無其禮而義起也。 拜禮一節, 問于大臣, 以揖爲請, 其後御製以再拜載焉, 故予遵敎而行。 御詩有曰, 生平我愛壽亭公, 此正父母所愛, 亦愛者也, 再拜定禮, 父母所敬, 亦敬者也。 頃者關王廟受香, 適同日, 予一體祗迎。 啓聖祠旣臨再拜, 且有東西廟香祗迎在所不已, 此後有釋菜祗迎, 則一體祗迎。" 임금이 말하기를, "계성사(啓聖祠)에 배례(拜禮)가 없기 때문에 기묘년의 일기(日記)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과연 관왕묘(關王廟)에 재배하는 예가 예전에는 없었는데, 의기(義起)한 것이다. 배례하는 한 절목을 대신에게 물었더니 읍(揖)을 하는 것으로 청하였었고, 그후 어제(御題)에 재배례가 실려 있기 때문에 내가 전교를 따라 행한다. 어시(御詩)에 ‘평생에 내가 수정공(壽亭公)을 사랑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부모가 사랑하는 바를 역시 사랑하는 것이며 재배를 예로 정정하는 것은 부모가 존경하는 바를 존경하는 것이다. 지난번 관왕묘의 수향(受香)이 마침 같은 날이어서 내가 일체로 지영(祗迎)하였다. 계성사에 이미 임하여 재배하였고, 또 동묘(東廟)·서묘(西廟)의 향 지영하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으니, 이후로 석채(釋菜) 때 지영하면 일체로 지영하라." 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4808004_003
Rec-0141 영조실록_120권_1773_0511_05 17730511 上御石隅省耕臺, 命大臣備堂畿伯入侍, 召農民賜酒。 令丁範祖製喜雨賦。 下御製詩, 使入侍諸臣賡進, 歷臨關王廟。 임금이 석우(石隅)의 성경대(省耕臺)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 및 경기 감사를 입시하라 명하고 농민을 불러 술을 내렸으며, 정범조(丁範祖)로 하여금 희우부(喜雨賦)를 짓게 하였다. 또 어제시(御製詩)를 내리고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차운(次韻)하여 올리게 하였으며, 지나는 길에 관왕묘(關王廟)에 들렸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4905011_005
Rec-0142 영조실록_122권_1774_0512_02 17740512 上詣垂恩墓陳酌, 歷臨關王廟, 仍詣景福宮, 王世孫隨駕。 都承旨贊禮以下, 賞賜有差。 임금이 수은묘(垂恩墓)에 나아가 진작(陳酌)하고 관왕묘(關王廟)에 들렀으며, 이어서 경복궁(景福宮)에 나아갔는데, 왕세손(王世孫)이 어가(御駕)를 따랐다. 도승지·찬례(贊禮)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하사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5005012_002
Rec-0143 영조실록_127권_1776_0225_02 17760225 大司諫朴相岳、獻納申大年、正言曺遠振等上箚, 略曰: 卽伏見大朝傳敎下者, 命我邸下, 展禮于武安王廟, 臣等竊以爲過矣。 噫! 武安王之精忠大節, 炳烺千古, 允爲後人之所景仰, 則在聖朝致其尊禮, 誠是風勵之美政, 而第與典禮之所應行者有異, 故國朝已行之禮, 或因駕過廟門之時, 歷致曠世之感, 未嘗有特行展拜之例。 又況邸下今日之動靜擧措, 一有失宜, 所關非細。 伏願邸下仰稟大朝, 亟寢武安王廟動輿之命。 答曰: "今玆奠酌之命, 聖人之大義有二, 而此非暇言, 大朝成命, 俾余還寢, 果何意義? 余未知其穩也。" 대사간(大司諫) 박상악(朴相岳)·헌납(獻納) 신대년(申大年)·정언(正言) 조원진(曹遠振)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대조(大朝)의 전교(傳敎)가 내려진 것을 삼가 보건대 우리 저하(邸下)에게 명하여 무안왕(武安王)의 사당에 전례(展禮)하게 하셨는데, 신들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아! 무안왕의 정충 대절(精忠大節)은 천고에 빛나므로 후세 사람이 사모하는 바가 되니, 성조(聖朝)에서 존례(尊禮)를 다하는 것은 참으로 부지런히 힘쓰게 하는 아름다운 정사(政事)입니다만 으레 행해야 할 전례(典禮)와는 다르므로, 국조(國朝)에서 이미 행해 온 예(禮)는 혹 거가(車駕)가 묘문(廟門)을 지나갈 때에 들러서 세상에 드문 느낌을 다한 일은 있으나, 특별히 전배(展拜)한 전례는 없었습니다. 또 더구나 저하의 오늘날의 동정 거조(動靜擧措)는 조금만 실의(失宜)가 있어도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대조께 여쭈어 무안왕의 사당에 거동하라는 명을 빨리 거두시게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이번에 전작(奠酌)하라는 명은 성인(聖人)의 대의(大義)가 두 가지 있고 이것은 헛된 말이 아닌데, 대조의 성명(成命)을 나로 하여금 도로 거두시게 하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인가? 나는 그것이 온당한 줄 모르겠다." 하였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5202025_002
Rec-0144 영조실록_127권_1776_0226_02 17760226 王世孫詣東關王廟, 行奠酌禮而還。 蓋因上命也。 왕세손이 동관왕묘(東關王廟)에 가서 전작례(奠酌禮)를 행하고 돌아왔다. 대개 임금의 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ua_15202026_002
Rec-0145 정조실록_6권_1778_0902_01 17780902 大閱于鷺梁。 上具戎服乘輿, 出仁政門, 乘馬詣行殿, 降馬入幕次。 兵曹判書李徽之啓稟隨駕軍兵除出, 領往信地, 列成五營。 少間, 上改具甲冑陞座。 兵曹判書啓請, 行大閱禮。 宣傳官跪稟初吹、再吹、三吹。 左通禮啓請外辦乘馬進發。 兵房承旨啓請藍白信箭, 以授宣傳官。 宣傳官奉以前行, 歷詣關王廟, 行展拜禮, 乘馬進發, 至敎場轅門外。 兵曹判書啓稟駐蹕。 宣傳官跪稟吹打止。 中營一聲放砲, 吹天鵝聲各營點旗, 吶喊共三次。 大開轅門。 上入轅門, 按轡徐行, 歷過各營, 遵正路, 至壇下, 降馬乘輿, 至壇上, 降輿陞座。 兵曹判書啓稟小開門。 宣傳官啓稟小開門, 號令鳴金小吹打。 兵曹判書及中營大將行參現禮, 陞壇升旗。 各營大將仍回本陣。 兵曹判書啓請召各營大將, 宣傳官稟行召各營大將, 號令吹大角三聲, 交龍旗下立。 各營招搖旗一麾。 各營大將以認旗應之, 單騎馳集壇下。 兵曹判書稟班誓, 仍至壇頭, 振鐸而誓告曰: "今行大閱, 以敎人戰, 進退左右一如兵法。 用命、不用命, 厥有賞罰, 勖哉。" 各營大將齊聲應之, 次第叩頭, 仍上壇, 以次跪啓稟, 聚官旗聽發放。 各以手旗一麾, 下送本陣。 各營中軍各自下營, 一體發放。 兵曹判書啓稟鳴鐸號令及肅靜砲號令, 又啓稟各營大將操鍊。 命五營合閱陣。 又命訓禁御三營合陣, 守摠兩營合陣。 又命各營分路行營。 又命各營變爲合營車騎陣訖。 各營大將至肅靜牌前, 査功罪。 兵曹判書跪請各營大將回信地落旗。 兵曹判書跪告大閱禮成。 上入小次, 釋甲冑, 御戎服陞座, 敎領議政金尙喆等曰: "凡大閱, 卽列聖朝應行之禮, 故予亦謹遵故事耳。" 日晩還宮。 노량(鷺梁)에서 대열(大閱)을 행하였다. 임금이 융복(戎服)을 갖추고 여(輿)를 타고 인정문(仁政門)을 지나 말을 타고 행전(行殿)에 나아가 말에서 내려 막차(幕次)에 들어갔다. 병조 판서 이휘지(李徽之)가 수가(隨駕)하는 군병을 덜어내어 데리고 신지(信地)에 가서 오영(五營)을 벌려 세울 것을 계품(啓稟)하였다. 조금 있다가 임금이 갑주(甲胄)로 고쳐 입고 전좌(殿座)에 올라가니, 병조 판서가 대열례를 행할 것을 계청하였다. 선전관이 꿇어앉아 초취(初吹)·재취(再吹)·삼취(三吹)를 계품하고, 좌통례(左通禮)가 외판(外辦)되었으니 말을 타고 진발(進發)할 것을 계청하였다. 병방 승지가 남백 신전(藍白信箭)을 선전관에게 줄 것을 계청하였는데, 선전관이 이를 받들고 앞으로 나아가 관왕묘(關王廟)에 들어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였다. 말을 타고 진발하여 교장(敎場)의 원문(轅門) 밖에 도착하니, 병조 판서가 주필(駐蹕)할 것을 계품하였다. 선전관이 꿇어앉아 취타(吹打)를 그칠 것을 품하였다. 중영에서 화포를 한 방 쏘아 소리를 낸 다음 천아성(天鵝聲)을 부니, 각영에서 깃발을 점검하고 크게 고함을 쳤는데 모두 세 번 하였다. 원문을 활짝 여니 임금이 원문으로 들어가 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며 각영을 두루 들른 다음 정로(正路)를 따라가서 단(壇) 아래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여를 탔다. 단 위에 올라가 여에서 내려 좌차에 올라가니, 병조 판서가 진문(陣門)을 조금 열기를 계품하고, 선전관이 진문을 조금 열고 호령하여 쇠[金]와 소취타를 울리게 할 것을 계품하였다. 병조 판서와 중영 대장이 참현례(參峴禮)를 행하고, 단에 올라가 깃발을 올리니, 인하여 각영의 대장들이 본진(本陣)으로 돌아갔다. 병조 판서가 각영의 대장들을 부를 것을 계청하니, 선전관이 각영의 대장을 부르는 것을 계품하여 행하였다. 대각(大角)을 세 번 소리내어 불고 교룡기(交龍旗) 아래에 서서 각영을 향하여 초요기(招搖旗)를 한 번 휘두르니, 각영의 대장이 인기(認旗)를 흔들어 응답한 다음 단기(單騎)로 달려와서 단 아래에 모였다. 병조 판서가 반서(班誓)하기를 계품하고, 이어 단의 윗쪽에 가서 방울을 흔들면서 서고(誓告)하기를, "이제 대열을 행하여 군병들에게 싸우는 방법을 가르치니, 앞으로 나가고 뒤로 물러가고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는 것을 한결같이 병법대로 할 것이다. 명을 따르고 따르지 않음에 따라 상과 벌이 있을 것이니, 힘쓰도록 하라." 하니, 각영의 대장들이 일제히 응답하고 나서 차례로 머리를 조아렸다. 이어 단에 올라가서 차례로 무릎을 꿇고 관기(官旗)를 모아 발방(發放)을 들을 것을 계품하고, 각기 수기(手旗) 하나씩을 본진에 내려보내어 각영의 중군이 각자의 하영(下營)에서 일체를 발방하였다. 병조 판서가 징을 울려서 호령할 것과 숙정포(肅靜砲)로 호령할 것을 계품하였고, 또 각영 대장에게 조련하게 할 것을 계품하였다. 오영이 열진(閱陣)을 합칠 것을 명하고, 또 훈영(訓營)·금영(禁營)·어영(御營)이 진을 합칠 것을 명하고, 수영(守營)과 총영(摠營)이 진을 합칠 것을 명하였다. 또 각영이 길을 나누어 행영(行營)할 것을 명하고 또 각영이 변하여 영을 합쳐 거기진(車騎陣)을 치도록 명하였다. 이 일이 끝나자 각영의 대장이 숙정패(肅靜牌) 앞으로 나와 공과 죄를 심사받았다. 병조 판서가 꿇어앉아 각영의 대장을 신지(信地)로 돌아가게 할 것과 깃발을 내릴 것을 계청하였다. 병조 판서가 꿇어앉아 대열례가 이루어졌음을 고하니, 임금이 소차(小次)에 들어가서 갑주를 벗고 융복을 입은 다음 좌차에 올라가서 영의정 김상철(金尙喆) 등에게 하교하기를, "무릇 대열은 열성조에서 으레 행하여 오던 예(禮)이기 때문에 나도 또한 삼가 고사를 준행한 것이다." 하고, 해가 기울어서야 환궁하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209002_001
Rec-0146 정조실록_8권_1779_0803_01 17790803 上將展拜寧陵。 是日, 次南漢行宮具戎服, 乘輿, 出仁和門, 至仁政殿 月臺, 敎曰: "今當遠陵行幸, 禮當展拜太廟, 而旣命遣官告由景慕宮, 則纔亦躬拜, 以寓出必告之意。 且於先朝, 每當陵謁之時, 必行展拜於眞殿, 予小子所常修述也。" 仍由萬安門, 詣璿源殿展拜。 還由萬安門乘輿, 謂兵曹判書鄭尙淳、訓鍊大將洪國榮曰: "今者行幸, 程路甚遠, 非比近陵動駕。 我國文治是尙, 武備不修, 故人不習兵, 兵不習鍊, 每當行軍, 雖於一舍之地, 少或驅馳, 則輒皆喘息靡定, 將不爲怪, 軍兵以爲常。 又況訓將, 卽三軍司命;元戎, 乃國家重任? 昔唐 玄宗 開元之初, 講武驪山, 因軍法失儀, 置兵部尙書郭元振於法, 史至今稱之。 惟玆之敎, 與誓師同, 訓將, 其勉之。 至於扈駕事務、衛內巡綽, 亦是本兵之任, 兵判亦勉旃。" 宣傳官請出信箭。 上曰: "此信箭, 卽受賜之物。 予於聽政之初, 先大王以此錫予, 蓋宮中流傳之物也。 自昔每當師行之時, 必立此箭於駕前, 卽專征伐之意也。" 上至仁政門外乘馬, 出興仁門, 至關王廟, 上曰: "以宋朝軍行必拜之禮, 我朝 肅祖、英考, 亦行展拜。 予小子敢不遵行?" 仍詣廟行再拜禮。 至華陽亭微雨。 至廣津 晝停所晴。 命勿禁都民之挾路觀光者, 至船凔所, 兵曹判書鄭尙淳啓放陞船砲。 上御龍舟, 先廂將士、龍虎營將士, 在龍舟之左曳船之外。 後廂將士、京畿營旗皷, 在龍舟之右曳船之外, 俱挾龍舟扈駕而渡。 尙淳啓放行船砲, 擧起火, 大吹打。 各營皆應之。 御營陣疊放, 命御營大將李敬懋記過。 上曰: "予於先朝戊子, 陪駕詣獻陵, 渡此津, 而伊時, 則軍器寺官, 在挾船, 誤聽號令, 非時放砲, 命回示該官員於三軍。 今番又有誤放之擧, 先後事之相符, 亦可謂不偶矣。" 又敎曰: "戊子年行幸時, 日氣亦如今日。 到馬場乍雨, 到晝停卽晴。 今亦然。 不但軍兵免沾濕之患, 天氣昭朗, 亦不甚熱, 殊可幸也。" 領議政金尙喆曰: "乍雨卽晴。 御路無塵, 軍兵俱免沾濕, 實爲欣幸。 臣於戊子年, 亦以陪班到此。 而日氣之前後相符, 果如聖敎。" 上曰: "今日此行, 寔遵先志, 而復渡此江, 仰惟昔日, 予懷感慕, 何以自抑?" 上顧謂侍臣曰: "漫山赤子, 遍野黃雲。 年事之幸獲登稔, 寔由於皇天之眷顧。 惟予否德, 豈或致此乎? 嗣歲之屢登, 方切祈祝。 至於民人, 如堵如墻, 可以億萬計。 扶老携幼, 塡咽委滿。 予於今日, 臨此地對此民, 憧憧一念, 思所以無一夫不獲之方, 而所恃者, 亦在於卿等協輔之功也。" 尙喆等曰: "殿下以無一夫不獲之念, 耿耿于中, 誠能推是心做實政, 無使御船上之念, 或忽於處宮中之時, 則生民之幸, 國家之幸。" 上曰: "君猶舟也, 民猶水也。 予今御舟臨民, 益切兢惕矣。 大抵人心之感, 多在於遇物之時, 古人所謂觸類而長者也。 昔我聖祖, 作舟水圖, 命詞臣撰其銘、序其事矣。" 因命宣饌船上諸臣。 玉堂權以綱、尹行元、吳大益、徐有成、趙鼎鎭、沈樂洙、尹行修請對, 啓言: "軍中紀律, 何等嚴重? 而御營陣中, 誤爲放砲, 以致諸營之應砲, 事極驚駭。 罪關軍律, 當該大將削職宜矣。" 削御營大將李敬懋職, 以李柱國代之。 至栗木亭, 改御甲冑乘馬。 守禦使徐命膺, 率中軍、各營將, 旗皷迎接。 上入南門, 入行宮御正堂。 守禦使參現。 上釋甲冑, 御戎服, 命護駕大臣、京畿觀察使、各務差使員入侍。 上謂諸臣曰: "行幸云者, 民幸其車駕之行臨也。 車駕所臨, 必有恩澤之及於民者, 故民皆以此爲幸也。 今予駕到此地, 彼小民, 豈無顒望之情乎? 古人所謂行幸之義, 實踐之, 然後無愧於心。 卿等各陳便民捄弊之策。" 領議政金尙喆, 請與諸臣。 相議仰達。 上曰: "今來此地, 又臨此宮。 追感之懷, 實不能自抑。 曾見古事, 粤在丙子, 聖祖御此宮, 汗軍登汗峰, 發大砲, 砲丸擊殿柱。 聖祖移御後內殿云。 此殿, 卽其時所御之殿乎?" 命膺曰: "然。" 上曰: "我國武備, 近益踈虞, 民不聞桴皷之響, 兵不解坐作之節, 一日二日, 玩愒以度。 若念丙子時事, 君臣上下, 烏可若是恬嬉乎? 日暮途遠, 聖祖所以發歎於中朝也; 閉關絶約, 先正所以屢陳於上疏也。 我東以蕞爾鰈域, 粗知禮義之方, 世有中華之稱。 而今則, 人心漸至狃安, 大義轉益湮晦, 北走之皮幣, 看作常事, 不以爲恥。 思之及此, 寧不心寒? 漢官威儀, 不可復覩, 神州腥羶, 不可復掃。 惟此北苑尺壇, 略寓執壤之誠。 大明日月, 只照一區之邦, 庶可以有辭於後世。 矧當此年, 仰惟孝廟未就之志事, 不勝慷慨激昻也。 顧今民力凋殘, 經費匱乏之時, 豈必作遠道行幸, 而逢此己亥之歲, 不有寧陵之行, 則是豈天理、人情之所可出乎? 然列邑供億之弊, 各營撼頓之勞, 何嘗食息暫忘也。" 尙喆等曰: "今日殿下臨御此地, 乃丙子年經亂之地也。 城下之盟, 終古恥之。 至今人士之經過此地者, 莫不指點而傷心, 扼腕而興憤, 則況興感於宸衷, 當如何哉? 惟我孝宗大王, 勵薪膽之志, 講復雪之策, 將以成仁祖未就之志事, 伸天下旣絶之大義, 不幸大業未半, 奄棄臣民。 此忠臣烈士所以痛心泣血, 而不能已者也。 今我殿下, 承丕大之基, 講繼述之謨。 所以繼述之者, 不出於修明刑政、收拾人才, 養軍兵而理財用數件事而已。 興師往討, 縱不可輕議, 而《春秋》尊攘之義, 庶可以不泯於天下萬世矣。" 上曰: "守禦廳五營之制何如?" 命膺曰: "左、右營各有別將, 卽京營將官也。 前營廣州, 後營竹山, 中營楊州也。" 上曰: "軍摠凡爲幾何?" 命膺曰: "一萬五千七百十四人。" 上曰: "本營軍摠幾何?" 廣州府尹宋煥億曰: "本州所管, 爲二千八百十四人。" 上曰: "本營操鍊時, 左營陣于東將臺, 右營陣于西將臺, 前營陣于南將臺, 中營陣于北將臺, 後營陣于東將臺嚴城云, 然否?" 命膺曰: "然。" 上曰: "東西南北, 皆有將臺, 而獨無中將臺之稱, 何也? 城中地形, 中凹四高而然乎?" 煥億曰: "中將臺之不設, 地形之使然。" 上問本營習操次數。 命膺曰: "每年則五營各一次輪操; 三年則五營一番合操矣。" 上曰: "私操、正操之法何如?" 命膺曰: "假如今日會軍, 則其翌日私操, 第三日正操, 第四日晝夜操, 第五日犒饋, 仍試射放, 第六日罷送各兵矣。" 上曰: "本營屯田幾何?" 命膺曰: "屯田之在廣州者, 六處;在果川者, 一處;在龍仁者, 三處;在陽智、永平、利川、砥平、原州、洪川、平澤、忠州、金海、昌原、扶安、長興、海州、定州、稷山、振威、永同、載寧、橫城者, 各一處;合爲二十九處矣。" 上曰: "予於丙申御極之初, 命罷諸宮房折受, 而深知載寧屯田, 與宮房相爭之弊, 故特命還屬本廳, 誠以軍餉體重, 不可與宮庄相等故耳。" 命膺曰: "臣弟, 左相在本廳時, 因特敎, 以此屯復屬本廳。 伊後則連以敎鍊官、軍官中差遣屯監, 每年收稅以米, 而所收殆近千金。 其外防堰開洋之費, 不在此中。 以此觀之, 本營若無此屯, 可謂着手無處, 幸蒙特恩, 有此還屬之擧, 其爲有益於本營, 實不貲矣。" 上曰: "本州戶口幾何? 曾聞, 城內人戶, 纔過千數云, 然否?" 煥億曰: "城內民戶, 爲一千餘戶。 而男則二千餘口;女則二千三百口。" 上曰: "摠一府戶口爲幾何?" 煥億曰: "戶, 一萬六百餘;口, 四萬八千餘。" 上曰: "民口雜役, 不一其端, 有烟戶焉, 有鷄雉ㆍ柴草等名色焉。 此等戶役能無弊端乎?" 命膺曰: "故府尹徐宗憲創立雜役價米之制, 凡諸雜物, 皆自官貿用。 至於動駕、陵役時雜物及使星往來時, 柴草進排等役, 故府尹南泰溫, 立策應庫應之, 而雜物進排, 一切革罷。 今則, 只有城內行宮些少之役矣。" 上曰: "本州倉廩幾何?" 煥億曰: "七庫、十一倉也。" 上曰: "曾聞, 淸城府院君 金錫冑所儲餉穀最多。 至於京營別備, 故判書趙觀彬爲最云, 然否?" 命膺曰: "山城軍餉穀措置等節, 皆是金錫冑所設。 而趙觀彬, 亦多別備矣 上曰: "本營歲入之數摠幾何, 而一年支放外, 亦有贏餘乎?" 命膺曰: "營財之贏縮, 固在得人之如何, 而近年以來, 每患不敷。 內營歲入雜穀外米, 不過二千餘石;外營歲入, 其數亦然, 而歲費之外, 餘者無幾矣。" 上曰: "仁廟甲子築城時以僧覺性爲名者, 爲八道都摠攝, 召募八道僧軍赴役, 仍命居此城。 蓋僧軍之制, 始於此時大備云, 卿等亦聞之乎?" 命膺曰: "果於此時, 創設云矣。" 임금이 장차 영릉(寧陵)에 전배(展拜)하려고 이날 남한 행궁(南漢行宮)에 머물렀다. 융복(戎服)을 갖추고 여(輿)를 타고 인화문(仁和門)을 나가 인정전(仁政殿)의 월대(月臺)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이제 먼 능(陵)에 행행(行幸)할 때를 당하여 예(禮)로서는 태묘(太廟)에 전배해야 하겠으나 이미 관원을 보내어 경모궁(景慕宮)에 고유(告由)하라고 명하였으니, 지금 막 또한 몸소 절하여 나갈 때에는 반드시 고한다고 뜻을 붙인다. 또 선조(先朝)에서는 번번이 능알(陵謁)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진전(眞殿)에 전배를 행하셨으니, 나 소자(小子)가 늘 닦아 계술(繼述)할 바이다." 하고, 이어서 만안문(萬安門)을 거쳐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만안문을 거쳐 돌아와 여를 타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정상순(鄭尙淳)·훈련 대장(訓鍊大將) 홍국영(洪國榮)에게 말하기를, "이번 행행은 길이 매우 머니, 가까운 능에 동가(動駕)하는 데에 견줄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는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무비(武備)를 닦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군사에 익숙하지 않고 군병이 연습하지 않아서 번번이 행군(行軍) 때를 당하면 비록 1사(舍)인 곳일지라도 조금만 달리면 문득 다들 숨이 차서 진정하지 못하는데, 장수는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군병은 예사로 여긴다. 또 더구나 훈장(訓將)은 곧 삼군(三軍)의 사명(司命)이고 원융(元戎)은 국사의 중임(重任)임에랴? 예전 당(唐)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초기에 여산(驪山)에서 강무(講武)하였는데 군법(軍法)의 실의(失儀) 때문에 병부 상서(兵部尙書) 곽원진(郭元振)을 처벌한 것을 사가(史家)가 이제까지도 일컫는다. 오직 이 하교는 군사에서 서계(誓戒)하는 것과 같으니, 훈장은 힘쓰라. 거가(車駕)를 호종(巵從)하는 일과 위내(衛內)를 돌며 경계하는 것으로 말하면 또한 본병(本兵)의 임무이니, 병판(兵判)도 힘쓰라." 하였다. 선전관(宣傳官)이 신전(信箭)을 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신전은 곧 하사받은 물건이다. 내가 청정(聽政)하던 초기에 선대왕(先大王)께서 이것을 나에게 내리셨는데, 대개 궁중에 전해 오던 물건이다. 예전부터 번번이 사행(師行) 때를 당하면 반드시 이 신전을 가전(駕前)에 세운 것은 오로지 정벌(征伐)의 뜻이다." 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 밖에 이르러 말을 타고 흥인문(興仁門)을 나갔다. 관왕묘(關王廟)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송조(宋朝)에서 군행(軍行)하면 반드시 절한 예(禮)에 따라 아조(我朝)의 숙조(肅祖)·영고(英考)께서도 전배하셨으니, 나 소자가 감히 따라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관왕묘에 나아가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308003_001
Rec-0147 정조실록_9권_1780_0413_01 17800413 親祭于永祐園, 歷臨東關王廟。 영우원(永祐園)에 친제(親祭)하고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404013_001
Rec-0148 정조실록_11권_1781_0127_04 17810127 歷臨東關王廟敎曰: "展禮後行祭, 卽是應行之事。 東南兩廟, 遣將臣行祭, 俄於行禮時, 已有提說。 一依宋武成王廟祭, 旣有肅廟受敎, 載《寶鑑》。 先朝亦以此有御製文, 而迄未遵行, 可謂欠事。 三局大將, 依例兼堂上例, 凡事管檢。 雖以守僕服色言之, 亦無定例。 此後依他守僕例, 俾無褺慢之歎事。 令該曹知悉。" 동관 왕묘(東關王廟)에 들러서 하교하기를, "전례(展禮)한 뒤 행제(行祭)하는 것은 곧 응당 행해야 할 일이다. 동남 양묘(東南兩廟)에 장신(將臣)을 보내어 행제하는 것은 아까 예를 행할 때 이미 제기하여 말하였다. 한결같이 송(宋)나라에서 무성왕(武成王)의 묘에 제사한 대로 하도록 이미 숙묘(肅廟)의 수교(受敎)가 있어서 《보감(寶鑑)》에 기재되어 있으며 선조(先朝)에서도 또한 이에 대한 어제문(御題文)이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껏 준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흠사(欠事)라고 할 수 있다. 삼국(三局)의 대장(大將)은 으레 당상(堂上)을 겸한 예대로 모든 일을 관검(管檢)하도록 하라. 모름지기 수복(守僕)들의 복색(服色)으로 말하더라도 또한 정해진 예(例)가 없으니, 이후로는 다른 수복들의 예에 따르도록 해서 설만(養慢)하다고 탄식하는 일이 없게 하라. 이런 내용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자세히 알게 하라." 하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501027_004
Rec-0149 정조실록_11권_1781_0409_02 17810409 歷臨關王廟。 관왕묘(關王廟)에 들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504009_002
Rec-0150 정조실록_11권_1781_윤0521_02 17810521 釐正關王廟祭品、儀式。 敎曰: "取考先朝丙申謄錄, 予小子承命攝行, 而正位配位, 皆有祭品。 且《五禮儀》, 有饌實、樽罍, 與先農壇同之文, 而今日告由祭祭品, 無配位之祭, 而其他祭品, 亦多不齊處, 不可不及時釐正。 且本廟享祀, 皆倣宣武祠與纛所, 而宣武祠, 則有門間挾室, 祭官軍, 本廟門神之祭, 亦當倣此矣。 纛所則有樂舞, 而此則更合商量。 以此令儀曹知悉, 與太常提調, 祭品釐正以聞。" 禮曹啓言: "參考太常祭禮儀節, 正位祭品, 依先農壇例, 配位祭品, 依他配享位例。 獻官, 以武臣堂下三品中差定。 門祭祭品, 依宣武祠官軍, 祭品用折半之例。 獻官, 以武臣堂下六品中差定。 兩處齋祝, 以武臣六品以下差擬。 其他儀節, 依他配位及官軍祭例, 定式施行。" 관왕묘(關王廟)의 제품(祭品)과 의식(儀式)을 이정(釐正)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선조(先朝) 병신년 때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하여 보니, 나 소자(小子)가 명을 받들어 섭행(攝行)했었는데, 그때는 정위(正位)와 배위(配位)에 모두 제품이 있었다. 그리고 《오례의(五禮儀)》에도 찬실(饌實)과 준뢰(樽罍)를 선농단(先農壇)과 같게 한다는 글이 있다. 그런데 오늘 고유제(告由祭)의 제품에 배위의 제품이 없었으며 그밖의 다른 제품도 또한 고르지 못한 데가 많았으니, 제때에 이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본묘(本廟)의 향사(享祀)는 모두 선무사(宣武祠)와 둑소(纛所)를 모방하였는데, 선무사에는 문간에 협실(挾室)이 있어 여기에서 관군(官軍)의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본묘의 문신제(門神祭)도 또한 당연히 이를 모방하여야 한다. 둑소에는 악무(樂舞)가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다시 상량해야 하니, 이런 내용을 예조로 하여금 알게 하고 태상 제조와 함께 제품을 이정하여 아뢰게 하라." 하니, 예조에서 아뢰기를, "태상의 제례(祭禮)에 관한 의절(儀節)을 참고하여 보니, 정위(正位)의 제품은 선농단의 예(例)에 의거하여 하게 되어 있고, 배위의 제품은 다른 배향위(配享位)의 예에 의거하여 하게 되어 있으며, 헌관(獻官)은 무신 당하관(堂下官) 3품 가운데서 차정(差定)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門祭)의 제품은 선무사에서 관군의 제품에 절반을 쓰는 예에 의거하여 하고, 헌관은 무신 당하관 6품 가운데서 차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곳의 재축(齋祝)은 무신 6품 이하로 차의(差擬)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타의 의절은 다른 배위와 관군의 제례(祭例)에 의거하여 하도록 법식을 정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505121_002
Rec-0151 정조실록_13권_1782_0123_03 17820123 禮曹啓言: "東關王廟祭享後, 司憲府吏隷輩, 偸取祭器, 事極驚駭。 請守直官及監祭監察, 竝拿處, 憲府吏隷, 照法勘處。" 允之。 仍敎曰: "他享所, 安知無此弊乎? 內而廟社殿宮, 外而壇陵、園墓祭享後, 獻官、典祀官、監察, 與本處官員, 照數祭器, 成文書列名着署, 以爲憑考。" 御營廳, 以宣傳官廳吹螺的同犯偸竊査啓。 命宣傳官李儒敬、具八柱、李晳等汰去。 義禁府, 以監察李尙說奪告身勘律。 刑曹引《大明律》盜大祀、中祀神御物者斬。 已奉祭訖之物減等之文, 憲府吏金世重絶島爲奴。 예조에서 아뢰기를, "동관왕묘(東關王廟)에 제향(祭享)을 올린 뒤 사헌부의 이례(吏隷)들이 제기(祭器)를 훔쳐 갔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수직관(守直官)과 감제 감찰(監祭監察)을 아울러 나처(拿處)하고 헌부의 이례들은 법에 비추어 감처(勘處)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다른 향소(享所)에도 이런 폐단이 없을 줄 어떻게 알겠는가? 안으로 묘사(廟社)·전궁(殿宮)과 밖으로 단릉(壇陵)·원묘(園墓)에 제향을 올린 뒤 헌관(獻官)·전사관(典祀官)·감찰(監察)이 그곳의 관원과 함께 제기(祭器)의 숫자를 대조하여 문서(文書)를 만들어 명목(名目)을 열기(列記)하고 서명(署名)하게 해서 빙고(憑考)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어영청(御營廳)에서 선전 관청(宣傳官廳)의 취라치(吹螺赤)가 함께 투절(偸竊)을 범했다는 것으로 사계(査啓)하니, 선전관 이유경(李儒敬)·구팔주(具八柱)·이석(李晳) 등을 태거(汰去)시키라고 명하였다. 의금부에서 감찰(監察) 이상열(李尙說)의 고신(告身)을 빼앗을 것으로 감률(勘律)하였다. 형조에서 《대명률(大明律)》의 ‘대사(大祀)·중사(中祀)의 신어물(神御物)을 훔친 자는 참(斬)한다. 그러나 제향을 받든 뒤의 물건일 경우에는 감등(減等)한다.’는 글을 인용하여 헌부의 하리(下吏) 김세중(金世重)을 절도(絶島)에 노예로 만들게 하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601023_003
Rec-0152 정조실록_13권_1782_0410_01 17820410 上詣永祐園, 行酌獻禮, 巡審後麓。 駕還, 至安樂峴, 召老農問農形, 歷臨東關王廟。 임금이 영우원(永祐園)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나서 뒷 산등성이를 살펴보았다. 대가(大駕)가 돌아오는 길에 안악현(安樂峴)에 이르러 노농(老農)을 불러 농사의 형편에 대해 묻고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604010_001
Rec-0153 정조실록_15권_1783_0405_01 17830405 駕還昌德宮, 歷臨東關王廟。 창덕궁으로 돌아와서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704005_001
Rec-0154 정조실록_20권_1785_1115_02 17851115 建四朝御製武安王廟碑于東南兩廟。 敎曰: "兩廟將各立二碑。 肅廟朝御製及先朝御製, 合刻一碑, 景慕宮睿製及予所撰, 合刻一碑。 蓋肅廟朝御製, 乃是圖像銘, 而御筆簇子, 奉安于東廟。 故奉來摸刻, 先朝御製廟記, 則以御筆集字, 景慕宮睿製, 次肅廟朝圖像銘韻, 亦以睿筆集字, 小子敬次原韻, 爲廟碑銘, 竝令內閣, 摸寫陪進。" 仍付太常, 爲迎送神奠獻樂歌。 사조 어제(四朝御製)의 무안왕 묘비(武安王廟碑)를 동묘(東廟)와 남묘(南廟)에 세웠다. 하교하기를, "동묘와 남묘에 장차 두 개의 비를 각각 세우려 한다. 숙종조[肅廟朝]의 어제(御製) 및 선조(先朝)의 어제를 한 비에 합하여 새기고, 경모궁(景慕宮)의 예제(睿製) 및 내가 지은 것을 한 비에 합하여 새겼다. 대체로 숙종조의 어제는 곧 도상명(圖像銘)으로서 어필 족자(御筆蔟子)를 동묘에 봉안(奉安)하였었다. 그러므로 받들어 가져다가 모각(摸刻)하였고, 선조(先朝)의 어제 묘기(御製廟記)는 어필을 집자(集字)하였으며, 경모궁의 예제는 숙종조의 도상명운(圖像銘韻)을 차운(次韻)한 것으로서 역시 예필을 집자한 것이고, 소자(小子)는 원운(原韻)을 삼가 차운(次韻)하여 묘비명(廟碑銘)을 지은 것으로서 모두 규장각(奎章閣)으로 하여금 모사(摸寫)하여 올리게 하였다." 하고, 이어 봉상시(奉常寺)에 보내어 영송신(迎送神) 전헌(奠獻)의 악가(樂歌)로 삼게 하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911015_002
Rec-0155 정조실록_21권_1786_0202_01 17860202 嘗親製《關廟樂章》。 至是始用之。 樂以三成爲式。 임금이 일찍이 관왕묘(關王廟)의 악장(樂章)을 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사용하였다. 악장은 세 번 연주하는 것으로 규식을 삼았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002002_001
Rec-0156 정조실록_21권_1786_0204_01 17860204 御春塘臺, 殿講畢, 還御壽康門。 命掌樂提調徐有寧, 率東南關王廟祭享樂工, 皆着甲冑, 建五方旗, 隷習于庭。 蓋以創用樂故也。 춘당대에 나아가 전강(殿講)을 끝마치고 나서 수강문(壽康門)으로 돌아왔다. 장악 제조 서유영(徐有寧)에게 명하여 동·남 관왕묘의 제향 악공(樂工)을 데리고 그들에게 모두 갑옷을 입히고 나서 오방기(五方旗)를 세우고 뜰에서 연습하게 하였는데, 처음으로 악장을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002004_001
Rec-0157 정조실록_21권_1786_0205_03 17860205 摠戎使金思穆, 以關王廟獻官, 出城外, 命招守禦使鄭尙淳兼察。 尙淳牌招不進。 敎曰: "將臣之以兼察出牌, 事關師律。 雖文宰, 焉敢違牌? 守禦使鄭尙淳, 越俸十等。" 총융사 김사목(金思穆)이 관왕묘의 헌관으로 성밖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수어사 정상순(鄭尙淳)을 불러 겸찰(兼察)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정상순이 패초(牌招)해도 나오지 않자, 하교하기를, "장신으로서 겸찰시키기 위하여 패초했으니, 군법에 관계된 일이다. 비록 문관의 재신이지만 어떻게 감히 패초를 어길 수 있다는 말인가? 수어사 정상순의 녹을 10등급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002005_003
Rec-0158 정조실록_21권_1786_0401_01 17860401 行酌獻禮後還宮, 仍歷臨東關王廟。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궁으로 돌아오면서 두루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렸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004001_001
Rec-0159 정조실록_21권_1786_0427_02 17860427 持平金遇國啓: "月初園幸回還時, 大駕歷臨關王廟, 軍兵留住街路, 訓鍊大將具善復, 以先廂下馬, 據床而坐於義洞口矣。 兵曹正郞柳畊, 以先詣禁喧行過陣外, 訓局牢卒, 大聲呵馬, 曹隷以侍衛之騎馬過去, 雖大臣不得呵禁之意, 答之, 善復捉來曹隷, 捽曳之不足, 至於批頰。 又於翌日候班, 以騎郞之陣前犯馬, 盛氣咆哮, 至發辱說, 柳畊以此引義。 噫! 不待坐息之令, 將臣之任便下馬, 已乖師律, 而呵除陪衛兵郞, 替治下隷, 公會之中, 詬辱無難。 驕蹇之習, 卽其伎倆, 駭妄之擧, 有關紀綱。 柳畊以年少文官, 受武將之凌踏罵辱, 而乍引旋止, 不思自處。 雖云橫逆之來, 豈非疲軟之甚乎? 請具善復亟施譴削之典, 柳畊亦施譴責之罰。" 批曰: "訓將, 令兵判査問, 該營以啓騎郞事, 前兵判處問啓。" 該營對以: "因曹隷之不恭, 捉來數罪而已, 初無呵馬及朝班詬罵之事。 路上留住, 則下馬坐息, 卽古例。" 云。 前兵曹判書徐有隣, 對以: "曹隷不恭之說, 卽指軍牢而言。 訓將認以直斥, 有所往復, 而柳畊引而爲嫌, 屢度乞遞, 未免過當, 再三勉出。" 云。 蓋兩解之也。 지평 김우국(金遇國)이 아뢰기를, "이달 초승 원(園)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오실 때에 관왕묘(關王廟)에 두루 들리셨는데, 군사들은 길거리에 주둔하였고 훈련 대장 구선복(具善復)은 선상(先廂)으로 말을 내려 어의동(於義洞) 동구에 앉아 있었습니다. 병조 정랑 유경(柳畊)이 앞으로 나아가 금훤(禁喧)으로 진(陣) 밖을 지나가자, 훈국의 군사들이 큰 소리로 말을 욕질하니, 병조의 부하가 시위의 기마(騎馬)가 지나갈 경우 비록 대신이라도 금지할 수 없다는 뜻으로 대답하니, 구선복이 그 부하를 잡아다가 내동댕이치고도 부족하여 뺨까지 때렸습니다. 또 이튿날 문안하는 반열에서 병조 낭관이 말을 타고 진 앞을 범하였다고 노기를 잔뜩 부리면서 말하였는가 하면 욕설까지 하자, 유경이 이로써 자책하고 물러갔습니다. 아! 앉아서 쉬라는 영도 기다리지 않은 채 장신이 편리할 대로 말에서 내렸으니, 이미 군법을 범한 것입니다. 그런데 호위하는 병조 낭관을 꾸짖고 대신 부하를 잡아 다스렸으며, 공적인 모임에서 어려움 없이 욕설을 퍼부었으니, 교만한 버릇은 그의 기량이고 해괴 망측한 짓은 기강에 관계가 있습니다. 유경은 연소한 문관으로 무장(武將)에게 짓밟히고 모욕을 당하고도 잠시 인피하였다가 그만두었으니, 자기 처신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뜻밖의 일이지만 어찌 너무나도 무기력하지 않습니까? 구 선복에게 빨리 견삭(譴削)의 법을 시행하고 유경에게도 견책의 벌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훈국의 장신은 병조 판서로 하여금 그 영을 조사하여 아뢰고, 병조 낭관의 일은 전 병조 판서에게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해당 영에서 대답하기를, "병조의 부하가 공순하지 않아 잡아다가 죄를 들어 나무라기만 하였지 애당초 말을 못 타게 하거나 조정의 반열에서 욕설을 한 일은 없습니다. 노상에서 머물러 있을 때는 말에서 내려 쉬는 것이 옛날의 관례입니다." 하고, 전 병조 판서 서유린이 대답하기를, "병조의 부하가 공순하지 않았다는 말은 바로 군뢰(軍牢)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훈국의 장신이 바로 배척한 것으로 알고 연락을 받은 바가 있는데, 유경이 이를 인혐하여 누차 체차해 달라고 청하여 지나친 것을 면치 못하였으므로 재삼 출사하라고 권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양쪽의 입장을 해소시킨 것이었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004027_002
Rec-0160 정조실록_25권_1788_0404_01 17880404 詣永祐園, 行酌獻禮, 歷臨關王廟。 영우원(永祐園)에 가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지나는 길에 관왕묘(關王廟)에 들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204004_001
Rec-0161 정조실록_29권_1790_0212_01 17900212 歷臨關王廟, 還宮。 관왕묘(關王廟)에 들러 돌아보고 환궁(還宮)하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402012_001
Rec-0162 정조실록_32권_1791_0116_01 17910116 駕次水原府。 方駕出崇禮門也, 雨雪交下, 上悶軍兵霑濕, 詣關王廟, 少駐, 命諸軍竪旗路傍, 使各避雨。 어가가 수원부에 머물렀다. 어가가 막 숭례문을 나왔을 때 비와 눈이 뒤섞여 내리니, 상이 군병들의 옷이 젖는 것을 불쌍히 여겨 관왕묘(關王廟)에 가서 잠시 머무르며 여러 군사들에게 깃발을 길가에 놓고 제각기 비를 피하도록 명하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01016_001
Rec-0163 정조실록_35권_1792_0819_01 17920819 以皇朝副摠兵鄧子龍, 配於康津 誕報廟, 遣官致祭。 敎曰: "近閱李忠武遺事, 追想露梁之戰, 不覺撫髀長歎。 天朝副摠兵鄧子龍, 以七十老將, 提二百勇士, 縱恣於滄海上, 唾手而矢滅狡夷, 其氣豪膽麄, 可謂大丈夫哉! 況欲居首功, 躍上忠武之舟, 直前奮突, 所俘獲無計, 偶觸火器, 中流延爇, 賊乃傳之而猶力戰。 忠武馳救之, 與之同死, 其詳在徐希辰 《東征記》。 予嘗愍之, 取考《明史》本傳, 有廟食朝鮮之語, 而未始有廟食焉, 康津之都督祠堂, 又未之配, 其爲欠典、闕事, 孰大於是? 平壤 武烈祠, 以追配駱參將尙志事, 道伯建請, 朝廷旣許之。 同時同事之人, 酬功報德之典, 豈或一爲一否, 使天將之英爽, 無所寄泊乎哉? 天朝副摠兵鄧公子龍, 陞配於陳都督祠, 而初聞祠在於南海。 迨今箕城駱公追配之時, 欲與之同擧矣, 更聞都督, 與忠武配享於康津地誕報廟之傍。 然則鄧公別祀, 嘗配於是祠。 陞配日, 遣官致祭, 忠武旣同享, 一體致祭。 祭文皆當親撰矣。 致祭雖有命, 此時廚傳有弊, 獻官以附近文倅中差送。 鄧緫兵與忠武公, 同時捐軀於露梁, 而忠武專享於南海 忠烈祠云。 忠武遺事, 近令內閣, 撰成全書。 待活印, 藏一本於本祠, 仍行致祭。" 황조(皇朝)의 부총병(副摠兵) 등자룡(鄧子龍)을 강진(康津) 탄보묘(誕報廟)에 배향하고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전교하기를, "근래에 이 충무(李忠武)의 유사(遺事)를 보다가 노량진 싸움을 추억하면서 저도 모르게 넓적다리를 만지면서 길게 탄식하였다. 중국의 부총병 등자룡은 70세의 노장(老將)으로 2백 명의 용사(勇士)를 이끌고 넓은 바다 위를 마음대로 횡행하면서 손에 침을 뱉으며 교활한 왜적을 섬멸할 것을 맹세했으니, 그 호탕한 담력은 대장부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수공(首功)을 차지하고자 하여 충무공의 배로 뛰어올라 곧장 앞으로 돌격하여 수없이 많은 포로를 잡았으나 우연히 화기(火器)를 건드려 중류(中流)에서 불이 붙자 적이 달라붙었는데도 오히려 힘껏 싸웠다. 충무공이 달려가 구해주다가 함께 죽었으니, 이 일은 서희진(徐希辰)의 《동정기(東征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내가 일찍이 불쌍하게 여겨 《명사(明史)》 본전(本傳)을 상고해 보니 ‘조선에서 묘식(廟食)을 받고 있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애당초 묘식함이 없고 강진의 도독(都督) 사당에도 또 배향하지 못했으니, 흠전(欠典)·궐사(闕事)로 어느 것이 이보다 크겠는가. 평양 무열사(武烈祠)에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를 추가로 배향하자고 도백이 건청(建請)하여 이미 허락하였다. 같은 때 같은 일을 한 사람의 공덕을 보답하는 전례가 어찌 한 사람은 하고 한 사람은 하지 않아서 중국 장수의 영혼이 깃들 곳이 없게 하겠는가. 중국 부총병 등자룡 공을 진 도독(陳都督)의 사당에 승배(陞配)해야 하는데 처음에 듣기로는 사당이 남해(南海)에 있다고 하여 이제 평양의 낙공을 추배할 때에 미쳐서 함께 거행하고자 하였다. 다시 듣건대 도독은 충무공과 강진 땅 탄보묘 옆에 배향하였다고 하니 등공의 별사(別祠)도 마땅히 이 사당에 배향해야 한다. 승배(陞配)하는 날에 관원을 보내 치제하되 충무공을 이미 함께 배향하였으니 일체로 치제하라. 제문은 모두 마땅히 친히 짓겠다. 치제는 비록 명이 있지만 이때에 주전(廚傳)하는 데 폐단이 있으니, 헌관(獻官)은 부근의 문관인 원 가운데서 차출해 보내라. 등 총병은 충무공과 동시에 노량에서 목숨을 바쳤는데 충무공은 남해의 충열사(忠烈祠)에서 전향(專享)하고 있다 한다. 충무공의 유사를 근래에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전서(全書)로 찬(撰)하게 하였으니 인쇄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1본(本)을 본 사당에 보관하고 인하여 치제를 행하라." 하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608019_001
Rec-0164 정조실록_35권_1792_0910_01 17920910 將詣光陵, 駕出興仁門。 歷臨關王廟, 命守直官邊將除授。 광릉(光陵)으로 가기 위해 대가(大駕)가 흥인문(興仁門)을 출발하였다. 관왕묘(關王廟)에 들러 수직관(守直官)을 변장(邊將)으로 제수할 것을 명하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609010_001
Rec-0165 정조실록_37권_1793_0112_01 17930112 上將謁顯隆園, 歷臨關王廟, 晝停于果川。 過仁德院坪, 召路傍父老, 勞問詢瘼, 夕次水原行宮。 상이 현륭원을 뵈러 가는 길에 관왕묘(關王廟)에 들렀다. 과천(果川)에서 주정(晝停)하였다. 인덕원(仁德院) 들녘을 지나다 길가의 부로(父老)들을 불러서 위로하며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저녁에는 수원 행궁에 머물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701012_001
Rec-0166 정조실록_38권_1793_0904_01 17930904 上將謁元陵, 歷臨關王廟, 晝停于泰陵洞口。 詣元陵, 行酌獻禮, 歷拜健元陵、徽陵、顯陵、惠陵、崇陵。 敎曰: "今日展省元陵, 冞增我感。 月正眞殿之拜, 特施拔例之賞典於駿奔之諸臣者, 一則推先王之恩, 一則寓是年之感。 況是年又値是月, 豈比於月正乎? 親祭時亞獻官領中樞府事蔡濟恭、終獻官行判中樞府事朴宗岳, 各熟馬一匹面給; 贊禮禮曹判書閔鍾顯、禮房承旨徐邁修, 各半熟馬一匹賜給; 執禮李東稷、大祝金祖淳, 竝加資。" 仍命諸執事、本陵官陞品, 施賞有差。 駕還晝停所, 召見京畿觀察使、各務差使員, 還宮。 상이 원릉(元陵) 참배를 가면서 관왕묘(關王廟)에 들렀으며, 태릉(泰陵) 동구에서 점심 수라를 들었다. 원릉에 이르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건원릉(健元陵) ·휘릉(徽陵) ·현릉(顯陵) ·혜릉(惠陵) ·숭릉(崇陵)을 두루 참배하였다. 전교하기를, "오늘 원릉을 참배하고 나니 나의 감회가 더욱 깊다. 정월달 진전(眞殿)에서 행한 참배 의식에서 특별히 이 제사에 애쓴 제신들에게 예외로 시상했던 것은, 하나는 선왕의 은혜를 미루어서였고, 하나는 이 해에 대한 나의 감회를 나타낸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 해에 또 이 달을 만나고 보니 정월달과는 또 비교가 안 된다. 친제(親祭) 때 아헌관(亞獻官)이었던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과 종헌관(從獻官)이었던 행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에게는 각각 숙마(熟馬) 1필씩을 보는 앞에서 내어주고, 찬례(贊禮)였던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과 예방 승지 서매수(徐邁修)에게는 각각 반숙마(半熟馬) 1필씩을 하사하며, 집례(執禮) 이동직(李東稷)과 대축(大祝) 김조순(金祖淳)은 모두 가자(加資)하라." 하고, 이어 제집사(諸執事)와 본릉의 능관(陵官)에게는 품계를 올려주거나 차등있게 상을 주게 하였다. 점심 수라를 들던 곳에 돌아와서는 경기 관찰사와 각종 직무를 맡은 차사원(差使員)들을 소견한 뒤 환궁하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709004_001
Rec-0167 정조실록_39권_1794_0112_01 17940112 將拜顯隆園, 是日申時出宮, 歷臨關王廟, 至望海亭少駐。 抵果川行宮, 日未暮矣。 敎曰: "宿次本縣, 坐待鷄鳴欲前進, 而一念耿耿於民事。 況逢此年, 當有示意。 舊糴一年條蕩減。" 현륭원에 참배하기 위하여 이날 신시에 대궐을 출발하였다. 지나는 길에 관왕묘(關王廟)를 들러 망해정(望海亭)에서 조금 머물렀다가 과천(果川)의 행궁(行宮)에 당도하였는데 날이 아직 저물지 않았다. 전교하였다. "본현(本縣)에서 유숙하여 앉아서 첫닭이 울기를 기다려 떠나려고 하는데, 백성들에 관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더구나 이런 해를 만났으니 당연히 경축하는 뜻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묵은 환곡의 1년 몫을 탕감하여 주도록 하라."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801012_001
Rec-0168 정조실록_46권_1797_0129_01 17970129 上, 將謁顯隆園, 駕發至崇禮門外, 歷臨關王廟, 命守直官邊將差送。 至龍驤鳳翥亭少駐, 還發晝停于始興, 夕次華城行宮。 상이 현륭원(顯隆園)을 전알하기 위하여 어가(御駕)가 숭례문(崇禮門) 밖에 이르렀을 때 관왕묘(關王廟)에 들러 수직관(守直官)을 변장(邊將)으로 파견할 것을 명하였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에 이르러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출발하여 시흥(始興)의 주정소(晝停所)에 머물렀다가 저녁에 화성 행궁(華城行宮)에 유숙하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2101029_001
Rec-0169 정조실록_47권_1797_0815_01 17970815 行茶禮于璿源殿。 上, 將詣章陵, 駕至崇禮門外, 歷臨關王廟, 晝停于陽川行宮。 召見京畿觀察使李在學, 地方官吳泰彦, 各務差使員吳鼎源等, 詢沿路民瘼。 泰彦奏: "陽川以濱江汚下之地, 每多水沈之患, 年久汰落爲二十九結, 丁未以後, 漸次未付爲四十九結, 而竝未入災, 間多白徵。" 上, 命年久汰落, 特蠲其稅, 丁未以後汰落, 令道臣, 更査蠲稅。 선원전(璿源殿)에서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상이 장릉(章陵)으로 가던 도중에 어가(御駕)가 숭례문(崇禮門) 밖에 이르자 관왕묘(關王廟)에 들리고, 양천(陽川) 행궁(行宮)에서 주정(晝停)하였다. 경기 관찰사 이재학(李在學)과 지방관 오태언(吳泰彦)과 각무 차사원(各務差使員) 오정원(吳鼎源) 등을 불러 보고 연로(沿路) 백성들의 고통을 물었다. 오태언이 아뢰기를, "양천은 강가의 낮은 지방이라서 매양 물에 잠기는 근심이 많으니, 세월이 오래되자 떨어져 나간 토지가 29결(結)이나 되며, 정미년 이후로 점차 부치지 못하게 된 것이 49결(結)이나 되는데도 모두 재결(災結)에 포함되지 못하고 간혹 생판으로 징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니, 상이 세월이 오래되어 떨어져 나간 토지는 그 부세(賦稅)를 특별히 감면하고 정미년 이후에 떨어져 나간 것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여 부세를 감면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2108015_001
Rec-0170 정조실록_52권_1799_0819_01 17990819 幸獻陵。 歷臨關王廟, 至舟橋, 製下七言近體詩二首。 英廟戊子, 上在春宮陪駕謁獻陵, 龍舟渡廣津, 嘗有賦詩。 至是追感昔事, 用其韻以賦, 命諸臣賡進。 至果川行宮, 天未明, 命軍兵少憩。 平明, 詣獻陵親祭, 入齋室, 又製七言律詩一篇, 亦戊子韻也。 諸臣復賡進, 還次果川行宮。 헌릉(獻陵)에 행차하였다. 관왕묘(關王廟)를 둘러본 뒤에 주교(舟橋)에 이르러 칠언근체시(七言近體詩) 두 수를 지었다. 영묘(英廟) 무자년 상이 동궁에 있을 때 어가를 모시고 헌릉을 참배하러 갔는데 용주(龍舟)로 광나루를 건너면서 시를 지은 적이 있었다. 이 때에 와서 옛일을 회상하여 그 당시의 운자로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올릴 것을 명하였다. 과천(果川) 행궁에 당도하니 날이 아직 새지 않아 군병들에게 조금 휴식을 취하라고 명하였다. 아침해가 돋을 때 헌릉에 나아가 직접 제사를 지내고 재실로 들어가 또 칠언 율시 한 편을 지었는데, 역시 무자년 당시의 운자였다. 신하들이 또 다시 화답하여 올린 뒤에 과천 행궁으로 돌아와 머물렀다.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va_12308019_001
Rec-0171 순조실록_6권_1804_0901_01 18040901 還宮, 歷路行禮於南關王廟。 환궁(還宮)하는 길에 남관왕묘(南關王廟)에서 예(禮)를 행하였다. 순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409001_001
Rec-0172 순조실록_8권_1806_0222_01 18060222 還宮, 歷詣南關王廟行禮。 환궁하였다. 지나면서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가 행례(行禮)하였다. 순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602022_001
Rec-0173 순조실록_10권_1807_0901_01 18070901 詣孝昌墓, 行酌獻禮, 歷臨宜嬪墓, 仍詣南關王廟, 行禮。 효창묘(孝昌墓)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의빈묘(宜嬪墓)에 역림(歷臨)하였다가, 이어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순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709001_001
Rec-0174 순조실록_13권_1810_0830_01 18100830 駕還, 歷臨南關王廟, 行奠酌禮, 還宮。 어가가 돌아오면서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들러 전작례(奠酌禮)를 행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순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wa_11008030_001
Rec-0175 순조실록_23권_1821_0221_01 18210221 還宮, 歷詣南關王廟行禮。 환궁하다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들러 예를 거행하였다. 순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wa_12102021_001
