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rd (3): 문집

hoonhyeok
이동: 둘러보기, 검색
gwms:id dcterms:title gwms:recordDate gwms:originalText gwms:translatedText gwms:source gwms:infoUrl
Rec-2139 갑진만록_관왕묘 null 中朝人尊敬關王 關羽。國家建廟之外。家家戶戶。無不設像。起居飮食必祭。至於出兵馬。尤致敬焉。戊戌春夏間。天兵大至。就南大門外都祭庫峴。立關王廟。大小將官。無不禮焉。至請 聖上行禮。己亥臨罷師還。稱爲奉聖旨。建廟於東大門外。留一官員董役。中原雖曰給價。其數無幾。功役浩大。皆出我國財力。動以萬計。事完。國家置官守之。都祭庫則塑像。東大門外則銅像。關王雖是忠勇之將。而身死人手。非功存後世之人。而中原尊敬如此。未知其然。或云高皇帝時。出神兵以助云。然未可知也。 중국 사람들은 관왕(關王 관우(關羽))을 존경하여 국가에서 사당을 세우는 외에 집집마다 화상을 그려 놓고 생활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에는 반드시 제사를 올리고, 특히 전쟁에 출동할 적에는 더욱 정성을 드린다. 무술년 봄과 여름 사이에 명 나라 군사가 많이 왔을 때, 남대문 밖 도제고현(都祭庫峴)에 관왕묘(關王廟)를 세웠는데, 대소의 장수들이 예를 드리지 않는 이가 없었고, 심지어는 성상께 예를 드리도록 청하기까지 하였다. 기해년 전쟁이 끝나 군사가 돌아갈 적에, 성지(聖旨 중국 천자의 분부)를 받들었다 하고, 동대문 밖에 사당을 세우는데 관원 한 사람을 두어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그 비용을 비록 중국에서 지급한다고 하지만, 그 액수는 얼마 되지 않았고, 공사가 커서 모두 우리 나라에서 재력(財力)을 동원하게 되니, 그 수는 만 냥도 넘었다. 공사가 끝난 다음에는 국가에서 관리를 두어 지키도록 하였다. 도제고에는 소상(塑像)을 세웠고, 동대문 밖에는 동상(銅像)을 세웠다. 관왕이 비록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장수라고는 하나, 남의 손에 죽음을 당한 사람이고, 공이 후세에 끼쳐진 사람도 아닌데, 중국에서 이처럼 존경하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의 말에는,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을 가리킴) 때에 신병(神兵)을 내어 도왔다.’ 하나, 알 수 없다. 갑진만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46A_0010_000_0010_2002_014_XML
Rec-2140 경세유표_7권_지관수제_전제_8 null 臣謹案。竹田,楮田。當與蘆田。松田。竝爲別籍。不當混入於田籍。大抵郡縣大槪狀規式。原有未善。今取康津縣大槪狀。評議如左。 大槪狀曰。官竹田幾結。兵營竹田幾結。右水營箭竹田幾結。加里鎭箭竹田幾結。〇臣謹案。此類。宜別爲一籍。雖至千年。不可以種五穀者。載a285_136a於田籍。虛張文簿曰幾結。幾結去麤去雜。其實無多。徒使覽者。眩於省察。非制也。 大槪狀曰。官垈田幾結。鄕校垈田幾結。社稷垈田幾結。海倉垈田幾結。書院垈田幾結。廟堂垈田幾結。卽古今島關王廟。 寺垈田幾結。石梯院垈田幾結。垣浦烽臺垈田幾結。〇兵營垈田幾結。將臺垈田幾結。氷庫垈田幾結。古海倉垈田幾結。〇馬島鎭垈田幾結。加里鎭垈田幾結。古今鎭垈田幾結。薪智鎭垈田幾結。〇臣謹案。凡此垈田。皆公署之垈田也。公署垈田。異於村家。非有徙邑罷鎭革除之令。不可爲田。年年列書幾結幾結。虛張元總。乃去麤皮。曷若別爲一冊。式年一報。以存其大體也。惟所謂古海倉垈田。今種五穀。若是者。宜入田籍也。 생각건대, 죽전ㆍ저전은 갈밭[蘆田]ㆍ송전(松田)과 별도의 장적으로 함이 마땅하며, 전적에 섞여들어감은 부당하다. 대저 군ㆍ현에서 보고하는 대개장 규식(規式)이 원래 좋지 못함이 있다. 이제 강진현(康津縣)의 대개 장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평론한다. 대개장에, "관죽전 몇 결, 병영 죽전 몇 결, 우수영(右水營) 전죽전(箭竹田) 몇 결, 가리진(加里鎭) 전죽전 몇 결이다." 하였다. 생각건대, 이런 따위는 별도로 한 장적을 만드는 것이 마땅하다. 비록 천 년이 되더라도 오곡(五穀)을 심지 못하는 것을 전적에다 기재하여, 헛 문서로 ‘몇 결, 몇 결’이라고 벌여 적는다. 거친 것을 없애고 잡동사니를 버리면 실상 남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아서 한갓 열람자의 살핌을 헛갈리게 하니 좋은 제도가 아니다. 대개장에, "관대전(官垈田) 몇 결, 향교대전(鄕校垈田) 몇 결, 사직대전(社稷垈田) 몇 결, 해창대전(海倉垈田) 몇 결, 서원대전(書院垈田) 몇 결, 묘당대전(廟堂垈田) 몇 결(즉 古今島에 있는 關王廟이다), 사대전(寺垈田) 몇 결, 석제원대전(石梯院垈田) 몇 결, 원포봉대대전(垣浦烽臺垈田) 몇 결이다. 병영대전(兵營垈田) 몇 결, 장대대전(將臺垈田) 몇 결, 빙고대전(氷庫垈田) 몇 결, 고해창대전(古海創垈田) 몇 결이다. 마도진대전(馬島鎭垈田) 몇 결, 가리진대전(加里鎭垈田) 몇 결, 고금진대전(古今鎭垈田) 몇 결, 신지진대전(薪智鎭垈田) 몇 결.”이라고 했다. 생각건대, 이런 대전(垈田)은 모두 공서(公署)의 대전이고, 공서의 대전은 촌가와 달라서 고을을 옮기거나 진(鎭)을 혁파하는 영(令)이 있지 않으면 전지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 해마다 몇 결 몇 결씩 헛 문서로 원총(元總)을 벌여 기재한다. 이에 거친 껍질을 버리고 별도로 한 책을 만든 다음, 식년(式年)에 한번씩 보고하여 그 대체를 보존함만 하겠는가? 오직 고해창대전(古海創垈田)만은 지금 오곡을 심고 있으니 이같은 것은 전적에 넣음이 마땅하다. 경세유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87A_0100_010_0020_2002_002_XML
Rec-2141 계곡집_16권_좌의정월사이공행장 null 關王廟成。天將請上同往奠。駕已辦。始命撰祭文。有司請召知製敎。上以命公。立就以進。上大悅命賜錦。 관왕묘(關王廟)가 낙성되자 중국 장수가 상에게 제사를 올리러 함께 가자고 청하였다. 그런데 대가(大駕)의 출발 준비가 다 된 시점에 와서야 비로소 제문(祭文)을 지어 올리도록 명하였다. 이에 유사(有司)가 지제교(知製敎)를 불러올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공에게 그 일을 명하였는데, 공이 그 자리에서 바로 지어 올리자 상이 크게 기뻐하면서 비단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계곡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33A_0170_010_0010_2004_002_XML
Rec-2142 계산기정_2권_도만_중후소 18031216 明時關防也。後改築方城。南有歌薰門。西有說澤門。城外有關帝庙。庙貌畧如我國東南庙。庭豎康煕,乾隆二碑。殿後安大昌像。殿東設小龕。而塑金佛百數。此庙素稱靈異。譯胥輩多有瓣香抽籤者。余適登西門樓。有一人踵來欣款曰。朴貞蕤復來否。 명나라 때의 관방(關防)인데 후에 네모난 성으로 개축했다. 남쪽에는 가훈문(歌薰門), 서쪽에는 열택문(說澤門)이 있다. 성 밖에 관제묘(關帝廟)가 있는데 그 규모는 우리나라의 동관왕묘, 남관왕묘와 같다. 뜰에는 강희ㆍ건륭의 두 비석이 있다. 전각 뒤에 대창(大昌)의 상이 안치되어 있고 동쪽에는 작은 감실을 마련하여 금부처 100여 개의 소상이 놓여 있다. 이 관제묘는 본래부터 영이(靈異)하다고 한다. 그래서 역관의 무리들 중에는 판향(瓣香)을 피우고 제비를 뽑는 자가 많았다. 나는 마침 서쪽 문루에 올랐는데 누가 다가와 기꺼이 말하기를, ‘박정유(朴貞蕤 박제가(朴齊家))는 또 오지 않았소?’ 한다. 계산기정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5A_0020_010_0130_2004_008_XML
Rec-2143 국조보감_49권_숙종조9_1691_02_01 16910200 null 상이 정릉(貞陵)에 가서 전알(展謁)한 뒤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돌아올 때에 사하리(沙河里)에 이르러 단에 올라가 무예를 사열하였다. 이어서 태복마(太僕馬) 3필을 끌어오도록 명하여 세 대장에게 나누어 하사하였다. 상이 송 태조(宋太祖)가 무성왕(武成王)의 사당에 들러 참배한 고사를 인용하여 장차 돌아가는 길에 무안왕(武安王)의 사당에 들러 유상(遺像)을 볼 계획으로 대신들에게 절목(節目)을 정하게 하였다. 좌의정 목내선(睦來善)이 아뢰기를, “마땅히 주 무왕(周武王)이 상용(商容)의 여문(閭門)에 허리를 굽혀 절한 사실을 본떠서 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우의정 민암(閔黯)이 아뢰기를, “절을 해서도 안 되고 허리를 굽혀 절을 해서도 안 됩니다. 마땅히 손을 들어 읍을 해야 됩니다.” 하자, 상이 민암의 의견을 따랐다. 삼사가 청대하여 국조에 전례가 없다고 하여 지나다가 들르는 일을 중지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안왕의 만고에 빛나는 충의(忠義)는 평소에 감탄하고 있었다. 이미 그 사당의 문앞을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감흥이 있었는데, 들어가 유상을 보는 것이 무슨 해가 있겠는가.” 하고, 따르지 않았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500_010_0010_2000_005_XML
Rec-2144 국조보감_49권_숙종조9_1691_02_02 16910200 null 상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아, 무안왕의 충의는 실로 천고에 드문 바이다. 내가 일찍이 관왕도(關王圖)에 절구 한 수를 - 시는 아래에 보임 - 써서 항상 감탄하고 흠모하는 뜻을 표하였고, 매번 동쪽으로 능에 거둥하는 길에 한번 들어가 엄숙한 유상을 바라보고자 했다. 지금 지나치면서 들른 것은 실로 시공을 초월하여 서로 감동한 뜻에서 나왔고 또 무사들을 격려하려는 것이었지, 본래 한때의 관람을 유쾌하게 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아, 여러 장수들은 나의 이런 뜻을 본받아서 더욱 충의에 분발하여 왕실을 보위하도록 하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바라는 바이다. 또 동쪽과 남쪽의 관왕묘 건물의 파손된 부분은 해조로 하여금 속히 날짜를 잡아 착실하게 보수하게 하고,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되 제문 속에 내가 멀리서 추모하고 매우 감탄한다는 뜻을 다 표현하라.” 하였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500_010_0010_2000_005_XML
Rec-2145 국조보감_49권_숙종조9_1691_03 16910300 null 3월. 상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어제 무안왕(武安王)의 유상(遺像)을 보았는데, 아름다운 수염이 잘린 흔적이 분명하게 있었으니 일이 매우 미안하다. 이런 부분을 새로 보수하라. 이어서 생각건대, 조종조에서 사당을 세워 숭봉(崇奉)한 것은 실로 충절을 크게 추앙하는 성대한 뜻에서 나왔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잡인들의 출입을 금하지 않아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였고 그 밖의 손상된 곳도 많으니, 엄숙하고 깨끗해야 할 묘우(廟宇)가 행인들이 장난치는 장소가 되었다. 만약 특별한 방법으로 금단(禁斷)하지 않는다면 오늘 고치고 나면 내일 다시 파손할 터이니 이는 절대로 경건하게 하는 본의가 아니다. 앞으로 또다시 이런 문제가 발생하여 적간(摘奸)할 때에 적발된다면 당해 수직관을 엄중하게 처벌한다는 뜻을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라.” 하였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500_010_0010_2000_005_XML
Rec-2146 국조보감_49권_숙종조9_1692_09 16920900 null 9월. 상이 시 2수를 지어 직접 써서 판목에 새겨서 내리고, 이르기를, “그 중 한 편은 관왕(關王)의 그림에 쓴 것이고, 한 편은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렀다가 느낀 바가 있어서 지은 것이다. 이것을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 나누어 걸어 경모(敬慕)하는 뜻을 표하라.” 하였다. 그 시에, 내 평소 수정공을 사모하니 / 生平我愛壽亭公 절의와 정충이 만고에 우뚝하네 / 節義精忠萬古崇 광복에 노심 초사하다 몸이 먼저 떠났기에 / 志勞匡復身先逝 천년을 두고 열사들 가슴에 눈물 고이네 / 烈士千秋涕滿胸 동쪽 교외 일이 있어 옛 사당을 지나치게 되어 / 有事東郊歷古廟 들어가 유상 보니 정신이 숙연해지네 / 入瞻遺像肅然淸 오늘에 공경하는 마음 더욱 절실한데 / 今辰致敬思逾切 부디 우리나라 만세토록 편안하게 하소서/ 願佑吾東萬世寧 하였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500_010_0020_2000_005_XML
Rec-2147 국조보감_54권_숙종조14_1710_03 17100300 null 3월. 대신에 청대(請對)하였을 때에, 상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전년에 동관왕묘(東關王廟)에 거둥하여 창졸간에 예법을 따지지 못하여 절을 하지 않고 읍(揖)을 하였고, 그 뒤에 남관왕묘(南關王廟)에서도 읍례(揖禮)를 행하였다. 이것이 비록 다 이루어진 일이지만 훗날 반드시 관례가 될 터인데, 읍을 한 것이 과연 실례됨이 없었는가?” 하니, 대신이 대답하기를, “제왕의 묘에 대해서 고사(故事)에 의거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선묘조에 명 나라의 장수가 나왔을 때에 관왕묘에 친히 제사를 지냈는데, 결코 읍례를 행하지 않았다.” 하였다. 좌의정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그때에는 명 나라 장수와 함께 가서 제사를 설행하였기 때문에 혹 배례(拜禮)를 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 꼭 길이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관왕(關王)의 충성과 용맹은 역사에 드문 것이기는 하나, 옛날의 명장으로서 선성(先聖)ㆍ선사(先師)와는 차이가 있으니, 배례를 행하는 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읍례를 행하는 외에 다른 예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안왕(武安王)이라 호칭하고, 향실(香室)의 축문에서도 ‘감히 무안왕께 밝게 고합니다.’ 하였다.” 하자, 대신이 또 대답하기를, “왕의 작호(爵號)는 추봉한 것이고 본래의 작호는 후(侯)입니다. 따라서 그가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대등한 예로 접대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옛날 사실을 널리 상고하여 예절을 알맞게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뒤에 홍문관이 아뢰기를, “《회전(會典)》 군사조(群祀條)에 ‘홍무(洪武) 6년에 비로소 서울에 제왕(帝王)의 사당을 설치하고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 이상의 제왕과 한(漢)ㆍ당(唐)ㆍ송(宋)을 개국한 임금을 제사지내게 하였다. 뒤에 주 문왕(周文王)은 은 나라를 섬겼다고 하여 신주를 설치하지 않고 단지 능묘(陵廟)에 제사지내는 데에 그치다가, 홍무 7년에 이르러 제왕묘에 친히 제사 지냈다.’ 하였고, 의주(儀註)에는 쓰지 않았습니다. 가정(嘉靖) 11년에 정한 친제의(親祭儀)에는 두 번 절하는 예가 있는데, 이 한 토막이 어느 정도 오늘날의 일에서 참조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문왕을 능묘에 제사지내는 것에 그치고 친히 임하여 절하고 제사지냈다는 글이 없는 것은 대개 추존하였기 때문입니다. 돌아보건대, 이 관왕의 왕작(王爵)도 또한 추봉에서 나온 것이니, 명 나라의 예로 유추하면 상께서 친히 임하여 절을 하는 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또 《오례의(五禮儀)》 빈례(賓禮) 연조정사조(宴朝廷使條)를 상고하니 ‘전하가 사자(使者)에게 읍(揖)을 하면 사자가 읍례(揖禮)로 답한다 ……’ 하였습니다. 설령 관왕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왔다고 하더라도 손님과 주인의 예로 접대하여, 읍례를 하고 배례를 하지 않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으로써 말하면 성상께서 읍을 한 것은 실로 예법에 적중한 것입니다. 관왕묘를 창설할 때의 예절이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 장수와 함께 가서 제사를 지내는 과정에 간혹 우악한 예를 표하여 매우 신중하게 대처한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한때의 임기 응변에서 나온 것일 뿐이니, 그것을 인용하여 법식으로 삼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명하기를, “훗날 《실록》을 포쇄(曝曬)할 때에 선묘(宣廟)의 친제의(親祭儀)를 상고해 내어오라.” 하였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550_010_0050_2000_005_XML
Rec-2148 국조보감_54권_숙종조14_1711_06 17110600 null 상이, 지난해에 관왕묘(關王廟)에 거둥하였다가 배례(拜禮)와 읍례(揖禮) 중에서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를 미처 상고하지 못하여 읍례를 행하기만 한 것을 가지고 《실록(實錄)》을 포쇄(曝曬)할 때에 선묘조(宣廟朝)의 구례(舊禮)를 상고해 내라고 하였는데, 사관이 서계하기를, “선묘께서는 두 번 절하는 예를 행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앞으로는 이에 의거하여 배례를 행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550_010_0060_2000_005_XML
Rec-2149 국조보감_63권_영조조7_1746_07 17460700 null 상이 ‘현영소덕왕묘(顯靈昭德王廟)’ 여섯 글자를 친히 썼는데,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액자를 만들어 걸도록 명하였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640_010_0050_2000_006_XML
Rec-2150 국조보감_70권_정조조2_1781_01 17810100 null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렀다. 이어 장신(將臣)을 보내어 동관왕묘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제사를 올렸다. 또 삼국(三局)의 대장은 겸당상(兼堂上)의 규례에 따라 모든 일을 관할하여 검속할 것을 명하였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710_010_0030_2000_007_XML
Rec-2151 국조보감_71권_정조조3_1785_12 17851200 null 12월. 사조어제어필비(四朝御製御筆碑)를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세웠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720_010_0030_2000_007_XML
Rec-2152 국조보감_72권_정조조4_1786_02 17860200 null 2월. 이에 앞서 상이 직접 관왕묘(關王廟)의 비명(碑銘)을 지어 묘정(廟廷)에 세웠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비명을 분장(分章)하여 악가(樂歌)로 만들도록 명하고, 음악은 3장(章)을 쓰도록 하였다. 관왕묘에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이때에 시작되었다. -영신(迎神)에는 왕재장(王在章)을 연주하고, 전폐(奠幣)와 초헌ㆍ아헌ㆍ종헌에는 힐향장(肹蠁章)을 연주하고, 송신(送神)에는 석가장(錫嘏章)을 연주한다. 악공(樂工)은 개주(介冑)를 착용하고, 오방(五方)의 기치를 세운다. 악기는 중고(中鼓)가 하나, 장고(杖鼓)가 둘, 필률(觱篥)이 둘, 대금(大笒)이 둘, 태평소(太平簫)가 둘, 대금(大金)이 하나, 소금(小金)이 하나, 가(歌)가 둘, 해금(奚琴)이 둘이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730_010_0010_2000_007_XML
Rec-2153 국조보감_80권_순조조5_1832_03 18320300 null 3월.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묘우(廟宇)를 세운 구갑(舊甲)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동묘(東廟)에는 장신(將臣)을 보내어 섭행(攝行)하게 하고, 남원(南原) 강진(康津)의 무안왕묘(武安王廟)에는 병사와 수사를 나누어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810_010_0110_2000_008_XML
Rec-2154 국조보감_88권_철종조2_1855_02 18550200 null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친히 잔을 올리고, 승지를 보내어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사당을 간심(看審)하게 하였다. 국조보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5A_0890_010_0030_2000_008_XML
Rec-2155 금계일기_1599_0422 15990422 晴。城東南兩門外。有一高峯。名曰平遠臺。遊冶公子騷人墨客。皆會此臺云。我與衙客二人。率奇孝淳等三人。買二人轎。登臨臺上。則三層蘭若。道僧數三。坐于榻上。見我等。下榻相揖。寺邊又有城隍堂。崢嶸翼翼。有同關王庙。而道士稱號者五六。戴華文冠。穿錦繡衣者。居其中。庙邊戚繼光生祀堂。陰陰高峙。而玉碑數丈。又立堂前。而碑額特書八字曰。戚將軍平倭大捷碑。碑陰誦功總武烈文五十餘行。如昨分明矣。俯視城池。周回倍於我國漢陽。而濠池則鑿注湖水。因成湖水。而城中鑿引湖水▣▣▣▣賈舶出入絡繹。市上繁華。處處花錦。南門外別開關王庙。庙前又開大將臺。臺下廣開敎場。周回四方。各五百餘步▣▣列置八大營部至句連。正正堂堂。戰馬數百餘匹。嘶雲▣風。一行▣場畒四邊黑角牛數百。成群齕草。 맑음. 동ㆍ남 두 성문 밖에 높은 봉우리 하나가 있어 이름을 평원대(平遠臺)라 하는데, 주색을 좋아하는 귀객과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 모두 이 평원대로 모인다는 것이다. 나도 아객 2인과 더불어 기효순 등 3인을 이끌고 이인교(二人轎)를 사서 대(臺) 위로 올라가니, 3층 난야(蘭若 절을 말함)에 도승(道僧 수도하는 중) 두세 사람이 평상 위에 앉았다가 우리들을 보고 평상에서 내려와 서로 읍(揖)을 했다. 절 가에는 또 성황당(城隍堂)이 있는데 웅장하게 치솟은 것이 관왕묘(關王廟 촉한(蜀漢)의 명장 관우의 사당)와 같았고, 도사(道士)라고 불리는 사람 5~6명이 화문관(華文冠)을 쓰고 비단옷을 입고 그 안에서 살고 있었다. 그 가에는 척계광(戚繼光)의 생사당(生祠堂 높은 공적을 기리는 마음에서 백성들이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부터 제사를 지내는 곳)이 쓸쓸하게 높이 솟아 있고 두어 길 되는 옥돌 비석이 또 그 앞에 서 있는데, 비석 앞면에는 여덟 자를 특서하기를 척 장군 평왜대첩비(戚將軍平倭大捷碑)라 하였고, 비석 뒷면에도 장렬한 무공을 칭송하는 글 모두 50여 줄이 어제 세운 듯 분명하였다. 성지(城池)를 굽어보니, 주위는 우리나라의 한양(漢陽)보다 갑절이나 되고, 그 못은 땅을 파서 호수를 끌어댐으로 인하여 호수가 되었고 성안으로도 땅을 파서 호수를 끌어댔다. □□□□ 장삿배는 끊이지 않고 출입하여 번화한 시가지는 곳곳마다 꽃과 비단이 있었다. 남문 밖으로 따로 관왕묘가 세워져 있는데, 그 앞에는 또 대장대(大將臺)가 세워져 있고, 그 아래에는 넓은 교육장이 펼쳐 있었다. 사방의 둘레는 각기 5백여 보 □□ 큰 영부(營部) 여덟 채를 나란히 지어 놓았는데, 구부러진 모퉁이까지도 정정당당했고, 전마(戰馬) 수백여 마리가 울어서 구름과 바람을 □□ 한 줄로 □□ 교련장 뚝 밖의 사방에는 검은 뿔소 수백 마리가 떼를 지어 풀을 뜯고 있었다. 금계일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01A_0010_030_0250_2003_009_XML
Rec-2156 기언_기언별집_15권_무오기행 16780424 廿四日。上歸田園箚。箚曰。臣蒙荷殊遇寵擢異等。感激恩私。爲殿下死無所辭。臣年入九十。精力耗死。老悖至此。不可冒居朝班。初欲臨行。趨詣殿陛之下。曕望天顏。永訣入地。以爲無憾也。旣衰敗無餘。耄病又劇。無復人事。舁疾還鄕。一念狗馬之戀。情亦慼矣。臣無任悚懼。死罪死罪。自西湖出里餘。 上因政院啓。遣承旨鄭維岳勉留。謝以不得。承命之意。至城東門外。京畿觀察使權大載,前大司諫權瑎,濟用監正李碩寬送別關王廟。左議政權公,鄭參判之虎,權參知修有送別書至。長興府使裵尙珩,禁府都事韓斗相來。相見於西湖上。仍送我。至此道峯。題名。 24일, 시골로 돌아가겠다는 내용의 차자를 올렸다. 그 차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이 각별한 은총으로 등급을 뛰어넘어 발탁되었으니 전하의 은혜에 감격하여 전하를 위한 일이라면 죽음도 불사하고픈 심정입니다. 그러나 신의 나이가 90이 다 되어 기력이 소진되고 이렇게 노쇠하였으니 이를 무릅쓰고 조정의 반열에 설 수가 없습니다. 애초 고향을 떠나올 때부터 신은 전하의 뜰아래에 나아가 전하의 용안(龍顔)을 우러러 뵙고서 전하를 영결(永訣)한 뒤에 죽으면 여한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신은 몸이 극도로 쇠한 데다 질병 또한 악화되어 더 이상 인사(人事)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병든 몸을 싣고서 고향으로 돌아가오니, 전하를 향한 신의 그리운 마음 또한 슬프옵니다. 신은 송구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고는 서호에서 1리 남짓 나가 있으니, 상이 승정원에서 올린 계사를 받아들여 승지 정유악(鄭維岳)을 보내 서울에 머물러 있기를 권유했으나 왕명을 받들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사양하였다. 도성의 동문(東門) 밖에 이르자 경기 관찰사 권대재(權大載), 전 대사간 권해(權瑎), 제용감 정 이석관(李碩寬)이 관왕묘(關王廟)에서 송별해 주었고, 좌의정 권공(權公), 참판 정지호(鄭之虎), 참지 권수(權脩)는 송별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리고 장흥 부사(長興府使) 배상형(裵尙珩), 의금부 도사 한두상(韓斗相)이 찾아와서 서호 가에서 만났는데, 이어 이곳 도봉산(道峯山)까지 전송해 주었다. 도봉산에서 제명(題名)하였다. 기언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44A_0840_010_0060_2013_006_XML
Rec-2157 난중잡록_4권_1599_0107 15990107 遊擊王之翰自倭橋領軍到南原。因向京。劉綎督標下旗鼓官徐。失其名 領軍五百留南原。建關王廟。 유격(遊擊) 왕지한(王之翰)이 왜교(倭橋)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에 왔다가 서울로 향하였다. 유제독(劉提督)이 휘하의 기고관(旗鼓官) 서(徐) 이름은 모름 를 독려하여 군사 5백을 거느리고 남원에 머물러 관왕묘(關王廟)를 지었다. 난중잡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32A_0050_000_0010_2002_007_XML
Rec-2158 농암집_2권_시 null 賜對煕政堂。親降封書。戒勑丁寧。拜受而出。到南關王廟。拆見。 殿裏承親命。城南拆賜書。聖心何惻怛。臣職敢虛徐。直置驅馳遠。先憂採訪疎。高堂二人在。臨路爲躕躇。 임금께서 희정당(熙政堂)에서 접견하시고 친히 봉함한 글을 내려 간곡히 분부하시니, 절하고 받들고 나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이르렀을 때 뜯어보다. 임금 어명 궁전에서 몸소 받들고 / 殿裏承親命 주신 글월 성남에서 뜯어 읽으니 / 城南拆賜書 임금 마음 이다지도 간곡하신 걸 / 聖心何惻怛 신하 직분 어찌 감히 느긋하리오 / 臣職敢虛徐 다만 머나먼 길을 달려가기에 / 直置驅馳遠 민심 탐지 부실할까 걱정 앞선다 / 先憂採訪疎 고당에 양친 부모 살아 계시어 / 高堂二人在 갈 길을 앞에 두고 주저하노라 / 臨路爲躕躇 농암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435A_0030_010_0180_2010_001_XML
Rec-2159 농암집_3권_시 null 關王廟。次子益韻。廟貌森帷戶。窺臨颯有風。丹靑神鬼接。涕淚古今同。北地羞銜璧。南陽效鞠躬。忠貞恨一槩。合此並幽宮。 관왕묘(關王廟)에서 자익의 시에 차운하다. 사당이라 휘장 문 엄숙한 모습 / 廟貌森帷戶 다가서서 엿보니 바람이 솨솨 / 窺臨颯有風 초상화에 귀신이 서려 있는데 / 丹靑神鬼接 예나 지금 똑같이 눈물 흘리네 / 涕淚古今同 항복을 수치라 한 북지 장비(張飛)와 / 北地羞銜璧 나라 부흥 신명 다한 남양 제갈량(諸葛亮) / 南陽效鞠躬 충절이며 유감이 모두 같으니 / 忠貞恨一槩 두 분도 이 사당에 함께 모셔야 / 合此並幽宮 농암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435A_0040_010_0070_2010_001_XML
Rec-2160 담헌서_외집_8권_연로기략 null 中後所。閭井繁庶。市門夾數里。摩蕩不可行。有關帝廟極壯麗。路上多賣麝香。諸譯言皆假品云。有生薑。其大者一根或數斤。靭而多絲云。歷視帽廠。我國冠帽。皆出於此。一屋長十數間。中置五大爐。炭火烘烘。入戶蒸暖如夏。汗出不可久留也。帽匠四五十人。環坐班行不亂。皆渾脫衣帽。徒着單袴。身手齊力。揮霍驍敏。其踴躍跳蕩之狀。始見莫不驚恠。盖華人雖工匠末技。其勤厲不苟如此。眞不可及也。 중후소(中後所)는 거리가 번화하고 사람이 우글거렸는데, 시장문에서 몇 리 사이는 매우 복잡하여 걸어다닐 수가 없었다. 관왕묘[關帝廟]가 있는데,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 길가에서 사향(麝香)을 파는 사람이 많았는데, 역관들의 말이 모두 가짜라고 했다. 생강이 있는데, 큰 것은 한 뿌리가 여러 근 되는 것도 있으며 질기고 힘줄이 많다고 했다. 모자 공장[帽廠]을 둘러보았는데, 우리 나라의 관모(冠帽)가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 집 1채의 길이가 10여 칸이나 되는데, 5개의 큰 화로가 설치되어 숯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서니 찌고 무더움이 여름과 같아 땀이 흐르므로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모자 만드는 직공들 40~50명이 삥 둘러앉아 있는데, 줄이 비뚤지 않았다. 모두 옷과 모자를 벗어 붙이고 다만 잠방이 하나만을 입고 있었다. 몸과 손이 힘을 합해 민첩한 동작으로 일을 했다. 그 재빨리 뛰고 설치는 품이 처음 보면 놀라고 이상히 여기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대개 중국 사람들은 비록 공장 같은 말단의 기술자라 할지라도 그 부지런하고 엄격하여 우물쭈물 넘기려고 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니, 참으로 따라갈 수 없는 일이다. 담헌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60A_0130_010_0060_2002_004_XML
Rec-2161 동국여지지_1권_한성부_사묘 null null 관왕묘(關王廟)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숭례문 밖 3리에 있고, 또 하나는 흥인문 밖 3리에 있다. 촉한의 장군 관우(關羽)의 사당이다. 만력 정유년(1597, 선조30) 중국의 장수와 관리들이 왜적을 정벌할 때에 세운 것이다. 동국여지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99A_0020_010_0020_2020_001_XML
Rec-2162 동사록(강홍중)_1624_0821 16240821 null 맑음. 평명에 조반을 재촉해 먹고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들어가니 사인(舍人) 이명한(李明漢)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월사상공(月沙相公 이정귀(李廷龜))과 김 순천 지남(金順天止男 순천은 지명. 순천 원이었음) 영공이 연달아 이르렀다. 종사관(從事官)이 또 뒤쫓아와서, ‘상사(上使)는 벌써 날이 밝기 전에 떠났다.’ 하였다. 동사록_강홍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84A_0020_010_0020_2003_003_XML
Rec-2163 동사록(강홍중)_1625_0323 16250323 null 맑음. 평명에 발행하여 양재참(良才站)에서 점심 먹었는데 남양(南陽) 부사(府使) 한회일(韓會一)과 과천(果川) 현감(縣監) 이정(李埥)이 지대차 나오고, 남양 향소(南陽鄕所)이문협(李文莢)이 술을 가지고 찾아왔으며, 남양 하인 등이 모두 와서 배알(拜謁)하였다. 노상에서 송 청도 석조(宋淸道碩祚 청도는 청도 원을 지냈다는 뜻) 영공을 만나 말에서 내려 반형(班荊)하고 담화하였다. 한강에 이르니 정 직장(鄭直長)ㆍ원자중(元子中)ㆍ송대뢰(宋大賚) 형제ㆍ윤치규(尹穉圭) 및 막내아들이 마중 나오고, 송달보(宋達甫) 형제는 그의 형 청도 영공(송석조를 말함)을 전송하고 그대로 배 위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렸으므로 담화를 나누었다. 한강을 건너 관왕묘(關王廟)에 들어가서 세 사신이 관디[冠帶]를 고쳐 착용하고, 대궐에 나아가 복명(復命)하니, 대신 이하가 모두 사람을 보내어 위문하였다. 집에 돌아와 사당에 배알하고 어머님을 뵈었다. 일가 친척들이 모두 모였는데 다 무고하다. 동사록_강홍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84A_0030_030_0230_2003_003_XML
Rec-2164 동사록(홍우재)_1682_0508 16820508 辭朝。賜虎皮弓箭臘藥節扇胡椒。首譯以下賜節扇胡椒 正副使各受節鉞。直出南關王廟。大臣諸宰來別。親戚故舊。惜別城南。落日催人。去留垂涕。顧此行色。江樹含情。重弟澤兒敏夏佩壺隨來。聯枕良才驛。站邑。醉不記之。 사조(辭朝)하니, 상께서 호피(虎皮)ㆍ활과 화살ㆍ납약(臘藥)ㆍ부채ㆍ후추(수석역관 이하는 부채와 후추만 내렸다.) 등을 내렸는데, 정ㆍ부사는 각각 절월(節鉞)을 받았다. 곧바로 남관왕묘(南關王廟)로 나아가니 대신 이하 관료들이 전별하고 친척과 친구들과는 도성 남쪽에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지는 해가 사람을 재촉하여 가고 남는 이가 눈물을 흘리니, 이 행색은 강과 나무들도 애틋한 정을 머금은 듯하다. 중제(重弟)ㆍ택아(澤兒)ㆍ민하(敏夏)가 술병을 들고 따라와 양재역(良才驛)에서 같이 잤다. 참읍(站邑)에 대한 내용은 술에 취하여 기록치 못했다. 동사록_홍우재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95A_0020_010_0040_2003_006_XML
