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왕묘
| 북관왕묘 (北關王廟) |
|
| 명칭 | 북관왕묘 |
|---|---|
| 한문명칭 | 北關王廟 |
| 유형 | 관왕묘 |
| 건립일 | 1883년 |
| 건립 기록 | 『고종실록』, 『소호당집』 등. |
| 주소 | 알 수 없음 |
| 위도 | 알 수 없음 |
| 경도 | 알 수 없음 |
| 문화재 지정 | 비지정 |
개요
북관왕묘는 무당 진령군(眞靈君)과 그의 정치적 후원자 명성황후(明成皇后)에 의해 건립이 추진되어 1883년에 완공되었다. 준공 당시 고종은 의례 절차를 동관왕묘, 남관왕묘의 것을 따르도록 지시했으나 실제로는 무당의 무격과 음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민간신앙의 성격을 갖는 관왕묘로 기능했다. 기존의 국가 의례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고종은 이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듯하며, 오히려 그런 기복적 신앙 형태를 주요한 목적으로 삼고 북관왕묘에 친림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에게 영향을 미친 진령군은 자신이 관우의 딸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임오군란에 의해 도주한 명성황후가 환궁할 것임을 예지해 적중시켰고, 고종은 갑신정변 당시 북관왕묘로 피난했다. 즉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북관왕묘는 국가 의례보다도 단순하고 원초적인 기복 신앙의 장소로서 의미가 더 큰 곳이었다. 1887년 고종은 자신이 비문을 짓고 민영환이 글씨를 쓴 북묘 비를 세워 북관왕묘의 건립 내력과 의의를 밝혔다.
건립 후 10년 가량이 지나 정언 안효제(安孝濟)는 북관왕묘의 기능 및 신앙 실태와 실질적 주인인 무당을 종합적으로 비판하고 관왕묘 의례의 정상화를 촉구했지만 김만제 등 다른 관원들의 반론과 고종의 의사에 따라 오히려 유배되었다.
그러나 고종 등의 기복에도 불구하고 북관왕묘는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북관왕묘의 의례는 다른 관왕묘들의 기능이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마찬가지로 폐지되었다.
현황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크게 훠첼되었고, 현재는 완전히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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