Rec-0176 순조실록_27권_1825_0212_01 18250212 詣徽慶園, 展謁親祭, 王世子隨詣行禮, 還宮時, 歷拜于東關王廟。 휘경원(徽慶園)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친제(親祭)하였는데, 왕세자가 따라가 행례하였다. 환궁할 때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러 전배하였다. 순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wa_12502012_001
Rec-0177 순조실록_28권_1827_0313_02 18270313 王世子承命。 詣懿陵奉審, 歷拜東關王廟。 왕세자가 명령을 받들어 의릉(懿陵)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지나는 길에 동관왕묘(東關王廟)에 참배하였다. 순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wa_12703013_002
Rec-0178 순조실록_30권_1828_0225_01 18280225 還宮。 命王世子奠酌于南關王廟, 祭官以下施賞。 환궁(還宮)하였다. 왕세자에게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가 전작(奠酌)을 행하고, 제관(祭官) 이하에게 시상하라고 명령하였다. 순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wa_12802025_001
Rec-0179 순조실록_30권_1829_0227_01 18290227 詣徽慶園展拜親祭。 還宮時行禮于東關王廟, 王世子隨詣行禮。 휘경원(徽慶園)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몸소 제사 지내었다. 환궁할 때에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러 행례하였는데, 왕세자도 따라가서 행례하였다. 순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wa_12902027_001
Rec-0180 순조실록_31권_1830_0219_01 18300219 全州 慶基殿鐵網及康津 誕報廟修改監(蕫)〔董〕 道臣以下, 施賞有差。 전주(全州) 경기전(慶基殿)의 철망(鐵網) 및 강진(康津) 탄보묘(誕報廟)의 수리를 감독한 도신(道臣)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순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wa_13002019_001
Rec-0181 순조실록_31권_1830_0228_01 18300228 詣徽慶園展謁親祭, 王世子隨詣行禮, 駕還, 行禮于東關王廟。 휘경원(徽慶園)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친제(親祭)하였으며, 왕세자도 수행하여 나아가 행례(行禮)하고, 대가(大駕)가 돌아오면서 동관왕묘(東關王廟)에 행례하였다. 순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wa_13002028_001
Rec-0182 순조실록_32권_1831_0219_01 18310219 詣徽慶園展謁, 親祭懿陵, 展謁延慶墓, 親行奠酌禮, 仍行夕上食。 還宮時, 歷臨東關王廟。 휘경원(徽慶園)에 나아가 전알(展謁)한 다음 친히 제사지내고 의릉(懿陵)에 전알하였으며, 연경묘(延慶墓)에 친히 전작례를 행하고 이어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궁(宮)으로 돌아올 때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렀다. 순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wa_13102019_001
Rec-0183 순조실록_32권_1832_0227_02 18320227 敎曰: "肇建之舊甲又回, 豈無興感之心? 武安王 南廟, 當親行奠酌禮, 日字, 以來月旬前擇入, 東廟令將臣攝行, 南原 康津兩廟, 則獻官令本道兵水使, 分進。" 하교하기를, "조건(肇建)한 옛 갑년(甲年)이 또 돌아왔으니, 어찌 흥감(興感)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무안왕(武安王)의 남묘(南廟)에 마땅히 전작례(奠酌禮)를 친히 행할 것이니, 날짜를 다음달 보름 이전으로 택정하여 들이도록 하라. 동묘(東廟)에는 장신(將臣)으로 하여금 섭행(攝行)하도록 하고, 남원(南原)·강진(康津)의 두 묘우(廟宇)에는 헌관을 본도의 병사(兵使)와 수사(水使)로 분정하여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순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wa_13202027_002
Rec-0184 순조실록_32권_1832_0312_01 18320312 詣南關王廟, 行奠酌禮。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가 전작례를 행하였다. 순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wa_13203012_001
Rec-0185 순조실록_32권_1832_0314_02 18320314 命湖南誕報廟、嶺南關王廟衣襨鋪陳, 自禮曹知委, 兩道道臣, 一竝新備, 此後則道臣巡歷時, 奉審修補, 年限以七年爲定, 所入物力, 以公穀會減。 호남의 탄보묘(誕報廟)와 영남의 관왕묘(關王廟)에 의대(衣對)와 포진(鋪陳)을 예조에서 두 도(道)의 도신에게 알리어 똑같이 새로 갖추도록 하고, 이 뒤로는 도신이 순력(巡歷)할 때에 보살피고 수리하되 연한(年限)을 7년으로 정하고 들어가는 물력(物力)은 공곡(公穀)에서 회감(會減)하라고 명하였다. 순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wa_13203014_002
Rec-0186 헌종실록_4권_1837_0802_01 18370802 大王大妃敎曰: "今年, 卽宣廟丁酉舊甲, 而天將撻伐之績, 百世不可忘。 宣武祠、征東官軍祠, 遣承旨致侑。 因此思之, 本朝殉義諸臣, 實難俱擧, 而此時南原之役, 尤切興愴。 本府誕報廟及忠烈祠, 遣道內秩高守令, 一體致祭。"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하교(下敎)하기를, "금년은 곧 선조조(宣祖朝)에 정유 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던 옛 갑년(甲年)인데, 천장(天將)이 왜구(倭寇)의 침략을 신속하게 토벌한 공적(功績)은 백대(百代)를 가도 잊을 수가 없다. 선무사(宣武祠)·정동관군사(征東官軍祠)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이로 인하여 생각하건대, 순사(殉死)한 본조(本朝)의 여러 신하들을 모두 거행하기는 진실로 어렵겠지만, 이때에 남원(南原)의 일은 더욱 절실하게 비통한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본부(本府)의 탄보묘(誕報廟)와 충렬사(忠烈祠)에 도내(道內)에서 품질(品秩)이 높은 수령(守令)을 보내어 일체로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헌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xa_10308002_001
Rec-0187 헌종실록_13권_1846_0409_01 18460409 上詣新陵所看審, 仍行犒饋, 還詣東關王廟, 行奠酌禮。 임금이 새 능소(陵所)에 나아가 간심(看審)하고, 이어서 호궤(犒饋)를 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헌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xa_11204009_001
Rec-0188 철종실록_4권_1852_0227_02 18520227 詣南關王廟展拜。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ya_10302027_002
Rec-0189 철종실록_6권_1854_0819_01 18540819 詣崇陵親祭, 仍詣景陵展謁, 東關王廟歷臨。 숭릉(崇陵)에 나아가 친제(親祭)하였다. 이어서 경릉(景陵)에 전알(展謁)하고 동관왕묘(東關王廟)에 차례로 임어(臨御)하였다. 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ya_10508019_001
Rec-0190 철종실록_7권_1855_0229_02 18550229 還詣南關王廟, 行奠酌禮, 仍還宮。 돌아오는 길에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하고, 이어 환궁(還宮)하였다. 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ya_10602029_002
Rec-0191 철종실록_7권_1855_0302_01 18550302 敎曰: "南關王廟奠酌禮時, 大祝訓鍊院正尹秉鼎加資。" 하교하기를, "남관왕묘(南關王廟)에서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을 때의 대축(大祝)인 훈련원정(訓鍊院正) 윤병정(尹秉鼎)에게 가자(加資)하라." 하였다. 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ya_10603002_001
Rec-0192 철종실록_13권_1861_0218_01 18610218 詣南關王廟, 行奠酌禮。 仍詣龍城府大夫人墓所展拜。 還至慕華館行殿, 閱武。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이어서 용성 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묘소(墓所)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돌아오다가 모화관(慕華館) 행전(行殿)에 이르러 열무(閱武)하였다. 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ya_11202018_001
Rec-0193 고종실록_3권_1866_0905_03 18660905 還宮時。 歷拜東關王廟。 환궁(還宮)시 동관왕묘(東關王廟)를 두루 전배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309005_003
Rec-0194 고종실록_5권_1868_0323_01 18680323 詣南關王廟, 展拜。 仍詣館所, 閱武。 訖, 領議政金炳學曰: "三軍府旣復設矣。 五衛舊制, 今不可遽議, 而曾經將臣中, 大匡則領事, 上輔國、輔國則判事, 崇祿、崇政則行知事, 正憲、資憲則知事, 竝以兼銜下批。 時任將臣, 亦照此例, 隨時單付, 仍以三營將臣定爲有司三員, 檢察一府事, 著爲定式, 恐好。" 允之。 又曰: "武臣晉塗, 各有其薦, 而武科壯元, 若無南行薦, 則一番付職, 更不得遷轉, 其所齎菀, 由來久矣。 自今爲始, 地閥之可合奬進者, 武將臣筵奏後, 依別薦例許用宣薦事, 著式施行何如?" 允之。 訓鍊大將申觀浩曰: "武臣之當薦而無薦人, 雖緣事會, 實爲齎菀矣。 纔有大僚所奏, 前水使金樂文、吉州牧使張斗衡、前僉使具昌植、把總李德純、捕從洪運爕、武兼申相兌, 俱合薦剡, 竝以宣薦施行何如?" 允之。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이어서 관소(館所)에 나아가 열무(閱武)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삼군부(三軍府)를 다시 설치하였습니다. 오위(五衛)의 옛 제도에 대해서는 이제 갑자기 논의할 수는 없으나 전임 장신 중에서 대광보국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는 영사(領事)로, 상보국숭록 대부(上輔國崇祿大夫)와 보국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는 판사(判事)로, 숭록 대부(崇祿大夫)와 숭정 대부(崇政大夫)는 행 지사(行知事)로, 정헌 대부(正憲大夫)와 자헌 대부(資憲大夫)는 지사(知事)로 삼아 모두 겸함(兼銜)으로 하비(下批)해야 되겠습니다. 시임 장신도 이 규례를 참조하여 수시로 단부(單付)하고 세 영문의 장신은 유사(有司) 3원(員)을 정하여 한 부(府)를 검찰하도록 정식(定式)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무신(武臣)들의 승진에는 각기 천거가 있습니다. 무과에 장원 급제하고서 만약 음관(蔭官)의 천거가 없을 경우에는 한 번 직책을 맡고 난 다음에 다시 천전(遷轉)할 수 없으므로 그들이 억울한 마음을 품고 있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가문이 밀어주어도 될 만한 자는 무장(武將) 신하가 연석에서 아뢴 뒤에 별천례(別薦例)에 의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의망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정식으로 삼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훈련대장(訓鍊大將) 신관호(申觀浩)가 아뢰기를, "무관(武官)으로서 천거를 받아야 할 사람이 천거하는 사람이 없으면 설사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실로 원통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방금 영의정이 아뢰었습니다만 전 수사(水使) 김낙문(金樂文), 길주 목사(吉州牧使) 장두형(張斗衡), 전 첨사(僉使) 구창식(具昌植), 파총(把總) 이덕순(李德純), 포종(捕從) 홍운섭(洪運燮), 무겸(武兼) 신상태(申相兌)는 모두 천거할 만한 사람들이니, 다 같이 선전관(宣傳官)에 천망하는 것으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503023_001
Rec-0195 고종실록_5권_1868_0810_01 18680810 自綏陵齋室還宮, 歷拜東關王廟, 行奠酌禮。 수릉(綏陵)의 재실(齋室)에서 환궁하다가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두루 전배하고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508010_001
Rec-0196 고종실록_5권_1868_0811_01 18680811 健元陵、崇陵、綏陵、景陵親祭時獻官以下、東廟奠酌禮時贊禮以下, 施賞有差。 贊禮金世均、禮房承旨趙采夏、執禮李世用、執尊閔謙鎬、大祝鄭顯裕, 竝加資。 건원릉(健元陵), 숭릉(崇陵), 수릉(綏陵)·경릉(景陵)에 친히 제사지낼 때의 헌관(獻官) 이하와 동관왕묘(東關王廟) 전작례(奠酌禮) 때의 찬례(贊禮)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찬례 김세균(金世均), 예방 승지(禮房承旨) 조채하(趙采夏), 집례(執禮) 이세용(李世用), 집준(執尊) 민겸호(閔謙鎬), 대축(大祝) 정현유(鄭顯裕)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508011_001
Rec-0197 고종실록_6권_1869_0315_01 18690315 自光陵還宮時, 歷拜東關王廟。 광릉(光陵)에서 환궁할 때 동관왕묘(東關王廟)를 두루 전배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603015_001
Rec-0198 고종실록_8권_1871_0911_01 18710911 詣南關王廟, 行奠酌禮。 仍幸鷺梁沙汀, 行內三廳試射。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이어 노량사정(鷺梁沙汀)에 행차하여 내삼청(內三廳)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809011_001
Rec-0199 고종실록_8권_1871_0912_01 18710912 詣東關王廟, 行奠酌禮。 仍幸沙阿里, 行西北別付料試射。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이어 사아리(沙阿里)에 행차하여 서북(西北)의 별부료 시사(別付料試射)를 행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809012_001
Rec-0200 고종실록_8권_1871_0912_03 18710912 東南關王廟奠酌禮時, 贊禮以下, 施賞有差。 禮房承旨尹泰經、大祝權鼎鎬, 加資。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서 전작례(奠酌禮)를 행할 때의 찬례(贊禮)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베풀었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윤태경(尹泰經)과 대축(大祝) 권정호(權鼎鎬)에게 가자(加資)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809012_003
Rec-0201 고종실록_11권_1874_0812_01 18740812 詣崇陵, 展謁。 還詣綏陵, 行辭陵禮。 仍爲還宮, 歷拜東關王廟。 숭릉(崇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다시 수릉(綏陵)에 나아가 사능례(辭陵禮)를 행하였으며, 이어 환궁(還宮)하는 길에 동관왕묘(東關王廟)에 참배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108012_001
Rec-0202 고종실록_11권_1874_0904_01 18740904 詣南關王廟, 展拜。 仍詣慕華館, 瑞葱臺試射。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가 전배하고 이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서총대(瑞蔥臺)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109004_001
Rec-0203 고종실록_18권_1881_0829_03 18810829 命右承旨金聲根, 馳詣禧陵、孝陵、昭慶園; 檢校直閣金興圭, 馳詣敬陵、昌陵、弘陵、順昌園; 待敎閔泳韶, 馳詣追慕洞碑閣; 檢校待敎金永悳, 馳詣南關王廟, 奉審以來。 우승지(右承旨) 김성근(金聲根)은 희릉(禧陵)·효릉(孝陵)·소경원(昭慶園)으로 달려가고, 검교 직각(檢校直閣) 김흥규(金興圭)는 경릉(敬陵)·창릉(昌陵)·홍릉(弘陵)·순창원(順昌園)으로 달려가며, 대교(待敎) 민영소(閔泳韶)는 추모동 비각(追慕洞碑閣)으로 달려가고, 검교 대교(檢校待敎) 김영덕(金永悳)은 남관왕묘(南關王廟)로 달려가서 봉심(奉審)하고 오라고 명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808029_003
Rec-0204 고종실록_20권_1883_0925_02 18830925 敎曰: "新建北關王廟, 今已畢役。 祭式與諸般儀節, 依東南廟例爲之。 關西建廟, 亦有年所。 香祝封送之節, 依星州、安東例爲之。 令本道臣行祭。" 전교하기를, "새로 세우는 북관왕묘(北關王廟)가 지금 이미 준공되었으니 제식(祭式)과 절차는 동남묘(東南廟)의 규례대로 하라. 관서(關西)에 묘를 세운 것도 몇 해가 되니, 향(香)과 축문(祝文)을 봉송(封送)하는 절차를 성주(星州)와 안동(安東)의 규례대로 하고, 본도(本道)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009025_002
Rec-2330 고종실록_21권_1884_1019_01 18841019 十九日。 夜, 上離次于北廟, 仍又轉次于宣仁門外淸統領吳兆有營房, 各殿、宮離次于蘆原。 是日申刻, 淸兵分入宮門, 放銃砲, 我左右營兵隨之, 日兵儘力禦之。 至酉刻, 上避于後苑演慶堂, 與各殿、宮, 相失轉避, 至玉流泉後北墻門。 武藝及衛士、別抄軍, 始入衛, 開門而出, 向于北廟。 日公使率兵辭宮。 金玉均、朴泳孝、徐光範、徐載弼等, 皆隨而去。 惟洪英植、朴泳敎及生徒七人從後至北廟。 亥刻, 吳統領聞上在北廟, 領隊往迎。 英植等挽御衣, 請勿往。 衆奉上御四人轎, 英植等, 又盛氣叱之。 我兵斫殺英植及泳敎, 又殺生徒七人。 袁世凱亦遣兵迎駕。 子刻, 到宣仁門外, 駐次吳營。 밤에 상께서 북묘(北廟)로 거처를 옮겼다가 그 길로 또 선인문(宣仁門) 밖에 있는 청(淸) 나라 통령(統領) 오조유(吳兆有)의 영방(營房)으로 옮겼으며, 각전(各殿)과 각궁(各宮)도 노원(蘆原)으로 옮겼다. 이날 신시(申時)에 청나라 병사들이 대오를 나누어 궁문(宮門)으로 들어오면서 총포(銃砲)를 쏘았고 우리나라 좌영(左營)과 우영(右營)의 병사들도 따라 들어오니 일본 병사들이 힘을 다해 막았다. 유시(酉時)에 상께서 후원(後苑)에 있는 연경당(演慶堂)으로 피하였는데 각 전과 각 궁과 서로 연계를 잃고 옮겨 피하여 옥류천(玉流泉) 뒤 북쪽 담문에 이르렀다. 이때에 무예청(武藝廳) 및 위사(衛士), 별초군(別抄軍)이 비로소 들어와서 호위하여 문을 열고 나가 북묘(北廟)로 향하였다. 일본 공사(日本公使)가 병사를 거느리고 궁을 떠났는데,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 등은 모두 따라나갔고, 오직 홍영식(洪英植)과 박영교(朴泳敎) 및 생도(生徒) 7인만이 뒤따라 북묘로 갔다. 해시(亥時)에 오 통령(吳統領)은 상께서 북묘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대오를 거느리고 맞이하러 갔다. 홍영식 등이 어의(御衣)를 끌어당기면서 가지 말라고 청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상을 모시고서 사인교(四人轎)에 태우니 홍영식 등은 또 성을 내며 고함쳤다. 우리 병사가 홍영식과 박영교를 쳐죽이고, 또 생도 7인도 죽였다. 원세개(袁世凱) 또한 병사를 보내어 임금을 영접하였다. 자시(子時)에 선인문 밖에 이르러 오 통령의 영방에서 머물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wza_12110019_001
Rec-0205 고종실록_22권_1885_0413_01 18850413 詣文廟, 展拜。 仍詣北關王廟, 行奠酌禮。 王世子隨詣, 行禮。 문묘(文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이어 북관왕묘(北關王廟)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204013_001
Rec-0206 고종실록_22권_1885_0826_06 18850826 臣見閭里之間有結搆精緻而不類居室者, 聞之則神祠也。 小民門楣往往揭伏魔聖帝字, 皆前所未見也。 我國崇奉關王, 旣有東南二廟, 又創建北廟, 儀制尊嚴, 都人士女, 祈禳報賽, 不患無所。 若家爲巫史而瀆之, 則不敬甚矣。 其外土木之怪、叢社之靈, 非典、不經, 朝令所禁, 且凡事休咎, 無不自己求之。 《書》曰: ‘作善降祥’, 又曰: ‘惠迪吉’。 《詩》曰: ‘豈弟君子, 求福不回。’ 此理灼然, 而小民無知, 惟求事神, 可爲矜憫。 亟令法司, 隨有毁除, 使輦下肅淸, 則亦衛正、闢異之一端也。 신이 보니, 동리(洞里) 안에 아주 잘 지은 집이 있었는데 사람이 사는 집 같지 않았습니다. 듣건대, 신사(神祠)로서 백성들이 문미(門楣)에 이따금 ‘복마성제(伏魔聖帝)’라는 글을 써서 걸어놓는다고 하니, 이것은 모두 이전에 보지 못한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관왕(關王)을 숭상하고 받들어서 이미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남관왕묘(南關王廟)가 있는데다가 또 북관왕묘(北關王廟)를 새로 세우고 의식 제도도 존엄하기 때문에 도성의 남녀들이 빌거나 푸닥거리할 곳이 없다는 근심이 없는데, 만약에 무당을 위해서 집을 짓고 어지럽힌다면 매우 불경(不敬)한 것입니다. 그 밖에 흙이나 나무로 만들어 놓은 괴이한 귀신과 각종 귀신을 위해 만들어 놓은 사당의 신령들은 법에 어긋나고 정상적인 것이 아니어서 조정의 명령으로 금지시키고 있는 것일 뿐 아니라 모든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어느 것이나 자기 자신이 하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착한 일을 하면 상서(祥瑞)를 내려준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은혜는 길(吉)한 데로 나간다.’라고 하였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선량한 군자는 복을 구하는 데에서 간사하게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치상 명백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무지하여 오직 귀신을 섬겨 요구하고 있으니, 불쌍하고 딱한 일입니다. 속히 법사로 하여금 있는 대로 헐어버려서 수도를 엄숙하고 맑게 한다면 또한 바른 것을 보위하고 이단을 물리치는 한 가지 단서가 될 것입니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208026_006
Rec-0207 고종실록_22권_1885_1122_02 18851122 親軍右營、別抄新營及關王廟畢役監董右營使以下, 施賞有差。 친군 우영(親軍右營), 별초 신영(別抄新營)과 관왕묘(關王廟)의 공사를 끝내는 것을 감독한 우영사(右營使) 이하에 대하여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211022_002
Rec-0208 고종실록_29권_1892_0820_02 18920820 敎曰: "謁聖之禮外曠, 于今三年矣。 趁卽展謁, 有不容緩, 當親行酌獻禮矣。 日字, 來九月望後擇入。" 又敎曰: "靈貺赫赫, 騭佑旣多, 而尤於是年, 愈切興感之心。 當親行奠酌禮于北關王廟矣。 日字, 來月旬間擇入。" 전교하기를, "알성(謁聖)의 예(禮)를 거행하지 않은 지 3년이 되었다. 늦추지 말고 즉시 전알(展謁)해야 할 것이고 작헌례(酌獻禮)를 친히 행할 것이다. 날짜는 다음달 보름 이후로 택일(擇日)하여 들이라." 하니, 또 전교하기를, "신령의 혜택이 빛나고 몰래 도움을 준 것도 많았는데 더구나 올해에 와서 고마운 생각이 더 간절하다. 북관왕묘(北關王廟)에 전작례(奠酌禮)를 친히 행할 것이니, 다음 달 10일께로 택일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908020_002
Rec-0209 고종실록_29권_1892_0910_01 18920910 詣北關王廟, 行奠酌禮。 王世子隨詣, 行禮。 북관왕묘(北關王廟)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909010_001
Rec-0210 고종실록_29권_1892_0910_02 18920910 北廟奠酌禮時贊禮以下、陪從春桂坊以下及東南廟獻官以下, 施賞有差。 禮房承旨李容稙、禮貌官閔泳奎、相禮金敎獻、大祝金成圭, 竝加資。 북관왕묘(北關王廟)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의 찬례(贊禮) 이하, 배종(陪從)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이하,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남관왕묘(南關王廟)의 향관(享官)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이용직(李容稙), 예모관(禮貌官) 민영규(閔泳奎), 상례(相禮) 김교헌(金敎獻), 대축(大祝) 김성규(金成圭)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909010_002
Rec-0211 고종실록_30권_1893_0513_01 18930513 詣文廟, 展拜, 次詣北關王廟, 展拜。 王世子隨詣, 行禮。 仍御三仙坪, 王世子侍座, 瑞葱臺試射。 문묘(文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이어 북관왕묘(北關王廟)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이어 삼선평(三仙坪)에 나아가 왕세자가 시좌(侍座)한 가운데 서총대 시사(瑞蔥臺試射)를 행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005013_001
Rec-0212 고종실록_30권_1893_0821_03 18930821 前正言安孝濟疏略: "昔在宣祖龍蛇之亂後, 天將謂有關王顯靈陰佑之事, 始建東南二廟。 蓋關王之貞忠大節, 炳若日星, 我列聖朝建香祝, 載在中祀。 寔崇象襃旌之義, 非專爲祈禳而設也。 我殿下增建北廟, 亦一體盛意也, 奈之何近年以來, 俗尙訛漓, 巫覡成風, 以堂堂俎豆之所, 視若詛呪祈禱之地? 乃者有一種怪鬼, 陰挾狐蠱, 假稱聖帝之女, 自作北廟主人, 以妖譎荒誕不經之說, 誑惑中外, 濫稱君號, 敢竊榮寵。 又廣引士大夫嗜利無恥者, 曰弟曰子, 而煽相呴噓, 睢盱眩亂, 以作威福, 往往守宰牧伯, 多出其手。 噫! 其瀆褻神靈, 臭穢廟宇, 孰甚於此? 況今國家無大故天災之變, 亦無成成湯之亢旱祈禱之事, 何爲而數也? 外若叢祠隍宇, 佛壇巫鈴, 殆無虛日, 動費巨萬, 宮門之內, 齋戒禁忌, 有若作佛事者然, 何哉? 瞽師巫祝, 由是而橫行; 僧尼妖道, 由是而縱藉; 輿臺倡優, 由是而喧豗; 府庫財用, 由是而窘絀; 官房銓注, 由是而淆雜; 宮禁, 由是而不肅; 刑賞, 由是而不明; 生民, 由是而困瘁; 朝政, 由是而委潰。 究其源委, 則皆禱祀之爲祟也。 嗚呼, 好淫祀瀆神以求福, 而反獲戾者, 亂亡之道也, 雖閭閻間稍解事理者, 尙不爲此輩之所惑, 況以殿下之聰明而尙不之覺乎?" 전 정언(前正言) 안효제(安孝濟)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옛날 선조(宣祖) 때의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 명(明) 나라 장수가 관왕(關王)의 신령이 나타나서 몰래 도와준 일이 있다고 하여 비로소 동쪽과 남쪽에 두 개의 관왕묘(關王廟)를 지었습니다. 대개 관왕의 곧고 충성스러운 절개는 해와 별과 같이 빛났으므로 우리 열성조(列聖朝)도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중사(中祀)의 규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숭상하고 찬양하는 뜻을 표시한 것이지, 오로지 복을 빌기 위해서만 설치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전하가 북관왕묘(北關王廟)를 더 지은 것도 다같이 훌륭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 어찌하여 근래에 와서는 시속이 거짓과 야박한 것을 숭상하고, 굿을 하는 것이 풍속을 이루어, 제사지내는 위풍당당한 곳을 주문을 외우며 기도를 드리는 장소와 같이 여기는 것입니까? 요사이 일종의 괴이한 귀신이 몰래 여우같은 생각을 품고 성제(聖帝)의 딸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스스로 북관왕묘의 주인이 되어 요사스럽고 황당하며 허망한 말로써 중앙과 지방의 사람들을 속이고 함부로 ‘군(君)’ 칭호를 부르며 감히 임금의 총애를 가로채려 하였습니다. 또한 잇속을 늘이기 즐겨하며 염치가 없는 사대부들을 널리 끌어들여서 아우요, 아들이요 하면서 서로 칭찬하고 감춰 주며 가늠할 수 없이 권세를 부려 위엄을 보이거나 생색을 내니, 왕왕 수령(守令)이나 감사(監司)들도 많은 경우 그의 손에서 나옵니다. 아! 신령을 모독하고 사당을 더럽히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나라에 큰 변고나 하늘의 재난도 없고 또한 은탕(殷湯) 때와 같은 큰 가뭄도 없는데, 기도하는 일은 무엇 때문에 자주 하는 것입니까? 겉은 마치 잡신을 모신 사당이나 성황당 같은데, 부처를 위해 둔 제단에서 무당의 염불 소리는 거의 없는 날이 없고, 걸핏하면 수만금의 재정을 소비하여 대궐 안에서의 재계(齋戒)와 제사와 관련한 일들을 마치 불교행사를 하듯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소경 점쟁이와 무당이 이 때문에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중들의 요망스러운 교리가 이 때문에 제멋대로 퍼지며, 하인과 광대들이 이 때문에 떠들썩하게 지껄여 대고, 창고의 재정은 이 때문에 궁색하며, 관청 준칙과 관리 추천은 이 때문에 난잡하게 되고, 대궐 안은 이 때문에 엄숙하지 못하며, 형벌과 표창은 이 때문에 공명정대하지 못하고, 백성은 이 때문에 곤궁에 빠지며, 조정의 정사는 이 때문에 문란하게 되는데, 그 근원을 따지면 모두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숭상하기 때문입니다. 아! 부당한 제사를 지내기 좋아하며 귀신을 모독하면서 복을 구하니 도리어 이런 죄를 짓는 것은 멸망하는 길입니다. 비록 일반 백성들 중에서 사리를 좀 아는 사람인 경우에도 이런 무리들에게 속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총명한 전하가 오히려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008021_003
Rec-0213 고종실록_30권_1893_0826_04 18930826 正言金萬濟疏略: "臣伏讀權鳳熙、安孝濟島配安置, 成命之下, 不勝惶懍。 噫, 彼兩罪人疏中句語, 負犯極大, 何至輕勘? 以權鳳熙言之, 三公六卿, 歸之以尸位素餐, 誹訕朝廷, 且以太甲悔悟之說, 指斥聖躬, 奚止島配安置之典也? 又以安孝濟言之, 渠以大逆罪人驥泳之族, 含怨在中, 包藏禍心。 不顧事體, 任意投疏, 以尊崇之關廟, 歸之於叢祠荒壇, 侮弄神明, 繼之以‘禱祀求福, 反獲戾者亂, 亡云’云之說, 誣辱詬罵, 無所不至。 且宮闕莫嚴之地, 渠以虛無佛事等說, 甚至有凶悖, 於此一款, 罪難貸於覆載之間, 亟正邦刑, 恐合當律也。 至於魚允中, 甲申亂四凶中泳孝之父尸兄尸, 渠皆自當治之, 今番宣撫公行之路, 又以棘置罪人李道宰之宿嫌, 濫殺二人。 若非護逆之心, 何至藉公而酬其私嫌乎? 此是邦刑之急先者, 而姑未蒙處分, 惶悚莫甚於此也。 又以張炳翊言之, 泮宮月課, 卽養士之王政也, 而敢言請罷, 此不免師門之賊也。 又以朴始淳言之, 與安孝濟居在同隣, 情契密合, 相爲治疏, 從中設力, 豈無臺論乎? 上項亂類, 不可以愚昧沒覺, 容之恕之云云?" 批曰: "又何如是支煩乎?" 정언(正言) 김만제(金萬濟)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권봉희(權鳳熙)와 안효제(安孝濟)를 도배 안치(島配安置)하라는 명이 내린 것을 읽고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 저 두 죄인의 상소 가운데 구어(句語)는 범한 죄가 매우 큰데 어찌 가볍게 처벌하고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권봉희로 말하면, 삼공(三公)과 육경(六卿)을 하는 일이 없이 자리나 차지하고 있거나 밥만 축내는 사람들로 치부하며 조정을 비난하고 헐뜯었고, 또한 태갑(太甲)이 자기 허물을 깨달았다는 말로써 성궁(聖躬)을 지적하였는데 어찌 도배 안치하는 법에 그칠 수 있습니까? 또한 안효제로 말하면, 그는 대역 죄인 안기영(安驥泳)의 친족으로서 마음속에 원망을 품고 화심(禍心)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일의 체모를 돌아보지 않고 제멋대로 상소를 올려 존숭(尊崇)하는 관왕묘(關王廟)를 잡귀신 사당과 허황한 제단으로 치부하면서 신명(神明)을 우롱하였을 뿐 아니라 계속하여, ‘기도하여 복을 구하다가 도리어 죄를 짓는 것은 난망(亂亡)이다.’라는 말로써 모독하고 욕질하며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더없이 숭엄한 대궐에 대하여 허무한 불사(佛事)를 한다는 등의 심히 흉패(凶悖)한 말까지 하였습니다. 이 한 가지 조목만 가지고도 그 죄는 천지간에 용서해 둘 수 없으니, 속히 나라의 형률을 바루시어 해당 형률을 시행하시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어윤중(魚允中)에 대하여 말하면, 그는 갑신년(1884) 변란의 사흉(四凶) 가운데 박영효(朴泳孝)의 아비와 형의 시체를 그가 다 맡아 처리하였고, 이번에는 선무사(宣撫使)라는 공무로 나간 길에 위리안치죄인(圍籬安置罪人) 이도재(李道宰)의 오랜 원망을 풀려고 두 사람을 함부로 죽였습니다. 그가 만일 역적을 비호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공무를 빙자하여 사사로운 원한을 갚게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나라의 형률에서 급선무인데, 아직 처분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보다 더 황송한 일은 없습니다. 또 장병익(張炳翊)으로 말하면, 성균관의 월과(月課)는 바로 선비를 양성하는 나라의 정사인데, 감히 폐지할 것을 청하였으니, 사문(師門)의 적(賊)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또 박시순(朴始淳)으로 말하면, 안효제와 같은 이웃에 살면서 정분이 친밀하게 맺어졌는데 같이 상소문을 쓰고 중간에서 주선하였으니, 어찌 대론(臺論)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상 나라를 어지럽힌 무리들은 우매하다거나 몰지각하다고 해서 용납하거나 용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또 무엇 때문에 이처럼 지리하고 번거롭게 하는가?"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008026_004
Rec-0214 고종실록_30권_1893_0904_01 18930904 敎曰: "今十一日, 當詣毓祥宮、延祜宮、宣禧宮展拜, 仍詣景祐宮展拜。 十五日, 當詣北關王廟展拜, 仍御三仙坪, 行瑞葱臺矣。" 전교하기를, "이달 11일에는 육상궁(毓祥宮), 연호궁(延祜宮), 선희궁(宣禧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이어 경우궁(景祐宮)에 나아가 전배할 것이며, 15일에는 북관왕묘(北關王廟)에 나아가 전배하고, 이어 삼선평(三仙坪)에 나아가 서총대과(瑞蔥臺科)를 행할 것이다."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009004_001
Rec-0215 고종실록_30권_1893_0915_01 18930915 敎曰: "慶運宮將行賀儀, 而永念默佑, 彌切景仰, 有倍於他年。 今十九日北關王廟, 當親行奠酌禮矣; 東廟、南廟, 遣將臣攝行, 奠酌禮祭文, 當親撰以下矣。" 又敎曰: "瑞葱臺, 今二十一日, 景武臺爲之。" 전교하기를, "경운궁(慶運宮)에서 장차 하례 의식을 행하려고 하는데 길이 보우해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니, 사모하는 정이 다른 해보다 배나 더 간절하다. 이달 19일에 북관왕묘(北關王廟)에 친히 전작례(奠酌禮)를 행할 것이다.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는 장신(將臣)을 보내어 전작례를 섭행(攝行)하게 하되 제문(祭文)은 친히 지어서 내려 보내겠다." 하니, 또 하교하기를, "서총대과(瑞蔥臺科)는 이달 21일 경무대(景武臺)에서 행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009015_001
Rec-0216 고종실록_30권_1893_0919_01 18930919 詣北關王廟, 行奠酌禮。 王世子隨詣, 行禮。 禮畢, 領議政沈舜澤曰: "向日奉有特敎, 會議臣府後, 親軍營接濟之方, 已爲草記蒙允, 又使外署, 照會於各國公館, 而尙未究竟, 稟覆此遲矣。 至於我國操束, 有不容玩愒, 內而申飭於左右捕廳, 外而行會於各道道臣, 恐好。" 允之。 북관왕묘(北關王廟)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따라 나아가 예(禮)를 행하였다. 예가 끝나자,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특교(特敎)를 받들어 신부(臣府)에서 회의(會議)한 후에 친군영(親軍營)의 〖모자라는 경비를〗 구제할 방도에 대해 이미 초기(草記)하여 윤허를 받았으며, 또 외서(外署)로 하여금 각국 공관(公館)에 조회(照會)하게 하였으나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아서 품복(稟覆)이 이렇게 늦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단속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시일만 보내고 있을 수 없으니, 안으로는 좌우 포청(左右捕廳)에 신칙(申飭)하고, 밖으로는 각도(各道)의 도신(道臣)에게 행회(行會)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009019_001
Rec-0217 고종실록_30권_1893_0919_02 18930919 北關王廟奠酌禮時贊禮以下, 施賞有差。 禮房承旨金完秀、大祝宋秉玉、禮貌官金永悳、相禮尹相澈, 加資。 북관왕묘(北關王廟)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의 찬례(贊禮)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김완수(金完秀), 대축(大祝) 송병옥(宋秉玉), 예모관(禮貌官) 김영덕(金永悳), 상례(相禮) 윤상철(尹相澈)에게 가자(加資)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009019_002
Rec-0218 고종실록_34권_1896_0814_01 18960814 宮內府大臣李載純以"欽奉詔勅旨意, 太廟、殿、宮各陵、園祭享, 一遵舊式, 圜丘、社稷、諸山川、諸廟享祀則臣與掌禮卿參酌釐正。 別單開錄"上奏。 大中小祀別單: 圜丘 【天地從祀風雲雷雨國內山川。 冬至合祭, 正月上辛祈穀。】 , 宗廟 【四孟朔上旬、臘享、俗節、朔、望】 , 永寧殿 【春秋孟朔上旬】 , 社稷 【春秋仲朔上戊】 , 大報壇 【三月上旬】 。 已上大祀。 景慕宮 【四仲朔上旬、臘享、俗節、朔、望】 , 文廟 【春秋仲朔上丁】 , 尾箕星 【正月上寅】 , 先農 【驚蟄後亥日】 , 先蠶 【季春上巳】 , 雩祀 【孟夏朔日】 , 關王廟 【驚蟄、霜降】 , 已上中祀。 三角山、木覓山、漢江 【竝春秋仲月】 , 司寒 【春分十二月上旬】 , 中霤 【季夏土旺日】 , 啓聖祠 【春秋仲月上巳】 , 四賢祠 【春秋仲月中丁】 , 宣武祠 【三月中丁】 , 靖武祠 【八月中丁】 , 纛祭 【驚蟄、霜降】 , 厲祭城隍祭 【淸明十月朔日】 , 馬祖 【二月中氣後剛日】 , 祈雨禜祭祈雪 【竝不常設行。】 。 已上小祀。 永禧殿、濬源殿 【竝俗節、臘享】 。 華寧殿, 【誕辰、臘享】 , 各陵園 【忌辰、俗節。 顯隆園外各園無冬至。 ○祧位只寒食。】 , 肇慶廟 【春秋仲月上旬】 , 各廟宮 【俗節、春·秋分、夏·冬至。 ○祧位, 只春秋分。】 。 已上俗禮。 萬東廟 【九月】 , 歷代始祖 【春秋仲月】 , 箕子陵、東明王陵 【竝寒食】 , 三聖祠 【八月】 , 城神祠 【正月】 , 武烈祠 【三月仲丁】 , 旌忠壇 【三月上旬】 , 風雲雷雨, 【濟州秋社日】 。 已上外道祀典。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이 아뢰기를, "삼가 명령 내용을 받들고 종묘(宗廟)와 전궁(殿宮), 각 능원(陵園)의 제향(祭享)은 일체 옛 규정을 따르고, 원구단(圜丘壇), 사직단(社稷壇), 여러 산천, 여러 묘(廟)의 제향은 신(臣)이 장례원 경(掌禮院卿)과 함께 참작하여 바로잡았습니다. 별단(別單)에 개록(開錄)하여 상주(上奏)합니다." 하였다.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에 관한 별단 원구단, 【하늘땅에 제사지내는데 바람 귀신, 구름 귀신, 우레 귀신, 비 귀신, 국내의 산천에는 동지(冬至)에 합쳐서 제사지내고 정월 첫 신일(辛日)에는 기곡 대제(祈穀大祭)를 지낸다.】 종묘(宗廟) 【네 계절의 첫 달 상순(上旬), 납향(臘享), 세속 명절, 초하루와 보름이다.】 , 영녕전(永寧殿) 【봄과 가을의 첫 달 상순이다.】 , 사직단(社稷壇) 【봄과 가을의 가운데 달 첫 무일(戊日)이다.】 , 대보단(大報壇) 【3월 상순이다.】 이상은 대사(大祀)이다. 경모궁(景慕宮) 【네 계절의 가운데 달 상순, 납향, 세속 명절, 초하루와 보름이다.】 , 문묘(文廟) 【봄과 가을의 가운데 달 첫 정일(丁日)이다.】 , 미성(尾星), 기성(箕星) 【정월 첫 인일(寅日)이다.】 , 선농(先農) 【경칩(驚蟄) 후 해일(亥日)이다.】 , 선잠(先蠶) 【3월 첫 사일(巳日)이다.】 , 우사(雩祀) 【6월 초하루이다.】 , 관왕묘(關王廟) 【경칩과 상강(霜降)이다.】 이상은 중사(中祀)이다. 삼각산(三角山), 목멱산(木覓山), 한강(漢江) 【모두 봄과 가을의 가운뎃달이다.】 , 사한(司寒) 【춘분(春分) 12월 상순이다.】 , 중류(中霤) 【6월 토왕일(土旺日)이다.】 , 계성사(啓聖祠) 【봄과 가을의 가운데 달 첫 사일(巳日)이다.】 , 사현사(四賢祠) 【봄과 가을의 가운데 달 두 번째 정일(丁日)이다.】 , 선무사(宣武祠) 【3월의 두 번째 정일이다.】 , 정무사(靖武祠) 【8월의 두 번째 정일이다.】 , 독제(纛祭) 【경칩과 상강이다.】 , 여제(厲祭), 성황제(城隍祭) 【청명(淸明)과 10월 초하루이다.】 , 마조(馬祖) 【2월의 중기(中氣)가 든 후의 강일(剛日)이다.】 , 기우(祈雨), 영제(禜祭), 기설(祈雪) 【모두 수시로 지낸다.】 이상은 소사(小祀)이다. 영희전(永禧殿)과 준원전(濬源殿) 【모두 세속 명절과 납향이다.】 , 화녕전(華寧殿) 【생일날과 납향이다.】 , 각 능원(陵園) 【기신(忌辰)과 세속 명절이니, 현륭원(顯隆園)을 제외한 각원(各園)에는 동짓날에 지내지 않는다. ○신주를 옮기는 대상에는 한식(寒食)날에만 지낸다.】 , 조경묘(肇慶廟) 【봄과 가을의 가운데 달 상순이다.】 , 각 묘(廟)와 궁(宮) 【세속 명절, 춘분(春分), 추분(秋分), 하지(夏至), 동지(冬至) ○신주를 옮기는 대상에는 춘분과 추분에만 지낸다.】 이상은 속례(俗禮)이다. 만동묘(萬東廟) 【9월이다.】 , 역대 시조(始祖) 【봄과 가을의 가운데 달이다.】 , 기자릉(箕子陵)과 동명왕릉(東明王陵) 【모두 한식날이다.】 , 삼성사(三聖祠) 【8월이다.】 , 성신사(城神祠) 【1월이다.】 , 무열사(武烈祠) 【3월 가운데 정일(丁日)이다.】 , 정충단(旌忠壇) 【3월 상순이다.】 , 풍운 뇌우(風雲雷雨) 【제주도(濟州道)에서 입추 후 다섯째 무일이다.】 이상은 지방의 도(道)의 제사 규정이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308014_001
Rec-0219 고종실록_39권_1899_0214_01 18990214 宮內府大臣李載純奏: "卽接南關王廟守直官金鎭泰所報, 則以爲: ‘今日申時量, 無根之火, 忽起於本廟正殿斑子上, 衝出南簷, 盡燒廟宇, 延及左右, 御筆碑閣、翼閣, 亦爲回祿。 而正位塑像、小本塑像、北龕室影幀、左右壁上影幀, 奉出權安于奉常提調李根秀家。 普凈大師塑像, 亦爲奉出, 而四位陪將塑像, 事在蒼黃竟, 未暇救云’矣。 至敬至重之地, 有此意外之變, 萬萬驚悚。 當該守直官, 所當重勘, 而自臣府不敢擅便, 何以爲之? 而失火根因, 令法部到底査覈何如?" 制曰: "當該守直官, 令法部照律懲辦。"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이 아뢰기를, "방금 남관왕묘(南關王廟)의 수직관(守直官) 김진태(金鎭泰)의 보고를 받아보니, ‘오늘 신시(申時) 경에 난데없는 불이 갑자기 본 왕묘(王廟)의 정전(正殿) 반자(斑子) 위에서 일어나 남쪽 처마를 뚫고 나왔는데 사당은 전부 타고 좌우 친필 비각(左右親筆碑閣)에 불이 번졌고 익각(翼閣)도 불타 버렸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있는 소상(塑像), 소본소상(小本塑像), 북감실(北龕室)에 있는 어진(御眞), 좌우벽에 걸린 어진(御眞)은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이근수(李根秀)의 집에 임시로 모셔놓았습니다. 보정 대사(普淨大師)의 소상(塑像)도 모셔 내왔는데 네 명의 장수 소상은 일이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끝내 꺼내올 겨를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극히 공경스럽고 중요한 곳에서 이런 뜻밖의 변이 일어났으니 매우 놀랍고 두렵습니다. 해당 수직관은 마땅히 엄중하게 처리해야 하겠는데 신의 부에서는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리고 실화(失火)의 근원은 법부(法部)에서 철저히 사핵(査覈)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해당 수직관은 법부에서 법률에 따라 징벌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02014_001
Rec-0220 고종실록_39권_1899_0214_02 18990214 掌禮院卿李鎬翼奏: "南關王廟正殿, 有失火之變, 萬萬驚悚。 塑像雖幸奉出, 不可無慰安之節, 慰安祭不卜日陰曆正月初六日設行, 祝文令侍讀撰出何如?" 允之。 仍制曰: "祭文當親撰以下矣。"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호익(李鎬翼)이 아뢰기를, "남관왕묘(南關王廟) 정전(正殿)에 화재가 일어난 변고는 매우 놀랍고 두려운 일입니다. 소상은 다행히 모셔내 왔다고 하지만 위안하는 절차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위안제(慰安祭)는 날을 받지 말고 음력 정월 6일에 설행하되 축문(祝文)은 시독관(侍讀官)이 찬출(撰出)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서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제문(祭文)은 직접 지어서 내려보내겠다."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02014_002
Rec-0221 고종실록_39권_1899_0214_03 18990214 引見原任議政大臣、議政府參政、贊政、參贊、宮內府大臣、勅任官、時原任閣臣。 承候也。 特進官尹容善曰: "景孝殿後面簾帳失火, 幸卽撲滅, 而聖衷必致驚動矣。" 上曰: "趁卽救止, 不至延燒, 猶爲萬幸也。" 容善曰: "南關王廟失火, 萬萬驚悚。 塑像趁卽移安, 不幸中幸。 而失火根因, 令法部嚴覈定罪何如?" 允之。 上曰: "三百年來, 豈有如許災異? 而列聖朝御筆, 亦在燒燼中, 萬萬驚悚。 陪將塑像, 未卽移出, 雖緣事勢, 驚歎極矣。" 容善曰: "御筆燒燼, 尤爲驚悚矣。" 上曰: "正位塑像, 詳細奉審, 若有虧欠處, 則精備埏埴, 陪將塑像, 旣未救出, 則一依北廟同像。 造成重建之役, 一時爲急, 令掌禮院吉日擇入, 亦令營繕司, 專管擧行。" 원임 의정 대신(原任議政大臣),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찬정(贊政), 참찬(參贊),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과 칙임관(勅任官), 시임 및 원임 규장각(奎章閣)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안부를 여쭈었기 때문이다. 특진관(特進官)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경효전(景孝殿) 후면의 염장(簾帳)에 불이 난 것을 다행히 이내 꺼버렸지만 전하의 마음은 필시 놀랐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때에 꺼버려서 퍼지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남관왕묘(南關王廟)에 화재가 일어난 것은 매우 놀랍고 두려운 일입니다. 소상(塑像)을 제때에 옮겨 모신 것은 불행 중 다행입니다. 실화(失火)의 근원을 법부(法部)에서 엄격히 조사하여 정죄(定罪)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300년 이래에 어찌 이와 같은 변고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열성조(列聖朝)들의 어필(御筆)도 타 버렸으니 매우 놀랍고 두려운 일이다. 모시고 선 장수들의 소상(塑像)을 미처 이출(移出)하지 못한 것은 형편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매우 놀라운 일이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선대 임금들의 친필 문적이 불에 타 버린 것은 특히 놀랍고 두려운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면 소상을 상세하게 봉심하고 만약 흠이 난 곳이 있으면 진흙을 이겨서 손질하고 배장(陪將)하는 소상은 구해내지 못하였으니 전부 북쪽 사당에 있는 것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 것이다. 재건하는 공사는 한시가 급한 만큼 장례원(掌禮院)에서 길일(吉日)을 받아 택입(擇入)하게 하며 역시 영선사(營繕司)에서 전적으로 주관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02014_003
Rec-0222 고종실록_39권_1899_0214_04 18990214 詔曰: "南關王廟失火云, 遣軍部大臣閔丙奭, 馳詣移安所, 奉審以來。" 又詔曰: "秘書院丞申泰休, 馳詣南關王廟, 奉審摘奸以來。"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남관왕묘(南關王廟)에 화재가 일어났다고 하는데 군부 대신(軍部大臣) 민병석(閔丙奭)을 파견하여 이안(移安)한 곳에 달려가서 봉심하고 적간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비서원 승(祕書院丞) 신태휴(申泰休)는 급히 남관왕묘에 달려가서 봉심하여 적간해 오라."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02014_004