Rec-2165 동사일기_1711_0515 17110515 辭陛。午後雨。上卽引見。初倭人請除其若君以下禮單。朝議以爲此是兩國交際間禮節。則不可因一差倭之言。遽爾除去。令萊府書問對馬太守。答言東武之令如此。非渠所知云。廟議迄未歸一。或言不可一徇其言。使操縱在彼。正使及臣具言禮單雖賫去。而彼若拒而不受。則非但納侮。倭人或稱禮曹參判通書彼之執政爲恥云。彼若堅持此說。終然退却。則勢將難處。不如減除之爲得宜。且當初書幣。出於一時之權宜。今雖除之。無損國軆。不必强而與之。從事官稍有異議。而上從臣等之言。詢于大臣。竟除禮單。上以臣等之遠涉瘴海。慰諭勤摯。因宣醞。正使言副使任某。雖不多飮。而時或過節。亦涉可慮云云。上曰。當此炎節。身爲遠役。不可崇飮。毋過三爵可矣。臣惶感踧踖。離席拜謝。以次飮賜酒。臣病困不能盡爵。李承旨震壽言任某荷此恩數。不爲盡量。請推考。上不許。上因問此行與水路 朝天 險夷如何云耶。臣等皆言此去海路雖遠。而不如朝天時海程之險艱云。仍退出。往南關王廟更衣。親舊若而人來送。領台亦追到矣。冒雨至漢江。一家及親友送者三四十人。日暮雨甚。投宿良才驛。豐德邊是泰出待來見。備忘記。黑角弓一張,長箭一部,油席二浮,白貼扇二柄,漆別扇三柄,虎皮一張,胡椒三升,臘藥一封。副使任某處賜給。 사폐. 오후에 비가 내렸다. 상이 곧 인견하였다. 처음에, 왜인이 약군(若君) 이하의 예단(禮單)을 뺄 것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것은 양국의 교제에 관한 예절이니, 일개 차왜(差倭)의 말로 인해 선뜻 뺄 수 없다.” 하여, 동래부(東萊府)로 하여금 대마도 태수(對馬島太守)에게 서신을 보내 묻게 했는데, 그 답서에는, “동무(東武)의 명령이 이와 같으니 당신들은 알 바 아니다.” 한다. 이리하여 조정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혹은, “한결같이 그들의 말만 따라 그들로 하여금 조종하게 할 수 없다.” 하였다. 정사와 신(臣)은, “예물은 비록 가지고 간다 하더라도 그들이 만약 거절하고 받지 않는다면 모욕을 당할 뿐만 아니라, 왜인들은 혹 예조 참판이 자기들 집정(執政)에게 통서(通書)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하니, 저들이 만약 이 말을 고집하고 끝내 물리치게 된다면 사세가 난처할 것이니 차라리 빼느니만 못하다. 당초에 서계(書契)와 폐물(幣物)은 일시적 방편에서 나온 것이므로 지금 뺀다 하더라도 국가 체면에 손상될 것이 없으니 굳이 주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고, 종사관은 조금 이의가 있었는데, 상이 신 등의 말을 따라 대신들에게 순문(詢問)한 다음, 마침내 예물을 뺐다. 상은 우리가 멀리 장해(瘴海 독기(毒氣)가 있는 바다)를 건넌다 하여 친절히 위로하면서 술을 내렸다. 정사는, “부사 임모(任某)는 비록 다음(多飮)하지는 않으나 간혹 지나칠 때가 있으니 또한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 무더운 여름에 원행하게 되었으니 과음하지 말 것이며 마시더라도 석잔에 지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신등은 황공한 생각에 조심하면서 일어나 배사(拜謝)하고, 하사한 술을 차례로 마셨는데 나는 몸이 아프고 피곤하여 술잔을 다 비우지 못했다. 승지(承旨) 이진수(李震壽)가 말하기를, “임모가 이와 같은 성은을 입고 주량을 채우지 않으니 추고하소서.” 하였으나 상은 이에 윤허하지 않고 이어, “이번에 가는 길이 조천(朝天)하는 수로(水路)에 비해 그 험하고 평탄한 경로가 어떠하냐?” 고 물었다. 이에 신등은, “이번에 가는 해로(海路)가 비록 멀기는 하나 조천할 때의 해로처럼 험하지는 않습니다.” 하고, 이어 퇴출하여 남관왕묘(南關王廟)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는데, 몇 명의 친구들이 송별차 왔고 영태(鈴台 영의정(領議政)의 별칭) 또한 뒤따라 도착했다. 비를 무릅쓰고 한강(漢江)에 이르니 송별차 나온 일가친척과 친우들이 30~40명이나 되었다. 날이 저물자 비는 더 세차게 내렸다. 양재역(良才驛)에 투숙하였는데, 풍덕(豐德) 변시태(邊是泰)가 나와 기다리다가 보러 왔다. 비망기(備忘記 임금의 명령을 적어서 전하는 문서)에, 흑각궁(黑角弓) 1장(張), 장전(長箭) 1부(部), 유석(油席) 2부(浮), 백첩선(白貼扇) 2병(柄), 칠별선(漆別扇) 3병(柄), 호피(虎皮) 1장, 후추[胡椒] 3승(升), 납약(臘藥) 1봉(封)을 부사 임모에게 사급(賜給)하라 하였다. 동사일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02A_0010_030_0010_2003_009_XML
Rec-2166 동사일록_1682_1116 16821116 晴。與鄭子昂到漢江津頭。迎三使相。而到關王廟。換着紅團領節鉞。裨將以對先導。各行員役。隨後陪行。詣闕復命之後。上引見三使臣於宣政堂。罷出。中官宣醞三使臣及一行員額於仁政殿南月廊。 맑음. 정자앙(鄭子昻)과 함께 한강 나루머리에 도착하여 세 사신을 맞았다. 관왕묘에 이르러 세 사신은 홍단령으로 바꿔 입고 절월(節鉞)을 가지고, 비장을 앞세워 길을 인도하게 하였다. 각 행차의 원역(員役)들은 뒤를 따라 배행하였다. 대궐에 들어가 복명(復命)하고 나니 임금이 선정당(宣政堂)에서 세 사신을 불러 보았다. 끝내고 나오자 내시[中官]가 인정전 남월랑(南月廊)에서 세 사신과 전체 일행에게 임금이 내리는 술을 주었다. 동사일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96A_0060_040_0160_2003_006_XML
Rec-2167 만기요람_재용편4_호조각장사례 null 丁未。戶曹判書李在簡啓。以東,南關王廟墻垣。依己亥年例。自三軍門輪回修築。江華長寧殿執頉物種中難辦者。自戶曹輸送。其餘自本府擧行會减事陳達。定式。 정미(1787, 정조 11)에 호조 판서 이재간(李在簡)이 계(啓)하기를. 동ㆍ남관왕묘(東南關王廟)의 장원(墻垣)을 기해(1779, 정조 3)의 예(例)에 의하여 삼군문(三軍門)에서 윤번으로 수축(修築)하고, 강화 장녕전(長寧殿) 집탈(執頉)된 물종(物種) 중에서 판비(辦備)하기 어려운 것은 호조에서 수송(輸送)하고, 그 나머지는 본부(本府)에서 거행하여 회감(會減)할 것으로 진달하여, 정식(定式)하였음. 만기요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7A_0040_050_0050_2002_001_XML
Rec-2168 만기요람_군정편1_포도청 null 左邊七牌。一牌。自南大門至駝駱洞。伏處在會賢洞口。上二牌。自駝駱洞東至南別殿西墻。伏處在南山洞。下二牌。自鑄字洞至生民洞。伏處在筆橋。三牌。自生民洞東至水口門。伏處在靑凉橋。四牌。自把字橋東至東大門北。伏處在於義洞。五牌。自把字橋西至典洞東。伏處在齋洞。六牌。自鍾樓至五間水門。伏處在水標橋。七牌。自東大門外至關王廟。伏處在東大門外。 좌변 칠패(左邊七牌). 1패는 남대문에서 타락동(駝駱洞)까지인데 복처(伏處)는 회현동(會賢洞) 어귀에 있으며, 상이패(上二牌)는 타락동 동쪽에서 남별전(南別殿) 서쪽 담까지인데 복처는 남산동(南山洞)에 있고, 하이패(下二牌)는 주자동(鑄字洞)에서 생민동(生民洞)까지인데 복처는 필교(筆橋)에 있으며, 3패는 생민동 동쪽에서 수구문(水口門)까지인데 복처는 청량교(靑凉橋)에 있으며, 4패는 파자교 동쪽에서 동대문 북쪽까지인데 복처는 오의동(於義洞)에 있으며, 5패는 파자교 서쪽에서 전동(典洞) 동쪽까지인데 복처는 재동(齋洞)에 있으며, 6패는 종루(鍾樓)에서 오간수문(五間水門)까지인데 복처는 수표교(水標橋)에 있으며, 7패는 동대문 밖에서 관왕묘(關王廟)까지인데 복처는 동대문 밖에 있음. 만기요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7A_0070_030_0020_2002_002_XML
Rec-2169 만기요람_군정편1_순라 null 京城內,外則三軍門,兩捕廳各定校,卒。作八牌。分字內行巡。而三軍門則分日輪回。訓局。初日。寅,申,巳,亥。 牌將八人,軍士八十名。一牌。自館峴至鑄字洞。○二牌。自掌苑署至南山洞。○三牌。自敦義門南邊至鍾閣。○四牌。自敦義門北邊至鍾閣。○五牌。自崇禮門外至西江。○六牌。自崇禮門外至漢江。○七牌。自興仁門外至鍾巖。○八牌。自崇禮門外至大峴西,麻浦。 禁衛營。中日。子,午,卯,酉。 牌將八人,軍士七十八名。一牌。自興仁門北邊至三淸洞。○二牌。自興仁門南邊至南山底。○三牌。自敦義門南邊至南山底。○四牌。自敦義門北邊至三淸洞。○五牌。自弘濟院由三門外至梨太院。○六牌。自麻浦至西氷庫。○七牌。自土亭至望遠亭。○八牌。東郊部字內全當。 御營廳。終日。辰,戌,丑,未。 牌將八人,軍士六十四名。一牌。自五間水門北邊至三淸洞。○二牌。自五間水門南邊至崇禮門。○三牌。自廣惠橋至敦義門。○四牌。自廣通橋至水閣橋。○五牌。自敦義門外至阿峴。○六牌。自興仁門外至水踰峴。○七牌。自崇禮門外至梨太院。○八牌。自大峴至楊花鎭。 左捕廳。軍官八人,軍士二十二名。一牌。自崇禮門南邊至駝駱洞。○上二牌。自駝駱洞東邊至永禧殿西墻外。○下二牌。自鑄字洞至生民洞。○三牌。自生民洞東邊。至水口門。○四牌。自把子橋東邊。至興仁門。○五牌。自把子橋西邊至典洞。○六牌。自鍾閣及銅峴至五間水門。○七牌。自興仁門外至關王廟。 右捕廳。軍官八人,軍士十六名。一牌。自六曹東邊至三淸洞。○二牌。自六曹西邊至彰義門外。○三牌。自工曹後洞南邊至昭義門。○四牌。自昭義門及鍾閣至崇禮門。○五牌。自敦義門外北邊慕華館至大峴。○六牌。自敦義門及藥峴至崇禮門。○七牌。自崇禮門外至萬里峴及石隅。○八牌。自里門洞至外南山。 경성(京城)의 내ㆍ외에는 삼군문과 양 포도청에서 각각 장교와 군졸을 선정하여 8패(八牌)로 만들어 구역을 나누어 순행하는데, 삼군문에서는 일자를 나누어 돌려가며 담당한다. 훈련 도감은 초일(初日)인일(寅日)ㆍ신일(申日)ㆍ사일(巳日)ㆍ해일(亥日) 에 패장 8명ㆍ군사 80명 1패는 관현(館峴)에서 주자동(鑄字洞)까지. ○ 2패는 장원서(掌苑署)에서 남산동(南山洞)까지. ○ 3패는 돈의문(敦義門) 남쪽에서 종각(鍾閣)까지. ○ 4패는 돈의문 북쪽에서 종각까지. ○ 5패는 숭례문(崇禮門) 밖에서 서강(西江)까지. ○ 6패는 숭례문 밖에서 한강(漢江)까지. ○ 7패는 흥인문(興仁門) 밖에서 종암(鍾巖)까지. ○ 8패는 숭례문 밖에서 대현(大峴)의 서쪽 마포(麻浦)까지. 금위영은 중일(中日)자일(子日)ㆍ오일(午日)ㆍ묘일(卯日)ㆍ유일(酉日) 에 패장 8명ㆍ군사 78명 1패는 흥인문 북쪽에서 삼청동(三淸洞)까지. ○ 2패는 흥인문 남쪽에서 남산 밑까지. ○ 3패는 돈의문 남쪽에서 남산 밑까지. ○ 4패는 돈의문 북쪽에서 삼청동까지. ○ 5패는 홍제원(弘濟院)에서 3문 밖을 거쳐 이태원(梨太院)까지. ○ 6패는 마포에서 서빙고(西氷庫)까지. ○ 7패는 토정(土亭)에서 망원정(望遠亭)까지. ○ 8패는 동교부(東郊部)의 구역을 전부 담당한다. 어영청은 종일(終日)진일(辰日)ㆍ술일(戌日)ㆍ축일(丑日)ㆍ미일(未日) 에 패장 8명ㆍ군사 64명 1패는 오간수문(五間水門) 북쪽에서 삼청동까지. ○ 2패는 오간수문 남쪽에서 숭례문까지. ○ 3패는 광혜교(廣惠橋)에서 돈의문까지. ○ 4패는 광통교(廣通橋)에서 수각교(水閣橋)까지. ○ 5패는 돈의문 밖에서 아현(阿峴)까지. ○ 6패는 흥인문 밖에서 무네미고개[水踰峴]까지. ○ 7패는 숭례문 밖에서 이태원까지. ○ 8패는 대현(大峴)에서 양화진(楊花鎭)까지. 좌포도청 : 군관 8명ㆍ군사 22명 1패는 숭례문 남쪽에서 타락동(駝駱洞)까지. ○ 상 2패는 타락동 동쪽에서 영희전(永禧殿) 서쪽 담 밖까지. ○ 하 2패(下二牌)는 주자동에서 생민동(生民洞)까지. ○ 3패는 생민동 동쪽에서 수구문(水口門)까지. ○ 4패는 파자교(把子橋) 동쪽에서 흥인문까지. ○ 5패는 파자교 서쪽에서 전동(典洞)까지. ○ 6패는 종각 및 구리재[銅峴]에서 오간수문까지. ○ 7패는 흥인문 밖[外]에서 관왕묘(關王廟)까지다. 우포도청 : 군관 8명ㆍ군사 16명 1패는 육조(六曹) 동쪽에서 삼청동까지. ○ 2패는 육조 서쪽에서 창의문(彰義門) 밖까지. ○ 3패는 공조(工曹) 뒷동리의 남쪽에서 소의문까지. ○ 4패는 소의문(昭義門)과 종각에서 숭례문까지. ○ 5패는 돈의문 밖 북쪽 모화관(慕華館)에서 대현까지. ○ 6패는 돈의문과 약재[藥峴]에서 숭례문까지. ○ 7패는 숭례문 밖에서 만리재[萬里峴]와 돌모루[石隅]까지. ○ 8패는 이문동(里門洞)에서 외남산(外南山)까지. 만기요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7A_0070_090_0010_2002_002_XML
Rec-2170 만기요람_군정편2_훈련도감 null 東,南關王廟墻垣頹圮則三營並力修築事。正宗丁未。定式。每朔初十日。送校摘奸。 동ㆍ남 관왕묘(關王廟)의 장원(墻垣)이 무너지면 3영에서 힘을 합해서 수축하도록 정종 11년 정미(1787년)에 규례를 정하여 매월 초 10일(初十日)에 장교를 보내어 부정을 적발한다. 만기요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7A_0080_040_0120_2002_002_XML
Rec-2171 만기요람_군정편3_금위영_배호 null 若値經宿之時。高峯斥堠,通路伏兵亦與御營廳輪回定送。城內經宿時。斥堠十四處。一將四卒。崇禮門城上,昭義門城上,敦義門城上,惠化門城上,興仁門城上,光煕門城上,蠶頭,鞍峴,北岳,曲城,鷹峯,東關王廟後峯,往十里後峯。伏兵六處。崇禮門外三巨里,昭義門外三巨里。敦義門外三巨里,彰義門外三巨里,惠化門外三巨里,光煕門外三巨里。扈衛時。斥堠五處。崇禮門城上,蠶頭,阿峴,南伐院峙,昭義門城上。伏兵。崇禮門外三巨里。若値冬節則斥堠,伏兵處所。並减半事。正宗癸卯。定式。故隨其經宿之所。各定信地。宗廟動駕時。斥堠七處。崇禮門城上,興仁門城上,光煕門城上,惠化門城上,東關王廟後峯,北岳,蠶頭。伏兵三處。崇禮門外三巨里,彰義門外三巨里,興仁門外三巨里。社稷動駕時。斥堠七處。崇禮門城上,興仁門城上,敦義門城上,彰義門城上,曲城,蠶頭,北岳。伏兵三處。彰義門外三巨里,敦義門外三巨里,興仁門外三巨里。迎勅時。伏兵三處。彰義門外三巨里,弘濟院三巨里,東關王廟三巨里。每處一將四卒。郊外幸行時斥堠,伏兵。迎勅時斥堠。訓局全當。 만일 밤을 지내게 될 때에는 고지[高峰]에서의 척후와 통로에서의 복병도 또한 어영청과 윤차로 결정하여 파송한다. 성내에서 밤을 지낼 때 척후 14개소에 장교 1명과 병졸 4명씩, 숭례문의 성상ㆍ소의문의 성상ㆍ돈의문의 성상ㆍ혜화문의 성상ㆍ흥인문의 성상ㆍ광희문의 성상ㆍ잠두(蠶頭)ㆍ안현(鞍峴)ㆍ북악ㆍ곡성(曲城)ㆍ응봉(鷹峯)ㆍ동관왕묘(東關王廟) 후봉ㆍ왕십리 후봉, 복병 6개소는 숭례문 밖의 삼거리ㆍ소의문 밖의 삼거리ㆍ돈의문 밖의 삼거리ㆍ창의문 밖의 삼거리ㆍ혜화문 밖의 삼거리ㆍ광희문 밖의 삼거리ㆍ왕가를 호위할 때 척후 5개소는 송례문의 성상ㆍ잠두ㆍ아현(阿峴)ㆍ남벌원치(南筏院峙)ㆍ소의문의 성상, 복병(伏兵)은 송례문 밖의 삼거리. 만일 동절을 당하게 되면[値冬節則] 척후와 복병의 장소는 모두 반수로 줄이도록 정종 7년 계묘에 규례를 정하였다. 그러므로 그 밤을 지내는 장소에 따라 모두 일정한 지점을 정한다. 국왕이 종묘에 거둥할 때 척후 7개소는 숭례문의 성상ㆍ흥인문의 성상ㆍ광희문의 성상ㆍ혜화문의 성상ㆍ동관왕묘의 후봉ㆍ북악ㆍ잠두, 복병 3개소는 숭례문 밖의 삼거리ㆍ창의문 밖의 삼거리ㆍ흥인문 밖의 삼거리. 국왕이 사직(社稷)에 거둥할 때 척후 7개소는 숭례문 성상ㆍ흥인문 성상ㆍ돈의문 성상ㆍ창의문 성상ㆍ곡성(曲城)ㆍ잠두ㆍ북악, 복병 3개소는 창의문 밖의 삼거리ㆍ돈의문(敦義門) 밖의 삼거리ㆍ흥인문 밖의 3거리. 중국 사절을 영접할 때 복병 3개소는 창의문 밖의 삼거리ㆍ홍제원(弘齊院)의 삼거리ㆍ동관왕묘의 삼거리. 1개소에 장교 1명과 군졸 4명씩이다. 국왕이 교외에 거둥할 때의 척후ㆍ복병과 중국 사절을 영접할 때의 척후는 훈련도감에서 전담한다. 만기요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7A_0090_010_0110_2002_002_XML
Rec-2172 만기요람_군정편3_금위영_적간 null 東,南關王廟。每朔二十日。宮墻。每五日。南壇,雩祀壇,龍壇,司寒壇。每月初。並送校摘奸。東,南廟墻垣。三軍門並力修築事。正宗丁未。定式。 동ㆍ남관왕묘(東南關王廟)는 매월 20일, 궁장(宮墻)은 매 5일, 남단(南壇)ㆍ우사단(雩祀壇)ㆍ용단(龍壇)ㆍ사한단(司寒壇)은 매월 초에 모두 장교를 보내어 부정을 적발한다. 동ㆍ남쪽관왕묘의 담장은 삼군문에서 힘을 아울러 수축하도록 정종 11년 정미(1787년)에 규례를 정하였다. 만기요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7A_0090_010_0190_2002_002_XML
Rec-2173 만기요람_군정편4_해방 null 宣祖三十一年。李舜臣移屯於此島。募民屯耕。南民。襁屬歸之。遂爲大鎭。有關王廟。肅宗七年。設僉使。 선조(宣祖) 31년에 이순신이 이 섬에 옮겨와서 주둔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실시했으므로 남도의 백성들이 많이 모여들어 드디어 큰 진(鎭)이 되었다. 관왕묘(關王廟)가 있다. 숙종(肅宗) 7년에 첨사를 설치하였다. 만기요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7A_0100_020_0030_2002_002_XML
Rec-2174 목민심서_예전6조_제사 null 如平壤之箕子廟。慶州之崇德廟。順天之忠愍祠。康津之誕報廟。所在有之。其屋宇之修葺。籩豆之庀治。皆牧之責也。神罔時恫。斯賢牧也。 평양(平壤)의 기자묘(箕子廟)ㆍ경주(慶州)의 숭덕묘(崇德廟)ㆍ순천(順天)의 충민사(忠愍祠)ㆍ강진(康津)의 탄보묘(誕報廟)와 같은 사묘가 가는 곳마다 있다. 그 사우(祠宇)의 수리와 변두(籩豆)의 수선도 모두 수령의 책임이니, 신의 상심이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어진 수령이다. 목민심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88A_0080_020_0050_2014_002_XML
Rec-2175 몽경당일사_1편_마자인정기_1885_1029 18851029 入關帝廟。廟制。外施金碧。有若精洒。殿內塵煤堆滿。塑像與我國南廟懸殊。全無嚴威氣像。傍有佛寺及財神廟。廟門兩扇。分貼龍虎二字。門外有朱漆木柱。上頭鍮飾。左右對立。如我國將臺前帥字旗竿。每月朔望。懸黃紬雙旗於柱上。無處不然。凡寺廟宜在靜僻乾淨之地。而此在閭家市街之中。極涉瀆褻。從人曰。沿路寺廟。在在皆然云。 관제(關帝)의 사당에 들어갔다. 밖에는 단청을 하여 정쇄(精灑)한 것같이 보이나 전 안에는 먼지와 그을음이 꽉 차 있었다. 소상(塑像)은 우리나라 남관왕묘(南關王廟)의 소상과 아주 달라서 전연 위엄스러운 기상이 없다. 곁에는 불사(佛寺)와 재신묘(財神廟)가 있다. 문은 두쪽 문으로 용(龍)ㆍ호(虎) 두 자를 갈라 붙였다. 문밖에는 붉은 칠을 한 나무기둥이 있는데, 꼭대기에 놋쇠로 장식하여 좌우에 마주 세운 것이 마치 우리나라 장대(將臺) 앞에 세운 수자기(帥字旗) 깃대 같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누런빛 명주로 만든 기(旗)를 쌍으로 다는데, 어디서나 그렇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무릇 절이나 사당은 고요하고 외진 깨끗한 곳에 있어야 하는데, 이는 여염집 시가 가운데 있어서 매우 정결하지 못한 것 같다. 따르던 사람이 말하기를, “연로(沿路)의 절이나 사당은 어디서나 모두 그렇습니다.” 한다. 몽경당일사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9A_0020_020_0040_2004_011_XML
Rec-2176 무오연행록_1권_1798_1123 17981123 null 마고령을 지나매 설유참(薛劉站)이 있으니 곧 당 나라 설인귀(薛仁貴)와 유인원(劉仁願)이 군사를 쓰던 곳이요, 또 이르기를 솔참이라 하니, 책문(柵門) 지난 후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두어 그루의 소나무가 있으니 서리고 창울(蒼欝)하여 가히 사랑스럽다. 소나무 남쪽에 ‘칠성사(七星祠)’란 사당(祠堂)이 길가에 있으니, 지나는 곳 한 마을에 한 절이 있으며, 혹 돌을 뚫어 감실(龕室)을 만들고, 또 흙을 쌓아 가운데를 비워 관왕(關王)의 화상(畫像)과 작은 부처와 토지신(土地神)을 앉히고 앞에 향로(香爐)를 놓아 예공(禮供)하고, 절과 관왕묘(關王廟)의 문 앞에 붉은 줏대를 쌍으로 세워, 삭망(朔望)이면 기(旗)를 달고 제(祭)를 지내니, 관왕묘는 근사(近似)하거니와 절에는 무위(無謂)하더라. 중이 관왕묘와 절에 잡되이 있어 고기를 먹으며, 냄새나는 풀을 먹어 출가(出家)한 사람의 모양같지 아니하고, 오직 황성(皇城) 만수사(萬壽寺) 중이 자못 중의 도리를 지킨다 하더라. 무오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3A_0010_030_0200_2004_007_XML
Rec-2177 무오연행록_1권_1798_1127 17981127 null 7, 8리를 가되 인가를 보지 못하고, 수 리(里)를 지나 청석령(靑石嶺)에 이르니 임목(林木)이 많고 악석(惡石)이 뇌락(磊落)하여 빛이 다 푸르니, 이래서 청석령이라 하더라. 영(嶺)이 거의 끝나는 곳에 인가가 둘이 있으니 숯을 굽는 사람이요, 관왕묘(關王廟) 영 위에 있어 용마루를 아니 하였으니 높고 바람이 거세어 기와가 걷힐까 염려함인가 싶으며, 문 앞에 비(碑)를 세웠으되 글자가 닳아서 보지 못할러라. 영 높이가 회령령(會寧嶺)만 못하나 제일 높은 데를 지나는데 눈이 두터이 덮였으니 매우 미끄럽고 첩첩한 바위 골짜기 사이로 굽어들어 말발이 깊이 빠지며 수레바퀴가 기울어져 떨어질까 싶으며, 길가에 달린 한 언덕 위에 세 바위가 섰는데 형상이 괴석(怪石) 같아 우러러보기에 장차 굴러 내릴 듯하니, 보기에 위태하더라. 무오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3A_0010_030_0240_2004_007_XML
Rec-2178 무오연행록_2권_1798_1208 17981208 null 마을 가운데 관왕묘(關王廟)가 있으니 묘당(廟堂)이 장려하고 소상(塑像)이 웅장하니 본래 영험(靈驗)이 많다 하는지라. 이번 사행이 책문(柵門) 이후로 병들지 않은 자가 없고 죽은 자 이미 세 사람이라. 하인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병들지 않은 자도 또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며, 병든 자는 더욱 앞날을 보전하지 못할 것 같은 마음이 많은지라. 대개 하인의 천(賤)하고 어리석은 상정(常情)이 일이 있으면 문득 기도하기를 일삼는지라. 드디어 부방(副房)에게 의논하여 상정을 진정코자 통돼지와 약과(藥果) 100닢과 배와 밤 대추 각 한 근과 술을 갖추어 지전(紙錢)을 태워 관제묘(關帝廟)에 제를 지낼 때, 당상 역관(堂上譯官) 김명귀를 보내어 글을 가려 써 제하니, 그 글에 말하기를, 오직 신령이 당당한 충의의 기운은 천고에 비치어 길이 있고 / 唯靈堂堂忠義之氣 炳千古而長存 명명한 높고 높은 은혜는 일만 나라를 전고하여 고르게 보는도다 / 明明庇佑之恩 轉萬邦以均施 물이 땅에 있음 같으니 일찍 천사의 신령을 나타냄으로부터시며 / 如水在地 爰自玉天之顯聖 큰 땅과 넓은 하늘이 드디어 금상을 평안히 모시기를 같이하였도다 / 率土普天 遂從金床之安享 하물며 청구는 두 번 지은 은혜를 입어 / 矧靑丘 被再造之惠 이 붉은 기둥이 두 묘당의 거동을 빛내게 하였도다 / 是丹楹 侈兩廟之儀 진사(辰巳)년 액운을 도리어 생각하니 신령이 진실로 힘이 들고 / 回思龍蛇之劫運 神實勞矣 생뢰의 향례를 공설하니 국왕이 또한 절을 하시도다 / 告厥牲牢之饗禮 國王亦拜 자못 소방의 흙덩이를 잡는 공을 닦으매 이에 삼사가 경(境)에 나는 역사를 맡았도다 / 殆小邦以修執壤之貢 乃三介應出彊之役 관개가 서로 도로에 이었으니 신선한 원습의 수고로움이요 / 冠蓋相屬於道路 駪駪原隰之勞 세월이 관하에 저물었으니 비비한 우설의 읊음이러라 / 歲月云暮於關河 霏霏雨雪之詠 이 시령의 유행하는 병을 즈음하여, 드디어 행로의 엎어지는 탄식을 이루었도다 / 際玆時令輪行之疾 遂致行路顚連之嘆 더우면 원망하고 추우면 슬퍼하니, 하늘이 바야흐로 몹쓸 병을 내리시거늘 / 暑怨寒咨 天方降疵 바람이 신음하고 비에 한숨 쉬니 사람이 진실로 무슨 죄런고 / 風呻雨喟 人實何故 만 리의 돌아오기를 미치지 못하니, 슬프도다 저 세 사람의 죽음이여 / 未及萬里之旋歸 哀哉三人之並零 층층한 얼음과 쌓인 눈에 귀신이 장차 주릴 것이요, 일만 돌무더미와 일천 뫼에 혼이 돌아가지 못하리로다 / 層氷積雪 鬼將餒矣 萬磧千山 魂不歸思 슬프고 슬프다, 죽은 사람은 할일 없거니와, 이를 어찌할꼬 오히려 병든 이여 / 吁嗟乎已矣死者 乃此何其有病諸 비록 추위 병이 가히 바람을 쐬지 못할 것이나, 이 진공이 스스로 그날이 있도다 / 雖寒疾 不可以風 此進貢 自有其日 적이 조섭하기를 기다리면, 찬진할 기약을 어길까 하거늘, 한가지로 신명에 빌어 부지하는 힘 입기를 원하는도다 / 少待將息 恐乖攢進之期 共祝神明 願資扶持之力 이에 절사 이 묘당을 지날 즈음을 당하여, 감히 곤궁하면 하늘을 부르짖는 정성을 부쳤도다 / 慈當節使過廟之際 敢寓困窮呼天之誠 엎드려 원하나니 / 伏願 언월도 휘각하는 위엄을 떨쳐, 반드시 먼저 400병을 소멸하고 / 奮偃月揮却之威 必也消滅四百病 해를 지나 행매하는 괴로움을 진념하니 멀다 삼천리 길이 묘망하도다 / 軫過歲行邁之苦 逖矣三千里渺茫 바람을 거두고 일기 평안하니, 현명을 조서하여 절을 늦추고 / 風收日斂 詔玄冥而弭節 아침에 가고 저녁에 쉬어 청춘의 고향에 돌아가게 할지라 / 朝徂夕宿 好靑春而還鄕 나으면 장차 조회하니 하여금 회동하는 예에 미치게 하고 / 愈將朝焉 俾晉會同之禮 슬피 여기는 것이 명이라, 써 질통의 부르짖음을 펴노이다 / 哀哉命也 用伸疾痛之呼 김명귀가 돌아와 말하되, “장차 제를 베풀고 지전(紙錢)을 태우려고 하는데 저들이 무리를 지어 구경하므로 제를 다 지내고 음식을 나누어 주었노라.” 하며, 또 말하되, “하인들이 저희를 위하여 제를 지낸다 하고 말하되, ‘이같이 마음을 써 주시니 아픈 줄을 깨닫지 못하노라.’ 하며, ‘이날 밤 제사에 인명이 많이 살리라.’ 하여 기뻐한다.” 하니, 하인(下人)의 어리석음이 이 같은지라. 무오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3A_0020_010_0020_2004_007_XML
Rec-2179 무오연행록_2권_1798_1211 17981211 null 가게 안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가게 윗집이 곧 관왕묘(關王廟)라, 밖에 두 겹으로 문을 막았으며, 바깥문을 마주하여 길을 건너 큰 채각(綵閣)이 있으니 외채집이로되 섬돌이 한 길이 넘으며 재목과 단청이 웅장하고 빛나니, 이는 희자(戱子)가 놀음하는 집이라. 희자라 하는 것은 우리나라 솟대놀음에 탈을 쓴 광대(廣大)놀음과 같으니, 명 나라 때 조정 신하의 의관에 괴이한 복색을 갖추어 각종 희롱을 하니 이래서 오랑캐들이 우리나라 사행(使行)의 의복을 보며 웃으며 말하되, “이 희자(戱子)와 같은 모양이라.” 하니, 제 비록 근본 한인(漢人)의 자손이나 풍속에 물들어 도리어 웃으니 어찌 불쌍하지 않으리오. 들보에 사람의 성명을 벌여 쓰고 성명 아래 은자(銀子) 추렴[出斂]한 수를 기록하였으니 모두가 강남(江南) 상인이라. 길가 큰 묘당(廟堂) 앞에 항상 희자 놀음하는 집을 지었으니 크게 제(祭)를 지내면 반드시 희자 놀음을 베풀고, 묘당 밖에 큰 비를 세웠으니 병신년에 중수한 비요, 시주(施主)한 사람의 성명을 또한 새겼으니, 그중 ‘조선 수당(首堂) 박도관’이라 하였으니, 이자는 이번 행중(行中) 역관 박내행의 아버지요, 박영화의 할아버지라. 수당은 곧 수역(首譯)을 이른 말이니, ‘500냥 은을 시주하다.’고 기록하였더라. 좌우 월랑(月廊)에 적토마(赤兎馬)를 세웠으되 다 사람이 고삐를 쥐었으니, 하나는 얼굴이 붉고 영특(英特)하며, 하나는 희고 고우니, 이는 우리나라 관왕묘에서 보던 바와 다르며, 묘당(廟堂)의 모습이 장대하고 화려하며 앞에 점(占)치는 산통이 있으니, 옛날부터 영험(靈驗)이 있다 하더라. 소상(塑像)이 특별히 웅장하니 세 길[丈]이 넘을 것이요, 낯빛이 대춧빛이라, 아국 남관왕묘(南關王廟) 소상과 같고, 앞에 또한 작은 소상을 앉혔더라. 탁자 앞에 여남은 소상을 세웠으니 다 장수(將帥)의 모양이라, 거동이 하나하나 다 웅장하고, 어둑한 집안에 흰빛이 번득이는 날카로운 창검을 좌우에 늘어놓았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서 스스로 존경하게 하더라. 관왕(關王)은 천하의 영웅이라, 범 같은 위엄과 굳은 충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장부(丈夫)의 천금(千金) 같은 몸을 헛되이 버렸으니, 이러므로 분해서 속이 답답한 정신과 영령(英靈)한 혼백이 천지간에 맺혀 1000여 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아니하니, 자주 신병(神兵)을 거느리고 구름 속에서 얼굴이 나타나 천하의 옳은 싸움을 돕고, 도적으로 하여금 기운을 잃게 하는지라. 이것으로 중국 사람이 공경하여 섬기는 것이 부처보다 더하고, 임진왜란을 당하여 우리나라에 이르러서는 천장(天將)이 은(銀)을 모아 동관왕묘(東關王廟)를 세우고, 그 후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수천 냥 은을 내리사 남관왕묘(南關王廟)를 세우게 하시니, 집을 이루고 소상을 받들어 모시는데, 모든 장수(將帥)가 정성을 깨끗이 하여 제사를 지내므로, 제사를 마친 후 우레하고 번개가 치면 이는 관왕의 신령이 강림(降臨)하심이니 필연 도움이 있어 병란(兵亂)을 평정한다 하니, 이때 하늘이 맑고 달과 별이 밝게 비쳐 빛나는지라, 사람이 다 믿지 아니하더니, 제사를 거의 마치는데 갑자기 바람이 일어나며 서북으로 검은 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덮고 천둥[天動]과 번개가 치며 큰비를 뿌리는지라, 사람이 다 놀라고 이상히 여기더니 오래지 않아 관백(關白) 평수길(平秀吉)이 죽고 적병이 물러가니, 지금까지 관왕의 도움을 유쾌하게 아는지라, 기이한 사건이요 생각지 못할 일일러라. 무오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3A_0020_010_0050_2004_007_XML
Rec-2180 무오연행록_2권_1798_1212 17981212 null 꼭두새벽에 떠나 10리를 가니 해가 비로소 돋더라. 소송령(小松嶺)에 이르니 이즈음에서 동북(東北)으로 바다가 보이는데, 물빛이 검고 푸르러 하늘에 닿아 끝이 없으니, 이는 발해(渤海)라 하는 바다요, 서북으로 또 큰 산이 막혔으니, 산허리에 만리장성이 굽이굽이 둘러져 있으니 이는 진시황(秦始皇)이 쌓은 것으로, 임조(臨洮)란 땅에서 시작하여 요동(遼東)에 이르러 넓이와 길이가 만여 리라. 중전소(中前所)에 다다르니, 길 오른편에 큰 성이 있어 중후소와 같아서 길이 성 밖으로 지나며, 길가에 관왕묘가 있으니 현판에 써 말하되, ‘충의신무령후관성대제(忠義神武寧侯關聖大帝)’라 하고, 또 푸른 글자로 썼으니 이는 길가에서 처음 보는 것이라. 이후는 관왕묘 현판이 이와 많이 같고, 또 ‘충성묘(虫聖廟)’라 하는 묘당이 있으니 벌레 성인의 묘당이란 말이다. 누에 귀신[蠶神]을 위한 곳인가 싶으나 자세히 모르겠더라. 무오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3A_0020_010_0060_2004_007_XML
Rec-2181 무오연행록_2권_1798_1217 17981217 null 봉산점(蜂山店)과 나산점(螺山店)을 지나니 북편(北便)에 높은 언덕이 있고, 중석(重石)이 우뚝 솟아 층계(層階)를 쌓은 모양같고 위에 절[寺]을 지었으니 모양새가 아주 정교하고, 여기를 지나니 제자산(梯子山)에 또한 돌이 쌓여 누백층(累百層) 섬돌이 생기고, 또한 절이 있어 나산점과 같고, 절 밖에 담을 둘렀으며 붉은 분으로 발랐으니, 우러러보매 모습이 네모 반듯하고 빛나며, 그 아래 평지(平地)에 관왕묘(關王廟)가 있으니 문을 길로 향하여 열었으며 소상(塑像)이 있는지라. 사행이 지나자 중의 무리가 향(香)을 피우고 경쇠를 치며 손에 그릇을 들고 돈을 달라 하니 매우 무례하며, 관내(關內)로부터 길에까지 모여 일행이 지날 때에 100여 보 앞에서부터 소리를 크게 하여 ‘대노야(大老爺)는 돈을 주라.’ 하며, 즉시 아니 주면 100여 보를 쫓아와 달라 하며, 계집은 아주 발을 동였으니 이는 한인(漢人)이라. 동인 발로 수백 보를 따라오되 넘어지는 일은 없으나 걸음 모양이 매우 위태하고, 옷이 극히 남루하나 귀밑에 가화(假花)를 없애지 아니하였으니 참으로 우습더라. 일행 중에 혹 돈을 주는 자 있으며, 주지 않는 자는 수레를 모는 되놈이 돈 푼씩 주고, 마두 황이(黃伊)는 보는 족족 한두 푼씩 주더라. 무오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3A_0020_010_0110_2004_007_XML
Rec-2182 무오연행록_5권_1799_0126 17990126 null 길가 가게 안으로 한 문을 지나며 한 묘당(廟堂)이 있으니, 관왕 소상(關王塑像)을 봉안(奉安)한지라, 갑옷을 입고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동쪽을 향하여 보며 무슨 말을 하는 모양이라. 눈에 노기가 있어 눈을 부릅뜨고, 동벽(東壁) 아래 한 소상을 매어 앉혔으니 얼굴을 밖으로 향하여 항복(降伏)하지 아니하는 모양이러라. 이는 오(吳) 나라 장수 조빈(曹彬)이니, 적토마를 도적하다가 잡힌 모양이러라. 한 사람은 조빈의 뒤에서 맨 노끈을 붙들고, 한 사람은 철퇴로 치려 하는 거동이요, 좌우에 뫼신 신장(神將)이 다 우러러 관왕(關王)께 명을 받아 조빈을 노리고 있으며, 적토마는 벽 밑에서 관왕을 치밀어 보며 갈기를 흔들고 눈을 부릅뜬 거동이로되, 보니 살았는 듯하니, 전하는 말이, 수(隋) 나라 때에 만들었다고 하더라. 관왕묘 서(西)로 반 리(里)는 가서 약왕(藥王)의 묘가 있으니, 천황씨(天皇氏)ㆍ지황씨(地皇氏)ㆍ인황씨(人皇氏)ㆍ헌원씨(軒轅氏)ㆍ복희씨(伏羲氏)ㆍ신농씨(神農氏) 여섯 위를 주벽(主壁)하여, 좌우로 의약(醫藥)에 공 있는 사람 10여 인을 만들어 앉혔으되, 각각 앞에 패(牌)를 세우고 성자(姓字)를 썼더라. 무오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3A_0050_010_0010_2004_007_XML
Rec-2183 무오연행록_6권_1799_0221 17990221 null 해 뜰 무렵에 양수하에서 떠나 중후소(中後所)에 이르러 점심 식사를 하니, 이전에 들렀던 집이라. 식후에 세 사신이 관제묘(關帝廟)에 이르러 들어가 배례(拜禮)하니, 소상은 우리나라 남묘(南廟)와 같고, 앞에 여러 신장(神將)을 모셨으되, 다 위풍이 늠름하고, 어둑한 집안에 서리 같은 창검(槍劍)이 벌였으니, 마음이 숙연하더라. 절할 때마다 승려가 옆에서 종과 북을 쳐 절하는 수(數) 대로 치더라. 상방이 올 때에 이곳에 기도(祈禱)하라 하고 건량관(乾糧官) 이시관(李時寬)을 남게 하여 보사제(報謝祭)를 지내다. 본래 영험이 있다 이르는 묘당이러라. 동관역(東關驛)에 숙소하니 또한 올 때 들었던 집이라. 계집 세 사람이 담으로 좇아 보며 우리나라 사람과 무슨 말을 하고자 하니, 곧 역승(驛丞) 마원의 집안 식구라. 늙은 여인은 역승의 아내요, 젊은 두 여인은 하나는 며느리요, 하나는 딸이라 하되, 얼굴이 단정하고 묘한지라. 유양청(柳良淸)이 좋게 여겨 변변치 못한 한어로 간신히 무슨 말을 물으니 힘들고 고생스럽더라. 무오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3A_0060_010_0150_2004_007_XML
Rec-2184 백사집_백사별집_1권_계사 null null 아뢰기를, “도병(逃兵)의 폐단에 대해서는 식자(識者)들이 그것을 걱정해 온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대체로 천장(天將)이 다 철수하고 나면 도병을 막기 어려운 걱정이 있음을 염려한 것입니다. 지금은 천장들이 경성에 가득히 있고 철거한 것은 다만 이 대아문(大衙門)뿐인데, 삼문(三門) 밖에는 이미 각(角)을 울려 계엄(戒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후일 걱정 거리의 조짐이 이미 드러났으니, 만일 지금 처치하지 않으면 후환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천장은 비록 우리 나라로 하여금 일일이 포박(捕縛)하도록 하고 있으나,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이미 포박한 뒤에 도병이 거짓말로 ‘일을 보러 밤에 나왔다가 잘못 체포되었다.’고 하면 천장이 바로 석방해 주어 끝내 아무 일이 없게 되고, 도병이 이로 인하여 거짓말로 ‘조선 사람이 나를 체포할 때에 내가 가지고 있던 은자(銀子)까지 아울러 빼앗아 갔다.’고 할 경우에는 천장이 그 은자를 추징(追徵)하는 사례까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포도군관(捕盜君官)들이 그 누가 힘을 다해서 체포하려 하겠습니까. 요즘 듣건대, 남방에는 이미 흩어져서 반란을 일으키는 폐단이 있다고 하니, 이 또한 대단히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만일 천장이 다 철수하고 나면 머물러 있을 사람은 다만 동관왕묘(東關王廟)의 감조관(監造官) 한빈(韓贇) 및 섭정국(葉靖國) 두 사람뿐인데, 두 사람의 표하(標下)에 있는 사람은 모두 10여 인도 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 도통판(陶通判)이 경성에 있을 때에 이 사유를 갖추어 통판으로 하여금 잘 처리해서 이 두 관원의 표하에 있는 사람들을 분명하게 적어 내도록 하고, 또 양표(糧表)를 주어서 우리 나라로 하여금 그 양표를 근거로 삼아 늠료(廩料)를 지급하게 하여 무뢰배들로 하여금 두 관원의 표하에 줄을 이어 투탁(投托)해서 점차로 많은 수를 이루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니, 그러고 나면 양표가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에서 의당 일일이 체포하여 해송(解送)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말을 만들어 통판에게 이자(移咨)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백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60A_0080_010_0100_2002_002_XML
