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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T0009== {| class="wikitable sortable" ! ThemeId !! ThemeName !! Description |- | T0009 || 유학자 윤증의 초상 || 조선시대의 학자 윤증의 초상은 1711년 변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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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8일 (일) 23:46 기준 최신판

T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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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9 유학자 윤증의 초상 조선시대의 학자 윤증의 초상은 1711년 변량이 처음 그렸으며, 이후 1744년에 장경주, 1788년에 이명기, 1885년에 이한철이 기존의 초상을 모사하면서 여러 점의 초상화가 제작되었다. 윤증 초상 제작에 참여한 이들은 왕의 어진을 제작하는 데에 참여한 당대 최고의 화사들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윤증의 초상 중 1744년과 1788년에 그려진 5점과 초상 제작 과정을 담은 『영당기적(影堂紀蹟)』이 2006년 ‘윤증 초상 일괄’이라는 이름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영당기적』에는 1711년부터 1885년까지 윤증 초상의 제작 일정, 제작된 초상의 수, 구본 및 신본의 봉안 과정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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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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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10 충청도 최초의 사액 서원, 충현서원 충현서원은 조선시대 학자인 서기가 주자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서기가 학문 연구와 후학양성을 위해 건립한 연정(박약재)에서 비롯되었으며, 1581년 공암서원(孔巖書院)이라는 이름으로 설립하면서 서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공암서원에는 중국의 주자를 중앙에 모시고, 공주의 향현(鄕賢)인 석탄 이존오, 한재 이목, 동주 성제원을 제향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10년 중수하였고, 1624년 충청도 지역에서는 최초로 사액서원이 되어 공암서원에서 '충현서원(忠賢)'이 되었다. 이후 충현서원은 중봉 조헌, 사계 김장생,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등의 위패를 모시고 지방 유생들을 교육하는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공주 지역 사림계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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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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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11 충현서원의 건물과 유적 충현서원은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5년에 다시 지었다. 현재 서원에는 홍살문, 하마비, 강당인 박약당, 내삼문, 사당이 있고, 충현서원의 내력과 주자의 영정을 새로 봉안하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한 사적비와 충현서원에 송시열이 배향되는 과정을 기록한 우암 손선생 추향기비가 있다. 사적비의 비문은 최규서가 짓고 조상우가 썼으며, 최규서의 문집인 『간재집』에 실려 있다. 우암 손선생 추향기비의 비문은 김진상이 썼다. 충현서원은 1984년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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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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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12 충현서원의 배향인물 충현서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공암서원은 건립 당시 주자를 중앙에 모시고 공주의 향현인 이존오, 이목, 성제원을 제향하였다. 사액서원이 된 이후에는 서기를 별사(別祀)하기 시작했다. 이후 충현서원은 당시 공주 지역 사림계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지역의 명현을 제향하게 되었다. 효종조에 중봉 조헌, 1674년 사계 김장생, 1686년 동춘당 송준길, 1713년 우암 송시열이 차례로 제향되었다. 한편 둔옹 박희성, 탄옹 권시, 초려 이유태, 인재 성희와 같은 공주를 가향으로 하고 충현서원의 원장을 역임하는 등의 공주와 충현서원과 밀접한 인물들의 제향이 시도되기도 했었으나 끝내 이뤄지지는 못했다. 이후 충현서원은 1925년 사우를 복원하면서 주자영정을 북벽에 봉안하고 그동안 별사되었던 서기도 함께 제향하면서 오늘과 같은 모습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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