Rec-0223 고종실록_39권_1899_0306_01 18990306 宮內府奏: "昨日東關王廟奉審摘奸時, 齋郞副尉李圭甲, 擧措駭妄, 揆以事體, 所當重勘, 而自臣府有難擅便, 何以爲之乎?" 制曰: "爲先免本官, 令法部照律懲辦。" 궁내부(宮內府)에서 아뢰기를, "어제 동관왕묘(東關王廟)를 봉심하고 적간할 때 제랑(齋郞)이며 부위(副尉) 이규갑(李圭甲)이 한 짓은 해괴 망칙하여 사체로 헤아려 볼 때 엄중히 처리해야 하겠으나 신의 부에서는 마음대로 처리하기 곤란합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우선 본 벼슬에서 파면시키고 법부(法部)에서는 법조문에 따라 처벌하게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03006_001
Rec-0224 고종실록_39권_1899_0314_01 18990314 議政府因度支部請議, 南關王廟重建費二萬元及外國人解雇費二萬五千二百元, 竝豫備金中支出事, 經議上奏。" 制曰: "可。" 탁지부(度支部)에서 남관왕묘(南關王廟)를 중건하는 비용 2만 원(元)과 외국인 해고비(解雇費) 2만 5,200원을 모두 예비금 가운데서 지출할 것을 청의(請議)한 일로 인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의논을 거쳐 상주(上奏)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03014_001
Rec-0225 고종실록_39권_1899_0408_03 18990408 議政府因度支部請議, "洪陵石儀重修費不足額五萬元, 南關王廟碑石造成費一萬元, 豫備金中支出事, 經議上奏。 制曰: "可。" 탁지부(度支部)에서 홍릉 석의 중수비(洪陵石儀重修費)의 부족액(不足額) 5만 원(元)과, 남관왕묘 비석 조성비(南關王廟碑石造成費) 1만 원을 예비금(豫備金) 중에서 지출(支出)할 것을 청의(請議)한 일로 인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의논을 거쳐 상주(上奏)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04008_003
Rec-0226 고종실록_39권_1899_0411_01 18990411 詔曰: "關廟方重建, 而松京建廟, 亦有年所, 香祝封送之節, 依星州、安東、關西例爲之, 令該地方官行祭。"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관왕묘(關王廟)를 지금 중건(重建) 중인데 송경(松京)에 관왕묘를 세운 것은 여러 해가 되었으니, 향축(香祝)을 봉하여 보내는 절차는 성주(星州)·안동(安東)·관서(關西)의 규례대로 하고 해당 지방관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04011_001
Rec-0227 고종실록_39권_1899_0512_03 18990512 議政府因度支部請議, 南關王廟重建費增額一萬九千三百五十一元及漢城五署內僵尸收埋費一百一元、仁川港內僵尸收埋費十二元、各地方燒死人渰死人。 恤金三十七元, 竝預備金中支出事, 經議上奏。 制曰: "可。" 탁지부(度支部)에서 남관왕묘 중건비 증액(南關王廟重建費增額) 1만 9,351원(元) 및 한성부(漢城府) 5서(署) 내의 강시 수매비(僵尸收埋費) 101원, 인천항(仁川港) 내의 강시 수매비 12원, 각 지방에서 화재를 당해 죽은 사람과 물에 빠져 죽은 사람에 대한 휼금(恤金) 37원을 모두 예비금(豫備金) 가운데서 지출할 것을 청의(請議)한 일로 인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의논을 거쳐 상주(上奏)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05012_003
Rec-0228 고종실록_39권_1899_0525_01 18990525 詔曰: "南關王廟廟宇告成, 塑像今將還安矣。 陰曆四月十九日奠酌禮, 遣大臣攝行, 東北兩廟奠酌禮, 遣將臣一體攝行。 祭文當親撰以下矣。"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남관왕묘(南關王廟)의 묘우(廟宇)가 완공되어 소상(塑像)을 이제 환안(還安)할 것이다. 음력 4월 19일의 전작례(奠酌禮)는 대신을 보내어 섭행(攝行)하고,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북관왕묘(北關王廟)의 전작례는 장신(將臣)을 보내어 모두 섭행하라. 제문(祭文)은 직접 지어서 내려 보내겠다."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05025_001
Rec-0229 고종실록_39권_1899_0528_02 18990528 召見特進官尹容善, 南關王廟奉審及還安後入來也。 특진관(特進官) 윤용선(尹容善)을 소견(召見)하였다. 남관왕묘(南關王廟)를 봉심(奉審)하고 소상(塑像)을 환안(還安)한 후 들어왔기 때문이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05028_002
Rec-0230 고종실록_39권_1899_0528_03 18990528 南關王廟重建時監董堂郞及還安時各差備、奠酌禮時獻官以下, 施賞有差。 秘書院卿閔泳柱、侍講院詹事李載現、軍部大臣署理協辦朱錫冕、參領具永祖、正尉李悳淳·李恒魯、副尉韓性鎭, 竝加資。 남관왕묘(南關王廟)를 중건할 때 감동(監董)한 당상(堂上)과 낭청(郎廳) 및 환안(還安)할 때의 각 차비관(差備官)들과 전작례(奠酌禮)를 거행할 때의 헌관(獻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비서원 경(祕書院卿) 민영주(閔泳柱),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 이재현(李載現), 군부 대신서리 협판(軍部大臣署理協辦) 주석면(朱錫冕), 참령(參領) 구영조(具永祖), 정위(正尉) 이덕순(李悳淳)과 이항로(李恒魯), 부위(副尉) 한성진(韓性鎭)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05028_003
Rec-0231 고종실록_39권_1899_1018_02 18991018 上曰: "隆陵、綏慶園碑閣修理, 碑石工役, 固當速竣, 而日氣漸寒, 磨刻之節, 似難盡善, 待明春爲之似好。 須詳考前例後, 以爲微稟擧行可也。 且南關王廟, 亦當有碑石之役, 而有肅宗、英祖、莊宗 正宗御筆矣, 所重自別。 而此亦當寒磨刻, 亦難盡善, 亦爲考例, 退行於明春, 似合事宜矣。" 상이 이르기를, "융릉(隆陵), 수경원(綏慶園)의 비각(碑閣)을 수리하고 비석(碑石)을 세우는 공사를 참으로 빨리 끝내야 되겠지만 날씨가 점점 차져서 다듬고 새기는 일을 완전하게 하기는 어려울 듯하니 내년 봄이 되거든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반드시 전례(前例)를 자세히 상고한 후 미품(微稟)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또 남관왕묘(南關王廟) 역시 비석에 관한 공사가 있어야 하겠는데, 숙종(肅宗)·영조(英祖)·장종(莊宗)·정종(正宗)의 어필(御筆)이 있으므로 특별히 소중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추운 때에 다듬고 새기는 것을 완전하게 하기는 어려우니 전례를 상고하여 내년 봄으로 물려 시행하는 것이 사리에 맞을 듯하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10018_002
Rec-0232 고종실록_39권_1899_1216_01 18991216 詔曰: "向聞奉審宰臣所奏, 則全州 關廟奉安, 已有年所云。 香祝封送之節, 依南原、康津例爲之, 令本道行祭。"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지난번에 봉심(奉審)한 재상의 보고를 듣건대, ‘전주(全州)에 관왕묘(關王廟)를 둔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됩니다.’라고 하였다. 향(香)과 축문(祝文)을 봉해서 보내는 절차는 남원(南原)과 강진(康津)의 규례대로 하고, 본 도에 제사를 지내게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12016_001
Rec-0233 고종실록_40권_1900_0630_02 19000630 議政府因度支部請議, 圜丘壇配天時祭俎床等費一百七十一元零、幸行時各項需用費六千七百七十一元零、興宣大院君祠宇新建費二萬九千三百七十元、南關王廟碑石換移治鍊費一千二百三十六元零、議政府移建及物品購買費二萬六千元, 豫備金中支出事, 經議上奏。 制曰: "可。" 탁지부(度支部)에서 원구단(圜丘壇) 천제(天祭)와 시제(時祭)의 제기(祭器) 등 비용 171원(元) 남짓, 행행(幸行)할 때 각 항목에 드는 비용 6,771원 남짓,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사당을 새로 짓는 비용 2만 9,370원, 남관왕묘(南關王廟)의 비석을 바꾸어 세우고 다듬는 비용 1,236원 남짓, 의정부를 옮겨 짓고 물품을 사는 비용 2만 6,000원을 예비금 중에서 지출해 줄 것을 청의(請議)한 일로 인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의논을 거쳐 상주(上奏)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706030_002
Rec-0234 고종실록_41권_1901_0825_01 19010825 詔曰: "法殿營建之尙此未遑, 實由國計, 而其在事體, 亦不可因循。 設都監卽爲擧行, 都監堂郞, 命宮內府差出。" 又詔曰: "關廟之崇奉敬祀, 今焉三百有餘年, 精忠節義之靈, 澟澟然亘千秋而不泯, 中正剛大之氣, 浩浩乎包六合而往來, 陰騭朕邦, 屢顯神威, 景仰欽慕之誠, 宜其靡不用極。 況有歷代已行之禮? 尊帝崇號之諸般儀節, 令掌禮院博考擇日擧行。" 조령을 내리기를, "법전(法殿)을 아직도 짓지 못한 것은 사실 나라의 재정 때문이지만, 일의 체모로 보아 역시 그대로 둘 수 없는 문제이다.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즉시 시행하되, 도감의 당상(堂上)과 낭청(郎廳)은 궁내부(宮內府)에서 차출하게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관왕묘(關王廟)를 높이 모시고 공경스럽게 제사지낸 지가 지금 300여 년이 되었다. 순수하고 충성스러우며 지조 있고 의로운 영혼은 천년토록 늠름하여 없어지지 않고, 중정(中正)하며 굳세고 큰 기백은 천하에 차고 넘쳐 오가면서 말없이 짐의 나라를 도와 여러 번 신령스러운 위엄을 드러냈으니, 경모하고 우러르는 성의를 한껏 표시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역대로 행해온 예법(禮法)이 있음에랴. 황제로 칭호를 높이는 제반 의식 절차를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고 택일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808025_001
Rec-0235 고종실록_42권_1902_0820_03 19020820 議政府。 因度支部請議, "影幀摹寫都監、眞殿重建都監需用費, 二十八萬八千六百九十六元; 上號都監需用費, 一萬五千一百八十四元; 關帝廟尊崇需用費, 五千二百七十七元; 慶運宮役費增額, 七萬三十三元; 法殿營建費增額, 二十萬元; 光武五年度內進宴費增額, 五萬二千三百五十三元; 稱慶禮式時各項費, 一百萬元; 義親王自日本往米國時旅費, 三千元; 各道各府郡雩祀費, 八千八百四十元; 各道按廉使旅費, 四千六百四十四元; 警務廳經費增額, 一萬五千七百九十七元; 吉州監理署建築費, 八千三百九十六元; 平壤監理署修理及物品費, 五百十七元; 昌原監理署物品費, 五百二十三元; 我國漂民自淸國救還恤金, 一百七十元; 駐紮法、比公使以下赴任旅費, 五千六百三十元; 駐淸公館印章及國旗費與赴英大使國旗費, 一百四元; 日本商船日出丸侵損償金, 三千元; 國庫金搬運費增額, 十萬元; 各軍隊旗章新造費, 一千二百七十三元; 侍衛騎兵隊營舍修理費及月尾島砲臺建築費, 六千五百十元; 軍事費增額, 二十萬五千八百九十七元; 鎭衛徵上隊營舍新建費及各項費, 十萬一千八十二元; 平壤徵上隊兩次還下送時賞金, 四千八百元; 關西司令官巡邊旅費, 四百六十九元; 地契衙門經費增額, 一萬三千二百二十四元; 表勳院製章費增額, 一萬三千五百五十七元; 中樞院移接後修理費, 二千元, 豫備金中支出豫備金一百萬元, 添算排用事’, 經議上奏。 制曰: "可。" 의정부(議政府)에서 탁지부(度支部)의 청의(請議)한 것으로 인하여 영정모사도감(影幀摹寫都監)과 진전중건도감(眞殿重建都監)의 비용으로 28만 8,696원, 상호도감(上號都監)의 비용으로 1만 5,184원, 관왕묘(關王廟)를 높이는 비용으로 5,277원, 경운궁(慶運宮) 공사비 증가액으로 7만 33원, 법전(法殿) 건축비 증가액으로 20만원, 광무(光武) 5년 내진연(內進宴) 연회비 증가액으로 5만 2,353원, 경축 행사 때의 각종 비용으로 100만 원, 의친왕(義親王)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갈 때의 여비로 3,000원, 각도와 각부(各府)와 군(郡)의 우제사(雩祭祀) 비용으로 8,840원, 각도 안렴사(按廉使)의 여비로 4,644원, 경무청(警務廳)의 경영비 증가액으로 1만 5,797원, 길주 감리서(吉州監理署) 건축비로 8,396원, 평양 감리서(平壤監理署)의 수리와 물품 비용으로 517원, 창원 감리서(昌原監理署)의 물품 비용으로 523원, 우리나라 표류민이 청(淸) 나라에서 구원받아 돌어올 때의 구제 비용으로 170원, 프랑스와 벨기에에 주재하는 공사(公使) 이하의 부임 여비로 5,630원, 청나라주재 공사관의 인장(印章)과 국기(國旗) 비용 및 영국에 가는 대사(大使)의 국기 비용으로 104원, 일본 상선 히데마루 〔日出丸〕호를 손상시킨 배상금으로 3,000원, 국고금(國庫金) 운반비 증가액으로 10만 원, 각 군대의 깃발을 새로 만드는 비용으로 1,273원, 시위 기병대(侍衛騎兵隊) 병영 수리비와 월미도(月尾島) 포대(砲臺) 건축비로 6,510원, 군사비 증가액으로 20만 5,897원, 불러 올린 진위대(鎭衛隊)의 병영 신축비와 각종 비용으로 10만 1,082원, 불러 올렸던 평양 진위대(平壤鎭衛隊)를 두 차례 도로 하송(下送)할 때의 상금으로 4,800원, 관서 사령관(關西司令官)의 변경 시찰 여비로 469원, 지계아문(地契衙門) 경영비 증가액으로 1만 3,224원, 표훈원(表勳院)의 훈장 제조비 증가액으로 1만 3,557원, 중추원(中樞院)을 옮긴 후 수리비로 2,000원을 예비금 중에서 지출하며 예비금을 1백만 원을 더 첨가하여 계산해서 배용(排用)할 것에 대한 문제를 의논을 거쳐 상주(上奏)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908020_003
Rec-0236 고종실록_44권_1904_0427_01 19040427 召見奉審大臣以下。 【宮內府特進官李根命、掌禮院卿李根秀、秘書院卿李容稙】 崇義廟奉審後復命也。 上曰: "廟宇比諸南關王廟何如也?" 根命曰: "其弘敞, 不下於南廟矣。" 上曰: "三人結誼, 千載大義, 朕所欽慕, 故創建此廟也。" 根命曰: "瞻審畫本, 英烈之氣, 澟然如生矣。" 上曰: "淸國則塑像, 而今番以畫像摹來矣。 塑像、畫像, 皆昉於何代也?" 根命曰: "雖未詳知, 文廟亦是塑像, 而明之宰臣桂萼奏, 撤其塑像, 仍造位版。 而畫像則見於經傳者, 有殷 傅說惟肖之像矣。" 숭의묘(崇義廟)를 봉심(奉審)한 대신(大臣)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이근명(李根命),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수(李根秀), 비서원 경(祕書院卿) 이용직(李容稙)이다.】 숭의묘(崇義廟)를 봉심한 뒤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사당 건물이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비해 어떻던가?" 하니, 이근명(李根命)이 아뢰기를, "넓게 트인 것이 남관왕묘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 사람의 결의가 천 년 변치 않을 큰 의리여서 짐(朕)이 흠모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당을 새로 세웠다." 하니, 이근명이 아뢰기를, "화본(畵本)을 보았는데 영웅호걸의 기품이 늠름한 것이 살아있는 듯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淸) 나라에서는 상(象)을 만들어 금번에 화상(畵像)을 보내왔다. 소상(塑像)이나 화상이 모두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가?" 하니, 이근명이 아뢰기를,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문묘(文廟)에도 소상을 모셨었는데, 명(明) 나라 재상 계악(桂萼)이 주달(奏達)하여 소상을 없애고 신위를 만들었습니다. 화상은 경전(經傳)에 은(殷) 나라 부열(傅說)이 똑같은 모습이었다고 씌어 있습니다." 하였다.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4104027_001

Record_(2): 승정원일기

Record_(3): 문집

gwms:id dcterms:title gwms:recordDate gwms:originalText gwms:translatedText gwms:source gwms:infoUrl
Rec-2139 갑진만록_관왕묘 null 中朝人尊敬關王 關羽。國家建廟之外。家家戶戶。無不設像。起居飮食必祭。至於出兵馬。尤致敬焉。戊戌春夏間。天兵大至。就南大門外都祭庫峴。立關王廟。大小將官。無不禮焉。至請 聖上行禮。己亥臨罷師還。稱爲奉聖旨。建廟於東大門外。留一官員董役。中原雖曰給價。其數無幾。功役浩大。皆出我國財力。動以萬計。事完。國家置官守之。都祭庫則塑像。東大門外則銅像。關王雖是忠勇之將。而身死人手。非功存後世之人。而中原尊敬如此。未知其然。或云高皇帝時。出神兵以助云。然未可知也。 중국 사람들은 관왕(關王 관우(關羽))을 존경하여 국가에서 사당을 세우는 외에 집집마다 화상을 그려 놓고 생활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에는 반드시 제사를 올리고, 특히 전쟁에 출동할 적에는 더욱 정성을 드린다. 무술년 봄과 여름 사이에 명 나라 군사가 많이 왔을 때, 남대문 밖 도제고현(都祭庫峴)에 관왕묘(關王廟)를 세웠는데, 대소의 장수들이 예를 드리지 않는 이가 없었고, 심지어는 성상께 예를 드리도록 청하기까지 하였다. 기해년 전쟁이 끝나 군사가 돌아갈 적에, 성지(聖旨 중국 천자의 분부)를 받들었다 하고, 동대문 밖에 사당을 세우는데 관원 한 사람을 두어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그 비용을 비록 중국에서 지급한다고 하지만, 그 액수는 얼마 되지 않았고, 공사가 커서 모두 우리 나라에서 재력(財力)을 동원하게 되니, 그 수는 만 냥도 넘었다. 공사가 끝난 다음에는 국가에서 관리를 두어 지키도록 하였다. 도제고에는 소상(塑像)을 세웠고, 동대문 밖에는 동상(銅像)을 세웠다. 관왕이 비록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장수라고는 하나, 남의 손에 죽음을 당한 사람이고, 공이 후세에 끼쳐진 사람도 아닌데, 중국에서 이처럼 존경하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의 말에는,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을 가리킴) 때에 신병(神兵)을 내어 도왔다.’ 하나, 알 수 없다. 갑진만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46A_0010_000_0010_2002_014_XML
Rec-2140 경세유표_7권_지관수제_전제_8 null 臣謹案。竹田,楮田。當與蘆田。松田。竝爲別籍。不當混入於田籍。大抵郡縣大槪狀規式。原有未善。今取康津縣大槪狀。評議如左。 大槪狀曰。官竹田幾結。兵營竹田幾結。右水營箭竹田幾結。加里鎭箭竹田幾結。〇臣謹案。此類。宜別爲一籍。雖至千年。不可以種五穀者。載a285_136a於田籍。虛張文簿曰幾結。幾結去麤去雜。其實無多。徒使覽者。眩於省察。非制也。 大槪狀曰。官垈田幾結。鄕校垈田幾結。社稷垈田幾結。海倉垈田幾結。書院垈田幾結。廟堂垈田幾結。卽古今島關王廟。 寺垈田幾結。石梯院垈田幾結。垣浦烽臺垈田幾結。〇兵營垈田幾結。將臺垈田幾結。氷庫垈田幾結。古海倉垈田幾結。〇馬島鎭垈田幾結。加里鎭垈田幾結。古今鎭垈田幾結。薪智鎭垈田幾結。〇臣謹案。凡此垈田。皆公署之垈田也。公署垈田。異於村家。非有徙邑罷鎭革除之令。不可爲田。年年列書幾結幾結。虛張元總。乃去麤皮。曷若別爲一冊。式年一報。以存其大體也。惟所謂古海倉垈田。今種五穀。若是者。宜入田籍也。 생각건대, 죽전ㆍ저전은 갈밭[蘆田]ㆍ송전(松田)과 별도의 장적으로 함이 마땅하며, 전적에 섞여들어감은 부당하다. 대저 군ㆍ현에서 보고하는 대개장 규식(規式)이 원래 좋지 못함이 있다. 이제 강진현(康津縣)의 대개 장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평론한다. 대개장에, "관죽전 몇 결, 병영 죽전 몇 결, 우수영(右水營) 전죽전(箭竹田) 몇 결, 가리진(加里鎭) 전죽전 몇 결이다." 하였다. 생각건대, 이런 따위는 별도로 한 장적을 만드는 것이 마땅하다. 비록 천 년이 되더라도 오곡(五穀)을 심지 못하는 것을 전적에다 기재하여, 헛 문서로 ‘몇 결, 몇 결’이라고 벌여 적는다. 거친 것을 없애고 잡동사니를 버리면 실상 남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아서 한갓 열람자의 살핌을 헛갈리게 하니 좋은 제도가 아니다. 대개장에, "관대전(官垈田) 몇 결, 향교대전(鄕校垈田) 몇 결, 사직대전(社稷垈田) 몇 결, 해창대전(海倉垈田) 몇 결, 서원대전(書院垈田) 몇 결, 묘당대전(廟堂垈田) 몇 결(즉 古今島에 있는 關王廟이다), 사대전(寺垈田) 몇 결, 석제원대전(石梯院垈田) 몇 결, 원포봉대대전(垣浦烽臺垈田) 몇 결이다. 병영대전(兵營垈田) 몇 결, 장대대전(將臺垈田) 몇 결, 빙고대전(氷庫垈田) 몇 결, 고해창대전(古海創垈田) 몇 결이다. 마도진대전(馬島鎭垈田) 몇 결, 가리진대전(加里鎭垈田) 몇 결, 고금진대전(古今鎭垈田) 몇 결, 신지진대전(薪智鎭垈田) 몇 결.”이라고 했다. 생각건대, 이런 대전(垈田)은 모두 공서(公署)의 대전이고, 공서의 대전은 촌가와 달라서 고을을 옮기거나 진(鎭)을 혁파하는 영(令)이 있지 않으면 전지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 해마다 몇 결 몇 결씩 헛 문서로 원총(元總)을 벌여 기재한다. 이에 거친 껍질을 버리고 별도로 한 책을 만든 다음, 식년(式年)에 한번씩 보고하여 그 대체를 보존함만 하겠는가? 오직 고해창대전(古海創垈田)만은 지금 오곡을 심고 있으니 이같은 것은 전적에 넣음이 마땅하다. 경세유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87A_0100_010_0020_2002_002_XML
Rec-2141 계곡집_16권_좌의정월사이공행장 null 關王廟成。天將請上同往奠。駕已辦。始命撰祭文。有司請召知製敎。上以命公。立就以進。上大悅命賜錦。 관왕묘(關王廟)가 낙성되자 중국 장수가 상에게 제사를 올리러 함께 가자고 청하였다. 그런데 대가(大駕)의 출발 준비가 다 된 시점에 와서야 비로소 제문(祭文)을 지어 올리도록 명하였다. 이에 유사(有司)가 지제교(知製敎)를 불러올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공에게 그 일을 명하였는데, 공이 그 자리에서 바로 지어 올리자 상이 크게 기뻐하면서 비단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계곡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33A_0170_010_0010_2004_002_XML
Rec-2142 계산기정_2권_도만_중후소 18031216 明時關防也。後改築方城。南有歌薰門。西有說澤門。城外有關帝庙。庙貌畧如我國東南庙。庭豎康煕,乾隆二碑。殿後安大昌像。殿東設小龕。而塑金佛百數。此庙素稱靈異。譯胥輩多有瓣香抽籤者。余適登西門樓。有一人踵來欣款曰。朴貞蕤復來否。 명나라 때의 관방(關防)인데 후에 네모난 성으로 개축했다. 남쪽에는 가훈문(歌薰門), 서쪽에는 열택문(說澤門)이 있다. 성 밖에 관제묘(關帝廟)가 있는데 그 규모는 우리나라의 동관왕묘, 남관왕묘와 같다. 뜰에는 강희ㆍ건륭의 두 비석이 있다. 전각 뒤에 대창(大昌)의 상이 안치되어 있고 동쪽에는 작은 감실을 마련하여 금부처 100여 개의 소상이 놓여 있다. 이 관제묘는 본래부터 영이(靈異)하다고 한다. 그래서 역관의 무리들 중에는 판향(瓣香)을 피우고 제비를 뽑는 자가 많았다. 나는 마침 서쪽 문루에 올랐는데 누가 다가와 기꺼이 말하기를, ‘박정유(朴貞蕤 박제가(朴齊家))는 또 오지 않았소?’ 한다. 계산기정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5A_0020_010_0130_2004_008_XML
Rec-2143 국조보감_49권_숙종조9_1691_02_01 16910200 null 상이 정릉(貞陵)에 가서 전알(展謁)한 뒤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돌아올 때에 사하리(沙河里)에 이르러 단에 올라가 무예를 사열하였다. 이어서 태복마(太僕馬) 3필을 끌어오도록 명하여 세 대장에게 나누어 하사하였다. 상이 송 태조(宋太祖)가 무성왕(武成王)의 사당에 들러 참배한 고사를 인용하여 장차 돌아가는 길에 무안왕(武安王)의 사당에 들러 유상(遺像)을 볼 계획으로 대신들에게 절목(節目)을 정하게 하였다. 좌의정 목내선(睦來善)이 아뢰기를, “마땅히 주 무왕(周武王)이 상용(商容)의 여문(閭門)에 허리를 굽혀 절한 사실을 본떠서 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우의정 민암(閔黯)이 아뢰기를, “절을 해서도 안 되고 허리를 굽혀 절을 해서도 안 됩니다. 마땅히 손을 들어 읍을 해야 됩니다.” 하자, 상이 민암의 의견을 따랐다. 삼사가 청대하여 국조에 전례가 없다고 하여 지나다가 들르는 일을 중지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안왕의 만고에 빛나는 충의(忠義)는 평소에 감탄하고 있었다. 이미 그 사당의 문앞을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감흥이 있었는데, 들어가 유상을 보는 것이 무슨 해가 있겠는가.” 하고, 따르지 않았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500_010_0010_2000_005_XML
Rec-2144 국조보감_49권_숙종조9_1691_02_02 16910200 null 상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아, 무안왕의 충의는 실로 천고에 드문 바이다. 내가 일찍이 관왕도(關王圖)에 절구 한 수를 - 시는 아래에 보임 - 써서 항상 감탄하고 흠모하는 뜻을 표하였고, 매번 동쪽으로 능에 거둥하는 길에 한번 들어가 엄숙한 유상을 바라보고자 했다. 지금 지나치면서 들른 것은 실로 시공을 초월하여 서로 감동한 뜻에서 나왔고 또 무사들을 격려하려는 것이었지, 본래 한때의 관람을 유쾌하게 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아, 여러 장수들은 나의 이런 뜻을 본받아서 더욱 충의에 분발하여 왕실을 보위하도록 하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바라는 바이다. 또 동쪽과 남쪽의 관왕묘 건물의 파손된 부분은 해조로 하여금 속히 날짜를 잡아 착실하게 보수하게 하고,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되 제문 속에 내가 멀리서 추모하고 매우 감탄한다는 뜻을 다 표현하라.” 하였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500_010_0010_2000_005_XML
Rec-2145 국조보감_49권_숙종조9_1691_03 16910300 null 3월. 상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어제 무안왕(武安王)의 유상(遺像)을 보았는데, 아름다운 수염이 잘린 흔적이 분명하게 있었으니 일이 매우 미안하다. 이런 부분을 새로 보수하라. 이어서 생각건대, 조종조에서 사당을 세워 숭봉(崇奉)한 것은 실로 충절을 크게 추앙하는 성대한 뜻에서 나왔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잡인들의 출입을 금하지 않아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였고 그 밖의 손상된 곳도 많으니, 엄숙하고 깨끗해야 할 묘우(廟宇)가 행인들이 장난치는 장소가 되었다. 만약 특별한 방법으로 금단(禁斷)하지 않는다면 오늘 고치고 나면 내일 다시 파손할 터이니 이는 절대로 경건하게 하는 본의가 아니다. 앞으로 또다시 이런 문제가 발생하여 적간(摘奸)할 때에 적발된다면 당해 수직관을 엄중하게 처벌한다는 뜻을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라.” 하였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500_010_0010_2000_005_XML
Rec-2146 국조보감_49권_숙종조9_1692_09 16920900 null 9월. 상이 시 2수를 지어 직접 써서 판목에 새겨서 내리고, 이르기를, “그 중 한 편은 관왕(關王)의 그림에 쓴 것이고, 한 편은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렀다가 느낀 바가 있어서 지은 것이다. 이것을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 나누어 걸어 경모(敬慕)하는 뜻을 표하라.” 하였다. 그 시에, 내 평소 수정공을 사모하니 / 生平我愛壽亭公 절의와 정충이 만고에 우뚝하네 / 節義精忠萬古崇 광복에 노심 초사하다 몸이 먼저 떠났기에 / 志勞匡復身先逝 천년을 두고 열사들 가슴에 눈물 고이네 / 烈士千秋涕滿胸 동쪽 교외 일이 있어 옛 사당을 지나치게 되어 / 有事東郊歷古廟 들어가 유상 보니 정신이 숙연해지네 / 入瞻遺像肅然淸 오늘에 공경하는 마음 더욱 절실한데 / 今辰致敬思逾切 부디 우리나라 만세토록 편안하게 하소서/ 願佑吾東萬世寧 하였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500_010_0020_2000_005_XML
Rec-2147 국조보감_54권_숙종조14_1710_03 17100300 null 3월. 대신에 청대(請對)하였을 때에, 상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전년에 동관왕묘(東關王廟)에 거둥하여 창졸간에 예법을 따지지 못하여 절을 하지 않고 읍(揖)을 하였고, 그 뒤에 남관왕묘(南關王廟)에서도 읍례(揖禮)를 행하였다. 이것이 비록 다 이루어진 일이지만 훗날 반드시 관례가 될 터인데, 읍을 한 것이 과연 실례됨이 없었는가?” 하니, 대신이 대답하기를, “제왕의 묘에 대해서 고사(故事)에 의거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선묘조에 명 나라의 장수가 나왔을 때에 관왕묘에 친히 제사를 지냈는데, 결코 읍례를 행하지 않았다.” 하였다. 좌의정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그때에는 명 나라 장수와 함께 가서 제사를 설행하였기 때문에 혹 배례(拜禮)를 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 꼭 길이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관왕(關王)의 충성과 용맹은 역사에 드문 것이기는 하나, 옛날의 명장으로서 선성(先聖)ㆍ선사(先師)와는 차이가 있으니, 배례를 행하는 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읍례를 행하는 외에 다른 예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안왕(武安王)이라 호칭하고, 향실(香室)의 축문에서도 ‘감히 무안왕께 밝게 고합니다.’ 하였다.” 하자, 대신이 또 대답하기를, “왕의 작호(爵號)는 추봉한 것이고 본래의 작호는 후(侯)입니다. 따라서 그가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대등한 예로 접대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옛날 사실을 널리 상고하여 예절을 알맞게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뒤에 홍문관이 아뢰기를, “《회전(會典)》 군사조(群祀條)에 ‘홍무(洪武) 6년에 비로소 서울에 제왕(帝王)의 사당을 설치하고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 이상의 제왕과 한(漢)ㆍ당(唐)ㆍ송(宋)을 개국한 임금을 제사지내게 하였다. 뒤에 주 문왕(周文王)은 은 나라를 섬겼다고 하여 신주를 설치하지 않고 단지 능묘(陵廟)에 제사지내는 데에 그치다가, 홍무 7년에 이르러 제왕묘에 친히 제사 지냈다.’ 하였고, 의주(儀註)에는 쓰지 않았습니다. 가정(嘉靖) 11년에 정한 친제의(親祭儀)에는 두 번 절하는 예가 있는데, 이 한 토막이 어느 정도 오늘날의 일에서 참조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문왕을 능묘에 제사지내는 것에 그치고 친히 임하여 절하고 제사지냈다는 글이 없는 것은 대개 추존하였기 때문입니다. 돌아보건대, 이 관왕의 왕작(王爵)도 또한 추봉에서 나온 것이니, 명 나라의 예로 유추하면 상께서 친히 임하여 절을 하는 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또 《오례의(五禮儀)》 빈례(賓禮) 연조정사조(宴朝廷使條)를 상고하니 ‘전하가 사자(使者)에게 읍(揖)을 하면 사자가 읍례(揖禮)로 답한다 ……’ 하였습니다. 설령 관왕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왔다고 하더라도 손님과 주인의 예로 접대하여, 읍례를 하고 배례를 하지 않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으로써 말하면 성상께서 읍을 한 것은 실로 예법에 적중한 것입니다. 관왕묘를 창설할 때의 예절이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 장수와 함께 가서 제사를 지내는 과정에 간혹 우악한 예를 표하여 매우 신중하게 대처한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한때의 임기 응변에서 나온 것일 뿐이니, 그것을 인용하여 법식으로 삼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명하기를, “훗날 《실록》을 포쇄(曝曬)할 때에 선묘(宣廟)의 친제의(親祭儀)를 상고해 내어오라.” 하였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550_010_0050_2000_005_XML
Rec-2148 국조보감_54권_숙종조14_1711_06 17110600 null 상이, 지난해에 관왕묘(關王廟)에 거둥하였다가 배례(拜禮)와 읍례(揖禮) 중에서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를 미처 상고하지 못하여 읍례를 행하기만 한 것을 가지고 《실록(實錄)》을 포쇄(曝曬)할 때에 선묘조(宣廟朝)의 구례(舊禮)를 상고해 내라고 하였는데, 사관이 서계하기를, “선묘께서는 두 번 절하는 예를 행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앞으로는 이에 의거하여 배례를 행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550_010_0060_2000_005_XML
Rec-2149 국조보감_63권_영조조7_1746_07 17460700 null 상이 ‘현영소덕왕묘(顯靈昭德王廟)’ 여섯 글자를 친히 썼는데,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액자를 만들어 걸도록 명하였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640_010_0050_2000_006_XML
Rec-2150 국조보감_70권_정조조2_1781_01 17810100 null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렀다. 이어 장신(將臣)을 보내어 동관왕묘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제사를 올렸다. 또 삼국(三局)의 대장은 겸당상(兼堂上)의 규례에 따라 모든 일을 관할하여 검속할 것을 명하였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710_010_0030_2000_007_XML
Rec-2151 국조보감_71권_정조조3_1785_12 17851200 null 12월. 사조어제어필비(四朝御製御筆碑)를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세웠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720_010_0030_2000_007_XML
Rec-2152 국조보감_72권_정조조4_1786_02 17860200 null 2월. 이에 앞서 상이 직접 관왕묘(關王廟)의 비명(碑銘)을 지어 묘정(廟廷)에 세웠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비명을 분장(分章)하여 악가(樂歌)로 만들도록 명하고, 음악은 3장(章)을 쓰도록 하였다. 관왕묘에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이때에 시작되었다. -영신(迎神)에는 왕재장(王在章)을 연주하고, 전폐(奠幣)와 초헌ㆍ아헌ㆍ종헌에는 힐향장(肹蠁章)을 연주하고, 송신(送神)에는 석가장(錫嘏章)을 연주한다. 악공(樂工)은 개주(介冑)를 착용하고, 오방(五方)의 기치를 세운다. 악기는 중고(中鼓)가 하나, 장고(杖鼓)가 둘, 필률(觱篥)이 둘, 대금(大笒)이 둘, 태평소(太平簫)가 둘, 대금(大金)이 하나, 소금(小金)이 하나, 가(歌)가 둘, 해금(奚琴)이 둘이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730_010_0010_2000_007_XML
Rec-2153 국조보감_80권_순조조5_1832_03 18320300 null 3월.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묘우(廟宇)를 세운 구갑(舊甲)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동묘(東廟)에는 장신(將臣)을 보내어 섭행(攝行)하게 하고, 남원(南原) 강진(康津)의 무안왕묘(武安王廟)에는 병사와 수사를 나누어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810_010_0110_2000_008_XML
Rec-2154 국조보감_88권_철종조2_1855_02 18550200 null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친히 잔을 올리고, 승지를 보내어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사당을 간심(看審)하게 하였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890_010_0030_2000_008_XML
Rec-2155 금계일기_1599_0422 15990422 晴。城東南兩門外。有一高峯。名曰平遠臺。遊冶公子騷人墨客。皆會此臺云。我與衙客二人。率奇孝淳等三人。買二人轎。登臨臺上。則三層蘭若。道僧數三。坐于榻上。見我等。下榻相揖。寺邊又有城隍堂。崢嶸翼翼。有同關王庙。而道士稱號者五六。戴華文冠。穿錦繡衣者。居其中。庙邊戚繼光生祀堂。陰陰高峙。而玉碑數丈。又立堂前。而碑額特書八字曰。戚將軍平倭大捷碑。碑陰誦功總武烈文五十餘行。如昨分明矣。俯視城池。周回倍於我國漢陽。而濠池則鑿注湖水。因成湖水。而城中鑿引湖水▣▣▣▣賈舶出入絡繹。市上繁華。處處花錦。南門外別開關王庙。庙前又開大將臺。臺下廣開敎場。周回四方。各五百餘步▣▣列置八大營部至句連。正正堂堂。戰馬數百餘匹。嘶雲▣風。一行▣場畒四邊黑角牛數百。成群齕草。 맑음. 동ㆍ남 두 성문 밖에 높은 봉우리 하나가 있어 이름을 평원대(平遠臺)라 하는데, 주색을 좋아하는 귀객과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 모두 이 평원대로 모인다는 것이다. 나도 아객 2인과 더불어 기효순 등 3인을 이끌고 이인교(二人轎)를 사서 대(臺) 위로 올라가니, 3층 난야(蘭若 절을 말함)에 도승(道僧 수도하는 중) 두세 사람이 평상 위에 앉았다가 우리들을 보고 평상에서 내려와 서로 읍(揖)을 했다. 절 가에는 또 성황당(城隍堂)이 있는데 웅장하게 치솟은 것이 관왕묘(關王廟 촉한(蜀漢)의 명장 관우의 사당)와 같았고, 도사(道士)라고 불리는 사람 5~6명이 화문관(華文冠)을 쓰고 비단옷을 입고 그 안에서 살고 있었다. 그 가에는 척계광(戚繼光)의 생사당(生祠堂 높은 공적을 기리는 마음에서 백성들이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부터 제사를 지내는 곳)이 쓸쓸하게 높이 솟아 있고 두어 길 되는 옥돌 비석이 또 그 앞에 서 있는데, 비석 앞면에는 여덟 자를 특서하기를 척 장군 평왜대첩비(戚將軍平倭大捷碑)라 하였고, 비석 뒷면에도 장렬한 무공을 칭송하는 글 모두 50여 줄이 어제 세운 듯 분명하였다. 성지(城池)를 굽어보니, 주위는 우리나라의 한양(漢陽)보다 갑절이나 되고, 그 못은 땅을 파서 호수를 끌어댐으로 인하여 호수가 되었고 성안으로도 땅을 파서 호수를 끌어댔다. □□□□ 장삿배는 끊이지 않고 출입하여 번화한 시가지는 곳곳마다 꽃과 비단이 있었다. 남문 밖으로 따로 관왕묘가 세워져 있는데, 그 앞에는 또 대장대(大將臺)가 세워져 있고, 그 아래에는 넓은 교육장이 펼쳐 있었다. 사방의 둘레는 각기 5백여 보 □□ 큰 영부(營部) 여덟 채를 나란히 지어 놓았는데, 구부러진 모퉁이까지도 정정당당했고, 전마(戰馬) 수백여 마리가 울어서 구름과 바람을 □□ 한 줄로 □□ 교련장 뚝 밖의 사방에는 검은 뿔소 수백 마리가 떼를 지어 풀을 뜯고 있었다. 금계일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01A_0010_030_0250_2003_009_XML
Rec-2156 기언_기언별집_15권_무오기행 16780424 廿四日。上歸田園箚。箚曰。臣蒙荷殊遇寵擢異等。感激恩私。爲殿下死無所辭。臣年入九十。精力耗死。老悖至此。不可冒居朝班。初欲臨行。趨詣殿陛之下。曕望天顏。永訣入地。以爲無憾也。旣衰敗無餘。耄病又劇。無復人事。舁疾還鄕。一念狗馬之戀。情亦慼矣。臣無任悚懼。死罪死罪。自西湖出里餘。 上因政院啓。遣承旨鄭維岳勉留。謝以不得。承命之意。至城東門外。京畿觀察使權大載,前大司諫權瑎,濟用監正李碩寬送別關王廟。左議政權公,鄭參判之虎,權參知修有送別書至。長興府使裵尙珩,禁府都事韓斗相來。相見於西湖上。仍送我。至此道峯。題名。 24일, 시골로 돌아가겠다는 내용의 차자를 올렸다. 그 차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이 각별한 은총으로 등급을 뛰어넘어 발탁되었으니 전하의 은혜에 감격하여 전하를 위한 일이라면 죽음도 불사하고픈 심정입니다. 그러나 신의 나이가 90이 다 되어 기력이 소진되고 이렇게 노쇠하였으니 이를 무릅쓰고 조정의 반열에 설 수가 없습니다. 애초 고향을 떠나올 때부터 신은 전하의 뜰아래에 나아가 전하의 용안(龍顔)을 우러러 뵙고서 전하를 영결(永訣)한 뒤에 죽으면 여한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신은 몸이 극도로 쇠한 데다 질병 또한 악화되어 더 이상 인사(人事)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병든 몸을 싣고서 고향으로 돌아가오니, 전하를 향한 신의 그리운 마음 또한 슬프옵니다. 신은 송구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고는 서호에서 1리 남짓 나가 있으니, 상이 승정원에서 올린 계사를 받아들여 승지 정유악(鄭維岳)을 보내 서울에 머물러 있기를 권유했으나 왕명을 받들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사양하였다. 도성의 동문(東門) 밖에 이르자 경기 관찰사 권대재(權大載), 전 대사간 권해(權瑎), 제용감 정 이석관(李碩寬)이 관왕묘(關王廟)에서 송별해 주었고, 좌의정 권공(權公), 참판 정지호(鄭之虎), 참지 권수(權脩)는 송별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리고 장흥 부사(長興府使) 배상형(裵尙珩), 의금부 도사 한두상(韓斗相)이 찾아와서 서호 가에서 만났는데, 이어 이곳 도봉산(道峯山)까지 전송해 주었다. 도봉산에서 제명(題名)하였다. 기언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44A_0840_010_0060_2013_006_XML
Rec-2157 난중잡록_4권_1599_0107 15990107 遊擊王之翰自倭橋領軍到南原。因向京。劉綎督標下旗鼓官徐。失其名 領軍五百留南原。建關王廟。 유격(遊擊) 왕지한(王之翰)이 왜교(倭橋)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에 왔다가 서울로 향하였다. 유제독(劉提督)이 휘하의 기고관(旗鼓官) 서(徐) 이름은 모름 를 독려하여 군사 5백을 거느리고 남원에 머물러 관왕묘(關王廟)를 지었다. 난중잡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32A_0050_000_0010_2002_007_XML
Rec-2158 농암집_2권_시 null 賜對煕政堂。親降封書。戒勑丁寧。拜受而出。到南關王廟。拆見。 殿裏承親命。城南拆賜書。聖心何惻怛。臣職敢虛徐。直置驅馳遠。先憂採訪疎。高堂二人在。臨路爲躕躇。 임금께서 희정당(熙政堂)에서 접견하시고 친히 봉함한 글을 내려 간곡히 분부하시니, 절하고 받들고 나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이르렀을 때 뜯어보다. 임금 어명 궁전에서 몸소 받들고 / 殿裏承親命 주신 글월 성남에서 뜯어 읽으니 / 城南拆賜書 임금 마음 이다지도 간곡하신 걸 / 聖心何惻怛 신하 직분 어찌 감히 느긋하리오 / 臣職敢虛徐 다만 머나먼 길을 달려가기에 / 直置驅馳遠 민심 탐지 부실할까 걱정 앞선다 / 先憂採訪疎 고당에 양친 부모 살아 계시어 / 高堂二人在 갈 길을 앞에 두고 주저하노라 / 臨路爲躕躇 농암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435A_0030_010_0180_2010_001_XML
Rec-2159 농암집_3권_시 null 關王廟。次子益韻。廟貌森帷戶。窺臨颯有風。丹靑神鬼接。涕淚古今同。北地羞銜璧。南陽效鞠躬。忠貞恨一槩。合此並幽宮。 관왕묘(關王廟)에서 자익의 시에 차운하다. 사당이라 휘장 문 엄숙한 모습 / 廟貌森帷戶 다가서서 엿보니 바람이 솨솨 / 窺臨颯有風 초상화에 귀신이 서려 있는데 / 丹靑神鬼接 예나 지금 똑같이 눈물 흘리네 / 涕淚古今同 항복을 수치라 한 북지 장비(張飛)와 / 北地羞銜璧 나라 부흥 신명 다한 남양 제갈량(諸葛亮) / 南陽效鞠躬 충절이며 유감이 모두 같으니 / 忠貞恨一槩 두 분도 이 사당에 함께 모셔야 / 合此並幽宮 농암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435A_0040_010_0070_2010_001_XML
Rec-2160 담헌서_외집_8권_연로기략 null 中後所。閭井繁庶。市門夾數里。摩蕩不可行。有關帝廟極壯麗。路上多賣麝香。諸譯言皆假品云。有生薑。其大者一根或數斤。靭而多絲云。歷視帽廠。我國冠帽。皆出於此。一屋長十數間。中置五大爐。炭火烘烘。入戶蒸暖如夏。汗出不可久留也。帽匠四五十人。環坐班行不亂。皆渾脫衣帽。徒着單袴。身手齊力。揮霍驍敏。其踴躍跳蕩之狀。始見莫不驚恠。盖華人雖工匠末技。其勤厲不苟如此。眞不可及也。 중후소(中後所)는 거리가 번화하고 사람이 우글거렸는데, 시장문에서 몇 리 사이는 매우 복잡하여 걸어다닐 수가 없었다. 관왕묘[關帝廟]가 있는데,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 길가에서 사향(麝香)을 파는 사람이 많았는데, 역관들의 말이 모두 가짜라고 했다. 생강이 있는데, 큰 것은 한 뿌리가 여러 근 되는 것도 있으며 질기고 힘줄이 많다고 했다. 모자 공장[帽廠]을 둘러보았는데, 우리 나라의 관모(冠帽)가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 집 1채의 길이가 10여 칸이나 되는데, 5개의 큰 화로가 설치되어 숯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서니 찌고 무더움이 여름과 같아 땀이 흐르므로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모자 만드는 직공들 40~50명이 삥 둘러앉아 있는데, 줄이 비뚤지 않았다. 모두 옷과 모자를 벗어 붙이고 다만 잠방이 하나만을 입고 있었다. 몸과 손이 힘을 합해 민첩한 동작으로 일을 했다. 그 재빨리 뛰고 설치는 품이 처음 보면 놀라고 이상히 여기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대개 중국 사람들은 비록 공장 같은 말단의 기술자라 할지라도 그 부지런하고 엄격하여 우물쭈물 넘기려고 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니, 참으로 따라갈 수 없는 일이다. 담헌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60A_0130_010_0060_2002_004_XML
Rec-2161 동국여지지_1권_한성부_사묘 null null 관왕묘(關王廟)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숭례문 밖 3리에 있고, 또 하나는 흥인문 밖 3리에 있다. 촉한의 장군 관우(關羽)의 사당이다. 만력 정유년(1597, 선조30) 중국의 장수와 관리들이 왜적을 정벌할 때에 세운 것이다. 동국여지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99A_0020_010_0020_2020_001_XML
Rec-2162 동사록(강홍중)_1624_0821 16240821 null 맑음. 평명에 조반을 재촉해 먹고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들어가니 사인(舍人) 이명한(李明漢)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월사상공(月沙相公 이정귀(李廷龜))과 김 순천 지남(金順天止男 순천은 지명. 순천 원이었음) 영공이 연달아 이르렀다. 종사관(從事官)이 또 뒤쫓아와서, ‘상사(上使)는 벌써 날이 밝기 전에 떠났다.’ 하였다. 동사록_강홍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84A_0020_010_0020_2003_003_XML
Rec-2163 동사록(강홍중)_1625_0323 16250323 null 맑음. 평명에 발행하여 양재참(良才站)에서 점심 먹었는데 남양(南陽) 부사(府使) 한회일(韓會一)과 과천(果川) 현감(縣監) 이정(李埥)이 지대차 나오고, 남양 향소(南陽鄕所)이문협(李文莢)이 술을 가지고 찾아왔으며, 남양 하인 등이 모두 와서 배알(拜謁)하였다. 노상에서 송 청도 석조(宋淸道碩祚 청도는 청도 원을 지냈다는 뜻) 영공을 만나 말에서 내려 반형(班荊)하고 담화하였다. 한강에 이르니 정 직장(鄭直長)ㆍ원자중(元子中)ㆍ송대뢰(宋大賚) 형제ㆍ윤치규(尹穉圭) 및 막내아들이 마중 나오고, 송달보(宋達甫) 형제는 그의 형 청도 영공(송석조를 말함)을 전송하고 그대로 배 위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렸으므로 담화를 나누었다. 한강을 건너 관왕묘(關王廟)에 들어가서 세 사신이 관디[冠帶]를 고쳐 착용하고, 대궐에 나아가 복명(復命)하니, 대신 이하가 모두 사람을 보내어 위문하였다. 집에 돌아와 사당에 배알하고 어머님을 뵈었다. 일가 친척들이 모두 모였는데 다 무고하다. 동사록_강홍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84A_0030_030_0230_2003_003_XML
Rec-2164 동사록(홍우재)_1682_0508 16820508 辭朝。賜虎皮弓箭臘藥節扇胡椒。首譯以下賜節扇胡椒 正副使各受節鉞。直出南關王廟。大臣諸宰來別。親戚故舊。惜別城南。落日催人。去留垂涕。顧此行色。江樹含情。重弟澤兒敏夏佩壺隨來。聯枕良才驛。站邑。醉不記之。 사조(辭朝)하니, 상께서 호피(虎皮)ㆍ활과 화살ㆍ납약(臘藥)ㆍ부채ㆍ후추(수석역관 이하는 부채와 후추만 내렸다.) 등을 내렸는데, 정ㆍ부사는 각각 절월(節鉞)을 받았다. 곧바로 남관왕묘(南關王廟)로 나아가니 대신 이하 관료들이 전별하고 친척과 친구들과는 도성 남쪽에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지는 해가 사람을 재촉하여 가고 남는 이가 눈물을 흘리니, 이 행색은 강과 나무들도 애틋한 정을 머금은 듯하다. 중제(重弟)ㆍ택아(澤兒)ㆍ민하(敏夏)가 술병을 들고 따라와 양재역(良才驛)에서 같이 잤다. 참읍(站邑)에 대한 내용은 술에 취하여 기록치 못했다. 동사록_홍우재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95A_0020_010_0040_2003_006_XML