Rec-2185 백사집_백사별집_2권_계사 null null 아뢰기를, “정원(政院)의 계사(啓辭)에서 ‘첨 천총(詹千總)이 구타를 당했다느니, 치료하는 일로 곳곳에서 소란을 일으킨다느니 하는 말이 있으니,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는 뜻으로 입계(入啓)한 결과, ‘아뢴 대로 하라. 이 일은 작지 않은 일이니, 만일 뜻밖의 일이라도 생기면 비변사로 하여금 속히 처치하도록 하라.’는 일로 전교하셨습니다. 신들은 전교를 받들고 허둥지둥 와서 모였으나, 사건의 수말(首末)을 알 수가 없어 각각의 사람을 파송(派送)하여 그 종적(蹤迹)을 조사해 본 결과, 대체로 요계(遼薊)의 도병(逃兵)들이 서로 모여 떼를 지어서 기필코 이승총(李承寵)을 상해(傷害)하려고 그를 결박하여 간 것입니다. 처음 동대문(東大門) 관왕묘(關王廟)의 감조위관(監造委官) 한수비(韓守備)의 우소(寓所)에 당도해서 즉각 또 들으니 ‘그대로 이승총을 결박하여 갔는데 아직 어느 곳에 두었는지는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소란을 일으키던 당시에는 그들의 원수(元數)가 겨우 20여 인 정도였는데, 지금 섭 도사(葉都事)의 문서(文書)를 보니, 숫자가 백여 인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숫자의 다과(多寡)에 대해서는 비록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옥문(獄門)을 때려부수고 차관(差官)을 결박하여 공공연히 한낮에 도중(都中)에서 소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요즘 외간(外間)에 항상 이런 우려가 있었는데, 지금 과연 증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들의 뜻도 서로 달라서 혹자는 ‘즉시 초포(剿捕)해야 한다.’ 하고, 혹자는 ‘우선 해산(解散)하도록 두었다가 그들이 여기저기 흩어지기를 기다려서 열군(列郡)에 통지하여 각각 체포하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승총이 이미 결박되어 갔으므로, 섭 도사가 이자(移咨)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지금 만일 우리 나라에서 전혀 하는 일이 없으면 이로 인하여 언단(言端)을 야기시켜서 천조(天朝)의 귀를 어지럽히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병조로 하여금 무사(武士)를 정밀히 뽑아서 장수를 정하여 군법(軍法)으로 조직시키도록 하고, 또 훈련도감으로 하여금 특별히 정용(精勇)한 군사를 뽑아서 성(城) 밖으로 나가 변(變)에 대비하게 하되, 한편으로는 계려(計慮)가 있는 역관(譯官) 수인(數人)으로 하여금 지계(智計)가 있는 무장(武將)을 대동하고 먼저 전로(前路)에 나가서 기회를 틈타 변을 관찰하게 하도록 할 것이며, 또 섭 도사나 혹은 이승총 등을 만나서 상의하여 계책을 물어보아서 만일 초포할 만한 형편이 되면 초포하고, 만일 이미 해산하였으면 그들의 종적을 탐문하여 때를 타서 박멸하도록 하되, 이는 주장(主將)이 임시하여 처치하기에 달린 것이니, 그 사이의 진퇴(進退)에 대해서는 일일이 지시해 주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다만 그 도병들이 모두 건장한 말을 타고 겸해서 궁전(弓箭)까지 소지하여 일대(一隊)를 이루었으니, 그들을 체포하는 즈음에 혹 소홀히 하여 관병(官兵)을 절손(折損)시키게 될까 하는 것이 또한 염려스러우니, 이런 곡절을 미리 지시해 주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백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60A_0090_010_0010_2002_002_XML
Rec-2186 백사집_백사별집_5권_조천록_1598_1219 15981219 null 요양(遼陽)에서 출발하여 화표주(華表柱)와 관왕묘(關王廟)를 구경하고, 서관(西關), 한가분(韓家墳), 팔리포(八里鋪), 수산포(首山鋪), 수산령(首山嶺), 주필산(駐蹕山), 사하포(沙河鋪), 사하(沙河), 장점포(長店鋪), 징청사(澄淸寺)를 지나 안산(鞍山)의 염가(閻家)에서 묵었다. 60리를 갔다. 백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60A_0120_010_0220_2002_003_XML
Rec-2187 백사집_백사별집_5권_조천록_1599_0102 15990102 null 정월 2일 해월의 관왕묘(關王廟)의 운에 차하다. 평생에 스스로 남보다 뛰어남을 자부했는데 / 平生自負出人奇 적토마와 청룡도가 세상일과 어그러졌네 / 赤兎靑龍世事違 비장한 절개는 천지에 맹세할 만하였고 / 壯節有如天地在 깊은 계책은 귀신이 알기를 허여치 않았네 / 深謀不許鬼神知 삼분은 정히 위주를 붙들려는 뜻이었는데 / 三分政欲扶危主 구석은 무슨 까닭으로 유아를 가두었던고 / 九錫何緣獄幼兒 그 의열은 지금까지 향사를 오로지 받으며 / 義烈祗今專享祀 남은 위엄이 아직도 화이를 진동시키누나 / 餘威猶得震華夷 백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60A_0120_010_0470_2002_003_XML
Rec-2188 백사집_백사별집_5권_조천록_1599_0208 15990208 null 병부(兵部)에서 돌아온 이후로 오래도록 관중(館中)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전혀 소식을 통할 수가 없고, 성지(聖旨) 또한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으므로, 자못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형 군문(軍門), 만 경리(萬經理) 등의 제본(題本)이 연달아 와서야 비로소 정 주사(丁主事)가 서쪽으로 돌아왔음을 알게 되었고, 또 본국(本國)의 군민(軍民)들이 관왕묘(關王廟)에 붙인 방문(榜文)의 말을 보았는데, 이로 인하여 중조(中朝)의 논의가 흉흉해졌다. 우리들은 이 때문에 혹 변무(辨誣)의 일에 또 장차 별도로 다른 논의가 생길까 몹시 염려되어 서로 머리를 모으고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아주 괴롭게 나날을 보냈다. 백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60A_0120_010_0950_2002_003_XML
Rec-2189 번암집_3권_시_관묘습악 null 東溟波靜日華森。神馬嘶空不可尋。廟裏祇今花月夜。彩簫閒捻太平音。 동해 물결 고요하고 햇빛이 찬란하니 / 東溟波靜日華森 허공에서 신마 우나 찾아볼 수는 없네 / 神馬嘶空不可尋 사당에서 단지 지금 꽃 피고 달 뜬 밤에 / 廟裏祇今花月夜 채색 피리 한가롭게 제사 음악 연습하네 / 彩簫閒捻太平音 번암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43A_0070_010_0160_2018_002_XML
Rec-2190 병자일본일기_1636_1222 16361222 朝晴。食後雪作。日出發行。入日光山。則彌滿一洞。羅絡高低者。皆梵宮也。所謂山管橋千年杉。特一古跡而已。義成及兩僧。先到寺門等待。吾行旣至。伴行過石門二重。相距幾百餘步。而左右築石墻高四丈許。廣袤半馬場。其中列置寺宇。不知其幾處。而屋頭之覆壓墻外者。相接於首尾。脊瓦簷瓦。幷爲金色矣。行至石門。如我國紅門者。則雙柱對豎。圍各數把。鍊以八稜。上橫杠亦用石。高不下五丈。廣不過三間。刻其柱曰筑前州石。運來若專由水路。則不知其幾千里。而以吾等所經見之。水路一千八百餘里。陸路一千五百餘里。且內外三庭。鋪以龜文博石。長廣各布帛尺二尺餘。亦自筑前來云。其爲用功可知。又入銅雀門二重。抵所謂權現大儀安置之處。則其室制。正如關王廟。而伊豆守具公服先至以待矣。 아침엔 맑고, 식후엔 눈. 해돋이에 출발하여 일광산(日光山)에 드니, 골짝 가득히 높고 낮게 깔려 있는 것들은 다 불당(佛堂)이며 소위 산관교(山管橋)의 천 년 묵은 삼목(杉木)이 독특한 하나의 고적이었다. 의성 및 두 중은 미리 절 문 앞에 가 대기하다가 우리 일행이 도달하자 우리와 같이 이중으로 된 석문(石門)을 지났다. 〈두 석문은〉 몇백 보(步) 서로 떨어져 있는데 좌우에 쌓은 돌담은 높이 4장(丈)쯤에, 넓이는 반 마장이나 되고, 그 가운데에는 몇 곳이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절들이 깔려져 있는데, 담 밖을 덮은 집머리는 수미(首尾)가 서로 이어지고, 등성마루의 기와나 처마의 기와는 다 금빛으로 장식했다. 석문에 이르러 보니 마치 우리나라의 홍문(紅門)과 같은 것인데, 두 기둥은 마주 세운 둘레가 각 두세 아름씩이나 되고 8각(角)으로 다듬었으며 위에 가로지른 것 또한 돌을 사용했는데, 높이는 5장(丈)이 못 되지 않고 넓이는 세 칸에 지나지 않았다. 그 기둥에 ‘축전주석(筑前州石)’이라고 새겨졌는데, 운반해 올 때에 만일 수로만을 경유했다면 그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우리들이 지나온 것으로 계산하면 수로가 1천 8백여 리, 육로가 1천 5백여 리다. 또 안팎 세 뜰에는 거북 무늬의 큰 돌[龜文博石]을 깔았으며, 길이와 넓이가 각 포백척(布帛尺 포백 재는 자)으로 두 자 남짓한데, 또한 축전주에서 실어 왔다 하니, 그 힘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중으로 된 동작문(銅雀門)을 지나, 소위 ‘권현(權現)의 영혼을 모셨다’는 곳에 이르러 보니, 그 집 제도는 마치 관왕묘(關王廟)와 같았는데, 거기에는 이두수(伊豆守)가 공복을 입고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병자일본일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85A_0010_030_0220_2003_003_XML
Rec-2191 부연일기_1828_0510 18280510 重神崇佛。爲第一風俗。若一民之家。幷有家庙,關庙,火神庙,佛庙。家家盡然。家而有一家之庙。村而有一村之庙。邑而如是。國而如是。大是惡風也。 귀신을 중히 여기고 부처를 존숭하는 것이 첫째 가는 풍속이 되어 한 민가 같은 데에도 모두 가묘(家廟)ㆍ관왕묘(關王廟)ㆍ화신묘(火神廟)ㆍ불묘(佛廟)가 있어 집집마다 그러하였고, 집에는 한 집안의 사당이 있고, 마을에는 한 마을의 사당이 있으며, 고을에도 이렇고 나라 또한 이러하니, 아주 나쁜 풍속이었다. 부연일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7A_0020_030_0100_2004_009_XML
Rec-2192 상촌집_10권_시_남관왕묘송객유감 null 戊戌春。南關王廟成。天朝將官劉寅實董其事。固請宣祖大王親臨。宣祖大王命儒臣考出關王祠原係祀典與否。時晩翠吳公億齡爲副提學。余爲應敎。同直玉堂。考大明會典則關廟在山川各神之列。a071_392c春秋降香。以此具奏。翌日。宣廟駕如廟。躬行祭奠訖。天朝將官齊會祠下。備呈雜戲。都人飫觀。今十六年矣。適緣送客至廟。愴然有懷舊之感。 무술년 봄에 남관왕묘가 이루어졌는데 중국 장관(將官) 유인(劉寅)이 직접 그 일을 관리 감독하고서 선조대왕께 친림(親臨)하실 것을 굳이 요청하자, 선조대왕은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관왕의 사당이 본디 사전(祀典)에 들어 있는지의 여부를 상고해 내도록 하셨다. 그 당시 만취(晩翠) 오공 억령(吳公億齡)은 부제학이고 나는 응교(應敎)로 있었는데 옥당에 함께 숙직하면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상고해 보니, 관왕묘는 산천 각 신들의 대열에 들어 있고 봄가을에 향을 내리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그대로 아뢰었다. 이튿날 선묘께서 사당에 거둥하여 몸소 제전(祭奠)을 행하셨으며 중국 장관들이 일제히 사당 아래에 모여 있었으므로 그들을 위해 여러 가지 놀이를 연출하였는데, 도성 사람들이 실컷 구경하였다. 그런데 이제 16 년이 지났다. 때마침 손님을 전송하느라 사당에까지 이르고 보니 옛날 생각이 서글프게 떠올랐다. 상촌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86B_0110_010_0540_2002_002_XML
Rec-2193 서애집_16권_잡저_기관왕묘 null 余往年赴燕都。自遼東至帝京數千里。名城大邑及閭閻衆盛處。無不立廟宇。以祀漢將壽亭侯關公。至於人家。亦私設畫像掛壁。置香火其前。飮食必祭。凡有事必祈禱。官員新赴任者。齊宿謁廟甚肅虔。余怪之。問於人。不獨北方爲然。在在如此。遍於天下云。萬曆壬辰。我國爲倭賊所侵。國幾亡。天朝發兵救之。連六七載未已。丁酉冬。天將合諸營兵。進攻蔚山賊壘。不利。戊戌正月初四日退師。有遊擊將軍陳寅力戰中賊丸。載還漢都調病。迺於所寓崇禮門外山麓。創起廟堂一坐。中設神像。以奉關王。諸將楊經理以下各出銀兩助其費。我國亦以銀兩助之。廟成。上亦往觀之。余與備邊司諸僚。隨駕詣廟庭。再拜。其像塑土爲之。面赤如重棗。鳳目。髯垂過腹。左右塑二人。持大劍侍立。謂之關平,周倉。儼然如生。自是諸將。每出入參拜。皆曰。爲東國求神助卻賊。五月十三日。大祭廟中。云是關王生日。若有䨓風之異則神至矣。是日。天氣淸明。午後黑雲四起。大風自西北來。䨓雨並作。有頃而止。衆人皆喜曰。王神下臨矣。旣而又於嶺南安東,星州二邑建廟。安東則斲石爲像。星州土塑。而星州甚著靈異之跡云。未幾倭酋關白平秀吉死。倭諸屯悉皆撤去。此亦理之難測者也。豈偶然耶。昔苻堅入寇晉。謝安以㫌節旗鼓。禱於蔣子文廟。謝玄以八萬偏師。勝强秦六十萬。如八公山草木風聲鶴唳。說者皆以爲神助。况關王以英雄剛大之氣。其扶正討賊之志。貫萬古如一日。死而不滅。安知無神應耶。嗚呼烈哉。京師廟前。立二長竿懸兩旗。一書協天大帝。一書威震華夷。字大如椽。因風飄拂半空。遠近皆仰而見之。其帝號亦皇朝所追崇云。可見其尊崇之至也。 내가 왕년에 연도(燕都)에 갈 때, 요동으로부터 연경까지 수천 리에 이르는 사이에 유명한 성이나 큰 읍과 여염이 번성한 곳에는 모두 묘우(廟宇)를 세워 한의 장군 수정후(壽亭侯) 관공(關公)을 제사하고 인가에도 사사로 화상을 설치하여 벽에 걸어 두고 향을 피우며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제사하는 것이었다. 무릇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기도하고, 새로 부임하는 관리는 목욕재계하고 관왕묘에 나가 알현하는데 심히 엄숙하고 경건하였다. 내가 이상히 여겨 어떤 사람에게 물었더니, 북방뿐 아니라 곳곳마다 이같이 하니 천하가 다 똑같다고 하였다. 만력 임진년에 우리나라가 왜적의 침범을 받아 거의 망하려는 차에 중국이 군병을 발동하여 연 6, 7년을 도왔으나 끝나지 않았다. 정유년 겨울에 명장(明將)이 모든 군영을 합하여 울산에 웅거한 적을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여 무술년 1월 4일에 물러났다. 그중에 유격장군 진인(陳寅)이 있었는데 힘써 싸우는 도중에 적의 탄환을 맞고 실려 서울에 돌아와 병을 조리하였다. 그는 우거하고 있던 숭례문 밖 산기슭에 묘당 한 채를 창건하고 가운데에 관왕과 제장(諸將)의 신상(神像)을 봉안하였다. 경리(經理) 양호(楊鎬) 이하가 각기 은냥을 갹출하여 그 비용을 돕고, 우리나라도 은냥으로 도와서 묘를 완성시켰다. 주상께서도 몸소 그곳에 가 보실 때에 내가 비변사 여러 막료들과 더불어 수행하여 묘정에 나가 그 상에 두 번 절하였다. 상은 흙으로 빚어 만들었는데 얼굴의 붉기가 잘 익은 대추와 같고 봉(鳳)의 눈에다 수염을 길게 드리웠는데 배 밑까지 닿았다. 좌우의 소상(塑像) 2인은 큰 칼을 짚고 서서 모시고 있는데 관평(關平)과 주창(周倉)이라고 한다. 엄연히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이로부터 모든 장수들이 출입할 때마다 참배하며 우리 동국을 위하여 신의 도움으로 적을 물리쳐 달라고 빌었다. 5월 13일 묘에 크게 제사를 드렸는데, 이날이 관왕의 생신이라고 하였다. 만약 뇌풍(雷風)의 이변이 있으면 신이 이른 징조라고 했다. 이날 날씨가 청명하였는데, 오후에는 검은 구름이 사방으로 일어나 큰 바람이 서북쪽으로부터 불어오고 뇌우가 함께 오다가 잠시 후에 그쳤다.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면서 “왕신(王神)이 강림하였다.”고 하였다. 얼마 뒤 또 영남의 안동ㆍ성주 두 읍에 묘를 건립하였는데 안동의 것은 돌을 깎아 상을 새겼고, 성주의 것은 흙으로 빚었다. 그런데 성주의 상이 심히 영이(靈異)한 자취를 나타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왜추 관백 평수길(平秀吉)이 죽자 모든 왜군이 다 귀환하였으니, 이 역시 이치로써는 측량하기 어려운 일이나 어찌 우연한 일이라고만 하겠는가. 옛날 부견(苻堅)이 쳐들어와 도적질할 때 진(晉) 나라 사안(謝安)이 정절기고(旌節旗鼓)로 장자문(蔣子文)의 묘에 기도하였다. 그런 후에 사현(謝玄)이 8만의 군사로 강한 진(秦) 나라 60만 대군을 이겼다. 진 나라 군사들은 팔공산(八公山) 초목의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에도 적의 복병이 아닌가 하여 놀랄 정도였다. 말하는 자가 모두 신조(神助)라 하였다. 하물며 관왕은 영웅으로 강대(剛大)한 기개가 있고 올바른 편에 서서 적을 토벌한 뜻이 만고를 관철하기를 한결같은지라 죽어서도 멸하지 아니하니 신응(神鷹)이 없음을 어찌 알겠는가. 아, 장렬하도다. 명 나라 서울에 있는 묘 앞에는 두개의 긴 장대를 세우고 두 개의 깃발을 달았는데, 한 곳에는 ‘협천대제(協天大帝)’라 씌어 있고 한 곳에는 ‘위진화이(威振華夷)’라고 씌어 있었다. 그 글자의 크기가 서까래만 하여 바람이 불면 반공에 휘날려 멀리서나 가까이에서나 모두 우러러보게 된다. 또 그 대제의 호는 명 나라 조정에서 추숭(追崇)한 것이라고 하니, 가히 그 존숭(尊崇)이 지극함을 알 수 있겠다. 서애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24B_0170_010_0080_2005_002_XML
Rec-2194 서애집_16권_잡저_기이 null 癸卯春。京江露梁。有大石自水中起立於岸上他石上。又黃海道豐川海中。有石沈在水底。一日移立於他石上。又江原道襄陽洛山寺下。有二石自海中來閣於岸石上。又慶尙道慶州慈仁縣。有石起行數十步。其起時。衆皆見之。曲折往復如人樣。殊可怪。不知其爲何變。又咸鏡道海水赤濁膠粘。不利行舟。以水煮鹽。亦腥不可食。自北而東。至江原道通川,襄陽而止。凡七日。又京中西江人。一夜相驚。多奔避山谷。或有搬移東西過江者。問其由。以爲夜中有兵馬廝殺之聲。自京城而來。聞者傳相驚駭。疑有變如此。其後人疑南關王廟神靈所爲云。人心之不定類此。 계묘년 봄에 한강의 노량진에 큰 바위가 물 가운데로부터 불쑥 일어나서 강 언덕의 다른 돌보다 위로 솟았다. 또한 황해도 풍천 바다 가운데 물 아래로 잠겨 있던 바위가 하루는 옮겨 가 다른 돌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 아래에 바위 두 개가 바다 가운데로부터 나와서 언덕에 있는 돌 위에 앉아 있었다. 또한 경상도 경주 자인현(慈仁縣)에서는 돌이 일어나 수십 보를 걸어간 일이 있었다. 이때 뭇사람들이 다 보니, 구비를 치며 갔다 왔다 하는 것이 마치 사람모습과 같았다고 하니, 매우 괴이하여 무슨 변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에 함경도 바닷물은 붉고 탁하며 끈끈하고 달라붙어 배가 다니기 불편할뿐더러 물을 달여서 소금을 만들어도 비린내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다. 북으로부터 동쪽으로 강원도 통천(通川)ㆍ양양까지 걸쳐 약 7개월간이나 계속하다가 그쳤다. 그리고 경성의 서강(西江) 사람들이 하룻밤에는 서로 놀라며 산골로 피란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동서로 뿔뿔이 흩어져 강을 건너간 자도 있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밤중에 병마들이 서로 싸우는 소리가 경성으로부터 났는데 들은 자들이 전하여 서로 놀라 변이 있을까 의심하여 이렇게 된 것이라 했다. 그 뒤에 사람들은 남쪽에 있는 관왕묘의 신령이 한 짓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였다. 인심이 안정되지 못한 것이 대개 이런 유다. 서애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24B_0170_010_0140_2005_002_XML
Rec-2195 성소부부고_1권_시부_장진보관왕묘 null 門前古碣臥苔中。蕭颯叢林一畝宮。殿角幡幢明夕照。墻頭杉檜響凄風。丹靑畫壁雲雷壯。香火空堂鬼物雄。莫把紙錢招怨魄。杜鵑啼血野花紅。 문 앞의 옛 빗돌은 이끼 속에 누웠는데 / 門前古碣臥苔中 소조한 떨기 숲에 한 이랑 묘궁일레 / 蕭颯叢林一畝宮 전각이라 깃발은 저녁 노을 눈부시고 / 殿角幡幢明夕照 담 꼭대기 삼과 회는 찬 바람에 메아리치네 / 墻頭杉檜響凄風 단청한 그림 벽에 구름 뇌성 굉장하고 / 丹靑畫壁雲雷壯 향불 타는 빈 당에 괴물이 우람쿠나 / 香火空堂鬼物雄 지전으로 원백을 부르질랑 말아다오 / 莫把紙錢招怨魄 두견이 피를 울어 들꽃이 빨갛다네 / 杜鵑啼血野花紅 성소부부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92A_0020_010_0170_2000_001_XML
Rec-2196 성소부부고_16권_문부_칙건현령관왕묘비 null 萬曆三十年十月初一日。上召大僕臣筠。詣閤門敎曰。予以寡德。不克負荷先業。頃遭寇亂。流離顚越于外。不能自振。賴我皇上念累世忠貞之故。察寡躬守義抗賊之誠。謂不可坐視其亡。力排廷議。決策以討之。前後發卒數十萬。捐帑金累百萬。中國爲之騷然。而不之卹焉。迄復三京。俾寡躬獲保宗祧。而環數千里跂行喙息。得安其生。海波不揚。藩籬益固。此乃聖天子柔遠字小之仁。高出於百王。而亦莫非祖宗世篤恭順之效。寡躬何力焉。曩者東征將士。皆言戰日輒有關王神來現其靈。故平壤之捷。閑山島之戰。三路驅倭之役。皆著其異。協宣皇威。以大讋卉面而蕩其氛。卒挈三韓舊壤。歸之屬國。不可不祀以酬之。天子曰。然。亟以四千金付撫臣萬世德。立祠於朝鮮王京以享之。世德以天子命詔之曰。關公之靈。素著於中國。平倭之役。亦與有勞。本國固當尸祝之。天子先貤其金。王可奉以周旋。以行天子志。以報其惠也。予聞而惕若曰。王之德也。天子命也。予小子其敢忽諸。爰命司空臣。斫材於山。聚鐵冶陶瓦之具。工匠之流以赴之。擇地於興仁門東。命大臣董之。自庚子冬始其役。越二年春訖工。其塑像圖繪之容。殿堂廡宇門廠鼓鍾之樓。凡百餘間。悉依中國制。乃大享以落之。春秋烝禴。朔望香火。禮官修之。而差一校尉守之。請額於朝。今年奉聖旨。令以勅建顯靈昭德王關公之廟榜之門。仍賜祭一壇焉。予惟王卽漢壽亭侯關公羽雲長也。公忠烈義勇。事昭烈期復漢室。虎視漢沔上。威振華夏。曺操奸雄。懾而欲遷都以避。孫權小子。瑟縮不敢抗。其志之不終。乃天亡漢也。豈公咎也。是以。忠憤慷慨之志。死猶未沫。千載之下。尙能檄召神祇。驅駕風雷而顯其威靈。故高皇帝鄱陽之役。御舟膠淺。六師無人色。王乃能現其身雲中。回風而爇賊艦。遂定大業。天下之家俎而戶豆之。固當獲其報也。又能拯屬國之難。以紓我聖天子東顧之憂。而東土百萬生靈。受祉以安。宜東民之願崇廟宇。以俾祀於無窮也已。余仰惟天子之恩。王之德。不敢忘乎懷。思所以文之。以示後代。你職是視草臣也。其以予意刊之石。俾永不朽。 만력(萬曆 명 신종 연호) 30년(1602, 선조35) 10월 초하루에 상감께서 대복(大僕) 신(臣) 균(筠)을 부르시므로 합문(閤門)에 나아가니, 교서(敎書)를 내렸다. “나는 덕이 없어 선왕의 업을 감당하지 못하는 터인데, 근래에는 왜구(倭寇)의 침입을 받아 서울 밖으로 떠돌아 다니게 되어 국운을 스스로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皇帝 명 신종(明神宗))께서는 대대로 충성스러웠던 일을 생각하고, 또한 나의 의(義)를 지켜 외적에 대항하는 정성을 살피어 그들이 망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하고, 힘써 조정의 의논을 물리치고 외적을 치기로 결단을 내리셨다. 그리고 전후하여 병사 수십만을 보내고 탕금(帑金 임금이 사사로이 사용하는 돈) 수백만 금을 내놓아 중국이 떠들썩해도 개의하지 않으셨다. 그로 인하여 마침내 왕경(王京)을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 종묘를 다시 찾게 하였다. 그리하여 수천 리 강토 안에 서식하는 새와 짐승들까지도 평안히 살 수 있게 되었는가 하면, 바다는 잔잔하고 중국의 울타리인 우리나라가 더욱 견고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성스러운 천자께서 먼 지방을 어루만지고 작은 나라를 보살펴 주시는 자애로운 마음이 모든 왕보다 뛰어난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조종(祖宗)께서 대대로 황제에 대해 공순(恭順)을 독실히 하신 보람일 뿐이지, 내가 무슨 힘이 되었겠는가. 지난번 우리나라에 온 중국 장사(將士)들이 모두들 ‘전투가 있는 날이면 번번이 관왕(關王 관우(關羽)를 말함)의 신(神)이 나타났습니다. 그 까닭에 평양에서의 승리, 한산도(閑山島)의 싸움과 삼로(三路 충청ㆍ전라ㆍ경상도)에서 왜구를 쫓는 싸움에서 모두 그 이적을 드러내어 황제의 위엄을 선양하고 왜구들을 크게 겁내주고 악한 기운을 소탕하여 마침내 삼한(三韓) 옛 땅을 속국(屬國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말함)에게 돌려주게 되었으니, 제사지내어 보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천자께서는 ‘그렇다.’ 하고는 바로 사천 금(四千金)을 신하 만세덕(萬世德)에게 내리고 조선 왕경에 사당을 지어 제사 지내게 하였다. 세덕은 천자의 명으로 조서하기를 ‘관공(關公)의 혼령은 본디 중국에 나타났었는데 왜구를 평정하는 싸움에도 참여하여 본국을 위해 수고하였으니, 당연히 제사지내어 숭배해야 한다. 천자께서 먼저 그 비용을 보내셨으니 왕은 천자의 이 명을 받들고 주선하여 천자의 뜻을 시행하여 그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므로, 나는 이 명을 듣고 공손하게, ‘관왕의 덕과 천자의 명을 이 소자(小子 임금이 자신을 칭함)가 어찌 소홀히 할 것인가.’하고, 곧 사공(司空 공조 판서의 별칭)에게 명령하여 산에서 재목을 베어오고 야철(冶鐵)하는 기구와 기와 굽는 기구 및 기술자들을 모아 일을 착수하게 하였다. 그리고 흥인문(興仁門) 동쪽에 터를 잡고 대신에게 명하여 이를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년(1600, 선조33) 겨울에 역사를 시작하여 2년 후 봄에 완공하였다. 소상(塑像)과 그림 모양과 전당(殿堂), 무우(廡宇 곁채), 문창(門廠), 고종루(鼓鍾樓) 등 백여 간을 모두 중국의 형식을 따르게 하고, 크게 제사를 올려 낙성식을 하였다. 춘하추동의 제사와 초하루 보름의 향화(香火 제사지냄을 말함)는 예관(禮官)이 엄수하되 교위(校尉) 1명을 파견하여 이를 지켜보게 하였다. 그리고 명(明) 나라에 액자(額字)를 청하였는데, 금년에 황제의 뜻을 받들어 ‘현령소덕왕관공지묘(顯靈昭德王關公之廟)’라는 액자를 문에 달게 하고 제물 일단(一壇)을 내리셨다. 내가 생각건대, 왕이란 바로 한(漢) 나라 수정후(壽亭侯) 관공 우운장(關公羽雲長 운장은 관우의 자)이다. 공은 충렬과 의용으로 소열왕(昭烈王)을 섬기고 한실(漢室 한 나라를 말함)의 부흥을 기도하여, 한수(漢水) 위를 범같은 눈초리로 감시하니 그 위세는 중국에 떨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조(曹操) 같은 간웅도 두려워서 천도하여 피하려 하였고, 손권(孫權) 따위 어린애는 겁에 질려 감히 대항하지 못하였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곧 하늘이 한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지, 어찌 공의 탓이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공의 충성스럽고 강개(慷慨)한 뜻은 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아 천 년 뒤에 와서도 오히려 신기(神祇)를 불러모으고 바람과 우레를 몰아 그 위엄스러운 영험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옛날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가 파양(鄱陽 호수 이름. 강서성(江西省) 북쪽에 있음)에서 싸울 때 황제의 배가 얕은 바다에 막히게 되자 모든 군사들이 새파랗게 질렸었는데 이 때 왕이 구름 속에서 그 몸을 드러내면서 바람을 돌려주었기에 적함을 불살라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는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온 천하가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고, 호구마다 예를 올리는 것은 바로 그에 보답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난리도 구해 주어 천자의 동방에 대한 근심을 놓이게 하였고, 우리나라 백만 백성은 그 복을 받아 평안하게 되었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당을 지어 후세에 길이길이 제사지내게 하려는 것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나는 우러러 생각건대, 천자의 은혜와 관왕의 덕은 감히 잊지 못하겠다. 나의 이러한 생각을 글로 지어 후대에 보여 주려 한다. 너는 글 짓는 신하이니 나의 뜻을 돌에 새겨 길이 보존케 하라.” 성소부부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92A_0170_010_0010_2000_002_XML
Rec-2197 성호사설_9권_인사문_관왕묘 null 京都東南門外皆有關王廟柳西厓集載其本末許筠承命撰顯靈碑云東征將士皆言平壤之捷島山之戰三路驅倭之役皆著其異天子以四千金付撫臣萬世徳立祠於朝鮮既成請額扵朝奉聖旨以勑建顯靈昭徳王關公之廟榜之又云髙皇帝鄱陽之役御舟膠淺王能現其神回風而焚賊艦云云然則皇明之崇奉自鄱陽始而凡軍行所在祀之也祝允明關公廟記云公既沒蜀人祀之後遍于天下至宋時追封為武安王廟號義勇而道家者流乃復奉之為神將崇之為真君夫以羽為義勇則可又何關於淸凈無為之道家而崇信至此意者修鍊之術必須驅除鬼魅故然也宋之追封伏魔即其事也至錢謙益牧齋集有關聖帝君畫像賛謂之聖謂之帝則尤覺僣矣祝允明謂當曰漢前將軍廟斯為得之王世貞云隋開皇中役神鬼七日建泉寺宋政和中驅風雨剪蚩尤復河中塩政此信之之過荒恠弥甚何足與議㢤惟朱宗元之說最得其實宋之伏魔即以魔驅魔也魔性本欲奉己然顯其本相人豈事之故假古士名目現為神異使人仰望非真有關羽之神如此也此千古獨見也向聞有鬼祟者两鬼迭見一欲殺之一輒救止其實两皆作孽救非其真也羽之驅魔何以異是人既信服精神交感種種現恠莫非羽像怳惚神姦誰得以別之所謂宋時故事政和中宫中有祟有一道士揖上曰臣奉帝命来治此祟即召一金甲丈夫捉祟啗盡上問丈夫何人曰此崇寕真君關羽也問張飛何在曰今生扵相州岳家云云故武穆以飛為名云凡我國有廟又四處康津天將都督陳璘所建後別立一祠於其旁陳璘主壁李舜臣配南原則以天將李新芳蔣表毛承先配安東則天將薛虎臣所建有石像星州則天將毛國器所建 서울 동ㆍ남문 밖에는 다 관왕묘(關王廟)가 있는데, 《유서애문집(柳西厓文集)》에 그 본말(本末)이 실려 있다. 허균(許筠)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현령비(顯靈碑)를 지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동으로 출정(出征)한 장병들의 말이 ‘평양(平壤)의 승첩과 도산(島山)의 싸움과 삼도(三道)에서 왜놈을 몰아내는 전쟁에 있어 다 이적(異蹟)을 나타냈다.’ 하므로, 천자(天子)는 4천 금(金)을 무신(撫臣) 만세덕(萬世德)에게 주어 조선에다 사우(祠宇)를 세우게 하였다. 낙성(落成)을 보자 액호(額號)를 조정에 청하여 성지(聖旨)를 받들어 ‘칙건 현령소덕왕 관공지묘(勅建顯靈昭德王關公之廟)’로써 방(榜)을 걸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고 황제(高皇帝 명 태조(明太祖))가 번양(鄱陽)의 싸움에서 자신이 탄 배가 여울목에 붙었었는데, 관왕이 능히 그 신(神)을 나타내서 바람머리를 돌리어 적의 전함(戰艦)을 불태웠다…….”라 하였다. 그렇다면 명 나라에서 숭봉(崇奉)한 것은 번양으로부터 시작되어서 무릇 군대가 주둔해 있는 곳에는 다 제사하게 한 것이다. 축윤명(祝允明)의 관공묘기(關公廟記)에 이르기를 “공이 죽은 뒤에 촉(蜀) 나라 사람들이 제사하였는데, 그 후로 천하에 보급되어 송(宋) 나라 때에는 추봉(追封)하여 무안왕(武安王)으로 삼고 묘호(廟號)를 ‘의용(義勇)’이라 했으며, 도가(道家)의 유파(流派)에서는 다시 받들어 신장(神將)으로 삼고 높여서 진군(眞君)으로 삼았다.” 하였으니, 대범 관우(關羽)를 ‘의용’이라 한다면 옳거니와 또 무엇이 청정무위(淸淨無爲)를 주로 하는 도가와 관계된다 해서 존숭과 신앙이 이에 이르렀을까? 생각건대, 수련(修煉)의 술법(術法)이란 반드시 귀매(鬼魅)를 제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송 나라에서 복마제(伏魔帝)로 추봉 한 것이 바로 그 일이었다. 심지어 전겸익(錢謙益)의 《목재집(牧齋集)》 같은 데는 ‘관성제군 화상찬(關聖帝君畫像贊)’이 들어 있어 ‘성(聖)’이라 ‘제(帝)’라 일컬었으니 더욱 참람함을 알겠다. 축윤명의 “한전장군묘(漢前將軍廟)라 이르는 것이 정당하다.”는 그 말이 바로 정곡을 얻은 것이다. 왕세정(王世貞)은 말하기를 “수(隋) 나라 개황(開皇) 중에는 7일 동안이나 신귀(神鬼)를 부려서 천사(泉寺)를 세우게 했고, 송 나라 정화(政和) 중에는 풍우(風雨)를 구사(驅使)하여 치우(蚩尤)를 베고 하중(河中)의 염정(鹽政)을 회복하게 했다.”라 하였는데, 이는 신앙의 도가 너무 지나쳐서 황탄부괴(荒誕浮怪)가 더욱 심하니 어찌 족히 따질 것이 있겠는가. 오직 주종원(朱宗元)의 설이 가장 그 진신을 얻었다 하겠으니, 즉 “송 나라의 ‘복마(伏魔)’란 것은 곧 마귀로써 마귀를 몰아낸 것이다. 마귀의 특성이 본래 자기만을 떠받들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본상(本相)을 나타내면 사람들이 어찌 그를 섬기겠는가! 그러므로 옛선비의 명목을 빌려 현신(現身)하여 신이(神異)로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러보게 하는 것이니, 참으로 관우의 신이 있어 이와 같은 것은 아니다.”라 하였다. 이야말로 천고의 독특한 명견이라 하겠다. 전에 들으니, 귀신병이 든 자가 있어 두 귀신이 번갈아 보이는데, 한 귀신이 죽이려 들면 한 귀신은 문득 구해주곤 하지만 기실은 둘이 다 작해하는 것이요 구하는 것은 그 진실이 아니라 한다. 관우의 마귀 몰아내는 것도 어찌 이와 다르랴. 사람이 이미 일단 신복하여 정신이 서로 감응하게 되면, 종종 나타나는 괴이가 관우의 상(像)이 아닌 것이 없으리니 황홀한 신간(神姦)을 뉘라서 구별하리요. 이른바 송 나라 시대의 고사로서 “정화(政和) 중에 궁중에 귀수(鬼祟)가 있었는데, 한 도사(道士)가 상(上)께 읍(揖)하며 아뢰기를 ‘신이 상제(上帝)의 명령을 받들고 이 귀수를 다스리러 왔습니다.’ 하고, 곧 금갑(金甲) 입은 장부(丈夫)를 불러 귀수를 잡아오게 하여 씹어 없애 버리는 것이었다. 상이 ‘장부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도사가 아뢰기를 ‘이는 숭령진군(崇寧眞君) 관우입니다.’ 하므로 상이 ‘장비(張飛)는 어디에 있느냐?’ 하니, 도사는 ‘지금 상주(相州) 악(岳)씨의 집안에 태어났습니다…….’고 아뢰었다. 그래서 무목(武穆)이 ‘비(飛)’로 이름을 한 것이다.”라 하였다는 것이다. 무릇 우리나라에는 그 묘(廟)가 또 넷이 있다. 즉 강진(康津)의 것은 명 나라 장수 도독(都督) 진인(陳璘)이 세운 것인데, 그 후에 한 칸의 사옥(祠屋)을 그 곁에 따로 세우고, 진인을 주벽(主壁)으로 이순신(李舜臣)을 배향하였다. 그리고 남원(南原)에는 명 나라 장수 이신방(李新芳)ㆍ장표(蔣表)ㆍ모승선(毛承先)을 배향하였고, 안동(安東)의 것은 명 나라 장수 설호신(薛虎臣)이 세운 것으로 석상(石像)이 있고, 성주(星州)의 것은 명 나라 장수 모국기(毛國器)가 세운 것이다. 성호사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8A_0100_010_0370_2002_004_XML
Rec-2198 속잡록_3권_1630_0303 16300303 進慰使狀啓。近日賊勢。別無他餘聲息。大陣如前。入據錦城。分屯灤暉等處。祖摠兵分送五管將等。斬獲首級。連絡不絶。又有招頭營副將王維城。前後斬獲至於一百三十一顆。二月初七日。五營將等。馳入建昌府。斬叛守城。解送首惡白衍慶等。閣部喜甚。驗功論賞。懸首街橋。甚於㺚賊。所以然者。衍慶以白養粹姓親。聽其指揮。首倡附賊。强㥘主將馬光遠削髮。光遠哭別妻子。不知去處云。同月十一日。奴賊來攻建昌城。燒燬關廟。劉遊擊大開城門。縱兵出射。斬獲五十三級。奪回人畜。不知其數。殺賊之功。無與此比。朝廷加祖摠銜太子少保。賞銀四萬兩。又書壯烈忠膽。太子褒加。又送三千兩銀。朝廷明知祖將之大功矣。袁軍門尙未蒙恩。奴賊差人賫書請和。前後三度。閣部卽斬使焚書。江東軍兵曾有撤回之奇。而閣部派送諸將。領船載回。住札雙島等處。以爲擣巢之計云。臣等觀勢。晦間乘船發行計料。 진위사(進慰使 진하사(進賀使)가 정당하다)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근일 적의 형세를 보면 별로 다른 소식은 없고 대진(大陣)의 본부는 전과 같이 금성(錦城)에 웅거하고 있으며, 분대는 난(灤)ㆍ휘(暉) 등지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습니다. 조 총병이 오영장(五營將) 등을 나누어 보내 적의 머리를 많이 베었다는 연락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또 초두영 부장(招頭營副將) 왕유성(王維城)이 전후로 적을 잡아 죽인 머리 수가 1백 31개나 되었다 합니다. 2월 7일에는 오영장 등이 건창부(建昌府)에 달려가서 반적(叛賊)을 참수하고 성을 지키며 악의 괴수 백연경(白衍慶) 등을 죽여서 보내니, 각부가 심히 기뻐하며 그 공을 헤아려 상을 주고 적의 머리를 가교(街橋)에 달았습니다. 이 적이 악하기가 달적(㺚賊)보다 더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연경은 백양수(白養粹)와 동성(同姓)의 친족으로 양수의 지휘를 받아 앞장서서 적에게 붙었으며 주장(主將) 마광원(馬光遠)을 강제로 협박하여 광원의 머리털을 되놈과 같이 빡빡 깎으니, 광원이 통곡하면서 처자를 이별하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달 11일에 오랑캐들이 와서 건창성을 공격하고 관왕묘(關王廟)를 불사르는데, 유 유격(劉遊擊)이 성문을 활짝 열고 병정을 풀어 사격하여 53급의 적을 베고 사람과 가축들을 빼앗아 돌려온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적을 죽인 공로가 이에 견줄 자가 없었으므로 조정에서는 조 총병에게 태자소보(太子少保)의 높은 벼슬을 주고 상으로 은자 4만 냥을 내렸으며, 도 장렬충담(壯烈忠膽)이란 글자를 써서 주고 태자가 또 은자 3천 냥을 포상하니, 조정에서는 조 장군(祖將軍)의 큰 공은 명백히 알아주었으나 원 군문(袁軍門)은 아직도 은혜를 받지 못하고 옥에 갇혀 있다 합니다. 오랑캐들이 글을 써가지고 사람을 보내서 화친하기를 청한 것이 전후로 세 번이나 있었으나 각부가 그 때마다 곧 사자를 죽이고 글을 불태워버렸다 합니다. 강동(江東) 방면의 군병들은 일찍이 철회한다는 기별이 있더니 각부가 여러 장수를 파견하여 배에 실어다가 쌍도(雙島) 등 여러 섬에 주둔케 해서 적의 소굴을 소탕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신들은 형세를 봐서 이달 그믐 사이에 배를 타고 떠나가려 합니다. 속잡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33A_0030_000_0040_2002_008_XML
