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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T0007== {| class="wikitable sortable" ! ThemeId !! ThemeName !! Description |- | T0007 ||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대표적 문중서당, 종학당과 기록유산 || 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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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8일 (일) 23:46 기준 최신판

T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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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7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대표적 문중서당, 종학당과 기록유산 종학당은 1643년 윤순거가 파평윤씨 문중의 자녀 교육을 위해 건립한 서당이다. 이곳에서는 종중의 자제와 문중의 내외척, 처가의 자제들까지 합숙하며 공부하였으며 40명이 넘는 과거급제자가 배출되었다. 종학당의 운영과 교육 내용 등을 보여주는 기록유산으로는 『종학실부』, 『월강록』 등이 남아 있다. 또한 종학당에 걸려 있던 편액에는 『초학획일지도』와 『위학지방도』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종학당 학생들이 지켜야 할 규칙과 학문하는 방도에 대해 당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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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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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8 정회당, 돈암서원이 되기까지의 운영 과정 명재고택은 윤증이 지었다고 전해진다.(or 명재고택은 1709년 제자들이 윤증을 위해 지었고, 윤증이 잠시 기거하였다고 전해진다.) 고택 앞쪽에는 넓은 마당과 커다란 인공 연못이 있는데, 솟을대문이 없어 탁 트인 개방감이 느껴진다. 높은 기단 위에 사랑채, 안채, 행랑채가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안채 동쪽 뒤편에 사당이 있다. 사당 앞에서부터 사랑채 옆까지 이르는 넓은 대지에는 수백개의 장독이 놓여있는데, 이 장독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300년 넘은 장(간장, 된장)이 저장되어 있다. 안채를 제외하고는 높은 담이 없고 연못과 커다란 나무 등 자연요소가 집의 담장 역할을 하고 있다.
윤증은 윤선거의 아들로, 송시열에게서 『주자대전』을 배웠다. 그러나 아버지 윤선거의 묘지명을 계기로 송시열과 사제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이후 윤증이 송시열을 배반하고 헐뜯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치열한 당쟁에서 소론의 영수로서 송시열과 대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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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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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9 유학자 윤증의 초상 조선시대의 학자 윤증의 초상은 1711년 변량이 처음 그렸으며, 이후 1744년에 장경주, 1788년에 이명기, 1885년에 이한철이 기존의 초상을 모사하면서 여러 점의 초상화가 제작되었다. 윤증 초상 제작에 참여한 이들은 왕의 어진을 제작하는 데에 참여한 당대 최고의 화사들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윤증의 초상 중 1744년과 1788년에 그려진 5점과 초상 제작 과정을 담은 『영당기적(影堂紀蹟)』이 2006년 ‘윤증 초상 일괄’이라는 이름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영당기적』에는 1711년부터 1885년까지 윤증 초상의 제작 일정, 제작된 초상의 수, 구본 및 신본의 봉안 과정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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