Rec-2165 동사일기_1711_0515 17110515 辭陛。午後雨。上卽引見。初倭人請除其若君以下禮單。朝議以爲此是兩國交際間禮節。則不可因一差倭之言。遽爾除去。令萊府書問對馬太守。答言東武之令如此。非渠所知云。廟議迄未歸一。或言不可一徇其言。使操縱在彼。正使及臣具言禮單雖賫去。而彼若拒而不受。則非但納侮。倭人或稱禮曹參判通書彼之執政爲恥云。彼若堅持此說。終然退却。則勢將難處。不如減除之爲得宜。且當初書幣。出於一時之權宜。今雖除之。無損國軆。不必强而與之。從事官稍有異議。而上從臣等之言。詢于大臣。竟除禮單。上以臣等之遠涉瘴海。慰諭勤摯。因宣醞。正使言副使任某。雖不多飮。而時或過節。亦涉可慮云云。上曰。當此炎節。身爲遠役。不可崇飮。毋過三爵可矣。臣惶感踧踖。離席拜謝。以次飮賜酒。臣病困不能盡爵。李承旨震壽言任某荷此恩數。不爲盡量。請推考。上不許。上因問此行與水路 朝天 險夷如何云耶。臣等皆言此去海路雖遠。而不如朝天時海程之險艱云。仍退出。往南關王廟更衣。親舊若而人來送。領台亦追到矣。冒雨至漢江。一家及親友送者三四十人。日暮雨甚。投宿良才驛。豐德邊是泰出待來見。備忘記。黑角弓一張,長箭一部,油席二浮,白貼扇二柄,漆別扇三柄,虎皮一張,胡椒三升,臘藥一封。副使任某處賜給。 사폐. 오후에 비가 내렸다. 상이 곧 인견하였다. 처음에, 왜인이 약군(若君) 이하의 예단(禮單)을 뺄 것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것은 양국의 교제에 관한 예절이니, 일개 차왜(差倭)의 말로 인해 선뜻 뺄 수 없다.” 하여, 동래부(東萊府)로 하여금 대마도 태수(對馬島太守)에게 서신을 보내 묻게 했는데, 그 답서에는, “동무(東武)의 명령이 이와 같으니 당신들은 알 바 아니다.” 한다. 이리하여 조정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혹은, “한결같이 그들의 말만 따라 그들로 하여금 조종하게 할 수 없다.” 하였다. 정사와 신(臣)은, “예물은 비록 가지고 간다 하더라도 그들이 만약 거절하고 받지 않는다면 모욕을 당할 뿐만 아니라, 왜인들은 혹 예조 참판이 자기들 집정(執政)에게 통서(通書)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하니, 저들이 만약 이 말을 고집하고 끝내 물리치게 된다면 사세가 난처할 것이니 차라리 빼느니만 못하다. 당초에 서계(書契)와 폐물(幣物)은 일시적 방편에서 나온 것이므로 지금 뺀다 하더라도 국가 체면에 손상될 것이 없으니 굳이 주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고, 종사관은 조금 이의가 있었는데, 상이 신 등의 말을 따라 대신들에게 순문(詢問)한 다음, 마침내 예물을 뺐다. 상은 우리가 멀리 장해(瘴海 독기(毒氣)가 있는 바다)를 건넌다 하여 친절히 위로하면서 술을 내렸다. 정사는, “부사 임모(任某)는 비록 다음(多飮)하지는 않으나 간혹 지나칠 때가 있으니 또한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 무더운 여름에 원행하게 되었으니 과음하지 말 것이며 마시더라도 석잔에 지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신등은 황공한 생각에 조심하면서 일어나 배사(拜謝)하고, 하사한 술을 차례로 마셨는데 나는 몸이 아프고 피곤하여 술잔을 다 비우지 못했다. 승지(承旨) 이진수(李震壽)가 말하기를, “임모가 이와 같은 성은을 입고 주량을 채우지 않으니 추고하소서.” 하였으나 상은 이에 윤허하지 않고 이어, “이번에 가는 길이 조천(朝天)하는 수로(水路)에 비해 그 험하고 평탄한 경로가 어떠하냐?” 고 물었다. 이에 신등은, “이번에 가는 해로(海路)가 비록 멀기는 하나 조천할 때의 해로처럼 험하지는 않습니다.” 하고, 이어 퇴출하여 남관왕묘(南關王廟)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는데, 몇 명의 친구들이 송별차 왔고 영태(鈴台 영의정(領議政)의 별칭) 또한 뒤따라 도착했다. 비를 무릅쓰고 한강(漢江)에 이르니 송별차 나온 일가친척과 친우들이 30~40명이나 되었다. 날이 저물자 비는 더 세차게 내렸다. 양재역(良才驛)에 투숙하였는데, 풍덕(豐德) 변시태(邊是泰)가 나와 기다리다가 보러 왔다. 비망기(備忘記 임금의 명령을 적어서 전하는 문서)에, 흑각궁(黑角弓) 1장(張), 장전(長箭) 1부(部), 유석(油席) 2부(浮), 백첩선(白貼扇) 2병(柄), 칠별선(漆別扇) 3병(柄), 호피(虎皮) 1장, 후추[胡椒] 3승(升), 납약(臘藥) 1봉(封)을 부사 임모에게 사급(賜給)하라 하였다. 동사일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02A_0010_030_0010_2003_009_XML
Rec-2166 동사일록_1682_1116 16821116 晴。與鄭子昂到漢江津頭。迎三使相。而到關王廟。換着紅團領節鉞。裨將以對先導。各行員役。隨後陪行。詣闕復命之後。上引見三使臣於宣政堂。罷出。中官宣醞三使臣及一行員額於仁政殿南月廊。 맑음. 정자앙(鄭子昻)과 함께 한강 나루머리에 도착하여 세 사신을 맞았다. 관왕묘에 이르러 세 사신은 홍단령으로 바꿔 입고 절월(節鉞)을 가지고, 비장을 앞세워 길을 인도하게 하였다. 각 행차의 원역(員役)들은 뒤를 따라 배행하였다. 대궐에 들어가 복명(復命)하고 나니 임금이 선정당(宣政堂)에서 세 사신을 불러 보았다. 끝내고 나오자 내시[中官]가 인정전 남월랑(南月廊)에서 세 사신과 전체 일행에게 임금이 내리는 술을 주었다. 동사일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96A_0060_040_0160_2003_006_XML
Rec-2167 만기요람_재용편4_호조각장사례 null 丁未。戶曹判書李在簡啓。以東,南關王廟墻垣。依己亥年例。自三軍門輪回修築。江華長寧殿執頉物種中難辦者。自戶曹輸送。其餘自本府擧行會减事陳達。定式。 정미(1787, 정조 11)에 호조 판서 이재간(李在簡)이 계(啓)하기를. 동ㆍ남관왕묘(東南關王廟)의 장원(墻垣)을 기해(1779, 정조 3)의 예(例)에 의하여 삼군문(三軍門)에서 윤번으로 수축(修築)하고, 강화 장녕전(長寧殿) 집탈(執頉)된 물종(物種) 중에서 판비(辦備)하기 어려운 것은 호조에서 수송(輸送)하고, 그 나머지는 본부(本府)에서 거행하여 회감(會減)할 것으로 진달하여, 정식(定式)하였음. 만기요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7A_0040_050_0050_2002_001_XML
Rec-2168 만기요람_군정편1_포도청 null 左邊七牌。一牌。自南大門至駝駱洞。伏處在會賢洞口。上二牌。自駝駱洞東至南別殿西墻。伏處在南山洞。下二牌。自鑄字洞至生民洞。伏處在筆橋。三牌。自生民洞東至水口門。伏處在靑凉橋。四牌。自把字橋東至東大門北。伏處在於義洞。五牌。自把字橋西至典洞東。伏處在齋洞。六牌。自鍾樓至五間水門。伏處在水標橋。七牌。自東大門外至關王廟。伏處在東大門外。 좌변 칠패(左邊七牌). 1패는 남대문에서 타락동(駝駱洞)까지인데 복처(伏處)는 회현동(會賢洞) 어귀에 있으며, 상이패(上二牌)는 타락동 동쪽에서 남별전(南別殿) 서쪽 담까지인데 복처는 남산동(南山洞)에 있고, 하이패(下二牌)는 주자동(鑄字洞)에서 생민동(生民洞)까지인데 복처는 필교(筆橋)에 있으며, 3패는 생민동 동쪽에서 수구문(水口門)까지인데 복처는 청량교(靑凉橋)에 있으며, 4패는 파자교 동쪽에서 동대문 북쪽까지인데 복처는 오의동(於義洞)에 있으며, 5패는 파자교 서쪽에서 전동(典洞) 동쪽까지인데 복처는 재동(齋洞)에 있으며, 6패는 종루(鍾樓)에서 오간수문(五間水門)까지인데 복처는 수표교(水標橋)에 있으며, 7패는 동대문 밖에서 관왕묘(關王廟)까지인데 복처는 동대문 밖에 있음. 만기요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7A_0070_030_0020_2002_002_XML
Rec-2169 만기요람_군정편1_순라 null 京城內,外則三軍門,兩捕廳各定校,卒。作八牌。分字內行巡。而三軍門則分日輪回。訓局。初日。寅,申,巳,亥。 牌將八人,軍士八十名。一牌。自館峴至鑄字洞。○二牌。自掌苑署至南山洞。○三牌。自敦義門南邊至鍾閣。○四牌。自敦義門北邊至鍾閣。○五牌。自崇禮門外至西江。○六牌。自崇禮門外至漢江。○七牌。自興仁門外至鍾巖。○八牌。自崇禮門外至大峴西,麻浦。 禁衛營。中日。子,午,卯,酉。 牌將八人,軍士七十八名。一牌。自興仁門北邊至三淸洞。○二牌。自興仁門南邊至南山底。○三牌。自敦義門南邊至南山底。○四牌。自敦義門北邊至三淸洞。○五牌。自弘濟院由三門外至梨太院。○六牌。自麻浦至西氷庫。○七牌。自土亭至望遠亭。○八牌。東郊部字內全當。 御營廳。終日。辰,戌,丑,未。 牌將八人,軍士六十四名。一牌。自五間水門北邊至三淸洞。○二牌。自五間水門南邊至崇禮門。○三牌。自廣惠橋至敦義門。○四牌。自廣通橋至水閣橋。○五牌。自敦義門外至阿峴。○六牌。自興仁門外至水踰峴。○七牌。自崇禮門外至梨太院。○八牌。自大峴至楊花鎭。 左捕廳。軍官八人,軍士二十二名。一牌。自崇禮門南邊至駝駱洞。○上二牌。自駝駱洞東邊至永禧殿西墻外。○下二牌。自鑄字洞至生民洞。○三牌。自生民洞東邊。至水口門。○四牌。自把子橋東邊。至興仁門。○五牌。自把子橋西邊至典洞。○六牌。自鍾閣及銅峴至五間水門。○七牌。自興仁門外至關王廟。 右捕廳。軍官八人,軍士十六名。一牌。自六曹東邊至三淸洞。○二牌。自六曹西邊至彰義門外。○三牌。自工曹後洞南邊至昭義門。○四牌。自昭義門及鍾閣至崇禮門。○五牌。自敦義門外北邊慕華館至大峴。○六牌。自敦義門及藥峴至崇禮門。○七牌。自崇禮門外至萬里峴及石隅。○八牌。自里門洞至外南山。 경성(京城)의 내ㆍ외에는 삼군문과 양 포도청에서 각각 장교와 군졸을 선정하여 8패(八牌)로 만들어 구역을 나누어 순행하는데, 삼군문에서는 일자를 나누어 돌려가며 담당한다. 훈련 도감은 초일(初日)인일(寅日)ㆍ신일(申日)ㆍ사일(巳日)ㆍ해일(亥日) 에 패장 8명ㆍ군사 80명 1패는 관현(館峴)에서 주자동(鑄字洞)까지. ○ 2패는 장원서(掌苑署)에서 남산동(南山洞)까지. ○ 3패는 돈의문(敦義門) 남쪽에서 종각(鍾閣)까지. ○ 4패는 돈의문 북쪽에서 종각까지. ○ 5패는 숭례문(崇禮門) 밖에서 서강(西江)까지. ○ 6패는 숭례문 밖에서 한강(漢江)까지. ○ 7패는 흥인문(興仁門) 밖에서 종암(鍾巖)까지. ○ 8패는 숭례문 밖에서 대현(大峴)의 서쪽 마포(麻浦)까지. 금위영은 중일(中日)자일(子日)ㆍ오일(午日)ㆍ묘일(卯日)ㆍ유일(酉日) 에 패장 8명ㆍ군사 78명 1패는 흥인문 북쪽에서 삼청동(三淸洞)까지. ○ 2패는 흥인문 남쪽에서 남산 밑까지. ○ 3패는 돈의문 남쪽에서 남산 밑까지. ○ 4패는 돈의문 북쪽에서 삼청동까지. ○ 5패는 홍제원(弘濟院)에서 3문 밖을 거쳐 이태원(梨太院)까지. ○ 6패는 마포에서 서빙고(西氷庫)까지. ○ 7패는 토정(土亭)에서 망원정(望遠亭)까지. ○ 8패는 동교부(東郊部)의 구역을 전부 담당한다. 어영청은 종일(終日)진일(辰日)ㆍ술일(戌日)ㆍ축일(丑日)ㆍ미일(未日) 에 패장 8명ㆍ군사 64명 1패는 오간수문(五間水門) 북쪽에서 삼청동까지. ○ 2패는 오간수문 남쪽에서 숭례문까지. ○ 3패는 광혜교(廣惠橋)에서 돈의문까지. ○ 4패는 광통교(廣通橋)에서 수각교(水閣橋)까지. ○ 5패는 돈의문 밖에서 아현(阿峴)까지. ○ 6패는 흥인문 밖에서 무네미고개[水踰峴]까지. ○ 7패는 숭례문 밖에서 이태원까지. ○ 8패는 대현(大峴)에서 양화진(楊花鎭)까지. 좌포도청 : 군관 8명ㆍ군사 22명 1패는 숭례문 남쪽에서 타락동(駝駱洞)까지. ○ 상 2패는 타락동 동쪽에서 영희전(永禧殿) 서쪽 담 밖까지. ○ 하 2패(下二牌)는 주자동에서 생민동(生民洞)까지. ○ 3패는 생민동 동쪽에서 수구문(水口門)까지. ○ 4패는 파자교(把子橋) 동쪽에서 흥인문까지. ○ 5패는 파자교 서쪽에서 전동(典洞)까지. ○ 6패는 종각 및 구리재[銅峴]에서 오간수문까지. ○ 7패는 흥인문 밖[外]에서 관왕묘(關王廟)까지다. 우포도청 : 군관 8명ㆍ군사 16명 1패는 육조(六曹) 동쪽에서 삼청동까지. ○ 2패는 육조 서쪽에서 창의문(彰義門) 밖까지. ○ 3패는 공조(工曹) 뒷동리의 남쪽에서 소의문까지. ○ 4패는 소의문(昭義門)과 종각에서 숭례문까지. ○ 5패는 돈의문 밖 북쪽 모화관(慕華館)에서 대현까지. ○ 6패는 돈의문과 약재[藥峴]에서 숭례문까지. ○ 7패는 숭례문 밖에서 만리재[萬里峴]와 돌모루[石隅]까지. ○ 8패는 이문동(里門洞)에서 외남산(外南山)까지. 만기요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7A_0070_090_0010_2002_002_XML
Rec-2170 만기요람_군정편2_훈련도감 null 東,南關王廟墻垣頹圮則三營並力修築事。正宗丁未。定式。每朔初十日。送校摘奸。 동ㆍ남 관왕묘(關王廟)의 장원(墻垣)이 무너지면 3영에서 힘을 합해서 수축하도록 정종 11년 정미(1787년)에 규례를 정하여 매월 초 10일(初十日)에 장교를 보내어 부정을 적발한다. 만기요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7A_0080_040_0120_2002_002_XML
Rec-2171 만기요람_군정편3_금위영_배호 null 若値經宿之時。高峯斥堠,通路伏兵亦與御營廳輪回定送。城內經宿時。斥堠十四處。一將四卒。崇禮門城上,昭義門城上,敦義門城上,惠化門城上,興仁門城上,光煕門城上,蠶頭,鞍峴,北岳,曲城,鷹峯,東關王廟後峯,往十里後峯。伏兵六處。崇禮門外三巨里,昭義門外三巨里。敦義門外三巨里,彰義門外三巨里,惠化門外三巨里,光煕門外三巨里。扈衛時。斥堠五處。崇禮門城上,蠶頭,阿峴,南伐院峙,昭義門城上。伏兵。崇禮門外三巨里。若値冬節則斥堠,伏兵處所。並减半事。正宗癸卯。定式。故隨其經宿之所。各定信地。宗廟動駕時。斥堠七處。崇禮門城上,興仁門城上,光煕門城上,惠化門城上,東關王廟後峯,北岳,蠶頭。伏兵三處。崇禮門外三巨里,彰義門外三巨里,興仁門外三巨里。社稷動駕時。斥堠七處。崇禮門城上,興仁門城上,敦義門城上,彰義門城上,曲城,蠶頭,北岳。伏兵三處。彰義門外三巨里,敦義門外三巨里,興仁門外三巨里。迎勅時。伏兵三處。彰義門外三巨里,弘濟院三巨里,東關王廟三巨里。每處一將四卒。郊外幸行時斥堠,伏兵。迎勅時斥堠。訓局全當。 만일 밤을 지내게 될 때에는 고지[高峰]에서의 척후와 통로에서의 복병도 또한 어영청과 윤차로 결정하여 파송한다. 성내에서 밤을 지낼 때 척후 14개소에 장교 1명과 병졸 4명씩, 숭례문의 성상ㆍ소의문의 성상ㆍ돈의문의 성상ㆍ혜화문의 성상ㆍ흥인문의 성상ㆍ광희문의 성상ㆍ잠두(蠶頭)ㆍ안현(鞍峴)ㆍ북악ㆍ곡성(曲城)ㆍ응봉(鷹峯)ㆍ동관왕묘(東關王廟) 후봉ㆍ왕십리 후봉, 복병 6개소는 숭례문 밖의 삼거리ㆍ소의문 밖의 삼거리ㆍ돈의문 밖의 삼거리ㆍ창의문 밖의 삼거리ㆍ혜화문 밖의 삼거리ㆍ광희문 밖의 삼거리ㆍ왕가를 호위할 때 척후 5개소는 송례문의 성상ㆍ잠두ㆍ아현(阿峴)ㆍ남벌원치(南筏院峙)ㆍ소의문의 성상, 복병(伏兵)은 송례문 밖의 삼거리. 만일 동절을 당하게 되면[値冬節則] 척후와 복병의 장소는 모두 반수로 줄이도록 정종 7년 계묘에 규례를 정하였다. 그러므로 그 밤을 지내는 장소에 따라 모두 일정한 지점을 정한다. 국왕이 종묘에 거둥할 때 척후 7개소는 숭례문의 성상ㆍ흥인문의 성상ㆍ광희문의 성상ㆍ혜화문의 성상ㆍ동관왕묘의 후봉ㆍ북악ㆍ잠두, 복병 3개소는 숭례문 밖의 삼거리ㆍ창의문 밖의 삼거리ㆍ흥인문 밖의 삼거리. 국왕이 사직(社稷)에 거둥할 때 척후 7개소는 숭례문 성상ㆍ흥인문 성상ㆍ돈의문 성상ㆍ창의문 성상ㆍ곡성(曲城)ㆍ잠두ㆍ북악, 복병 3개소는 창의문 밖의 삼거리ㆍ돈의문(敦義門) 밖의 삼거리ㆍ흥인문 밖의 3거리. 중국 사절을 영접할 때 복병 3개소는 창의문 밖의 삼거리ㆍ홍제원(弘齊院)의 삼거리ㆍ동관왕묘의 삼거리. 1개소에 장교 1명과 군졸 4명씩이다. 국왕이 교외에 거둥할 때의 척후ㆍ복병과 중국 사절을 영접할 때의 척후는 훈련도감에서 전담한다. 만기요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7A_0090_010_0110_2002_002_XML
Rec-2172 만기요람_군정편3_금위영_적간 null 東,南關王廟。每朔二十日。宮墻。每五日。南壇,雩祀壇,龍壇,司寒壇。每月初。並送校摘奸。東,南廟墻垣。三軍門並力修築事。正宗丁未。定式。 동ㆍ남관왕묘(東南關王廟)는 매월 20일, 궁장(宮墻)은 매 5일, 남단(南壇)ㆍ우사단(雩祀壇)ㆍ용단(龍壇)ㆍ사한단(司寒壇)은 매월 초에 모두 장교를 보내어 부정을 적발한다. 동ㆍ남쪽관왕묘의 담장은 삼군문에서 힘을 아울러 수축하도록 정종 11년 정미(1787년)에 규례를 정하였다. 만기요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7A_0090_010_0190_2002_002_XML
Rec-2173 만기요람_군정편4_해방 null 宣祖三十一年。李舜臣移屯於此島。募民屯耕。南民。襁屬歸之。遂爲大鎭。有關王廟。肅宗七年。設僉使。 선조(宣祖) 31년에 이순신이 이 섬에 옮겨와서 주둔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실시했으므로 남도의 백성들이 많이 모여들어 드디어 큰 진(鎭)이 되었다. 관왕묘(關王廟)가 있다. 숙종(肅宗) 7년에 첨사를 설치하였다. 만기요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7A_0100_020_0030_2002_002_XML
Rec-2174 목민심서_예전6조_제사 null 如平壤之箕子廟。慶州之崇德廟。順天之忠愍祠。康津之誕報廟。所在有之。其屋宇之修葺。籩豆之庀治。皆牧之責也。神罔時恫。斯賢牧也。 평양(平壤)의 기자묘(箕子廟)ㆍ경주(慶州)의 숭덕묘(崇德廟)ㆍ순천(順天)의 충민사(忠愍祠)ㆍ강진(康津)의 탄보묘(誕報廟)와 같은 사묘가 가는 곳마다 있다. 그 사우(祠宇)의 수리와 변두(籩豆)의 수선도 모두 수령의 책임이니, 신의 상심이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어진 수령이다. 목민심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88A_0080_020_0050_2014_002_XML
Rec-2175 몽경당일사_1편_마자인정기_1885_1029 18851029 入關帝廟。廟制。外施金碧。有若精洒。殿內塵煤堆滿。塑像與我國南廟懸殊。全無嚴威氣像。傍有佛寺及財神廟。廟門兩扇。分貼龍虎二字。門外有朱漆木柱。上頭鍮飾。左右對立。如我國將臺前帥字旗竿。每月朔望。懸黃紬雙旗於柱上。無處不然。凡寺廟宜在靜僻乾淨之地。而此在閭家市街之中。極涉瀆褻。從人曰。沿路寺廟。在在皆然云。 관제(關帝)의 사당에 들어갔다. 밖에는 단청을 하여 정쇄(精灑)한 것같이 보이나 전 안에는 먼지와 그을음이 꽉 차 있었다. 소상(塑像)은 우리나라 남관왕묘(南關王廟)의 소상과 아주 달라서 전연 위엄스러운 기상이 없다. 곁에는 불사(佛寺)와 재신묘(財神廟)가 있다. 문은 두쪽 문으로 용(龍)ㆍ호(虎) 두 자를 갈라 붙였다. 문밖에는 붉은 칠을 한 나무기둥이 있는데, 꼭대기에 놋쇠로 장식하여 좌우에 마주 세운 것이 마치 우리나라 장대(將臺) 앞에 세운 수자기(帥字旗) 깃대 같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누런빛 명주로 만든 기(旗)를 쌍으로 다는데, 어디서나 그렇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무릇 절이나 사당은 고요하고 외진 깨끗한 곳에 있어야 하는데, 이는 여염집 시가 가운데 있어서 매우 정결하지 못한 것 같다. 따르던 사람이 말하기를, “연로(沿路)의 절이나 사당은 어디서나 모두 그렇습니다.” 한다. 몽경당일사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9A_0020_020_0040_2004_011_XML
Rec-2176 무오연행록_1권_1798_1123 17981123 null 마고령을 지나매 설유참(薛劉站)이 있으니 곧 당 나라 설인귀(薛仁貴)와 유인원(劉仁願)이 군사를 쓰던 곳이요, 또 이르기를 솔참이라 하니, 책문(柵門) 지난 후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두어 그루의 소나무가 있으니 서리고 창울(蒼欝)하여 가히 사랑스럽다. 소나무 남쪽에 ‘칠성사(七星祠)’란 사당(祠堂)이 길가에 있으니, 지나는 곳 한 마을에 한 절이 있으며, 혹 돌을 뚫어 감실(龕室)을 만들고, 또 흙을 쌓아 가운데를 비워 관왕(關王)의 화상(畫像)과 작은 부처와 토지신(土地神)을 앉히고 앞에 향로(香爐)를 놓아 예공(禮供)하고, 절과 관왕묘(關王廟)의 문 앞에 붉은 줏대를 쌍으로 세워, 삭망(朔望)이면 기(旗)를 달고 제(祭)를 지내니, 관왕묘는 근사(近似)하거니와 절에는 무위(無謂)하더라. 중이 관왕묘와 절에 잡되이 있어 고기를 먹으며, 냄새나는 풀을 먹어 출가(出家)한 사람의 모양같지 아니하고, 오직 황성(皇城) 만수사(萬壽寺) 중이 자못 중의 도리를 지킨다 하더라. 무오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3A_0010_030_0200_2004_007_XML
Rec-2177 무오연행록_1권_1798_1127 17981127 null 7, 8리를 가되 인가를 보지 못하고, 수 리(里)를 지나 청석령(靑石嶺)에 이르니 임목(林木)이 많고 악석(惡石)이 뇌락(磊落)하여 빛이 다 푸르니, 이래서 청석령이라 하더라. 영(嶺)이 거의 끝나는 곳에 인가가 둘이 있으니 숯을 굽는 사람이요, 관왕묘(關王廟) 영 위에 있어 용마루를 아니 하였으니 높고 바람이 거세어 기와가 걷힐까 염려함인가 싶으며, 문 앞에 비(碑)를 세웠으되 글자가 닳아서 보지 못할러라. 영 높이가 회령령(會寧嶺)만 못하나 제일 높은 데를 지나는데 눈이 두터이 덮였으니 매우 미끄럽고 첩첩한 바위 골짜기 사이로 굽어들어 말발이 깊이 빠지며 수레바퀴가 기울어져 떨어질까 싶으며, 길가에 달린 한 언덕 위에 세 바위가 섰는데 형상이 괴석(怪石) 같아 우러러보기에 장차 굴러 내릴 듯하니, 보기에 위태하더라. 무오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3A_0010_030_0240_2004_007_XML
Rec-2178 무오연행록_2권_1798_1208 17981208 null 마을 가운데 관왕묘(關王廟)가 있으니 묘당(廟堂)이 장려하고 소상(塑像)이 웅장하니 본래 영험(靈驗)이 많다 하는지라. 이번 사행이 책문(柵門) 이후로 병들지 않은 자가 없고 죽은 자 이미 세 사람이라. 하인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병들지 않은 자도 또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며, 병든 자는 더욱 앞날을 보전하지 못할 것 같은 마음이 많은지라. 대개 하인의 천(賤)하고 어리석은 상정(常情)이 일이 있으면 문득 기도하기를 일삼는지라. 드디어 부방(副房)에게 의논하여 상정을 진정코자 통돼지와 약과(藥果) 100닢과 배와 밤 대추 각 한 근과 술을 갖추어 지전(紙錢)을 태워 관제묘(關帝廟)에 제를 지낼 때, 당상 역관(堂上譯官) 김명귀를 보내어 글을 가려 써 제하니, 그 글에 말하기를, 오직 신령이 당당한 충의의 기운은 천고에 비치어 길이 있고 / 唯靈堂堂忠義之氣 炳千古而長存 명명한 높고 높은 은혜는 일만 나라를 전고하여 고르게 보는도다 / 明明庇佑之恩 轉萬邦以均施 물이 땅에 있음 같으니 일찍 천사의 신령을 나타냄으로부터시며 / 如水在地 爰自玉天之顯聖 큰 땅과 넓은 하늘이 드디어 금상을 평안히 모시기를 같이하였도다 / 率土普天 遂從金床之安享 하물며 청구는 두 번 지은 은혜를 입어 / 矧靑丘 被再造之惠 이 붉은 기둥이 두 묘당의 거동을 빛내게 하였도다 / 是丹楹 侈兩廟之儀 진사(辰巳)년 액운을 도리어 생각하니 신령이 진실로 힘이 들고 / 回思龍蛇之劫運 神實勞矣 생뢰의 향례를 공설하니 국왕이 또한 절을 하시도다 / 告厥牲牢之饗禮 國王亦拜 자못 소방의 흙덩이를 잡는 공을 닦으매 이에 삼사가 경(境)에 나는 역사를 맡았도다 / 殆小邦以修執壤之貢 乃三介應出彊之役 관개가 서로 도로에 이었으니 신선한 원습의 수고로움이요 / 冠蓋相屬於道路 駪駪原隰之勞 세월이 관하에 저물었으니 비비한 우설의 읊음이러라 / 歲月云暮於關河 霏霏雨雪之詠 이 시령의 유행하는 병을 즈음하여, 드디어 행로의 엎어지는 탄식을 이루었도다 / 際玆時令輪行之疾 遂致行路顚連之嘆 더우면 원망하고 추우면 슬퍼하니, 하늘이 바야흐로 몹쓸 병을 내리시거늘 / 暑怨寒咨 天方降疵 바람이 신음하고 비에 한숨 쉬니 사람이 진실로 무슨 죄런고 / 風呻雨喟 人實何故 만 리의 돌아오기를 미치지 못하니, 슬프도다 저 세 사람의 죽음이여 / 未及萬里之旋歸 哀哉三人之並零 층층한 얼음과 쌓인 눈에 귀신이 장차 주릴 것이요, 일만 돌무더미와 일천 뫼에 혼이 돌아가지 못하리로다 / 層氷積雪 鬼將餒矣 萬磧千山 魂不歸思 슬프고 슬프다, 죽은 사람은 할일 없거니와, 이를 어찌할꼬 오히려 병든 이여 / 吁嗟乎已矣死者 乃此何其有病諸 비록 추위 병이 가히 바람을 쐬지 못할 것이나, 이 진공이 스스로 그날이 있도다 / 雖寒疾 不可以風 此進貢 自有其日 적이 조섭하기를 기다리면, 찬진할 기약을 어길까 하거늘, 한가지로 신명에 빌어 부지하는 힘 입기를 원하는도다 / 少待將息 恐乖攢進之期 共祝神明 願資扶持之力 이에 절사 이 묘당을 지날 즈음을 당하여, 감히 곤궁하면 하늘을 부르짖는 정성을 부쳤도다 / 慈當節使過廟之際 敢寓困窮呼天之誠 엎드려 원하나니 / 伏願 언월도 휘각하는 위엄을 떨쳐, 반드시 먼저 400병을 소멸하고 / 奮偃月揮却之威 必也消滅四百病 해를 지나 행매하는 괴로움을 진념하니 멀다 삼천리 길이 묘망하도다 / 軫過歲行邁之苦 逖矣三千里渺茫 바람을 거두고 일기 평안하니, 현명을 조서하여 절을 늦추고 / 風收日斂 詔玄冥而弭節 아침에 가고 저녁에 쉬어 청춘의 고향에 돌아가게 할지라 / 朝徂夕宿 好靑春而還鄕 나으면 장차 조회하니 하여금 회동하는 예에 미치게 하고 / 愈將朝焉 俾晉會同之禮 슬피 여기는 것이 명이라, 써 질통의 부르짖음을 펴노이다 / 哀哉命也 用伸疾痛之呼 김명귀가 돌아와 말하되, “장차 제를 베풀고 지전(紙錢)을 태우려고 하는데 저들이 무리를 지어 구경하므로 제를 다 지내고 음식을 나누어 주었노라.” 하며, 또 말하되, “하인들이 저희를 위하여 제를 지낸다 하고 말하되, ‘이같이 마음을 써 주시니 아픈 줄을 깨닫지 못하노라.’ 하며, ‘이날 밤 제사에 인명이 많이 살리라.’ 하여 기뻐한다.” 하니, 하인(下人)의 어리석음이 이 같은지라. 무오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3A_0020_010_0020_2004_007_XML
Rec-2179 무오연행록_2권_1798_1211 17981211 null 가게 안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가게 윗집이 곧 관왕묘(關王廟)라, 밖에 두 겹으로 문을 막았으며, 바깥문을 마주하여 길을 건너 큰 채각(綵閣)이 있으니 외채집이로되 섬돌이 한 길이 넘으며 재목과 단청이 웅장하고 빛나니, 이는 희자(戱子)가 놀음하는 집이라. 희자라 하는 것은 우리나라 솟대놀음에 탈을 쓴 광대(廣大)놀음과 같으니, 명 나라 때 조정 신하의 의관에 괴이한 복색을 갖추어 각종 희롱을 하니 이래서 오랑캐들이 우리나라 사행(使行)의 의복을 보며 웃으며 말하되, “이 희자(戱子)와 같은 모양이라.” 하니, 제 비록 근본 한인(漢人)의 자손이나 풍속에 물들어 도리어 웃으니 어찌 불쌍하지 않으리오. 들보에 사람의 성명을 벌여 쓰고 성명 아래 은자(銀子) 추렴[出斂]한 수를 기록하였으니 모두가 강남(江南) 상인이라. 길가 큰 묘당(廟堂) 앞에 항상 희자 놀음하는 집을 지었으니 크게 제(祭)를 지내면 반드시 희자 놀음을 베풀고, 묘당 밖에 큰 비를 세웠으니 병신년에 중수한 비요, 시주(施主)한 사람의 성명을 또한 새겼으니, 그중 ‘조선 수당(首堂) 박도관’이라 하였으니, 이자는 이번 행중(行中) 역관 박내행의 아버지요, 박영화의 할아버지라. 수당은 곧 수역(首譯)을 이른 말이니, ‘500냥 은을 시주하다.’고 기록하였더라. 좌우 월랑(月廊)에 적토마(赤兎馬)를 세웠으되 다 사람이 고삐를 쥐었으니, 하나는 얼굴이 붉고 영특(英特)하며, 하나는 희고 고우니, 이는 우리나라 관왕묘에서 보던 바와 다르며, 묘당(廟堂)의 모습이 장대하고 화려하며 앞에 점(占)치는 산통이 있으니, 옛날부터 영험(靈驗)이 있다 하더라. 소상(塑像)이 특별히 웅장하니 세 길[丈]이 넘을 것이요, 낯빛이 대춧빛이라, 아국 남관왕묘(南關王廟) 소상과 같고, 앞에 또한 작은 소상을 앉혔더라. 탁자 앞에 여남은 소상을 세웠으니 다 장수(將帥)의 모양이라, 거동이 하나하나 다 웅장하고, 어둑한 집안에 흰빛이 번득이는 날카로운 창검을 좌우에 늘어놓았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서 스스로 존경하게 하더라. 관왕(關王)은 천하의 영웅이라, 범 같은 위엄과 굳은 충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장부(丈夫)의 천금(千金) 같은 몸을 헛되이 버렸으니, 이러므로 분해서 속이 답답한 정신과 영령(英靈)한 혼백이 천지간에 맺혀 1000여 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아니하니, 자주 신병(神兵)을 거느리고 구름 속에서 얼굴이 나타나 천하의 옳은 싸움을 돕고, 도적으로 하여금 기운을 잃게 하는지라. 이것으로 중국 사람이 공경하여 섬기는 것이 부처보다 더하고, 임진왜란을 당하여 우리나라에 이르러서는 천장(天將)이 은(銀)을 모아 동관왕묘(東關王廟)를 세우고, 그 후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수천 냥 은을 내리사 남관왕묘(南關王廟)를 세우게 하시니, 집을 이루고 소상을 받들어 모시는데, 모든 장수(將帥)가 정성을 깨끗이 하여 제사를 지내므로, 제사를 마친 후 우레하고 번개가 치면 이는 관왕의 신령이 강림(降臨)하심이니 필연 도움이 있어 병란(兵亂)을 평정한다 하니, 이때 하늘이 맑고 달과 별이 밝게 비쳐 빛나는지라, 사람이 다 믿지 아니하더니, 제사를 거의 마치는데 갑자기 바람이 일어나며 서북으로 검은 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덮고 천둥[天動]과 번개가 치며 큰비를 뿌리는지라, 사람이 다 놀라고 이상히 여기더니 오래지 않아 관백(關白) 평수길(平秀吉)이 죽고 적병이 물러가니, 지금까지 관왕의 도움을 유쾌하게 아는지라, 기이한 사건이요 생각지 못할 일일러라. 무오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3A_0020_010_0050_2004_007_XML
Rec-2180 무오연행록_2권_1798_1212 17981212 null 꼭두새벽에 떠나 10리를 가니 해가 비로소 돋더라. 소송령(小松嶺)에 이르니 이즈음에서 동북(東北)으로 바다가 보이는데, 물빛이 검고 푸르러 하늘에 닿아 끝이 없으니, 이는 발해(渤海)라 하는 바다요, 서북으로 또 큰 산이 막혔으니, 산허리에 만리장성이 굽이굽이 둘러져 있으니 이는 진시황(秦始皇)이 쌓은 것으로, 임조(臨洮)란 땅에서 시작하여 요동(遼東)에 이르러 넓이와 길이가 만여 리라. 중전소(中前所)에 다다르니, 길 오른편에 큰 성이 있어 중후소와 같아서 길이 성 밖으로 지나며, 길가에 관왕묘가 있으니 현판에 써 말하되, ‘충의신무령후관성대제(忠義神武寧侯關聖大帝)’라 하고, 또 푸른 글자로 썼으니 이는 길가에서 처음 보는 것이라. 이후는 관왕묘 현판이 이와 많이 같고, 또 ‘충성묘(虫聖廟)’라 하는 묘당이 있으니 벌레 성인의 묘당이란 말이다. 누에 귀신[蠶神]을 위한 곳인가 싶으나 자세히 모르겠더라. 무오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3A_0020_010_0060_2004_007_XML
Rec-2181 무오연행록_2권_1798_1217 17981217 null 봉산점(蜂山店)과 나산점(螺山店)을 지나니 북편(北便)에 높은 언덕이 있고, 중석(重石)이 우뚝 솟아 층계(層階)를 쌓은 모양같고 위에 절[寺]을 지었으니 모양새가 아주 정교하고, 여기를 지나니 제자산(梯子山)에 또한 돌이 쌓여 누백층(累百層) 섬돌이 생기고, 또한 절이 있어 나산점과 같고, 절 밖에 담을 둘렀으며 붉은 분으로 발랐으니, 우러러보매 모습이 네모 반듯하고 빛나며, 그 아래 평지(平地)에 관왕묘(關王廟)가 있으니 문을 길로 향하여 열었으며 소상(塑像)이 있는지라. 사행이 지나자 중의 무리가 향(香)을 피우고 경쇠를 치며 손에 그릇을 들고 돈을 달라 하니 매우 무례하며, 관내(關內)로부터 길에까지 모여 일행이 지날 때에 100여 보 앞에서부터 소리를 크게 하여 ‘대노야(大老爺)는 돈을 주라.’ 하며, 즉시 아니 주면 100여 보를 쫓아와 달라 하며, 계집은 아주 발을 동였으니 이는 한인(漢人)이라. 동인 발로 수백 보를 따라오되 넘어지는 일은 없으나 걸음 모양이 매우 위태하고, 옷이 극히 남루하나 귀밑에 가화(假花)를 없애지 아니하였으니 참으로 우습더라. 일행 중에 혹 돈을 주는 자 있으며, 주지 않는 자는 수레를 모는 되놈이 돈 푼씩 주고, 마두 황이(黃伊)는 보는 족족 한두 푼씩 주더라. 무오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3A_0020_010_0110_2004_007_XML
Rec-2182 무오연행록_5권_1799_0126 17990126 null 길가 가게 안으로 한 문을 지나며 한 묘당(廟堂)이 있으니, 관왕 소상(關王塑像)을 봉안(奉安)한지라, 갑옷을 입고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동쪽을 향하여 보며 무슨 말을 하는 모양이라. 눈에 노기가 있어 눈을 부릅뜨고, 동벽(東壁) 아래 한 소상을 매어 앉혔으니 얼굴을 밖으로 향하여 항복(降伏)하지 아니하는 모양이러라. 이는 오(吳) 나라 장수 조빈(曹彬)이니, 적토마를 도적하다가 잡힌 모양이러라. 한 사람은 조빈의 뒤에서 맨 노끈을 붙들고, 한 사람은 철퇴로 치려 하는 거동이요, 좌우에 뫼신 신장(神將)이 다 우러러 관왕(關王)께 명을 받아 조빈을 노리고 있으며, 적토마는 벽 밑에서 관왕을 치밀어 보며 갈기를 흔들고 눈을 부릅뜬 거동이로되, 보니 살았는 듯하니, 전하는 말이, 수(隋) 나라 때에 만들었다고 하더라. 관왕묘 서(西)로 반 리(里)는 가서 약왕(藥王)의 묘가 있으니, 천황씨(天皇氏)ㆍ지황씨(地皇氏)ㆍ인황씨(人皇氏)ㆍ헌원씨(軒轅氏)ㆍ복희씨(伏羲氏)ㆍ신농씨(神農氏) 여섯 위를 주벽(主壁)하여, 좌우로 의약(醫藥)에 공 있는 사람 10여 인을 만들어 앉혔으되, 각각 앞에 패(牌)를 세우고 성자(姓字)를 썼더라. 무오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3A_0050_010_0010_2004_007_XML
Rec-2183 무오연행록_6권_1799_0221 17990221 null 해 뜰 무렵에 양수하에서 떠나 중후소(中後所)에 이르러 점심 식사를 하니, 이전에 들렀던 집이라. 식후에 세 사신이 관제묘(關帝廟)에 이르러 들어가 배례(拜禮)하니, 소상은 우리나라 남묘(南廟)와 같고, 앞에 여러 신장(神將)을 모셨으되, 다 위풍이 늠름하고, 어둑한 집안에 서리 같은 창검(槍劍)이 벌였으니, 마음이 숙연하더라. 절할 때마다 승려가 옆에서 종과 북을 쳐 절하는 수(數) 대로 치더라. 상방이 올 때에 이곳에 기도(祈禱)하라 하고 건량관(乾糧官) 이시관(李時寬)을 남게 하여 보사제(報謝祭)를 지내다. 본래 영험이 있다 이르는 묘당이러라. 동관역(東關驛)에 숙소하니 또한 올 때 들었던 집이라. 계집 세 사람이 담으로 좇아 보며 우리나라 사람과 무슨 말을 하고자 하니, 곧 역승(驛丞) 마원의 집안 식구라. 늙은 여인은 역승의 아내요, 젊은 두 여인은 하나는 며느리요, 하나는 딸이라 하되, 얼굴이 단정하고 묘한지라. 유양청(柳良淸)이 좋게 여겨 변변치 못한 한어로 간신히 무슨 말을 물으니 힘들고 고생스럽더라. 무오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3A_0060_010_0150_2004_007_XML
Rec-2184 백사집_백사별집_1권_계사 null null 아뢰기를, “도병(逃兵)의 폐단에 대해서는 식자(識者)들이 그것을 걱정해 온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대체로 천장(天將)이 다 철수하고 나면 도병을 막기 어려운 걱정이 있음을 염려한 것입니다. 지금은 천장들이 경성에 가득히 있고 철거한 것은 다만 이 대아문(大衙門)뿐인데, 삼문(三門) 밖에는 이미 각(角)을 울려 계엄(戒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후일 걱정 거리의 조짐이 이미 드러났으니, 만일 지금 처치하지 않으면 후환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천장은 비록 우리 나라로 하여금 일일이 포박(捕縛)하도록 하고 있으나,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이미 포박한 뒤에 도병이 거짓말로 ‘일을 보러 밤에 나왔다가 잘못 체포되었다.’고 하면 천장이 바로 석방해 주어 끝내 아무 일이 없게 되고, 도병이 이로 인하여 거짓말로 ‘조선 사람이 나를 체포할 때에 내가 가지고 있던 은자(銀子)까지 아울러 빼앗아 갔다.’고 할 경우에는 천장이 그 은자를 추징(追徵)하는 사례까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포도군관(捕盜君官)들이 그 누가 힘을 다해서 체포하려 하겠습니까. 요즘 듣건대, 남방에는 이미 흩어져서 반란을 일으키는 폐단이 있다고 하니, 이 또한 대단히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만일 천장이 다 철수하고 나면 머물러 있을 사람은 다만 동관왕묘(東關王廟)의 감조관(監造官) 한빈(韓贇) 및 섭정국(葉靖國) 두 사람뿐인데, 두 사람의 표하(標下)에 있는 사람은 모두 10여 인도 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 도통판(陶通判)이 경성에 있을 때에 이 사유를 갖추어 통판으로 하여금 잘 처리해서 이 두 관원의 표하에 있는 사람들을 분명하게 적어 내도록 하고, 또 양표(糧表)를 주어서 우리 나라로 하여금 그 양표를 근거로 삼아 늠료(廩料)를 지급하게 하여 무뢰배들로 하여금 두 관원의 표하에 줄을 이어 투탁(投托)해서 점차로 많은 수를 이루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니, 그러고 나면 양표가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에서 의당 일일이 체포하여 해송(解送)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말을 만들어 통판에게 이자(移咨)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백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60A_0080_010_0100_2002_002_XML
Rec-2185 백사집_백사별집_2권_계사 null null 아뢰기를, “정원(政院)의 계사(啓辭)에서 ‘첨 천총(詹千總)이 구타를 당했다느니, 치료하는 일로 곳곳에서 소란을 일으킨다느니 하는 말이 있으니,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는 뜻으로 입계(入啓)한 결과, ‘아뢴 대로 하라. 이 일은 작지 않은 일이니, 만일 뜻밖의 일이라도 생기면 비변사로 하여금 속히 처치하도록 하라.’는 일로 전교하셨습니다. 신들은 전교를 받들고 허둥지둥 와서 모였으나, 사건의 수말(首末)을 알 수가 없어 각각의 사람을 파송(派送)하여 그 종적(蹤迹)을 조사해 본 결과, 대체로 요계(遼薊)의 도병(逃兵)들이 서로 모여 떼를 지어서 기필코 이승총(李承寵)을 상해(傷害)하려고 그를 결박하여 간 것입니다. 처음 동대문(東大門) 관왕묘(關王廟)의 감조위관(監造委官) 한수비(韓守備)의 우소(寓所)에 당도해서 즉각 또 들으니 ‘그대로 이승총을 결박하여 갔는데 아직 어느 곳에 두었는지는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소란을 일으키던 당시에는 그들의 원수(元數)가 겨우 20여 인 정도였는데, 지금 섭 도사(葉都事)의 문서(文書)를 보니, 숫자가 백여 인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숫자의 다과(多寡)에 대해서는 비록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옥문(獄門)을 때려부수고 차관(差官)을 결박하여 공공연히 한낮에 도중(都中)에서 소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요즘 외간(外間)에 항상 이런 우려가 있었는데, 지금 과연 증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들의 뜻도 서로 달라서 혹자는 ‘즉시 초포(剿捕)해야 한다.’ 하고, 혹자는 ‘우선 해산(解散)하도록 두었다가 그들이 여기저기 흩어지기를 기다려서 열군(列郡)에 통지하여 각각 체포하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승총이 이미 결박되어 갔으므로, 섭 도사가 이자(移咨)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지금 만일 우리 나라에서 전혀 하는 일이 없으면 이로 인하여 언단(言端)을 야기시켜서 천조(天朝)의 귀를 어지럽히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병조로 하여금 무사(武士)를 정밀히 뽑아서 장수를 정하여 군법(軍法)으로 조직시키도록 하고, 또 훈련도감으로 하여금 특별히 정용(精勇)한 군사를 뽑아서 성(城) 밖으로 나가 변(變)에 대비하게 하되, 한편으로는 계려(計慮)가 있는 역관(譯官) 수인(數人)으로 하여금 지계(智計)가 있는 무장(武將)을 대동하고 먼저 전로(前路)에 나가서 기회를 틈타 변을 관찰하게 하도록 할 것이며, 또 섭 도사나 혹은 이승총 등을 만나서 상의하여 계책을 물어보아서 만일 초포할 만한 형편이 되면 초포하고, 만일 이미 해산하였으면 그들의 종적을 탐문하여 때를 타서 박멸하도록 하되, 이는 주장(主將)이 임시하여 처치하기에 달린 것이니, 그 사이의 진퇴(進退)에 대해서는 일일이 지시해 주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다만 그 도병들이 모두 건장한 말을 타고 겸해서 궁전(弓箭)까지 소지하여 일대(一隊)를 이루었으니, 그들을 체포하는 즈음에 혹 소홀히 하여 관병(官兵)을 절손(折損)시키게 될까 하는 것이 또한 염려스러우니, 이런 곡절을 미리 지시해 주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백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60A_0090_010_0010_2002_002_XML
Rec-2186 백사집_백사별집_5권_조천록_1598_1219 15981219 null 요양(遼陽)에서 출발하여 화표주(華表柱)와 관왕묘(關王廟)를 구경하고, 서관(西關), 한가분(韓家墳), 팔리포(八里鋪), 수산포(首山鋪), 수산령(首山嶺), 주필산(駐蹕山), 사하포(沙河鋪), 사하(沙河), 장점포(長店鋪), 징청사(澄淸寺)를 지나 안산(鞍山)의 염가(閻家)에서 묵었다. 60리를 갔다. 백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60A_0120_010_0220_2002_003_XML
Rec-2187 백사집_백사별집_5권_조천록_1599_0102 15990102 null 정월 2일 해월의 관왕묘(關王廟)의 운에 차하다. 평생에 스스로 남보다 뛰어남을 자부했는데 / 平生自負出人奇 적토마와 청룡도가 세상일과 어그러졌네 / 赤兎靑龍世事違 비장한 절개는 천지에 맹세할 만하였고 / 壯節有如天地在 깊은 계책은 귀신이 알기를 허여치 않았네 / 深謀不許鬼神知 삼분은 정히 위주를 붙들려는 뜻이었는데 / 三分政欲扶危主 구석은 무슨 까닭으로 유아를 가두었던고 / 九錫何緣獄幼兒 그 의열은 지금까지 향사를 오로지 받으며 / 義烈祗今專享祀 남은 위엄이 아직도 화이를 진동시키누나 / 餘威猶得震華夷 백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60A_0120_010_0470_2002_003_XML
Rec-2188 백사집_백사별집_5권_조천록_1599_0208 15990208 null 병부(兵部)에서 돌아온 이후로 오래도록 관중(館中)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전혀 소식을 통할 수가 없고, 성지(聖旨) 또한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으므로, 자못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형 군문(軍門), 만 경리(萬經理) 등의 제본(題本)이 연달아 와서야 비로소 정 주사(丁主事)가 서쪽으로 돌아왔음을 알게 되었고, 또 본국(本國)의 군민(軍民)들이 관왕묘(關王廟)에 붙인 방문(榜文)의 말을 보았는데, 이로 인하여 중조(中朝)의 논의가 흉흉해졌다. 우리들은 이 때문에 혹 변무(辨誣)의 일에 또 장차 별도로 다른 논의가 생길까 몹시 염려되어 서로 머리를 모으고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아주 괴롭게 나날을 보냈다. 백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60A_0120_010_0950_2002_003_XML
Rec-2189 번암집_3권_시_관묘습악 null 東溟波靜日華森。神馬嘶空不可尋。廟裏祇今花月夜。彩簫閒捻太平音。 동해 물결 고요하고 햇빛이 찬란하니 / 東溟波靜日華森 허공에서 신마 우나 찾아볼 수는 없네 / 神馬嘶空不可尋 사당에서 단지 지금 꽃 피고 달 뜬 밤에 / 廟裏祇今花月夜 채색 피리 한가롭게 제사 음악 연습하네 / 彩簫閒捻太平音 번암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43A_0070_010_0160_2018_002_XML
Rec-2190 병자일본일기_1636_1222 16361222 朝晴。食後雪作。日出發行。入日光山。則彌滿一洞。羅絡高低者。皆梵宮也。所謂山管橋千年杉。特一古跡而已。義成及兩僧。先到寺門等待。吾行旣至。伴行過石門二重。相距幾百餘步。而左右築石墻高四丈許。廣袤半馬場。其中列置寺宇。不知其幾處。而屋頭之覆壓墻外者。相接於首尾。脊瓦簷瓦。幷爲金色矣。行至石門。如我國紅門者。則雙柱對豎。圍各數把。鍊以八稜。上橫杠亦用石。高不下五丈。廣不過三間。刻其柱曰筑前州石。運來若專由水路。則不知其幾千里。而以吾等所經見之。水路一千八百餘里。陸路一千五百餘里。且內外三庭。鋪以龜文博石。長廣各布帛尺二尺餘。亦自筑前來云。其爲用功可知。又入銅雀門二重。抵所謂權現大儀安置之處。則其室制。正如關王廟。而伊豆守具公服先至以待矣。 아침엔 맑고, 식후엔 눈. 해돋이에 출발하여 일광산(日光山)에 드니, 골짝 가득히 높고 낮게 깔려 있는 것들은 다 불당(佛堂)이며 소위 산관교(山管橋)의 천 년 묵은 삼목(杉木)이 독특한 하나의 고적이었다. 의성 및 두 중은 미리 절 문 앞에 가 대기하다가 우리 일행이 도달하자 우리와 같이 이중으로 된 석문(石門)을 지났다. 〈두 석문은〉 몇백 보(步) 서로 떨어져 있는데 좌우에 쌓은 돌담은 높이 4장(丈)쯤에, 넓이는 반 마장이나 되고, 그 가운데에는 몇 곳이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절들이 깔려져 있는데, 담 밖을 덮은 집머리는 수미(首尾)가 서로 이어지고, 등성마루의 기와나 처마의 기와는 다 금빛으로 장식했다. 석문에 이르러 보니 마치 우리나라의 홍문(紅門)과 같은 것인데, 두 기둥은 마주 세운 둘레가 각 두세 아름씩이나 되고 8각(角)으로 다듬었으며 위에 가로지른 것 또한 돌을 사용했는데, 높이는 5장(丈)이 못 되지 않고 넓이는 세 칸에 지나지 않았다. 그 기둥에 ‘축전주석(筑前州石)’이라고 새겨졌는데, 운반해 올 때에 만일 수로만을 경유했다면 그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우리들이 지나온 것으로 계산하면 수로가 1천 8백여 리, 육로가 1천 5백여 리다. 또 안팎 세 뜰에는 거북 무늬의 큰 돌[龜文博石]을 깔았으며, 길이와 넓이가 각 포백척(布帛尺 포백 재는 자)으로 두 자 남짓한데, 또한 축전주에서 실어 왔다 하니, 그 힘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중으로 된 동작문(銅雀門)을 지나, 소위 ‘권현(權現)의 영혼을 모셨다’는 곳에 이르러 보니, 그 집 제도는 마치 관왕묘(關王廟)와 같았는데, 거기에는 이두수(伊豆守)가 공복을 입고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병자일본일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85A_0010_030_0220_2003_003_XML
Rec-2191 부연일기_1828_0510 18280510 重神崇佛。爲第一風俗。若一民之家。幷有家庙,關庙,火神庙,佛庙。家家盡然。家而有一家之庙。村而有一村之庙。邑而如是。國而如是。大是惡風也。 귀신을 중히 여기고 부처를 존숭하는 것이 첫째 가는 풍속이 되어 한 민가 같은 데에도 모두 가묘(家廟)ㆍ관왕묘(關王廟)ㆍ화신묘(火神廟)ㆍ불묘(佛廟)가 있어 집집마다 그러하였고, 집에는 한 집안의 사당이 있고, 마을에는 한 마을의 사당이 있으며, 고을에도 이렇고 나라 또한 이러하니, 아주 나쁜 풍속이었다. 부연일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7A_0020_030_0100_2004_009_XML
Rec-2192 상촌집_10권_시_남관왕묘송객유감 null 戊戌春。南關王廟成。天朝將官劉寅實董其事。固請宣祖大王親臨。宣祖大王命儒臣考出關王祠原係祀典與否。時晩翠吳公億齡爲副提學。余爲應敎。同直玉堂。考大明會典則關廟在山川各神之列。a071_392c春秋降香。以此具奏。翌日。宣廟駕如廟。躬行祭奠訖。天朝將官齊會祠下。備呈雜戲。都人飫觀。今十六年矣。適緣送客至廟。愴然有懷舊之感。 무술년 봄에 남관왕묘가 이루어졌는데 중국 장관(將官) 유인(劉寅)이 직접 그 일을 관리 감독하고서 선조대왕께 친림(親臨)하실 것을 굳이 요청하자, 선조대왕은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관왕의 사당이 본디 사전(祀典)에 들어 있는지의 여부를 상고해 내도록 하셨다. 그 당시 만취(晩翠) 오공 억령(吳公億齡)은 부제학이고 나는 응교(應敎)로 있었는데 옥당에 함께 숙직하면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상고해 보니, 관왕묘는 산천 각 신들의 대열에 들어 있고 봄가을에 향을 내리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그대로 아뢰었다. 이튿날 선묘께서 사당에 거둥하여 몸소 제전(祭奠)을 행하셨으며 중국 장관들이 일제히 사당 아래에 모여 있었으므로 그들을 위해 여러 가지 놀이를 연출하였는데, 도성 사람들이 실컷 구경하였다. 그런데 이제 16 년이 지났다. 때마침 손님을 전송하느라 사당에까지 이르고 보니 옛날 생각이 서글프게 떠올랐다. 상촌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86B_0110_010_0540_2002_002_XML
Rec-2193 서애집_16권_잡저_기관왕묘 null 余往年赴燕都。自遼東至帝京數千里。名城大邑及閭閻衆盛處。無不立廟宇。以祀漢將壽亭侯關公。至於人家。亦私設畫像掛壁。置香火其前。飮食必祭。凡有事必祈禱。官員新赴任者。齊宿謁廟甚肅虔。余怪之。問於人。不獨北方爲然。在在如此。遍於天下云。萬曆壬辰。我國爲倭賊所侵。國幾亡。天朝發兵救之。連六七載未已。丁酉冬。天將合諸營兵。進攻蔚山賊壘。不利。戊戌正月初四日退師。有遊擊將軍陳寅力戰中賊丸。載還漢都調病。迺於所寓崇禮門外山麓。創起廟堂一坐。中設神像。以奉關王。諸將楊經理以下各出銀兩助其費。我國亦以銀兩助之。廟成。上亦往觀之。余與備邊司諸僚。隨駕詣廟庭。再拜。其像塑土爲之。面赤如重棗。鳳目。髯垂過腹。左右塑二人。持大劍侍立。謂之關平,周倉。儼然如生。自是諸將。每出入參拜。皆曰。爲東國求神助卻賊。五月十三日。大祭廟中。云是關王生日。若有䨓風之異則神至矣。是日。天氣淸明。午後黑雲四起。大風自西北來。䨓雨並作。有頃而止。衆人皆喜曰。王神下臨矣。旣而又於嶺南安東,星州二邑建廟。安東則斲石爲像。星州土塑。而星州甚著靈異之跡云。未幾倭酋關白平秀吉死。倭諸屯悉皆撤去。此亦理之難測者也。豈偶然耶。昔苻堅入寇晉。謝安以㫌節旗鼓。禱於蔣子文廟。謝玄以八萬偏師。勝强秦六十萬。如八公山草木風聲鶴唳。說者皆以爲神助。况關王以英雄剛大之氣。其扶正討賊之志。貫萬古如一日。死而不滅。安知無神應耶。嗚呼烈哉。京師廟前。立二長竿懸兩旗。一書協天大帝。一書威震華夷。字大如椽。因風飄拂半空。遠近皆仰而見之。其帝號亦皇朝所追崇云。可見其尊崇之至也。 내가 왕년에 연도(燕都)에 갈 때, 요동으로부터 연경까지 수천 리에 이르는 사이에 유명한 성이나 큰 읍과 여염이 번성한 곳에는 모두 묘우(廟宇)를 세워 한의 장군 수정후(壽亭侯) 관공(關公)을 제사하고 인가에도 사사로 화상을 설치하여 벽에 걸어 두고 향을 피우며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제사하는 것이었다. 무릇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기도하고, 새로 부임하는 관리는 목욕재계하고 관왕묘에 나가 알현하는데 심히 엄숙하고 경건하였다. 내가 이상히 여겨 어떤 사람에게 물었더니, 북방뿐 아니라 곳곳마다 이같이 하니 천하가 다 똑같다고 하였다. 만력 임진년에 우리나라가 왜적의 침범을 받아 거의 망하려는 차에 중국이 군병을 발동하여 연 6, 7년을 도왔으나 끝나지 않았다. 정유년 겨울에 명장(明將)이 모든 군영을 합하여 울산에 웅거한 적을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여 무술년 1월 4일에 물러났다. 그중에 유격장군 진인(陳寅)이 있었는데 힘써 싸우는 도중에 적의 탄환을 맞고 실려 서울에 돌아와 병을 조리하였다. 그는 우거하고 있던 숭례문 밖 산기슭에 묘당 한 채를 창건하고 가운데에 관왕과 제장(諸將)의 신상(神像)을 봉안하였다. 경리(經理) 양호(楊鎬) 이하가 각기 은냥을 갹출하여 그 비용을 돕고, 우리나라도 은냥으로 도와서 묘를 완성시켰다. 주상께서도 몸소 그곳에 가 보실 때에 내가 비변사 여러 막료들과 더불어 수행하여 묘정에 나가 그 상에 두 번 절하였다. 상은 흙으로 빚어 만들었는데 얼굴의 붉기가 잘 익은 대추와 같고 봉(鳳)의 눈에다 수염을 길게 드리웠는데 배 밑까지 닿았다. 좌우의 소상(塑像) 2인은 큰 칼을 짚고 서서 모시고 있는데 관평(關平)과 주창(周倉)이라고 한다. 엄연히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이로부터 모든 장수들이 출입할 때마다 참배하며 우리 동국을 위하여 신의 도움으로 적을 물리쳐 달라고 빌었다. 5월 13일 묘에 크게 제사를 드렸는데, 이날이 관왕의 생신이라고 하였다. 만약 뇌풍(雷風)의 이변이 있으면 신이 이른 징조라고 했다. 이날 날씨가 청명하였는데, 오후에는 검은 구름이 사방으로 일어나 큰 바람이 서북쪽으로부터 불어오고 뇌우가 함께 오다가 잠시 후에 그쳤다.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면서 “왕신(王神)이 강림하였다.”고 하였다. 얼마 뒤 또 영남의 안동ㆍ성주 두 읍에 묘를 건립하였는데 안동의 것은 돌을 깎아 상을 새겼고, 성주의 것은 흙으로 빚었다. 그런데 성주의 상이 심히 영이(靈異)한 자취를 나타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왜추 관백 평수길(平秀吉)이 죽자 모든 왜군이 다 귀환하였으니, 이 역시 이치로써는 측량하기 어려운 일이나 어찌 우연한 일이라고만 하겠는가. 옛날 부견(苻堅)이 쳐들어와 도적질할 때 진(晉) 나라 사안(謝安)이 정절기고(旌節旗鼓)로 장자문(蔣子文)의 묘에 기도하였다. 그런 후에 사현(謝玄)이 8만의 군사로 강한 진(秦) 나라 60만 대군을 이겼다. 진 나라 군사들은 팔공산(八公山) 초목의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에도 적의 복병이 아닌가 하여 놀랄 정도였다. 말하는 자가 모두 신조(神助)라 하였다. 하물며 관왕은 영웅으로 강대(剛大)한 기개가 있고 올바른 편에 서서 적을 토벌한 뜻이 만고를 관철하기를 한결같은지라 죽어서도 멸하지 아니하니 신응(神鷹)이 없음을 어찌 알겠는가. 아, 장렬하도다. 명 나라 서울에 있는 묘 앞에는 두개의 긴 장대를 세우고 두 개의 깃발을 달았는데, 한 곳에는 ‘협천대제(協天大帝)’라 씌어 있고 한 곳에는 ‘위진화이(威振華夷)’라고 씌어 있었다. 그 글자의 크기가 서까래만 하여 바람이 불면 반공에 휘날려 멀리서나 가까이에서나 모두 우러러보게 된다. 또 그 대제의 호는 명 나라 조정에서 추숭(追崇)한 것이라고 하니, 가히 그 존숭(尊崇)이 지극함을 알 수 있겠다. 서애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24B_0170_010_0080_2005_002_XML