Rec-2199 속잡록_4권_1636_1214 16361214 朝廷令戶部官入送京城取武庫之物。以爲和好之資。又令各一員入城。守其所主之物。賊兵自慕華館至南關廟結陣。又五六營留城中。出東大門外結陣。旗麾劍戟。鼓樂叫噪。驚惑視聽。城中人物。一不侵害。出入來往專不禁斷。只見牛馬則奪之。美女則執之。 조정에서는 호부(戶部)의 관원을 서울로 들여보내어 무고(武庫)의 물품을 가져와 화친하는 물자로 삼게 하고 또 각 부의 관원 한 사람씩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어 주관하는 물자를 지키게 하였다. 적병이 모화관(慕華館)으로부터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와서 진을 치고 또 5ㆍ6진영은 성 안에 머무르다가 동대문 밖에 나와 진을 쳤는데, 기치와 검극(劍戟)을 휘두르며 군악으로 떠들어대서 이목을 놀라 당황하게 하며, 성중의 인물에 대해서는 조금도 침해하지 아니하고 출입 내왕을 전혀 금하지 아니하되, 다만 소ㆍ말을 보면 빼앗고 어여쁜 여자는 잡아갔다. 속잡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33A_0040_000_0010_2002_008_XML
Rec-2200 속잡록_4권_1636_1230 16361230 大雪。軆府以夜氣陰霾。令將士合番守堞。賊之初到。造精舍于所破昆箭串兩處。築三層臺。至是汗居東關廟。往來于兩處。僭侈之具。不可盡言。 큰눈이 내렸다. 체부(體府)는 밤기운이 음산하고 어두우므로 장병에게 번을 합쳐 성을 지키게 하였다. 적이 처음 당도하여 정사(精舍)를 소파곤(所破昆)ㆍ살곶이[箭串] 두 곳에다 짓고 삼층의 대를 쌓았는데, 이에 이르러 한(汗)은 동관왕묘(東關王廟)에 거처하고 두 곳을 왕래하였다. 그 사치스러운 도구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속잡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33A_0040_000_0010_2002_008_XML
Rec-2201 신증동국여지승람_2권_동국여지비고_경도 null null 남관왕묘(南關王廟) 숭례문 밖 도저동(桃楮洞) 산기슭에 있다. 선조 31년(1598)에 명 나라 장수 진인(陳寅)이 창건하였는데, 정전은 푸른 기와로 덮었다. 관왕(關王)을 향사하는데, 동쪽 배위는 왕보(王甫)ㆍ조루(趙累)요, 서쪽 배위는 주창(周倉)ㆍ관평(關平)이다. ○ 임진년과 정유년의 난리에 신령이 나타나 싸움을 도운 이적이 있으므로 창건하였다. 흙을 빚어 형상을 만들고 또 한 작은 금상(金像)을 봉안하였는데 바로 중국에서 받들고 온 상(像)이라 한다. ○ 혹 말하기를, 좌우쪽에 관평ㆍ주창의 소상을 모셨다고도 한다. 묘 앞에 두 기를 세웠는데, 하나는 협천대제(協天大帝)라 쓰고, 하나는 위진화하(威鎭華夏)라고 썼다. 영종이 친히 현령소덕왕묘(顯靈昭德王廟)라고 써서 현판을 달라고 명하고, 친히 묘기(廟記)를 지었다. ○ 명 나라 조정의 통판(通判) 도량성(陶良性)이 비기(碑記)를 지었으며, 허균(許筠)이 비문을 지었다. 동관왕묘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다. 만력(萬曆 명 나라 연호) 임인년, 곧 선조 35년에 명 나라 조정에서 순무하는 신하[撫臣] 만세덕(萬歲德)을 명하여 창립하였다. 소상은 흙을 빚고 금을 칠하여 그림을 그렸으며, 전무(殿廡)와 문창(門廠)이 모두 중국 제도를 모방하였다. 혹은 동상(銅像)이라고도 한다. 명 나라 조정에서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칙건 현령소덕 관공지묘(勅建顯靈昭德關公之廟)라고 하였다. ○ 매해 경칩일과 상강일에 제사드리는 것은 남묘(南廟)와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B001A_0030_020_0010_2000_001_XML
Rec-2202 신증동국여지승람_3권_동국여지비고_한성부 null null 자문감(紫門監)의 9영선(營繕)이 궐내ㆍ궐외 각처의 수리하는 일을 나누어 맡아 한다 시어소(時御所)와 각 전(殿)과 각 당(堂) 안의 각 관청 청사의 수보(修補)와 차비문(差備門) 안의 각종 기구의 제조와 내빙고(內氷庫)의 공상(供上)을 맡아 한다. ○ 9영선은 지금 5소장(所掌)으로 되었다. 1소장은 종묘ㆍ육상궁(毓祥宮)ㆍ연우궁(延祐宮)ㆍ장생전(長生殿)ㆍ독소(纛所)ㆍ종친부(宗親府)ㆍ중학ㆍ돈녕부 조방(敦寧府朝房)ㆍ의빈부(儀賓府)ㆍ홍문관 조방(弘文館朝房)ㆍ정업원(淨業院)ㆍ선잠단(先蠶壇)ㆍ첨성대(瞻星臺)ㆍ목멱당(木覓堂)ㆍ마조단(馬祖壇)ㆍ하순청(下巡廳)이며, 2소장은 사직ㆍ덕흥대원군궁(德興大院君宮)ㆍ광명전 시어소ㆍ요령막(搖鈴幕)ㆍ경복궁ㆍ기로소(耆老所)ㆍ의정부 조방ㆍ돈녕부(敦寧府)ㆍ이조ㆍ동학ㆍ유하정(流霞亭)ㆍ종각ㆍ선농단(先農壇)ㆍ양정재(養正齋)ㆍ하함춘원(下含春苑)ㆍ좌순청(左巡廳)이며, 3소장은 영희전(永禧殿)ㆍ저경궁(儲慶宮)ㆍ선원록청(璿源錄廳)ㆍ대빈궁(大嬪宮)ㆍ남별궁ㆍ봉상시(奉常寺)ㆍ신당(神堂)ㆍ북단(北壇)ㆍ여단(厲壇)ㆍ내자시(內資寺)ㆍ권초각(捲草閣)ㆍ상함춘원(上含春苑)ㆍ중추부(中樞府)ㆍ예조ㆍ서학ㆍ내섬시(內贍寺)ㆍ우모가가(牛毛假家)ㆍ상하당직(上下當直)이며, 4소장은 경모궁(景慕宮)ㆍ경우궁(景祐宮)ㆍ동관왕묘ㆍ경희궁ㆍ12별당ㆍ어의본궁(於義本宮)ㆍ의금부ㆍ의정부 반열조방(議政府班列朝房)ㆍ사간원 조방ㆍ모화관(慕華館)ㆍ남학ㆍ상림원(上林苑)ㆍ승문원(承文院)ㆍ우사단(雩祀壇)ㆍ한강단(漢江壇)이며, 5소장은 성균관ㆍ창의궁(彰義宮)ㆍ융례전(隆禮殿)ㆍ문희묘(文禧廟)ㆍ남관왕묘ㆍ전계대원군궁(全溪大院君宮)ㆍ선무사(宣武祠)ㆍ연서비각(延曙碑閣)ㆍ차동비각(車洞碑閣)ㆍ남단(南壇)ㆍ사한단(司寒壇)ㆍ의정부 중추부 조방ㆍ사헌부ㆍ내각 조방(內閣朝房)ㆍ방마원(放馬苑)ㆍ전생서(典牲署)이다. ○ 무릇 영선하는 곳은 맡은 관원이 본사(本司)의 관원과 함께 나가 검거(檢擧)한다. ○ 궁장(宮墻)은 도성의 준례에 따라 3군문에 나뉘어 속하여 허물어진 곳을 돌로 쌓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B001A_0040_020_0010_2000_001_XML
Rec-2203 신증동국여지승람_24권_경상도_안동대도호부 null null 관왕묘(關王廟) 서악(西岳) 동대(東臺)에 있다. 선조 무술년에 천장(天將) 설호신(薛虎臣)이 세웠다. 석상(石像)을 묘정비(廟庭碑)로 세웠다. 신증동국여지승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B001A_0250_010_0010_2000_003_XML
Rec-2204 신증동국여지승람_28권_경상도_성주목 null null 관왕묘(關王廟) 선조 정유년 천장(天將) 제국기(第國器)가 세웠는데, 영조 정미년에 남정(南亭) 아래로 옮겨 세웠다. 신증동국여지승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B001A_0290_010_0020_2000_004_XML
Rec-2205 연려실기술_25권_인조조고사본말 null null 명길이 치계하기를, “저 오랑캐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행차한 것은 오로지 화친하는 일에 있는데, 너희 나라의 국민이 모두 흩어지고 심지어는 국왕이 파천하였으니 마음이 매우 편치 못하다. 만일 화친하려고 한다면 모름지기 왕자와 대신과 척화(斥和)하는 사람을 보내야 한다. 그러면 마땅히 여기서부터 돌아갈 뿐이다.’ 합니다.” 하였다. 오랑캐가 순한 말로 우리를 달래고서 한(汗)에게 사람을 보내 대병(大兵)을 청하려는 것이었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깨닫지 못하였다. 절대로 살육하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온 조정이 자못 믿어, 호부의 관원을 보내 서울에 들어가 화물(貨物)을 취해 화친 용도에 사용하도록 하고, 또 각 사(各司)로 하여금 1원씩 성에 들어가 간수하게 하였다. 이때 적병은 모화관에서부터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이르기까지 진을 치고, 또 동문 밖에 5, 6개의 병영을 만들어 기치와 창칼을 나열하고 군악이 떠들썩하여 보고 듣는 이를 놀라고 의혹스럽게 하였으나, 성중의 사람은 침해하지 못하게 하고 출입과 왕래도 전혀 금지시켰는데, 다만 우마(牛馬)를 보면 빼앗아가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붙잡아 갔다. 연려실기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260_010_0040_2002_006_XML
Rec-2206 연려실기술_34권_숙종조고사본말 null null 그때 김익훈이 매를 맞아 죽음에 그 시체를 의금부 앞에 두었더니, 원수측 사람들이 서로 시체를 찢으려고 하였다. 널을 띄우던 밤에 비가 오고 어두웠는데, 원수측에서 세 곳에 모여 엿보고 있었다. 김씨측에서도 많은 사람이 모여서 어둠을 틈타 남몰래 동관왕묘(東關王廟) 앞에 이르렀는데, 그때 원수측의 습격을 당하였으나, 김진서(金鎭瑞)가 칼을 휘둘러 겨우 빠져나왔다. 묘현(墓峴)에 이르러 제사지내고 불을 끄고 암장하여 평지로 만들어 두고, 그 아들 만채(萬埰)는 앞서 신주를 안고 귀양 지로 출발하였다. 경오년 1월에 김익훈의 훈록(勳錄)을 깎았다. 어떤 무인이 제물(祭物)을 가지고 암장한 근처 마을에 와서 여러 날을 머물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광남(光南 익훈(益勳)) 집의 옛 부하로 많은 은혜를 입었기에 늘 한번 치전(致典)하려고 하였으나 장사지낸 곳을 알지 못하였다. 이제 제수를 갖추어 왔으나 버리고 가는 수밖에 없다.”고 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 집 늙은이가 진정으로 그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는 장사지낸 곳을 알려주고, 밤에 함께 가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물은 모두 늙은이에게 주고 가버렸다. 5, 6일 지난 뒤에 늙은이가 그곳에 까마귀와 솔개가 모여드는 것을 보고 가서 보았더니, 시체를 파내어 땅에 버린 채 머리는 없고, 옷ㆍ이불과 널은 모두 불타버렸다. 익훈의 집에서 듣고 다시 옷ㆍ이불을 갖추어 고쳐 염하여 다른 곳에 이장하였다. 연려실기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350_010_0090_2002_008_XML
Rec-2207 연려실기술별집_4권_사전전고_제사 null null 관왕묘(關王廟)는, 하나(남묘(南廟))는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고, 하나(동묘(東廟))는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는데, 안무왕(安武王) 관우(關羽)를 향사하였다. 남묘(南廟)는 흙으로 만든 소상(塑像)이며, 동묘(東廟)는 구리쇠로 만든 동상(銅像)이다. 경칩(驚蟄)과 상강(霜降)일에 제사지내고 축문에는 ‘조선 국왕’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란 때에 관우의 신령이 여러 번 나타나 신병(神兵)으로써 싸움을 도와주어 명 나라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평양의 싸움에서 이긴 것과 도산(島山)에서의 싸움과, 삼도(三道)에서 왜병을 구축할 때 관우의 신령이 늘 나타나 음조(陰助)하였다.” 하였다. 행주(幸州) 싸움에서 이길 때에도 신병이 나타났다 한다. 중국에는 관왕묘가 없는 곳이 없으니 이것은 세상에 전하기를, “고황제(高皇帝 명(明) 나라 태조(太祖)) 때에 관우의 신령이 꿈에 나타나서 음호(陰護)한 공이 있었으므로 온 나라가 모두 관우를 제사지냈다.” 한다. 정유년 겨울에 명 나라 장수가 울산(蔚山)의 적진을 공격하다가 불리하게 되니, 무술년 1월에 퇴병하였는데 명 나라 장수 유격(遊擊) 진인(陳寅)이 힘써 싸우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진 것을 싣고 서울로 돌아와서 치료하면서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 산기슭에다가 사당 한 채를 창건하고 그 가운데 신상(神像)을 설치하여 관공(關公 관우)을 모셨더니 장수 양호(楊鎬)를 비롯하여 모든 장수가 은(銀)을 내어 그 비용을 도왔고, 우리나라에서도 또한 은으로 도왔다. 그 사당이 낙성되자 선조(宣祖)께서도 가서 보았는데, 비변사(備邊司)의 모든 관료들이 임금의 행차를 따라 사당 앞뜰에 나아가서 재배하였다.그 신상은 흙으로 만든 것으로서 낯은 진한 대추[重棗]와 같이 붉고, 봉(鳳)의 눈이며, 수염은 배까지 드리웠으며, 그 좌우에 소상(塑像) 둘이 큰 칼을 가지고 모시고 서 있는데 관평(關平 관우의 양아들)과 주창(周倉 관우의 부하 장수)이라고 이르며, 의젓하여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이로부터 모든 장수가 출입할 때마다 참배하였으며, 모두 동국을 위하여 신령의 도움으로 적을 물리치기를 빌었다. 5월 13일에 사당에서 큰 제사를 지냈는데, 이날은 바로 관왕의 생일로 만일 우레나 이상한 것이 있으면 이는 관왕의 신령이 이른 것이라고들 하였다. 이날의 일기가 청명하다가 오후에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큰 바람이 서북쪽으로부터 불어오며 우레 소리와 아울러 소나기가 오다가 조금 후에 그쳤다. 뭇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관왕의 신령이 하림한 것이다.” 하였다. 그 후에 바로 또 안동(安東)과 성주(星州) 두 고을에 관왕묘(關王廟)를 세웠는데, 안동에서는 나무를 깎아서 신상을 만들었고, 성주에서는 흙으로 소상을 만들었는데, 성주에서는 신령의 이상한 흔적이 현저하게 나타났다고 한다. 얼마 안 되어 왜놈의 추장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고 주둔해 있던 모든 왜병이 철수해 갔으니, 이것 또한 이치로는 측량하기 어려운 일이다.옛날에 부견(苻堅)이 진(晉) 나라를 침범해 왔을 때, 진 나라 사안(謝安)이 정절(旌節 대장에게 준 표신(標信))과 기고(旗鼓 군기와 북)로써 장자문(蔣子文)의 사당에 가서 빈 일이 있었는데, 뒷날 사현(謝玄 사안(謝安)의 조카)의 대승을 말하는 자는 “장자문의 신령이 도운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하물며 관왕의 강대(剛大)한 기운으로 어찌 신령의 영험이 없었을까보냐. 관왕묘 앞에 두 개의 긴 장대(長竿)를 세우고 한 장대에는, ‘하늘을 돕는 큰 임금[協天大帝]’이라 쓰고, 다른 한 장대에는, ‘위엄이 중국에 떨쳤다[威辰華夏]’고 썼는데, 그 글자가 서까래와 같이 굵어 바람으로 인하여 반공에 휘날려 멀고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쳐다 보았다. 서울 서강(西江)에 사는 사람들이 어느 날 밤에 모두 놀라 많은 사람들이 산골짜기로 피해 달아나고, 혹은 세간을 싣고 동서로 이사하기도 하였다. 서강을 지나던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밤중에 병마(兵馬)가 서로 죽이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말하여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듣고 서로 놀라고 전파하며 무슨 변이 있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그 뒤에 사람들이 의심하기를 이것은 남관왕묘의 신령이 한 일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한다. 만력(萬曆) 30년에 명 나라의 신종황제(神宗皇帝)가 4천 금(金)을 무신(撫臣) 만세덕(萬世德)에게 부쳐서 조선 서울에 관왕묘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그 조서에 이르기를, “관공의 신령이 본래 중국에서 나타났었는데, 왜란을 평정하는 역사에도 뚜렷한 도움을 받았다 하니, 조선에서도 당연히 신주를 모셔야 한다.” 하였다. 이에 동대문 밖에 땅을 택하여 대신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하였는데, 경자년부터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3년 만인 봄에 준공하였다. 그 소상(塑像)은 그림의 모양에 의한 것이며, 전각(殿閣)ㆍ행랑ㆍ문간ㆍ쇠종과 북을 설치하여 놓은 것이 무릇 백여 칸이나 되는데, 모두 중국의 제도에 의한 것이다. 편액(扁額)에 쓸 것을 명 나라 조정에 청하여 명 나라 임금의 뜻을 받아 ‘현령 소덕왕 관공의 묘[顯靈昭德王關公之廟]’라고 세웠다. 허균(許筠)이 왕명을 받들어 관왕묘 비문을 지어 올린 것은 뒤에 결국 세우지 아니 하였다. 숙종 신미년에 숙종이 지나는 길에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어갔는데, 좌의정 목내선이 아뢰기를, “마땅히 주 무왕(周武王)이 상용(商容)의 정문[閭]을 지나가다가 구부리고 경의를 표시한 식례(式禮)를 모방하여 관우묘에 식례를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우의정 민암(閔黯)이 아뢰기를, “배례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사오며 식례도 부당하옵니다. 손을 들어서 읍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암(黯)의 의논을 따랐다. 신미년에 또 남묘(南廟)에도 지나는 길에 들어갔는데, 전과 같이 읍을 행하였다. 경인년에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관왕묘에 배례를 하지 않고 읍을 하는 것이 과연 예법으로 보아 잘못된 것이 없겠는가. 선조(宣祖)께서 관왕묘에 친히 제사를 지내실 때에는 반드시 읍례는 행하지 아니하셨을 것이다.” 하니, 좌의정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그때는 명 나라 장수와 함께 가셨으니 혹 배례를 행하셨을 것이오나, 지금까지도 반드시 영구히 준수할 것은 아닙니다. 관왕은 본래 연대가 다른 명장으로 선성(先聖)이나 선사(先師)와는 차이가 있어 읍을 행하는 이외에 다른 예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선조실록(宣祖實錄)》을 상고하여 내게 하니 실록에, “선조는 재배를 행하였다.”고 되어 있었다. 임금이 명하기를, “앞으로는 이에 따라 배례를 행하라.” 하였다. 영종(英宗 영조(英祖)) 정미년에 임금이 관왕묘에 임어하여 재배의 예를 행하였다. 관왕묘는 또 전라도 강진군(康津郡) 고금도(古今島)에 있으니, 선조 정유년에 명 나라의 도독(都督) 진린(陳璘)이 창건한 것이다. 숙종 갑자년에 다시 수리하고 따로 한 사당을 그 곁에 세우고 진린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이순신(李舜臣)을 배향으로 모셨다. 관왕묘의 하나는 안동부(安東府)에 있는데, 선조 무술년에 진정영도사(眞定營都司) 설호신(薛虎臣)이 창건하고 석상을 봉안하였다. 처음에는 안동부 성문 안 북산 꼭대기에 있었고, 또 석비(石碑)를 세우고 임진왜란 때 명 나라 장병이 동으로 나와 조선을 구원하고, 왜군을 정벌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 뒤 병오년에 서악(西嶽)의 동대(東臺)에 옮겼다. 관왕묘의 하나는 성주목(星州牧)에 있다. 선조 정유년에 명 나라 장수 모국기(茅國器)가 창건한 것으로서, 여기에는 흙으로 만든 소상(塑像)이 있는데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매우 현저하게 나타났다. 처음에는 성문 밖에 있었는데, 영종 3년에 남정(南亭) 아래로 옮겨 세웠다. 관왕묘의 또 하나는 남원부(南原府)의 성(城) 서문 밖에 있는데, 선조 기해년 사이에 명 나라 도독 유정(劉綎)이 창건한 것으로서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숙종 42년에 신상(神像)을 고쳐 세웠는데, 모두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고, 명 나라의 총부중군(摠府中軍) 이신방(李新芳)과 총부천총(摠府千摠) 장표(蔣表)와 총부천부(摠府千夫) 모승선(毛承先)을 배향하였다. 숙종 37년에 명을 내려 여러 도에 있는 관왕묘의 제사를 선무사(宣武祠)의 예에 따라 경칩과 상강에 향과 축문을 내려보내 본도에서 제사를 행하도록 하였다. 연려실기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430_010_0010_2002_009_XML
Rec-2208 연려실기술별집_4권_사전전고_서원 null null 강진(康津) 서봉서원(瑞峯書院) 만력 경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후백(李後白)ㆍ백광훈(白光勳)ㆍ최경창(崔慶昌), 월남영당(月南影堂) : 이의경(李毅敬) 고금도(古今島)의 관왕묘(關王廟)에 진린(陳璘)과 이순신을 배향하였다. 제사조(諸祀條)에 들어 있다. 연려실기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430_010_0040_2002_009_XML
Rec-2209 연려실기술별집_15권_천문전고_재변상서 null null 서울 안 서강(西江) 사람들이 밤에 서로 놀라서 산골로 많이 달아나 피하였고, 혹은 동ㆍ서로 집을 옮기는 자도 있었다. 서강을 지나는 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말하기를, “밤중에 군사와 말이 서로 죽이는 소리가 서울로부터 들려왔다.”고 하여, 이를 들은 사람이 서로 전하며 놀라고 해괴히 여겨 무슨 변이 있는가 의심하였다. 그 뒤에 사람들이 “남관왕묘(南關王廟) 관우(關羽)의 신령이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으니 인심의 불안하기가 이와 같았다. 연려실기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540_010_0060_2002_011_XML
Rec-2210 연려실기술별집_16권_지리전고_산천형승 null null 영호루(映湖樓) 낙동강의 원류가 태백산의 황지(黃池)에서 나와 남쪽 예안에 이르러 동쪽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여기에 와서 비로소 커지면서 굽이쳐 돌아 호수가 된다. 무협(巫崍)이 그 왼쪽에 벌여 있고, 성산(城山)이 오른쪽에 버티고 있다. 누각의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누각의 북쪽에 신라 때의 옛 절이 있는데 절의 정전이 들 가운데 높다랗게 서 있다. 서쪽에는 관왕묘(關王廟)의 석상이 있다. 연려실기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550_010_0040_2002_011_XML
Rec-2211 연암집_7권_별집_영처고서 null 雩祀壇之下。桃渚之衕。靑甍而廟。貌之渥丹而鬚儼然。關公也。士女患瘧。納其牀下。𢥠神褫魄。遁寒祟也。孺子不嚴。瀆冒威尊。爬瞳不瞬。觸鼻不啑。塊然泥塑也。由是觀之。外舐水匏。全呑胡椒者。不可與語味也。羡鄰人之貂裘。借衣於盛夏者。不可與語時也。假像衣冠。不足以欺孺子之眞率矣。 우사단(雩祀壇) 아래 도저동(桃渚洞)에 푸른 기와로 이은 사당이 있고, 그 안에 얼굴이 붉고 수염을 길게 드리운 이가 모셔져 있으니 영락없는 관운장(關雲長)이다. 학질(瘧疾)을 앓는 남녀들을 그 좌상(座牀) 밑에 들여보내면 정신이 놀라고 넋이 나가 추위에 떠는 증세가 달아나고 만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아무런 무서움도 없이 그 위엄스러운 소상(塑像)에게 무례한 짓을 하는데, 그 눈동자를 후벼도 눈을 깜짝이지 않고 코를 쑤셔도 재채기를 하지 않는다. 그저 덩그러니 앉아 있는 소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를 통해 보건대, 수박을 겉만 핥고 후추를 통째로 삼키는 자와는 더불어 그 맛을 말할 수가 없으며, 이웃 사람의 초피(貂皮) 갖옷을 부러워하여 한여름에 빌려 입는 자와는 더불어 계절을 말할 수가 없듯이, 관운장의 가상(假像)에다 아무리 옷을 입히고 관을 씌워 놓아도 진솔(眞率)한 어린아이를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연암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68A_0070_010_0090_2006_002_XML
Rec-2212 연원직지_1권_출강록_1832_1123 18321123 距所舍。不數十武。有關帝廟。蓋其俗崇奉關帝。殆家尸戶祝。而上自帝都。至於市墟村落。皆建廟安塑像。其來已久。與正副使聯步往見。廟門外對立十餘丈紅柱。雕墻刻桷。已非我國之所有。爲屋凡五。皆有神像。第一安四五鬼像。第二安一座女像。主者謂以碧霞元君。卽泰山神之女也。左右各安女像。乃其侍女云。第三安關帝像。扁曰萬古一人。第四安一座黑面神像。扁曰龍王宮。第五又安關帝像。卓前排四神像。外門兩傍。各立赤兔馬。如我國關廟之制。內扁曰富國裕民。外扁曰財神廟。以關帝而稱財神。大不可也。或曰財神者。比干也。以比干之忠直而死爲財神。何也。且安排節次。與關廟一樣。抑何義也。庭立一碑。刻曰萬古流芳。其下列書檀越人姓名及施財多少之數。蓋道光辛卯新建也。第三屋旣安關帝。則又此新刱。未知爲何意。 사관에서 수십 보 되지 않는 곳에 관제묘가 있다. 대개 그곳 풍속이 관제(關帝)를 높이 받들어 거의 집집마다 모신다. 위로 국도(國都)로부터 시가나 촌락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당을 세우고 초상을 봉안(奉安)하니,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정사, 부사와 더불어 같이 가 보니, 사당문 밖에 10여 길의 붉은 기둥[紅柱]을 마주 세웠으며, 담장을 아로새기고 서까래를 조각하여 우리나라에 있는 것과 달랐다. 집은 무릇 5칸인데 모두 신상(神像)을 두었다. 제일 첫 칸에는 4, 5개의 신상을 봉안하고, 둘째 칸에는 하나의 여상(女像)을 봉안하였다. 주관하는 사람이 벽하원군(碧霞元君)은 곧 태산신(泰山神)의 딸이고, 좌우에 각각 봉안한 여상은 바로 그 시녀라고 하였다. 셋째 칸에 관제의 초상을 봉안하고 편액(扁額)을 ‘만고일인(萬古一人)’이라 썼다. 넷째 칸에 얼굴이 검은 한 신상을 봉안하고 편액을 ‘용왕궁(龍王宮)’이라 썼다. 다섯째 칸에도 또한 관제의 초상을 봉안하고 탁자 앞에 4개의 신상을 배치하였으며, 문 양쪽에는 각각 적토마(赤兎馬)를 세웠으니, 우리나라 관왕묘(關王廟)의 제도와 같다. 안의 편액은 ‘부국유민(富國裕民)’이라 썼고, 밖의 편액엔 ‘재신묘(財神廟)’라 썼다. 관제를 재신이라 한 것은 큰 잘못이다. 혹자는 “재신은 비간(比干)이다.” 하였다. 비간이 충직(忠直)으로 죽었는데 재신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일이며, 또한 안배(安排)한 절차가 관묘(關廟)와 동일한 모양은 무슨 뜻일까? 뜰에 비 하나를 세워 ‘만고유방(萬古流芳)’이라 새기고, 그 아래 시주(施主)한 사람의 성명과 재물을 희사(喜捨)한 액수를 열거하여 썼는데, 대개 도광(道光) 신묘년(1831, 순조 31)에 새로 세운 것이다. 셋째 칸에 이미 관제를 봉안하고도 다시 이를 새로 창건한 것은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다. 연원직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8A_0020_040_0230_2004_010_XML
Rec-2213 연원직지_1권_출강록_1832_1127 18321127 又行十里至靑石嶺。嶺高幾如會寧。以石色皆靑故名。路傍有古碑。字沒不可知。行到嶺上。遂下車少憩。路右有關廟。扁曰亘古一人。餘無可觀。 또 10리를 가서 청석령에 닿으니, 높이가 거의 회령령과 같고, 돌빛이 온통 푸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길옆에 옛 비석이 있는데 글자가 마멸(磨滅)되어 알 수가 없었다. 고개 위에 가서야 드디어 수레에서 내려 조금 쉬었다. 길 오른쪽에 관왕묘(關王廟)가 있는데 편액에 ‘고금에 제일 가는 사람[亘古一人]’이라 하였고 나머지는 보잘것없었다. 연원직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8A_0020_040_0270_2004_010_XML
Rec-2214 연원직지_1권_출강록_1832_1128 18321128 出新遼城西門外百餘步。有石橋。雕石爲欄。制極精巧。康煕五十七年所築也。橋北百餘步有關廟。廟前有一座牌樓。扁曰武聖人。傍刻水仙雲龍。牌樓內又有一門。扁曰萬古臣極。門上爲樓。扁曰摘錦樓。又有一扁。曰函夏欽仰。內扁書飛雲謠。乾隆十年。趙學淦書。門內爲廣庭。右有鼓樓。曰虎嘯。左有鍾樓。曰龍吟。虎嘯樓北有殿。曰護世。嘉慶八年御筆。龍吟樓北有殿。曰大丈夫。道光九年御筆。兩殿並安關帝像。庭之正北有層階。階有門。左扁曰正大光明。右扁曰義以爲上。又入一門。扁曰元精當中。道光九年。王世芳書。其柱聯曰。莫恨呑吳。吳宮花草埋幽徑。休勞帝魏。魏國山河半夕陽。其內有正殿。扁曰威靈遠鎭。晉谷信史嘉書。右扁曰精忠大義。嘉慶十三年御筆。左扁曰仁勇配天。嘉慶丙子趙某書。其名忘之。殿內安關帝像。像甚雄偉。位置一如我國關廟制。床卓器玩。種種侈麗。東廡張飛。西廡趙雲。又設嚴顏不屈之像。庭中有四碑。忙不能記。正殿後又有一小殿。安奉關帝位板。還出殿庭。迤入東邊。有儀狄廟。外扁書仙傳妙術。道光五年書。內扁書功比和羹。嘉慶十九年書。殿內安白面塑像。又東邊有屋。曰監饍。內有生鷄數十首。似是供神之需也。其傍又有屋。曰銷鍋行。道光十一年書。與正副使入此少憩。自廚房備進薏苡。略啜而出。蓋此廟見於前輩日記者。俱不甚鋪張。見今丹碧璀璨。棟宇宏侈。柱楣扁額。率多嘉慶道光時書。則似是仍舊而增修之。聞其壯麗。雖瀋陽,燕京。亦無以過之云。 신요동성(新遼東城) 서문(西門) 밖으로 100여 보를 나오니 돌다리가 있다. 돌을 조각하여 난간을 만들었는데 제작이 지극히 정교하니, 강희 57년에 축조(築造)한 것이다. 다리 북쪽 100여 보에 관제묘가 있고 그 앞에 한 채의 패루(牌樓)가 있다. 편액(扁額)을 ‘무성인(武聖人)’이라 하고, 곁에 수선(水仙)과 운룡(雲龍)을 새겼다. 패루 안에 또 문 하나가 있는데, 편액을 ‘만고신극(萬古臣極)’이라 한다. 문 위에 다락[樓]을 만들었는데 편액을 ‘적금루(摘錦樓)’라 하였으며, 또 하나의 편액이 있는데 ‘함하흠앙(函夏欽仰)’이라 하였고, 안 편액에는 ‘비운요(飛雲謠)’라고 썼는데, 건륭(乾隆) 10년(1745, 영조 21)에 조학감(趙學淦)이 쓴 것이다. 문안에는 넓은 뜰이 있다. 오른쪽으로 고루(鼓樓)가 있는데 ‘호소(虎嘯)’라 하였고, 왼쪽으로 종루(鍾樓)가 있는데 ‘용음(龍吟)’이라 하였다. 호소루(虎嘯樓)의 북쪽에 전각(殿閣)이 있어 ‘호세전(護世殿)’이라 하였는데, 가경(嘉慶) 8년(1803, 순조 3)의 어필(御筆)이다. 용음루(龍吟樓)의 북쪽에 있는 전각은 ‘대장부전(大丈夫殿)’이라 하였는데, 도광(道光) 9년(1829, 순조 29)의 어필이다. 두 전(殿)에 모두 관제(關帝)의 상(像)을 봉안하고 뜰의 정북쪽에 층계가 있다. 이 층계에 문이 있는데 왼쪽 편액은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 하고, 오른쪽 편액은 ‘의이위상(義以爲上)’이라고 하였다. 또 한 문을 들어가니 편액을 ‘원정당중(元精當中)’이라고 하였는데, 도광(道光) 9년에 왕세방(王世芳)이 쓴 것이다... 그 안에 정전(正殿)은 편액을 ‘위령원진(威靈遠鎭)’이라 하였는데, 진(晉) 곡신(谷信) 사가(史嘉)가 쓴 것이다. 오른쪽 편액은 ‘정충대의(精忠大義)’라고 하였는데 가경 13년의 어필이고, 왼쪽 편액은 ‘인용배천(仁勇配天)’이라고 하였는데 가경(嘉慶) 병자년(1816, 순조 16)에 조(趙) 아무개의 글씨이나, 그 이름은 잊어버렸다. 전 안에 관제의 상을 봉안하였다. 상이 매우 웅장하고 컸으며, 위치는 한결같이 우리나라 관왕묘의 제도와 같았고, 상과 탁자나 여러 가지 기구들은 사치스럽고 화려하였다. 동무(東廡)에는 장비(張飛), 서무에는 조운(趙雲)을 봉안하였으며 또 엄안(嚴顔)의 굴하지 않는 상을 설치하였다. 뜰 가운데에는 4개의 비석이 있었는데 바빠서 기록할 수 없었다. 정전 뒤에 또 하나의 조그마한 전이 있어 관제의 위판(位板)을 봉안하였다. 도로 전 뜰로 나와 동편으로 따라 들어가니 의적(儀狄)의 사당이 있다. 바깥 편액에 ‘선전묘술(仙傳妙術)’이라고 쓴 것은 도광 5년에 쓴 것이고, 안쪽 편액에 ‘공비화갱(功比和羹)’이라고 쓴 것은 가경 19년에 쓴 것이다. 전각 안에 얼굴이 흰 소상(塑像)을 봉안해 놓았다. 또한 동편에 ‘감선(監饍)’이라는 집이 있는데, 안에는 살아 있는 닭 수십 마리가 있어 신(神)에게 대접할 감인 듯하였다. 그 곁에 또 ‘소와행(銷鍋行)’이라는 집이 있는데 그 편액은 도광 11년에 쓴 것이었다. 정사, 부사와 더불어 여기에 들어가 잠깐 쉬는데, 주방에서 율무를 마련하여 가져왔기에 조금 먹다 나왔다. 대개 이 사당이 선배들의 일기에 나타난 것은 모두 그다지 떠들지 않았는데, 지금 보면 단청(丹靑)이 찬란하고 동우(棟宇)가 굉장히 사치스러우며 주련이나 편액이 거의 모두 가경, 도광 때 쓴 것이니, 옛것을 그대로 두고 중수한 듯하다. 듣건대 그 웅장하고 화려함이 비록 심양이나 연경의 것이라 할지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다고 한다. 연원직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8A_0020_040_0280_2004_010_XML
Rec-2215 연원직지_1권_출강록_1832_1129 18321129 聖申出外觀覽而歸。言村閭市肆甚盛。店北數百步有關廟。門左右皆有懸板。記重修始末及施財人姓名。道光七年事也。庭有一碑。字刓不可知。東墻內有古松五六株。他無可觀云。 성신이 밖에 나가 구경하고 돌아와서 “마을의 여염(閭閻)과 시장 가게가 매우 번성합니다. 점사 북쪽으로 수백 보 거리에 관왕묘(關王廟)가 있는데, 문 좌우에 모두 현판(懸板)이 있어 중수한 시말과 재물을 희사한 사람들의 성명을 기록하였는데, 도광(道光) 7년의 일입니다. 뜰에 비석 하나가 있는데 글자가 없어져 알 수 없고, 동쪽 담장 안에 고송(古松) 5, 6그루가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볼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연원직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8A_0020_040_0290_2004_010_XML
Rec-2216 연원직지_4권_유관록_1833_0106 18330106 明因寺東南一里許。有金魚池。或稱魚藻池。池產五色魚。而金色者尤多。故名。正陽門外魚肆所鬻者。多出此池。而其小者。爲豪富家晶缸之蓄云。池周稍廣。中有數三島嶼。繞堤楊柳。井井成行。村閭櫛比。園亭相望。此則城內所無者。方春景光。似可愛。而每歲端陽日。都人競集柳陰中。走馬爲戱。亦一壯觀云。池東有慈源寺。寺東數百武。有姚彬,關王廟。皆有古蹟。而未及歷入云。 명인사 동남쪽 1리쯤에 금어지가 있는데, 혹 어조지(魚藻池)라고도 한다. 이 못에는 오색 물고기가 생산되는데, 그중에 금빛 물고기가 더욱 많기 때문에 금어지라 이름한 것이다. 정양문(正陽門) 밖 고기 가게에서 파는 것은 이 못에서 나는 것이 많은데, 그중에 작은 것은 부호한 집에서 어항에 기르는 데에 쓰인다고 한다. 못의 둘레가 꽤 넓고 그 안에 섬 2, 3개가 있다. 못의 둑을 두른 버드나무가 질서 정연[井井]하게 줄지어 있으며, 마을이 즐비(櫛比)하고 동산과 정자가 서로 잇대었으니, 이는 성안에도 없는 것이다. 봄이 한창일 때의 경치는 사랑스러울 듯하다. 그런데 매해 단오날은 도성 사람들이 버드나무 그늘 속에 앞을 다투어 모여들어서 말달리기 놀이를 하는데 또한 하나의 장관(壯觀)이라 한다. 못 동쪽에 자원사(慈源寺)가 있고, 절의 동쪽 수백 보에 요빈(姚彬), 관왕묘(關王廟)가 있다. 모두 고적인데도 미처 들르지 못하였다고 한다. 연원직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8A_0050_010_0060_2004_010_XML
Rec-2217 연원직지_4권_유관록_1833_0112 18330112 西墻外有關廟。制不甚大。而頗蕭洒。東炕掛觀音畫像。旁書唐吳道子寫。世稱希寶云。 서쪽 담장 밖에 관왕묘(關王廟)가 있는데 제도가 그리 웅대하지는 않으나 꽤 깨끗하였다. 동편 온돌방에 관음화상(觀音畫像)을 걸고 그 곁에 ‘당(唐) 오도자(吳道子) 그림’이라 씌어 있는데, 세상에서 드문 보물로 일컫는다고 한다. 연원직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8A_0050_010_0120_2004_010_XML
Rec-2218 연원직지_6권_유관별록 null 有村則必有寺有廟。如遼陽,瀋陽,山海關等處最多。至北京城內外寺觀。比人家幾居三分之一。但一寺所居僧。雖大刹。其數不多。道士尤少。今時尙佛。似不如前明故也。或曰。時制嚴於度僧。每寺各有定額云。關廟必供佛。佛寺必供關帝。關,佛一體尊奉。曾無分別。崇奉關廟。自前世伊然。而今淸尤謹且嚴。考爵秩便覽。關公之孫。世襲博士。稱聖裔。與衍聖公等。凡村堡城邑。莫不有關廟。其規制奢儉。視本處之大小貧富。扁牌柱聯。務尙新奇。甚至家家奉關帝像。朝夕焚香祈禱。市肆亦然。 마을이 있으면 반드시 사찰이 있고 묘(廟)가 있는데, 요양, 심양, 산해관 등지에 가장 많고, 또 북경으로 가면 안팎에 있는 사관(寺觀)의 수가 인가에 비해 거의 3분의 1은 된다. 그러나 한 사찰에 승려의 수는 큰 절이라 해도 불과 얼마 되지 않고 도사(道士)의 수는 더욱 드물다. 오늘날 부처를 숭상하는 것이 예전 명(明) 나라 때와는 같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혹은 말하기를, 현재의 도승(度僧) 제도가 엄격해서, 사찰마다 일정한 인원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관왕묘(關王廟)에서는 반드시 부처를 받들고 절에서는 또 관운장(關雲長)을 받든다. 이처럼 관운장과 부처를 일체(一體)로 존봉(尊奉)해서 구별이 없는 것이다. 관왕묘를 숭봉하는 것은 과거부터 그러했었지만 현재 청(淸) 나라에서는 이를 더욱 조심스럽게 한다. 뿐만 아니라 작질(爵秩)을 엄격히 상고하고 관공(關公)의 후손을 두루 찾아내어 이들에게 박사(博士)를 세습시켜 ‘성예(聖裔)’라 이름하기를 연성공(衍聖公)의 경우와 꼭 같게 한다. 그리하여 시골 마을과 성읍(城邑)에 관왕묘가 없는 곳이 없는데, 그 규모와 사치롭고 검소한 정도는 그곳의 대소 내지 빈부의 정도에 따라 다르다. 편패(扁牌) 주련(柱聯) 같은 것은 애써 신기한 것을 숭상한다. 심지어는 집집마다 관제(關帝)의 상을 받들고 조석으로 분향 기도하며 시장 전방들도 그렇게 한다. 연원직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8A_0070_010_0050_2004_010_XML