Rec-2194 서애집_16권_잡저_기이 null 癸卯春。京江露梁。有大石自水中起立於岸上他石上。又黃海道豐川海中。有石沈在水底。一日移立於他石上。又江原道襄陽洛山寺下。有二石自海中來閣於岸石上。又慶尙道慶州慈仁縣。有石起行數十步。其起時。衆皆見之。曲折往復如人樣。殊可怪。不知其爲何變。又咸鏡道海水赤濁膠粘。不利行舟。以水煮鹽。亦腥不可食。自北而東。至江原道通川,襄陽而止。凡七日。又京中西江人。一夜相驚。多奔避山谷。或有搬移東西過江者。問其由。以爲夜中有兵馬廝殺之聲。自京城而來。聞者傳相驚駭。疑有變如此。其後人疑南關王廟神靈所爲云。人心之不定類此。 계묘년 봄에 한강의 노량진에 큰 바위가 물 가운데로부터 불쑥 일어나서 강 언덕의 다른 돌보다 위로 솟았다. 또한 황해도 풍천 바다 가운데 물 아래로 잠겨 있던 바위가 하루는 옮겨 가 다른 돌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 아래에 바위 두 개가 바다 가운데로부터 나와서 언덕에 있는 돌 위에 앉아 있었다. 또한 경상도 경주 자인현(慈仁縣)에서는 돌이 일어나 수십 보를 걸어간 일이 있었다. 이때 뭇사람들이 다 보니, 구비를 치며 갔다 왔다 하는 것이 마치 사람모습과 같았다고 하니, 매우 괴이하여 무슨 변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에 함경도 바닷물은 붉고 탁하며 끈끈하고 달라붙어 배가 다니기 불편할뿐더러 물을 달여서 소금을 만들어도 비린내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다. 북으로부터 동쪽으로 강원도 통천(通川)ㆍ양양까지 걸쳐 약 7개월간이나 계속하다가 그쳤다. 그리고 경성의 서강(西江) 사람들이 하룻밤에는 서로 놀라며 산골로 피란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동서로 뿔뿔이 흩어져 강을 건너간 자도 있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밤중에 병마들이 서로 싸우는 소리가 경성으로부터 났는데 들은 자들이 전하여 서로 놀라 변이 있을까 의심하여 이렇게 된 것이라 했다. 그 뒤에 사람들은 남쪽에 있는 관왕묘의 신령이 한 짓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였다. 인심이 안정되지 못한 것이 대개 이런 유다. 서애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24B_0170_010_0140_2005_002_XML
Rec-2195 성소부부고_1권_시부_장진보관왕묘 null 門前古碣臥苔中。蕭颯叢林一畝宮。殿角幡幢明夕照。墻頭杉檜響凄風。丹靑畫壁雲雷壯。香火空堂鬼物雄。莫把紙錢招怨魄。杜鵑啼血野花紅。 문 앞의 옛 빗돌은 이끼 속에 누웠는데 / 門前古碣臥苔中 소조한 떨기 숲에 한 이랑 묘궁일레 / 蕭颯叢林一畝宮 전각이라 깃발은 저녁 노을 눈부시고 / 殿角幡幢明夕照 담 꼭대기 삼과 회는 찬 바람에 메아리치네 / 墻頭杉檜響凄風 단청한 그림 벽에 구름 뇌성 굉장하고 / 丹靑畫壁雲雷壯 향불 타는 빈 당에 괴물이 우람쿠나 / 香火空堂鬼物雄 지전으로 원백을 부르질랑 말아다오 / 莫把紙錢招怨魄 두견이 피를 울어 들꽃이 빨갛다네 / 杜鵑啼血野花紅 성소부부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92A_0020_010_0170_2000_001_XML
Rec-2196 성소부부고_16권_문부_칙건현령관왕묘비 null 萬曆三十年十月初一日。上召大僕臣筠。詣閤門敎曰。予以寡德。不克負荷先業。頃遭寇亂。流離顚越于外。不能自振。賴我皇上念累世忠貞之故。察寡躬守義抗賊之誠。謂不可坐視其亡。力排廷議。決策以討之。前後發卒數十萬。捐帑金累百萬。中國爲之騷然。而不之卹焉。迄復三京。俾寡躬獲保宗祧。而環數千里跂行喙息。得安其生。海波不揚。藩籬益固。此乃聖天子柔遠字小之仁。高出於百王。而亦莫非祖宗世篤恭順之效。寡躬何力焉。曩者東征將士。皆言戰日輒有關王神來現其靈。故平壤之捷。閑山島之戰。三路驅倭之役。皆著其異。協宣皇威。以大讋卉面而蕩其氛。卒挈三韓舊壤。歸之屬國。不可不祀以酬之。天子曰。然。亟以四千金付撫臣萬世德。立祠於朝鮮王京以享之。世德以天子命詔之曰。關公之靈。素著於中國。平倭之役。亦與有勞。本國固當尸祝之。天子先貤其金。王可奉以周旋。以行天子志。以報其惠也。予聞而惕若曰。王之德也。天子命也。予小子其敢忽諸。爰命司空臣。斫材於山。聚鐵冶陶瓦之具。工匠之流以赴之。擇地於興仁門東。命大臣董之。自庚子冬始其役。越二年春訖工。其塑像圖繪之容。殿堂廡宇門廠鼓鍾之樓。凡百餘間。悉依中國制。乃大享以落之。春秋烝禴。朔望香火。禮官修之。而差一校尉守之。請額於朝。今年奉聖旨。令以勅建顯靈昭德王關公之廟榜之門。仍賜祭一壇焉。予惟王卽漢壽亭侯關公羽雲長也。公忠烈義勇。事昭烈期復漢室。虎視漢沔上。威振華夏。曺操奸雄。懾而欲遷都以避。孫權小子。瑟縮不敢抗。其志之不終。乃天亡漢也。豈公咎也。是以。忠憤慷慨之志。死猶未沫。千載之下。尙能檄召神祇。驅駕風雷而顯其威靈。故高皇帝鄱陽之役。御舟膠淺。六師無人色。王乃能現其身雲中。回風而爇賊艦。遂定大業。天下之家俎而戶豆之。固當獲其報也。又能拯屬國之難。以紓我聖天子東顧之憂。而東土百萬生靈。受祉以安。宜東民之願崇廟宇。以俾祀於無窮也已。余仰惟天子之恩。王之德。不敢忘乎懷。思所以文之。以示後代。你職是視草臣也。其以予意刊之石。俾永不朽。 만력(萬曆 명 신종 연호) 30년(1602, 선조35) 10월 초하루에 상감께서 대복(大僕) 신(臣) 균(筠)을 부르시므로 합문(閤門)에 나아가니, 교서(敎書)를 내렸다. “나는 덕이 없어 선왕의 업을 감당하지 못하는 터인데, 근래에는 왜구(倭寇)의 침입을 받아 서울 밖으로 떠돌아 다니게 되어 국운을 스스로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皇帝 명 신종(明神宗))께서는 대대로 충성스러웠던 일을 생각하고, 또한 나의 의(義)를 지켜 외적에 대항하는 정성을 살피어 그들이 망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하고, 힘써 조정의 의논을 물리치고 외적을 치기로 결단을 내리셨다. 그리고 전후하여 병사 수십만을 보내고 탕금(帑金 임금이 사사로이 사용하는 돈) 수백만 금을 내놓아 중국이 떠들썩해도 개의하지 않으셨다. 그로 인하여 마침내 왕경(王京)을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 종묘를 다시 찾게 하였다. 그리하여 수천 리 강토 안에 서식하는 새와 짐승들까지도 평안히 살 수 있게 되었는가 하면, 바다는 잔잔하고 중국의 울타리인 우리나라가 더욱 견고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성스러운 천자께서 먼 지방을 어루만지고 작은 나라를 보살펴 주시는 자애로운 마음이 모든 왕보다 뛰어난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조종(祖宗)께서 대대로 황제에 대해 공순(恭順)을 독실히 하신 보람일 뿐이지, 내가 무슨 힘이 되었겠는가. 지난번 우리나라에 온 중국 장사(將士)들이 모두들 ‘전투가 있는 날이면 번번이 관왕(關王 관우(關羽)를 말함)의 신(神)이 나타났습니다. 그 까닭에 평양에서의 승리, 한산도(閑山島)의 싸움과 삼로(三路 충청ㆍ전라ㆍ경상도)에서 왜구를 쫓는 싸움에서 모두 그 이적을 드러내어 황제의 위엄을 선양하고 왜구들을 크게 겁내주고 악한 기운을 소탕하여 마침내 삼한(三韓) 옛 땅을 속국(屬國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말함)에게 돌려주게 되었으니, 제사지내어 보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천자께서는 ‘그렇다.’ 하고는 바로 사천 금(四千金)을 신하 만세덕(萬世德)에게 내리고 조선 왕경에 사당을 지어 제사 지내게 하였다. 세덕은 천자의 명으로 조서하기를 ‘관공(關公)의 혼령은 본디 중국에 나타났었는데 왜구를 평정하는 싸움에도 참여하여 본국을 위해 수고하였으니, 당연히 제사지내어 숭배해야 한다. 천자께서 먼저 그 비용을 보내셨으니 왕은 천자의 이 명을 받들고 주선하여 천자의 뜻을 시행하여 그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므로, 나는 이 명을 듣고 공손하게, ‘관왕의 덕과 천자의 명을 이 소자(小子 임금이 자신을 칭함)가 어찌 소홀히 할 것인가.’하고, 곧 사공(司空 공조 판서의 별칭)에게 명령하여 산에서 재목을 베어오고 야철(冶鐵)하는 기구와 기와 굽는 기구 및 기술자들을 모아 일을 착수하게 하였다. 그리고 흥인문(興仁門) 동쪽에 터를 잡고 대신에게 명하여 이를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년(1600, 선조33) 겨울에 역사를 시작하여 2년 후 봄에 완공하였다. 소상(塑像)과 그림 모양과 전당(殿堂), 무우(廡宇 곁채), 문창(門廠), 고종루(鼓鍾樓) 등 백여 간을 모두 중국의 형식을 따르게 하고, 크게 제사를 올려 낙성식을 하였다. 춘하추동의 제사와 초하루 보름의 향화(香火 제사지냄을 말함)는 예관(禮官)이 엄수하되 교위(校尉) 1명을 파견하여 이를 지켜보게 하였다. 그리고 명(明) 나라에 액자(額字)를 청하였는데, 금년에 황제의 뜻을 받들어 ‘현령소덕왕관공지묘(顯靈昭德王關公之廟)’라는 액자를 문에 달게 하고 제물 일단(一壇)을 내리셨다. 내가 생각건대, 왕이란 바로 한(漢) 나라 수정후(壽亭侯) 관공 우운장(關公羽雲長 운장은 관우의 자)이다. 공은 충렬과 의용으로 소열왕(昭烈王)을 섬기고 한실(漢室 한 나라를 말함)의 부흥을 기도하여, 한수(漢水) 위를 범같은 눈초리로 감시하니 그 위세는 중국에 떨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조(曹操) 같은 간웅도 두려워서 천도하여 피하려 하였고, 손권(孫權) 따위 어린애는 겁에 질려 감히 대항하지 못하였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곧 하늘이 한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지, 어찌 공의 탓이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공의 충성스럽고 강개(慷慨)한 뜻은 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아 천 년 뒤에 와서도 오히려 신기(神祇)를 불러모으고 바람과 우레를 몰아 그 위엄스러운 영험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옛날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가 파양(鄱陽 호수 이름. 강서성(江西省) 북쪽에 있음)에서 싸울 때 황제의 배가 얕은 바다에 막히게 되자 모든 군사들이 새파랗게 질렸었는데 이 때 왕이 구름 속에서 그 몸을 드러내면서 바람을 돌려주었기에 적함을 불살라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는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온 천하가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고, 호구마다 예를 올리는 것은 바로 그에 보답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난리도 구해 주어 천자의 동방에 대한 근심을 놓이게 하였고, 우리나라 백만 백성은 그 복을 받아 평안하게 되었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당을 지어 후세에 길이길이 제사지내게 하려는 것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나는 우러러 생각건대, 천자의 은혜와 관왕의 덕은 감히 잊지 못하겠다. 나의 이러한 생각을 글로 지어 후대에 보여 주려 한다. 너는 글 짓는 신하이니 나의 뜻을 돌에 새겨 길이 보존케 하라.” 성소부부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92A_0170_010_0010_2000_002_XML
Rec-2197 성호사설_9권_인사문_관왕묘 null 京都東南門外皆有關王廟柳西厓集載其本末許筠承命撰顯靈碑云東征將士皆言平壤之捷島山之戰三路驅倭之役皆著其異天子以四千金付撫臣萬世徳立祠於朝鮮既成請額扵朝奉聖旨以勑建顯靈昭徳王關公之廟榜之又云髙皇帝鄱陽之役御舟膠淺王能現其神回風而焚賊艦云云然則皇明之崇奉自鄱陽始而凡軍行所在祀之也祝允明關公廟記云公既沒蜀人祀之後遍于天下至宋時追封為武安王廟號義勇而道家者流乃復奉之為神將崇之為真君夫以羽為義勇則可又何關於淸凈無為之道家而崇信至此意者修鍊之術必須驅除鬼魅故然也宋之追封伏魔即其事也至錢謙益牧齋集有關聖帝君畫像賛謂之聖謂之帝則尤覺僣矣祝允明謂當曰漢前將軍廟斯為得之王世貞云隋開皇中役神鬼七日建泉寺宋政和中驅風雨剪蚩尤復河中塩政此信之之過荒恠弥甚何足與議㢤惟朱宗元之說最得其實宋之伏魔即以魔驅魔也魔性本欲奉己然顯其本相人豈事之故假古士名目現為神異使人仰望非真有關羽之神如此也此千古獨見也向聞有鬼祟者两鬼迭見一欲殺之一輒救止其實两皆作孽救非其真也羽之驅魔何以異是人既信服精神交感種種現恠莫非羽像怳惚神姦誰得以別之所謂宋時故事政和中宫中有祟有一道士揖上曰臣奉帝命来治此祟即召一金甲丈夫捉祟啗盡上問丈夫何人曰此崇寕真君關羽也問張飛何在曰今生扵相州岳家云云故武穆以飛為名云凡我國有廟又四處康津天將都督陳璘所建後別立一祠於其旁陳璘主壁李舜臣配南原則以天將李新芳蔣表毛承先配安東則天將薛虎臣所建有石像星州則天將毛國器所建 서울 동ㆍ남문 밖에는 다 관왕묘(關王廟)가 있는데, 《유서애문집(柳西厓文集)》에 그 본말(本末)이 실려 있다. 허균(許筠)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현령비(顯靈碑)를 지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동으로 출정(出征)한 장병들의 말이 ‘평양(平壤)의 승첩과 도산(島山)의 싸움과 삼도(三道)에서 왜놈을 몰아내는 전쟁에 있어 다 이적(異蹟)을 나타냈다.’ 하므로, 천자(天子)는 4천 금(金)을 무신(撫臣) 만세덕(萬世德)에게 주어 조선에다 사우(祠宇)를 세우게 하였다. 낙성(落成)을 보자 액호(額號)를 조정에 청하여 성지(聖旨)를 받들어 ‘칙건 현령소덕왕 관공지묘(勅建顯靈昭德王關公之廟)’로써 방(榜)을 걸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고 황제(高皇帝 명 태조(明太祖))가 번양(鄱陽)의 싸움에서 자신이 탄 배가 여울목에 붙었었는데, 관왕이 능히 그 신(神)을 나타내서 바람머리를 돌리어 적의 전함(戰艦)을 불태웠다…….”라 하였다. 그렇다면 명 나라에서 숭봉(崇奉)한 것은 번양으로부터 시작되어서 무릇 군대가 주둔해 있는 곳에는 다 제사하게 한 것이다. 축윤명(祝允明)의 관공묘기(關公廟記)에 이르기를 “공이 죽은 뒤에 촉(蜀) 나라 사람들이 제사하였는데, 그 후로 천하에 보급되어 송(宋) 나라 때에는 추봉(追封)하여 무안왕(武安王)으로 삼고 묘호(廟號)를 ‘의용(義勇)’이라 했으며, 도가(道家)의 유파(流派)에서는 다시 받들어 신장(神將)으로 삼고 높여서 진군(眞君)으로 삼았다.” 하였으니, 대범 관우(關羽)를 ‘의용’이라 한다면 옳거니와 또 무엇이 청정무위(淸淨無爲)를 주로 하는 도가와 관계된다 해서 존숭과 신앙이 이에 이르렀을까? 생각건대, 수련(修煉)의 술법(術法)이란 반드시 귀매(鬼魅)를 제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송 나라에서 복마제(伏魔帝)로 추봉 한 것이 바로 그 일이었다. 심지어 전겸익(錢謙益)의 《목재집(牧齋集)》 같은 데는 ‘관성제군 화상찬(關聖帝君畫像贊)’이 들어 있어 ‘성(聖)’이라 ‘제(帝)’라 일컬었으니 더욱 참람함을 알겠다. 축윤명의 “한전장군묘(漢前將軍廟)라 이르는 것이 정당하다.”는 그 말이 바로 정곡을 얻은 것이다. 왕세정(王世貞)은 말하기를 “수(隋) 나라 개황(開皇) 중에는 7일 동안이나 신귀(神鬼)를 부려서 천사(泉寺)를 세우게 했고, 송 나라 정화(政和) 중에는 풍우(風雨)를 구사(驅使)하여 치우(蚩尤)를 베고 하중(河中)의 염정(鹽政)을 회복하게 했다.”라 하였는데, 이는 신앙의 도가 너무 지나쳐서 황탄부괴(荒誕浮怪)가 더욱 심하니 어찌 족히 따질 것이 있겠는가. 오직 주종원(朱宗元)의 설이 가장 그 진신을 얻었다 하겠으니, 즉 “송 나라의 ‘복마(伏魔)’란 것은 곧 마귀로써 마귀를 몰아낸 것이다. 마귀의 특성이 본래 자기만을 떠받들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본상(本相)을 나타내면 사람들이 어찌 그를 섬기겠는가! 그러므로 옛선비의 명목을 빌려 현신(現身)하여 신이(神異)로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러보게 하는 것이니, 참으로 관우의 신이 있어 이와 같은 것은 아니다.”라 하였다. 이야말로 천고의 독특한 명견이라 하겠다. 전에 들으니, 귀신병이 든 자가 있어 두 귀신이 번갈아 보이는데, 한 귀신이 죽이려 들면 한 귀신은 문득 구해주곤 하지만 기실은 둘이 다 작해하는 것이요 구하는 것은 그 진실이 아니라 한다. 관우의 마귀 몰아내는 것도 어찌 이와 다르랴. 사람이 이미 일단 신복하여 정신이 서로 감응하게 되면, 종종 나타나는 괴이가 관우의 상(像)이 아닌 것이 없으리니 황홀한 신간(神姦)을 뉘라서 구별하리요. 이른바 송 나라 시대의 고사로서 “정화(政和) 중에 궁중에 귀수(鬼祟)가 있었는데, 한 도사(道士)가 상(上)께 읍(揖)하며 아뢰기를 ‘신이 상제(上帝)의 명령을 받들고 이 귀수를 다스리러 왔습니다.’ 하고, 곧 금갑(金甲) 입은 장부(丈夫)를 불러 귀수를 잡아오게 하여 씹어 없애 버리는 것이었다. 상이 ‘장부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도사가 아뢰기를 ‘이는 숭령진군(崇寧眞君) 관우입니다.’ 하므로 상이 ‘장비(張飛)는 어디에 있느냐?’ 하니, 도사는 ‘지금 상주(相州) 악(岳)씨의 집안에 태어났습니다…….’고 아뢰었다. 그래서 무목(武穆)이 ‘비(飛)’로 이름을 한 것이다.”라 하였다는 것이다. 무릇 우리나라에는 그 묘(廟)가 또 넷이 있다. 즉 강진(康津)의 것은 명 나라 장수 도독(都督) 진인(陳璘)이 세운 것인데, 그 후에 한 칸의 사옥(祠屋)을 그 곁에 따로 세우고, 진인을 주벽(主壁)으로 이순신(李舜臣)을 배향하였다. 그리고 남원(南原)에는 명 나라 장수 이신방(李新芳)ㆍ장표(蔣表)ㆍ모승선(毛承先)을 배향하였고, 안동(安東)의 것은 명 나라 장수 설호신(薛虎臣)이 세운 것으로 석상(石像)이 있고, 성주(星州)의 것은 명 나라 장수 모국기(毛國器)가 세운 것이다. 성호사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8A_0100_010_0370_2002_004_XML
Rec-2198 속잡록_3권_1630_0303 16300303 進慰使狀啓。近日賊勢。別無他餘聲息。大陣如前。入據錦城。分屯灤暉等處。祖摠兵分送五管將等。斬獲首級。連絡不絶。又有招頭營副將王維城。前後斬獲至於一百三十一顆。二月初七日。五營將等。馳入建昌府。斬叛守城。解送首惡白衍慶等。閣部喜甚。驗功論賞。懸首街橋。甚於㺚賊。所以然者。衍慶以白養粹姓親。聽其指揮。首倡附賊。强㥘主將馬光遠削髮。光遠哭別妻子。不知去處云。同月十一日。奴賊來攻建昌城。燒燬關廟。劉遊擊大開城門。縱兵出射。斬獲五十三級。奪回人畜。不知其數。殺賊之功。無與此比。朝廷加祖摠銜太子少保。賞銀四萬兩。又書壯烈忠膽。太子褒加。又送三千兩銀。朝廷明知祖將之大功矣。袁軍門尙未蒙恩。奴賊差人賫書請和。前後三度。閣部卽斬使焚書。江東軍兵曾有撤回之奇。而閣部派送諸將。領船載回。住札雙島等處。以爲擣巢之計云。臣等觀勢。晦間乘船發行計料。 진위사(進慰使 진하사(進賀使)가 정당하다)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근일 적의 형세를 보면 별로 다른 소식은 없고 대진(大陣)의 본부는 전과 같이 금성(錦城)에 웅거하고 있으며, 분대는 난(灤)ㆍ휘(暉) 등지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습니다. 조 총병이 오영장(五營將) 등을 나누어 보내 적의 머리를 많이 베었다는 연락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또 초두영 부장(招頭營副將) 왕유성(王維城)이 전후로 적을 잡아 죽인 머리 수가 1백 31개나 되었다 합니다. 2월 7일에는 오영장 등이 건창부(建昌府)에 달려가서 반적(叛賊)을 참수하고 성을 지키며 악의 괴수 백연경(白衍慶) 등을 죽여서 보내니, 각부가 심히 기뻐하며 그 공을 헤아려 상을 주고 적의 머리를 가교(街橋)에 달았습니다. 이 적이 악하기가 달적(㺚賊)보다 더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연경은 백양수(白養粹)와 동성(同姓)의 친족으로 양수의 지휘를 받아 앞장서서 적에게 붙었으며 주장(主將) 마광원(馬光遠)을 강제로 협박하여 광원의 머리털을 되놈과 같이 빡빡 깎으니, 광원이 통곡하면서 처자를 이별하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달 11일에 오랑캐들이 와서 건창성을 공격하고 관왕묘(關王廟)를 불사르는데, 유 유격(劉遊擊)이 성문을 활짝 열고 병정을 풀어 사격하여 53급의 적을 베고 사람과 가축들을 빼앗아 돌려온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적을 죽인 공로가 이에 견줄 자가 없었으므로 조정에서는 조 총병에게 태자소보(太子少保)의 높은 벼슬을 주고 상으로 은자 4만 냥을 내렸으며, 도 장렬충담(壯烈忠膽)이란 글자를 써서 주고 태자가 또 은자 3천 냥을 포상하니, 조정에서는 조 장군(祖將軍)의 큰 공은 명백히 알아주었으나 원 군문(袁軍門)은 아직도 은혜를 받지 못하고 옥에 갇혀 있다 합니다. 오랑캐들이 글을 써가지고 사람을 보내서 화친하기를 청한 것이 전후로 세 번이나 있었으나 각부가 그 때마다 곧 사자를 죽이고 글을 불태워버렸다 합니다. 강동(江東) 방면의 군병들은 일찍이 철회한다는 기별이 있더니 각부가 여러 장수를 파견하여 배에 실어다가 쌍도(雙島) 등 여러 섬에 주둔케 해서 적의 소굴을 소탕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신들은 형세를 봐서 이달 그믐 사이에 배를 타고 떠나가려 합니다. 속잡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33A_0030_000_0040_2002_008_XML
Rec-2199 속잡록_4권_1636_1214 16361214 朝廷令戶部官入送京城取武庫之物。以爲和好之資。又令各一員入城。守其所主之物。賊兵自慕華館至南關廟結陣。又五六營留城中。出東大門外結陣。旗麾劍戟。鼓樂叫噪。驚惑視聽。城中人物。一不侵害。出入來往專不禁斷。只見牛馬則奪之。美女則執之。 조정에서는 호부(戶部)의 관원을 서울로 들여보내어 무고(武庫)의 물품을 가져와 화친하는 물자로 삼게 하고 또 각 부의 관원 한 사람씩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어 주관하는 물자를 지키게 하였다. 적병이 모화관(慕華館)으로부터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와서 진을 치고 또 5ㆍ6진영은 성 안에 머무르다가 동대문 밖에 나와 진을 쳤는데, 기치와 검극(劍戟)을 휘두르며 군악으로 떠들어대서 이목을 놀라 당황하게 하며, 성중의 인물에 대해서는 조금도 침해하지 아니하고 출입 내왕을 전혀 금하지 아니하되, 다만 소ㆍ말을 보면 빼앗고 어여쁜 여자는 잡아갔다. 속잡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33A_0040_000_0010_2002_008_XML
Rec-2200 속잡록_4권_1636_1230 16361230 大雪。軆府以夜氣陰霾。令將士合番守堞。賊之初到。造精舍于所破昆箭串兩處。築三層臺。至是汗居東關廟。往來于兩處。僭侈之具。不可盡言。 큰눈이 내렸다. 체부(體府)는 밤기운이 음산하고 어두우므로 장병에게 번을 합쳐 성을 지키게 하였다. 적이 처음 당도하여 정사(精舍)를 소파곤(所破昆)ㆍ살곶이[箭串] 두 곳에다 짓고 삼층의 대를 쌓았는데, 이에 이르러 한(汗)은 동관왕묘(東關王廟)에 거처하고 두 곳을 왕래하였다. 그 사치스러운 도구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속잡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33A_0040_000_0010_2002_008_XML
Rec-2201 신증동국여지승람_2권_동국여지비고_경도 null null 남관왕묘(南關王廟) 숭례문 밖 도저동(桃楮洞) 산기슭에 있다. 선조 31년(1598)에 명 나라 장수 진인(陳寅)이 창건하였는데, 정전은 푸른 기와로 덮었다. 관왕(關王)을 향사하는데, 동쪽 배위는 왕보(王甫)ㆍ조루(趙累)요, 서쪽 배위는 주창(周倉)ㆍ관평(關平)이다. ○ 임진년과 정유년의 난리에 신령이 나타나 싸움을 도운 이적이 있으므로 창건하였다. 흙을 빚어 형상을 만들고 또 한 작은 금상(金像)을 봉안하였는데 바로 중국에서 받들고 온 상(像)이라 한다. ○ 혹 말하기를, 좌우쪽에 관평ㆍ주창의 소상을 모셨다고도 한다. 묘 앞에 두 기를 세웠는데, 하나는 협천대제(協天大帝)라 쓰고, 하나는 위진화하(威鎭華夏)라고 썼다. 영종이 친히 현령소덕왕묘(顯靈昭德王廟)라고 써서 현판을 달라고 명하고, 친히 묘기(廟記)를 지었다. ○ 명 나라 조정의 통판(通判) 도량성(陶良性)이 비기(碑記)를 지었으며, 허균(許筠)이 비문을 지었다. 동관왕묘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다. 만력(萬曆 명 나라 연호) 임인년, 곧 선조 35년에 명 나라 조정에서 순무하는 신하[撫臣] 만세덕(萬歲德)을 명하여 창립하였다. 소상은 흙을 빚고 금을 칠하여 그림을 그렸으며, 전무(殿廡)와 문창(門廠)이 모두 중국 제도를 모방하였다. 혹은 동상(銅像)이라고도 한다. 명 나라 조정에서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칙건 현령소덕 관공지묘(勅建顯靈昭德關公之廟)라고 하였다. ○ 매해 경칩일과 상강일에 제사드리는 것은 남묘(南廟)와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B001A_0030_020_0010_2000_001_XML
Rec-2202 신증동국여지승람_3권_동국여지비고_한성부 null null 자문감(紫門監)의 9영선(營繕)이 궐내ㆍ궐외 각처의 수리하는 일을 나누어 맡아 한다 시어소(時御所)와 각 전(殿)과 각 당(堂) 안의 각 관청 청사의 수보(修補)와 차비문(差備門) 안의 각종 기구의 제조와 내빙고(內氷庫)의 공상(供上)을 맡아 한다. ○ 9영선은 지금 5소장(所掌)으로 되었다. 1소장은 종묘ㆍ육상궁(毓祥宮)ㆍ연우궁(延祐宮)ㆍ장생전(長生殿)ㆍ독소(纛所)ㆍ종친부(宗親府)ㆍ중학ㆍ돈녕부 조방(敦寧府朝房)ㆍ의빈부(儀賓府)ㆍ홍문관 조방(弘文館朝房)ㆍ정업원(淨業院)ㆍ선잠단(先蠶壇)ㆍ첨성대(瞻星臺)ㆍ목멱당(木覓堂)ㆍ마조단(馬祖壇)ㆍ하순청(下巡廳)이며, 2소장은 사직ㆍ덕흥대원군궁(德興大院君宮)ㆍ광명전 시어소ㆍ요령막(搖鈴幕)ㆍ경복궁ㆍ기로소(耆老所)ㆍ의정부 조방ㆍ돈녕부(敦寧府)ㆍ이조ㆍ동학ㆍ유하정(流霞亭)ㆍ종각ㆍ선농단(先農壇)ㆍ양정재(養正齋)ㆍ하함춘원(下含春苑)ㆍ좌순청(左巡廳)이며, 3소장은 영희전(永禧殿)ㆍ저경궁(儲慶宮)ㆍ선원록청(璿源錄廳)ㆍ대빈궁(大嬪宮)ㆍ남별궁ㆍ봉상시(奉常寺)ㆍ신당(神堂)ㆍ북단(北壇)ㆍ여단(厲壇)ㆍ내자시(內資寺)ㆍ권초각(捲草閣)ㆍ상함춘원(上含春苑)ㆍ중추부(中樞府)ㆍ예조ㆍ서학ㆍ내섬시(內贍寺)ㆍ우모가가(牛毛假家)ㆍ상하당직(上下當直)이며, 4소장은 경모궁(景慕宮)ㆍ경우궁(景祐宮)ㆍ동관왕묘ㆍ경희궁ㆍ12별당ㆍ어의본궁(於義本宮)ㆍ의금부ㆍ의정부 반열조방(議政府班列朝房)ㆍ사간원 조방ㆍ모화관(慕華館)ㆍ남학ㆍ상림원(上林苑)ㆍ승문원(承文院)ㆍ우사단(雩祀壇)ㆍ한강단(漢江壇)이며, 5소장은 성균관ㆍ창의궁(彰義宮)ㆍ융례전(隆禮殿)ㆍ문희묘(文禧廟)ㆍ남관왕묘ㆍ전계대원군궁(全溪大院君宮)ㆍ선무사(宣武祠)ㆍ연서비각(延曙碑閣)ㆍ차동비각(車洞碑閣)ㆍ남단(南壇)ㆍ사한단(司寒壇)ㆍ의정부 중추부 조방ㆍ사헌부ㆍ내각 조방(內閣朝房)ㆍ방마원(放馬苑)ㆍ전생서(典牲署)이다. ○ 무릇 영선하는 곳은 맡은 관원이 본사(本司)의 관원과 함께 나가 검거(檢擧)한다. ○ 궁장(宮墻)은 도성의 준례에 따라 3군문에 나뉘어 속하여 허물어진 곳을 돌로 쌓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B001A_0040_020_0010_2000_001_XML
Rec-2203 신증동국여지승람_24권_경상도_안동대도호부 null null 관왕묘(關王廟) 서악(西岳) 동대(東臺)에 있다. 선조 무술년에 천장(天將) 설호신(薛虎臣)이 세웠다. 석상(石像)을 묘정비(廟庭碑)로 세웠다. 신증동국여지승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B001A_0250_010_0010_2000_003_XML
Rec-2204 신증동국여지승람_28권_경상도_성주목 null null 관왕묘(關王廟) 선조 정유년 천장(天將) 제국기(第國器)가 세웠는데, 영조 정미년에 남정(南亭) 아래로 옮겨 세웠다. 신증동국여지승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B001A_0290_010_0020_2000_004_XML
Rec-2205 연려실기술_25권_인조조고사본말 null null 명길이 치계하기를, “저 오랑캐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행차한 것은 오로지 화친하는 일에 있는데, 너희 나라의 국민이 모두 흩어지고 심지어는 국왕이 파천하였으니 마음이 매우 편치 못하다. 만일 화친하려고 한다면 모름지기 왕자와 대신과 척화(斥和)하는 사람을 보내야 한다. 그러면 마땅히 여기서부터 돌아갈 뿐이다.’ 합니다.” 하였다. 오랑캐가 순한 말로 우리를 달래고서 한(汗)에게 사람을 보내 대병(大兵)을 청하려는 것이었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깨닫지 못하였다. 절대로 살육하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온 조정이 자못 믿어, 호부의 관원을 보내 서울에 들어가 화물(貨物)을 취해 화친 용도에 사용하도록 하고, 또 각 사(各司)로 하여금 1원씩 성에 들어가 간수하게 하였다. 이때 적병은 모화관에서부터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이르기까지 진을 치고, 또 동문 밖에 5, 6개의 병영을 만들어 기치와 창칼을 나열하고 군악이 떠들썩하여 보고 듣는 이를 놀라고 의혹스럽게 하였으나, 성중의 사람은 침해하지 못하게 하고 출입과 왕래도 전혀 금지시켰는데, 다만 우마(牛馬)를 보면 빼앗아가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붙잡아 갔다. 연려실기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260_010_0040_2002_006_XML
Rec-2206 연려실기술_34권_숙종조고사본말 null null 그때 김익훈이 매를 맞아 죽음에 그 시체를 의금부 앞에 두었더니, 원수측 사람들이 서로 시체를 찢으려고 하였다. 널을 띄우던 밤에 비가 오고 어두웠는데, 원수측에서 세 곳에 모여 엿보고 있었다. 김씨측에서도 많은 사람이 모여서 어둠을 틈타 남몰래 동관왕묘(東關王廟) 앞에 이르렀는데, 그때 원수측의 습격을 당하였으나, 김진서(金鎭瑞)가 칼을 휘둘러 겨우 빠져나왔다. 묘현(墓峴)에 이르러 제사지내고 불을 끄고 암장하여 평지로 만들어 두고, 그 아들 만채(萬埰)는 앞서 신주를 안고 귀양 지로 출발하였다. 경오년 1월에 김익훈의 훈록(勳錄)을 깎았다. 어떤 무인이 제물(祭物)을 가지고 암장한 근처 마을에 와서 여러 날을 머물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광남(光南 익훈(益勳)) 집의 옛 부하로 많은 은혜를 입었기에 늘 한번 치전(致典)하려고 하였으나 장사지낸 곳을 알지 못하였다. 이제 제수를 갖추어 왔으나 버리고 가는 수밖에 없다.”고 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 집 늙은이가 진정으로 그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는 장사지낸 곳을 알려주고, 밤에 함께 가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물은 모두 늙은이에게 주고 가버렸다. 5, 6일 지난 뒤에 늙은이가 그곳에 까마귀와 솔개가 모여드는 것을 보고 가서 보았더니, 시체를 파내어 땅에 버린 채 머리는 없고, 옷ㆍ이불과 널은 모두 불타버렸다. 익훈의 집에서 듣고 다시 옷ㆍ이불을 갖추어 고쳐 염하여 다른 곳에 이장하였다. 연려실기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350_010_0090_2002_008_XML
Rec-2207 연려실기술별집_4권_사전전고_제사 null null 관왕묘(關王廟)는, 하나(남묘(南廟))는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고, 하나(동묘(東廟))는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는데, 안무왕(安武王) 관우(關羽)를 향사하였다. 남묘(南廟)는 흙으로 만든 소상(塑像)이며, 동묘(東廟)는 구리쇠로 만든 동상(銅像)이다. 경칩(驚蟄)과 상강(霜降)일에 제사지내고 축문에는 ‘조선 국왕’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란 때에 관우의 신령이 여러 번 나타나 신병(神兵)으로써 싸움을 도와주어 명 나라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평양의 싸움에서 이긴 것과 도산(島山)에서의 싸움과, 삼도(三道)에서 왜병을 구축할 때 관우의 신령이 늘 나타나 음조(陰助)하였다.” 하였다. 행주(幸州) 싸움에서 이길 때에도 신병이 나타났다 한다. 중국에는 관왕묘가 없는 곳이 없으니 이것은 세상에 전하기를, “고황제(高皇帝 명(明) 나라 태조(太祖)) 때에 관우의 신령이 꿈에 나타나서 음호(陰護)한 공이 있었으므로 온 나라가 모두 관우를 제사지냈다.” 한다. 정유년 겨울에 명 나라 장수가 울산(蔚山)의 적진을 공격하다가 불리하게 되니, 무술년 1월에 퇴병하였는데 명 나라 장수 유격(遊擊) 진인(陳寅)이 힘써 싸우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진 것을 싣고 서울로 돌아와서 치료하면서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 산기슭에다가 사당 한 채를 창건하고 그 가운데 신상(神像)을 설치하여 관공(關公 관우)을 모셨더니 장수 양호(楊鎬)를 비롯하여 모든 장수가 은(銀)을 내어 그 비용을 도왔고, 우리나라에서도 또한 은으로 도왔다. 그 사당이 낙성되자 선조(宣祖)께서도 가서 보았는데, 비변사(備邊司)의 모든 관료들이 임금의 행차를 따라 사당 앞뜰에 나아가서 재배하였다.그 신상은 흙으로 만든 것으로서 낯은 진한 대추[重棗]와 같이 붉고, 봉(鳳)의 눈이며, 수염은 배까지 드리웠으며, 그 좌우에 소상(塑像) 둘이 큰 칼을 가지고 모시고 서 있는데 관평(關平 관우의 양아들)과 주창(周倉 관우의 부하 장수)이라고 이르며, 의젓하여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이로부터 모든 장수가 출입할 때마다 참배하였으며, 모두 동국을 위하여 신령의 도움으로 적을 물리치기를 빌었다. 5월 13일에 사당에서 큰 제사를 지냈는데, 이날은 바로 관왕의 생일로 만일 우레나 이상한 것이 있으면 이는 관왕의 신령이 이른 것이라고들 하였다. 이날의 일기가 청명하다가 오후에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큰 바람이 서북쪽으로부터 불어오며 우레 소리와 아울러 소나기가 오다가 조금 후에 그쳤다. 뭇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관왕의 신령이 하림한 것이다.” 하였다. 그 후에 바로 또 안동(安東)과 성주(星州) 두 고을에 관왕묘(關王廟)를 세웠는데, 안동에서는 나무를 깎아서 신상을 만들었고, 성주에서는 흙으로 소상을 만들었는데, 성주에서는 신령의 이상한 흔적이 현저하게 나타났다고 한다. 얼마 안 되어 왜놈의 추장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고 주둔해 있던 모든 왜병이 철수해 갔으니, 이것 또한 이치로는 측량하기 어려운 일이다.옛날에 부견(苻堅)이 진(晉) 나라를 침범해 왔을 때, 진 나라 사안(謝安)이 정절(旌節 대장에게 준 표신(標信))과 기고(旗鼓 군기와 북)로써 장자문(蔣子文)의 사당에 가서 빈 일이 있었는데, 뒷날 사현(謝玄 사안(謝安)의 조카)의 대승을 말하는 자는 “장자문의 신령이 도운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하물며 관왕의 강대(剛大)한 기운으로 어찌 신령의 영험이 없었을까보냐. 관왕묘 앞에 두 개의 긴 장대(長竿)를 세우고 한 장대에는, ‘하늘을 돕는 큰 임금[協天大帝]’이라 쓰고, 다른 한 장대에는, ‘위엄이 중국에 떨쳤다[威辰華夏]’고 썼는데, 그 글자가 서까래와 같이 굵어 바람으로 인하여 반공에 휘날려 멀고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쳐다 보았다. 서울 서강(西江)에 사는 사람들이 어느 날 밤에 모두 놀라 많은 사람들이 산골짜기로 피해 달아나고, 혹은 세간을 싣고 동서로 이사하기도 하였다. 서강을 지나던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밤중에 병마(兵馬)가 서로 죽이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말하여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듣고 서로 놀라고 전파하며 무슨 변이 있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그 뒤에 사람들이 의심하기를 이것은 남관왕묘의 신령이 한 일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한다. 만력(萬曆) 30년에 명 나라의 신종황제(神宗皇帝)가 4천 금(金)을 무신(撫臣) 만세덕(萬世德)에게 부쳐서 조선 서울에 관왕묘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그 조서에 이르기를, “관공의 신령이 본래 중국에서 나타났었는데, 왜란을 평정하는 역사에도 뚜렷한 도움을 받았다 하니, 조선에서도 당연히 신주를 모셔야 한다.” 하였다. 이에 동대문 밖에 땅을 택하여 대신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하였는데, 경자년부터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3년 만인 봄에 준공하였다. 그 소상(塑像)은 그림의 모양에 의한 것이며, 전각(殿閣)ㆍ행랑ㆍ문간ㆍ쇠종과 북을 설치하여 놓은 것이 무릇 백여 칸이나 되는데, 모두 중국의 제도에 의한 것이다. 편액(扁額)에 쓸 것을 명 나라 조정에 청하여 명 나라 임금의 뜻을 받아 ‘현령 소덕왕 관공의 묘[顯靈昭德王關公之廟]’라고 세웠다. 허균(許筠)이 왕명을 받들어 관왕묘 비문을 지어 올린 것은 뒤에 결국 세우지 아니 하였다. 숙종 신미년에 숙종이 지나는 길에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어갔는데, 좌의정 목내선이 아뢰기를, “마땅히 주 무왕(周武王)이 상용(商容)의 정문[閭]을 지나가다가 구부리고 경의를 표시한 식례(式禮)를 모방하여 관우묘에 식례를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우의정 민암(閔黯)이 아뢰기를, “배례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사오며 식례도 부당하옵니다. 손을 들어서 읍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암(黯)의 의논을 따랐다. 신미년에 또 남묘(南廟)에도 지나는 길에 들어갔는데, 전과 같이 읍을 행하였다. 경인년에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관왕묘에 배례를 하지 않고 읍을 하는 것이 과연 예법으로 보아 잘못된 것이 없겠는가. 선조(宣祖)께서 관왕묘에 친히 제사를 지내실 때에는 반드시 읍례는 행하지 아니하셨을 것이다.” 하니, 좌의정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그때는 명 나라 장수와 함께 가셨으니 혹 배례를 행하셨을 것이오나, 지금까지도 반드시 영구히 준수할 것은 아닙니다. 관왕은 본래 연대가 다른 명장으로 선성(先聖)이나 선사(先師)와는 차이가 있어 읍을 행하는 이외에 다른 예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선조실록(宣祖實錄)》을 상고하여 내게 하니 실록에, “선조는 재배를 행하였다.”고 되어 있었다. 임금이 명하기를, “앞으로는 이에 따라 배례를 행하라.” 하였다. 영종(英宗 영조(英祖)) 정미년에 임금이 관왕묘에 임어하여 재배의 예를 행하였다. 관왕묘는 또 전라도 강진군(康津郡) 고금도(古今島)에 있으니, 선조 정유년에 명 나라의 도독(都督) 진린(陳璘)이 창건한 것이다. 숙종 갑자년에 다시 수리하고 따로 한 사당을 그 곁에 세우고 진린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이순신(李舜臣)을 배향으로 모셨다. 관왕묘의 하나는 안동부(安東府)에 있는데, 선조 무술년에 진정영도사(眞定營都司) 설호신(薛虎臣)이 창건하고 석상을 봉안하였다. 처음에는 안동부 성문 안 북산 꼭대기에 있었고, 또 석비(石碑)를 세우고 임진왜란 때 명 나라 장병이 동으로 나와 조선을 구원하고, 왜군을 정벌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 뒤 병오년에 서악(西嶽)의 동대(東臺)에 옮겼다. 관왕묘의 하나는 성주목(星州牧)에 있다. 선조 정유년에 명 나라 장수 모국기(茅國器)가 창건한 것으로서, 여기에는 흙으로 만든 소상(塑像)이 있는데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매우 현저하게 나타났다. 처음에는 성문 밖에 있었는데, 영종 3년에 남정(南亭) 아래로 옮겨 세웠다. 관왕묘의 또 하나는 남원부(南原府)의 성(城) 서문 밖에 있는데, 선조 기해년 사이에 명 나라 도독 유정(劉綎)이 창건한 것으로서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숙종 42년에 신상(神像)을 고쳐 세웠는데, 모두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고, 명 나라의 총부중군(摠府中軍) 이신방(李新芳)과 총부천총(摠府千摠) 장표(蔣表)와 총부천부(摠府千夫) 모승선(毛承先)을 배향하였다. 숙종 37년에 명을 내려 여러 도에 있는 관왕묘의 제사를 선무사(宣武祠)의 예에 따라 경칩과 상강에 향과 축문을 내려보내 본도에서 제사를 행하도록 하였다. 연려실기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430_010_0010_2002_009_XML
Rec-2208 연려실기술별집_4권_사전전고_서원 null null 강진(康津) 서봉서원(瑞峯書院) 만력 경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후백(李後白)ㆍ백광훈(白光勳)ㆍ최경창(崔慶昌), 월남영당(月南影堂) : 이의경(李毅敬) 고금도(古今島)의 관왕묘(關王廟)에 진린(陳璘)과 이순신을 배향하였다. 제사조(諸祀條)에 들어 있다. 연려실기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430_010_0040_2002_009_XML
Rec-2209 연려실기술별집_15권_천문전고_재변상서 null null 서울 안 서강(西江) 사람들이 밤에 서로 놀라서 산골로 많이 달아나 피하였고, 혹은 동ㆍ서로 집을 옮기는 자도 있었다. 서강을 지나는 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말하기를, “밤중에 군사와 말이 서로 죽이는 소리가 서울로부터 들려왔다.”고 하여, 이를 들은 사람이 서로 전하며 놀라고 해괴히 여겨 무슨 변이 있는가 의심하였다. 그 뒤에 사람들이 “남관왕묘(南關王廟) 관우(關羽)의 신령이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으니 인심의 불안하기가 이와 같았다. 연려실기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540_010_0060_2002_011_XML
Rec-2210 연려실기술별집_16권_지리전고_산천형승 null null 영호루(映湖樓) 낙동강의 원류가 태백산의 황지(黃池)에서 나와 남쪽 예안에 이르러 동쪽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여기에 와서 비로소 커지면서 굽이쳐 돌아 호수가 된다. 무협(巫崍)이 그 왼쪽에 벌여 있고, 성산(城山)이 오른쪽에 버티고 있다. 누각의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누각의 북쪽에 신라 때의 옛 절이 있는데 절의 정전이 들 가운데 높다랗게 서 있다. 서쪽에는 관왕묘(關王廟)의 석상이 있다. 연려실기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550_010_0040_2002_011_XML
Rec-2211 연암집_7권_별집_영처고서 null 雩祀壇之下。桃渚之衕。靑甍而廟。貌之渥丹而鬚儼然。關公也。士女患瘧。納其牀下。𢥠神褫魄。遁寒祟也。孺子不嚴。瀆冒威尊。爬瞳不瞬。觸鼻不啑。塊然泥塑也。由是觀之。外舐水匏。全呑胡椒者。不可與語味也。羡鄰人之貂裘。借衣於盛夏者。不可與語時也。假像衣冠。不足以欺孺子之眞率矣。 우사단(雩祀壇) 아래 도저동(桃渚洞)에 푸른 기와로 이은 사당이 있고, 그 안에 얼굴이 붉고 수염을 길게 드리운 이가 모셔져 있으니 영락없는 관운장(關雲長)이다. 학질(瘧疾)을 앓는 남녀들을 그 좌상(座牀) 밑에 들여보내면 정신이 놀라고 넋이 나가 추위에 떠는 증세가 달아나고 만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아무런 무서움도 없이 그 위엄스러운 소상(塑像)에게 무례한 짓을 하는데, 그 눈동자를 후벼도 눈을 깜짝이지 않고 코를 쑤셔도 재채기를 하지 않는다. 그저 덩그러니 앉아 있는 소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를 통해 보건대, 수박을 겉만 핥고 후추를 통째로 삼키는 자와는 더불어 그 맛을 말할 수가 없으며, 이웃 사람의 초피(貂皮) 갖옷을 부러워하여 한여름에 빌려 입는 자와는 더불어 계절을 말할 수가 없듯이, 관운장의 가상(假像)에다 아무리 옷을 입히고 관을 씌워 놓아도 진솔(眞率)한 어린아이를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연암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68A_0070_010_0090_2006_002_XML
Rec-2212 연원직지_1권_출강록_1832_1123 18321123 距所舍。不數十武。有關帝廟。蓋其俗崇奉關帝。殆家尸戶祝。而上自帝都。至於市墟村落。皆建廟安塑像。其來已久。與正副使聯步往見。廟門外對立十餘丈紅柱。雕墻刻桷。已非我國之所有。爲屋凡五。皆有神像。第一安四五鬼像。第二安一座女像。主者謂以碧霞元君。卽泰山神之女也。左右各安女像。乃其侍女云。第三安關帝像。扁曰萬古一人。第四安一座黑面神像。扁曰龍王宮。第五又安關帝像。卓前排四神像。外門兩傍。各立赤兔馬。如我國關廟之制。內扁曰富國裕民。外扁曰財神廟。以關帝而稱財神。大不可也。或曰財神者。比干也。以比干之忠直而死爲財神。何也。且安排節次。與關廟一樣。抑何義也。庭立一碑。刻曰萬古流芳。其下列書檀越人姓名及施財多少之數。蓋道光辛卯新建也。第三屋旣安關帝。則又此新刱。未知爲何意。 사관에서 수십 보 되지 않는 곳에 관제묘가 있다. 대개 그곳 풍속이 관제(關帝)를 높이 받들어 거의 집집마다 모신다. 위로 국도(國都)로부터 시가나 촌락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당을 세우고 초상을 봉안(奉安)하니,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정사, 부사와 더불어 같이 가 보니, 사당문 밖에 10여 길의 붉은 기둥[紅柱]을 마주 세웠으며, 담장을 아로새기고 서까래를 조각하여 우리나라에 있는 것과 달랐다. 집은 무릇 5칸인데 모두 신상(神像)을 두었다. 제일 첫 칸에는 4, 5개의 신상을 봉안하고, 둘째 칸에는 하나의 여상(女像)을 봉안하였다. 주관하는 사람이 벽하원군(碧霞元君)은 곧 태산신(泰山神)의 딸이고, 좌우에 각각 봉안한 여상은 바로 그 시녀라고 하였다. 셋째 칸에 관제의 초상을 봉안하고 편액(扁額)을 ‘만고일인(萬古一人)’이라 썼다. 넷째 칸에 얼굴이 검은 한 신상을 봉안하고 편액을 ‘용왕궁(龍王宮)’이라 썼다. 다섯째 칸에도 또한 관제의 초상을 봉안하고 탁자 앞에 4개의 신상을 배치하였으며, 문 양쪽에는 각각 적토마(赤兎馬)를 세웠으니, 우리나라 관왕묘(關王廟)의 제도와 같다. 안의 편액은 ‘부국유민(富國裕民)’이라 썼고, 밖의 편액엔 ‘재신묘(財神廟)’라 썼다. 관제를 재신이라 한 것은 큰 잘못이다. 혹자는 “재신은 비간(比干)이다.” 하였다. 비간이 충직(忠直)으로 죽었는데 재신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일이며, 또한 안배(安排)한 절차가 관묘(關廟)와 동일한 모양은 무슨 뜻일까? 뜰에 비 하나를 세워 ‘만고유방(萬古流芳)’이라 새기고, 그 아래 시주(施主)한 사람의 성명과 재물을 희사(喜捨)한 액수를 열거하여 썼는데, 대개 도광(道光) 신묘년(1831, 순조 31)에 새로 세운 것이다. 셋째 칸에 이미 관제를 봉안하고도 다시 이를 새로 창건한 것은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다. 연원직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8A_0020_040_0230_2004_010_XML
Rec-2213 연원직지_1권_출강록_1832_1127 18321127 又行十里至靑石嶺。嶺高幾如會寧。以石色皆靑故名。路傍有古碑。字沒不可知。行到嶺上。遂下車少憩。路右有關廟。扁曰亘古一人。餘無可觀。 또 10리를 가서 청석령에 닿으니, 높이가 거의 회령령과 같고, 돌빛이 온통 푸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길옆에 옛 비석이 있는데 글자가 마멸(磨滅)되어 알 수가 없었다. 고개 위에 가서야 드디어 수레에서 내려 조금 쉬었다. 길 오른쪽에 관왕묘(關王廟)가 있는데 편액에 ‘고금에 제일 가는 사람[亘古一人]’이라 하였고 나머지는 보잘것없었다. 연원직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8A_0020_040_0270_2004_010_XML