Rec-2219 연행기사_상_1777_1218 17771218 晴。行過三臺子,六渡河。至中後所二十里。午憩於韓姓人家。店傍有關帝廟。與兩价稅轎。歷見結搆之奢麗。雕刻之奇巧。亞於舊遼之關廟。而丹雘炫耀。諸扁筆法。字字活動。第一門。題曰關帝廟。內曰此之謂大丈夫。左右廊中。有赤兔馬。第二門有兩題。上曰至聖至神。下曰浩氣彌空。庭畔有二碑。一則乾隆元年所立。一則今年所立。皆是重修記也。入第三門。有正殿。門上題曰日星河嶽。左右柱題曰浩氣千秋環北斗。精靈萬禩鎭東溟。又曰。神勇蓋人羣雷動。風馳三國皆遜武。丹心扶漢祚日光。月皎萬年獨稱尊。皆果親王筆。而正殿簷楣。列刻海仙三像。殿門內設龕室。安關帝塑像。戴冑被甲。踞坐於床上。兩邊張飛,趙雲,關平,張興等。執矛劍列立。中排一床。上有香爐。其傍有竹簽及占書。與我國關王廟所置者無異矣。人之欲占吉凶者。拜禱抽簽。往往有驗云。未知信然否也。 맑음. 행하여 삼대자(三臺子), 육도하(六渡河)를 지나 중후소(中後所) 20리에 이르러 한낮에 한씨(韓氏)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쉬었다. 점사(店舍) 곁에 관제묘(關帝廟)가 있어 두 사신과 함께 가마에서 내려 돌아보았다. 건물 구조의 사치스러움이 구요동(舊遼東) 관제묘에 다음갈 만하다. 단청이 밝고 빛나며 편액(扁額)의 필법이 글자마다 살아 움직인다. 제1문에는 ‘관제묘(關帝廟)’라 쓰고, 안에는 ‘이를 대장부라고 한다.[此之謂大丈夫]’라는 글이 있으며, 좌우 낭중(廊中)에는 적토마(赤兎馬)가 있다. 제2문에는 두 가지 제액(題額)이 있는데 뒤의 것은 ‘지성지신(至聖至神)’ 아래 것은 ‘호기미공(浩氣彌空)’이다. 뜰가에 두 비(碑)가 있는데, 하나는 건륭(乾隆) 원년에 세운 것이고 하나는 금년에 세운 것이다. 모두 중수기(重修記)이다. 제3문에 들어서니 정전(正殿) 문 위에 쓰기를 ‘일성하악(日星河嶽)’이라 하였고... 정전(正殿) 처마 서까래에는 해선(海仙) 3상(像)을 벌여 조각하고 전문(殿門) 안에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관제(關帝)의 소상(塑像)을 안치하였다. 투구에 갑옷을 입고 상 위에 걸터앉은 상이다. 양쪽 가에는 장비(張飛), 조운(趙雲), 관평(關平), 장흥(張興) 등이 창과 칼을 잡고 늘어섰고, 가운데에도 상을 놓았는데 위에 향로(香爐)가 있고 그 옆에는 죽첨(竹簽)과 점서(占書)가 있어 우리나라 관왕묘(關王廟)의 배치와 다름이 없다. 길흉을 점치고자 하는 자가 절하여 기도하고 첨(簽)을 뽑으면 가끔 증험이 있다 하나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연행기사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21A_0010_050_0180_2004_006_XML
Rec-2220 연행록_일기_1712_1204 17121204 行出西門外。至關王庿。則庿閣之宏侈。有勝於永安寺。而正門外有磚屛。以磚石塗灰。高可四五丈。廣可五六間。而畫以物像。屛內設一梁二柱門,牌樓三間。而狀如我東延詔門也。此門之內。又設三門。門板塗以靑粉。加着凍油。人影相照矣。三門內左右。有龍吟虎嘯兩樓。樓上懸鍾。四門內設左右庿。庿有右邊趙雲,左邊張飛塑像。正堂有左右牌。牌之後面。書曰山西僧費九百餘兩銀重修者也。各殿揭號。皆取忠義之意爲名。卽道配天地。無能爲名,忠義勇烈等號也。丹雘極輝煌矣。 서문 밖으로 나가서 관왕묘(關王廟)에 이르니, 묘각(廟閣)의 굉장ㆍ사치함이 영안사보다 나음이 있었다. 정문(正門) 밖에 벽돌로 쌓은 가리개가 있었다. 벽돌에다 회로 때워서 높이는 4, 5자쯤이고 넓이는 5, 6칸쯤 되는데, 물상(物像)이 그려져 있었다. 가리개 안에 1량 2주문(一梁二柱門)을 만들었고 패루(牌樓)가 3칸인데 모양이 우리나라 연조문(延詔門)과 같았다. 이 문간 안에 또 3문을 설치했고, 문 판자에 청분(靑粉)을 바르고 동유(凍油)를 덧칠해서 사람의 그림자가 서로 비쳤다. 3문 안쪽 좌우에 용음(龍吟)ㆍ호소(虎嘯) 두 누각(樓閣)이 있고, 누각 위에는 종이 달려 있었다. 사방 문간안에도 좌우묘(左右廟)를 설치했는데, 오른편에는 조운(趙雲)의 소상(塑像)이, 왼편에는 장비(張飛)의 소상이 있었다. 정당(正堂)에도 좌우패(左右牌)가 있었고, 패 후면에는 ‘산서 승(山西僧)이 은 900여 냥을 들여서 중수(重修)한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각전(各殿)에 전호(殿號)를 걸어 놓은 것은 모두 충의(忠義)의 뜻을 취하여 이름으로 삼은 것이었다. 즉, ‘도배천지(道配天地)’ㆍ‘무능위명(無能爲名)’ㆍ‘충의용렬(忠義勇烈)’이라는 등의 이름이었고, 단청이 아주 휘황하였다. 연행록_최덕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7A_0040_020_0040_2004_003_XML
Rec-2221 연행록_일기_1712_1215 17121215 而家家村村寺寺。無不掛關將之像。其敬慕可知。寺去七里。有寧遠衛。而登內城西門上。周覽形勢。則外城乃方城。而一面不過二里餘。內城亦方城。而俱皆崩頹。只存內外八虹門。門以磚石造成。民家雖不稠密。內城則無空棄之處。外城西北多空垈。而市廛半不如遼東。內城中當衢路。有十字閣。狀如瀋陽之制。南門內有兩石牌樓。皆以熟石造作。制作如遼東關王庙之一梁三間門制。 집마다 마을마다 절마다 관장(關將 관우)의 화상을 걸지 않은 곳이 없으니, 그들의 경모(敬慕)함을 알 수 있었다. 영녕사에서 7리 거리에 영원위(寧遠衛)가 있었다. 내성(內城) 서문(西門) 위에 올라서 형세를 두루 보니, 외성(外城)은 바로 방성(方城)인데 한 면이 불과 2리 남짓하였다. 내성도 또한 방성이나 모두 무너졌고 다만 안팎으로 여덟 곳 홍예문만 남았는데, 문은 벽돌로 지은 것이었다. 민가가 비록 촘촘하지는 않았으나 내성에는 비워 둔 땅이 없었고, 외성에는 서북쪽에 빈터가 많았다. 저자 가게도 요동의 반만 못했으나 내성 안 한 거리에 있는 십자각(十字閣)은 생김새가 심양의 제도와 같았다. 남문 안에 돌 패루(牌樓) 둘이 있는데, 모두 다듬은 돌로 만들었는데 제작한 것이 요동 관왕묘의 1량 3칸문(一梁三間門)의 제도와 같았다. 연행록_최덕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7A_0040_020_0150_2004_003_XML
Rec-2222 열하일기_양엽기_관제묘 null null 관제묘(關帝廟)는 천하에 어디든지 비록 궁촌 벽지라도 사람 몇 호만 사는 데는 반드시 사치한 묘우를 떠받들어 지어 놓고, 제사에 정성이 대단하여 소 먹이는 아이와 곁두리 먹이는 지어미[饁婦]들까지 뒤떨어지기가 두려워 달려든다. 책문(柵門)에 들어온 뒤 황성까지 2천여 리 사이에 새로 지은 것이나 묵은 것이나 혹은 크고 작은 수많은 관제묘가 서로 마주 바라다보고 있다. 그 중에도 요양(遼陽)과 중후소(中後所)에 있는 것이 가장 영험이 있다 하고, 북경에 있는 백마관제묘(白馬關帝廟)라 하여 사전(祀典)에 실렸으니, 곧 정양문 오른편에 있는 관제묘가 이것이라 한다. 매년 5월 13일이면 제사를 올리는데, 10일 앞서 태상시(太常寺)가 본시(本寺)의 당상관(堂上官)을 보내어 예식을 집행한다. 이날은 특히 민간의 참배가 더욱 극성스럽다. 대체로 나라에 큰 재앙이 있으면 제사를 모셔서 고해 바친다. 명(明)의 만력(萬曆) 시대는 특히 삼계복마대제신위진원천존(三界伏魔大帝神威鎭遠天尊)으로 봉했으니, 이 지시는 궁중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 남관왕묘(南關王廟) 바람벽 위에 걸린 그림도 대체로 이곳의 것을 모방한 그림이다. 초굉(焦竑 명(明) 학자. 자는 약후(弱侯))이 묘비문을 짓고 동기창(董其昌 명(明)의 서예가. 자는 원재(元宰))이 글씨를 썼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이절(二絶)이라 한다. 열하일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70A_0270_010_0140_2003_002_XML
Rec-2223 오산집_속집_3권_시요 null 未幾北虜有警。公移節遼陽。東征之事。付諸撫院。撫院之去。公又建牙下國。部勒水陸大將。自作載書。共詣關王廟。祭以築壇。盟以歃血。同心討賊。指天誓日。鼓三軍之氣。激以忠義。士皆瞋目。四大將意氣相合。咸奮大勇。 그 뒤 얼마 안 되어 오랑캐에 대한 경보(警報)가 있어 상공이 요양(遼陽)으로 가면서 동정(東征)의 일을 무원(撫院)에다 넘겼고 무원이 떠나자 상공이 또다시 조선에다 대장기를 세우고 수륙(水陸)의 장수들을 통솔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맹약(盟約)의 글을 지어 다 같이 관왕묘(關王廟)로 가서 단을 쌓아 제사를 지낸 다음 피를 마시고 맹세하였다. 이에 마음을 합해 적을 토벌하기로 하늘의 해를 가리키며 다짐하여 삼군(三軍)의 기세를 진작시키고 충의로 격동시키니, 병사들은 모두 눈을 부릅떴으며 4명의 대장들은 의기가 서로 합치되어 모두 큰 용맹을 떨치리라 마음먹었다. 오산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58A_0120_020_0020_2013_004_XML
Rec-2224 오주연문장전산고_경사5_논사_한국 null null 우리나라 경도(京都)나 시골에 다같이 관문(關門) 같은 이문(里門)이 있어 낮에는 열어 두고 밤에는 닫으니, 이 또한 좋은 법이라 이를 만하다. 이문의 창설(創設) 또한 조명(朝命)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다. 상고하건대, 세조(世祖) 10년(을사)에 경성(京城)과 시골에 모두 이문을 짓도록 명하였는데, 지금 경성 안으로 말하면 운종가(雲從街 지금의 종로 4가 근처) 동북편에 이문 내동(里門內洞)이 있고, 성 밖으로 말하면 숭례문(崇禮門) 밖 관왕묘(關王廟) 근처에 이문동(里門洞)이 있다. 시골의 경우, 양주목(楊州牧)으로 말하면 누(樓)ㆍ원(院)ㆍ점(店) 등에 각기 이문을 설치하였는데, 근래에는 다 허물어져 버리고 옛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나도 젊었을 적에 이것을 보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1A_0150_020_0160_2000_020_XML
Rec-2225 오주연문장전산고_경사5_인물_중국_01 null null 우리나라에는 관왕묘가 네 군데에 있다. 강진(康津)에 있는 사당은 명 나라의 도독(都督) 진인(陳璘)이 건립하였는데, 그 뒤에 또 하나의 사당을 그 옆에 따로 세워 진인을 주위(主位), 이순신(李舜臣)을 배위(配位)로 모셨고, 남원(南原)에 있는 사당은 명 나라의 장수 이신방(李新芳)ㆍ장표(蔣表)ㆍ모승선(毛承先)을 배위로 모셨고, 안동(安東)에 있는 사당은 명 나라의 장수 설호신(薛虎臣)이 건립하였는데 석상(石像)으로 되었고, 성주(星州)에 있는 사당은 명 나라의 장수 모국기(茅國器)가 건립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1A_0160_020_0060_2000_020_XML
Rec-2226 오주연문장전산고_경사5_인물_중국_02 null null 관왕묘의 사적에 대해 이 맹휴(李孟休)의 《춘관지(春官志)》에, “선조(宣祖) 30년(1597) 겨울에 명 나라의 여러 장수가 울산(蔚山)에 있는 왜적의 진루(陣壘)를 공격하다가 전세가 불리하게 되어 유격장군(遊擊將軍) 진인(陳寅)이 역전(力戰)을 거듭하던 도중에 탄환을 맞았다. 이에 그 이듬해에 서울로 옮겨 병을 조섭하게 되었는데, 그가 자신이 묵고 있는 숭례문(崇禮門) 밖 산기슭에 사당을 건립하고 사당 중앙에 신상(神像)을 설치하여 관왕을 봉안하자 경리(經理) 양호(楊鎬) 이하가 각기 은자(銀子)를 내어 경비를 도왔고 우리나라에서도 은자를 내어 도왔으며, 사당이 준공된 뒤에는 주상(主上 선조를 말함)도 친히 가서 참관하였다. 그 신상은 소상(塑像 찰흙으로 만든 상)으로 되었고 좌우로 시립(侍立)한 두 장수의 소상은 대검(大劍)을 가졌는데, 그들은 관평(關平)과 주창(周倉)이라 한다. 사당 앞에는 두 개의 길다란 장대를 세우고 두 폭의 기(旗)를 달았는데, 한 폭에는 협천대제(協天大帝)라 쓰고 또 한폭에는 위진화하(威振華夏)라 썼다. 이때부터 명 나라의 여러 장수가 출입할 적마다 참배하면서 ‘조선국을 위하여 신조(神助)를 받아 왜적을 물리치기 바란다.’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5월 13일은 사당에서 대제(大祭)를 드린다고 하는데, 이날은 관왕의 생신인 것이다. 이날 따라 오전에는 일기가 청명하다가 오후에는 먹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큰 바람이 서북으로부터 불어오면서 천둥치고 폭우가 쏟아지자 여러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면서 ‘관왕의 신이 강림했다.’고 하였다. 그 뒤 경자년(1600)에 신종황제가 무신(撫臣 순무사(巡撫使)의 별칭) 만세덕(萬世德)에게 4천금을 교부하면서, 조선의 서울에 관왕묘를 건립하고 제사를 드리도록 하였으니, 이는 동정(東征)에 나온 명 나라의 여러 장병들이 모두 ‘평양의 승리와 도산(島山)의 싸움과 삼로(三路)에서 왜적을 몰아낼 때 관왕이 갑자기 현성(顯聖)하여 싸움을 도와 주었다.’고 말한 때문이었다. 이에 흥인문(興仁門) 밖 동편에 터를 정하고 대신(大臣)에게 공사 감독을 명하여 임인년(1602)에 비로소 준공되었는데, 다 중국 제도를 모방하였다. 이어 대제(大祭)를 드려 낙성식을 마치고 중국에 액자를 청하자, 칙건현령소덕관공지묘(勅建顯靈昭德關公之廟)로 사액(賜額)되었다.” 하였다. 그런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관왕의 신이 남쪽에서 나타났다가 동쪽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숭례문 밖에 있는 사당의 신상은 생상(生像)으로 만들고 흥인문 밖에 있는 사당의 신상은 사상(死像)으로 만들어 도금(鍍金)했다.” 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1A_0160_020_0060_2000_020_XML
Rec-2227 오주연문장전산고_경사5_인물_중국_03 null null 또 《춘관지》에, “강진 고금도(古今島)에 있는 관왕묘는 도독(都督) 진인(陳璘)이 건립, 숙종(肅宗) 9년(1683)에 개수(改修)하고 또 하나의 사당을 그 옆에 세워진 도독을 주위(主位)로, 이순신을 배위(配位)로 모셨고 남원에 있는 사당은 건립된 연대는 자세하지 못하나 숙종 43년(1717)에 중건(重建)하여 명 나라의 세 장수, 즉 이신방(李新芳)ㆍ장표(蔣表)ㆍ모승선(毛承先)을 배향(配享)시켰다.” 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1A_0160_020_0060_2000_020_XML
Rec-2228 오주연문장전산고_경사5_인물_중국_04 null null 나의 조부 형암공(炯庵公)의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에, “남원부(南原府) 서편에 관왕묘가 있는데, 신축년(1781) 봄에 금상(今上 정조(正祖)를 말함)이 탄보묘(誕報廟) 3자를 친히 써서 감서(監書)에게 싸 가지고 가서 현액(懸額)하도록 하였다. 임인년(1782) 가을에 내가 공행(公行 공무로 나가는 출장)으로 나왔다가 이곳 관왕묘를 참배하게 되었는데, 관왕의 목상(木像)이 매우 장대(壯大)한데다 금관(金冠)과 홍포(紅袍) 차림이었고 앞에는 두 장수가 시립(侍立)해 있었으며 정원(庭院)에 세워진 비(碑)에는 ‘만력(萬曆) 27년(1599)에 명 나라의 도독 유정(劉綎)이 창건했다.’ 하였으나 비는 거의 다 부스러지고, 비문(碑文)은 유정이 지었는데 문장이 너무 졸렬하고 글씨도 거칠었다. 안동(安東)에 있는 관왕묘는 만력 26년(1598)에 명 나라의 진정영 도사(眞定營都司) 설호신(薛虎臣)이 건립, 석상(石像)으로 되었고 오수정(烏水晶)으로 눈동자를 상감(象嵌)하였다. 성주(星州)에 있는 관왕묘는 만력 25년(1597)에 명 나라의 장수 모국기(茅國器)가 건립, 소상(塑像)으로 되었는데, 매우 영험스럽다.” 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1A_0160_020_0060_2000_020_XML
Rec-2229 오주연문장전산고_경사5_인물_중국_05 null null 또 나의 조부의 《한죽당섭필》에, “성주부(星州府) 서편에 관후묘(關侯廟)가 있는데, 금관(金冠)과 녹포(綠袍) 차림으로 교의 위에 올라앉아서 오른손에는 창(鎗)을, 왼손에는 검(劍)을 잡았고, 왼편에는 얼굴이 하얀 장수 하나가 걸터앉았고, 오른편에는 두 장수가 있는데, 한 장수는 두 손에 창과 철퇴를 잡았고 또 한 장수는 네개의 팔[臂]로 한 손에는 당파(钂鈀 세 갈래의 창과 쇠갈퀴)를 가졌으나 세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이들 두 장수는 다 붉은 얼굴에 노기(怒氣)를 띠었는데, 그 이름은 끝내 알 수 없다.” 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1A_0160_020_0060_2000_020_XML
Rec-2230 월사집_2권_무술조천록_상 null 才賦豪雄命賦奇 / 天時其奈與心違 / 英風萬古孤墳在 / 壯志平生一劍知 / 畢竟功名歸豎子 / 當時吳魏視嬰兒 / 江淮不盡傾遺憤 / 祠廟猶能讋九夷 호웅으로 태어났건만 운명이 기구해 / 천시가 그 마음과 어긋났음을 어이하리오 / 만고에 영웅 풍모 외로운 무덤으로 남았지만 / 평생에 장대한 뜻은 한 자루 검이 알았도다 / 필경에 공명은 소인놈에게 돌아갔으니 / 당시에 오와 위를 어린아이로 보았었지 / 강수와 회수로도 남은 분을 다 못 씻지만 / 사당은 오히려 구이를 삼가 복종케 하누나 월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82A_0030_010_0400_2012_001_XML
Rec-2231 월사집_55권_제문_상 null 烈烈惟王 / 式闡武功 / 神資拳勇 / 天挺豪雄 / 俎豆天下 / 萬古猶生 / 威震華夷 / 義徹幽明 / 一氣撑柱 / 炳然如日 / 逖矣偏邦 / 亦欽斯烈 / 幸沾神化 / 陟看新廟 / 瞻聆聳動 / 遠邇顚倒 / 燕頷虯鬚 / 森然若見 / 赤兔偃月 / 新回酣戰 / 願仗餘威 / 殱此兇酋 / 保祐東土 / 永賴冥庥 열렬한 관왕이여 / 烈烈惟王 실로 무공을 크게 떨쳤으니 / 式闡武功 그 타고난 용맹한 자품은 / 神資拳勇 하늘이 낸 빼어난 호걸이어라 / 天挺豪雄 그래서 온 천하에 제향되었으니 / 俎豆天下 만고에 길이 살아 계신 셈이라 / 萬古猶生 위엄은 화이를 두루 진동하였고 / 威震華夷 의리는 유명에 모두 관철했도다 / 義徹幽明 한 가닥 바른 기운을 지탱시켜 / 一氣撑柱 그 밝기가 마치 해와 같으니 / 炳然如日 아득히 멀고 외진 이 나라에서도 / 逖矣偏邦 그 빛나는 공렬을 공경하도다 / 亦欽斯烈 다행히 이제 그 신화를 입어 / 幸沾神化 새로 지은 사당을 보게 되었나니 / 𨺗看新廟 사람들의 이목이 깜짝 놀라고 / 瞻聆聳動 원근에서 허겁지겁 몰려오누나 / 遠邇顚倒 제비의 턱이요 규룡의 수염이라 / 燕頷虯鬚 실제로 풍모를 뵙는 듯하며 / 森然若見 타는 적토마와 쓰는 언월도는 / 赤兔偃月 막 전쟁터에서 돌아온 듯해라 / 新回酣戰 원컨대 관왕의 위엄에 의지하여 / 願仗餘威 이 흉악한 적의 괴수 죽여서 / 殱此兇酋 우리 동토를 보우하시고 / 保祐東土 길이 보살피는 은택 내려 주소서 / 永賴冥庥 월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82A_0560_010_0010_2012_007_XML
Rec-2232 월사집부록_2권_행장 null 關王廟初成。天將往奠。臨行。請上同奠。倉卒行出。奠須有文。乘輿已駕。請宣召知製敎。宣廟特命公製之。公承命立製以進。有鳳眼虯髥。森然若見。赤兔偃月。新回酣戰等句。宣廟大稱賞。賜錦段。 관왕묘(關王廟)가 처음 낙성되어 중국 장수가 제전(祭奠)을 올리러 가면서 출발할 즈음에야 상에게 함께 제전을 올릴 것을 청하였다. 상이 창졸간에 행행하게 되었는데 제전에는 제문이 있어야 했다. 승여(乘輿)를 대령한 상황에서 유사(有司)가 지제교(知製敎)를 불러올 것을 청하니, 선묘가 특명을 내려 공에게 짓도록 하였다. 이에 공이 명을 받아 즉시 지어 올렸는데, 그 글에 “봉황의 눈이요 규룡의 수염이라 실제로 풍모를 뵙는 듯하며, 타는 적토마와 쓰는 언월도는 막 전쟁터에서 돌아온 듯해라.〔鳳眼虯鬚 森然若見 赤兔偃月 新回酣戰〕” 등의 구절이 있었는데 선묘가 보고 크게 칭찬하며 비단을 상으로 내렸다. 월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82A_0660_000_0010_2012_008_XML
Rec-2233 월사집부록_3권_사장 null 戊戌。拜司憲府執義。擢拜承政院同副承旨。兼承文院副提調。關王廟成。天將請上同往。奠駕已辦。始命撰祭文。有司請召知製敎。上以命公立就以進。上大悅。命賜錦。 무술년(1598, 선조31)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었고,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발탁되고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대하였다. 관왕묘(關王廟)가 낙성되자 중국 장수가 상에게 함께 가서 제사를 올릴 것을 청하였다. 대가(大駕)가 출발할 준비가 다 된 때에 비로소 제문을 지어 올릴 것을 명하였다. 이에 유사(有司)가 지제교(知製敎)를 불러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공에게 그 일을 명하였다. 공이 그 자리에서 바로 지어 올리니 상이 매우 기뻐하며 비단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월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82A_0670_000_0010_2012_008_XML
Rec-2234 월사집부록_5권_비명 null 關王廟成。天將請上同祭。駕辦始具祭文。上不用當製詞臣。而命公製之。公方以該房掌飭鹵簿。聞命立就。詞甚稱旨。卽賜綵幣。改兵曹參知。自此眷遇日渥。每有賓禮。公必在御前。 관왕묘(關王廟)가 완성되자 중국 장수가 상에게 함께 제사 지내자고 청하였다. 어가(御駕)가 출발 준비를 다 마친 다음에야 비로소 제문(祭文)이 완성되었는데, 상께서 담당 사신(詞臣)의 제문을 쓰지 않고 공에게 명하여 새로 짓게 했던 것이다. 공은 그때 해당 방(房)에서 노부(鹵簿)를 담당하여 신칙하고 있다가 상의 명을 듣고 그 자리에서 제문을 지어 올렸는데 글이 성상의 뜻에 딱 맞았다. 이에 곧바로 비단을 하사받고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개차되었다. 이때부터 상의 총애가 날로 융숭해졌으며 중국 사람들을 접대할 일이 있을 때마다 공은 반드시 어전(御前)에 있었다. 월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82A_0690_000_0010_2016_009_XML
Rec-2235 월사집연보_1권_월사선생연보 null null 5월에 특명을 받아 〈관왕묘친제문(關王廟親祭文)〉을 지었다. 관왕묘가 막 완성되자 명나라 장수가 가서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는데, 출발할 때에 상에게 함께 제사를 지내자고 청하였다. 제사를 지내려면 제문이 필요하였으나 어가가 이미 출발할 시점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에게 특명을 내려 즉석에서 짓게 하자, 입으로 지어 올렸는데 ‘봉황의 눈과 규룡의 수염이여, 엄숙하여 뵙는 듯하네. 적토마와 언월도로, 막 격전 치르고 돌아오셨네.〔鳳眼虯髥 森然若見 赤兎偃月 新回酣戰〕’ 등의 구절이 있었다. 상이 매우 칭찬하고 비단을 하사하였다. 월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82A_0780_000_0010_2016_010_XML
Rec-2236 은대조례_예고_제향 null 廟、社爲大祀,景慕宮、南壇、星壇、先農壇、先蠶壇、雩祀壇、文廟、關王廟爲中祀,其餘諸享及朔、望、俗節爲小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은 대사(大祀)로 지내고, 경모궁(景慕宮), 남단(南壇), 성단(星壇), 선농단(先農壇), 선잠단(先蠶壇), 우사단(雩祀壇), 문묘(文廟), 관왕묘(關王廟)는 중사(中祀)로 지내며, 그 나머지의 제향(祭享)과 삭제(朔祭), 망제(望祭), 속절제(俗節祭)는 소사(小祀)로 지낸다. 은대조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6A_0050_000_0130_2014_001_XML
Rec-2237 은대조례_예고_작헌례 null 奠酌禮,關王廟、大院君祠宇,亦因特旨行。 관왕묘(關王廟)와 대원군(大院君)의 사우(祠宇)에도 임금의 특별 지시에 따라 전작례(奠酌禮)를 행한다. 은대조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6A_0050_000_0140_2014_001_XML
Rec-2238 은대조례_예고_봉심 null 皇壇、社稷、宗廟、永寧殿、永禧殿、景慕宮、各宮ㆍ廟、諸壇、諸山川、文廟、東ㆍ南關王廟、纛所、宣武祠及祈告祭、【告文。還安、祈晴、中霤、城隍、厲等祭否。○ 服色黑團領,國恤時,社稷外竝無揚。】 健元陵、健陵、仁陵、綏陵、景陵、睿陵、顯隆園、徽慶園忌辰祭,承旨進去,【用淺淡服,而局內陵、園一體奉審。○ 陵、園則每因特敎宗臣、閣臣、儒臣中進去。○ 遣大臣酌獻禮時,局內陵、園亦爲奉審。】 有奉審處慰安、告由祭,亦爲進去。【各陵、園、墓則否。】 황단(皇壇), 사직(社稷), 종묘(宗廟), 영녕전(永寧殿), 영희전(永禧殿), 경모궁(景慕宮), 각 궁(宮)ㆍ묘(廟), 여러 제단(祭壇)ㆍ산천(山川), 문묘(文廟), 동관왕묘(東關王廟), 남관왕묘(南關王廟), 둑소(纛所), 선무사(宣武祠)에 제사를 지낼 경우와 기고제(祈告祭)를 지낼 경우, 이들 제사를 지낼 때에는 고하는 글이 있다. 환안제(還安祭), 기청제(祈晴祭), 중류제(中霤祭), 성황제(城隍祭), 여제(厲祭) 등을 지낼 때에는 탈이 있는지를 살피지 않는다. 복장은 흑단령(黑團領)으로 마련하되, 국휼(國恤) 기간에는 사직에 제사를 지내는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흉배(胸背)를 달지 않은 흑단령으로 마련한다. 건원릉(健元陵), 건릉(健陵), 인릉(仁陵), 수릉(綏陵), 경릉(景陵), 예릉(睿陵), 현륭원(顯隆園), 휘경원(徽慶園)에 기신제(忌辰祭)를 지낼 경우에는 승지가 나아가고 천담복(淺淡服)을 착용하고, 같은 구역 안에 있는 능(陵)과 원(園)도 탈이 있는지를 함께 살핀다. 능과 원에는 매번 임금의 특별 하교에 따라 종신(宗臣), 각신(閣臣), 유신(儒臣) 중에서 나아간다. 대신을 보내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에는 같은 구역 안에 있는 능과 원도 탈이 있는지를 살피도록 한다. 탈이 있는지를 살폈던 곳에 위안제(慰安祭)와 고유제(告由祭)를 지낼 경우에도 승지가 탈이 있는지를 살피러 다시 나아간다. 각 능, 원, 묘에는 탈이 있는지를 살핀 뒤에 위안제나 고유제를 지내더라도 승지가 탈이 있는지를 살피러 다시 나아가지 않는다. 은대조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6A_0050_000_0210_2014_001_XML
Rec-2239 은대조례_부록_판부규식 null 社稷、宗廟、各陵ㆍ殿、肇慶廟祭文,書“奉敎 【敎字高一字】 敬依”;景慕宮、顯隆園,“奉敎恭依”;文廟、關王廟、各宮ㆍ廟ㆍ園ㆍ墓及諸臣致祭文與敎書,“奉敎可”,竝書長銜。 사직(社稷), 종묘(宗廟), 각 능(陵)ㆍ전(殿), 조경묘(肇慶廟)의 제문(祭文)에 대한 판부는 ‘삼가 아뢴 대로 하겠다는 하교를 받듦.〔奉敎敬依〕’이라고 쓴다. ‘교(敎)’ 자는 1자를 높여서 쓴다. 경모궁(景慕宮)과 현륭원(顯隆園)의 제문에 대한 판부는 ‘삼가 아뢴 대로 하겠다는 하교를 받듦.〔奉敎恭依〕’이라고 쓴다. 문묘(文廟), 관왕묘(關王廟), 각 궁(宮)ㆍ묘(廟)ㆍ원(園)ㆍ묘(墓)의 제문 및 신하들의 치제문(致祭文)과 교서(敎書)에 대한 판부는 ‘승낙한다는 하교를 받듦.〔奉敎可〕’이라고 쓴다. 모두 장함을 쓴다. 은대조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6A_0090_000_0030_2014_001_XML
Rec-2240 응천일록_6권_1632_1006 16321006 初六日罷漏後。延光門外望哭。靈轝至關王廟後。百官分東西班。序立路左。望靈轝之來。行四拜禮。先導詣魂殿。到禮曹前大路祗迎。百官參初虞祭望哭後。百官奉慰問安答曰罔極。 파루(罷漏) 후에 연광문(延光門) 밖에서 망곡(望哭)하였다. 영여(靈與)가 관왕묘(關王廟)에 도착한 후에, 백관이 동ㆍ서반으로 갈라 길옆에 차례로 서서 영여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선도(先導)는 혼전(魂殿)에 나아갔고, 예조 앞 큰 길에 와서 지영하였다. 백관이 초우제(初虞祭)에 참석하였다. 망곡한 후에 백관이 위로 문안을 하니, 망극하다고 답하였다. 응천일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37A_0060_000_0010_2002_012_XML
Rec-2241 임하필기_13권_문헌지장_묘우사당 null null 남관왕묘(南關王廟)는 선조 31년(1598)에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이 세웠으며, 동관왕묘(東關王廟)는 명나라가 무신(撫臣 순무(巡撫)의 임무를 맡은 신하) 만세덕(萬世德)에게 명해서 세웠다. 선무사(宣武祠)는 선조 31년에 세웠는데 세상에서 이를 생사당(生祠堂)이라고 칭하는바 명나라의 병부 상서 형개(邢玠)를 제사하는 사당으로 어필로 게판(揭板)하였으며, 37년(1604)에는 명나라의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병향(幷享)하였다. 임하필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32A_0160_010_1240_2007_003_XML
Rec-2242 임하필기_16권_문헌지장_관왕묘 null null 선조 31년(1598)에 숭례문(崇禮門) 밖에 관왕묘를 창건하고 한(漢)나라 수정후(壽亭侯) 증(贈) 무안왕(武安王) 관우(關羽)를 제향하였는데, 예조의 낭관 허균(許筠)이 묘정비(廟庭碑)를 지어 올렸다. 이에 심희수(沈喜壽)가 아뢰기를, “이번 이 관왕묘의 건립은 사실 황제의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비문을 지은 자의 벼슬이 미약하니, 황상께서 듣는다면 너무 소홀하다는 혐의가 있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여, 결국 세우지 않고 말았다. 35년(1602)에 또 흥인문(興仁門) 밖에 이를 창건하고 중국에 사액(賜額)을 청하였는데, 황제가 이를 ‘칙건현령소덕관공지묘(勅建顯靈昭德關公之廟)’로 제방(題牓)하라고 하였다. 숙종 18년(1692)에 상이 스스로 두 수의 시를 지어 어필(御筆)로 써서 현판에 새겨 나누어 걸었으며, 22년(1696)에는 친히 ‘현령소덕왕묘(顯靈昭德王廟)’라는 여섯 글자를 써서 나누어 걸었다. 관왕묘는 강진현(康津縣)의 고금도(古今島)에도 있는데, 선조 30년(1597)에 명나라의 도독(都督) 진린(陳璘)이 창건한 것으로 숙종 10년(1684)에 다시 개수(改修)하였으며, 그 옆에 따로 사당 하나를 세워서 도독 진린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여기에 배향(配享)하였다. 또 안동부(安東府)에도 있는데 선조 31년에 명나라의 진정영 도사(眞定營都司) 설호신(薛虎臣)이 창건한 것으로 석상(石像)을 봉안하였다. 처음에는 부성(府城)의 성문 안에 있는 북산(北山) 정상에 있었는바 돌로 비석까지 세우고 동정(東征)의 전역(戰役)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병오년(1606, 선조39)에 서악(西嶽)의 동대(東臺)로 옮겨 봉안하였다. 또 성주목(星州牧)에도 있는데, 선조 30년(1597)에 명나라 장수 모국기(茅國器)가 창건한 것으로 소상(塑像)이 있어서 매우 영이(靈異)함을 나타낸다. 처음에는 주성(州城) 동문 밖에 있었는데 영종 3년(1727)에 남정(南亭) 아래로 옮겨 세웠다. 또 남원부(南原府) 부성의 서문(西門) 밖에도 있는데, 선조 기해년(1599, 선조32) 연간에 명나라의 도독 유정(劉綎)이 창건한 것으로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숙종 42년(1716)에 다시 고쳐 짓고 명나라의 이신방(李新芳), 장표(蔣表), 모승선(毛承先)을 배향하였으며, 또 따로 사당 하나를 세우고 유 도독(劉都督)을 제사 지낸다. 각도(各道)에 있는 사당들의 제사 의식은 선무사(宣武祠)의 예에 따라서 매년 경칩(驚蟄)과 상강(霜降)에 향축(香祝)을 내려 보내면 본도(本道)에서 제사를 지낸다. 임하필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32A_0190_010_0440_2007_003_XML
Rec-2243 임하필기_28권_춘명일사_01 null null 훈련원 정은 무직(武職) 중의 준망(峻望)이니, 음직(蔭職)의 정(正)과 같다. 문신이 이 직함을 거치면 서반(西班)의 작위도 구애받지 않고 될 수 있었으니, 옛 법규가 그러하였고 그 비중이 장천(將薦)에 비할 정도였다. 그 규례가 근래에는 폐지되었다. 다만 관왕묘(關王廟)에 전작례(奠酌禮)를 거행할 때에 문신을 차출하여 대축(大祝)의 일을 행하게 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임하필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32A_0310_010_0240_2007_006_XML
Rec-2244 임하필기_28권_춘명일사_02 null null 헌묘(憲廟) 병오년(1846, 헌종12)에 내영(內營)을 설치할 적에 우란(友蘭) 서희순(徐憙淳)이 총위사(摠衛使)가 되었으니, 이는 문신이 장수에 임명된 것이다. 하루는 관왕묘(關王廟)의 가을 제사를 지내게 되어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장신(將臣)을 모두 제관(祭官)으로 차출하였는데, 상이 서공(徐公)의 직함을 더욱 빛내기 위하여 특별히 두 영(營)을 겸관(兼管)하도록 명하였으므로 세 곳의 수기(手旗)를 일시에 모두 관장하게 되니, 보는 자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임하필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32A_0310_010_0560_2007_006_XML
Rec-2245 잠곡유고_14권_녹_1636_1106 16361106 關王廟謂之勑封三界伏魔大帝廟。無處不有。又有玉皇廟,玄帝廟,碧霞君廟,天妃聖母廟,西王母廟,火神廟,馬神廟,馬明王廟,泰山行宮三官廟等。名號不可勝記。皆a086_274a以金字扁額。過者入則必拜。無貴賤皆然。 관왕묘(關王廟)는 ‘칙봉삼계복마대제묘(勅封三界伏魔大帝廟)’라고 하였는데, 어디에나 다 있었다. 또 옥황묘(玉皇廟), 현제묘(玄帝廟), 벽하군묘(碧霞君廟), 천비성모묘(天妃聖母廟), 서왕모묘(西王母廟), 화신묘(火神廟), 마신묘(馬神廟), 마명왕묘(馬明王廟), 태산행궁(泰山行宮), 삼관묘(三官廟) 등 명칭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조차도 없이 많은데, 모두 금자(金字)로 현판을 달았다. 지나가는 행인도 들어가면 반드시 절하였는데, 귀천을 따질 것 없이 모두 그러하였다. 잠곡유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22A_0150_010_0020_2002_003_XML
Rec-2246 조경일록_1636_1106 16361106 關王廟謂之勑封三界伏魔大帝廟。無處不有。又有玉皇廟,玄帝廟,碧霞君廟,天妃聖母廟,西王母廟,火神廟,馬神廟,馬明王廟,泰山行宮三官廟等。名號不可勝記。皆a086_274a以金字扁額。過者入則必拜。無貴賤皆然。 관왕묘(關王廟)는 ‘칙봉삼계복마대제묘(勅封三界伏魔大帝廟)’라고 하였는데, 어디에나 다 있었다. 또 옥황묘(玉皇廟), 현제묘(玄帝廟), 벽하군묘(碧霞君廟), 천비성모묘(天妃聖母廟), 서왕모묘(西王母廟), 화신묘(火神廟), 마신묘(馬神廟), 마명왕묘(馬明王廟), 태산행궁(泰山行宮), 삼관묘(三官廟) 등 명칭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조차도 없이 많은데, 모두 금자(金字)로 현판을 달았다. 지나가는 행인도 들어가면 반드시 절하였는데, 귀천을 따질 것 없이 모두 그러하였다. 조경일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5A_0010_060_0040_2004_002_XML
Rec-2247 조천기_상_1574_0628 15740628 余等由安定門。歷濟美,進士等門。尙書里大中丞奎光,按臨,總會三門。出西門。過關王廟。廟宇壯麗嚴邃。中有蒼松鬱然。遼左絶無松柏。獨此廟有之。故關廟靑松。入於遼陽八景云。可見其貴也。 우리들은 안정문(安定門)을 거쳐 제미(濟美)ㆍ진사(進士) 등의 문과 상서리(尙書里) 대중승(大中丞)의 규광(奎光), 안림(按臨), 총회(總會) 등의 3문을 지나서 서문(西門)을 벗어나 관왕묘(關王廟)를 지났는데, 관왕묘는 장엄하고도 그윽하였으며, 가운데는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였다. 요좌(遼左)에는 송백(松柏)이 없었는데, 유독 이 관왕묘에만 있는 까닭에 관왕묘[關廟]의 푸른 소나무[靑松]가 요양(遼陽)의 8경(景)에 든다고 하였으니, 그 귀한 것을 볼 수 있다. 조천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1A_0020_020_0280_2004_001_XML