Rec-2214 연원직지_1권_출강록_1832_1128 18321128 出新遼城西門外百餘步。有石橋。雕石爲欄。制極精巧。康煕五十七年所築也。橋北百餘步有關廟。廟前有一座牌樓。扁曰武聖人。傍刻水仙雲龍。牌樓內又有一門。扁曰萬古臣極。門上爲樓。扁曰摘錦樓。又有一扁。曰函夏欽仰。內扁書飛雲謠。乾隆十年。趙學淦書。門內爲廣庭。右有鼓樓。曰虎嘯。左有鍾樓。曰龍吟。虎嘯樓北有殿。曰護世。嘉慶八年御筆。龍吟樓北有殿。曰大丈夫。道光九年御筆。兩殿並安關帝像。庭之正北有層階。階有門。左扁曰正大光明。右扁曰義以爲上。又入一門。扁曰元精當中。道光九年。王世芳書。其柱聯曰。莫恨呑吳。吳宮花草埋幽徑。休勞帝魏。魏國山河半夕陽。其內有正殿。扁曰威靈遠鎭。晉谷信史嘉書。右扁曰精忠大義。嘉慶十三年御筆。左扁曰仁勇配天。嘉慶丙子趙某書。其名忘之。殿內安關帝像。像甚雄偉。位置一如我國關廟制。床卓器玩。種種侈麗。東廡張飛。西廡趙雲。又設嚴顏不屈之像。庭中有四碑。忙不能記。正殿後又有一小殿。安奉關帝位板。還出殿庭。迤入東邊。有儀狄廟。外扁書仙傳妙術。道光五年書。內扁書功比和羹。嘉慶十九年書。殿內安白面塑像。又東邊有屋。曰監饍。內有生鷄數十首。似是供神之需也。其傍又有屋。曰銷鍋行。道光十一年書。與正副使入此少憩。自廚房備進薏苡。略啜而出。蓋此廟見於前輩日記者。俱不甚鋪張。見今丹碧璀璨。棟宇宏侈。柱楣扁額。率多嘉慶道光時書。則似是仍舊而增修之。聞其壯麗。雖瀋陽,燕京。亦無以過之云。 신요동성(新遼東城) 서문(西門) 밖으로 100여 보를 나오니 돌다리가 있다. 돌을 조각하여 난간을 만들었는데 제작이 지극히 정교하니, 강희 57년에 축조(築造)한 것이다. 다리 북쪽 100여 보에 관제묘가 있고 그 앞에 한 채의 패루(牌樓)가 있다. 편액(扁額)을 ‘무성인(武聖人)’이라 하고, 곁에 수선(水仙)과 운룡(雲龍)을 새겼다. 패루 안에 또 문 하나가 있는데, 편액을 ‘만고신극(萬古臣極)’이라 한다. 문 위에 다락[樓]을 만들었는데 편액을 ‘적금루(摘錦樓)’라 하였으며, 또 하나의 편액이 있는데 ‘함하흠앙(函夏欽仰)’이라 하였고, 안 편액에는 ‘비운요(飛雲謠)’라고 썼는데, 건륭(乾隆) 10년(1745, 영조 21)에 조학감(趙學淦)이 쓴 것이다. 문안에는 넓은 뜰이 있다. 오른쪽으로 고루(鼓樓)가 있는데 ‘호소(虎嘯)’라 하였고, 왼쪽으로 종루(鍾樓)가 있는데 ‘용음(龍吟)’이라 하였다. 호소루(虎嘯樓)의 북쪽에 전각(殿閣)이 있어 ‘호세전(護世殿)’이라 하였는데, 가경(嘉慶) 8년(1803, 순조 3)의 어필(御筆)이다. 용음루(龍吟樓)의 북쪽에 있는 전각은 ‘대장부전(大丈夫殿)’이라 하였는데, 도광(道光) 9년(1829, 순조 29)의 어필이다. 두 전(殿)에 모두 관제(關帝)의 상(像)을 봉안하고 뜰의 정북쪽에 층계가 있다. 이 층계에 문이 있는데 왼쪽 편액은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 하고, 오른쪽 편액은 ‘의이위상(義以爲上)’이라고 하였다. 또 한 문을 들어가니 편액을 ‘원정당중(元精當中)’이라고 하였는데, 도광(道光) 9년에 왕세방(王世芳)이 쓴 것이다... 그 안에 정전(正殿)은 편액을 ‘위령원진(威靈遠鎭)’이라 하였는데, 진(晉) 곡신(谷信) 사가(史嘉)가 쓴 것이다. 오른쪽 편액은 ‘정충대의(精忠大義)’라고 하였는데 가경 13년의 어필이고, 왼쪽 편액은 ‘인용배천(仁勇配天)’이라고 하였는데 가경(嘉慶) 병자년(1816, 순조 16)에 조(趙) 아무개의 글씨이나, 그 이름은 잊어버렸다. 전 안에 관제의 상을 봉안하였다. 상이 매우 웅장하고 컸으며, 위치는 한결같이 우리나라 관왕묘의 제도와 같았고, 상과 탁자나 여러 가지 기구들은 사치스럽고 화려하였다. 동무(東廡)에는 장비(張飛), 서무에는 조운(趙雲)을 봉안하였으며 또 엄안(嚴顔)의 굴하지 않는 상을 설치하였다. 뜰 가운데에는 4개의 비석이 있었는데 바빠서 기록할 수 없었다. 정전 뒤에 또 하나의 조그마한 전이 있어 관제의 위판(位板)을 봉안하였다. 도로 전 뜰로 나와 동편으로 따라 들어가니 의적(儀狄)의 사당이 있다. 바깥 편액에 ‘선전묘술(仙傳妙術)’이라고 쓴 것은 도광 5년에 쓴 것이고, 안쪽 편액에 ‘공비화갱(功比和羹)’이라고 쓴 것은 가경 19년에 쓴 것이다. 전각 안에 얼굴이 흰 소상(塑像)을 봉안해 놓았다. 또한 동편에 ‘감선(監饍)’이라는 집이 있는데, 안에는 살아 있는 닭 수십 마리가 있어 신(神)에게 대접할 감인 듯하였다. 그 곁에 또 ‘소와행(銷鍋行)’이라는 집이 있는데 그 편액은 도광 11년에 쓴 것이었다. 정사, 부사와 더불어 여기에 들어가 잠깐 쉬는데, 주방에서 율무를 마련하여 가져왔기에 조금 먹다 나왔다. 대개 이 사당이 선배들의 일기에 나타난 것은 모두 그다지 떠들지 않았는데, 지금 보면 단청(丹靑)이 찬란하고 동우(棟宇)가 굉장히 사치스러우며 주련이나 편액이 거의 모두 가경, 도광 때 쓴 것이니, 옛것을 그대로 두고 중수한 듯하다. 듣건대 그 웅장하고 화려함이 비록 심양이나 연경의 것이라 할지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다고 한다. 연원직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8A_0020_040_0280_2004_010_XML
Rec-2215 연원직지_1권_출강록_1832_1129 18321129 聖申出外觀覽而歸。言村閭市肆甚盛。店北數百步有關廟。門左右皆有懸板。記重修始末及施財人姓名。道光七年事也。庭有一碑。字刓不可知。東墻內有古松五六株。他無可觀云。 성신이 밖에 나가 구경하고 돌아와서 “마을의 여염(閭閻)과 시장 가게가 매우 번성합니다. 점사 북쪽으로 수백 보 거리에 관왕묘(關王廟)가 있는데, 문 좌우에 모두 현판(懸板)이 있어 중수한 시말과 재물을 희사한 사람들의 성명을 기록하였는데, 도광(道光) 7년의 일입니다. 뜰에 비석 하나가 있는데 글자가 없어져 알 수 없고, 동쪽 담장 안에 고송(古松) 5, 6그루가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볼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연원직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8A_0020_040_0290_2004_010_XML
Rec-2216 연원직지_4권_유관록_1833_0106 18330106 明因寺東南一里許。有金魚池。或稱魚藻池。池產五色魚。而金色者尤多。故名。正陽門外魚肆所鬻者。多出此池。而其小者。爲豪富家晶缸之蓄云。池周稍廣。中有數三島嶼。繞堤楊柳。井井成行。村閭櫛比。園亭相望。此則城內所無者。方春景光。似可愛。而每歲端陽日。都人競集柳陰中。走馬爲戱。亦一壯觀云。池東有慈源寺。寺東數百武。有姚彬,關王廟。皆有古蹟。而未及歷入云。 명인사 동남쪽 1리쯤에 금어지가 있는데, 혹 어조지(魚藻池)라고도 한다. 이 못에는 오색 물고기가 생산되는데, 그중에 금빛 물고기가 더욱 많기 때문에 금어지라 이름한 것이다. 정양문(正陽門) 밖 고기 가게에서 파는 것은 이 못에서 나는 것이 많은데, 그중에 작은 것은 부호한 집에서 어항에 기르는 데에 쓰인다고 한다. 못의 둘레가 꽤 넓고 그 안에 섬 2, 3개가 있다. 못의 둑을 두른 버드나무가 질서 정연[井井]하게 줄지어 있으며, 마을이 즐비(櫛比)하고 동산과 정자가 서로 잇대었으니, 이는 성안에도 없는 것이다. 봄이 한창일 때의 경치는 사랑스러울 듯하다. 그런데 매해 단오날은 도성 사람들이 버드나무 그늘 속에 앞을 다투어 모여들어서 말달리기 놀이를 하는데 또한 하나의 장관(壯觀)이라 한다. 못 동쪽에 자원사(慈源寺)가 있고, 절의 동쪽 수백 보에 요빈(姚彬), 관왕묘(關王廟)가 있다. 모두 고적인데도 미처 들르지 못하였다고 한다. 연원직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8A_0050_010_0060_2004_010_XML
Rec-2217 연원직지_4권_유관록_1833_0112 18330112 西墻外有關廟。制不甚大。而頗蕭洒。東炕掛觀音畫像。旁書唐吳道子寫。世稱希寶云。 서쪽 담장 밖에 관왕묘(關王廟)가 있는데 제도가 그리 웅대하지는 않으나 꽤 깨끗하였다. 동편 온돌방에 관음화상(觀音畫像)을 걸고 그 곁에 ‘당(唐) 오도자(吳道子) 그림’이라 씌어 있는데, 세상에서 드문 보물로 일컫는다고 한다. 연원직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8A_0050_010_0120_2004_010_XML
Rec-2218 연원직지_6권_유관별록 null 有村則必有寺有廟。如遼陽,瀋陽,山海關等處最多。至北京城內外寺觀。比人家幾居三分之一。但一寺所居僧。雖大刹。其數不多。道士尤少。今時尙佛。似不如前明故也。或曰。時制嚴於度僧。每寺各有定額云。關廟必供佛。佛寺必供關帝。關,佛一體尊奉。曾無分別。崇奉關廟。自前世伊然。而今淸尤謹且嚴。考爵秩便覽。關公之孫。世襲博士。稱聖裔。與衍聖公等。凡村堡城邑。莫不有關廟。其規制奢儉。視本處之大小貧富。扁牌柱聯。務尙新奇。甚至家家奉關帝像。朝夕焚香祈禱。市肆亦然。 마을이 있으면 반드시 사찰이 있고 묘(廟)가 있는데, 요양, 심양, 산해관 등지에 가장 많고, 또 북경으로 가면 안팎에 있는 사관(寺觀)의 수가 인가에 비해 거의 3분의 1은 된다. 그러나 한 사찰에 승려의 수는 큰 절이라 해도 불과 얼마 되지 않고 도사(道士)의 수는 더욱 드물다. 오늘날 부처를 숭상하는 것이 예전 명(明) 나라 때와는 같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혹은 말하기를, 현재의 도승(度僧) 제도가 엄격해서, 사찰마다 일정한 인원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관왕묘(關王廟)에서는 반드시 부처를 받들고 절에서는 또 관운장(關雲長)을 받든다. 이처럼 관운장과 부처를 일체(一體)로 존봉(尊奉)해서 구별이 없는 것이다. 관왕묘를 숭봉하는 것은 과거부터 그러했었지만 현재 청(淸) 나라에서는 이를 더욱 조심스럽게 한다. 뿐만 아니라 작질(爵秩)을 엄격히 상고하고 관공(關公)의 후손을 두루 찾아내어 이들에게 박사(博士)를 세습시켜 ‘성예(聖裔)’라 이름하기를 연성공(衍聖公)의 경우와 꼭 같게 한다. 그리하여 시골 마을과 성읍(城邑)에 관왕묘가 없는 곳이 없는데, 그 규모와 사치롭고 검소한 정도는 그곳의 대소 내지 빈부의 정도에 따라 다르다. 편패(扁牌) 주련(柱聯) 같은 것은 애써 신기한 것을 숭상한다. 심지어는 집집마다 관제(關帝)의 상을 받들고 조석으로 분향 기도하며 시장 전방들도 그렇게 한다. 연원직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8A_0070_010_0050_2004_010_XML
Rec-2219 연행기사_상_1777_1218 17771218 晴。行過三臺子,六渡河。至中後所二十里。午憩於韓姓人家。店傍有關帝廟。與兩价稅轎。歷見結搆之奢麗。雕刻之奇巧。亞於舊遼之關廟。而丹雘炫耀。諸扁筆法。字字活動。第一門。題曰關帝廟。內曰此之謂大丈夫。左右廊中。有赤兔馬。第二門有兩題。上曰至聖至神。下曰浩氣彌空。庭畔有二碑。一則乾隆元年所立。一則今年所立。皆是重修記也。入第三門。有正殿。門上題曰日星河嶽。左右柱題曰浩氣千秋環北斗。精靈萬禩鎭東溟。又曰。神勇蓋人羣雷動。風馳三國皆遜武。丹心扶漢祚日光。月皎萬年獨稱尊。皆果親王筆。而正殿簷楣。列刻海仙三像。殿門內設龕室。安關帝塑像。戴冑被甲。踞坐於床上。兩邊張飛,趙雲,關平,張興等。執矛劍列立。中排一床。上有香爐。其傍有竹簽及占書。與我國關王廟所置者無異矣。人之欲占吉凶者。拜禱抽簽。往往有驗云。未知信然否也。 맑음. 행하여 삼대자(三臺子), 육도하(六渡河)를 지나 중후소(中後所) 20리에 이르러 한낮에 한씨(韓氏)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쉬었다. 점사(店舍) 곁에 관제묘(關帝廟)가 있어 두 사신과 함께 가마에서 내려 돌아보았다. 건물 구조의 사치스러움이 구요동(舊遼東) 관제묘에 다음갈 만하다. 단청이 밝고 빛나며 편액(扁額)의 필법이 글자마다 살아 움직인다. 제1문에는 ‘관제묘(關帝廟)’라 쓰고, 안에는 ‘이를 대장부라고 한다.[此之謂大丈夫]’라는 글이 있으며, 좌우 낭중(廊中)에는 적토마(赤兎馬)가 있다. 제2문에는 두 가지 제액(題額)이 있는데 뒤의 것은 ‘지성지신(至聖至神)’ 아래 것은 ‘호기미공(浩氣彌空)’이다. 뜰가에 두 비(碑)가 있는데, 하나는 건륭(乾隆) 원년에 세운 것이고 하나는 금년에 세운 것이다. 모두 중수기(重修記)이다. 제3문에 들어서니 정전(正殿) 문 위에 쓰기를 ‘일성하악(日星河嶽)’이라 하였고... 정전(正殿) 처마 서까래에는 해선(海仙) 3상(像)을 벌여 조각하고 전문(殿門) 안에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관제(關帝)의 소상(塑像)을 안치하였다. 투구에 갑옷을 입고 상 위에 걸터앉은 상이다. 양쪽 가에는 장비(張飛), 조운(趙雲), 관평(關平), 장흥(張興) 등이 창과 칼을 잡고 늘어섰고, 가운데에도 상을 놓았는데 위에 향로(香爐)가 있고 그 옆에는 죽첨(竹簽)과 점서(占書)가 있어 우리나라 관왕묘(關王廟)의 배치와 다름이 없다. 길흉을 점치고자 하는 자가 절하여 기도하고 첨(簽)을 뽑으면 가끔 증험이 있다 하나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연행기사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1A_0010_050_0180_2004_006_XML
Rec-2220 연행록_일기_1712_1204 17121204 行出西門外。至關王庿。則庿閣之宏侈。有勝於永安寺。而正門外有磚屛。以磚石塗灰。高可四五丈。廣可五六間。而畫以物像。屛內設一梁二柱門,牌樓三間。而狀如我東延詔門也。此門之內。又設三門。門板塗以靑粉。加着凍油。人影相照矣。三門內左右。有龍吟虎嘯兩樓。樓上懸鍾。四門內設左右庿。庿有右邊趙雲,左邊張飛塑像。正堂有左右牌。牌之後面。書曰山西僧費九百餘兩銀重修者也。各殿揭號。皆取忠義之意爲名。卽道配天地。無能爲名,忠義勇烈等號也。丹雘極輝煌矣。 서문 밖으로 나가서 관왕묘(關王廟)에 이르니, 묘각(廟閣)의 굉장ㆍ사치함이 영안사보다 나음이 있었다. 정문(正門) 밖에 벽돌로 쌓은 가리개가 있었다. 벽돌에다 회로 때워서 높이는 4, 5자쯤이고 넓이는 5, 6칸쯤 되는데, 물상(物像)이 그려져 있었다. 가리개 안에 1량 2주문(一梁二柱門)을 만들었고 패루(牌樓)가 3칸인데 모양이 우리나라 연조문(延詔門)과 같았다. 이 문간 안에 또 3문을 설치했고, 문 판자에 청분(靑粉)을 바르고 동유(凍油)를 덧칠해서 사람의 그림자가 서로 비쳤다. 3문 안쪽 좌우에 용음(龍吟)ㆍ호소(虎嘯) 두 누각(樓閣)이 있고, 누각 위에는 종이 달려 있었다. 사방 문간안에도 좌우묘(左右廟)를 설치했는데, 오른편에는 조운(趙雲)의 소상(塑像)이, 왼편에는 장비(張飛)의 소상이 있었다. 정당(正堂)에도 좌우패(左右牌)가 있었고, 패 후면에는 ‘산서 승(山西僧)이 은 900여 냥을 들여서 중수(重修)한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각전(各殿)에 전호(殿號)를 걸어 놓은 것은 모두 충의(忠義)의 뜻을 취하여 이름으로 삼은 것이었다. 즉, ‘도배천지(道配天地)’ㆍ‘무능위명(無能爲名)’ㆍ‘충의용렬(忠義勇烈)’이라는 등의 이름이었고, 단청이 아주 휘황하였다. 연행록_최덕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7A_0040_020_0040_2004_003_XML
Rec-2221 연행록_일기_1712_1215 17121215 而家家村村寺寺。無不掛關將之像。其敬慕可知。寺去七里。有寧遠衛。而登內城西門上。周覽形勢。則外城乃方城。而一面不過二里餘。內城亦方城。而俱皆崩頹。只存內外八虹門。門以磚石造成。民家雖不稠密。內城則無空棄之處。外城西北多空垈。而市廛半不如遼東。內城中當衢路。有十字閣。狀如瀋陽之制。南門內有兩石牌樓。皆以熟石造作。制作如遼東關王庙之一梁三間門制。 집마다 마을마다 절마다 관장(關將 관우)의 화상을 걸지 않은 곳이 없으니, 그들의 경모(敬慕)함을 알 수 있었다. 영녕사에서 7리 거리에 영원위(寧遠衛)가 있었다. 내성(內城) 서문(西門) 위에 올라서 형세를 두루 보니, 외성(外城)은 바로 방성(方城)인데 한 면이 불과 2리 남짓하였다. 내성도 또한 방성이나 모두 무너졌고 다만 안팎으로 여덟 곳 홍예문만 남았는데, 문은 벽돌로 지은 것이었다. 민가가 비록 촘촘하지는 않았으나 내성에는 비워 둔 땅이 없었고, 외성에는 서북쪽에 빈터가 많았다. 저자 가게도 요동의 반만 못했으나 내성 안 한 거리에 있는 십자각(十字閣)은 생김새가 심양의 제도와 같았다. 남문 안에 돌 패루(牌樓) 둘이 있는데, 모두 다듬은 돌로 만들었는데 제작한 것이 요동 관왕묘의 1량 3칸문(一梁三間門)의 제도와 같았다. 연행록_최덕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7A_0040_020_0150_2004_003_XML
Rec-2222 열하일기_양엽기_관제묘 null null 관제묘(關帝廟)는 천하에 어디든지 비록 궁촌 벽지라도 사람 몇 호만 사는 데는 반드시 사치한 묘우를 떠받들어 지어 놓고, 제사에 정성이 대단하여 소 먹이는 아이와 곁두리 먹이는 지어미[饁婦]들까지 뒤떨어지기가 두려워 달려든다. 책문(柵門)에 들어온 뒤 황성까지 2천여 리 사이에 새로 지은 것이나 묵은 것이나 혹은 크고 작은 수많은 관제묘가 서로 마주 바라다보고 있다. 그 중에도 요양(遼陽)과 중후소(中後所)에 있는 것이 가장 영험이 있다 하고, 북경에 있는 백마관제묘(白馬關帝廟)라 하여 사전(祀典)에 실렸으니, 곧 정양문 오른편에 있는 관제묘가 이것이라 한다. 매년 5월 13일이면 제사를 올리는데, 10일 앞서 태상시(太常寺)가 본시(本寺)의 당상관(堂上官)을 보내어 예식을 집행한다. 이날은 특히 민간의 참배가 더욱 극성스럽다. 대체로 나라에 큰 재앙이 있으면 제사를 모셔서 고해 바친다. 명(明)의 만력(萬曆) 시대는 특히 삼계복마대제신위진원천존(三界伏魔大帝神威鎭遠天尊)으로 봉했으니, 이 지시는 궁중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 남관왕묘(南關王廟) 바람벽 위에 걸린 그림도 대체로 이곳의 것을 모방한 그림이다. 초굉(焦竑 명(明) 학자. 자는 약후(弱侯))이 묘비문을 짓고 동기창(董其昌 명(明)의 서예가. 자는 원재(元宰))이 글씨를 썼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이절(二絶)이라 한다. 열하일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70A_0270_010_0140_2003_002_XML
Rec-2223 오산집_속집_3권_시요 null 未幾北虜有警。公移節遼陽。東征之事。付諸撫院。撫院之去。公又建牙下國。部勒水陸大將。自作載書。共詣關王廟。祭以築壇。盟以歃血。同心討賊。指天誓日。鼓三軍之氣。激以忠義。士皆瞋目。四大將意氣相合。咸奮大勇。 그 뒤 얼마 안 되어 오랑캐에 대한 경보(警報)가 있어 상공이 요양(遼陽)으로 가면서 동정(東征)의 일을 무원(撫院)에다 넘겼고 무원이 떠나자 상공이 또다시 조선에다 대장기를 세우고 수륙(水陸)의 장수들을 통솔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맹약(盟約)의 글을 지어 다 같이 관왕묘(關王廟)로 가서 단을 쌓아 제사를 지낸 다음 피를 마시고 맹세하였다. 이에 마음을 합해 적을 토벌하기로 하늘의 해를 가리키며 다짐하여 삼군(三軍)의 기세를 진작시키고 충의로 격동시키니, 병사들은 모두 눈을 부릅떴으며 4명의 대장들은 의기가 서로 합치되어 모두 큰 용맹을 떨치리라 마음먹었다. 오산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58A_0120_020_0020_2013_004_XML
Rec-2224 오주연문장전산고_경사5_논사_한국 null null 우리나라 경도(京都)나 시골에 다같이 관문(關門) 같은 이문(里門)이 있어 낮에는 열어 두고 밤에는 닫으니, 이 또한 좋은 법이라 이를 만하다. 이문의 창설(創設) 또한 조명(朝命)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다. 상고하건대, 세조(世祖) 10년(을사)에 경성(京城)과 시골에 모두 이문을 짓도록 명하였는데, 지금 경성 안으로 말하면 운종가(雲從街 지금의 종로 4가 근처) 동북편에 이문 내동(里門內洞)이 있고, 성 밖으로 말하면 숭례문(崇禮門) 밖 관왕묘(關王廟) 근처에 이문동(里門洞)이 있다. 시골의 경우, 양주목(楊州牧)으로 말하면 누(樓)ㆍ원(院)ㆍ점(店) 등에 각기 이문을 설치하였는데, 근래에는 다 허물어져 버리고 옛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나도 젊었을 적에 이것을 보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1A_0150_020_0160_2000_020_XML
Rec-2225 오주연문장전산고_경사5_인물_중국_01 null null 우리나라에는 관왕묘가 네 군데에 있다. 강진(康津)에 있는 사당은 명 나라의 도독(都督) 진인(陳璘)이 건립하였는데, 그 뒤에 또 하나의 사당을 그 옆에 따로 세워 진인을 주위(主位), 이순신(李舜臣)을 배위(配位)로 모셨고, 남원(南原)에 있는 사당은 명 나라의 장수 이신방(李新芳)ㆍ장표(蔣表)ㆍ모승선(毛承先)을 배위로 모셨고, 안동(安東)에 있는 사당은 명 나라의 장수 설호신(薛虎臣)이 건립하였는데 석상(石像)으로 되었고, 성주(星州)에 있는 사당은 명 나라의 장수 모국기(茅國器)가 건립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1A_0160_020_0060_2000_020_XML
Rec-2226 오주연문장전산고_경사5_인물_중국_02 null null 관왕묘의 사적에 대해 이 맹휴(李孟休)의 《춘관지(春官志)》에, “선조(宣祖) 30년(1597) 겨울에 명 나라의 여러 장수가 울산(蔚山)에 있는 왜적의 진루(陣壘)를 공격하다가 전세가 불리하게 되어 유격장군(遊擊將軍) 진인(陳寅)이 역전(力戰)을 거듭하던 도중에 탄환을 맞았다. 이에 그 이듬해에 서울로 옮겨 병을 조섭하게 되었는데, 그가 자신이 묵고 있는 숭례문(崇禮門) 밖 산기슭에 사당을 건립하고 사당 중앙에 신상(神像)을 설치하여 관왕을 봉안하자 경리(經理) 양호(楊鎬) 이하가 각기 은자(銀子)를 내어 경비를 도왔고 우리나라에서도 은자를 내어 도왔으며, 사당이 준공된 뒤에는 주상(主上 선조를 말함)도 친히 가서 참관하였다. 그 신상은 소상(塑像 찰흙으로 만든 상)으로 되었고 좌우로 시립(侍立)한 두 장수의 소상은 대검(大劍)을 가졌는데, 그들은 관평(關平)과 주창(周倉)이라 한다. 사당 앞에는 두 개의 길다란 장대를 세우고 두 폭의 기(旗)를 달았는데, 한 폭에는 협천대제(協天大帝)라 쓰고 또 한폭에는 위진화하(威振華夏)라 썼다. 이때부터 명 나라의 여러 장수가 출입할 적마다 참배하면서 ‘조선국을 위하여 신조(神助)를 받아 왜적을 물리치기 바란다.’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5월 13일은 사당에서 대제(大祭)를 드린다고 하는데, 이날은 관왕의 생신인 것이다. 이날 따라 오전에는 일기가 청명하다가 오후에는 먹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큰 바람이 서북으로부터 불어오면서 천둥치고 폭우가 쏟아지자 여러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면서 ‘관왕의 신이 강림했다.’고 하였다. 그 뒤 경자년(1600)에 신종황제가 무신(撫臣 순무사(巡撫使)의 별칭) 만세덕(萬世德)에게 4천금을 교부하면서, 조선의 서울에 관왕묘를 건립하고 제사를 드리도록 하였으니, 이는 동정(東征)에 나온 명 나라의 여러 장병들이 모두 ‘평양의 승리와 도산(島山)의 싸움과 삼로(三路)에서 왜적을 몰아낼 때 관왕이 갑자기 현성(顯聖)하여 싸움을 도와 주었다.’고 말한 때문이었다. 이에 흥인문(興仁門) 밖 동편에 터를 정하고 대신(大臣)에게 공사 감독을 명하여 임인년(1602)에 비로소 준공되었는데, 다 중국 제도를 모방하였다. 이어 대제(大祭)를 드려 낙성식을 마치고 중국에 액자를 청하자, 칙건현령소덕관공지묘(勅建顯靈昭德關公之廟)로 사액(賜額)되었다.” 하였다. 그런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관왕의 신이 남쪽에서 나타났다가 동쪽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숭례문 밖에 있는 사당의 신상은 생상(生像)으로 만들고 흥인문 밖에 있는 사당의 신상은 사상(死像)으로 만들어 도금(鍍金)했다.” 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1A_0160_020_0060_2000_020_XML
Rec-2227 오주연문장전산고_경사5_인물_중국_03 null null 또 《춘관지》에, “강진 고금도(古今島)에 있는 관왕묘는 도독(都督) 진인(陳璘)이 건립, 숙종(肅宗) 9년(1683)에 개수(改修)하고 또 하나의 사당을 그 옆에 세워진 도독을 주위(主位)로, 이순신을 배위(配位)로 모셨고 남원에 있는 사당은 건립된 연대는 자세하지 못하나 숙종 43년(1717)에 중건(重建)하여 명 나라의 세 장수, 즉 이신방(李新芳)ㆍ장표(蔣表)ㆍ모승선(毛承先)을 배향(配享)시켰다.” 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1A_0160_020_0060_2000_020_XML
Rec-2228 오주연문장전산고_경사5_인물_중국_04 null null 나의 조부 형암공(炯庵公)의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에, “남원부(南原府) 서편에 관왕묘가 있는데, 신축년(1781) 봄에 금상(今上 정조(正祖)를 말함)이 탄보묘(誕報廟) 3자를 친히 써서 감서(監書)에게 싸 가지고 가서 현액(懸額)하도록 하였다. 임인년(1782) 가을에 내가 공행(公行 공무로 나가는 출장)으로 나왔다가 이곳 관왕묘를 참배하게 되었는데, 관왕의 목상(木像)이 매우 장대(壯大)한데다 금관(金冠)과 홍포(紅袍) 차림이었고 앞에는 두 장수가 시립(侍立)해 있었으며 정원(庭院)에 세워진 비(碑)에는 ‘만력(萬曆) 27년(1599)에 명 나라의 도독 유정(劉綎)이 창건했다.’ 하였으나 비는 거의 다 부스러지고, 비문(碑文)은 유정이 지었는데 문장이 너무 졸렬하고 글씨도 거칠었다. 안동(安東)에 있는 관왕묘는 만력 26년(1598)에 명 나라의 진정영 도사(眞定營都司) 설호신(薛虎臣)이 건립, 석상(石像)으로 되었고 오수정(烏水晶)으로 눈동자를 상감(象嵌)하였다. 성주(星州)에 있는 관왕묘는 만력 25년(1597)에 명 나라의 장수 모국기(茅國器)가 건립, 소상(塑像)으로 되었는데, 매우 영험스럽다.” 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1A_0160_020_0060_2000_020_XML
Rec-2229 오주연문장전산고_경사5_인물_중국_05 null null 또 나의 조부의 《한죽당섭필》에, “성주부(星州府) 서편에 관후묘(關侯廟)가 있는데, 금관(金冠)과 녹포(綠袍) 차림으로 교의 위에 올라앉아서 오른손에는 창(鎗)을, 왼손에는 검(劍)을 잡았고, 왼편에는 얼굴이 하얀 장수 하나가 걸터앉았고, 오른편에는 두 장수가 있는데, 한 장수는 두 손에 창과 철퇴를 잡았고 또 한 장수는 네개의 팔[臂]로 한 손에는 당파(钂鈀 세 갈래의 창과 쇠갈퀴)를 가졌으나 세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이들 두 장수는 다 붉은 얼굴에 노기(怒氣)를 띠었는데, 그 이름은 끝내 알 수 없다.” 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1A_0160_020_0060_2000_020_XML
Rec-2230 월사집_2권_무술조천록_상 null 才賦豪雄命賦奇 / 天時其奈與心違 / 英風萬古孤墳在 / 壯志平生一劍知 / 畢竟功名歸豎子 / 當時吳魏視嬰兒 / 江淮不盡傾遺憤 / 祠廟猶能讋九夷 호웅으로 태어났건만 운명이 기구해 / 천시가 그 마음과 어긋났음을 어이하리오 / 만고에 영웅 풍모 외로운 무덤으로 남았지만 / 평생에 장대한 뜻은 한 자루 검이 알았도다 / 필경에 공명은 소인놈에게 돌아갔으니 / 당시에 오와 위를 어린아이로 보았었지 / 강수와 회수로도 남은 분을 다 못 씻지만 / 사당은 오히려 구이를 삼가 복종케 하누나 월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82A_0030_010_0400_2012_001_XML
Rec-2231 월사집_55권_제문_상 null 烈烈惟王 / 式闡武功 / 神資拳勇 / 天挺豪雄 / 俎豆天下 / 萬古猶生 / 威震華夷 / 義徹幽明 / 一氣撑柱 / 炳然如日 / 逖矣偏邦 / 亦欽斯烈 / 幸沾神化 / 陟看新廟 / 瞻聆聳動 / 遠邇顚倒 / 燕頷虯鬚 / 森然若見 / 赤兔偃月 / 新回酣戰 / 願仗餘威 / 殱此兇酋 / 保祐東土 / 永賴冥庥 열렬한 관왕이여 / 烈烈惟王 실로 무공을 크게 떨쳤으니 / 式闡武功 그 타고난 용맹한 자품은 / 神資拳勇 하늘이 낸 빼어난 호걸이어라 / 天挺豪雄 그래서 온 천하에 제향되었으니 / 俎豆天下 만고에 길이 살아 계신 셈이라 / 萬古猶生 위엄은 화이를 두루 진동하였고 / 威震華夷 의리는 유명에 모두 관철했도다 / 義徹幽明 한 가닥 바른 기운을 지탱시켜 / 一氣撑柱 그 밝기가 마치 해와 같으니 / 炳然如日 아득히 멀고 외진 이 나라에서도 / 逖矣偏邦 그 빛나는 공렬을 공경하도다 / 亦欽斯烈 다행히 이제 그 신화를 입어 / 幸沾神化 새로 지은 사당을 보게 되었나니 / 𨺗看新廟 사람들의 이목이 깜짝 놀라고 / 瞻聆聳動 원근에서 허겁지겁 몰려오누나 / 遠邇顚倒 제비의 턱이요 규룡의 수염이라 / 燕頷虯鬚 실제로 풍모를 뵙는 듯하며 / 森然若見 타는 적토마와 쓰는 언월도는 / 赤兔偃月 막 전쟁터에서 돌아온 듯해라 / 新回酣戰 원컨대 관왕의 위엄에 의지하여 / 願仗餘威 이 흉악한 적의 괴수 죽여서 / 殱此兇酋 우리 동토를 보우하시고 / 保祐東土 길이 보살피는 은택 내려 주소서 / 永賴冥庥 월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82A_0560_010_0010_2012_007_XML
Rec-2232 월사집부록_2권_행장 null 關王廟初成。天將往奠。臨行。請上同奠。倉卒行出。奠須有文。乘輿已駕。請宣召知製敎。宣廟特命公製之。公承命立製以進。有鳳眼虯髥。森然若見。赤兔偃月。新回酣戰等句。宣廟大稱賞。賜錦段。 관왕묘(關王廟)가 처음 낙성되어 중국 장수가 제전(祭奠)을 올리러 가면서 출발할 즈음에야 상에게 함께 제전을 올릴 것을 청하였다. 상이 창졸간에 행행하게 되었는데 제전에는 제문이 있어야 했다. 승여(乘輿)를 대령한 상황에서 유사(有司)가 지제교(知製敎)를 불러올 것을 청하니, 선묘가 특명을 내려 공에게 짓도록 하였다. 이에 공이 명을 받아 즉시 지어 올렸는데, 그 글에 “봉황의 눈이요 규룡의 수염이라 실제로 풍모를 뵙는 듯하며, 타는 적토마와 쓰는 언월도는 막 전쟁터에서 돌아온 듯해라.〔鳳眼虯鬚 森然若見 赤兔偃月 新回酣戰〕” 등의 구절이 있었는데 선묘가 보고 크게 칭찬하며 비단을 상으로 내렸다. 월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82A_0660_000_0010_2012_008_XML
Rec-2233 월사집부록_3권_사장 null 戊戌。拜司憲府執義。擢拜承政院同副承旨。兼承文院副提調。關王廟成。天將請上同往。奠駕已辦。始命撰祭文。有司請召知製敎。上以命公立就以進。上大悅。命賜錦。 무술년(1598, 선조31)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었고,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발탁되고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대하였다. 관왕묘(關王廟)가 낙성되자 중국 장수가 상에게 함께 가서 제사를 올릴 것을 청하였다. 대가(大駕)가 출발할 준비가 다 된 때에 비로소 제문을 지어 올릴 것을 명하였다. 이에 유사(有司)가 지제교(知製敎)를 불러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공에게 그 일을 명하였다. 공이 그 자리에서 바로 지어 올리니 상이 매우 기뻐하며 비단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월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82A_0670_000_0010_2012_008_XML
Rec-2234 월사집부록_5권_비명 null 關王廟成。天將請上同祭。駕辦始具祭文。上不用當製詞臣。而命公製之。公方以該房掌飭鹵簿。聞命立就。詞甚稱旨。卽賜綵幣。改兵曹參知。自此眷遇日渥。每有賓禮。公必在御前。 관왕묘(關王廟)가 완성되자 중국 장수가 상에게 함께 제사 지내자고 청하였다. 어가(御駕)가 출발 준비를 다 마친 다음에야 비로소 제문(祭文)이 완성되었는데, 상께서 담당 사신(詞臣)의 제문을 쓰지 않고 공에게 명하여 새로 짓게 했던 것이다. 공은 그때 해당 방(房)에서 노부(鹵簿)를 담당하여 신칙하고 있다가 상의 명을 듣고 그 자리에서 제문을 지어 올렸는데 글이 성상의 뜻에 딱 맞았다. 이에 곧바로 비단을 하사받고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개차되었다. 이때부터 상의 총애가 날로 융숭해졌으며 중국 사람들을 접대할 일이 있을 때마다 공은 반드시 어전(御前)에 있었다. 월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82A_0690_000_0010_2016_009_XML
Rec-2235 월사집연보_1권_월사선생연보 null null 5월에 특명을 받아 〈관왕묘친제문(關王廟親祭文)〉을 지었다. 관왕묘가 막 완성되자 명나라 장수가 가서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는데, 출발할 때에 상에게 함께 제사를 지내자고 청하였다. 제사를 지내려면 제문이 필요하였으나 어가가 이미 출발할 시점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에게 특명을 내려 즉석에서 짓게 하자, 입으로 지어 올렸는데 ‘봉황의 눈과 규룡의 수염이여, 엄숙하여 뵙는 듯하네. 적토마와 언월도로, 막 격전 치르고 돌아오셨네.〔鳳眼虯髥 森然若見 赤兎偃月 新回酣戰〕’ 등의 구절이 있었다. 상이 매우 칭찬하고 비단을 하사하였다. 월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82A_0780_000_0010_2016_010_XML
Rec-2236 은대조례_예고_제향 null 廟、社爲大祀,景慕宮、南壇、星壇、先農壇、先蠶壇、雩祀壇、文廟、關王廟爲中祀,其餘諸享及朔、望、俗節爲小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은 대사(大祀)로 지내고, 경모궁(景慕宮), 남단(南壇), 성단(星壇), 선농단(先農壇), 선잠단(先蠶壇), 우사단(雩祀壇), 문묘(文廟), 관왕묘(關王廟)는 중사(中祀)로 지내며, 그 나머지의 제향(祭享)과 삭제(朔祭), 망제(望祭), 속절제(俗節祭)는 소사(小祀)로 지낸다. 은대조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6A_0050_000_0130_2014_001_XML
Rec-2237 은대조례_예고_작헌례 null 奠酌禮,關王廟、大院君祠宇,亦因特旨行。 관왕묘(關王廟)와 대원군(大院君)의 사우(祠宇)에도 임금의 특별 지시에 따라 전작례(奠酌禮)를 행한다. 은대조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6A_0050_000_0140_2014_001_XML
Rec-2238 은대조례_예고_봉심 null 皇壇、社稷、宗廟、永寧殿、永禧殿、景慕宮、各宮ㆍ廟、諸壇、諸山川、文廟、東ㆍ南關王廟、纛所、宣武祠及祈告祭、【告文。還安、祈晴、中霤、城隍、厲等祭否。○ 服色黑團領,國恤時,社稷外竝無揚。】 健元陵、健陵、仁陵、綏陵、景陵、睿陵、顯隆園、徽慶園忌辰祭,承旨進去,【用淺淡服,而局內陵、園一體奉審。○ 陵、園則每因特敎宗臣、閣臣、儒臣中進去。○ 遣大臣酌獻禮時,局內陵、園亦爲奉審。】 有奉審處慰安、告由祭,亦爲進去。【各陵、園、墓則否。】 황단(皇壇), 사직(社稷), 종묘(宗廟), 영녕전(永寧殿), 영희전(永禧殿), 경모궁(景慕宮), 각 궁(宮)ㆍ묘(廟), 여러 제단(祭壇)ㆍ산천(山川), 문묘(文廟), 동관왕묘(東關王廟), 남관왕묘(南關王廟), 둑소(纛所), 선무사(宣武祠)에 제사를 지낼 경우와 기고제(祈告祭)를 지낼 경우, 이들 제사를 지낼 때에는 고하는 글이 있다. 환안제(還安祭), 기청제(祈晴祭), 중류제(中霤祭), 성황제(城隍祭), 여제(厲祭) 등을 지낼 때에는 탈이 있는지를 살피지 않는다. 복장은 흑단령(黑團領)으로 마련하되, 국휼(國恤) 기간에는 사직에 제사를 지내는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흉배(胸背)를 달지 않은 흑단령으로 마련한다. 건원릉(健元陵), 건릉(健陵), 인릉(仁陵), 수릉(綏陵), 경릉(景陵), 예릉(睿陵), 현륭원(顯隆園), 휘경원(徽慶園)에 기신제(忌辰祭)를 지낼 경우에는 승지가 나아가고 천담복(淺淡服)을 착용하고, 같은 구역 안에 있는 능(陵)과 원(園)도 탈이 있는지를 함께 살핀다. 능과 원에는 매번 임금의 특별 하교에 따라 종신(宗臣), 각신(閣臣), 유신(儒臣) 중에서 나아간다. 대신을 보내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에는 같은 구역 안에 있는 능과 원도 탈이 있는지를 살피도록 한다. 탈이 있는지를 살폈던 곳에 위안제(慰安祭)와 고유제(告由祭)를 지낼 경우에도 승지가 탈이 있는지를 살피러 다시 나아간다. 각 능, 원, 묘에는 탈이 있는지를 살핀 뒤에 위안제나 고유제를 지내더라도 승지가 탈이 있는지를 살피러 다시 나아가지 않는다. 은대조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6A_0050_000_0210_2014_001_XML
Rec-2239 은대조례_부록_판부규식 null 社稷、宗廟、各陵ㆍ殿、肇慶廟祭文,書“奉敎 【敎字高一字】 敬依”;景慕宮、顯隆園,“奉敎恭依”;文廟、關王廟、各宮ㆍ廟ㆍ園ㆍ墓及諸臣致祭文與敎書,“奉敎可”,竝書長銜。 사직(社稷), 종묘(宗廟), 각 능(陵)ㆍ전(殿), 조경묘(肇慶廟)의 제문(祭文)에 대한 판부는 ‘삼가 아뢴 대로 하겠다는 하교를 받듦.〔奉敎敬依〕’이라고 쓴다. ‘교(敎)’ 자는 1자를 높여서 쓴다. 경모궁(景慕宮)과 현륭원(顯隆園)의 제문에 대한 판부는 ‘삼가 아뢴 대로 하겠다는 하교를 받듦.〔奉敎恭依〕’이라고 쓴다. 문묘(文廟), 관왕묘(關王廟), 각 궁(宮)ㆍ묘(廟)ㆍ원(園)ㆍ묘(墓)의 제문 및 신하들의 치제문(致祭文)과 교서(敎書)에 대한 판부는 ‘승낙한다는 하교를 받듦.〔奉敎可〕’이라고 쓴다. 모두 장함을 쓴다. 은대조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6A_0090_000_0030_2014_001_XML
Rec-2240 응천일록_6권_1632_1006 16321006 初六日罷漏後。延光門外望哭。靈轝至關王廟後。百官分東西班。序立路左。望靈轝之來。行四拜禮。先導詣魂殿。到禮曹前大路祗迎。百官參初虞祭望哭後。百官奉慰問安答曰罔極。 파루(罷漏) 후에 연광문(延光門) 밖에서 망곡(望哭)하였다. 영여(靈與)가 관왕묘(關王廟)에 도착한 후에, 백관이 동ㆍ서반으로 갈라 길옆에 차례로 서서 영여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선도(先導)는 혼전(魂殿)에 나아갔고, 예조 앞 큰 길에 와서 지영하였다. 백관이 초우제(初虞祭)에 참석하였다. 망곡한 후에 백관이 위로 문안을 하니, 망극하다고 답하였다. 응천일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37A_0060_000_0010_2002_012_XML
Rec-2241 임하필기_13권_문헌지장_묘우사당 null null 남관왕묘(南關王廟)는 선조 31년(1598)에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이 세웠으며, 동관왕묘(東關王廟)는 명나라가 무신(撫臣 순무(巡撫)의 임무를 맡은 신하) 만세덕(萬世德)에게 명해서 세웠다. 선무사(宣武祠)는 선조 31년에 세웠는데 세상에서 이를 생사당(生祠堂)이라고 칭하는바 명나라의 병부 상서 형개(邢玠)를 제사하는 사당으로 어필로 게판(揭板)하였으며, 37년(1604)에는 명나라의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병향(幷享)하였다. 임하필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32A_0160_010_1240_2007_003_XML
Rec-2242 임하필기_16권_문헌지장_관왕묘 null null 선조 31년(1598)에 숭례문(崇禮門) 밖에 관왕묘를 창건하고 한(漢)나라 수정후(壽亭侯) 증(贈) 무안왕(武安王) 관우(關羽)를 제향하였는데, 예조의 낭관 허균(許筠)이 묘정비(廟庭碑)를 지어 올렸다. 이에 심희수(沈喜壽)가 아뢰기를, “이번 이 관왕묘의 건립은 사실 황제의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비문을 지은 자의 벼슬이 미약하니, 황상께서 듣는다면 너무 소홀하다는 혐의가 있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여, 결국 세우지 않고 말았다. 35년(1602)에 또 흥인문(興仁門) 밖에 이를 창건하고 중국에 사액(賜額)을 청하였는데, 황제가 이를 ‘칙건현령소덕관공지묘(勅建顯靈昭德關公之廟)’로 제방(題牓)하라고 하였다. 숙종 18년(1692)에 상이 스스로 두 수의 시를 지어 어필(御筆)로 써서 현판에 새겨 나누어 걸었으며, 22년(1696)에는 친히 ‘현령소덕왕묘(顯靈昭德王廟)’라는 여섯 글자를 써서 나누어 걸었다. 관왕묘는 강진현(康津縣)의 고금도(古今島)에도 있는데, 선조 30년(1597)에 명나라의 도독(都督) 진린(陳璘)이 창건한 것으로 숙종 10년(1684)에 다시 개수(改修)하였으며, 그 옆에 따로 사당 하나를 세워서 도독 진린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여기에 배향(配享)하였다. 또 안동부(安東府)에도 있는데 선조 31년에 명나라의 진정영 도사(眞定營都司) 설호신(薛虎臣)이 창건한 것으로 석상(石像)을 봉안하였다. 처음에는 부성(府城)의 성문 안에 있는 북산(北山) 정상에 있었는바 돌로 비석까지 세우고 동정(東征)의 전역(戰役)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병오년(1606, 선조39)에 서악(西嶽)의 동대(東臺)로 옮겨 봉안하였다. 또 성주목(星州牧)에도 있는데, 선조 30년(1597)에 명나라 장수 모국기(茅國器)가 창건한 것으로 소상(塑像)이 있어서 매우 영이(靈異)함을 나타낸다. 처음에는 주성(州城) 동문 밖에 있었는데 영종 3년(1727)에 남정(南亭) 아래로 옮겨 세웠다. 또 남원부(南原府) 부성의 서문(西門) 밖에도 있는데, 선조 기해년(1599, 선조32) 연간에 명나라의 도독 유정(劉綎)이 창건한 것으로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숙종 42년(1716)에 다시 고쳐 짓고 명나라의 이신방(李新芳), 장표(蔣表), 모승선(毛承先)을 배향하였으며, 또 따로 사당 하나를 세우고 유 도독(劉都督)을 제사 지낸다. 각도(各道)에 있는 사당들의 제사 의식은 선무사(宣武祠)의 예에 따라서 매년 경칩(驚蟄)과 상강(霜降)에 향축(香祝)을 내려 보내면 본도(本道)에서 제사를 지낸다. 임하필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32A_0190_010_0440_2007_003_XML
Rec-2243 임하필기_28권_춘명일사_01 null null 훈련원 정은 무직(武職) 중의 준망(峻望)이니, 음직(蔭職)의 정(正)과 같다. 문신이 이 직함을 거치면 서반(西班)의 작위도 구애받지 않고 될 수 있었으니, 옛 법규가 그러하였고 그 비중이 장천(將薦)에 비할 정도였다. 그 규례가 근래에는 폐지되었다. 다만 관왕묘(關王廟)에 전작례(奠酌禮)를 거행할 때에 문신을 차출하여 대축(大祝)의 일을 행하게 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임하필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32A_0310_010_0240_2007_006_XML
Rec-2244 임하필기_28권_춘명일사_02 null null 헌묘(憲廟) 병오년(1846, 헌종12)에 내영(內營)을 설치할 적에 우란(友蘭) 서희순(徐憙淳)이 총위사(摠衛使)가 되었으니, 이는 문신이 장수에 임명된 것이다. 하루는 관왕묘(關王廟)의 가을 제사를 지내게 되어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장신(將臣)을 모두 제관(祭官)으로 차출하였는데, 상이 서공(徐公)의 직함을 더욱 빛내기 위하여 특별히 두 영(營)을 겸관(兼管)하도록 명하였으므로 세 곳의 수기(手旗)를 일시에 모두 관장하게 되니, 보는 자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임하필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32A_0310_010_0560_2007_006_XML
Rec-2245 잠곡유고_14권_녹_1636_1106 16361106 關王廟謂之勑封三界伏魔大帝廟。無處不有。又有玉皇廟,玄帝廟,碧霞君廟,天妃聖母廟,西王母廟,火神廟,馬神廟,馬明王廟,泰山行宮三官廟等。名號不可勝記。皆a086_274a以金字扁額。過者入則必拜。無貴賤皆然。 관왕묘(關王廟)는 ‘칙봉삼계복마대제묘(勅封三界伏魔大帝廟)’라고 하였는데, 어디에나 다 있었다. 또 옥황묘(玉皇廟), 현제묘(玄帝廟), 벽하군묘(碧霞君廟), 천비성모묘(天妃聖母廟), 서왕모묘(西王母廟), 화신묘(火神廟), 마신묘(馬神廟), 마명왕묘(馬明王廟), 태산행궁(泰山行宮), 삼관묘(三官廟) 등 명칭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조차도 없이 많은데, 모두 금자(金字)로 현판을 달았다. 지나가는 행인도 들어가면 반드시 절하였는데, 귀천을 따질 것 없이 모두 그러하였다. 잠곡유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22A_0150_010_0020_2002_003_XML
Rec-2246 조경일록_1636_1106 16361106 關王廟謂之勑封三界伏魔大帝廟。無處不有。又有玉皇廟,玄帝廟,碧霞君廟,天妃聖母廟,西王母廟,火神廟,馬神廟,馬明王廟,泰山行宮三官廟等。名號不可勝記。皆a086_274a以金字扁額。過者入則必拜。無貴賤皆然。 관왕묘(關王廟)는 ‘칙봉삼계복마대제묘(勅封三界伏魔大帝廟)’라고 하였는데, 어디에나 다 있었다. 또 옥황묘(玉皇廟), 현제묘(玄帝廟), 벽하군묘(碧霞君廟), 천비성모묘(天妃聖母廟), 서왕모묘(西王母廟), 화신묘(火神廟), 마신묘(馬神廟), 마명왕묘(馬明王廟), 태산행궁(泰山行宮), 삼관묘(三官廟) 등 명칭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조차도 없이 많은데, 모두 금자(金字)로 현판을 달았다. 지나가는 행인도 들어가면 반드시 절하였는데, 귀천을 따질 것 없이 모두 그러하였다. 조경일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5A_0010_060_0040_2004_002_XML
Rec-2247 조천기_상_1574_0628 15740628 余等由安定門。歷濟美,進士等門。尙書里大中丞奎光,按臨,總會三門。出西門。過關王廟。廟宇壯麗嚴邃。中有蒼松鬱然。遼左絶無松柏。獨此廟有之。故關廟靑松。入於遼陽八景云。可見其貴也。 우리들은 안정문(安定門)을 거쳐 제미(濟美)ㆍ진사(進士) 등의 문과 상서리(尙書里) 대중승(大中丞)의 규광(奎光), 안림(按臨), 총회(總會) 등의 3문을 지나서 서문(西門)을 벗어나 관왕묘(關王廟)를 지났는데, 관왕묘는 장엄하고도 그윽하였으며, 가운데는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였다. 요좌(遼左)에는 송백(松柏)이 없었는데, 유독 이 관왕묘에만 있는 까닭에 관왕묘[關廟]의 푸른 소나무[靑松]가 요양(遼陽)의 8경(景)에 든다고 하였으니, 그 귀한 것을 볼 수 있다. 조천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1A_0020_020_0280_2004_001_XML
Rec-2248 조천기_중_1574_0716 15740716 河上有關王廟。歷杏林千戶所城。城一名中後所。道邊有前屯衛杏林堡遊營忠義叢塚碑記。隆慶壬申。遊擊將軍楊燮立。碑陰開錄陣亡者六十八員名。 하수 위에는 관왕묘(關王廟)가 있었고 행림천호소성(杏林千戶所城)을 지났다. 성의 또 다른 이름은 중후소(中後所)라고 하였으며, 길가에는 ‘전둔위행림보 유영충의총비(前屯衛杏林堡遊營忠義塚碑)’가 있는데 융경(隆慶) 임신년(1572)에 유격장군(遊擊將軍) 양섭(楊燮)이 세운 비이며 음각(陰刻)으로 적진에서 죽은 68명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조천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1A_0030_010_0160_2004_001_XML
Rec-2249 조천기_중_1574_0727 15740727 午後。過梁家店城。由保障門。出自寧靜門。又過五里橋,攤船河,漢陽公雍伯種玉碑。碑在嘉靖十四年知縣麻强建。縣之得名以此。事載太平廣記。其說極無謂。歷關王廟。至玉田縣東門。門外有東門橋。城下有創建東門橋記碑。穿城中歷淨業寺,三官廟,光啓門,大方伯門,鵬鶚高摶門,文廟。縣雖小而人居富密。又出自西門。入于陽樊驛。驛中有新遷驛記碑。嘉靖三年。按察副使熊相撰。 오후에는 양가점(梁家店)의 성(城)을 지나 보장문(保障門)을 거쳤고 영정문(寧靜門)으로부터 나갔다. 또한 오리교(五里橋)ㆍ탄선하(攤船河)를 지나자 한양공(漢陽公) 옹백(雍伯)이 종옥비(種玉碑)를 세워 놓았는데, 그것은 가정(嘉靖) 14년(1535)에 지현(知縣) 마강(麻强)이 세웠으며, 현의 이름은 이 일로 해서 얻어졌다. 이 일은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실려 있는데 그 말은 극히 이를 것이 없었다. 관왕묘(關王廟)를 거쳐 옥전현(玉田縣) 동문(東門)에 이르렀는데 문밖에는 동문교(東門橋)가 있었고, 성 아래에는 새로 세운 동문교기비(東門橋記碑)가 있었다. 성안을 지나서 정업사(淨業寺), 삼관묘(三官廟), 광계문(光啓門), 대방백문(大方伯門), 붕악고박문(鵬鶚高搏門), 문묘(文廟)를 지났다. 고을은 비록 작았으나 사람 사는 것은 부유하고 밀집하여 있었다. 그리고 서문(西門)으로부터 벗어나서 양반역(陽樊驛)으로 들어가니, 역 가운데에 신천역기비(新遷驛記碑)가 있었는데, 가정(嘉靖) 3년(1524)에 안찰 부사(按察副使) 웅상(熊相)이 지은 것이었다. 조천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1A_0030_010_0270_2004_001_XML
Rec-2250 조천기_중_1574_0801 15740801 午後。又過公樂店,關王廟,東嶺急遞鋪。渡草河過草橋店。至三河縣三河驛。驛門外有修驛碑銘幷序。巡撫都御史李貢撰。中廳扁曰皇華堂。左右豎碑各一。皆記重修之事。一嘉靖戊申。戶部主事周俶撰。一嘉靖丙寅。南京戶部郞中致仕喬伊撰。大廳揭額駐節二篆。 오후에는 공락점(公樂店)의 관왕묘(關王廟)와 동령(東嶺)의 급체포(急遞鋪)를 지나서 초하(草河)를 건넜고, 초교점(草橋店)을 지나서 삼하현(三河縣)의 삼하역에 이르렀다. 역문 밖에는 역을 보수한 비명(碑銘)과 서문(序文)이 있는데 순무도 어사(巡撫都御史) 이공(李貢)이 지은 것이었고, 중청(中廳)의 편액에는 이르기를 황화당(皇華堂)이라고 하였으며, 좌우에는 각각 비 하나씩을 세웠는데 모두 중수(重修)한 일을 기록해 놓았다. 하나는 가정(嘉靖) 무신년(1548, 명종 3)에 호부 주사(戶部主事) 주숙(周俶)이 지었고, 하나는 가정(嘉靖) 병인년(1566, 명종 21)에 남경(南京)의 호부 낭중(戶部郞中)으로 치사(致仕)한 교이(喬伊)가 지었으며, 대청에는 ‘주절(駐節)’이란 전서(篆書)로 쓴 두 액자를 걸어 놓았다. 조천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1A_0030_020_0010_2004_001_XML
Rec-2251 청음집_25권_비명_이정귀신도비명 null 遷司憲府執義。擢同副承旨。上疏力辭不許。大臣破格請兼承文院副提調。關王廟成。天將請上同祭。駕辦始具祭文。上不用當製詞臣。而命公製之。公方以該房掌飭鹵簿。聞命立就。詞甚稱旨。卽賜綵幣。改兵曹參知。自此眷遇日渥。每有賓禮。公必在御前。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옮겨졌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는데, 상소를 올려 극력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이 격례(格例)를 깨뜨리고서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임시키기를 청하였다. 관왕묘(關王廟)가 완성되어 중국 장수가 상에게 함께 제사 지내자고 청하였다. 어가(御駕)가 출발 준비를 다 마친 다음에 비로소 제문(祭文)이 갖추어졌는데, 상께서 제문을 담당한 사신(詞臣)의 제문을 쓰지 않고 공에게 명하여 새로 짓게 하였다. 공은 그때 해당 방(房)에서 노부(鹵簿)를 관장하여 신칙하고 있다가 상의 명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제문을 지어 올렸는데, 글이 매우 성상의 뜻에 맞았다. 이에 곧바로 비단을 하사하였으며,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개차하였다. 이로부터 상의 총애가 날로 융성해졌으며 중국 사람들을 접대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공에게 반드시 어전(御前)에 있게 하였다. 청음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99A_0260_010_0010_2008_005_XML
Rec-2252 청장관전서_간본_아정유고5_나통어사일사장 null null 공의 성품은 간묵(簡黙)하고 강직하며 몸가짐이 장엄하였다. 구차히 용납하기를 부끄러워하며, 언의(言議)는 높고 엄격하였다. 온갖 비방이 엉클어져 일어나되 조금도 숙이는 태도가 없으며, 일을 요량하여 움직일 적에는 마치 신(神)과 같았다. 용골대가 우리나라에 와 관에 머물고 있을 때, 하루는 용골대가 말을 달려 없어져 버리므로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공이 급히 병조 판서 김시양(金時讓)을 찾아가 보고, 지공자(支供者)로 하여금 빨리 동관왕묘(東關王廟)로 가 기다리게 하고 말하기를, “이 오랑캐놈이 필시 남몰래 남한산성을 정탐하려는 심산일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올 때 에는 반드시 동관왕묘에 들러 잠시 쉴 것이니, 우리가 먼저 동관왕묘에 나가 기다리다가 영접하게 되면, 저 오랑캐가 감히 우리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과연 공의 말과 같았고 용골대는 몹시 무안해 하였다. 공이 왕왕 이와 같이 기이한 계책을 내었다. 청장관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7A_0200_010_0030_2000_004_XML