Rec-2248 조천기_중_1574_0716 15740716 河上有關王廟。歷杏林千戶所城。城一名中後所。道邊有前屯衛杏林堡遊營忠義叢塚碑記。隆慶壬申。遊擊將軍楊燮立。碑陰開錄陣亡者六十八員名。 하수 위에는 관왕묘(關王廟)가 있었고 행림천호소성(杏林千戶所城)을 지났다. 성의 또 다른 이름은 중후소(中後所)라고 하였으며, 길가에는 ‘전둔위행림보 유영충의총비(前屯衛杏林堡遊營忠義塚碑)’가 있는데 융경(隆慶) 임신년(1572)에 유격장군(遊擊將軍) 양섭(楊燮)이 세운 비이며 음각(陰刻)으로 적진에서 죽은 68명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조천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1A_0030_010_0160_2004_001_XML
Rec-2249 조천기_중_1574_0727 15740727 午後。過梁家店城。由保障門。出自寧靜門。又過五里橋,攤船河,漢陽公雍伯種玉碑。碑在嘉靖十四年知縣麻强建。縣之得名以此。事載太平廣記。其說極無謂。歷關王廟。至玉田縣東門。門外有東門橋。城下有創建東門橋記碑。穿城中歷淨業寺,三官廟,光啓門,大方伯門,鵬鶚高摶門,文廟。縣雖小而人居富密。又出自西門。入于陽樊驛。驛中有新遷驛記碑。嘉靖三年。按察副使熊相撰。 오후에는 양가점(梁家店)의 성(城)을 지나 보장문(保障門)을 거쳤고 영정문(寧靜門)으로부터 나갔다. 또한 오리교(五里橋)ㆍ탄선하(攤船河)를 지나자 한양공(漢陽公) 옹백(雍伯)이 종옥비(種玉碑)를 세워 놓았는데, 그것은 가정(嘉靖) 14년(1535)에 지현(知縣) 마강(麻强)이 세웠으며, 현의 이름은 이 일로 해서 얻어졌다. 이 일은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실려 있는데 그 말은 극히 이를 것이 없었다. 관왕묘(關王廟)를 거쳐 옥전현(玉田縣) 동문(東門)에 이르렀는데 문밖에는 동문교(東門橋)가 있었고, 성 아래에는 새로 세운 동문교기비(東門橋記碑)가 있었다. 성안을 지나서 정업사(淨業寺), 삼관묘(三官廟), 광계문(光啓門), 대방백문(大方伯門), 붕악고박문(鵬鶚高搏門), 문묘(文廟)를 지났다. 고을은 비록 작았으나 사람 사는 것은 부유하고 밀집하여 있었다. 그리고 서문(西門)으로부터 벗어나서 양반역(陽樊驛)으로 들어가니, 역 가운데에 신천역기비(新遷驛記碑)가 있었는데, 가정(嘉靖) 3년(1524)에 안찰 부사(按察副使) 웅상(熊相)이 지은 것이었다. 조천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1A_0030_010_0270_2004_001_XML
Rec-2250 조천기_중_1574_0801 15740801 午後。又過公樂店,關王廟,東嶺急遞鋪。渡草河過草橋店。至三河縣三河驛。驛門外有修驛碑銘幷序。巡撫都御史李貢撰。中廳扁曰皇華堂。左右豎碑各一。皆記重修之事。一嘉靖戊申。戶部主事周俶撰。一嘉靖丙寅。南京戶部郞中致仕喬伊撰。大廳揭額駐節二篆。 오후에는 공락점(公樂店)의 관왕묘(關王廟)와 동령(東嶺)의 급체포(急遞鋪)를 지나서 초하(草河)를 건넜고, 초교점(草橋店)을 지나서 삼하현(三河縣)의 삼하역에 이르렀다. 역문 밖에는 역을 보수한 비명(碑銘)과 서문(序文)이 있는데 순무도 어사(巡撫都御史) 이공(李貢)이 지은 것이었고, 중청(中廳)의 편액에는 이르기를 황화당(皇華堂)이라고 하였으며, 좌우에는 각각 비 하나씩을 세웠는데 모두 중수(重修)한 일을 기록해 놓았다. 하나는 가정(嘉靖) 무신년(1548, 명종 3)에 호부 주사(戶部主事) 주숙(周俶)이 지었고, 하나는 가정(嘉靖) 병인년(1566, 명종 21)에 남경(南京)의 호부 낭중(戶部郞中)으로 치사(致仕)한 교이(喬伊)가 지었으며, 대청에는 ‘주절(駐節)’이란 전서(篆書)로 쓴 두 액자를 걸어 놓았다. 조천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1A_0030_020_0010_2004_001_XML
Rec-2251 청음집_25권_비명_이정귀신도비명 null 遷司憲府執義。擢同副承旨。上疏力辭不許。大臣破格請兼承文院副提調。關王廟成。天將請上同祭。駕辦始具祭文。上不用當製詞臣。而命公製之。公方以該房掌飭鹵簿。聞命立就。詞甚稱旨。卽賜綵幣。改兵曹參知。自此眷遇日渥。每有賓禮。公必在御前。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옮겨졌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는데, 상소를 올려 극력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이 격례(格例)를 깨뜨리고서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임시키기를 청하였다. 관왕묘(關王廟)가 완성되어 중국 장수가 상에게 함께 제사 지내자고 청하였다. 어가(御駕)가 출발 준비를 다 마친 다음에 비로소 제문(祭文)이 갖추어졌는데, 상께서 제문을 담당한 사신(詞臣)의 제문을 쓰지 않고 공에게 명하여 새로 짓게 하였다. 공은 그때 해당 방(房)에서 노부(鹵簿)를 관장하여 신칙하고 있다가 상의 명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제문을 지어 올렸는데, 글이 매우 성상의 뜻에 맞았다. 이에 곧바로 비단을 하사하였으며,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개차하였다. 이로부터 상의 총애가 날로 융성해졌으며 중국 사람들을 접대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공에게 반드시 어전(御前)에 있게 하였다. 청음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99A_0260_010_0010_2008_005_XML
Rec-2252 청장관전서_간본_아정유고5_나통어사일사장 null null 공의 성품은 간묵(簡黙)하고 강직하며 몸가짐이 장엄하였다. 구차히 용납하기를 부끄러워하며, 언의(言議)는 높고 엄격하였다. 온갖 비방이 엉클어져 일어나되 조금도 숙이는 태도가 없으며, 일을 요량하여 움직일 적에는 마치 신(神)과 같았다. 용골대가 우리나라에 와 관에 머물고 있을 때, 하루는 용골대가 말을 달려 없어져 버리므로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공이 급히 병조 판서 김시양(金時讓)을 찾아가 보고, 지공자(支供者)로 하여금 빨리 동관왕묘(東關王廟)로 가 기다리게 하고 말하기를, “이 오랑캐놈이 필시 남몰래 남한산성을 정탐하려는 심산일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올 때 에는 반드시 동관왕묘에 들러 잠시 쉴 것이니, 우리가 먼저 동관왕묘에 나가 기다리다가 영접하게 되면, 저 오랑캐가 감히 우리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과연 공의 말과 같았고 용골대는 몹시 무안해 하였다. 공이 왕왕 이와 같이 기이한 계책을 내었다. 청장관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7A_0200_010_0030_2000_004_XML
Rec-2253 청장관전서_56권_양엽기3_주허후 null null 성양경왕(城陽景王)은 바로 한(漢) 나라의 종실(宗室) 주허후(朱虛侯) 장(章)이다. 《풍속통(風俗通)》 에, “낭야(琅邪)ㆍ청주(靑州)ㆍ육군(六郡)으로부터 발해(渤海)에 이르기까지 모두 유장(劉章)을 위하여 사당을 세웠는데, 다만 낙안태수(樂安太守) 진번(陳藩)과 제남상(濟南相) 조조(曹操)는 이런 일을 모두 금지했으나 그 후에 차츰 전과 같이 회복하였다.” 하였다.《오잡조(五雜組)》 에는, “당(唐) 나라 이전에는 주허후 유장을 높이 받들어 집집마다 사당을 세우고, 호호마다 지금의 관왕(關王)에게 빌 듯 복을 빌었다 한다. 그러나 장목왕(壯繆王)이 일어나면서부터 주허후의 신(神)은 또 어디로 갔는가? 지금 세상에 숭봉(崇奉)하는 정신(正神)으로는 관음대사(觀音大師)ㆍ진무상제(眞武上帝)ㆍ벽하원군(碧霞元君) 셋이 있어 관장목(關壯繆)과 더불어 향화(香火)를 동일하게 받고 있다. 그러므로 부녀자(婦女子)들은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에 대하여 말을 하면 혹 알지 못하나, 사신(四神)만은 공경히 믿으며 감히 마음속으로 그르게 여겨 거리에서 비난하는 사람이 없으니 또한 천지(天地)와 더불어 길이 존재할 것이다.” 하고, 또, “관왕(關王)은 당(唐) 나라 이전에는 소문이 있지 않았는데 송(宋) 나라에 이르러 염지(鹽池)의 일로 인해 마침내 영험이 나타났다.” 하였다. 덕무(德懋)는 생각하건대, 신(神)은 스스로 영험한 것이 아니요 사람의 마음을 의지하여, 따라서 성하고 쇠하는 것이니, 지성(至誠)이 독실(篤實)하면 이치가 갖추어지고 형세가 중하면 기(氣)가 응한다고 본다. 한(漢) 나라로부터 당(唐) 나라에 이르기까지는 주허후를 집집마다 경건하게 받들었으니 자연 오늘날 관왕(關王)과 같이 영험이 있었을 것인데 전기(傳記)로는 상고할 수가 없다. 그러나 주허후의 쇠퇴는 인심이 또한 해이(解弛)해짐에 따라 신도 영험이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관왕묘(關王廟)가 처음 왕성할 때에는 공사(公私) 간에 경건히 받드는 사람이 해마다 늘어나고 날마다 보태어졌으니 그 영험의 보응(報應)을 확실하게 근거할 만한 것들이 이따금 있었다. 그러나 가령 몇 백 년 뒤에 경건히 받든 사람들이 쇠퇴해지면 신도(神道)도 끝나고 또 그 뒤를 이어 일어나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그 예로는 악무목(岳武穆)과 같은 유로써 영험(靈驗)이 관왕보다 못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씨(李氏)의《사설(僿設)》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축윤명(祝允明)의 관왕묘기(關王廟記)에 ‘송(宋) 나라 때에는 무안왕(武安王)으로 추봉(追封)하고 묘호(廟號)를 의용(義勇)이라 하였다. 그리고 도가(道家)에서도 그를 높여 신군(神君)으로 삼았다.’ 하였는데, 무엇이 청정무위(淸淨無爲)한 도가에 관계되기에 숭상하여 신봉함이 여기에 이르렀는가? 생각건대, 수련(修鍊)의 술법은 반드시 귀매(鬼魅)를 몰아내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 뜻으로 볼 때 명(明)나라에서 복마왕(伏魔王)으로 추봉한 것이 바로 그 사실이다. 서국(西國) 주종원(朱宗元)의 말이 가장 실지에 맞는다. 그는 ‘명 나라의 복마란 마귀를 구제했기 때문이다. 마귀의 성품은 본디 제 몸을 떠받들게 하고자 하는 것이므로 옛 선비의 명목(名目)을 가탁하여 나타나서 신이(神異)를 부려 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러보게 하는 것이고, 참으로 관우(關羽)의 신(神)이 있어서 이와 같은 것이 아니다.’ 했다.” 청장관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7A_0560_010_0070_2000_009_XML
Rec-2254 청장관전서_68권_한죽당섭필_상_탄보묘 null null 남원(南原)의 부성(府城) 서쪽에 관왕묘(關王廟)가 있다. 그런데 신축년(1781, 정조 5) 봄에 금상(今上 정조)께서 어필(御筆)로 탄보묘(誕報廟) 3자를 써서 감서(監書)에게 명하여 가지고 가 걸어 놓게 하였다. 임인년(1782, 정조 6) 가을, 내가 사근역(沙斤驛)에 부임하던 길에 관왕묘에 들러 배알하였다. 관왕의 목상(木像)이 매우 장대한데 금관(金冠)을 쓰고 홍포(紅袍)를 입었고 앞에는 두 장수가 시립(侍立)하고 있었다. 사당의 뜰에 비(碑)가 있는데 만력(萬曆) 기해년(1599, 선조 32)에 도독(都督) 유정(劉綎)이 세운 것으로 비가 다 깎이고 떨어져나갔다. 비문도 유정이 지은 것인데 말이 매우 졸렬하고 거칠다. 청장관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7A_0680_010_0020_2000_012_XML
Rec-2255 포저집_34권_행장_문충이공행장 null 關王廟初成。天將往奠。臨行。請上同奠。倉卒行出。奠須有文。乘輿已駕。請宣召知製敎。宣廟特命公製之。公承命立製以進。有鳳眼虯髥。森然若見。赤兔偃月。新回酣戰等句。宣廟大稱賞。賜錦段。其後親祭楊遊擊祭文及答經理揭帖。皆命公製進。輒賜錦段。 관왕묘(關王廟)가 낙성되자 중국 장수가 제사를 올리러 가면서 출발할 즈음에야 상에게 함께 제사를 올리자고 청하였으므로 상이 창졸간에 행행하게 되었다. 여기에 필요한 제문(祭文)을 마련해야 했는데, 승여(乘輿)에 이미 멍에를 멘 상태에서 유사(有司)가 지제교(知製敎)를 불러올 것을 청하니, 선묘가 특명을 내려 공에게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에 공이 명을 받들어 그 즉시로 지어 올렸는데, 그 내용 중에 “봉황 같은 눈에 용 같은 수염의 그 모습, 지금도 삼연히 눈에 보이는 듯한데, 적토마 타고 언월도 들고서, 지금 막 격전 치르고 돌아오셨네.〔鳳眼虯髥 森然若見 赤兎偃月 新回酣戰〕”라는 등의 구절이 있었다. 선묘가 이 제문을 보고는 크게 칭찬하며 비단을 상으로 내렸다. 그 뒤에 상이 양 유격(楊遊擊)을 친히 제사 지낼 때의 제문과 경리(經理)에게 답하는 게첩(揭帖)도 모두 공에게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는데, 그때마다 비단을 하사하였다. 포저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21A_0340_010_0010_2007_006_XML
Rec-2256 표해록(최부)_2권_1488_0319 14880319 過良店驛。是日晴。早發過皮口鋪,高家鳳鋪。至吳橋縣地方。又過羅家口,高官廠等鋪,關王廟。至濟南府地方良店驛。又過桑園兒,薄皮口鋪,狼家口鋪,郭家口鋪,舊連窩鋪。至連窩驛。又至連窩遞運所而泊。 양점역(良店驛)을 지났음. 이날은 맑았습니다. 일찍 출발, 피구포(皮口鋪)ㆍ고가봉포(高家鳳鋪)를 지나서 오교현(吳橋縣) 지방에 이르고, 또 나가구(羅家口)ㆍ고관창(高官廠) 등 포(鋪)와 관왕묘(關王廟)를 지나서 제남부(濟南府) 지방의 양점역(良店驛)에 이르고, 또 상원아(桑園兒) 박피구포(薄皮口鋪)ㆍ낭가구포(狼家口鋪)ㆍ곽가구포(郭家口鋪)ㆍ구련와포(舊連窩鋪)를 지나서 연와역(連窩驛)에 이르고, 또 연와 체운소(連窩遞運所)에 이르러 숙박했습니다. 표해록_최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0A_0020_020_0190_2004_003_XML
Rec-2257 표해록(최부)_3권_1488_0504 14880504 至撫寧衛。是日晴。過東關遞運所。至驢槽河。河之北岸。有大石如槽。號爲石槽。諺傳唐張果飼驢之器。又過國家鋪,十八里鋪,雙望鋪,儀院嶺鋪,蘆峯口鋪,鋪。至陽河。河源出列陀山。經撫寧縣城西八里許。又過民壯敎場門。入撫寧縣城西門。過關王廟。寓于撫寧衛。兔耳,鏵子,大崇,連峯諸山。圍城之南北。治西有西關遞運所。 무령위(撫寧衛)에 이르렀음. 이날은 맑았습니다. 동관 체운소(東關遞運所)를 지나서 여조하(驢槽河)에 이르렀는데, 노조하의 북쪽 언덕에는 구유[槽] 같은 큰 돌이 있는데, 석조(石槽 돌구유)라 호칭하였습니다. 시속에서 전하기를, 당 나라 장과(張果)가 당나귀를 먹이던 그릇이라고 합니다. 또 국가포(國家鋪)ㆍ십팔리포(十八里鋪)ㆍ쌍망포(雙望鋪)ㆍ의원령포(儀院嶺鋪)ㆍ노봉구포(蘆峯口鋪)ㆍ녹궁포(鋪)를 지나서 양하(陽河)에 이르니, 양하의 근원은 열타산(列陀山)에서 나왔습니다. 무령현성(撫寧縣城) 서쪽을 8리 가량 지나고 또 민장교장문(民壯敎場門)을 거쳐서 무령현성의 서문에 들러 관왕묘(關王廟)를 지나서 무령위(撫寧衛)에 유숙했습니다. 토이산(兎耳山)ㆍ화자산(鏵子山)ㆍ대숭연봉(大崇連峯) 등 여러 산들이 성 남북에 둘러싸 있었습니다. 치소(治所)의 서쪽에 서관 체운소(西關遞運所)가 있었습니다. 표해록_최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0A_0030_030_0040_2004_003_XML
Rec-2258 표해록(최부)_3권_1488_0523 14880523 至遼陽驛。是日陰而雷。自驛傍衛城而西而北而東。過遞運所,土河鋪,甘泉鋪,關王廟。至鞍山驛。驛之東有遼高山。西有遼下山。又過武安王廟,長占鋪。至沙河鋪。有二水俱帶于鋪之東西。名皆沙河。蓋自通州以來。地多沙土。故水以沙河得名者多。又過首山鋪。至遞運所城。城卽八里莊也。過接官亭。至遼陽在城驛。驛在遼東城西。 요양역(遼陽驛)에 이르렀음. 이날은 흐렸다가 천둥이 쳤습니다. 요양역 곁의 위성(衛城)에서 서쪽으로, 또 북쪽으로 해서 또 동쪽으로 가서 체운소(遞運所)ㆍ토하포(土河鋪)ㆍ감천포(甘泉鋪)ㆍ관왕묘(關王廟)를 지나 안산역(鞍山驛)에 이르니, 안산역의 동쪽에는 요고산(遼高山)이 있고, 서쪽에는 요하산(遼下山)이 있었습니다. 또 무안왕묘(武安王廟)ㆍ장점포(長店鋪)를 지나서 사하포(沙河鋪)에 이르니, 두 강물이 모두 포(鋪 우정(郵亭))의 동쪽과 서쪽을 둘러 있는 까닭으로 명칭을 모두 ‘사하(沙河)’라고 한 것입니다. 대개 통주(通州)로부터 땅이 사토가 많은 까닭에 강물이 ‘사하’란 명칭을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또 수산포(首山鋪)를 지나서 체운소성(遞運所城)에 이르니, 체운소성은 곧 팔리장(八里莊)이었습니다. 접관정(接官亭)을 지나서 요양 재성역에 이르니, 요양 재성역은 요동성의 서쪽에 있었습니다. 표해록_최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0A_0030_030_0230_2004_003_XML
Rec-2259 표해록(최부)_3권_1488_0529 14880529 自遼東登程。是日晴。吳壐與千戶田福偕至驛。引臣等行。出驛城東門外。不一里。乃遼東城也。兩城間有關王廟。行過兀良哈館,泰和門,安定門。至我朝鮮館。館前立標。扁畏天保國四字。又過石河兒。入高麗洞。過大石門嶺,小石門嶺。兩嶺間有王都督墓。又過柳河兒,湯河兒,頭巾站,狼子山。至顯得寨里而歇。里有三四家。乘昏。里人偸去臣之帽匣。匣中藏紗帽囊佩及江南人所贈詩藁。程保告于壐。訊里人索之不得。壐謂臣曰。慢藏誨盜。尙誰咎乎。 요동에서 길을 떠났음. 이날은 맑았습니다. 오새가 천호(千戶) 전복(田福)과 함께 역에 이르러 신 등을 인도해 역성(驛城) 동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거리는 1리가 채 되지 못했는데, 곧 요동성이 있었습니다. 두 성(城 역성과 요동성) 사이에 관왕묘(關王廟)가 있었습니다. 가다가 올량합관(兀良哈館)ㆍ태화문(泰和門)ㆍ안정문(安定門)을 지나서 우리 조선관(朝鮮館)에 이르니, 조선관 앞에 푯말을 세워 ‘외천보국(畏天保國)’이란 네 글자를 써 놓았습니다. 또 석하아(石河兒)를 지나서 고려동(高麗洞)으로 들어와 대석문령(大石門嶺)과 소석문령(小石門嶺)을 지나니, 두 영 사이에 왕 도독(王都督)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또 유하아(柳河兒)ㆍ탕하아(湯河兒)ㆍ두건참(頭巾站)ㆍ낭자산(狼子山)을 지나서 현득채리(顯得寨里)에 이르러 쉬었습니다. 마을에는 3, 4집이 있었는데, 황혼(黃昏)을 이용하여 마을 사람이 신의 모자갑[帽匣]을 훔쳐 갔습니다. 모자갑 속에는 사모(紗帽)ㆍ낭패(囊佩)와 강남 사람이 지어 준 시고(詩藁)를 간직해 두었으므로, 정보가 오새에게 알려서 마을 사람을 신문(訊問)하여 이를 찾으려고 했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오새가 신에게 이르기를, “소홀히 간수하는 것은 도적에게 도적질하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으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표해록_최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10A_0030_030_0290_2004_003_XML
Rec-2260 학봉전집_학봉속집_1권_시_조천기행 null 關王一廟遍天下。金碧處處侈華楹。堂堂義烈感人心。濊時籩豆豐粢盛。 관왕묘는 온 천하에 두루두루 널려 있어 / 關王一廟遍天下 곳곳마다 금빛 단청 기둥이 화려하네 / 金碧處處侈華楹 당당한 그 의열은 사람들 맘 감동케 해 / 堂堂義烈感人心 세시마다 제기에는 제수가 풍성하네 / 歲時籩豆豐粢盛 학봉전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10A_0110_010_1400_2004_002_XML
Rec-2261 학봉전집_학봉일고_1권_시_무안왕묘 null 一介奇男子 千秋萬世名 荊門張虎旅 關北振風聲 未馘鄴中賊 先班漢上兵 身殲義益烈 此外更何營 東都淪喪日 西土中興時 虎躍邦猶倚 人亡事可知 英雄千載恨 籩豆百年儀 彷彿威靈在 天風颯古祠 한 사람의 기이한 남자 있어서 / 一介奇男子 천추토록 만세토록 이름 전하네 / 千秋萬世名 형주에서 용맹한 군대 펼쳤고 / 荊門張虎旅 관북에서 명성 크게 떨치었어라 / 關北振風聲 업중의 도적 미처 베기도 전에 / 未馘鄴中賊 한수(漢水) 가서 군사 먼저 되돌리었네 / 先班漢上兵 몸 죽어서 의기 더욱 불타오르니 / 身殲義益烈 이 이외에 무얼 다시 더 구하리요 / 此外更何營 동도가 몰락하여 가던 그날은 / 東都淪喪日 서토가 중흥하던 바로 그때네 / 西土中興時 범이 뛰자 나라 그에 의지했으니 / 虎躍邦猶倚 죽은 뒤엔 일을 가히 알 수 있어라 / 人亡事可知 영웅은 천 년토록 한 품었는데 / 英雄千載恨 제기에다 백 년토록 의식 올리네 / 籩豆百年儀 위령께서 마치 앞에 계신 듯하여 / 彷彿威靈在 하늘 바람 옛 사당에 소슬히 부네 / 天風颯古祠 학봉전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10A_0210_010_1360_2004_004_XML
Rec-2262 해사록(김세렴)_1636_0811 16360811 出往南關王廟。內乘辛 宗述 先待。朴參判 𥶇 吳全州 端 黃文學 一皓 隨至。俄而上使至。正郞趙 錫胤 修撰李 裯 安邊府使李 基祚 京畿監司尹 履之 都承旨金 慶徵 綾城府院君具宏 東陽尉申 翊聖 來會。畿伯設酌。東陽尉曰。今此萬里行役。何送客落落歟。 대궐을 나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갔는데, 내승(內乘) 신종술(辛宗述)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참판박로(朴𥶇)ㆍ오 전주 단(吳全州端)ㆍ문학(文學) 황일호(黃一皓)가 뒤따라 이르고, 조금 뒤에 상사가 이르렀다. 정랑 조석윤(趙錫胤)ㆍ수찬 이도(李禂)ㆍ안변 부사(安邊府使) 이기조(李基祚)ㆍ경기 감사 윤이지(尹履之)ㆍ도승지 김경징(金慶徵)ㆍ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 구굉(具宏)ㆍ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와서 모였다. 기백(畿伯 경기 감사의 별칭)이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동양위가 말하기를, “이번에 만 리 먼 곳으로 사신을 가는데, 어찌하여 배웅하는 손님들이 드문가?” 하였다. 해사록_김세렴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87A_0010_010_0010_2003_004_XML
Rec-2263 해유록_상_1719_0411 17190411 三使臣以下。悉詣闕拜辭。製述官譯官寫字官外。軍官書記。無肅拜。將出都門。權正郞相一。金判官益謙。以嶺人。貰酒來別。金佐郞履萬。姜直長必慶。洪侍直重聖。各爲詩致意。李進士周鎭。以奚囊藥丸見餽。崔士集。設酒餞追別於路。惓惓如骨。肉三使臣奉國書受節鉞。出崇禮門到關王廟。一行改着靑袍。是日宿良才驛。 세 사신 이하가 모두 대궐에 나아가 절하고 하직하였다. 제술관(製述官), 역관(譯官), 사자관(寫字官) 외에 군관(軍官)과 서기(書記)는 숙배(肅拜)가 없었다. 성문에 나오자, 정랑(正郞) 권상일(權相一)과 판관(判官) 김익겸(金益謙)이 같은 영남 사람으로 술을 사가지고 와서 송별하였고, 좌랑(佐郞) 김이만(金履萬)ㆍ직장(直長) 강필경(姜必慶)ㆍ시직(侍直) 홍중성(洪重聖)이 각각 시를 지어 우의를 표하였다. 진사 이주진(李周鎭)이 해낭(奚囊)과 환약(丸藥)을 선사하였다. 최사집(崔士集)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뒤따라 와 중로에서 송별하였는데, 다정하기가 골육(骨肉)과 같았다. 세 사신이 국서(國書)를 받들고 절월(節鉞)을 받아, 숭례문(崇禮門)으로 나와 관왕묘(關王廟)에 이르러서는 일행이 청포(靑袍)로 바꾸어 입었다. 이날 양재역(良才驛)에서 잤다. 해유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79A_0010_020_0010_2003_001_XML
Rec-2264 해유록_하_1720_0124 17200124 朝渡漢江。太常傔從數人。已來候。三使行齊到城南關王廟。改着紅團領。以次乘馬入京復命。 아침에 한강을 건너니, 태상시(太常寺)의 하인 몇 사람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신의 행차가 일제히 성남(城南) 관왕묘(關王廟)에 도착하여 홍단령(紅團領)으로 고쳐 입고 차례로 말을 타고 서울에 들어가서 복명(復命)하였다. 해유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79A_0030_030_0170_2003_001_XML
Rec-2265 허백당집_허백당시집_4권_시_관왕묘 null 建安天地屯雲雷。卯金大運挽不回。將軍慷慨有大志。欲持橐鑰噓寒灰。曹瞞區區伺大器。慓猾亦是英雄魁。山東老表本庸鄙。顏良文醜非長材。將軍談笑坐唾掌。俯睨兩豎如嬰孩。一劍橫空白馬倒。二十萬衆如死荄。脫身西走扶劉氏。割據劍閣靑崔嵬。身擁a014_267c貔貅駐樊口。鷹瞬虎視雄八垓。何期一夕天不佑。丈夫壯氣如山摧。九泉雙眸終不冥。神鬼飮泣后土哀。英魂千載遇眞主。感應吉夢相隨來。神騎縱橫導前陣。胡雛散盡無塵埃。升平百年古來少。萬民妥帖登春臺。生扶漢室盡臣節。死定大功何壯哉。九州紛紛設廟宇。薦以蘋藻陳樽罍。我行適到廣寧城。殿中遺像高嵬嵬。老樹森森蔭堂廡。斷碑蕪沒生莓苔。訪古酸然意不歇。春風落日空徘徊。 건안 연간의 천지는 운뢰가 둔한 때라서 / 묘금의 대운은 끝내 만회할 수 없었건만 / 장군은 비분강개한 거대한 뜻이 있어 / 다 식은 재에 풀무질을 하려고 했었네 / 조만은 구구하게 대기를 넘보았으니 / 그 교활함은 또한 영웅의 괴수였는데 / 산동의 노표는 본디 못난 자였거니와 / 안량 문추 역시 큰 재목이 아니었기에 / 장군은 담소하면서 손바닥에 침을 뱉고 / 안량 문추를 어린애처럼 하찮게 여기어 / 백마에서 한칼에 그들을 거꾸러뜨리니 / 이십만 군대가 마른풀 꼴이 되어버렸네 / 끝내 서쪽으로 탈주하여 유씨를 도와서 / 푸른 산 우뚝한 검각을 나누어 웅거할 제 / 몸소 용맹한 군사 거느리고 번구에 주둔해 / 호시탐탐 팔방 끝까지 노리고 있었는데 / 어찌 뜻했으랴 하룻밤에 하늘이 돕지 않아 / 장부의 장대한 기개가 산처럼 무너질 줄을 / 구천에서도 두 눈을 끝내 감지 못하니 / 귀신이 슬피 울고 땅귀신도 슬퍼하였네 / 그 영혼이 천 년 만에 참다운 임금을 만나 / 길몽에 감응하여 꿈속에 따라 들어와 / 신병이 종횡으로 앞 군진을 인도하니 / 호추가 다 흩어져서 깨끗이 맑혀졌네 / 백 년의 태평이 예로부터 드물고말고 / 만백성이 춘대에 오른 듯 편안도 해라 / 살아서는 한실을 붙들어 충성을 다하더니 / 죽어서도 큰 공 세워라 어이 그리 장한고 / 구주에 여기저기 수많은 사당을 세워서 / 조촐한 제수에 향기로운 술잔 올리는데 / 나의 행차가 마침 광녕성에 이르러 보니 / 장군 유상은 전각 안에 우뚝이 자리하였고 / 고목들은 늘어서서 전당에 그늘 드리우고 / 잡초에 묻힌 조각난 비석엔 이끼가 올랐네 / 고적을 찾고 보니 상심하는 뜻 그지없어 / 봄바람 석양 아래 부질없이 배회하노라 / 허백당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072A_0050_010_0140_2014_001_XML
Rec-2266 홍재전서_19권_제문_동관왕묘수개고유문_01 null 有儼王宮。有奕王靈。宇宙大節。日月其光。冥應不忒。佑我東方。列祖攸欽。况予齎誠。年年夏月。敬奠有常。庶格微忱。冀垂陰庥。簷桷有漏。門垣宜修。敢薦泂酌。虔告厥由。 관왕(關王)의 궁이 엄연하고 / 관왕의 혼령이 혁연하도다 / 우주에 가득한 절의이고 / 일월과 다투는 광채일세 / 묵묵히 감응함이 어긋나지 않아 / 우리 동방을 도우셨나이다 / 역대의 선왕이 공경한 바였으니 / 나 또한 정성을 바치네 / 해마다 여름철이면 / 경건한 제사를 바침이 상도였네 / 보잘것없는 정성을 흠향하여 / 가만히 보살피길 드리우소서 / 처마의 서까래에 물이 새니 / 문과 담장을 수리함이 마땅하네 / 감히 맑은 술을 바쳐 / 경건히 그 사유를 고하나이다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190_010_0070_2006_003_XML
Rec-2267 홍재전서_19권_제문_남관왕묘수개고유문 null 赫赫王神。萬古英靈。日月炳忠。金石貫誠。睠彼城南。廟貌斯煌。每歲孟夏。虔薦心香。垂祐東土。神化彌彰。式敬式欽。予罔敢忽。垣宇將繕。卜日之吉。玆緣告儀。冀歆淸酌。 혁혁한 관왕의 신이여 / 만고의 영령이로다 / 일월같이 충성이 빛나며 / 금석처럼 정성이 지극했네 / 저 성남을 바라보니 / 사당의 모습 이에 빛나네 / 해마다 초여름이면 / 경건히 심향을 드리네 / 우리 동토를 보우하시니 / 신의 조화 더욱 드러났네 / 이에 공경하고 이에 흠앙하니 / 내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였네 / 담장과 집을 장차 수리하려고 / 날을 점쳐 길일을 얻었네 / 이러한 연유로 고하노니 / 맑은 술을 흠향하길 바라노라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190_010_0080_2006_003_XML
Rec-2268 홍재전서_19권_제문_동관왕묘수개고유문_02 null 殿宇荒頹。宜卽改修。玆以涓吉。敢告厥由。 전우가 황폐 퇴락하니 / 즉시 수리함이 마땅하기에 / 이에 길일을 받아서 / 감히 그 사유를 고하나이다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190_010_0100_2006_003_XML
Rec-2269 홍재전서_19권_제문_동관왕묘치제문_01 null 奕奕明神。翼翼斯宮。誕垂冥祐。永綏我東。誠事之道。實在寡躬。載新牆垣。載繕殿櫳。非欲侈大。寔寓尊慕。工旣告訖。煥然改覩。於東歷拜。謁陵歸路。餘懷耿往。替奠酤脯。 혁혁하게 밝은 신이여 / 우뚝 높은 이 사당이로다 / 크게 보우하심을 드리워 / 길이 우리나라를 편안하게 하였네 / 정성으로 섬기는 도리가 / 실로 과인의 몸에 있노라 / 이에 담장을 새롭게 하고 / 이에 문을 수선하였네 / 사치스럽고 크게 하고자 함이 아니라 / 곧 높이고 사모하는 정성을 깃들임일세 / 공사를 마침을 고하니 / 경관이 빛나게 되었도다 / 동쪽에 두루 절하여 / 능묘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 남은 회포 향함이 있기에 / 술과 포를 바치게 하노라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190_010_0110_2006_003_XML
Rec-2270 홍재전서_19권_제문_남관왕묘치제문_01 null 一體明神。于東于南。旣拜且奠。庶鑑微諴。 일체의 밝은 신이여 / 동쪽과 남쪽이로소이다 / 이미 절하고 제물을 드리오니 / 작은 정성을 살피기 바라나이다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190_010_0170_2006_003_XML
Rec-2271 홍재전서_19권_제문_동관왕묘치제문_02 null 祇拜于廟。八月三日。於昭洋洋。是鑑是騭。 경건히 사당에 절하니 / 팔월 삼일이로다 / 아, 양양히 빛나시니 / 이에 살피어 오르내리도다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190_010_0180_2006_003_XML
Rec-2272 홍재전서_20권_제문_동관왕묘어필비신건고유문 null 廟門肅肅。罇罍薦誠。曷以崇報。莫稱微情。螭首紀功。以永千春。庭甎鋪新。亦及良辰。 사당의 문 엄숙하니 / 술잔에 정성을 갖추어 올리네 / 어떻게 높이 보답할까 / 그 무엇도 이 마음 같은 게 없네 / 비석에 공을 기려 새기니 / 길이 천 년을 이어 가게 하소서 / 묘정의 바닥에 벽돌을 새로 까니 / 또한 좋은 때에 미쳤다네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200_010_0530_2006_003_XML
Rec-2273 홍재전서_20권_제문_남관왕묘어필비신건고유문 null 英爽百代。若偏一邦。三聖醻德。穹龜有雙。仍廊設閣。煥修楹桷。牲醪肥潔。永垂冥騭。 관왕(關王)의 영령 백대에 걸쳐 / 우리나라를 몹시 보살피는 듯하네 / 세 임금에 걸쳐서 덕을 갚으니 / 두 개의 높은 비석이 세워졌네 / 낭을 인하여 각을 설치하니 / 기둥과 서까래를 빛나게 갖추었네 / 희생이 살지고 술이 청결하니 / 길이 어두운 곳에서 도움을 드리우소서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200_010_0540_2006_003_XML
Rec-2274 홍재전서_21권_제문_남관왕묘수개고유문 null 煌煌衮衣。敝予改爲。齎誠涓吉。虔將告儀。 황황한 곤의가 / 해지게 되어 내가 수리하노니 / 정성을 갖추어 길일을 택하여 / 경건히 고하는 의식을 받드노라 /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210_010_0080_2006_003_XML
Rec-2275 홍재전서_22권_제문_동관왕묘수개고유문 null 令辰芬苾。兼告繕葺。簫鼓在庭。洋洋如覿。 좋은 날을 택하여 제사를 드리고 / 겸하여 개수하는 일을 고하네 / 호가(胡家)와 북이 묘정(廟庭)에 있으니 / 양양하게 보는 듯하네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0220_010_0060_2006_003_XML
Rec-2276 홍재전서_172권_일득록_인물 null 靈城君朴文秀。眞滿腔熱血。乙卯以前。日拜關王廟。祈祝邦慶。卽此誠意。今世豈易得乎。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는 참으로 가슴속에 열혈(熱血)이 가득한 사람이다. 을묘년(1735, 영조11) 이전에 날마다 관왕묘(關王廟)를 배알하고 나라의 복을 빌었으니, 이런 성의를 지닌 사람을 오늘날 세상에서 어찌 쉽게 얻겠는가. 홍재전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84A_1720_010_0010_2006_017_XML
Rec-2277 각사등록_경상감영계록_1842_0908 18420908 null 안동(安東)ㆍ성주(星州)의 관왕묘(關王廟)는 도신(道臣)이 순력(巡歷)할 때 봉심(奉審)하도록 전에 정식(定式)으로 정해졌습니다만, 올해 가을의 순력은 비변사(備邊司)의 계하 관문(啓下關文)에 따라 정지하였으므로 지방관(地方官)이 봉심하여 첩보(牒報)하라는 내용으로 관문을 보내 각각의 해당 읍에 통지하였더니, 이번에 도부(到付)한 안동 부사 권용경(權用經)ㆍ성주 목사 이인량(李寅亮)의 첩정(牒呈)에, “직접 관왕묘에 나아가 상세히 봉심하니, 석상(石像)ㆍ의대(衣襨)ㆍ포진(舖陳)ㆍ묘우(廟宇)가 모두 흠이 없었습니다.”라고 모두 첩정을 보내왔습니다. 연유를 치계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510_010_1330_2015_041_XML
Rec-2278 각사등록_경상감영계록_1863_0816 18630816 null 안동(安東)ㆍ성주(星州)의 관왕묘(關王廟)는 도신(道臣)이 순력(巡歷)할 때 봉심(奉審)하도록 전에 정식(定式)으로 정해졌습니다만, 올해 가을의 순력은 비변사(備邊司)의 계하 관문(啓下關文)에 따라 정지하였으므로 지방관이 봉심하여 첩보(牒報)하라는 내용으로 관문을 보내 각각의 해당 읍에 통지하였더니, 이번에 도부(到付)한 안동 겸임 안동진영장(安東兼任安東鎭營將) 유환(柳晥)과 성주 겸임 지례 현감(星州兼任知禮縣監) 정기화(鄭夔和)의 첩정(牒呈)에, “직접 관왕묘에 나아가 상세히 봉심하니, 석상(石像), 의대(衣襨), 포진(鋪陳), 묘우(廟宇)가 모두 흠이 없었습니다.”라고 모두 첩정을 보내왔습니다. 연유를 치계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520_010_0850_2015_041_XML
Rec-2279 각사등록_경상감영계록_1872_0222 18720222 null 안동(安東)ㆍ성주(星州)의 관왕묘(關王廟)는 도신(道臣)이 순력(巡歷)할 때 봉심하도록 전에 정식으로 정하였습니다만, 올해 봄의 순력은 의정부의 계하 관문(啓下關文)에 따라 정지하였으므로 지방관이 봉심하여 첩보하라는 내용으로 관문을 보내 각각의 해당 읍에 통지하였더니, 이번에 도부(到付)한 안동 겸임 안동(安東兼任安東) 진영장(鎭營將) 안학선(安鶴善)과 성주 목사(星州牧使) 조운긍(趙雲兢)의 첩정에, “직접 관왕묘에 나아가 상세히 봉심하니, 석상(石像)ㆍ의대(衣襨)ㆍ포진(舖陳)ㆍ묘우(廟宇)가 모두 흠이 없었습니다.”라고 모두 첩정을 보내왔으므로 연유를 치계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530_090_0290_2015_044_XML
Rec-2280 각사등록_경상감영계록_1872_0810 18720810 null 안동(安東)ㆍ성주(星州)의 관왕묘(關王廟)는 도신(道臣)이 순력(巡歷)할 때 봉심(奉審)하도록 전에 정식(定式)으로 정해졌습니다만, 올해 가을의 순력은 의정부의 계하 관문(啓下關文)에 따라 정지하였으므로 지방관이 봉심하여 첩보(牒報)하라는 내용으로 관문을 보내 각각의 해당 읍에 통지하였더니, 이번에 도부(到付)한 안동 부사 박제관(朴齊寬)과 성주 목사 조운긍(趙雲兢)의 첩정(牒呈)에, “직접 관왕묘에 나아가 상세히 봉심하니, 석상(石像)ㆍ의대(衣襨)ㆍ포진(舖陳)ㆍ묘우(廟宇)가 모두 흠(欠)이 없습니다.”라고 모두 첩정을 보내왔습니다. 연유를 치계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530_090_1500_2015_044_XML
Rec-2281 각사등록_경상감영계록_1890_0815 18900815 null 안동(安東)과 성주(星州)의 관왕묘(關王廟)는 도신(道臣)이 순력(巡歷)할 때 봉심(奉審)하는 것이 전에 정식(定式)이 있었습니다. 금년 가을 순력은 의정부(議政府)의 계하 관문(啓下關文 임금의 재가를 받은 왕명(王命)을 전하는 관문)에 따라 정지했으므로 지방관이 봉심하여 첩보(牒報)하도록 각 해당 읍에 관문을 보내 통지했더니, 이번에 도착한 안동 겸임 안동 영장(安東兼任安東營將) 이종호(李宗鎬), 성주 목사(星州牧使) 김갑수(金甲秀)의 첩정(牒呈)에, “직접 관왕묘에 나아가 상세하게 봉심하니, 석상(石像)ㆍ의대(衣襨)ㆍ포진(鋪陳)ㆍ묘우(廟宇)에 모두 흠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연유를 치계하오니 이런 내용을 잘 아뢰어 주소서.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530_120_0230_2015_045_XML