Rec-2253 청장관전서_56권_양엽기3_주허후 null null 성양경왕(城陽景王)은 바로 한(漢) 나라의 종실(宗室) 주허후(朱虛侯) 장(章)이다. 《풍속통(風俗通)》 에, “낭야(琅邪)ㆍ청주(靑州)ㆍ육군(六郡)으로부터 발해(渤海)에 이르기까지 모두 유장(劉章)을 위하여 사당을 세웠는데, 다만 낙안태수(樂安太守) 진번(陳藩)과 제남상(濟南相) 조조(曹操)는 이런 일을 모두 금지했으나 그 후에 차츰 전과 같이 회복하였다.” 하였다.《오잡조(五雜組)》 에는, “당(唐) 나라 이전에는 주허후 유장을 높이 받들어 집집마다 사당을 세우고, 호호마다 지금의 관왕(關王)에게 빌 듯 복을 빌었다 한다. 그러나 장목왕(壯繆王)이 일어나면서부터 주허후의 신(神)은 또 어디로 갔는가? 지금 세상에 숭봉(崇奉)하는 정신(正神)으로는 관음대사(觀音大師)ㆍ진무상제(眞武上帝)ㆍ벽하원군(碧霞元君) 셋이 있어 관장목(關壯繆)과 더불어 향화(香火)를 동일하게 받고 있다. 그러므로 부녀자(婦女子)들은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에 대하여 말을 하면 혹 알지 못하나, 사신(四神)만은 공경히 믿으며 감히 마음속으로 그르게 여겨 거리에서 비난하는 사람이 없으니 또한 천지(天地)와 더불어 길이 존재할 것이다.” 하고, 또, “관왕(關王)은 당(唐) 나라 이전에는 소문이 있지 않았는데 송(宋) 나라에 이르러 염지(鹽池)의 일로 인해 마침내 영험이 나타났다.” 하였다. 덕무(德懋)는 생각하건대, 신(神)은 스스로 영험한 것이 아니요 사람의 마음을 의지하여, 따라서 성하고 쇠하는 것이니, 지성(至誠)이 독실(篤實)하면 이치가 갖추어지고 형세가 중하면 기(氣)가 응한다고 본다. 한(漢) 나라로부터 당(唐) 나라에 이르기까지는 주허후를 집집마다 경건하게 받들었으니 자연 오늘날 관왕(關王)과 같이 영험이 있었을 것인데 전기(傳記)로는 상고할 수가 없다. 그러나 주허후의 쇠퇴는 인심이 또한 해이(解弛)해짐에 따라 신도 영험이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관왕묘(關王廟)가 처음 왕성할 때에는 공사(公私) 간에 경건히 받드는 사람이 해마다 늘어나고 날마다 보태어졌으니 그 영험의 보응(報應)을 확실하게 근거할 만한 것들이 이따금 있었다. 그러나 가령 몇 백 년 뒤에 경건히 받든 사람들이 쇠퇴해지면 신도(神道)도 끝나고 또 그 뒤를 이어 일어나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그 예로는 악무목(岳武穆)과 같은 유로써 영험(靈驗)이 관왕보다 못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씨(李氏)의《사설(僿設)》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축윤명(祝允明)의 관왕묘기(關王廟記)에 ‘송(宋) 나라 때에는 무안왕(武安王)으로 추봉(追封)하고 묘호(廟號)를 의용(義勇)이라 하였다. 그리고 도가(道家)에서도 그를 높여 신군(神君)으로 삼았다.’ 하였는데, 무엇이 청정무위(淸淨無爲)한 도가에 관계되기에 숭상하여 신봉함이 여기에 이르렀는가? 생각건대, 수련(修鍊)의 술법은 반드시 귀매(鬼魅)를 몰아내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 뜻으로 볼 때 명(明)나라에서 복마왕(伏魔王)으로 추봉한 것이 바로 그 사실이다. 서국(西國) 주종원(朱宗元)의 말이 가장 실지에 맞는다. 그는 ‘명 나라의 복마란 마귀를 구제했기 때문이다. 마귀의 성품은 본디 제 몸을 떠받들게 하고자 하는 것이므로 옛 선비의 명목(名目)을 가탁하여 나타나서 신이(神異)를 부려 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러보게 하는 것이고, 참으로 관우(關羽)의 신(神)이 있어서 이와 같은 것이 아니다.’ 했다.” 청장관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7A_0560_010_0070_2000_009_XML
Rec-2254 청장관전서_68권_한죽당섭필_상_탄보묘 null null 남원(南原)의 부성(府城) 서쪽에 관왕묘(關王廟)가 있다. 그런데 신축년(1781, 정조 5) 봄에 금상(今上 정조)께서 어필(御筆)로 탄보묘(誕報廟) 3자를 써서 감서(監書)에게 명하여 가지고 가 걸어 놓게 하였다. 임인년(1782, 정조 6) 가을, 내가 사근역(沙斤驛)에 부임하던 길에 관왕묘에 들러 배알하였다. 관왕의 목상(木像)이 매우 장대한데 금관(金冠)을 쓰고 홍포(紅袍)를 입었고 앞에는 두 장수가 시립(侍立)하고 있었다. 사당의 뜰에 비(碑)가 있는데 만력(萬曆) 기해년(1599, 선조 32)에 도독(都督) 유정(劉綎)이 세운 것으로 비가 다 깎이고 떨어져나갔다. 비문도 유정이 지은 것인데 말이 매우 졸렬하고 거칠다. 청장관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7A_0680_010_0020_2000_012_XML
Rec-2255 포저집_34권_행장_문충이공행장 null 關王廟初成。天將往奠。臨行。請上同奠。倉卒行出。奠須有文。乘輿已駕。請宣召知製敎。宣廟特命公製之。公承命立製以進。有鳳眼虯髥。森然若見。赤兔偃月。新回酣戰等句。宣廟大稱賞。賜錦段。其後親祭楊遊擊祭文及答經理揭帖。皆命公製進。輒賜錦段。 관왕묘(關王廟)가 낙성되자 중국 장수가 제사를 올리러 가면서 출발할 즈음에야 상에게 함께 제사를 올리자고 청하였으므로 상이 창졸간에 행행하게 되었다. 여기에 필요한 제문(祭文)을 마련해야 했는데, 승여(乘輿)에 이미 멍에를 멘 상태에서 유사(有司)가 지제교(知製敎)를 불러올 것을 청하니, 선묘가 특명을 내려 공에게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에 공이 명을 받들어 그 즉시로 지어 올렸는데, 그 내용 중에 “봉황 같은 눈에 용 같은 수염의 그 모습, 지금도 삼연히 눈에 보이는 듯한데, 적토마 타고 언월도 들고서, 지금 막 격전 치르고 돌아오셨네.〔鳳眼虯髥 森然若見 赤兎偃月 新回酣戰〕”라는 등의 구절이 있었다. 선묘가 이 제문을 보고는 크게 칭찬하며 비단을 상으로 내렸다. 그 뒤에 상이 양 유격(楊遊擊)을 친히 제사 지낼 때의 제문과 경리(經理)에게 답하는 게첩(揭帖)도 모두 공에게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는데, 그때마다 비단을 하사하였다. 포저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21A_0340_010_0010_2007_006_XML
Rec-2256 표해록(최부)_2권_1488_0319 14880319 過良店驛。是日晴。早發過皮口鋪,高家鳳鋪。至吳橋縣地方。又過羅家口,高官廠等鋪,關王廟。至濟南府地方良店驛。又過桑園兒,薄皮口鋪,狼家口鋪,郭家口鋪,舊連窩鋪。至連窩驛。又至連窩遞運所而泊。 양점역(良店驛)을 지났음. 이날은 맑았습니다. 일찍 출발, 피구포(皮口鋪)ㆍ고가봉포(高家鳳鋪)를 지나서 오교현(吳橋縣) 지방에 이르고, 또 나가구(羅家口)ㆍ고관창(高官廠) 등 포(鋪)와 관왕묘(關王廟)를 지나서 제남부(濟南府) 지방의 양점역(良店驛)에 이르고, 또 상원아(桑園兒) 박피구포(薄皮口鋪)ㆍ낭가구포(狼家口鋪)ㆍ곽가구포(郭家口鋪)ㆍ구련와포(舊連窩鋪)를 지나서 연와역(連窩驛)에 이르고, 또 연와 체운소(連窩遞運所)에 이르러 숙박했습니다. 표해록_최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0A_0020_020_0190_2004_003_XML
Rec-2257 표해록(최부)_3권_1488_0504 14880504 至撫寧衛。是日晴。過東關遞運所。至驢槽河。河之北岸。有大石如槽。號爲石槽。諺傳唐張果飼驢之器。又過國家鋪,十八里鋪,雙望鋪,儀院嶺鋪,蘆峯口鋪,鋪。至陽河。河源出列陀山。經撫寧縣城西八里許。又過民壯敎場門。入撫寧縣城西門。過關王廟。寓于撫寧衛。兔耳,鏵子,大崇,連峯諸山。圍城之南北。治西有西關遞運所。 무령위(撫寧衛)에 이르렀음. 이날은 맑았습니다. 동관 체운소(東關遞運所)를 지나서 여조하(驢槽河)에 이르렀는데, 노조하의 북쪽 언덕에는 구유[槽] 같은 큰 돌이 있는데, 석조(石槽 돌구유)라 호칭하였습니다. 시속에서 전하기를, 당 나라 장과(張果)가 당나귀를 먹이던 그릇이라고 합니다. 또 국가포(國家鋪)ㆍ십팔리포(十八里鋪)ㆍ쌍망포(雙望鋪)ㆍ의원령포(儀院嶺鋪)ㆍ노봉구포(蘆峯口鋪)ㆍ녹궁포(鋪)를 지나서 양하(陽河)에 이르니, 양하의 근원은 열타산(列陀山)에서 나왔습니다. 무령현성(撫寧縣城) 서쪽을 8리 가량 지나고 또 민장교장문(民壯敎場門)을 거쳐서 무령현성의 서문에 들러 관왕묘(關王廟)를 지나서 무령위(撫寧衛)에 유숙했습니다. 토이산(兎耳山)ㆍ화자산(鏵子山)ㆍ대숭연봉(大崇連峯) 등 여러 산들이 성 남북에 둘러싸 있었습니다. 치소(治所)의 서쪽에 서관 체운소(西關遞運所)가 있었습니다. 표해록_최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0A_0030_030_0040_2004_003_XML
Rec-2258 표해록(최부)_3권_1488_0523 14880523 至遼陽驛。是日陰而雷。自驛傍衛城而西而北而東。過遞運所,土河鋪,甘泉鋪,關王廟。至鞍山驛。驛之東有遼高山。西有遼下山。又過武安王廟,長占鋪。至沙河鋪。有二水俱帶于鋪之東西。名皆沙河。蓋自通州以來。地多沙土。故水以沙河得名者多。又過首山鋪。至遞運所城。城卽八里莊也。過接官亭。至遼陽在城驛。驛在遼東城西。 요양역(遼陽驛)에 이르렀음. 이날은 흐렸다가 천둥이 쳤습니다. 요양역 곁의 위성(衛城)에서 서쪽으로, 또 북쪽으로 해서 또 동쪽으로 가서 체운소(遞運所)ㆍ토하포(土河鋪)ㆍ감천포(甘泉鋪)ㆍ관왕묘(關王廟)를 지나 안산역(鞍山驛)에 이르니, 안산역의 동쪽에는 요고산(遼高山)이 있고, 서쪽에는 요하산(遼下山)이 있었습니다. 또 무안왕묘(武安王廟)ㆍ장점포(長店鋪)를 지나서 사하포(沙河鋪)에 이르니, 두 강물이 모두 포(鋪 우정(郵亭))의 동쪽과 서쪽을 둘러 있는 까닭으로 명칭을 모두 ‘사하(沙河)’라고 한 것입니다. 대개 통주(通州)로부터 땅이 사토가 많은 까닭에 강물이 ‘사하’란 명칭을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또 수산포(首山鋪)를 지나서 체운소성(遞運所城)에 이르니, 체운소성은 곧 팔리장(八里莊)이었습니다. 접관정(接官亭)을 지나서 요양 재성역에 이르니, 요양 재성역은 요동성의 서쪽에 있었습니다. 표해록_최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0A_0030_030_0230_2004_003_XML
Rec-2259 표해록(최부)_3권_1488_0529 14880529 自遼東登程。是日晴。吳壐與千戶田福偕至驛。引臣等行。出驛城東門外。不一里。乃遼東城也。兩城間有關王廟。行過兀良哈館,泰和門,安定門。至我朝鮮館。館前立標。扁畏天保國四字。又過石河兒。入高麗洞。過大石門嶺,小石門嶺。兩嶺間有王都督墓。又過柳河兒,湯河兒,頭巾站,狼子山。至顯得寨里而歇。里有三四家。乘昏。里人偸去臣之帽匣。匣中藏紗帽囊佩及江南人所贈詩藁。程保告于壐。訊里人索之不得。壐謂臣曰。慢藏誨盜。尙誰咎乎。 요동에서 길을 떠났음. 이날은 맑았습니다. 오새가 천호(千戶) 전복(田福)과 함께 역에 이르러 신 등을 인도해 역성(驛城) 동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거리는 1리가 채 되지 못했는데, 곧 요동성이 있었습니다. 두 성(城 역성과 요동성) 사이에 관왕묘(關王廟)가 있었습니다. 가다가 올량합관(兀良哈館)ㆍ태화문(泰和門)ㆍ안정문(安定門)을 지나서 우리 조선관(朝鮮館)에 이르니, 조선관 앞에 푯말을 세워 ‘외천보국(畏天保國)’이란 네 글자를 써 놓았습니다. 또 석하아(石河兒)를 지나서 고려동(高麗洞)으로 들어와 대석문령(大石門嶺)과 소석문령(小石門嶺)을 지나니, 두 영 사이에 왕 도독(王都督)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또 유하아(柳河兒)ㆍ탕하아(湯河兒)ㆍ두건참(頭巾站)ㆍ낭자산(狼子山)을 지나서 현득채리(顯得寨里)에 이르러 쉬었습니다. 마을에는 3, 4집이 있었는데, 황혼(黃昏)을 이용하여 마을 사람이 신의 모자갑[帽匣]을 훔쳐 갔습니다. 모자갑 속에는 사모(紗帽)ㆍ낭패(囊佩)와 강남 사람이 지어 준 시고(詩藁)를 간직해 두었으므로, 정보가 오새에게 알려서 마을 사람을 신문(訊問)하여 이를 찾으려고 했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오새가 신에게 이르기를, “소홀히 간수하는 것은 도적에게 도적질하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으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표해록_최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0A_0030_030_0290_2004_003_XML
Rec-2260 학봉전집_학봉속집_1권_시_조천기행 null 關王一廟遍天下。金碧處處侈華楹。堂堂義烈感人心。濊時籩豆豐粢盛。 관왕묘는 온 천하에 두루두루 널려 있어 / 關王一廟遍天下 곳곳마다 금빛 단청 기둥이 화려하네 / 金碧處處侈華楹 당당한 그 의열은 사람들 맘 감동케 해 / 堂堂義烈感人心 세시마다 제기에는 제수가 풍성하네 / 歲時籩豆豐粢盛 학봉전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10A_0110_010_1400_2004_002_XML
Rec-2261 학봉전집_학봉일고_1권_시_무안왕묘 null 一介奇男子 千秋萬世名 荊門張虎旅 關北振風聲 未馘鄴中賊 先班漢上兵 身殲義益烈 此外更何營 東都淪喪日 西土中興時 虎躍邦猶倚 人亡事可知 英雄千載恨 籩豆百年儀 彷彿威靈在 天風颯古祠 한 사람의 기이한 남자 있어서 / 一介奇男子 천추토록 만세토록 이름 전하네 / 千秋萬世名 형주에서 용맹한 군대 펼쳤고 / 荊門張虎旅 관북에서 명성 크게 떨치었어라 / 關北振風聲 업중의 도적 미처 베기도 전에 / 未馘鄴中賊 한수(漢水) 가서 군사 먼저 되돌리었네 / 先班漢上兵 몸 죽어서 의기 더욱 불타오르니 / 身殲義益烈 이 이외에 무얼 다시 더 구하리요 / 此外更何營 동도가 몰락하여 가던 그날은 / 東都淪喪日 서토가 중흥하던 바로 그때네 / 西土中興時 범이 뛰자 나라 그에 의지했으니 / 虎躍邦猶倚 죽은 뒤엔 일을 가히 알 수 있어라 / 人亡事可知 영웅은 천 년토록 한 품었는데 / 英雄千載恨 제기에다 백 년토록 의식 올리네 / 籩豆百年儀 위령께서 마치 앞에 계신 듯하여 / 彷彿威靈在 하늘 바람 옛 사당에 소슬히 부네 / 天風颯古祠 학봉전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10A_0210_010_1360_2004_004_XML
Rec-2262 해사록(김세렴)_1636_0811 16360811 出往南關王廟。內乘辛 宗述 先待。朴參判 𥶇 吳全州 端 黃文學 一皓 隨至。俄而上使至。正郞趙 錫胤 修撰李 裯 安邊府使李 基祚 京畿監司尹 履之 都承旨金 慶徵 綾城府院君具宏 東陽尉申 翊聖 來會。畿伯設酌。東陽尉曰。今此萬里行役。何送客落落歟。 대궐을 나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갔는데, 내승(內乘) 신종술(辛宗述)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참판박로(朴𥶇)ㆍ오 전주 단(吳全州端)ㆍ문학(文學) 황일호(黃一皓)가 뒤따라 이르고, 조금 뒤에 상사가 이르렀다. 정랑 조석윤(趙錫胤)ㆍ수찬 이도(李禂)ㆍ안변 부사(安邊府使) 이기조(李基祚)ㆍ경기 감사 윤이지(尹履之)ㆍ도승지 김경징(金慶徵)ㆍ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 구굉(具宏)ㆍ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와서 모였다. 기백(畿伯 경기 감사의 별칭)이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동양위가 말하기를, “이번에 만 리 먼 곳으로 사신을 가는데, 어찌하여 배웅하는 손님들이 드문가?” 하였다. 해사록_김세렴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87A_0010_010_0010_2003_004_XML
Rec-2263 해유록_상_1719_0411 17190411 三使臣以下。悉詣闕拜辭。製述官譯官寫字官外。軍官書記。無肅拜。將出都門。權正郞相一。金判官益謙。以嶺人。貰酒來別。金佐郞履萬。姜直長必慶。洪侍直重聖。各爲詩致意。李進士周鎭。以奚囊藥丸見餽。崔士集。設酒餞追別於路。惓惓如骨。肉三使臣奉國書受節鉞。出崇禮門到關王廟。一行改着靑袍。是日宿良才驛。 세 사신 이하가 모두 대궐에 나아가 절하고 하직하였다. 제술관(製述官), 역관(譯官), 사자관(寫字官) 외에 군관(軍官)과 서기(書記)는 숙배(肅拜)가 없었다. 성문에 나오자, 정랑(正郞) 권상일(權相一)과 판관(判官) 김익겸(金益謙)이 같은 영남 사람으로 술을 사가지고 와서 송별하였고, 좌랑(佐郞) 김이만(金履萬)ㆍ직장(直長) 강필경(姜必慶)ㆍ시직(侍直) 홍중성(洪重聖)이 각각 시를 지어 우의를 표하였다. 진사 이주진(李周鎭)이 해낭(奚囊)과 환약(丸藥)을 선사하였다. 최사집(崔士集)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뒤따라 와 중로에서 송별하였는데, 다정하기가 골육(骨肉)과 같았다. 세 사신이 국서(國書)를 받들고 절월(節鉞)을 받아, 숭례문(崇禮門)으로 나와 관왕묘(關王廟)에 이르러서는 일행이 청포(靑袍)로 바꾸어 입었다. 이날 양재역(良才驛)에서 잤다. 해유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79A_0010_020_0010_2003_001_XML
Rec-2264 해유록_하_1720_0124 17200124 朝渡漢江。太常傔從數人。已來候。三使行齊到城南關王廟。改着紅團領。以次乘馬入京復命。 아침에 한강을 건너니, 태상시(太常寺)의 하인 몇 사람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신의 행차가 일제히 성남(城南) 관왕묘(關王廟)에 도착하여 홍단령(紅團領)으로 고쳐 입고 차례로 말을 타고 서울에 들어가서 복명(復命)하였다. 해유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79A_0030_030_0170_2003_001_XML
Rec-2265 허백당집_허백당시집_4권_시_관왕묘 null 建安天地屯雲雷。卯金大運挽不回。將軍慷慨有大志。欲持橐鑰噓寒灰。曹瞞區區伺大器。慓猾亦是英雄魁。山東老表本庸鄙。顏良文醜非長材。將軍談笑坐唾掌。俯睨兩豎如嬰孩。一劍橫空白馬倒。二十萬衆如死荄。脫身西走扶劉氏。割據劍閣靑崔嵬。身擁a014_267c貔貅駐樊口。鷹瞬虎視雄八垓。何期一夕天不佑。丈夫壯氣如山摧。九泉雙眸終不冥。神鬼飮泣后土哀。英魂千載遇眞主。感應吉夢相隨來。神騎縱橫導前陣。胡雛散盡無塵埃。升平百年古來少。萬民妥帖登春臺。生扶漢室盡臣節。死定大功何壯哉。九州紛紛設廟宇。薦以蘋藻陳樽罍。我行適到廣寧城。殿中遺像高嵬嵬。老樹森森蔭堂廡。斷碑蕪沒生莓苔。訪古酸然意不歇。春風落日空徘徊。 건안 연간의 천지는 운뢰가 둔한 때라서 / 묘금의 대운은 끝내 만회할 수 없었건만 / 장군은 비분강개한 거대한 뜻이 있어 / 다 식은 재에 풀무질을 하려고 했었네 / 조만은 구구하게 대기를 넘보았으니 / 그 교활함은 또한 영웅의 괴수였는데 / 산동의 노표는 본디 못난 자였거니와 / 안량 문추 역시 큰 재목이 아니었기에 / 장군은 담소하면서 손바닥에 침을 뱉고 / 안량 문추를 어린애처럼 하찮게 여기어 / 백마에서 한칼에 그들을 거꾸러뜨리니 / 이십만 군대가 마른풀 꼴이 되어버렸네 / 끝내 서쪽으로 탈주하여 유씨를 도와서 / 푸른 산 우뚝한 검각을 나누어 웅거할 제 / 몸소 용맹한 군사 거느리고 번구에 주둔해 / 호시탐탐 팔방 끝까지 노리고 있었는데 / 어찌 뜻했으랴 하룻밤에 하늘이 돕지 않아 / 장부의 장대한 기개가 산처럼 무너질 줄을 / 구천에서도 두 눈을 끝내 감지 못하니 / 귀신이 슬피 울고 땅귀신도 슬퍼하였네 / 그 영혼이 천 년 만에 참다운 임금을 만나 / 길몽에 감응하여 꿈속에 따라 들어와 / 신병이 종횡으로 앞 군진을 인도하니 / 호추가 다 흩어져서 깨끗이 맑혀졌네 / 백 년의 태평이 예로부터 드물고말고 / 만백성이 춘대에 오른 듯 편안도 해라 / 살아서는 한실을 붙들어 충성을 다하더니 / 죽어서도 큰 공 세워라 어이 그리 장한고 / 구주에 여기저기 수많은 사당을 세워서 / 조촐한 제수에 향기로운 술잔 올리는데 / 나의 행차가 마침 광녕성에 이르러 보니 / 장군 유상은 전각 안에 우뚝이 자리하였고 / 고목들은 늘어서서 전당에 그늘 드리우고 / 잡초에 묻힌 조각난 비석엔 이끼가 올랐네 / 고적을 찾고 보니 상심하는 뜻 그지없어 / 봄바람 석양 아래 부질없이 배회하노라 / 허백당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072A_0050_010_0140_2014_001_XML
Rec-2266 홍재전서_19권_제문_동관왕묘수개고유문_01 null 有儼王宮。有奕王靈。宇宙大節。日月其光。冥應不忒。佑我東方。列祖攸欽。况予齎誠。年年夏月。敬奠有常。庶格微忱。冀垂陰庥。簷桷有漏。門垣宜修。敢薦泂酌。虔告厥由。 관왕(關王)의 궁이 엄연하고 / 관왕의 혼령이 혁연하도다 / 우주에 가득한 절의이고 / 일월과 다투는 광채일세 / 묵묵히 감응함이 어긋나지 않아 / 우리 동방을 도우셨나이다 / 역대의 선왕이 공경한 바였으니 / 나 또한 정성을 바치네 / 해마다 여름철이면 / 경건한 제사를 바침이 상도였네 / 보잘것없는 정성을 흠향하여 / 가만히 보살피길 드리우소서 / 처마의 서까래에 물이 새니 / 문과 담장을 수리함이 마땅하네 / 감히 맑은 술을 바쳐 / 경건히 그 사유를 고하나이다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190_010_0070_2006_003_XML
Rec-2267 홍재전서_19권_제문_남관왕묘수개고유문 null 赫赫王神。萬古英靈。日月炳忠。金石貫誠。睠彼城南。廟貌斯煌。每歲孟夏。虔薦心香。垂祐東土。神化彌彰。式敬式欽。予罔敢忽。垣宇將繕。卜日之吉。玆緣告儀。冀歆淸酌。 혁혁한 관왕의 신이여 / 만고의 영령이로다 / 일월같이 충성이 빛나며 / 금석처럼 정성이 지극했네 / 저 성남을 바라보니 / 사당의 모습 이에 빛나네 / 해마다 초여름이면 / 경건히 심향을 드리네 / 우리 동토를 보우하시니 / 신의 조화 더욱 드러났네 / 이에 공경하고 이에 흠앙하니 / 내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였네 / 담장과 집을 장차 수리하려고 / 날을 점쳐 길일을 얻었네 / 이러한 연유로 고하노니 / 맑은 술을 흠향하길 바라노라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190_010_0080_2006_003_XML
Rec-2268 홍재전서_19권_제문_동관왕묘수개고유문_02 null 殿宇荒頹。宜卽改修。玆以涓吉。敢告厥由。 전우가 황폐 퇴락하니 / 즉시 수리함이 마땅하기에 / 이에 길일을 받아서 / 감히 그 사유를 고하나이다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190_010_0100_2006_003_XML
Rec-2269 홍재전서_19권_제문_동관왕묘치제문_01 null 奕奕明神。翼翼斯宮。誕垂冥祐。永綏我東。誠事之道。實在寡躬。載新牆垣。載繕殿櫳。非欲侈大。寔寓尊慕。工旣告訖。煥然改覩。於東歷拜。謁陵歸路。餘懷耿往。替奠酤脯。 혁혁하게 밝은 신이여 / 우뚝 높은 이 사당이로다 / 크게 보우하심을 드리워 / 길이 우리나라를 편안하게 하였네 / 정성으로 섬기는 도리가 / 실로 과인의 몸에 있노라 / 이에 담장을 새롭게 하고 / 이에 문을 수선하였네 / 사치스럽고 크게 하고자 함이 아니라 / 곧 높이고 사모하는 정성을 깃들임일세 / 공사를 마침을 고하니 / 경관이 빛나게 되었도다 / 동쪽에 두루 절하여 / 능묘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 남은 회포 향함이 있기에 / 술과 포를 바치게 하노라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190_010_0110_2006_003_XML
Rec-2270 홍재전서_19권_제문_남관왕묘치제문_01 null 一體明神。于東于南。旣拜且奠。庶鑑微諴。 일체의 밝은 신이여 / 동쪽과 남쪽이로소이다 / 이미 절하고 제물을 드리오니 / 작은 정성을 살피기 바라나이다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190_010_0170_2006_003_XML
Rec-2271 홍재전서_19권_제문_동관왕묘치제문_02 null 祇拜于廟。八月三日。於昭洋洋。是鑑是騭。 경건히 사당에 절하니 / 팔월 삼일이로다 / 아, 양양히 빛나시니 / 이에 살피어 오르내리도다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190_010_0180_2006_003_XML
Rec-2272 홍재전서_20권_제문_동관왕묘어필비신건고유문 null 廟門肅肅。罇罍薦誠。曷以崇報。莫稱微情。螭首紀功。以永千春。庭甎鋪新。亦及良辰。 사당의 문 엄숙하니 / 술잔에 정성을 갖추어 올리네 / 어떻게 높이 보답할까 / 그 무엇도 이 마음 같은 게 없네 / 비석에 공을 기려 새기니 / 길이 천 년을 이어 가게 하소서 / 묘정의 바닥에 벽돌을 새로 까니 / 또한 좋은 때에 미쳤다네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200_010_0530_2006_003_XML
Rec-2273 홍재전서_20권_제문_남관왕묘어필비신건고유문 null 英爽百代。若偏一邦。三聖醻德。穹龜有雙。仍廊設閣。煥修楹桷。牲醪肥潔。永垂冥騭。 관왕(關王)의 영령 백대에 걸쳐 / 우리나라를 몹시 보살피는 듯하네 / 세 임금에 걸쳐서 덕을 갚으니 / 두 개의 높은 비석이 세워졌네 / 낭을 인하여 각을 설치하니 / 기둥과 서까래를 빛나게 갖추었네 / 희생이 살지고 술이 청결하니 / 길이 어두운 곳에서 도움을 드리우소서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200_010_0540_2006_003_XML
Rec-2274 홍재전서_21권_제문_남관왕묘수개고유문 null 煌煌衮衣。敝予改爲。齎誠涓吉。虔將告儀。 황황한 곤의가 / 해지게 되어 내가 수리하노니 / 정성을 갖추어 길일을 택하여 / 경건히 고하는 의식을 받드노라 /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210_010_0080_2006_003_XML
Rec-2275 홍재전서_22권_제문_동관왕묘수개고유문 null 令辰芬苾。兼告繕葺。簫鼓在庭。洋洋如覿。 좋은 날을 택하여 제사를 드리고 / 겸하여 개수하는 일을 고하네 / 호가(胡家)와 북이 묘정(廟庭)에 있으니 / 양양하게 보는 듯하네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220_010_0060_2006_003_XML
Rec-2276 홍재전서_172권_일득록_인물 null 靈城君朴文秀。眞滿腔熱血。乙卯以前。日拜關王廟。祈祝邦慶。卽此誠意。今世豈易得乎。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는 참으로 가슴속에 열혈(熱血)이 가득한 사람이다. 을묘년(1735, 영조11) 이전에 날마다 관왕묘(關王廟)를 배알하고 나라의 복을 빌었으니, 이런 성의를 지닌 사람을 오늘날 세상에서 어찌 쉽게 얻겠는가.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1720_010_0010_2006_017_XML
Rec-2277 각사등록_경상감영계록_1842_0908 18420908 null 안동(安東)ㆍ성주(星州)의 관왕묘(關王廟)는 도신(道臣)이 순력(巡歷)할 때 봉심(奉審)하도록 전에 정식(定式)으로 정해졌습니다만, 올해 가을의 순력은 비변사(備邊司)의 계하 관문(啓下關文)에 따라 정지하였으므로 지방관(地方官)이 봉심하여 첩보(牒報)하라는 내용으로 관문을 보내 각각의 해당 읍에 통지하였더니, 이번에 도부(到付)한 안동 부사 권용경(權用經)ㆍ성주 목사 이인량(李寅亮)의 첩정(牒呈)에, “직접 관왕묘에 나아가 상세히 봉심하니, 석상(石像)ㆍ의대(衣襨)ㆍ포진(舖陳)ㆍ묘우(廟宇)가 모두 흠이 없었습니다.”라고 모두 첩정을 보내왔습니다. 연유를 치계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510_010_1330_2015_041_XML
Rec-2278 각사등록_경상감영계록_1863_0816 18630816 null 안동(安東)ㆍ성주(星州)의 관왕묘(關王廟)는 도신(道臣)이 순력(巡歷)할 때 봉심(奉審)하도록 전에 정식(定式)으로 정해졌습니다만, 올해 가을의 순력은 비변사(備邊司)의 계하 관문(啓下關文)에 따라 정지하였으므로 지방관이 봉심하여 첩보(牒報)하라는 내용으로 관문을 보내 각각의 해당 읍에 통지하였더니, 이번에 도부(到付)한 안동 겸임 안동진영장(安東兼任安東鎭營將) 유환(柳晥)과 성주 겸임 지례 현감(星州兼任知禮縣監) 정기화(鄭夔和)의 첩정(牒呈)에, “직접 관왕묘에 나아가 상세히 봉심하니, 석상(石像), 의대(衣襨), 포진(鋪陳), 묘우(廟宇)가 모두 흠이 없었습니다.”라고 모두 첩정을 보내왔습니다. 연유를 치계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520_010_0850_2015_041_XML
Rec-2279 각사등록_경상감영계록_1872_0222 18720222 null 안동(安東)ㆍ성주(星州)의 관왕묘(關王廟)는 도신(道臣)이 순력(巡歷)할 때 봉심하도록 전에 정식으로 정하였습니다만, 올해 봄의 순력은 의정부의 계하 관문(啓下關文)에 따라 정지하였으므로 지방관이 봉심하여 첩보하라는 내용으로 관문을 보내 각각의 해당 읍에 통지하였더니, 이번에 도부(到付)한 안동 겸임 안동(安東兼任安東) 진영장(鎭營將) 안학선(安鶴善)과 성주 목사(星州牧使) 조운긍(趙雲兢)의 첩정에, “직접 관왕묘에 나아가 상세히 봉심하니, 석상(石像)ㆍ의대(衣襨)ㆍ포진(舖陳)ㆍ묘우(廟宇)가 모두 흠이 없었습니다.”라고 모두 첩정을 보내왔으므로 연유를 치계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530_090_0290_2015_044_XML
Rec-2280 각사등록_경상감영계록_1872_0810 18720810 null 안동(安東)ㆍ성주(星州)의 관왕묘(關王廟)는 도신(道臣)이 순력(巡歷)할 때 봉심(奉審)하도록 전에 정식(定式)으로 정해졌습니다만, 올해 가을의 순력은 의정부의 계하 관문(啓下關文)에 따라 정지하였으므로 지방관이 봉심하여 첩보(牒報)하라는 내용으로 관문을 보내 각각의 해당 읍에 통지하였더니, 이번에 도부(到付)한 안동 부사 박제관(朴齊寬)과 성주 목사 조운긍(趙雲兢)의 첩정(牒呈)에, “직접 관왕묘에 나아가 상세히 봉심하니, 석상(石像)ㆍ의대(衣襨)ㆍ포진(舖陳)ㆍ묘우(廟宇)가 모두 흠(欠)이 없습니다.”라고 모두 첩정을 보내왔습니다. 연유를 치계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530_090_1500_2015_044_XML
Rec-2281 각사등록_경상감영계록_1890_0815 18900815 null 안동(安東)과 성주(星州)의 관왕묘(關王廟)는 도신(道臣)이 순력(巡歷)할 때 봉심(奉審)하는 것이 전에 정식(定式)이 있었습니다. 금년 가을 순력은 의정부(議政府)의 계하 관문(啓下關文 임금의 재가를 받은 왕명(王命)을 전하는 관문)에 따라 정지했으므로 지방관이 봉심하여 첩보(牒報)하도록 각 해당 읍에 관문을 보내 통지했더니, 이번에 도착한 안동 겸임 안동 영장(安東兼任安東營將) 이종호(李宗鎬), 성주 목사(星州牧使) 김갑수(金甲秀)의 첩정(牒呈)에, “직접 관왕묘에 나아가 상세하게 봉심하니, 석상(石像)ㆍ의대(衣襨)ㆍ포진(鋪陳)ㆍ묘우(廟宇)에 모두 흠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연유를 치계하오니 이런 내용을 잘 아뢰어 주소서.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530_120_0230_2015_045_XML
Rec-2282 각사등록_경상도관초_1892_0903 18920903 null 상고(相考)하는 일. 살펴보건대, 전에 유유상(鍮油商)을 영구히 본 아문(衙門)에 넘겨주는 한 가지 일에 대하여 이미 관칙(關飭)한 것이 문건에 기록되어 있다. 방금 온 첩보(牒報)의 내용을 요약해 보건대, “해당 각 읍의 유유상(鍮油商) 등이 호소하기를, ‘유사 도소(鍮社都所)에서 지난번에 도내(道內) 유유상과 점인(店人)들에게 매달 거두는 것을 빨리 독촉했으니, 유점(鍮店)을 반드시 그만두면 장삿길이 영원히 끊어질 것입니다. 특별히 논보(論報)하여 수세(收稅)를 혁파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이 유유상은 가난하고 쇠잔하여 의지할 데가 없는데 장차 수탈을 당하면 뿔뿔이 흩어지는 데 이를 것입니다. 사실에 근거하여 첩보하니, 위에서 말한 수세 한 항목은 참작하고 헤아려 시행하지 말아 각각 생업을 편안히 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방금 해당 도의 안동 유상(油商) 김한주(金漢柱) 등이 호소한 것을 받아 보니, “제가 상임방(商任房)을 창설한 것은 진실로 상민(商民)을 보호하여 재화(財貨)를 불려 판매를 늘리려는 데서 연유했는데, 아! 저 보부상 가운데 무뢰한 무리들이 도당(徒黨)을 성대하게 모아 만나기만 하면 멋대로 침탈하였습니다. 지난 경진년(庚辰年, 1880, 고종17)에 비로소 임방(任房)을 설치하여 저희들 장내(掌內)는 안동진관(安東鎭管)의 15읍이었으니, 다른 상사와 차이가 있는 것은 본부(本府)에서 서악(西岳)의 관왕묘(關王廟) 위(位)와 세자궁(世子宮)의 장수를 축원하는 등유(燈油)를 진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영읍(營邑)의 완문(完文)이 있어서 거의 폐단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해에 풍기(豐基) 유상(油商) 두세 사람이 장내의 약조(約條)를 따르지 않고 보부상에게 투입했는데, 그 해당 읍의 보부상 홍춘겸(洪春兼)ㆍ김준이(金俊伊)ㆍ김여현(金汝賢)ㆍ최대여(崔大汝), 영천(榮川 현재의 영주(榮州)) 이경실(李敬實) 등이 너희들이 가지고 온 공문이라 하며 즉시 강제로 불태우고 저희들 접장(接長)을 구타하였으며, 또 총각 보부상 30여 명이 저희들을 결박하여 받든 공문을 다 억지로 빼앗았습니다. 이에 감히 외람되게 호소하여 간절히 바라니, 진남(鎭南) 삼도(三道)에 엄하게 관문을 보내 위에서 말한 접장 김준이 및 같이 도모한 홍춘겸 등 다섯 놈을 모두 잡아 올려 판하(判下)한 막중한 절목(節目)과 억지로 빼앗아 간 각 공문을 특별히 후록(後錄)한 대로 일일이 찾아 주며, 모두 즉시 엄하게 형신하고 조감(照勘)하여 이 임방으로 하여금 생업을 잃는 것을 면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모두 조사하니, 해당 도내(道內) 유유상(鍮油商)이 수세를 견디지 못해 등소(等訴)하는 데 이르렀고 또 등소에 근거하여 자세히 첩보하는 데 이르렀으니, 그 지나치게 거둔 것이 해가 됨을 헤아릴 수 있겠다. 첩보한 대로 해당 수세에 관한 한 항목은 신칙하여 즉시 시행하지 말게 하고, 또 만약 폐단이 되는데도 여기에서 그치지 않을 경우에는 모두 소유한 절목을 본 아문에 첩보를 올려 철폐하게 하고, 안동 유상 등이 보부상들에게 능멸을 멋대로 입고 공문을 빼앗기는 데 이르렀으니, 징벌을 시행해야 합당하다. 관문이 도착하는 즉시 풍기와 면읍(面邑)에 엄하게 관문을 보내 소란을 피운 보부상 홍춘겸 등을 잡게 하여 특별히 징벌하고, 빼앗긴 공문과 영수증〔票據〕 및 각건(各件)을 후록한 대로 일일이 찾아주어 각각 생업을 편안하게 하고 장삿길을 방해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550_070_0270_2016_046_XML
Rec-2283 각사등록_호남계록_1879_1026 18791026 null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 신 심이택(沈履澤)은 삼가 상고(相考)의 일을 아룁니다. 전에 도착한 예조의 관문에, “이번에 계하(啓下)한 관찰사의 첩정(牒呈)에 따라 금년 기묘년(己卯年, 1879, 고종16) 7월부터 12월까지 매달 행하는 각 도(道)의 제사 중에 7월 안에 행하는 여제(厲祭)는 15일에 행하고,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 성황신에게 여제(厲祭)의 거행을 알리는 제사)는 여제일 기일 3일 전인 12일에 행하며, 8월 안에 행하는 사직 대제(社稷大祭)는 상무일(上戊日)인 초7일에 행하고, 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의 석전제(釋奠祭)는 상정일(上丁日)인 초6일에 행하고, 조경묘(肇慶廟)는 전주에서 초2일에 행하고, 경기전(慶基殿)의 전주 추석제는 15일에 행하고, 한라산은 제주에서, 지리산은 남원ㆍ남해ㆍ나주에서, 금성산(錦城山)은 나주에서 초3일에 행하고, 풍운뇌우제(風雲雷雨祭)는 제주에서 사일(社日)인 초7일에 행하며, 9월 안에 거행하는 둑제(纛祭)와 관왕묘제(關王廟祭)는 고금도(古今島)와 남원에서 상강일(霜降日)인 초10일에 행하고, 성황발고제는 여제 기일 3일 전인 28일에 행하며, 10월 안에 행하는 여제는 초1일에 행하며, 11월 안에 행하는 경기전의 동지제(冬至祭)는 초10일에 행하며, 12월 안에 행하는 경기전의 전주 납향제(臘享祭)는 초8일에 행하도록 한 일에 근거한 예조의 계목(啓目)에, ‘첩정은 첨부하였습니다. 지난번에 각 도(道) 제사의 향(香)ㆍ축문(祝文)ㆍ폐백(幣帛)은 해당 관사로 하여금 규례를 살펴 마련하여 내려 보내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또한 각 본도에서 제물을 정성스럽게 마련하여 예문대로 설행하도록 행문 이첩(行文移牒 공문서를 발송하여 조회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그대로 윤허한다고 계하하였다. 계하의 뜻을 잘 받들어 도내 각 읍에 알려 시행하게 할 것이며, 각 제사를 설행한 뒤 규례대로 계문(啓聞)하고 점이(粘移)를 모아 올려 보내 참고하게 하되, 제주 목사에게 똑같이 알려 시행하게 하며, 관문이 도착한 즉시 먼저 회이(回移)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각 제사 날짜는 낱낱이 거론하여 해당 읍에 알려 당일에 제물을 정성스럽게 마련하여 예문에 따라 설행하게 하였는데, 각 고을 수령 중에 다른 제관이 진참(進參)한 경우와 말미를 받았거나 교체된 곳은 정식에 따라 진사(進士)나 유생(儒生)으로 거행하게 한 뒤 모두 보고하였으므로 헌관(獻官)의 직(職)과 성명을 기록하여 성책을 수정하여 예조에 올려 보냅니다. 제주 한라산제와 풍운뇌우제는 제주목에서 설행한 뒤 곧바로 치계하도록 전에 이미 관문을 등서하여 알렸습니다. 연유를 아울러 삼가 갖추어 계문(啓聞)합니다.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690_040_1660_2017_056_XML
Rec-2284 각사등록_호남계록_1885_0510 18850510 null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 신 윤(尹)은 삼가 상고(相考)의 일을 아룁니다. 전에 도착한 예조의 관문(關文)에, “본조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계하(啓下)한 관상감(觀象監)의 첩정(牒呈)에 따라 오는 을유년 정월부터 5월까지 각각의 달에 행하는 각 도의 제향(祭享)에서 정월에 행하는 전주(全州)의 경기전 정조제(慶基殿正朝祭)는 초1일에 행하고, 남원(南原)의 지리산제(智異山祭), 나주(羅州)의 남해당제(南海堂祭), 나주의 금성산제(錦城山祭), 제주(濟州)의 한라산제(漢拏山祭) 등의 제향은 11일에 행하고, 고금도(古今島)와 남원(南原)의 둑제(纛祭)와 관왕묘제(關王廟祭)는 경칩일(驚蟄日)인 19일에 행하고, 2월에 행하는 사직 대제(社稷大祭)는 상무일(上戊日)인 초8일에 행하고, 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 석전제(釋奠祭)는 상정일(上丁日)인 초7일에 행하고, 전주의 조경묘제(肇慶廟祭)는 초7일에 행하고, 남원의 지리산제, 나주의 남해당제, 나주의 금성산제, 제주의 한라산제 등의 제향은 11일에 행하고, 여제(厲祭)는 청명일(淸明日)인 19일에 행하고,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 성황신에게 여제(厲祭)의 거행을 알리는 제사)는 여제일 3일 전인 16일에 행하고, 풍운뇌우제(風雲雷雨祭)는 제주의 사일(社日)인 초8일에 행하고, 5월에 행하는 전주의 경기전 단오제(慶基殿端午祭)는 초5일에 행하는 일에 의거하여 본조의 계목(啓目 주로 작은 일에 대해서 임금에게 상주하는 문서)에 첩정을 첨부하였습니다. 전에 각 도의 각 제향에 쓸 향축(香祝 향과 축문(祝文))과 폐백은 해당 관사로 하여금 전례에 비추어 마련하여 내려 보내게 하였습니다. 또한 각기 본도로 하여금 전물(奠物)을 정갈하게 마련하게 하여 예문(禮文)에 따라 설행하라는 뜻으로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한다고 계하하였다. 계하의 뜻을 잘 받들어 도내 각 고을에 거듭 밝혀 알려 시행하되, 각 제향을 설행한 뒤 전례대로 계문(啓聞)하고 첨부한 문서를 수합하여 올려 보내서 빙고(憑考)할 수 있게 하고, 제주목(濟州牧)에도 일체 알려 시행하며, 관문이 도착한 즉시 먼저 회답 공문을 보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각 제향의 날짜를 일일이 거론하여 각 해당 고을에 알렸더니, 각 당일에 전물을 정갈하게 마련하여 예문에 따라 설행하였습니다. 각 고을의 수령이 다른 곳에 제관(祭官)으로 나아가 참석하였거나 말미를 받았거나 교체(交遞)한 곳은 정식에 따라 생진(生進) 유생으로 거행한 뒤 모두 보고해 왔으므로, 헌관(獻官)의 직(職)과 성명을 개록(開錄)한 성책(成冊)을 수정(修正)하여 예조에 올려 보냅니다. 제주의 한라산제와 풍운뇌우제는 본목(本牧)에서 설행한 뒤 바로 치계(馳啓)하라는 뜻으로 전에 이미 관문을 등서(謄書)하여 알렸습니다. 연유를 아울러 삼가 갖추어 계문(啓聞)합니다.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690_060_1000_2017_057_XML
Rec-2285 각사등록_호남계록_1885_1201 18851201 null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 신 윤(尹)은 삼가 상고(相考)의 일을 아룁니다. 전에 이미 도착한 예조(禮曹)의 관문(關文)에, “이번에 계하(啓下)한 관상감(觀象監)의 첩정(牒呈)에 따라 오는 을유년 7월부터 12월까지 각각의 달에 행하는 각 도의 제향(祭享)은 7월에 행하는 여제(厲祭)는 15일에 행하고,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는 여제일 3일 전인 12일에 행하고, 8월에 행하는 사직 대제(社稷大祭)는 상무일(上戊日)인 초2일에 행하고, 문선왕(文宣王) 석전제(釋奠祭)는 상정일(上丁日)인 초1일에 행하고, 전주(全州)의 조경묘제(肇慶廟祭)는 초6일에 행하고, 전주의 경기전 추석제(慶基殿秋夕祭)는 15일에 행하고, 제주(濟州)의 한라산제(漢拏山祭), 남원(南原)의 지리산제(智異山祭), 나주(羅州)의 남해당제(南海堂祭), 나주의 금성산제(錦城山祭)는 초7일에 행하고, 제주의 풍운뇌우제(風雲雷雨祭)는 사일(社日)인 12일에 행하고, 9월에 행하는 고금도(古今島)와 남원(南原)의 둑제(纛祭)와 관왕묘제(關王廟祭)는 상강일(霜降日)인 16일에 행하고, 성황발고제는 여제일 3일 전인 28일에 행하고, 10월에 행하는 여제는 초1일에 행하고, 11월에 행하는 전주의 경기전 동지제(慶基殿冬至祭)는 17일에 행하고, 12월에 행하는 전주의 경기전 납향제(慶基殿臘享祭)는 19일에 행하는 일에 의거하여 본조의 계목(啓目)에 첩정을 첨부하였습니다. 전에 각 도의 각 제향에 쓸 향축(香祝)과 폐백은 해당 관사로 하여금 전례에 비추어 마련하여 내려 보내게 하였습니다. 또한 각기 본도로 하여금 전물(奠物)을 정갈하게 마련하여 예문(禮文)에 따라 설행하라는 뜻으로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한다고 계하(啓下)하였다. 계하의 뜻을 잘 받들어 도내 각 고을에 거듭 밝혀 알려 시행하되, 각 제향을 설행한 뒤 전례대로 계문(啓聞)하고 첨부한 문서를 수합하여 올려 보내서 빙고(憑考)할 수 있게 하고, 제주목(濟州牧)에도 일체 알려 시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각 제향의 날짜를 일일이 거론하여 각 해당 고을에 알려 각 당일에 전물을 정갈하게 마련하여 예문에 따라 설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각 고을의 수령이 다른 곳에 제관(祭官)으로 나아가 참석하였거나 말미를 받았거나 교체(交遞)한 곳은 정식에 따라 생진(生進) 유생으로 거행한 뒤 모두 보고해 왔으므로, 헌관(獻官)의 직(職)과 성명을 개록(開錄)하여 성책(成冊)하고 수정(修正)하여 예조에 올려 보냅니다. 제주의 한라산제와 풍운뇌우제는 본목(本牧)에서 설행한 뒤 바로 치계(馳啓)하라는 뜻으로 전에 이미 관문을 등서(謄書)하여 알렸습니다. 연유를 아울러 삼가 갖추어 계문(啓聞)합니다.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690_060_2880_2017_057_XML
Rec-2286 각사등록_호남계록_1886_0727 18860727 null 행전라도 관찰사 겸 도순찰사 신 윤(尹)은 삼가 상고(相考)의 일을 아룁니다. 전에 도착한 예조의 관문(關文)에, “본조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계하(啓下)한 관상감(觀象監)의 첩정(牒呈)에 따라 오는 병술년 정월부터 5월까지 각각의 달에 행하는 각 도의 제향(祭享)은 정월에 행하는 전주(全州)의 경기전 정조제(慶基殿正朝祭)는 초1일에 행하고, 남원(南原)의 지리산제(智異山祭), 나주(羅州)의 남해당제(南海堂祭), 나주의 금성산제(錦城山祭), 제주(濟州)의 한라산제(漢拏山祭) 등의 제향은 초3일에 행하고, 고금도(古今島)와 남원(南原)의 둑제(纛祭)와 관왕묘제(關王廟祭)는 경칩일(驚蟄日)인 30일에 행하고, 2월에 행하는 사직 대제(社稷大祭)는 상무일(上戊日)인 초4일에 행하고, 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 석전제(釋奠祭)는 상정일(上丁日)인 초3일에 행하고, 전주의 조경묘제(肇慶廟祭)는 초3일에 행하고, 남원의 지리산제, 나주의 남해당제, 나주의 금성산제, 제주의 한라산제 등의 제향은 초10일에 행하고,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는 여제일(厲祭日) 3일 전인 28일에 행하고, 제주의 풍운뇌우제(風雲雷雨祭)는 사일(社日)인 14일에 행하고, 3월에 행하는 전주의 경기전 한식제(慶基殿寒食祭)는 초3일에, 여제(厲祭)는 청명일(淸明日)인 초2일에 행하고, 5월에 행하는 전주의 경기전 단오제(慶基殿端午祭)는 초5일에 행하는 일에 의거하여 본조의 계목(啓目)에 첩정을 첨부하였습니다. 전에 각 고을의 각 제향에 쓸 향축(香祝)과 폐백은 해당 관사로 하여금 아뢴 대로 마련하여 내려 보냈으니, 각기 본도로 하여금 전물(奠物)을 정갈하게 마련하게 하여 예문(禮文)에 따라 설행하라는 뜻으로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한다고 계하하였다. 계하의 뜻을 잘 받들어 시행하되, 도내 각 고을 및 제주목(濟州牧)에 일체 통지하여 시행하며, 각 제향을 설행한 뒤 전례대로 계문(啓聞)하고 첨부한 문서를 수합하여 올려 보내서 빙고(憑考)할 수 있게 하되, 관문이 도착하면 우선 회답 공문을 보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각 제향의 날짜를 일일이 거론하여 각 해당 고을에 통지하여 각 당일에 전물을 정갈하게 마련하여 예문에 따라 설행하였습니다. 각 고을의 수령이 다른 곳에 제관(祭官)으로 나아가 참석하였거나 말미를 받았거나 교체(交遞)한 곳은 정식에 따라 생진(生進) 유생(儒生)으로 거행한 뒤 모두 보고해 오므로 헌관(獻官)의 직(職)과 성명을 성책(成冊)에 개록(開錄)하고 수정(修正)하여 예조에 올려 보냅니다. 제주의 한라산제와 풍운뇌우제는 본목(本牧)에서 설행한 뒤 바로 치계(馳啓)하라는 뜻으로 전에 이미 관문을 등서(謄書)하여 통지하였습니다. 연유를 아울러 삼가 갖추어 계문(啓聞)합니다.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690_070_1100_2017_058_XML
Rec-2287 각사등록_호남계록_1886_1124 18861124 null 행전라도 관찰사 겸 도순찰사 신 윤(尹)은 삼가 상고(相考)의 일을 아룁니다. 이번에 도착한 예조(禮曹)의 관문(關文)에, “본조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계하(啓下)한 관상감(觀象監)의 첩정(牒呈)에 따라 올해 병술년 7월부터 12월까지 각각의 달에 행하는 각 도의 제향(祭享)에서 7월에 행하는 여제(厲祭)는 15일에 행하고,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는 여제일 3일 전인 12일에 행하고, 8월에 행하는 사직 대제(社稷大祭)는 상무일(上戊日)인 초8일에 행하고, 문선왕 석전제(文宣王釋奠祭)는 상정일(上丁日)인 초7일에 행하고, 전주(全州)의 조경묘제(肇慶廟祭)는 초2일에 행하고, 전주의 경기전 추석제(慶基殿秋夕祭)는 15일에 행하고, 제주(濟州)의 한라산제(漢拏山祭), 남원(南原)의 지리산제(智異山祭), 나주(羅州)의 남해당제(南海堂祭), 나주의 금성산제(錦城山祭)는 초7일에 행하고, 제주의 풍운뇌우제(風雲雷雨祭)는 사일(社日)인 28일에 행하고, 9월에 행하는 고금도(古今島)와 남원(南原)의 둑제(纛祭)와 관왕묘제(關王廟祭)는 상강일(霜降日)인 26일에 행하고, 성황발고제는 여제일 3일 전인 27일에 행하고, 10월에 행하는 여제는 초1일에 행하고, 11월에 행하는 전주의 경기전 동지제(慶基殿冬至祭)는 27일에 행하고, 12월에 행하는 전주의 경기전 납향제(慶基殿臘享祭)는 25일에 행하는 일에 의거하여 본조의 계목(啓目)에 첩정을 첨부하였습니다. 전에 각 도의 각 제향에 쓸 향축(香祝)과 폐백은 해당 관사로 하여금 전례에 비추어 마련하여 내려 보내게 하였습니다. 또한 각기 본도로 하여금 전물(奠物)을 정갈하게 마련하여 예문(禮文)에 따라 설행하라는 뜻으로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한다고 계하하였다. 계하의 뜻을 잘 받들어 시행하되, 도내 각 고을에 거듭 밝혀 통지하여 시행하며, 각 제향을 설행한 뒤 전례대로 계문(啓聞)하고 첨부한 문서를 수합하여 올려 보내서 빙고(憑考)할 수 있게 하되, 제주목(濟州牧)에도 일체 통지하여 시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각 제향의 날짜를 일일이 거론하여 각 해당 고을에 통지하여 각 당일에 전물을 정갈하게 마련하여 예문에 따라 설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각 고을의 수령이 다른 곳에 제관(祭官)으로 나아가 참석하였거나 말미를 받았거나 교체(交遞)한 곳은 정식에 따라 생원 진사, 유생으로 거행한 뒤 모두 보고해 오므로 헌관(獻官)의 직(職)과 성명을 개록(開錄)하여 성책(成冊)하고 수정(修正)하여 예조에 올려 보냅니다. 제주의 한라산제와 풍운뇌우제는 본목(本牧)에서 설행한 뒤 바로 치계(馳啓)하라는 뜻으로 전에 이미 관문을 등서(謄書)하여 통지하였습니다. 연유를 아울러 삼가 갖추어 계문(啓聞)합니다.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690_070_2070_2017_058_XML
Rec-2288 각사등록_전라좌수영계록_1866_0229 18660229 null 지로 차원(指路差員)은 처음에 여도 만호(呂島萬戶) 유재득(劉在得)으로 차정하여 관문을 발송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해당 진 만호가 남원부(南原府)에서 해마다 봄에 지내는 관왕묘제(關王廟祭)의 제관(祭官)으로 이미 출발하였기 때문에 다시 사도 첨사(蛇渡僉使) 이시승(李時昇)으로 차정하였습니다.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740_040_0030_2017_061_XML
Rec-2289 각사등록_전라좌수영계록_1882_0917 18820917 null 좌사 중초관(左司中哨官) 낙안 군수(樂安郡守) 정익용(鄭益鎔)은 이달 11일에 지내는 남원부(南原府) 관왕묘제(關王廟祭)의 대축(大祝)으로 차정되어 이미 출발하였으며, 우사 우초관(右司右哨官) 고돌산 별장(古突山別將) 임희상(林喜祥)은 신병으로 파출(罷黜)된 뒤에 새 별장이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낙안군에서 군병을 취점하는 것은 그 고을 좌수(座首) 강재규(姜宰奎)로 하여금 대행하도록 하고 신의 수영 대솔 군관(帶率軍官) 전 오위장(五衛將) 이사훈(李思勳)을 파견하여 같이 거행하도록 하였으며, 고돌산에서 군병을 취점하는 것은 해당 진(鎭)의 유진장(留鎭將) 엄경무(嚴敬武)로 하여금 대행하도록 하고 신의 수영 대솔 군관 전 낭청(郎廳) 이문섭(李汶燮)을 파견하여 같이 거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740_150_0140_2017_061_XML
Rec-2290 각사등록_전라좌수영계록_1892_0907 18920907 null 이번에 도착한 본도(本道) 관찰사(觀察使) 신(臣) 이경직(李耕稙)의 관문(關文)에, “방금 전에 도착한 내서(內署)의 전보(電報)에, ‘강진(康津) 관왕묘(關王廟)와 남원(南原) 관왕묘 제향(祭享)의 날짜를 다음 달 초4일에 거행하도록 명을 내리셨습니다. 강진은 병사(兵使)가 가고 남원은 좌수사(左水使)가 가야 하는데, 날짜가 촉박하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알려 날짜를 어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제문(祭文)은 기한에 맞추어 내려 보냅니다. 제향의 절차는 순조조(純祖朝) 임진년(壬辰年, 1832, 순조32)의 전례에 따라 하되, 만약 영영(嶺營 경상도 감영)에서 예절에 관해 물을 경우에는 전문(電文)을 통해 상세히 기록해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날짜가 충분한지의 여부를 곧바로 자세히 통보해 주기 바랍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지금 막 순조조 임진년 관왕묘제의 절차에 관한 등록(謄錄)을 베껴서 본영(本營)에 보고하라는 뜻으로 관문을 작성하여 남원부(南原府)에 발송하여 신칙하였습니다. 그리고 차비 제관(差備祭官)도 차송(差送)하여 기일까지 달려가서 규례에 따라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이어서 받은 관찰사의 감결(甘結)에, “남원 관왕묘제를 다음 달 초4일에 설행할 것을 내서의 전보에 따라 방금 전에 관문을 발송하였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도착한 내서의 전보에, ‘제향의 날짜를 뒤로 연기하여 다음 달 초10일로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다시 감결을 발송하니, 상고(相考)하여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달 9월 초10일 낮에 남원 관왕묘제의 헌관(獻官)을 하기 위해 초7일에 출발하였습니다. 유영장(留營將)은 우후(虞候) 하익수(河益秀)가 아직 부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의 수영 대솔 군관(帶率軍官) 전 오위장(五衛將) 신장희(申章熙)로 차정(差定)하였습니다. 연유를 치계(馳啓)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740_220_0180_2017_061_XML
Rec-2291 각사등록_전라좌수영계록_1892_0913 18920913 null 절충 장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신 신(申) 신이 이달 9월 초10일 낮에 남원(南原) 관왕묘제(關王廟祭)의 헌관(獻官)을 하기 위해 초7일에 출발한 연유에 대해 전에 이미 치계(馳啓)하였는데, 이달 초10일 낮에 예문(禮文)에 따라 제향을 지냈습니다. 제향 점이(粘移)는 지방관 남원 부사(南原府使) 민종렬(閔種烈)로 하여금 규례에 따라 본도(本道) 관찰사(觀察使)에게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초10일에 그냥 회정(回程 일을 마치고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감)하여 13일에 수영으로 돌아왔습니다. 연유를 치계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740_220_0190_2017_061_XML
Rec-2292 갑인연행록_1권_입책록_1734_0808 17340808 null 봉황성에 도착한 이후부터 관왕묘(關王廟)와 절들이 여염집 사이에 뒤섞여 있었다. 누각은 활처럼 휘어 솟아있고 금빛 벽은 휘황찬란하며 꽃과 도구들은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한다. 심지어 집마다 부처를 모시고 벽마다 분향을 하는 것이 마을마다 있고 집집마다 있었다. 갑인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89A_0010_030_0060_2016_001_XML
Rec-2293 갑인연행록_1권_입책록_1734_0812 17340812 null 돌다리를 지나서 관왕묘로 들어가니 정문 밖에 벽돌로 된 문병(門屛)이 있는데 조벽(照壁)이라는 것이다. 높이는 3, 4장(丈)이고 너비는 5, 6칸〔間〕이며 회를 발라 물상(物像)을 세웠다. 제1문은 대들보 하나를 걸쳐서 3칸으로 나누고 기둥 위〔斗供〕에 첨차가 9겹이었다. 제2문은 들보 5개를 걸쳤는데 모두 3칸이고, 동쪽과 서쪽 협문(挾門)에는 각각 문신(門神)과 흙으로 만든 말을 세워두었다. 제3문은 정자각(丁字閣)과 비슷한 모양인데 외삼문(外三門) 중 양쪽 협문은 대(臺)위에 있고 가운데 한 칸은 누(樓) 아래의 문으로 삼았다. 안쪽의 정자각도 세 칸으로 바깥의 누각에 비해서는 조금 작았다. 모두 들보가 5개였다. 제4문은 삼가(三架)를 들보로 삼고, 동쪽과 서쪽에 협문이 있었다. 관제묘(關帝廟)의 전각은 5칸으로 사면에 퇴(退)를 내었다. 공포(控包)는 9포(包)이며 들보는 7개였다. 관제묘 앞에는 또 3칸짜리 무량각(無樑閣)을 세웠다. 관제묘 안에는 관왕(關王 관우)의 소상(塑像)이 앉아 있으니 망룡포(蟒龍袍)를 입고 면류관을 썼다. 탑(榻)의 아래에는 상(床)이 놓였고 상의 좌우에 청룡검(靑龍劒)이 세워져 있으며, 검의 서쪽에는 주창(周蒼) 동쪽에는 관평(關平)이 있다. 동쪽과 서쪽 벽의 아래에는 각각 서너 개의 불상(佛像)을 세워 두었다. 무량각 아래의 좌우에는 각각 무(廡)가 있으니 오른쪽은 조운(趙雲), 왼쪽은 장비(張飛)였다. 안팎의 문에는 금을 메워서 쓴 편액이 걸려 있었으니 ‘적금루(摘錦樓)’, ‘예배정(禮拜亭)’, ‘대장부(大丈夫)’였다. 안팎과 좌우의 문에 걸린 편액들은, ‘고금일심(古今一心)’, ‘막불존친(莫不尊親)’, ‘위진화이(威振華夷)’, ‘도배천지(道配天地)’, ‘무능위명(無能爲名)’, ‘충용의열(忠勇義烈)’, ‘영무성인(英武聖人)’, ‘정충관일(貞忠貫日)’, ‘긍고막급(亘古莫及)’, ‘지대지강(至大至剛)’, ‘충의극(忠義極)’, ‘지용겸(智勇兼)’이었다. 3문 안쪽에는 또 ‘용음(龍吟)’, ‘호소(虎嘯)’의 두 누각이 있고 누각 위에는 종과 북이 매달려 있었다. 전각 전무(殿廡)의 좌우 뜰에는 모두 10좌의 비석이 있었는데 중수(重修)하거나 속수(續修)한 전말이 쓰여 있었다. 전각은 극히 웅장하고 커서 금빛 벽이 바닥까지 찬란하게 빛났다. 사방의 벽에는 삼국 시대의 전투 장면이 단청으로 그려져 있어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 속에 둥둥 울리는 북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였다. 갑인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89A_0010_030_0100_2016_001_XML
Rec-2294 귀암집_11권_귀암이원정연행록_1660_0217 16600217 null 내성의 안에 영안사(永安寺)가 있고, 외성의 밖에 서회사(西會寺)가 있는데, 관왕묘(關王廟)는 외성과 내성의 사이에 있다. 서회사의 동쪽에 또 관왕묘가 있고, 서회사의 북쪽에 광우사(廣祐寺)가 있는데 모두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며 누각이 아득히 솟아 있고 행랑이 주위를 두르고 있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귀암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507A_0010_020_0280_2017_001_XML
Rec-2295 귀암집_12권_귀암이원정연행록_1670_0808 16700808 null 아침에 삼하(三河)를 출발하여 다시 남문을 나서 몇 리쯤 가니 길가에 비석이 있는데 ‘의총(義塚)’이라는 큰 2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옆에 10여 개 무덤이 있는데 만력 연간 등명이(鄧明易) 등 5인이 세운 것이다. 하점(夏店)의 관왕묘(關王廟)에서 아침을 먹었다. 귀암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507A_0020_010_0330_2017_001_XML
Rec-2296 금역당집_6권_비명_무안관왕묘비명 null 關王廟徧宇內。惟屬國無所建。有明萬曆卄六年夏四月。都司薛侯虎臣奉命東征。駐營本府。勝算未決。軍吏多暇。乃謀諸同駐諸將曰。惟玆關王。血食中土。蓋祀典然也。顧惟朝鲜。恭事天朝。實同內服。未有王廟。大爲欠典。當此搶攘。以神道詔民。用兵之道也。盍立像宇。以妥王靈。以鎭夷禍。於是。擇地於府城西北隅。背鶴面洛。盤鬱爽塏。乃伐石鳩材。鐫治甫訖。未及揭虔。令申征勦。馳圍賊巢。適天心悔禍。夷酋自斃。厥將淸正以下。亦讋服天威。胆裂潛遁。是年冬十有二月。奏凱還營。侯乃卜吉。以某日朝。恭奉牲齊。俯伏灌薦。肸蠁旣通。卽稽首告曰。炎灰旣冷。姦雄割據。惟王義勇拔萃。知所去就。結帝冑於桃園。刺顔良於敵陣。降于禁。斬龎德。威振華夏。賊謀避鋒。誠蓋世豪也。矧玆島夷。構禍孔棘。匪王之靈。無以鎭之。靈在天下。如水在地。孰云遐僻而不可居。夤緣征夷。獲創祠宇于異域南。敢與同志。釁于祠下。威風颯爽。永鎭靑丘。三獻禮畢。神人以和。軍吏詠歎。合辭以請。願章于石。伻來謁辭。以示無極。龍吉海外鯫生也。斯擧甚盛。筆之所屬。可非其人。旣以知遇之厚。欲謝不能。仍竊惟念王之英魂毅魄。千載未泯。化而爲轟霆烈日。以陰隲下土方。所以能感我聰明神武之聖衷。崇爵追諡。著祀令式。二百有餘歲。信乎君臣相遇。不以異代而有殊也。今我薛侯之來也。以不滅賊爲深恥。卽王之忠節也。軍卒不敢犯秋毫。卽王之號令也。邑人固嘗頌侯之德。侯方且列柵浚堭。除器積糧。日夜蕫治。爲戰守計。又以暇日。倡建斯宇。使屬國士庶。知所興起。眞朝暮遇之者。幸而賊人先遁。不克大成先登斬將之勳。雖人事之允臧。實鬼謀之孔協。乃敬篆而詩之。俾刻焉。 관왕묘(關王廟)는 중국에는 두루 있으나 다만 속국(屬國)에는 세워진 것이 없다. 명나라 만력(萬曆) 26년(1598, 선조31) 여름 4월에 도사(都司) 설후 호신(薛侯虎臣)이 왜적 정벌을 명받고 와서 본부(本府)에 진영을 주둔하였는데, 승산(勝算)이 결정되지 않아 군리(軍吏)가 한가한 틈이 많았다. 그래서 함께 주둔하던 여러 장수에게 의논하여 말하기를 “이 관왕(關王)은 중국에서는 혈식(血食)을 하니, 제사를 지내는 예전(禮典)이 그러하다. 생각건대 조선은 중국〔天朝〕을 공경히 받들어 실로 내복(內服)과 같은데, 관왕묘가 아직 없으니 크게 흠이 된다. 지금처럼 혼란하고 어수선한 때에 신도(神道)로써 백성을 이끄는 일은 용병(用兵)의 방법이다. 어찌 상(像)과 사당을 세워 관왕의 영령을 편안하게 하고 그로써 오랑캐의 화를 진압하지 아니하는가?”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부성(府城)의 서북쪽 모퉁이에 길지(吉地)를 택하였다. 학가산(鶴駕山)을 등지고 낙동강(洛東江)을 향하여 우거진 숲에 둘러싸였으며, 시원하게 탁 트인 곳이었다. 곧 돌을 채취하고 재목을 모아서 새기고 다듬기를 겨우 마치고 미처 봉안하지도 않았는데, 거듭 토벌하고 괴롭히면서 적의 소굴을 포위해 갔고, 마침 하늘이 환난을 내린 것을 후회하였는지 오랑캐의 우두머리가 저절로 죽어 그의 장수 청정(淸正) 이하가 또한 명나라 군대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간담이 서늘해져서 몰래 달아났다. 이해 겨울 12월에 승리를 상주(上奏)하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설후(薛侯)가 곧 길일(吉日)을 정하여 아무 날 아침에 제물을 공손히 받들고 엎드려 절하고 정성스럽게 올리니 영감이 이미 통하였다. 머리를 조아리고 고하기를 “불타고 남은 재는 이미 식었지만 간사한 무리가 여기저기 숨어 있었는데, 오직 관왕만이 빼어난 용맹으로 나아갈 바를 알고, 도원(桃園)에서 제주(帝冑)와 결의하였습니다. 적진에서 안량(顔良)을 찌르시고 우금(于禁)을 사로잡으며, 방덕(龎德)의 목을 베니, 위엄이 중국〔華夏〕에 떨쳐 적들은 관왕의 예봉을 피할 꾀만 찾았으니, 진실로 세상을 뒤엎는 호걸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섬나라 오랑캐가 급박하게 화란(禍亂)을 일으키니, 관왕의 영령이 아니면 진압하기 어렵습니다. 영령이 세상에 머물기를 물이 땅 위에 있는 듯하니, 누가 ‘멀리 궁벽하여 머물 수 없다’라고 말하겠습니까. 계속 오랑캐를 정벌하면서 이역(異域)의 남녘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감히 동지(同志)들과 더불어 사당 아래에서 희생(犧牲)을 바칩니다. 시원스런 위풍(威風)으로 길이 청구(靑丘)를 편안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삼헌례(三獻禮)를 마치니, 신(神)과 사람이 화합하고 군리(軍吏)가 영탄(詠歎)하였다. 다 같이 청하기를 비석에 새기자고 하고 사람을 보내어 글을 청하여 후세에 영원히 보이려고 하였다. 나는 바다 건너의 변변치 못한 사람이며, 이 일은 매우 성대하여 글을 부탁한 사람이 적임자가 아니다. 이미 두터운 인정〔知遇〕을 받은 뒤여서 사양하고자 해도 사양할 수 없었다. 이에 삼가 생각건대, 관왕의 빼어나고 굳센 혼백(魂魄)은 천 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우렁찬 천둥소리와 뜨거운 햇살이 되어 암암리에 이 땅을 도와주니, 총명하고 신무(神武)하신 우리 임금님의 마음에 감응하신 까닭이다. 관작을 높이고 시호(諡號)를 추증하며, 법식을 갖춰 제사한 지가 2백여 년이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는 일이 시대가 다르다고 하여 달라지지는 않는다.’던 말이 참으로 옳다. 지금 우리 설후가 이 땅에 와서 적을 멸하지 못한 일을 깊이 부끄러워함은 관왕의 충절이고, 군졸들이 추호도 법을 어기지 못함은 관왕의 호령이다. 고을 사람들이 진실로 일찍부터 설후의 덕을 칭송하고 있다. 설후는 또 목책을 둘러치고 해자를 깊이 파며, 무기를 손질하고 군량을 비축하는 등, 밤낮으로 감독하여 전투 준비를 하였다. 또 바쁜 중에도 여가를 틈타 이 사당을 창건하여 조선 백성들이 떨쳐 일어날 것을 알게 하니, 참으로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사람으로서 행복하다. 왜적이 미리 도망가 버려서 맨 먼저 성에 올라 적장(敵將)의 목을 베는 공을 크게 이루지는 못하였다. 비록 사람이 하는 일이 정말 착하더라도 정말 귀신이 크게 도와야 하는 것이다. 이에 공경히 전자(篆字)로 시를 지어 새기게 하였다. 금역당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59A_0070_020_0010_2014_002_XML
Rec-2297 낙전당집_7권_기_유금강소기 null 出城日雨甚。到關王廟。天章兄弟與建中邀飮。天章索我扇。題贈一絶。我左相自光陵奉審還。持國亦會。見余扇頭詩。易一字而去。 성을 나서는 날에 비가 심하게 내렸다. 관왕묘(關王廟)에 도착하니, 천장(天章 이명한(李明漢)) 형제와 건중(建中 홍주원(洪柱元))이 맞이하여 술을 마셨다. 천장이 나의 부채를 찾더니 절구 한 수를 써 주었다. 우리 좌상은 광릉(光陵)에 봉심(奉審)하러 갔다 돌아왔고, 지국(持國 장유(張維))도 왔다. 내 부채에 쓴 시를 보고는 한 글자를 고치고 떠났다. 낙전당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35A_0080_010_0130_2017_002_XML
Rec-2298 노봉집_10권_잡저_연행일기 16691217 丙子朝發。秣馬榛子店之關王廟。流川在廟前。駕石爲橋。夕投豐潤縣。僦宿漢人曹重輝家。是日行一百十里。 병자일(丙子日). 아침에 출발하여 진자점(榛子店)의 관왕묘(關王廟)에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흐르는 시냇물이 관왕묘 앞에 있었는데, 돌을 얹어 다리를 만들었다. 저녁에 풍윤현(豐潤縣)으로 들어가서, 한인(漢人) 조중휘(曹重輝)의 집에 가서 잤다. 이날은 110리를 갔다. 노봉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92A_0110_010_0080_2016_003_XML
Rec-2299 무명자집_시고_1책_시_01 null 東南關廟屹 / 西北佛宮羅 동쪽 남쪽 관왕묘(關王廟) 우뚝히 섰고 / 서쪽 북쪽 절간들이 즐비하구나 무명자집_윤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6A_0010_010_1570_2015_001_XML
Rec-2300 무명자집_시고_2책_시_01 null 泮儒祗迎。東則於關王廟傍。西則於慕華館革橋傍。作班於路邊。掌議押班。待天樂漸近玉輦繞過。一齊鞠躬。今之鞠躬。乃伏地也。 東傍關祠西革橋 / 路邊成列聽簫韶 / 鞠躬只待鑾輿近 / 掌議押班肅不囂。 성균관 유생들이 어가를 공손히 맞이할 때 동쪽의 경우 관왕묘(關王廟) 옆, 서쪽의 경우 모화관(慕華館) 혁교(革橋) 옆의 길가에 도열하는데, 장의(掌議)가 대열을 정돈시킨다. 임금의 행차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가 점차 가까워져 어가가 지나갈 때면 일제히 ‘국궁(鞠躬)’하는데, 오늘날 국궁이라 하는 것은 땅에 엎드림을 이른다. 동쪽이면 관왕묘 옆, 서쪽이면 혁교 옆의 / 길가에 도열하여 취타 소리에 귀 기울이다 / 어가가 가까워지면 땅에 엎드리는데 / 장의가 정돈시켜 엄숙하고 조용하네 무명자집_윤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6A_0020_010_0160_2015_002_XML
Rec-2301 무명자집_시고_2책_시_02 null 假令才足追蘇黃。未必關公自主張。况我一毫猶不盡。安能感格彼蒼蒼。 소동파(蘇東坡) 황산곡(黃山谷)과 같은 재주가 있더라도 / 관우(關羽)가 과거 급제를 정해주진 못하네 / 더구나 나는 한 자루의 붓도 모지라지지 않았는데 / 저 하늘을 어떻게 감동시킬 수 있으랴 무명자집_윤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6A_0020_010_1450_2015_002_XML
Rec-2302 무명자집_문고_14책_답태소서 null 去冬以朝令。結丐者之幕於吾家至近之處。洞內上下人皆苦之。欲逐去他處而無計可施。原居兩班。捉致洞任。使之逐送。而不肯聽從。訴于部官。部官躬來督役。成之而去。於是丐兒來集。衆情雖不欲。莫可奈何。有人言于洞內一兩班曰。此易耳。若招致南廟守僕語之曰。此南廟之路也。今結丐幕。必不㓗凈。祈禱之類。將皆還去。不可不逐丐幕。而亦不可以此爲言。須以南廟主脉爲言。告于主將則可逐矣。乃如其計。招語守僕。守僕喜而從之蓋。外托主脉之說。而其實則恐阻祈禱之路也。於是不移時。果撤去。乃知世事之難成。患無智略耳。苟有智略。則天下無不可爲之事矣。 작년 겨울에 조령(朝令)으로 거지들의 천막을 우리 집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치도록 하였습니다. 동네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괴롭게 생각하였지만 다른 곳으로 쫓아내고 싶어도 어떻게 해볼 묘안이 없었습니다. 원래 살던 양반들이 동임(洞任)을 잡아와서는 그에게 쫓아 보내게 하였지만 동임은 따르려 하지 않았고, 부관(部官)에게 호소하였으나 부관은 직접 와서 일을 독려하더니 일이 끝나자 떠나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거지들이 몰려오니, 많은 사람들이 비록 원하지 않았지만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동네의 한 양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간단합니다. 만일 남묘(南廟)의 수복(守僕)을 불러와서 그에게 ‘이것은 남묘로 가는 길이다. 지금 거지들의 천막을 치면 필시 불결할 것이니,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러니 거지들의 천막을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또한 이것을 가지고 말해서는 안 되고, 남묘의 주맥(主脈)을 가지고 말을 만들어 주장(主將)에게 고해야 한다.’라고 하시면 쫓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 계책대로 수복을 불러 얘기하자, 수복이 기뻐하며 이 말대로 하였습니다. 겉으로는 주맥설을 핑계 댔지만 사실은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의 길이 막힐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천막을 철거하니, 이루기 어려운 세상일도 단지 지략이 없는 것만 걱정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참으로 지략만 있다면 천하에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무명자집_윤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6A_0200_000_0260_2014_016_XML
Rec-2303 문곡집_1권_시_광녕차부사운_원운 null 關防形勝一方雄。雉堞逶迤迥入空。楡塞悲風羌笛裏。巫山愁色夕陽中。荒原半閉關王廟。彩石猶傳驃騎功。今日可堪千古恨。寒泉嗚咽幾時窮。 관문의 형승이 한 지방에 웅장한데 / 성가퀴 구불구불 저 멀리 허공으로 드누나 / 오랑캐 피리 속 임유관은 슬픈 바람 / 석양 가운데 의무려산은 근심스러운 빛 / 황량한 평원에 관왕묘 반쯤 닫혔는데 / 고운 빛깔 바위는 표기장군 공 전하누나 / 오늘날 천고의 통한 견뎌낼 수 있을까 / 한천의 오열 어느 때나 다할런고 문곡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97A_0010_010_1110_2015_001_XML
Rec-2304 미산집_11권_공조판서문헌공묘갈명 null 壬午以迎接官。儐吳提督長慶於東廟。差承文提調。 임오년(1882)에 영접관(迎接官)이 되어서 제독 오장경(吳長慶)을 동묘(東廟)에서 접대하였고, 승문원 제조가 되었다. 미산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645A_0120_040_0080_2016_005_XML
Rec-2305 벽로집_벽로속집_3권_관제묘_1수 null 家家關帝妥威靈。 晨夕虔誠薦酌馨。 五廟東邦猶欠禮。 龍年眷顧感冥冥。 집집마다 관제(關帝)의 위령(威靈)을 안치하여 / 아침저녁으로 정성 다해 술잔을 올리네 / 오묘 모시는 우리 동방 오히려 예에 부족하니 / 임진년에 돌보심이 까마득하게 느껴지네. 벽로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541A_0040_010_0190_2019_001_XML
Rec-2306 벽로집_벽로속집_3권_관제묘_1수_시평 null 眷顧東邦, 有加中國, 而五所崇尊, 果是虧禮. 조선을 돌봐 주심이 중국보다도 더함이 있으나 다섯 곳에서만 존숭하는 것은 과연 예에 부족한 것이다. 벽로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541A_0040_010_0190_2019_001_XML
Rec-2307 벽로집_벽로속집_3권_관제묘_2수 null 嚴威象照若平生。 親作父師尊聖明。 王春正統三分業。 華夏長留萬古名。 위엄 있는 모습이 평소와 같으니 / 친히 부친과 스승 되어 성스러운 천자 숭상했네. / 왕업의 정통 이어 삼분천하 대업 세워 / 중국에서 길이길이 만고 명성 남기었네. 벽로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541A_0040_010_0200_2019_001_XML
Rec-2308 병산집_2권_시_관왕묘 null 神馬奔如電。洋洋在帝傍。寧隨天竺骨。來顧爾肴觴。 적토마는 빠르기가 번개 같아서 / 의기도 양양하게 관제 곁에 있더니만 / 어찌하여 천축의 뼈 따라다니다 / 여기에 와 너는 술상이나 돌아보는가 병산집_이관명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458A_0020_010_0250_2016_001_XML
Rec-2309 북경록_1826_1128 18261128 轉至關帝廟, 制度之奇巧細密, 比我東, 不啻十倍, 宏偉等之。 돌아서 관제묘(關帝廟)에 이르렀다. 제도가 기이하고 교묘하며 세세하고 조밀한 것은 우리나라와 비교해 10배 이상이었고, 크고 웅장한 것은 같았다. 북경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536A_0010_010_0360_2019_001_XML
Rec-2310 북경록_1826_1201 18261201 忙忙下車, 遂與一能周經, 直出街上, 見關帝廟。 八位塑像, 各安龕供之, 各有七位神禆護侍, 偃然若有知。 其中主壁, 爲關帝塑像, 比我國南廟神像, 其大不啻倍之。 重廊疊閣, 雄深宏傑, 亦可十倍。 급하게 수레에서 내려서 드디어 일능(一能)과 주경(周經)과 함께 곧장 거리로 나가 관제묘(關帝廟)를 살펴보았다. 8위(位)의 소상(塑像)을 각각 감실에 안치하여 공양하고 각각 7위의 신비(神禆)가 호위하며 모시고 있었으니, 엄숙하여 마치 지각이 있는 듯하였다. 그 중간의 주벽(主壁)에 있는 것이 관제(關帝)의 소상이다. 우리나라 남묘(南廟)의 신상(神像)에 비하면 그 크기가 배 이상이었다. 겹겹의 회랑(回廊)과 첩첩의 누각(樓閣)이 웅장하고 깊으며 굉장하고 훌륭한 것은 또한 열 배는 되었다. 북경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536A_0010_010_0380_2019_001_XML
Rec-2311 서원등록_1684_0902 16840902 null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사명(李師命)이 올린 장계(狀啓)에, ‘강진(康津)의 고금도(古今島)에 명(明)나라 군대가 주둔하였을 때, 명나라 도독(都督) 진린(陳璘)이 관왕묘(關王廟 관우(關羽)의 위패를 모신 사당)를 건립하였는데 훼손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작년 가을에 재목을 모아서 사당을 수리하였는데, 그 옆에 별도로 사우(祠宇) 하나를 지어 도독 진린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이순신(李舜臣)을 배향(配享)하였습니다. 그 묘호(廟號)ㆍ사전(祠典)ㆍ신주(神主)ㆍ법식(法式)ㆍ향촉(香燭)ㆍ희생물을 결정하여 영구히 준행(遵行)하는 토대로 삼도록 해조(該曹)로 하여금 지시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명나라가 왜적이 침입하였을 때 도와준 은혜와 훌륭한 신하들이 국가를 회복(恢復)한 공적은 진실로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것인데, 세월이 이미 오래 지났음에도 옛 터가 여전히 보존되어 있어 지금과 예전을 생각하면 느껴지는 바가 있으니, 위패를 안치하고 제사 지내려는 것은 진실로 표장(表獎)하여 높이 받들고 변방의 백성들을 격려하는 뜻에서 나온 바로서, 장계대로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다만 진 도독(陳都督)의 사전(祀典)과 신판(神版)의 법식은 이여송(李如松)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향사하는 평양(平壤) 무열사(武烈祠)의 법도에 따라 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희(康熙) 23년(1684) 9월 초2일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신(臣) 김재현(金載顯)이 담당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한다고 계하(啓下)하였다. 서원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87A_0040_100_0010_2016_002_XML
Rec-2312 서원등록_1695_0820 16950820 null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향실(香室)의 관원이 보고한 것을 지금 접하였는데, 평안도(平安道) 영유현(永柔縣)에 있는 제갈 무후(諸葛武侯)의 사우(祠宇)에 악 무목(岳武穆)을 합향(合享)하는 제문(祭文)에 있는 두사(頭辭)는 일찍이 전례가 없으니, 어느 하나를 지목해서 분부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禮)에 없는 예(禮)로서 신(臣)의 조(曹)에서 갑자기 억측하여 단정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예전의 예(例)에 따라서는 말할 수 있으니, 관왕묘(關王廟)의 치제문(致祭文)에 따라 글을 짓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이렇게 분부하도록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니, 알았다고 전교(傳敎)하였다. 서원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87A_0040_210_0110_2016_002_XML
Rec-2313 서원등록_1703_0809 17030809 null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임금께서 전교(傳敎)하기를, ‘성주(星州)와 안동(安東)에 관왕상(關王像)의 유무(有無)를 본도(本道)로 하여금 계문(啓聞)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어제 본도에서 올라온 장문(狀聞)을 보니, 성주에는 과연 유상(遺像)과 묘우(廟宇)가 있어 관아로부터 묘우를 지키는 사람을 두고, 훼손될 때마다 보수하였습니다. 안동의 경우에는 여러 사찰의 근처에 두어 중들로 하여금 수호하게 한다고 하니, 착실함이 너무나 결여되어 있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성주와 안동 두 고을에 있는 관무안왕(關武安王)의 유상과 묘우는 모두 애당초 당(唐)나라 장수가 건립한 것으로, 성주에서는 이미 그곳의 수령〔本官〕이 훼손된 것을 보수하여 수호함을 폐지하지 않고 있는데, 안동의 경우에는 중간에 사찰 근처로 이전하여 건립하고, 중들로 하여금 지켜 보호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똑같은 묘우인데도 안동에서만 중들에게 지키는 일을 맡겨, 관아에서 지키고 보호하는 일이 없어서 너무나 착실함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성상(聖上)의 전교처럼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묘직(廟直)을 정하고 보수하는 일을 성주의 예와 같이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따라서 이 뜻을 본도에 분부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傳敎)하였다. 서원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87A_0040_290_0040_2016_003_XML
Rec-2314 서하집_1권_부_관왕묘부 null 嘉春日之孔麗兮。步余馬乎江皐。得古廟於城南兮。懷英靈兮忉忉。儼遺像之若在兮。環壯士之槊刀。入廟門而祗肅兮。羞余肴兮挹余醪。吁嗟將軍兮。振世之豪。騂顏戟髥兮。怒而雷號。雄心猛志兮。世無爾曹。舞劍獨進兮。殱良醜如拔毛。斬關徑出兮。操莫遏其西逃。秉奇節而一意兮。扶漢業於蓬蒿。雖時世之阨艱兮。幸知己之是遭。焚艨衝而蹶魏兮。我有事乎西方。借荊土而峙鼎兮。奉草廬之經營。留猛將於上游兮。保千里之封疆。介二方而雄視兮。期王業之潛張。撫長劍而一顧兮。涉中原而高驤。揚威靈而北出兮。得余志而翺翔。孰嬰鋒而納馘兮。爭紹我以壺漿。惟許下之老賊兮。亦怊悵其難當。彼孫權之豎子兮。曾不保余好姻。利甘言而奉盜兮。遂潛師而圖親。方務進而不悟兮。實天喪余虎臣。痛伯業之中淪兮。奚恤侯之一身。匪人謀之或爽兮。諒天心之不仁。功背時而莫就兮。勢隨遇而屈伸。而時勢之適然兮。亦何誅乎東隣。從新附之一州兮。仗大義而橫行。將飮馬於洛水兮。庶馘曹於鄴城。復高光之遺土兮。淸四海而永寧。雖初志之不立兮。實耿耿余精誠。無右臂而孑立兮。保巖阻而頓兵。提孤師而出秦兮。信孔明之無成。嗚呼。惟智勇與才力兮。寔天民之俊英。然得之而不善用兮。免盜亂爲蓋寡。顧義勇之能兼兮。世未有如將軍也。忠魂著而不滅兮。駕電車兮驅神馬。出八荒而窮渺茫兮。求正直焉是輔。受百王之崇報兮。廟宇達於東土。瞻英儀而極遡兮。諒余心之獨苦。 아름다운 봄날이 좋아 / 말 타고 강가 거닐다가 / 성 남쪽에 오래된 사당 보고는 / 영령을 생각하며 수심에 잠기네 / 엄숙한 유상은 살아 있는 듯한데 / 장사의 창과 칼 둘러 있구나 / 사당문 들어가 공경하고 엄숙하게 / 술과 안주 올리노라 / 아 장군이여 / 세상에 이름 떨친 호걸이었네 / 붉은 얼굴에 창 모양 수염으로 / 성나면 우렛소리 냈고 / 웅대하고 용맹한 심지는 / 세상에 이런 무리 없었지 / 칼 휘두르며 홀로 나아가 / 터럭을 뽑듯 안량과 문추 죽였고 / 성문 빗장 부수고 곧바로 나가니 / 서쪽으로 달아나는 장군을 조조는 막지 못했네 / 뛰어난 절개 잡고서 한결된 마음으로 / 초야에서 한나라 왕업을 도우니 / 비록 험난한 시대였으나 / 다행히 자신을 알아주는 이 만났다오 / 몽충을 불살라 위나라 쓰러뜨리고는 / 서방에서 일함이 있었으니 / 형주 땅 빌려 삼국으로 분립하여 / 초려에서 구상한 것 실천하였네 / 요충지에 맹장 머무르게 하여 / 천 리 강토를 보전케 하니 / 두 나라 사이에서 위엄 있게 바라보며 / 왕업이 은밀히 펴지기를 기약했다오 / 장검 어루만지며 한번 돌아보고는 / 중원으로 가서 유린하였고 / 신령한 위명 떨치며 북쪽으로 출정해 / 뜻대로 이루고는 유유히 노닐었네 / 누가 예봉을 범해 머리 바쳤던가 / 병에 장물을 담아서 앞다퉈 섬겼고 / 허창의 노련한 적도 / 대적하기 어렵다며 낙담했지 / 저 손권이란 놈이 / 일찍이 인척의 우호 지키지 않고 / 감언이설 이롭게 여겨 도둑질하니 / 드디어 몰래 출병하여 친척의 나라 도모했네 / 진격에만 힘쓰다가 깨닫지 못하여 / 하늘이 범 같은 신하 잃게 하니 / 패업이 중도에 무너져 비통해라 / 어찌 일신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리 / 사람의 도모함이 간혹 어그러진 것이 아니라 / 진실로 하늘의 마음이 어질지 못함이라오 / 공업은 시대와 어긋나면 이룰 수 없고 / 형세는 처한 상황에 따라 굽히고 펴는데 / 시대와 형세가 마침 이러하였으니 / 또한 동쪽 이웃 나라 어찌 주벌하랴 / 새로 귀속된 형주로부터 / 대의를 잡고 횡행하여 / 장차 낙수에서 말에게 물 먹이고 / 부디 업성에서 조조의 목 베어 / 고조와 광무제의 땅 회복해서 / 천하를 맑게 해 영원히 안정시키려 했나니 / 비록 초심을 이루지 못했지만 / 실로 비범한 정신이었네 / 오른팔 없이 외로이 서서 / 험준한 지역 보전하며 주둔하다가 / 외로운 군대 이끌고 출정했으니 / 제갈공명이 성공하지 못함은 당연하도다 / 아 지혜, 용기, 재능을 갖추면 / 이는 하늘이 낸 인걸이지만 / 이를 얻고도 잘 사용하지 못하면 / 도둑질과 난리 일으킴이 어찌 적지 않으랴 / 돌아보건대 의리와 용기 겸한 인물로 / 세상에 장군만 한 이 없었으니 / 충성스런 영혼은 사라지지 않아 / 우레 수레에 멍에 하고 신마를 몰며 / 팔방의 아득히 먼 곳까지 돌아다니니 / 정직을 구하는 데 도움 준다오 / 백왕의 융숭한 보답받아 / 사당이 조선에까지 세워졌네 / 훌륭한 의표 바라보며 회고하매 / 진실로 나 홀로 고심하누나 서하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408A_0010_020_0020_2019_001_XML
Rec-2315 소호당집_10권_안효제전 null 先是十九年軍變。王后閔氏避居忠州。有湖西李媼 金氏妻 來謁自言是關王之女。關王者關羽也。媼因言后於某月日當復位。及期果驗。后大奇之。及還京。令媼陪從。爲起北關王廟於宮城東北隅以處之。賜號曰眞靈君。其所言無不聽從。內外官職之除拜。多出其口。於是士大夫之奸愚者紛然趨之。至有呼爲母姊者。孝濟聞而憤歎。至三十年七月。上疏千餘言。請斬李媼以謝國人。因極陳當時廣設齋醮。害政糜財之失。上與后覽而大怒。留疏不下。李媼假子李裕寅,閔泳柱等。嗾宋廷燮輩。疏攻孝濟請投遠外。上乃命安置于楸子島。 이보다 앞서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왕후 민씨(閔氏)는 충주(忠州)로 피신하였다. 호서(湖西)의 이 노파(李老婆) 김씨(金氏)의 아내 가 왕후를 배알하고 자신은 관왕(關王)의 딸이라고 하였는데, 관왕이란 관우(關羽)이다. 이 노파는 인하여 왕후에게 모월 모일에 응당 복위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날이 되어 과연 말한 그대로 되니, 왕후가 크게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서울로 돌아오게 되자, 이 노파로 하여금 자신을 배종하게 하고, 궁성 동북쪽에 북관왕묘(北關王廟)를 지어서 거처하게 하고는, 진령군(眞靈君)이라는 호를 내려 주고, 그녀가 말하는 것은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으니, 내외 관직의 제수도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 사대부들 중 간사하고 우둔한 자들은 분분히 좇아서 심지어는 어머니니 누님이니 하고 부르는 자들까지 있게 되니, 효제는 듣고서 분하고 한스럽게 생각하였다. 고종 30년(1893) 7월에 천여 자나 되는 상소를 올려 이 노파를 베어서 나라 사람들에게 답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당시에 널리 재초(齋醮)를 열어서 정사를 해치고 재정을 탕진하는 것을 극언하였다. 임금과 왕후가 상소를 읽고 크게 노해서, 머물려 둔 채 승정원에 내려보내지 않았다. 이 노파의 가자(假子) 이유인(李裕寅)과 민영주(閔泳柱) 등이 송정섭(宋廷燮) 등을 사주하여, 상소하여 효제를 공박해서 원방으로 귀향을 보내도록 청하게 하니, 임금은 추자도(楸子島)에 안치하도록 명하였다. 소호당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658A_0170_010_0040_2020_004_XML
Rec-2316 수사한필_상편_시_관제묘 null 在在皆祠廟, 丹宮復碧樓. 倘聞英魄降, 秪爲福田求. 褻卜叢神竝, 崇奉釋氏浮. 莫嚴名與分. 公昔讀春秋. 가는 곳마다 모두 사묘(祠廟)라 / 붉은 궁궐에 푸른 누각이로다 / 영령한 혼백이 내려왔다고 듣기만 하면 / 다만 복을 구하러 가지 / 무람없이 여러 신에게 점을 치고 / 허황되게 부처를 높이 받드네 / 명분을 엄히 하지 못할 때에 / 공도 예전에 《춘추》를 읽었겠지 수사한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539A_0020_010_0880_2019_001_XML
Rec-2317 수사한필_하편_문_관제묘 null 正陽門右側有關帝廟, 殿宇窄迫. 自明時最著靈應, 萬曆間冊尊帝號, 而太常祭祀 【祭用五月十三日】, 仍舊稱漢前將軍侯志也. 至今拈香祈願, 抽籤決疑者無虛日. 右廡矮簷, 內隱一碑, 修撰焦竤撰, 庶吉士董其昌書, 字體遒媚可愛. 所過遼ㆍ薊ㆍ燕數千里內, 家家祀關帝, 十家之聚, 必有一廟. 州縣及大都, 廟貌尤極雄麗, 而正陽之廟, 故蹟可紀, 故特表焉. 정양문(正陽門) 오른편에 관제묘(關帝廟)가 있는데, 전우(殿宇)가 협소하다. 명나라 때부터 영응(靈應)이 가장 드러난 곳으로, 만력(萬曆) 연간에 ‘제(帝)’의 칭호로 높여 봉하고 태상시(太常寺)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5월 13일에 제사를 지낸다.】, 옛날 칭호대로 ‘한(漢)나라 전(前) 장군(將軍) 후(侯)’로 기록하였다. 지금까지도 향을 피워 소원을 빌며, 제비를 뽑아 의문을 해결하려는 사람이 없는 날이 없다. 오른쪽 행랑은 처마가 낮고 안에는 비(碑) 하나가 숨겨져 있는데, 수찬(修撰) 초굉(焦竤)이 비문을 짓고, 서길사(庶吉士) 동기창(董其昌)이 글씨를 썼다. 자체(字體)가 굳세고 아름다워서 사랑할 만하였다. 지나온 요동(遼東)ㆍ계주(薊州)ㆍ연경(燕京) 수천 리에 집집마다 관제(關帝)에 제사를 지내고, 열 집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관제묘 하나가 있다. 주현(州縣)과 대도(大都 북경)의 관제묘는 더욱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한데, 정양문의 관제묘가 기록할 만한 고적(古蹟)이므로 특별히 여기에 드러낸다. 수사한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539A_0030_010_0120_2019_001_XML
Rec-2318 어우집_2권_시_관왕묘 null 關王遺廟四方同。雕繪丹靑百巧窮。禮享反多宣父殿。淫祠還類釋迦宮。誰知聖代褒忠意。轉作愚黎尙鬼風。君子惟論惠廸吉。神雖欲福渠何功。 관왕의 남은 사당은 사방이 똑같으니 / 온갖 재주 다하여 단청을 그렸네 / 제향은 도리어 공자묘보다 성대하고 / 음사인지라 도리어 절과 비슷하네 / 누가 알았으랴 성군이 충성을 기린 뜻이 / 어리석은 백성이 귀신 숭상하는 풍속이 될 줄 / 군자는 오직 선을 따르면 길하다고 말할 뿐 / 신이 복을 내리려 한들 그에게 무슨 힘이 있으랴 어우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65A_0030_010_0210_2017_001_XML
Rec-2319 어우집_후집_2권_시_제관왕묘 null 句龍尊奉等宣翁。不料雲長祭秩同。四海九州香火遍。禮容還復到吾東。 구룡을 선옹처럼 모시고 받들더니 / 운장까지 제사 등급 같아질 줄 몰랐네 / 사해와 구주에서 향불 두루 피우더니 / 엄숙한 모습이 다시금 우리 동방에 이르렀네 어우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65A_0110_040_0280_2019_004_XML
Rec-2320 제호집_8권_시_동성만망 null 高城獨上思無聊。世事浮雲已寂寥。砧杵小村煙淡淡。旅人歸路馬蕭蕭。溪聲暮入關王廟。草色遙連普濟橋。舅氏林莊隔山外。一回東望一魂消。 고성 홀로 오르니 생각도 무료하고 / 세상사는 부운처럼 이미 쓸쓸하기만 / 마을 연기에 절구와 다듬이 들리고 / 나그네 돌아오는 길에 말울음 소리 / 저녁 시내소리 관왕묘에 들려오고 / 풀빛은 멀리 보제교까지 이어졌네 / 외삼촌 별장은 건너 산 밖에 있으니 / 동쪽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안타깝네 제호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90A_0090_010_0030_2015_001_XML
Rec-2321 존재집_21권_관왕묘강진중수기 null 維我朝鮮。於中華爲偏僻小邦。古今之島。於我國爲僻陋小島。若漢壽亭侯尙以荊益爲偏安而矢死呑孫曺者。乃於壬辰之變。顯聖天將。願留塑像。是其意必非偶然也。時則有若李忠武公實以水軍統制。征討倭寇。其盡瘁死國之義。同於諸葛武侯。折衝之略。蹈刃之勇。逼於翼德子龍。况其水戰之法。出沒神鬼。摧拉霆電。雖島夷之陸於水者。撞之必鏖。片舸不活。恒勝於赤壁之千古一戰。苟使李公載蒙鬪艦。自荊州順流東下。孫陸狐鼠輩。當一鼔而梟之旝下無疑矣。關公不沫之靈。神會千載。必欲卜也。嗚呼盛哉。河侯以余在廟之近地。詳其首末。使介以言曰。非敢謂腆也。亦宜有記。余雖與侯無雅分。維以爲斯廟之食於玆土。爲神之有功於邦家也。若不虔共於廟。是忽忘於邦家也。忽忘邦家者。是關王,李公之不貸也。瞻拜之際。能有不泚於顙乎。泚猶不思。晏然以專鎭之符。坐糜俸錢者。彼何心哉。乃若河侯獨能以廟靈之心爲心。忠君籌邊之誠。先著於修廟之役。其將功以志成。事之不負於國。爲王干城可必也。苟使後來者皆如河侯志。則其爲王臣之職。豈古今島一廟而已。余於是不辭而書之。暮春且將謁于廟。因喜以是而爲乘韋焉。 우리 조선은 중국에서 볼 때 외지고 작은 나라이며, 고금도(古今島)는 우리나라에서 외지고 보잘것없는 작은 섬이다. 형주(荊州)와 익주(益州)에 있는 것을 편안한 계책이라 여기면서도 손권(孫權)과 조조(曹操)의 땅을 차지하려고 죽음으로 맹세했던 한수정후(漢壽亭侯 관우(關羽))의 경우, 임진왜란 때 훌륭한 명나라 장수가 관우 조각상을 여기에 두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니, 이는 그 뜻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시 이 충무공(李忠武公)께서 실제 수군통제사로 있으면서 왜구를 정벌하였다. 충무공이 온 힘을 다해 나라에 목숨을 바친 의리는 제갈무후(諸葛武侯 제갈량(諸葛亮))와 같고, 적을 반드시 이기는 모략이나 우뚝한 용맹은 익덕(翼德 장비(張飛))과 자룡(子龍 조자룡(趙子龍))에 가까웠으니, 하물며 해전(海戰)의 병법이 귀신처럼 출몰하고 번개처럼 적을 꺾는 데에 있어서랴. 비록 바다를 육지처럼 다니는 왜놈이라도 맞붙으면 반드시 섬멸하고 한 척의 배도 살려 보내지 않아 천고에 보기 드문 전투였던 적벽대전(赤壁大戰)보다 늘 뛰어났다. 만약 이공(李公)을 몽동(艨艟)이나 전투함 같은 배에 태워 형주로부터 동쪽으로 물길을 따라 내려가게 하였다면 여우나 쥐 같은 손권과 육손(陸遜)의 무리들이 북 한 번 울리는 사이에 깃발 아래에서 효수(梟首)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관공(關公)의 사라지지 않는 혼령은 그 정신이 천여 년 후의 이공을 만나 반드시 여기에 강림하려 했을 것이니, 아! 성대하다. 하(河) 사또는 내가 관왕묘 근처에 살아서 그 내력에 대해 잘 알리라 생각하여 사람을 통해 말하기를 “감히 후하게 모신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기문 정도는 지어야 마땅할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내 비록 하 사또와 평소 친분은 없지만, 이 땅에 관우 사당을 세워 제향을 누리도록 하는 이유는 관우 신령이 나라에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사당에서 경건하게 제사를 올리지 않는다면 이는 나라를 소홀히 잊는 것이다. 나라를 소홀히 잊는 사람은 관왕과 이공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관왕의 사당에 절을 할 때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땀 흘리는 것은 생각조차 않고 편안하게 한 지방의 전권을 맡은 벼슬자리에 앉아 녹봉이나 축내는 사람은 그 어떤 마음인가. 그런데 하 사또 홀로 관왕 신령의 마음처럼 작심하고서 임금께 충성하며 변방을 지켜 내려는 정성을 사당 수리 공사를 통해 먼저 드러냈다. 따라서 뜻한 대로 공적을 이루고 나라를 저버리지 않도록 종사함으로써 임금을 위하는 신하가 될 것이 틀림없다. 만일 훗날 이곳에 부임하는 사람 모두 하 사또의 뜻과 같다면, 그들이 임금을 위하여 신하의 직분을 수행하는 일이 어찌 고금도의 관왕묘 하나에 그칠 뿐이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사양하지 않고 글을 쓴다. 늦은 봄 사당에 참배할 터인데 이로써 기뻐하며 승위(乘韋)로 삼으리라. 존재집_위백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53A_0220_020_0130_2014_006_XML
Rec-2322 하재일기_1권_1891_0101 18910101 晴. 茶禮罷後, 卽往內谷, 拜謁關聖帝君, 抽籤得第十九籤, 上吉. 맑음. 차례(茶禮)를 마치고 곧바로 내곡(內谷)으로 가서 관성제군(關聖帝君)을 배알하고 추첨하여 19번을 뽑으니, 상길(上吉)이다. 하재일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41A_0010_010_0010_2011_001_XML
Rec-2323 하재일기_1권_1891_0429 18910429 晴. 寄書於胡洞伊人處, 移時方乘轎而來. 共往泥峴周覽市物, 上南山, 俯瞰長安, 復往南廟, 瞻謁聖帝. 歸路沽酒六錢飮之, 聯路賞玩而歸寺洞館. 맑음. 호동(胡洞) 이인(伊人)에게 편지를 부쳤더니 조금 있다가 바로 가마를 타고 왔다. 함께 이현(泥峴)에 가서 시장의 물건들을 두루 구경하고 남산에 올라가 장안을 굽어본 뒤에 남관왕묘[南廟]에 가서 관성제군(關聖帝君)을 배알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6전을 주고 술을 사서 마시고 길을 따라 구경하면서 인사동 여관으로 돌아왔다. 하재일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41A_0010_040_0290_2011_001_XML
Rec-2324 하재일기_2권_1892_0101 18920101 辛酉. 朝晴, 四無雲陰微, 有東風, 晩復陰. 茶禮罷後, 往內谷拜謁關聖, 心祝年內身數. 推籤得七十九籤, 中平卦. 신유. 아침은 맑고 사방에 구름 한 점 없음 흐리고 동풍이 솔솔 불다가 저녁에 다시 흐림. 차례를 마친 후에 내곡(內谷)에 가서 관성제군(關聖帝君)을 배알하고 마음속으로 금년 신수를 빌었다. 추첨하여 79첨(籤)을 얻으니 중평괘(中平卦)이다. 하재일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41A_0020_010_0010_2011_002_XML
Rec-2325 하재일기_4권_1895_0115 18950115 朝飯後, 往內谷, 謁關聖心祝, 推籤得第七籤, 甲庚大吉. 아침을 먹은 뒤 내곡(內谷)에 가서 관성제군(關聖帝君)을 뵙고 마음속으로 축원하며 추첨하여 제7첨(籤)을 얻으니 갑경대길(甲庚大吉)이다. 하재일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41A_0040_010_0150_2011_003_XML
Rec-2326 환재집_4권_잡저_녹고정림선생일지록논화발 null 東自興仁門外關帝廟。西南至蓉山麻湖。悉開燈市。往往陳列雜戱。絲竹嘲轟。若値春物未早之歲。則緋桃練李。時方盛開。兼有花柳之盛。 동쪽으로 흥인문(興仁門) 밖 관제묘(關帝廟)로부터 서남쪽으로 용산(蓉山)ㆍ마호(麻湖)에 이르기까지 모두 등시를 여는데, 이따금 잡희(雜戲)를 벌여서 음악소리가 진동한다. 만약 봄철이 빠르지 않은 해를 만나면, 붉은 복사꽃과 흰 오얏꽃이 한창 만개하고 아울러 꽃과 버들의 성대함이 펼쳐진다. 환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632A_0050_010_0090_2017_002_XML
Rec-2327 환재집_6권_소차_걸해우의정소 null 伏以起感忠義。特拜關廟。克詰戎兵。歷臨舘所。盛德在金。順時行令。都人士女。 생각건대, 충의(忠義)에 느낌이 일어 특별히 관묘(關廟)에 배알하시고, 군대를 사열하러 관소(館所)에 친히 거둥하셨는데, 성덕을 쇠에 기울여 시절에 맞추어 명을 내리시매 온 도성 사람들이 임금의 행차를 기쁘게 우러러 보았습니다. 환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632A_0070_020_0120_2017_002_XML
Rec-2328 일성록_1778_0902 17780902 具戎服, 乘輿出仁和門, 至仁政門外降輿. 乘馬由敦化門, 出崇禮門詣行殿入幕次, 改具甲冑. 予曰, 當展拜關王廟, 只槍劍攔後軍隨駕, 而先廂前路扎駐事分付. 仍乘馬詣關王廟大門外降馬, 乘輿入廟門, 降輿就版位行禮, 仍詣廟內奉審訖, 乘輿出廟門降輿, 乘馬至敎場轅門勞軍. 予曰, 鳴鑼邊旗幟不爲分立, 過左營前騎不爲前導, 廵營節次, 已失次第, 何營旗幟爲前導乎. 宣傳奏曰, 守禦營云矣. 仍降馬陞座. 予曰, 廵營節次詳在於節目, 而各營不知擧行, 入轅門駐馬良久, 不在前營之何在, 廵營一節, 不得如儀行之, 該營大將及執事宣傳官之擧行, 極爲駭然矣. 융복(戎服)을 갖추고 여(輿)를 타고 인화문(仁和門)을 나가 인정문(仁政門) 밖에 이르러 여에서 내렸다. 다시 말을 타고 돈화문(敦化門)을 경유하여 숭례문(崇禮門)을 나가 행전(行殿)에 나아가 막차(幕次)에 들어갔다. 갑옷과 투구로 갈아입었다. 내가 이르기를, “관왕묘(關王廟)에 전배할 때 창검군(槍劍軍)과 난후군(攔後軍)만 수가(隨駕)하고 선상(先廂)은 미리 가서 주둔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이어 말을 타고서 관왕묘 대문 밖에 나아가 말에서 내려 여를 타고 묘문(廟門)으로 들어갔다. 여에서 내려 판위(板位)에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이어서 묘 안으로 나아가 봉심(奉審)하였다. 여를 타고 묘문을 나와 여에서 내렸다. 다시 말을 타고 교장(敎場)의 원문(轅門)에 이르러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명라(鳴鑼) 옆에 기치(旗幟)가 나누어 서 있지 않고 좌영(左營)을 지날 때 전기(前騎)가 앞에서 인도하지 않은 것은, 순영(巡營)의 절차에서 이미 그 순서를 잃은 것이다. 어느 영의 기치가 인도하였는가?” 하니, 선전관(宣傳官)이 아뢰기를, “수어영(守禦營)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말에서 내려 어좌에 올랐다. 내가 이르기를, “순영의 절차가 절목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는데도 각영이 거행할 줄을 모르고, 원문에 들어가 한참 동안 말을 멈추고 서 있었는데도 전영(前營)이 어디에 있는 줄을 모르는 등 순영의 절차가 의례대로 시행되지 못하였으니, 해당 영의 대장 및 집사와 선전관의 거행이 매우 놀랍다.” 일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IT_V0_A02_09A_02A_00020_2003_012_XML
Rec-2329 일성록_1779_0803 17790803 校理權以綱等啓言, 軍律何等嚴重, 而御營陣中, 誤爲放砲, 以致諸營之應砲, 事極驚駭. 罪關軍律, 臣等以爲, 當該大將爲先削職宜矣, 從之. 敎曰, 捴戎使李柱國爲御營大將. 교리 권이강(權以綱) 등이 아뢰기를, “군율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데 어영청의 진영에서 잘못 방포(放砲)하여 여러 진영이 응포(應砲)하게 하였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죄가 군율에 관계되니 신들은 해당 대장을 우선 삭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 하교하기를, “총융사 이주국을 어영대장으로 삼으라.” 하였다. 일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IT_V0_A03_08A_03A_00020_2003_016_X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