Rec-2282 각사등록_경상도관초_1892_0903 18920903 null 상고(相考)하는 일. 살펴보건대, 전에 유유상(鍮油商)을 영구히 본 아문(衙門)에 넘겨주는 한 가지 일에 대하여 이미 관칙(關飭)한 것이 문건에 기록되어 있다. 방금 온 첩보(牒報)의 내용을 요약해 보건대, “해당 각 읍의 유유상(鍮油商) 등이 호소하기를, ‘유사 도소(鍮社都所)에서 지난번에 도내(道內) 유유상과 점인(店人)들에게 매달 거두는 것을 빨리 독촉했으니, 유점(鍮店)을 반드시 그만두면 장삿길이 영원히 끊어질 것입니다. 특별히 논보(論報)하여 수세(收稅)를 혁파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이 유유상은 가난하고 쇠잔하여 의지할 데가 없는데 장차 수탈을 당하면 뿔뿔이 흩어지는 데 이를 것입니다. 사실에 근거하여 첩보하니, 위에서 말한 수세 한 항목은 참작하고 헤아려 시행하지 말아 각각 생업을 편안히 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방금 해당 도의 안동 유상(油商) 김한주(金漢柱) 등이 호소한 것을 받아 보니, “제가 상임방(商任房)을 창설한 것은 진실로 상민(商民)을 보호하여 재화(財貨)를 불려 판매를 늘리려는 데서 연유했는데, 아! 저 보부상 가운데 무뢰한 무리들이 도당(徒黨)을 성대하게 모아 만나기만 하면 멋대로 침탈하였습니다. 지난 경진년(庚辰年, 1880, 고종17)에 비로소 임방(任房)을 설치하여 저희들 장내(掌內)는 안동진관(安東鎭管)의 15읍이었으니, 다른 상사와 차이가 있는 것은 본부(本府)에서 서악(西岳)의 관왕묘(關王廟) 위(位)와 세자궁(世子宮)의 장수를 축원하는 등유(燈油)를 진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영읍(營邑)의 완문(完文)이 있어서 거의 폐단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해에 풍기(豐基) 유상(油商) 두세 사람이 장내의 약조(約條)를 따르지 않고 보부상에게 투입했는데, 그 해당 읍의 보부상 홍춘겸(洪春兼)ㆍ김준이(金俊伊)ㆍ김여현(金汝賢)ㆍ최대여(崔大汝), 영천(榮川 현재의 영주(榮州)) 이경실(李敬實) 등이 너희들이 가지고 온 공문이라 하며 즉시 강제로 불태우고 저희들 접장(接長)을 구타하였으며, 또 총각 보부상 30여 명이 저희들을 결박하여 받든 공문을 다 억지로 빼앗았습니다. 이에 감히 외람되게 호소하여 간절히 바라니, 진남(鎭南) 삼도(三道)에 엄하게 관문을 보내 위에서 말한 접장 김준이 및 같이 도모한 홍춘겸 등 다섯 놈을 모두 잡아 올려 판하(判下)한 막중한 절목(節目)과 억지로 빼앗아 간 각 공문을 특별히 후록(後錄)한 대로 일일이 찾아 주며, 모두 즉시 엄하게 형신하고 조감(照勘)하여 이 임방으로 하여금 생업을 잃는 것을 면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모두 조사하니, 해당 도내(道內) 유유상(鍮油商)이 수세를 견디지 못해 등소(等訴)하는 데 이르렀고 또 등소에 근거하여 자세히 첩보하는 데 이르렀으니, 그 지나치게 거둔 것이 해가 됨을 헤아릴 수 있겠다. 첩보한 대로 해당 수세에 관한 한 항목은 신칙하여 즉시 시행하지 말게 하고, 또 만약 폐단이 되는데도 여기에서 그치지 않을 경우에는 모두 소유한 절목을 본 아문에 첩보를 올려 철폐하게 하고, 안동 유상 등이 보부상들에게 능멸을 멋대로 입고 공문을 빼앗기는 데 이르렀으니, 징벌을 시행해야 합당하다. 관문이 도착하는 즉시 풍기와 면읍(面邑)에 엄하게 관문을 보내 소란을 피운 보부상 홍춘겸 등을 잡게 하여 특별히 징벌하고, 빼앗긴 공문과 영수증〔票據〕 및 각건(各件)을 후록한 대로 일일이 찾아주어 각각 생업을 편안하게 하고 장삿길을 방해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550_070_0270_2016_046_XML
Rec-2283 각사등록_호남계록_1879_1026 18791026 null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 신 심이택(沈履澤)은 삼가 상고(相考)의 일을 아룁니다. 전에 도착한 예조의 관문에, “이번에 계하(啓下)한 관찰사의 첩정(牒呈)에 따라 금년 기묘년(己卯年, 1879, 고종16) 7월부터 12월까지 매달 행하는 각 도(道)의 제사 중에 7월 안에 행하는 여제(厲祭)는 15일에 행하고,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 성황신에게 여제(厲祭)의 거행을 알리는 제사)는 여제일 기일 3일 전인 12일에 행하며, 8월 안에 행하는 사직 대제(社稷大祭)는 상무일(上戊日)인 초7일에 행하고, 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의 석전제(釋奠祭)는 상정일(上丁日)인 초6일에 행하고, 조경묘(肇慶廟)는 전주에서 초2일에 행하고, 경기전(慶基殿)의 전주 추석제는 15일에 행하고, 한라산은 제주에서, 지리산은 남원ㆍ남해ㆍ나주에서, 금성산(錦城山)은 나주에서 초3일에 행하고, 풍운뇌우제(風雲雷雨祭)는 제주에서 사일(社日)인 초7일에 행하며, 9월 안에 거행하는 둑제(纛祭)와 관왕묘제(關王廟祭)는 고금도(古今島)와 남원에서 상강일(霜降日)인 초10일에 행하고, 성황발고제는 여제 기일 3일 전인 28일에 행하며, 10월 안에 행하는 여제는 초1일에 행하며, 11월 안에 행하는 경기전의 동지제(冬至祭)는 초10일에 행하며, 12월 안에 행하는 경기전의 전주 납향제(臘享祭)는 초8일에 행하도록 한 일에 근거한 예조의 계목(啓目)에, ‘첩정은 첨부하였습니다. 지난번에 각 도(道) 제사의 향(香)ㆍ축문(祝文)ㆍ폐백(幣帛)은 해당 관사로 하여금 규례를 살펴 마련하여 내려 보내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또한 각 본도에서 제물을 정성스럽게 마련하여 예문대로 설행하도록 행문 이첩(行文移牒 공문서를 발송하여 조회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그대로 윤허한다고 계하하였다. 계하의 뜻을 잘 받들어 도내 각 읍에 알려 시행하게 할 것이며, 각 제사를 설행한 뒤 규례대로 계문(啓聞)하고 점이(粘移)를 모아 올려 보내 참고하게 하되, 제주 목사에게 똑같이 알려 시행하게 하며, 관문이 도착한 즉시 먼저 회이(回移)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각 제사 날짜는 낱낱이 거론하여 해당 읍에 알려 당일에 제물을 정성스럽게 마련하여 예문에 따라 설행하게 하였는데, 각 고을 수령 중에 다른 제관이 진참(進參)한 경우와 말미를 받았거나 교체된 곳은 정식에 따라 진사(進士)나 유생(儒生)으로 거행하게 한 뒤 모두 보고하였으므로 헌관(獻官)의 직(職)과 성명을 기록하여 성책을 수정하여 예조에 올려 보냅니다. 제주 한라산제와 풍운뇌우제는 제주목에서 설행한 뒤 곧바로 치계하도록 전에 이미 관문을 등서하여 알렸습니다. 연유를 아울러 삼가 갖추어 계문(啓聞)합니다.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690_040_1660_2017_056_XML
Rec-2284 각사등록_호남계록_1885_0510 18850510 null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 신 윤(尹)은 삼가 상고(相考)의 일을 아룁니다. 전에 도착한 예조의 관문(關文)에, “본조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계하(啓下)한 관상감(觀象監)의 첩정(牒呈)에 따라 오는 을유년 정월부터 5월까지 각각의 달에 행하는 각 도의 제향(祭享)에서 정월에 행하는 전주(全州)의 경기전 정조제(慶基殿正朝祭)는 초1일에 행하고, 남원(南原)의 지리산제(智異山祭), 나주(羅州)의 남해당제(南海堂祭), 나주의 금성산제(錦城山祭), 제주(濟州)의 한라산제(漢拏山祭) 등의 제향은 11일에 행하고, 고금도(古今島)와 남원(南原)의 둑제(纛祭)와 관왕묘제(關王廟祭)는 경칩일(驚蟄日)인 19일에 행하고, 2월에 행하는 사직 대제(社稷大祭)는 상무일(上戊日)인 초8일에 행하고, 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 석전제(釋奠祭)는 상정일(上丁日)인 초7일에 행하고, 전주의 조경묘제(肇慶廟祭)는 초7일에 행하고, 남원의 지리산제, 나주의 남해당제, 나주의 금성산제, 제주의 한라산제 등의 제향은 11일에 행하고, 여제(厲祭)는 청명일(淸明日)인 19일에 행하고,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 성황신에게 여제(厲祭)의 거행을 알리는 제사)는 여제일 3일 전인 16일에 행하고, 풍운뇌우제(風雲雷雨祭)는 제주의 사일(社日)인 초8일에 행하고, 5월에 행하는 전주의 경기전 단오제(慶基殿端午祭)는 초5일에 행하는 일에 의거하여 본조의 계목(啓目 주로 작은 일에 대해서 임금에게 상주하는 문서)에 첩정을 첨부하였습니다. 전에 각 도의 각 제향에 쓸 향축(香祝 향과 축문(祝文))과 폐백은 해당 관사로 하여금 전례에 비추어 마련하여 내려 보내게 하였습니다. 또한 각기 본도로 하여금 전물(奠物)을 정갈하게 마련하게 하여 예문(禮文)에 따라 설행하라는 뜻으로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한다고 계하하였다. 계하의 뜻을 잘 받들어 도내 각 고을에 거듭 밝혀 알려 시행하되, 각 제향을 설행한 뒤 전례대로 계문(啓聞)하고 첨부한 문서를 수합하여 올려 보내서 빙고(憑考)할 수 있게 하고, 제주목(濟州牧)에도 일체 알려 시행하며, 관문이 도착한 즉시 먼저 회답 공문을 보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각 제향의 날짜를 일일이 거론하여 각 해당 고을에 알렸더니, 각 당일에 전물을 정갈하게 마련하여 예문에 따라 설행하였습니다. 각 고을의 수령이 다른 곳에 제관(祭官)으로 나아가 참석하였거나 말미를 받았거나 교체(交遞)한 곳은 정식에 따라 생진(生進) 유생으로 거행한 뒤 모두 보고해 왔으므로, 헌관(獻官)의 직(職)과 성명을 개록(開錄)한 성책(成冊)을 수정(修正)하여 예조에 올려 보냅니다. 제주의 한라산제와 풍운뇌우제는 본목(本牧)에서 설행한 뒤 바로 치계(馳啓)하라는 뜻으로 전에 이미 관문을 등서(謄書)하여 알렸습니다. 연유를 아울러 삼가 갖추어 계문(啓聞)합니다.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690_060_1000_2017_057_XML
Rec-2285 각사등록_호남계록_1885_1201 18851201 null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 신 윤(尹)은 삼가 상고(相考)의 일을 아룁니다. 전에 이미 도착한 예조(禮曹)의 관문(關文)에, “이번에 계하(啓下)한 관상감(觀象監)의 첩정(牒呈)에 따라 오는 을유년 7월부터 12월까지 각각의 달에 행하는 각 도의 제향(祭享)은 7월에 행하는 여제(厲祭)는 15일에 행하고,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는 여제일 3일 전인 12일에 행하고, 8월에 행하는 사직 대제(社稷大祭)는 상무일(上戊日)인 초2일에 행하고, 문선왕(文宣王) 석전제(釋奠祭)는 상정일(上丁日)인 초1일에 행하고, 전주(全州)의 조경묘제(肇慶廟祭)는 초6일에 행하고, 전주의 경기전 추석제(慶基殿秋夕祭)는 15일에 행하고, 제주(濟州)의 한라산제(漢拏山祭), 남원(南原)의 지리산제(智異山祭), 나주(羅州)의 남해당제(南海堂祭), 나주의 금성산제(錦城山祭)는 초7일에 행하고, 제주의 풍운뇌우제(風雲雷雨祭)는 사일(社日)인 12일에 행하고, 9월에 행하는 고금도(古今島)와 남원(南原)의 둑제(纛祭)와 관왕묘제(關王廟祭)는 상강일(霜降日)인 16일에 행하고, 성황발고제는 여제일 3일 전인 28일에 행하고, 10월에 행하는 여제는 초1일에 행하고, 11월에 행하는 전주의 경기전 동지제(慶基殿冬至祭)는 17일에 행하고, 12월에 행하는 전주의 경기전 납향제(慶基殿臘享祭)는 19일에 행하는 일에 의거하여 본조의 계목(啓目)에 첩정을 첨부하였습니다. 전에 각 도의 각 제향에 쓸 향축(香祝)과 폐백은 해당 관사로 하여금 전례에 비추어 마련하여 내려 보내게 하였습니다. 또한 각기 본도로 하여금 전물(奠物)을 정갈하게 마련하여 예문(禮文)에 따라 설행하라는 뜻으로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한다고 계하(啓下)하였다. 계하의 뜻을 잘 받들어 도내 각 고을에 거듭 밝혀 알려 시행하되, 각 제향을 설행한 뒤 전례대로 계문(啓聞)하고 첨부한 문서를 수합하여 올려 보내서 빙고(憑考)할 수 있게 하고, 제주목(濟州牧)에도 일체 알려 시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각 제향의 날짜를 일일이 거론하여 각 해당 고을에 알려 각 당일에 전물을 정갈하게 마련하여 예문에 따라 설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각 고을의 수령이 다른 곳에 제관(祭官)으로 나아가 참석하였거나 말미를 받았거나 교체(交遞)한 곳은 정식에 따라 생진(生進) 유생으로 거행한 뒤 모두 보고해 왔으므로, 헌관(獻官)의 직(職)과 성명을 개록(開錄)하여 성책(成冊)하고 수정(修正)하여 예조에 올려 보냅니다. 제주의 한라산제와 풍운뇌우제는 본목(本牧)에서 설행한 뒤 바로 치계(馳啓)하라는 뜻으로 전에 이미 관문을 등서(謄書)하여 알렸습니다. 연유를 아울러 삼가 갖추어 계문(啓聞)합니다.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690_060_2880_2017_057_XML
Rec-2286 각사등록_호남계록_1886_0727 18860727 null 행전라도 관찰사 겸 도순찰사 신 윤(尹)은 삼가 상고(相考)의 일을 아룁니다. 전에 도착한 예조의 관문(關文)에, “본조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계하(啓下)한 관상감(觀象監)의 첩정(牒呈)에 따라 오는 병술년 정월부터 5월까지 각각의 달에 행하는 각 도의 제향(祭享)은 정월에 행하는 전주(全州)의 경기전 정조제(慶基殿正朝祭)는 초1일에 행하고, 남원(南原)의 지리산제(智異山祭), 나주(羅州)의 남해당제(南海堂祭), 나주의 금성산제(錦城山祭), 제주(濟州)의 한라산제(漢拏山祭) 등의 제향은 초3일에 행하고, 고금도(古今島)와 남원(南原)의 둑제(纛祭)와 관왕묘제(關王廟祭)는 경칩일(驚蟄日)인 30일에 행하고, 2월에 행하는 사직 대제(社稷大祭)는 상무일(上戊日)인 초4일에 행하고, 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 석전제(釋奠祭)는 상정일(上丁日)인 초3일에 행하고, 전주의 조경묘제(肇慶廟祭)는 초3일에 행하고, 남원의 지리산제, 나주의 남해당제, 나주의 금성산제, 제주의 한라산제 등의 제향은 초10일에 행하고,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는 여제일(厲祭日) 3일 전인 28일에 행하고, 제주의 풍운뇌우제(風雲雷雨祭)는 사일(社日)인 14일에 행하고, 3월에 행하는 전주의 경기전 한식제(慶基殿寒食祭)는 초3일에, 여제(厲祭)는 청명일(淸明日)인 초2일에 행하고, 5월에 행하는 전주의 경기전 단오제(慶基殿端午祭)는 초5일에 행하는 일에 의거하여 본조의 계목(啓目)에 첩정을 첨부하였습니다. 전에 각 고을의 각 제향에 쓸 향축(香祝)과 폐백은 해당 관사로 하여금 아뢴 대로 마련하여 내려 보냈으니, 각기 본도로 하여금 전물(奠物)을 정갈하게 마련하게 하여 예문(禮文)에 따라 설행하라는 뜻으로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한다고 계하하였다. 계하의 뜻을 잘 받들어 시행하되, 도내 각 고을 및 제주목(濟州牧)에 일체 통지하여 시행하며, 각 제향을 설행한 뒤 전례대로 계문(啓聞)하고 첨부한 문서를 수합하여 올려 보내서 빙고(憑考)할 수 있게 하되, 관문이 도착하면 우선 회답 공문을 보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각 제향의 날짜를 일일이 거론하여 각 해당 고을에 통지하여 각 당일에 전물을 정갈하게 마련하여 예문에 따라 설행하였습니다. 각 고을의 수령이 다른 곳에 제관(祭官)으로 나아가 참석하였거나 말미를 받았거나 교체(交遞)한 곳은 정식에 따라 생진(生進) 유생(儒生)으로 거행한 뒤 모두 보고해 오므로 헌관(獻官)의 직(職)과 성명을 성책(成冊)에 개록(開錄)하고 수정(修正)하여 예조에 올려 보냅니다. 제주의 한라산제와 풍운뇌우제는 본목(本牧)에서 설행한 뒤 바로 치계(馳啓)하라는 뜻으로 전에 이미 관문을 등서(謄書)하여 통지하였습니다. 연유를 아울러 삼가 갖추어 계문(啓聞)합니다.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690_070_1100_2017_058_XML
Rec-2287 각사등록_호남계록_1886_1124 18861124 null 행전라도 관찰사 겸 도순찰사 신 윤(尹)은 삼가 상고(相考)의 일을 아룁니다. 이번에 도착한 예조(禮曹)의 관문(關文)에, “본조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계하(啓下)한 관상감(觀象監)의 첩정(牒呈)에 따라 올해 병술년 7월부터 12월까지 각각의 달에 행하는 각 도의 제향(祭享)에서 7월에 행하는 여제(厲祭)는 15일에 행하고,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는 여제일 3일 전인 12일에 행하고, 8월에 행하는 사직 대제(社稷大祭)는 상무일(上戊日)인 초8일에 행하고, 문선왕 석전제(文宣王釋奠祭)는 상정일(上丁日)인 초7일에 행하고, 전주(全州)의 조경묘제(肇慶廟祭)는 초2일에 행하고, 전주의 경기전 추석제(慶基殿秋夕祭)는 15일에 행하고, 제주(濟州)의 한라산제(漢拏山祭), 남원(南原)의 지리산제(智異山祭), 나주(羅州)의 남해당제(南海堂祭), 나주의 금성산제(錦城山祭)는 초7일에 행하고, 제주의 풍운뇌우제(風雲雷雨祭)는 사일(社日)인 28일에 행하고, 9월에 행하는 고금도(古今島)와 남원(南原)의 둑제(纛祭)와 관왕묘제(關王廟祭)는 상강일(霜降日)인 26일에 행하고, 성황발고제는 여제일 3일 전인 27일에 행하고, 10월에 행하는 여제는 초1일에 행하고, 11월에 행하는 전주의 경기전 동지제(慶基殿冬至祭)는 27일에 행하고, 12월에 행하는 전주의 경기전 납향제(慶基殿臘享祭)는 25일에 행하는 일에 의거하여 본조의 계목(啓目)에 첩정을 첨부하였습니다. 전에 각 도의 각 제향에 쓸 향축(香祝)과 폐백은 해당 관사로 하여금 전례에 비추어 마련하여 내려 보내게 하였습니다. 또한 각기 본도로 하여금 전물(奠物)을 정갈하게 마련하여 예문(禮文)에 따라 설행하라는 뜻으로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한다고 계하하였다. 계하의 뜻을 잘 받들어 시행하되, 도내 각 고을에 거듭 밝혀 통지하여 시행하며, 각 제향을 설행한 뒤 전례대로 계문(啓聞)하고 첨부한 문서를 수합하여 올려 보내서 빙고(憑考)할 수 있게 하되, 제주목(濟州牧)에도 일체 통지하여 시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각 제향의 날짜를 일일이 거론하여 각 해당 고을에 통지하여 각 당일에 전물을 정갈하게 마련하여 예문에 따라 설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각 고을의 수령이 다른 곳에 제관(祭官)으로 나아가 참석하였거나 말미를 받았거나 교체(交遞)한 곳은 정식에 따라 생원 진사, 유생으로 거행한 뒤 모두 보고해 오므로 헌관(獻官)의 직(職)과 성명을 개록(開錄)하여 성책(成冊)하고 수정(修正)하여 예조에 올려 보냅니다. 제주의 한라산제와 풍운뇌우제는 본목(本牧)에서 설행한 뒤 바로 치계(馳啓)하라는 뜻으로 전에 이미 관문을 등서(謄書)하여 통지하였습니다. 연유를 아울러 삼가 갖추어 계문(啓聞)합니다.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690_070_2070_2017_058_XML
Rec-2288 각사등록_전라좌수영계록_1866_0229 18660229 null 지로 차원(指路差員)은 처음에 여도 만호(呂島萬戶) 유재득(劉在得)으로 차정하여 관문을 발송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해당 진 만호가 남원부(南原府)에서 해마다 봄에 지내는 관왕묘제(關王廟祭)의 제관(祭官)으로 이미 출발하였기 때문에 다시 사도 첨사(蛇渡僉使) 이시승(李時昇)으로 차정하였습니다.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740_040_0030_2017_061_XML
Rec-2289 각사등록_전라좌수영계록_1882_0917 18820917 null 좌사 중초관(左司中哨官) 낙안 군수(樂安郡守) 정익용(鄭益鎔)은 이달 11일에 지내는 남원부(南原府) 관왕묘제(關王廟祭)의 대축(大祝)으로 차정되어 이미 출발하였으며, 우사 우초관(右司右哨官) 고돌산 별장(古突山別將) 임희상(林喜祥)은 신병으로 파출(罷黜)된 뒤에 새 별장이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낙안군에서 군병을 취점하는 것은 그 고을 좌수(座首) 강재규(姜宰奎)로 하여금 대행하도록 하고 신의 수영 대솔 군관(帶率軍官) 전 오위장(五衛將) 이사훈(李思勳)을 파견하여 같이 거행하도록 하였으며, 고돌산에서 군병을 취점하는 것은 해당 진(鎭)의 유진장(留鎭將) 엄경무(嚴敬武)로 하여금 대행하도록 하고 신의 수영 대솔 군관 전 낭청(郎廳) 이문섭(李汶燮)을 파견하여 같이 거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740_150_0140_2017_061_XML
Rec-2290 각사등록_전라좌수영계록_1892_0907 18920907 null 이번에 도착한 본도(本道) 관찰사(觀察使) 신(臣) 이경직(李耕稙)의 관문(關文)에, “방금 전에 도착한 내서(內署)의 전보(電報)에, ‘강진(康津) 관왕묘(關王廟)와 남원(南原) 관왕묘 제향(祭享)의 날짜를 다음 달 초4일에 거행하도록 명을 내리셨습니다. 강진은 병사(兵使)가 가고 남원은 좌수사(左水使)가 가야 하는데, 날짜가 촉박하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알려 날짜를 어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제문(祭文)은 기한에 맞추어 내려 보냅니다. 제향의 절차는 순조조(純祖朝) 임진년(壬辰年, 1832, 순조32)의 전례에 따라 하되, 만약 영영(嶺營 경상도 감영)에서 예절에 관해 물을 경우에는 전문(電文)을 통해 상세히 기록해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날짜가 충분한지의 여부를 곧바로 자세히 통보해 주기 바랍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지금 막 순조조 임진년 관왕묘제의 절차에 관한 등록(謄錄)을 베껴서 본영(本營)에 보고하라는 뜻으로 관문을 작성하여 남원부(南原府)에 발송하여 신칙하였습니다. 그리고 차비 제관(差備祭官)도 차송(差送)하여 기일까지 달려가서 규례에 따라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이어서 받은 관찰사의 감결(甘結)에, “남원 관왕묘제를 다음 달 초4일에 설행할 것을 내서의 전보에 따라 방금 전에 관문을 발송하였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도착한 내서의 전보에, ‘제향의 날짜를 뒤로 연기하여 다음 달 초10일로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다시 감결을 발송하니, 상고(相考)하여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달 9월 초10일 낮에 남원 관왕묘제의 헌관(獻官)을 하기 위해 초7일에 출발하였습니다. 유영장(留營將)은 우후(虞候) 하익수(河益秀)가 아직 부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의 수영 대솔 군관(帶率軍官) 전 오위장(五衛將) 신장희(申章熙)로 차정(差定)하였습니다. 연유를 치계(馳啓)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740_220_0180_2017_061_XML
Rec-2291 각사등록_전라좌수영계록_1892_0913 18920913 null 절충 장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신 신(申) 신이 이달 9월 초10일 낮에 남원(南原) 관왕묘제(關王廟祭)의 헌관(獻官)을 하기 위해 초7일에 출발한 연유에 대해 전에 이미 치계(馳啓)하였는데, 이달 초10일 낮에 예문(禮文)에 따라 제향을 지냈습니다. 제향 점이(粘移)는 지방관 남원 부사(南原府使) 민종렬(閔種烈)로 하여금 규례에 따라 본도(本道) 관찰사(觀察使)에게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초10일에 그냥 회정(回程 일을 마치고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감)하여 13일에 수영으로 돌아왔습니다. 연유를 치계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 각사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53A_0740_220_0190_2017_061_XML
Rec-2292 갑인연행록_1권_입책록_1734_0808 17340808 null 봉황성에 도착한 이후부터 관왕묘(關王廟)와 절들이 여염집 사이에 뒤섞여 있었다. 누각은 활처럼 휘어 솟아있고 금빛 벽은 휘황찬란하며 꽃과 도구들은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한다. 심지어 집마다 부처를 모시고 벽마다 분향을 하는 것이 마을마다 있고 집집마다 있었다. 갑인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89A_0010_030_0060_2016_001_XML
Rec-2293 갑인연행록_1권_입책록_1734_0812 17340812 null 돌다리를 지나서 관왕묘로 들어가니 정문 밖에 벽돌로 된 문병(門屛)이 있는데 조벽(照壁)이라는 것이다. 높이는 3, 4장(丈)이고 너비는 5, 6칸〔間〕이며 회를 발라 물상(物像)을 세웠다. 제1문은 대들보 하나를 걸쳐서 3칸으로 나누고 기둥 위〔斗供〕에 첨차가 9겹이었다. 제2문은 들보 5개를 걸쳤는데 모두 3칸이고, 동쪽과 서쪽 협문(挾門)에는 각각 문신(門神)과 흙으로 만든 말을 세워두었다. 제3문은 정자각(丁字閣)과 비슷한 모양인데 외삼문(外三門) 중 양쪽 협문은 대(臺)위에 있고 가운데 한 칸은 누(樓) 아래의 문으로 삼았다. 안쪽의 정자각도 세 칸으로 바깥의 누각에 비해서는 조금 작았다. 모두 들보가 5개였다. 제4문은 삼가(三架)를 들보로 삼고, 동쪽과 서쪽에 협문이 있었다. 관제묘(關帝廟)의 전각은 5칸으로 사면에 퇴(退)를 내었다. 공포(控包)는 9포(包)이며 들보는 7개였다. 관제묘 앞에는 또 3칸짜리 무량각(無樑閣)을 세웠다. 관제묘 안에는 관왕(關王 관우)의 소상(塑像)이 앉아 있으니 망룡포(蟒龍袍)를 입고 면류관을 썼다. 탑(榻)의 아래에는 상(床)이 놓였고 상의 좌우에 청룡검(靑龍劒)이 세워져 있으며, 검의 서쪽에는 주창(周蒼) 동쪽에는 관평(關平)이 있다. 동쪽과 서쪽 벽의 아래에는 각각 서너 개의 불상(佛像)을 세워 두었다. 무량각 아래의 좌우에는 각각 무(廡)가 있으니 오른쪽은 조운(趙雲), 왼쪽은 장비(張飛)였다. 안팎의 문에는 금을 메워서 쓴 편액이 걸려 있었으니 ‘적금루(摘錦樓)’, ‘예배정(禮拜亭)’, ‘대장부(大丈夫)’였다. 안팎과 좌우의 문에 걸린 편액들은, ‘고금일심(古今一心)’, ‘막불존친(莫不尊親)’, ‘위진화이(威振華夷)’, ‘도배천지(道配天地)’, ‘무능위명(無能爲名)’, ‘충용의열(忠勇義烈)’, ‘영무성인(英武聖人)’, ‘정충관일(貞忠貫日)’, ‘긍고막급(亘古莫及)’, ‘지대지강(至大至剛)’, ‘충의극(忠義極)’, ‘지용겸(智勇兼)’이었다. 3문 안쪽에는 또 ‘용음(龍吟)’, ‘호소(虎嘯)’의 두 누각이 있고 누각 위에는 종과 북이 매달려 있었다. 전각 전무(殿廡)의 좌우 뜰에는 모두 10좌의 비석이 있었는데 중수(重修)하거나 속수(續修)한 전말이 쓰여 있었다. 전각은 극히 웅장하고 커서 금빛 벽이 바닥까지 찬란하게 빛났다. 사방의 벽에는 삼국 시대의 전투 장면이 단청으로 그려져 있어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 속에 둥둥 울리는 북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였다. 갑인연행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89A_0010_030_0100_2016_001_XML
Rec-2294 귀암집_11권_귀암이원정연행록_1660_0217 16600217 null 내성의 안에 영안사(永安寺)가 있고, 외성의 밖에 서회사(西會寺)가 있는데, 관왕묘(關王廟)는 외성과 내성의 사이에 있다. 서회사의 동쪽에 또 관왕묘가 있고, 서회사의 북쪽에 광우사(廣祐寺)가 있는데 모두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며 누각이 아득히 솟아 있고 행랑이 주위를 두르고 있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귀암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507A_0010_020_0280_2017_001_XML
Rec-2295 귀암집_12권_귀암이원정연행록_1670_0808 16700808 null 아침에 삼하(三河)를 출발하여 다시 남문을 나서 몇 리쯤 가니 길가에 비석이 있는데 ‘의총(義塚)’이라는 큰 2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옆에 10여 개 무덤이 있는데 만력 연간 등명이(鄧明易) 등 5인이 세운 것이다. 하점(夏店)의 관왕묘(關王廟)에서 아침을 먹었다. 귀암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507A_0020_010_0330_2017_001_XML
Rec-2296 금역당집_6권_비명_무안관왕묘비명 null 關王廟徧宇內。惟屬國無所建。有明萬曆卄六年夏四月。都司薛侯虎臣奉命東征。駐營本府。勝算未決。軍吏多暇。乃謀諸同駐諸將曰。惟玆關王。血食中土。蓋祀典然也。顧惟朝鲜。恭事天朝。實同內服。未有王廟。大爲欠典。當此搶攘。以神道詔民。用兵之道也。盍立像宇。以妥王靈。以鎭夷禍。於是。擇地於府城西北隅。背鶴面洛。盤鬱爽塏。乃伐石鳩材。鐫治甫訖。未及揭虔。令申征勦。馳圍賊巢。適天心悔禍。夷酋自斃。厥將淸正以下。亦讋服天威。胆裂潛遁。是年冬十有二月。奏凱還營。侯乃卜吉。以某日朝。恭奉牲齊。俯伏灌薦。肸蠁旣通。卽稽首告曰。炎灰旣冷。姦雄割據。惟王義勇拔萃。知所去就。結帝冑於桃園。刺顔良於敵陣。降于禁。斬龎德。威振華夏。賊謀避鋒。誠蓋世豪也。矧玆島夷。構禍孔棘。匪王之靈。無以鎭之。靈在天下。如水在地。孰云遐僻而不可居。夤緣征夷。獲創祠宇于異域南。敢與同志。釁于祠下。威風颯爽。永鎭靑丘。三獻禮畢。神人以和。軍吏詠歎。合辭以請。願章于石。伻來謁辭。以示無極。龍吉海外鯫生也。斯擧甚盛。筆之所屬。可非其人。旣以知遇之厚。欲謝不能。仍竊惟念王之英魂毅魄。千載未泯。化而爲轟霆烈日。以陰隲下土方。所以能感我聰明神武之聖衷。崇爵追諡。著祀令式。二百有餘歲。信乎君臣相遇。不以異代而有殊也。今我薛侯之來也。以不滅賊爲深恥。卽王之忠節也。軍卒不敢犯秋毫。卽王之號令也。邑人固嘗頌侯之德。侯方且列柵浚堭。除器積糧。日夜蕫治。爲戰守計。又以暇日。倡建斯宇。使屬國士庶。知所興起。眞朝暮遇之者。幸而賊人先遁。不克大成先登斬將之勳。雖人事之允臧。實鬼謀之孔協。乃敬篆而詩之。俾刻焉。 관왕묘(關王廟)는 중국에는 두루 있으나 다만 속국(屬國)에는 세워진 것이 없다. 명나라 만력(萬曆) 26년(1598, 선조31) 여름 4월에 도사(都司) 설후 호신(薛侯虎臣)이 왜적 정벌을 명받고 와서 본부(本府)에 진영을 주둔하였는데, 승산(勝算)이 결정되지 않아 군리(軍吏)가 한가한 틈이 많았다. 그래서 함께 주둔하던 여러 장수에게 의논하여 말하기를 “이 관왕(關王)은 중국에서는 혈식(血食)을 하니, 제사를 지내는 예전(禮典)이 그러하다. 생각건대 조선은 중국〔天朝〕을 공경히 받들어 실로 내복(內服)과 같은데, 관왕묘가 아직 없으니 크게 흠이 된다. 지금처럼 혼란하고 어수선한 때에 신도(神道)로써 백성을 이끄는 일은 용병(用兵)의 방법이다. 어찌 상(像)과 사당을 세워 관왕의 영령을 편안하게 하고 그로써 오랑캐의 화를 진압하지 아니하는가?”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부성(府城)의 서북쪽 모퉁이에 길지(吉地)를 택하였다. 학가산(鶴駕山)을 등지고 낙동강(洛東江)을 향하여 우거진 숲에 둘러싸였으며, 시원하게 탁 트인 곳이었다. 곧 돌을 채취하고 재목을 모아서 새기고 다듬기를 겨우 마치고 미처 봉안하지도 않았는데, 거듭 토벌하고 괴롭히면서 적의 소굴을 포위해 갔고, 마침 하늘이 환난을 내린 것을 후회하였는지 오랑캐의 우두머리가 저절로 죽어 그의 장수 청정(淸正) 이하가 또한 명나라 군대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간담이 서늘해져서 몰래 달아났다. 이해 겨울 12월에 승리를 상주(上奏)하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설후(薛侯)가 곧 길일(吉日)을 정하여 아무 날 아침에 제물을 공손히 받들고 엎드려 절하고 정성스럽게 올리니 영감이 이미 통하였다. 머리를 조아리고 고하기를 “불타고 남은 재는 이미 식었지만 간사한 무리가 여기저기 숨어 있었는데, 오직 관왕만이 빼어난 용맹으로 나아갈 바를 알고, 도원(桃園)에서 제주(帝冑)와 결의하였습니다. 적진에서 안량(顔良)을 찌르시고 우금(于禁)을 사로잡으며, 방덕(龎德)의 목을 베니, 위엄이 중국〔華夏〕에 떨쳐 적들은 관왕의 예봉을 피할 꾀만 찾았으니, 진실로 세상을 뒤엎는 호걸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섬나라 오랑캐가 급박하게 화란(禍亂)을 일으키니, 관왕의 영령이 아니면 진압하기 어렵습니다. 영령이 세상에 머물기를 물이 땅 위에 있는 듯하니, 누가 ‘멀리 궁벽하여 머물 수 없다’라고 말하겠습니까. 계속 오랑캐를 정벌하면서 이역(異域)의 남녘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감히 동지(同志)들과 더불어 사당 아래에서 희생(犧牲)을 바칩니다. 시원스런 위풍(威風)으로 길이 청구(靑丘)를 편안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삼헌례(三獻禮)를 마치니, 신(神)과 사람이 화합하고 군리(軍吏)가 영탄(詠歎)하였다. 다 같이 청하기를 비석에 새기자고 하고 사람을 보내어 글을 청하여 후세에 영원히 보이려고 하였다. 나는 바다 건너의 변변치 못한 사람이며, 이 일은 매우 성대하여 글을 부탁한 사람이 적임자가 아니다. 이미 두터운 인정〔知遇〕을 받은 뒤여서 사양하고자 해도 사양할 수 없었다. 이에 삼가 생각건대, 관왕의 빼어나고 굳센 혼백(魂魄)은 천 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우렁찬 천둥소리와 뜨거운 햇살이 되어 암암리에 이 땅을 도와주니, 총명하고 신무(神武)하신 우리 임금님의 마음에 감응하신 까닭이다. 관작을 높이고 시호(諡號)를 추증하며, 법식을 갖춰 제사한 지가 2백여 년이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는 일이 시대가 다르다고 하여 달라지지는 않는다.’던 말이 참으로 옳다. 지금 우리 설후가 이 땅에 와서 적을 멸하지 못한 일을 깊이 부끄러워함은 관왕의 충절이고, 군졸들이 추호도 법을 어기지 못함은 관왕의 호령이다. 고을 사람들이 진실로 일찍부터 설후의 덕을 칭송하고 있다. 설후는 또 목책을 둘러치고 해자를 깊이 파며, 무기를 손질하고 군량을 비축하는 등, 밤낮으로 감독하여 전투 준비를 하였다. 또 바쁜 중에도 여가를 틈타 이 사당을 창건하여 조선 백성들이 떨쳐 일어날 것을 알게 하니, 참으로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사람으로서 행복하다. 왜적이 미리 도망가 버려서 맨 먼저 성에 올라 적장(敵將)의 목을 베는 공을 크게 이루지는 못하였다. 비록 사람이 하는 일이 정말 착하더라도 정말 귀신이 크게 도와야 하는 것이다. 이에 공경히 전자(篆字)로 시를 지어 새기게 하였다. 금역당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59A_0070_020_0010_2014_002_XML
Rec-2297 낙전당집_7권_기_유금강소기 null 出城日雨甚。到關王廟。天章兄弟與建中邀飮。天章索我扇。題贈一絶。我左相自光陵奉審還。持國亦會。見余扇頭詩。易一字而去。 성을 나서는 날에 비가 심하게 내렸다. 관왕묘(關王廟)에 도착하니, 천장(天章 이명한(李明漢)) 형제와 건중(建中 홍주원(洪柱元))이 맞이하여 술을 마셨다. 천장이 나의 부채를 찾더니 절구 한 수를 써 주었다. 우리 좌상은 광릉(光陵)에 봉심(奉審)하러 갔다 돌아왔고, 지국(持國 장유(張維))도 왔다. 내 부채에 쓴 시를 보고는 한 글자를 고치고 떠났다. 낙전당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35A_0080_010_0130_2017_002_XML
Rec-2298 노봉집_10권_잡저_연행일기 16691217 丙子朝發。秣馬榛子店之關王廟。流川在廟前。駕石爲橋。夕投豐潤縣。僦宿漢人曹重輝家。是日行一百十里。 병자일(丙子日). 아침에 출발하여 진자점(榛子店)의 관왕묘(關王廟)에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흐르는 시냇물이 관왕묘 앞에 있었는데, 돌을 얹어 다리를 만들었다. 저녁에 풍윤현(豐潤縣)으로 들어가서, 한인(漢人) 조중휘(曹重輝)의 집에 가서 잤다. 이날은 110리를 갔다. 노봉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92A_0110_010_0080_2016_003_XML
Rec-2299 무명자집_시고_1책_시_01 null 東南關廟屹 / 西北佛宮羅 동쪽 남쪽 관왕묘(關王廟) 우뚝히 섰고 / 서쪽 북쪽 절간들이 즐비하구나 무명자집_윤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6A_0010_010_1570_2015_001_XML
Rec-2300 무명자집_시고_2책_시_01 null 泮儒祗迎。東則於關王廟傍。西則於慕華館革橋傍。作班於路邊。掌議押班。待天樂漸近玉輦繞過。一齊鞠躬。今之鞠躬。乃伏地也。 東傍關祠西革橋 / 路邊成列聽簫韶 / 鞠躬只待鑾輿近 / 掌議押班肅不囂。 성균관 유생들이 어가를 공손히 맞이할 때 동쪽의 경우 관왕묘(關王廟) 옆, 서쪽의 경우 모화관(慕華館) 혁교(革橋) 옆의 길가에 도열하는데, 장의(掌議)가 대열을 정돈시킨다. 임금의 행차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가 점차 가까워져 어가가 지나갈 때면 일제히 ‘국궁(鞠躬)’하는데, 오늘날 국궁이라 하는 것은 땅에 엎드림을 이른다. 동쪽이면 관왕묘 옆, 서쪽이면 혁교 옆의 / 길가에 도열하여 취타 소리에 귀 기울이다 / 어가가 가까워지면 땅에 엎드리는데 / 장의가 정돈시켜 엄숙하고 조용하네 무명자집_윤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6A_0020_010_0160_2015_002_XML
Rec-2301 무명자집_시고_2책_시_02 null 假令才足追蘇黃。未必關公自主張。况我一毫猶不盡。安能感格彼蒼蒼。 소동파(蘇東坡) 황산곡(黃山谷)과 같은 재주가 있더라도 / 관우(關羽)가 과거 급제를 정해주진 못하네 / 더구나 나는 한 자루의 붓도 모지라지지 않았는데 / 저 하늘을 어떻게 감동시킬 수 있으랴 무명자집_윤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6A_0020_010_1450_2015_002_XML
Rec-2302 무명자집_문고_14책_답태소서 null 去冬以朝令。結丐者之幕於吾家至近之處。洞內上下人皆苦之。欲逐去他處而無計可施。原居兩班。捉致洞任。使之逐送。而不肯聽從。訴于部官。部官躬來督役。成之而去。於是丐兒來集。衆情雖不欲。莫可奈何。有人言于洞內一兩班曰。此易耳。若招致南廟守僕語之曰。此南廟之路也。今結丐幕。必不㓗凈。祈禱之類。將皆還去。不可不逐丐幕。而亦不可以此爲言。須以南廟主脉爲言。告于主將則可逐矣。乃如其計。招語守僕。守僕喜而從之蓋。外托主脉之說。而其實則恐阻祈禱之路也。於是不移時。果撤去。乃知世事之難成。患無智略耳。苟有智略。則天下無不可爲之事矣。 작년 겨울에 조령(朝令)으로 거지들의 천막을 우리 집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치도록 하였습니다. 동네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괴롭게 생각하였지만 다른 곳으로 쫓아내고 싶어도 어떻게 해볼 묘안이 없었습니다. 원래 살던 양반들이 동임(洞任)을 잡아와서는 그에게 쫓아 보내게 하였지만 동임은 따르려 하지 않았고, 부관(部官)에게 호소하였으나 부관은 직접 와서 일을 독려하더니 일이 끝나자 떠나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거지들이 몰려오니, 많은 사람들이 비록 원하지 않았지만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동네의 한 양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간단합니다. 만일 남묘(南廟)의 수복(守僕)을 불러와서 그에게 ‘이것은 남묘로 가는 길이다. 지금 거지들의 천막을 치면 필시 불결할 것이니,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러니 거지들의 천막을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또한 이것을 가지고 말해서는 안 되고, 남묘의 주맥(主脈)을 가지고 말을 만들어 주장(主將)에게 고해야 한다.’라고 하시면 쫓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 계책대로 수복을 불러 얘기하자, 수복이 기뻐하며 이 말대로 하였습니다. 겉으로는 주맥설을 핑계 댔지만 사실은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의 길이 막힐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천막을 철거하니, 이루기 어려운 세상일도 단지 지략이 없는 것만 걱정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참으로 지략만 있다면 천하에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무명자집_윤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6A_0200_000_0260_2014_016_XML
Rec-2303 문곡집_1권_시_광녕차부사운_원운 null 關防形勝一方雄。雉堞逶迤迥入空。楡塞悲風羌笛裏。巫山愁色夕陽中。荒原半閉關王廟。彩石猶傳驃騎功。今日可堪千古恨。寒泉嗚咽幾時窮。 관문의 형승이 한 지방에 웅장한데 / 성가퀴 구불구불 저 멀리 허공으로 드누나 / 오랑캐 피리 속 임유관은 슬픈 바람 / 석양 가운데 의무려산은 근심스러운 빛 / 황량한 평원에 관왕묘 반쯤 닫혔는데 / 고운 빛깔 바위는 표기장군 공 전하누나 / 오늘날 천고의 통한 견뎌낼 수 있을까 / 한천의 오열 어느 때나 다할런고 문곡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97A_0010_010_1110_2015_001_XML
Rec-2304 미산집_11권_공조판서문헌공묘갈명 null 壬午以迎接官。儐吳提督長慶於東廟。差承文提調。 임오년(1882)에 영접관(迎接官)이 되어서 제독 오장경(吳長慶)을 동묘(東廟)에서 접대하였고, 승문원 제조가 되었다. 미산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645A_0120_040_0080_2016_005_XML
Rec-2305 벽로집_벽로속집_3권_관제묘_1수 null 家家關帝妥威靈。 晨夕虔誠薦酌馨。 五廟東邦猶欠禮。 龍年眷顧感冥冥。 집집마다 관제(關帝)의 위령(威靈)을 안치하여 / 아침저녁으로 정성 다해 술잔을 올리네 / 오묘 모시는 우리 동방 오히려 예에 부족하니 / 임진년에 돌보심이 까마득하게 느껴지네. 벽로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541A_0040_010_0190_2019_001_XML
Rec-2306 벽로집_벽로속집_3권_관제묘_1수_시평 null 眷顧東邦, 有加中國, 而五所崇尊, 果是虧禮. 조선을 돌봐 주심이 중국보다도 더함이 있으나 다섯 곳에서만 존숭하는 것은 과연 예에 부족한 것이다. 벽로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541A_0040_010_0190_2019_001_XML
Rec-2307 벽로집_벽로속집_3권_관제묘_2수 null 嚴威象照若平生。 親作父師尊聖明。 王春正統三分業。 華夏長留萬古名。 위엄 있는 모습이 평소와 같으니 / 친히 부친과 스승 되어 성스러운 천자 숭상했네. / 왕업의 정통 이어 삼분천하 대업 세워 / 중국에서 길이길이 만고 명성 남기었네. 벽로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541A_0040_010_0200_2019_001_XML
Rec-2308 병산집_2권_시_관왕묘 null 神馬奔如電。洋洋在帝傍。寧隨天竺骨。來顧爾肴觴。 적토마는 빠르기가 번개 같아서 / 의기도 양양하게 관제 곁에 있더니만 / 어찌하여 천축의 뼈 따라다니다 / 여기에 와 너는 술상이나 돌아보는가 병산집_이관명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458A_0020_010_0250_2016_001_XML
Rec-2309 북경록_1826_1128 18261128 轉至關帝廟, 制度之奇巧細密, 比我東, 不啻十倍, 宏偉等之。 돌아서 관제묘(關帝廟)에 이르렀다. 제도가 기이하고 교묘하며 세세하고 조밀한 것은 우리나라와 비교해 10배 이상이었고, 크고 웅장한 것은 같았다. 북경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536A_0010_010_0360_2019_001_XML
Rec-2310 북경록_1826_1201 18261201 忙忙下車, 遂與一能周經, 直出街上, 見關帝廟。 八位塑像, 各安龕供之, 各有七位神禆護侍, 偃然若有知。 其中主壁, 爲關帝塑像, 比我國南廟神像, 其大不啻倍之。 重廊疊閣, 雄深宏傑, 亦可十倍。 급하게 수레에서 내려서 드디어 일능(一能)과 주경(周經)과 함께 곧장 거리로 나가 관제묘(關帝廟)를 살펴보았다. 8위(位)의 소상(塑像)을 각각 감실에 안치하여 공양하고 각각 7위의 신비(神禆)가 호위하며 모시고 있었으니, 엄숙하여 마치 지각이 있는 듯하였다. 그 중간의 주벽(主壁)에 있는 것이 관제(關帝)의 소상이다. 우리나라 남묘(南廟)의 신상(神像)에 비하면 그 크기가 배 이상이었다. 겹겹의 회랑(回廊)과 첩첩의 누각(樓閣)이 웅장하고 깊으며 굉장하고 훌륭한 것은 또한 열 배는 되었다. 북경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536A_0010_010_0380_2019_001_XML
Rec-2311 서원등록_1684_0902 16840902 null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사명(李師命)이 올린 장계(狀啓)에, ‘강진(康津)의 고금도(古今島)에 명(明)나라 군대가 주둔하였을 때, 명나라 도독(都督) 진린(陳璘)이 관왕묘(關王廟 관우(關羽)의 위패를 모신 사당)를 건립하였는데 훼손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작년 가을에 재목을 모아서 사당을 수리하였는데, 그 옆에 별도로 사우(祠宇) 하나를 지어 도독 진린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이순신(李舜臣)을 배향(配享)하였습니다. 그 묘호(廟號)ㆍ사전(祠典)ㆍ신주(神主)ㆍ법식(法式)ㆍ향촉(香燭)ㆍ희생물을 결정하여 영구히 준행(遵行)하는 토대로 삼도록 해조(該曹)로 하여금 지시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명나라가 왜적이 침입하였을 때 도와준 은혜와 훌륭한 신하들이 국가를 회복(恢復)한 공적은 진실로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것인데, 세월이 이미 오래 지났음에도 옛 터가 여전히 보존되어 있어 지금과 예전을 생각하면 느껴지는 바가 있으니, 위패를 안치하고 제사 지내려는 것은 진실로 표장(表獎)하여 높이 받들고 변방의 백성들을 격려하는 뜻에서 나온 바로서, 장계대로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다만 진 도독(陳都督)의 사전(祀典)과 신판(神版)의 법식은 이여송(李如松)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향사하는 평양(平壤) 무열사(武烈祠)의 법도에 따라 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희(康熙) 23년(1684) 9월 초2일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신(臣) 김재현(金載顯)이 담당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한다고 계하(啓下)하였다. 서원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87A_0040_100_0010_2016_002_XML
Rec-2312 서원등록_1695_0820 16950820 null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향실(香室)의 관원이 보고한 것을 지금 접하였는데, 평안도(平安道) 영유현(永柔縣)에 있는 제갈 무후(諸葛武侯)의 사우(祠宇)에 악 무목(岳武穆)을 합향(合享)하는 제문(祭文)에 있는 두사(頭辭)는 일찍이 전례가 없으니, 어느 하나를 지목해서 분부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禮)에 없는 예(禮)로서 신(臣)의 조(曹)에서 갑자기 억측하여 단정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예전의 예(例)에 따라서는 말할 수 있으니, 관왕묘(關王廟)의 치제문(致祭文)에 따라 글을 짓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이렇게 분부하도록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니, 알았다고 전교(傳敎)하였다. 서원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87A_0040_210_0110_2016_002_XML
Rec-2313 서원등록_1703_0809 17030809 null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임금께서 전교(傳敎)하기를, ‘성주(星州)와 안동(安東)에 관왕상(關王像)의 유무(有無)를 본도(本道)로 하여금 계문(啓聞)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어제 본도에서 올라온 장문(狀聞)을 보니, 성주에는 과연 유상(遺像)과 묘우(廟宇)가 있어 관아로부터 묘우를 지키는 사람을 두고, 훼손될 때마다 보수하였습니다. 안동의 경우에는 여러 사찰의 근처에 두어 중들로 하여금 수호하게 한다고 하니, 착실함이 너무나 결여되어 있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성주와 안동 두 고을에 있는 관무안왕(關武安王)의 유상과 묘우는 모두 애당초 당(唐)나라 장수가 건립한 것으로, 성주에서는 이미 그곳의 수령〔本官〕이 훼손된 것을 보수하여 수호함을 폐지하지 않고 있는데, 안동의 경우에는 중간에 사찰 근처로 이전하여 건립하고, 중들로 하여금 지켜 보호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똑같은 묘우인데도 안동에서만 중들에게 지키는 일을 맡겨, 관아에서 지키고 보호하는 일이 없어서 너무나 착실함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성상(聖上)의 전교처럼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묘직(廟直)을 정하고 보수하는 일을 성주의 예와 같이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따라서 이 뜻을 본도에 분부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傳敎)하였다. 서원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87A_0040_290_0040_2016_003_XML
Rec-2314 서하집_1권_부_관왕묘부 null 嘉春日之孔麗兮。步余馬乎江皐。得古廟於城南兮。懷英靈兮忉忉。儼遺像之若在兮。環壯士之槊刀。入廟門而祗肅兮。羞余肴兮挹余醪。吁嗟將軍兮。振世之豪。騂顏戟髥兮。怒而雷號。雄心猛志兮。世無爾曹。舞劍獨進兮。殱良醜如拔毛。斬關徑出兮。操莫遏其西逃。秉奇節而一意兮。扶漢業於蓬蒿。雖時世之阨艱兮。幸知己之是遭。焚艨衝而蹶魏兮。我有事乎西方。借荊土而峙鼎兮。奉草廬之經營。留猛將於上游兮。保千里之封疆。介二方而雄視兮。期王業之潛張。撫長劍而一顧兮。涉中原而高驤。揚威靈而北出兮。得余志而翺翔。孰嬰鋒而納馘兮。爭紹我以壺漿。惟許下之老賊兮。亦怊悵其難當。彼孫權之豎子兮。曾不保余好姻。利甘言而奉盜兮。遂潛師而圖親。方務進而不悟兮。實天喪余虎臣。痛伯業之中淪兮。奚恤侯之一身。匪人謀之或爽兮。諒天心之不仁。功背時而莫就兮。勢隨遇而屈伸。而時勢之適然兮。亦何誅乎東隣。從新附之一州兮。仗大義而橫行。將飮馬於洛水兮。庶馘曹於鄴城。復高光之遺土兮。淸四海而永寧。雖初志之不立兮。實耿耿余精誠。無右臂而孑立兮。保巖阻而頓兵。提孤師而出秦兮。信孔明之無成。嗚呼。惟智勇與才力兮。寔天民之俊英。然得之而不善用兮。免盜亂爲蓋寡。顧義勇之能兼兮。世未有如將軍也。忠魂著而不滅兮。駕電車兮驅神馬。出八荒而窮渺茫兮。求正直焉是輔。受百王之崇報兮。廟宇達於東土。瞻英儀而極遡兮。諒余心之獨苦。 아름다운 봄날이 좋아 / 말 타고 강가 거닐다가 / 성 남쪽에 오래된 사당 보고는 / 영령을 생각하며 수심에 잠기네 / 엄숙한 유상은 살아 있는 듯한데 / 장사의 창과 칼 둘러 있구나 / 사당문 들어가 공경하고 엄숙하게 / 술과 안주 올리노라 / 아 장군이여 / 세상에 이름 떨친 호걸이었네 / 붉은 얼굴에 창 모양 수염으로 / 성나면 우렛소리 냈고 / 웅대하고 용맹한 심지는 / 세상에 이런 무리 없었지 / 칼 휘두르며 홀로 나아가 / 터럭을 뽑듯 안량과 문추 죽였고 / 성문 빗장 부수고 곧바로 나가니 / 서쪽으로 달아나는 장군을 조조는 막지 못했네 / 뛰어난 절개 잡고서 한결된 마음으로 / 초야에서 한나라 왕업을 도우니 / 비록 험난한 시대였으나 / 다행히 자신을 알아주는 이 만났다오 / 몽충을 불살라 위나라 쓰러뜨리고는 / 서방에서 일함이 있었으니 / 형주 땅 빌려 삼국으로 분립하여 / 초려에서 구상한 것 실천하였네 / 요충지에 맹장 머무르게 하여 / 천 리 강토를 보전케 하니 / 두 나라 사이에서 위엄 있게 바라보며 / 왕업이 은밀히 펴지기를 기약했다오 / 장검 어루만지며 한번 돌아보고는 / 중원으로 가서 유린하였고 / 신령한 위명 떨치며 북쪽으로 출정해 / 뜻대로 이루고는 유유히 노닐었네 / 누가 예봉을 범해 머리 바쳤던가 / 병에 장물을 담아서 앞다퉈 섬겼고 / 허창의 노련한 적도 / 대적하기 어렵다며 낙담했지 / 저 손권이란 놈이 / 일찍이 인척의 우호 지키지 않고 / 감언이설 이롭게 여겨 도둑질하니 / 드디어 몰래 출병하여 친척의 나라 도모했네 / 진격에만 힘쓰다가 깨닫지 못하여 / 하늘이 범 같은 신하 잃게 하니 / 패업이 중도에 무너져 비통해라 / 어찌 일신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리 / 사람의 도모함이 간혹 어그러진 것이 아니라 / 진실로 하늘의 마음이 어질지 못함이라오 / 공업은 시대와 어긋나면 이룰 수 없고 / 형세는 처한 상황에 따라 굽히고 펴는데 / 시대와 형세가 마침 이러하였으니 / 또한 동쪽 이웃 나라 어찌 주벌하랴 / 새로 귀속된 형주로부터 / 대의를 잡고 횡행하여 / 장차 낙수에서 말에게 물 먹이고 / 부디 업성에서 조조의 목 베어 / 고조와 광무제의 땅 회복해서 / 천하를 맑게 해 영원히 안정시키려 했나니 / 비록 초심을 이루지 못했지만 / 실로 비범한 정신이었네 / 오른팔 없이 외로이 서서 / 험준한 지역 보전하며 주둔하다가 / 외로운 군대 이끌고 출정했으니 / 제갈공명이 성공하지 못함은 당연하도다 / 아 지혜, 용기, 재능을 갖추면 / 이는 하늘이 낸 인걸이지만 / 이를 얻고도 잘 사용하지 못하면 / 도둑질과 난리 일으킴이 어찌 적지 않으랴 / 돌아보건대 의리와 용기 겸한 인물로 / 세상에 장군만 한 이 없었으니 / 충성스런 영혼은 사라지지 않아 / 우레 수레에 멍에 하고 신마를 몰며 / 팔방의 아득히 먼 곳까지 돌아다니니 / 정직을 구하는 데 도움 준다오 / 백왕의 융숭한 보답받아 / 사당이 조선에까지 세워졌네 / 훌륭한 의표 바라보며 회고하매 / 진실로 나 홀로 고심하누나 서하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408A_0010_020_0020_2019_001_XML
Rec-2315 소호당집_10권_안효제전 null 先是十九年軍變。王后閔氏避居忠州。有湖西李媼 金氏妻 來謁自言是關王之女。關王者關羽也。媼因言后於某月日當復位。及期果驗。后大奇之。及還京。令媼陪從。爲起北關王廟於宮城東北隅以處之。賜號曰眞靈君。其所言無不聽從。內外官職之除拜。多出其口。於是士大夫之奸愚者紛然趨之。至有呼爲母姊者。孝濟聞而憤歎。至三十年七月。上疏千餘言。請斬李媼以謝國人。因極陳當時廣設齋醮。害政糜財之失。上與后覽而大怒。留疏不下。李媼假子李裕寅,閔泳柱等。嗾宋廷燮輩。疏攻孝濟請投遠外。上乃命安置于楸子島。 이보다 앞서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왕후 민씨(閔氏)는 충주(忠州)로 피신하였다. 호서(湖西)의 이 노파(李老婆) 김씨(金氏)의 아내 가 왕후를 배알하고 자신은 관왕(關王)의 딸이라고 하였는데, 관왕이란 관우(關羽)이다. 이 노파는 인하여 왕후에게 모월 모일에 응당 복위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날이 되어 과연 말한 그대로 되니, 왕후가 크게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서울로 돌아오게 되자, 이 노파로 하여금 자신을 배종하게 하고, 궁성 동북쪽에 북관왕묘(北關王廟)를 지어서 거처하게 하고는, 진령군(眞靈君)이라는 호를 내려 주고, 그녀가 말하는 것은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으니, 내외 관직의 제수도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 사대부들 중 간사하고 우둔한 자들은 분분히 좇아서 심지어는 어머니니 누님이니 하고 부르는 자들까지 있게 되니, 효제는 듣고서 분하고 한스럽게 생각하였다. 고종 30년(1893) 7월에 천여 자나 되는 상소를 올려 이 노파를 베어서 나라 사람들에게 답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당시에 널리 재초(齋醮)를 열어서 정사를 해치고 재정을 탕진하는 것을 극언하였다. 임금과 왕후가 상소를 읽고 크게 노해서, 머물려 둔 채 승정원에 내려보내지 않았다. 이 노파의 가자(假子) 이유인(李裕寅)과 민영주(閔泳柱) 등이 송정섭(宋廷燮) 등을 사주하여, 상소하여 효제를 공박해서 원방으로 귀향을 보내도록 청하게 하니, 임금은 추자도(楸子島)에 안치하도록 명하였다. 소호당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658A_0170_010_0040_2020_004_XML
Rec-2316 수사한필_상편_시_관제묘 null 在在皆祠廟, 丹宮復碧樓. 倘聞英魄降, 秪爲福田求. 褻卜叢神竝, 崇奉釋氏浮. 莫嚴名與分. 公昔讀春秋. 가는 곳마다 모두 사묘(祠廟)라 / 붉은 궁궐에 푸른 누각이로다 / 영령한 혼백이 내려왔다고 듣기만 하면 / 다만 복을 구하러 가지 / 무람없이 여러 신에게 점을 치고 / 허황되게 부처를 높이 받드네 / 명분을 엄히 하지 못할 때에 / 공도 예전에 《춘추》를 읽었겠지 수사한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539A_0020_010_0880_2019_001_XML
Rec-2317 수사한필_하편_문_관제묘 null 正陽門右側有關帝廟, 殿宇窄迫. 自明時最著靈應, 萬曆間冊尊帝號, 而太常祭祀 【祭用五月十三日】, 仍舊稱漢前將軍侯志也. 至今拈香祈願, 抽籤決疑者無虛日. 右廡矮簷, 內隱一碑, 修撰焦竤撰, 庶吉士董其昌書, 字體遒媚可愛. 所過遼ㆍ薊ㆍ燕數千里內, 家家祀關帝, 十家之聚, 必有一廟. 州縣及大都, 廟貌尤極雄麗, 而正陽之廟, 故蹟可紀, 故特表焉. 정양문(正陽門) 오른편에 관제묘(關帝廟)가 있는데, 전우(殿宇)가 협소하다. 명나라 때부터 영응(靈應)이 가장 드러난 곳으로, 만력(萬曆) 연간에 ‘제(帝)’의 칭호로 높여 봉하고 태상시(太常寺)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5월 13일에 제사를 지낸다.】, 옛날 칭호대로 ‘한(漢)나라 전(前) 장군(將軍) 후(侯)’로 기록하였다. 지금까지도 향을 피워 소원을 빌며, 제비를 뽑아 의문을 해결하려는 사람이 없는 날이 없다. 오른쪽 행랑은 처마가 낮고 안에는 비(碑) 하나가 숨겨져 있는데, 수찬(修撰) 초굉(焦竤)이 비문을 짓고, 서길사(庶吉士) 동기창(董其昌)이 글씨를 썼다. 자체(字體)가 굳세고 아름다워서 사랑할 만하였다. 지나온 요동(遼東)ㆍ계주(薊州)ㆍ연경(燕京) 수천 리에 집집마다 관제(關帝)에 제사를 지내고, 열 집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관제묘 하나가 있다. 주현(州縣)과 대도(大都 북경)의 관제묘는 더욱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한데, 정양문의 관제묘가 기록할 만한 고적(古蹟)이므로 특별히 여기에 드러낸다. 수사한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539A_0030_010_0120_2019_001_XML
Rec-2318 어우집_2권_시_관왕묘 null 關王遺廟四方同。雕繪丹靑百巧窮。禮享反多宣父殿。淫祠還類釋迦宮。誰知聖代褒忠意。轉作愚黎尙鬼風。君子惟論惠廸吉。神雖欲福渠何功。 관왕의 남은 사당은 사방이 똑같으니 / 온갖 재주 다하여 단청을 그렸네 / 제향은 도리어 공자묘보다 성대하고 / 음사인지라 도리어 절과 비슷하네 / 누가 알았으랴 성군이 충성을 기린 뜻이 / 어리석은 백성이 귀신 숭상하는 풍속이 될 줄 / 군자는 오직 선을 따르면 길하다고 말할 뿐 / 신이 복을 내리려 한들 그에게 무슨 힘이 있으랴 어우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65A_0030_010_0210_2017_001_XML
Rec-2319 어우집_후집_2권_시_제관왕묘 null 句龍尊奉等宣翁。不料雲長祭秩同。四海九州香火遍。禮容還復到吾東。 구룡을 선옹처럼 모시고 받들더니 / 운장까지 제사 등급 같아질 줄 몰랐네 / 사해와 구주에서 향불 두루 피우더니 / 엄숙한 모습이 다시금 우리 동방에 이르렀네 어우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65A_0110_040_0280_2019_004_XML
Rec-2320 제호집_8권_시_동성만망 null 高城獨上思無聊。世事浮雲已寂寥。砧杵小村煙淡淡。旅人歸路馬蕭蕭。溪聲暮入關王廟。草色遙連普濟橋。舅氏林莊隔山外。一回東望一魂消。 고성 홀로 오르니 생각도 무료하고 / 세상사는 부운처럼 이미 쓸쓸하기만 / 마을 연기에 절구와 다듬이 들리고 / 나그네 돌아오는 길에 말울음 소리 / 저녁 시내소리 관왕묘에 들려오고 / 풀빛은 멀리 보제교까지 이어졌네 / 외삼촌 별장은 건너 산 밖에 있으니 / 동쪽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안타깝네 제호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90A_0090_010_0030_2015_001_XML
Rec-2321 존재집_21권_관왕묘강진중수기 null 維我朝鮮。於中華爲偏僻小邦。古今之島。於我國爲僻陋小島。若漢壽亭侯尙以荊益爲偏安而矢死呑孫曺者。乃於壬辰之變。顯聖天將。願留塑像。是其意必非偶然也。時則有若李忠武公實以水軍統制。征討倭寇。其盡瘁死國之義。同於諸葛武侯。折衝之略。蹈刃之勇。逼於翼德子龍。况其水戰之法。出沒神鬼。摧拉霆電。雖島夷之陸於水者。撞之必鏖。片舸不活。恒勝於赤壁之千古一戰。苟使李公載蒙鬪艦。自荊州順流東下。孫陸狐鼠輩。當一鼔而梟之旝下無疑矣。關公不沫之靈。神會千載。必欲卜也。嗚呼盛哉。河侯以余在廟之近地。詳其首末。使介以言曰。非敢謂腆也。亦宜有記。余雖與侯無雅分。維以爲斯廟之食於玆土。爲神之有功於邦家也。若不虔共於廟。是忽忘於邦家也。忽忘邦家者。是關王,李公之不貸也。瞻拜之際。能有不泚於顙乎。泚猶不思。晏然以專鎭之符。坐糜俸錢者。彼何心哉。乃若河侯獨能以廟靈之心爲心。忠君籌邊之誠。先著於修廟之役。其將功以志成。事之不負於國。爲王干城可必也。苟使後來者皆如河侯志。則其爲王臣之職。豈古今島一廟而已。余於是不辭而書之。暮春且將謁于廟。因喜以是而爲乘韋焉。 우리 조선은 중국에서 볼 때 외지고 작은 나라이며, 고금도(古今島)는 우리나라에서 외지고 보잘것없는 작은 섬이다. 형주(荊州)와 익주(益州)에 있는 것을 편안한 계책이라 여기면서도 손권(孫權)과 조조(曹操)의 땅을 차지하려고 죽음으로 맹세했던 한수정후(漢壽亭侯 관우(關羽))의 경우, 임진왜란 때 훌륭한 명나라 장수가 관우 조각상을 여기에 두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니, 이는 그 뜻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시 이 충무공(李忠武公)께서 실제 수군통제사로 있으면서 왜구를 정벌하였다. 충무공이 온 힘을 다해 나라에 목숨을 바친 의리는 제갈무후(諸葛武侯 제갈량(諸葛亮))와 같고, 적을 반드시 이기는 모략이나 우뚝한 용맹은 익덕(翼德 장비(張飛))과 자룡(子龍 조자룡(趙子龍))에 가까웠으니, 하물며 해전(海戰)의 병법이 귀신처럼 출몰하고 번개처럼 적을 꺾는 데에 있어서랴. 비록 바다를 육지처럼 다니는 왜놈이라도 맞붙으면 반드시 섬멸하고 한 척의 배도 살려 보내지 않아 천고에 보기 드문 전투였던 적벽대전(赤壁大戰)보다 늘 뛰어났다. 만약 이공(李公)을 몽동(艨艟)이나 전투함 같은 배에 태워 형주로부터 동쪽으로 물길을 따라 내려가게 하였다면 여우나 쥐 같은 손권과 육손(陸遜)의 무리들이 북 한 번 울리는 사이에 깃발 아래에서 효수(梟首)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관공(關公)의 사라지지 않는 혼령은 그 정신이 천여 년 후의 이공을 만나 반드시 여기에 강림하려 했을 것이니, 아! 성대하다. 하(河) 사또는 내가 관왕묘 근처에 살아서 그 내력에 대해 잘 알리라 생각하여 사람을 통해 말하기를 “감히 후하게 모신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기문 정도는 지어야 마땅할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내 비록 하 사또와 평소 친분은 없지만, 이 땅에 관우 사당을 세워 제향을 누리도록 하는 이유는 관우 신령이 나라에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사당에서 경건하게 제사를 올리지 않는다면 이는 나라를 소홀히 잊는 것이다. 나라를 소홀히 잊는 사람은 관왕과 이공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관왕의 사당에 절을 할 때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땀 흘리는 것은 생각조차 않고 편안하게 한 지방의 전권을 맡은 벼슬자리에 앉아 녹봉이나 축내는 사람은 그 어떤 마음인가. 그런데 하 사또 홀로 관왕 신령의 마음처럼 작심하고서 임금께 충성하며 변방을 지켜 내려는 정성을 사당 수리 공사를 통해 먼저 드러냈다. 따라서 뜻한 대로 공적을 이루고 나라를 저버리지 않도록 종사함으로써 임금을 위하는 신하가 될 것이 틀림없다. 만일 훗날 이곳에 부임하는 사람 모두 하 사또의 뜻과 같다면, 그들이 임금을 위하여 신하의 직분을 수행하는 일이 어찌 고금도의 관왕묘 하나에 그칠 뿐이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사양하지 않고 글을 쓴다. 늦은 봄 사당에 참배할 터인데 이로써 기뻐하며 승위(乘韋)로 삼으리라. 존재집_위백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53A_0220_020_0130_2014_006_XML
Rec-2322 하재일기_1권_1891_0101 18910101 晴. 茶禮罷後, 卽往內谷, 拜謁關聖帝君, 抽籤得第十九籤, 上吉. 맑음. 차례(茶禮)를 마치고 곧바로 내곡(內谷)으로 가서 관성제군(關聖帝君)을 배알하고 추첨하여 19번을 뽑으니, 상길(上吉)이다. 하재일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41A_0010_010_0010_2011_001_XML
Rec-2323 하재일기_1권_1891_0429 18910429 晴. 寄書於胡洞伊人處, 移時方乘轎而來. 共往泥峴周覽市物, 上南山, 俯瞰長安, 復往南廟, 瞻謁聖帝. 歸路沽酒六錢飮之, 聯路賞玩而歸寺洞館. 맑음. 호동(胡洞) 이인(伊人)에게 편지를 부쳤더니 조금 있다가 바로 가마를 타고 왔다. 함께 이현(泥峴)에 가서 시장의 물건들을 두루 구경하고 남산에 올라가 장안을 굽어본 뒤에 남관왕묘[南廟]에 가서 관성제군(關聖帝君)을 배알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6전을 주고 술을 사서 마시고 길을 따라 구경하면서 인사동 여관으로 돌아왔다. 하재일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41A_0010_040_0290_2011_001_XML
Rec-2324 하재일기_2권_1892_0101 18920101 辛酉. 朝晴, 四無雲陰微, 有東風, 晩復陰. 茶禮罷後, 往內谷拜謁關聖, 心祝年內身數. 推籤得七十九籤, 中平卦. 신유. 아침은 맑고 사방에 구름 한 점 없음 흐리고 동풍이 솔솔 불다가 저녁에 다시 흐림. 차례를 마친 후에 내곡(內谷)에 가서 관성제군(關聖帝君)을 배알하고 마음속으로 금년 신수를 빌었다. 추첨하여 79첨(籤)을 얻으니 중평괘(中平卦)이다. 하재일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41A_0020_010_0010_2011_002_XML
Rec-2325 하재일기_4권_1895_0115 18950115 朝飯後, 往內谷, 謁關聖心祝, 推籤得第七籤, 甲庚大吉. 아침을 먹은 뒤 내곡(內谷)에 가서 관성제군(關聖帝君)을 뵙고 마음속으로 축원하며 추첨하여 제7첨(籤)을 얻으니 갑경대길(甲庚大吉)이다. 하재일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41A_0040_010_0150_2011_003_XML
Rec-2326 환재집_4권_잡저_녹고정림선생일지록논화발 null 東自興仁門外關帝廟。西南至蓉山麻湖。悉開燈市。往往陳列雜戱。絲竹嘲轟。若値春物未早之歲。則緋桃練李。時方盛開。兼有花柳之盛。 동쪽으로 흥인문(興仁門) 밖 관제묘(關帝廟)로부터 서남쪽으로 용산(蓉山)ㆍ마호(麻湖)에 이르기까지 모두 등시를 여는데, 이따금 잡희(雜戲)를 벌여서 음악소리가 진동한다. 만약 봄철이 빠르지 않은 해를 만나면, 붉은 복사꽃과 흰 오얏꽃이 한창 만개하고 아울러 꽃과 버들의 성대함이 펼쳐진다. 환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632A_0050_010_0090_2017_002_XML
Rec-2327 환재집_6권_소차_걸해우의정소 null 伏以起感忠義。特拜關廟。克詰戎兵。歷臨舘所。盛德在金。順時行令。都人士女。 생각건대, 충의(忠義)에 느낌이 일어 특별히 관묘(關廟)에 배알하시고, 군대를 사열하러 관소(館所)에 친히 거둥하셨는데, 성덕을 쇠에 기울여 시절에 맞추어 명을 내리시매 온 도성 사람들이 임금의 행차를 기쁘게 우러러 보았습니다. 환재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632A_0070_020_0120_2017_002_XML
Rec-2328 일성록_1778_0902 17780902 具戎服, 乘輿出仁和門, 至仁政門外降輿. 乘馬由敦化門, 出崇禮門詣行殿入幕次, 改具甲冑. 予曰, 當展拜關王廟, 只槍劍攔後軍隨駕, 而先廂前路扎駐事分付. 仍乘馬詣關王廟大門外降馬, 乘輿入廟門, 降輿就版位行禮, 仍詣廟內奉審訖, 乘輿出廟門降輿, 乘馬至敎場轅門勞軍. 予曰, 鳴鑼邊旗幟不爲分立, 過左營前騎不爲前導, 廵營節次, 已失次第, 何營旗幟爲前導乎. 宣傳奏曰, 守禦營云矣. 仍降馬陞座. 予曰, 廵營節次詳在於節目, 而各營不知擧行, 入轅門駐馬良久, 不在前營之何在, 廵營一節, 不得如儀行之, 該營大將及執事宣傳官之擧行, 極爲駭然矣. 융복(戎服)을 갖추고 여(輿)를 타고 인화문(仁和門)을 나가 인정문(仁政門) 밖에 이르러 여에서 내렸다. 다시 말을 타고 돈화문(敦化門)을 경유하여 숭례문(崇禮門)을 나가 행전(行殿)에 나아가 막차(幕次)에 들어갔다. 갑옷과 투구로 갈아입었다. 내가 이르기를, “관왕묘(關王廟)에 전배할 때 창검군(槍劍軍)과 난후군(攔後軍)만 수가(隨駕)하고 선상(先廂)은 미리 가서 주둔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이어 말을 타고서 관왕묘 대문 밖에 나아가 말에서 내려 여를 타고 묘문(廟門)으로 들어갔다. 여에서 내려 판위(板位)에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이어서 묘 안으로 나아가 봉심(奉審)하였다. 여를 타고 묘문을 나와 여에서 내렸다. 다시 말을 타고 교장(敎場)의 원문(轅門)에 이르러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명라(鳴鑼) 옆에 기치(旗幟)가 나누어 서 있지 않고 좌영(左營)을 지날 때 전기(前騎)가 앞에서 인도하지 않은 것은, 순영(巡營)의 절차에서 이미 그 순서를 잃은 것이다. 어느 영의 기치가 인도하였는가?” 하니, 선전관(宣傳官)이 아뢰기를, “수어영(守禦營)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말에서 내려 어좌에 올랐다. 내가 이르기를, “순영의 절차가 절목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는데도 각영이 거행할 줄을 모르고, 원문에 들어가 한참 동안 말을 멈추고 서 있었는데도 전영(前營)이 어디에 있는 줄을 모르는 등 순영의 절차가 의례대로 시행되지 못하였으니, 해당 영의 대장 및 집사와 선전관의 거행이 매우 놀랍다.” 일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IT_V0_A02_09A_02A_00020_2003_012_XML
Rec-2329 일성록_1779_0803 17790803 校理權以綱等啓言, 軍律何等嚴重, 而御營陣中, 誤爲放砲, 以致諸營之應砲, 事極驚駭. 罪關軍律, 臣等以爲, 當該大將爲先削職宜矣, 從之. 敎曰, 捴戎使李柱國爲御營大將. 교리 권이강(權以綱) 등이 아뢰기를, “군율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데 어영청의 진영에서 잘못 방포(放砲)하여 여러 진영이 응포(應砲)하게 하였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죄가 군율에 관계되니 신들은 해당 대장을 우선 삭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 하교하기를, “총융사 이주국을 어영대장으로 삼으라.” 하였다. 일성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IT_V0_A03_08A_03A_00020_2003_016_X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