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효자 신급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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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문

초고

1703년(숙종 29) 신급(申礏 : 1543~1592)의 효(孝)를 표창해 내린 정려문이다. 신급은 본관이 평산이고 별검 신화국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경서를 통달했고 특히 역사에 밝았다. 1583년(선조 16) 상소를 올려 이이, 성혼에 대한 탄핵의 부당함을 지적하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 뒤에 선공감역에 추천되었으나 거절하고 재야에서 처사로 생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때 노모를 모시고 이천으로 피난하는 도중 노모와 가족이 적에게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형은 멀리 떠나갔고 두 동생은 모두 순절하고 노모마저 돌아가셨으니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살아 남으리오” 하며 절벽 아래로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1703년 효자 정려를 내리고 정각을 세웠다. 당초에는 무등산 아래에 세워졌으나 6 · 25때 소실, 1980년 현 위치에 재건립했다. 선생의 5대손 신윤하도 부모에 대한 효행으로 1865년(고종 2) 효자 정문을 받아 현재 같은 문에 나란히 정표되어 있다.

수정

숙종 29년(1703)에 신급(申礏, 1543~1592)의 효행을 표창해 내린 정려문이다. 일찍이 학문에 힘써 경서를 통달했고 특히 역사에 밝았다. 선조 16년(1583)에 상소를 올려 이이(李珥, 1536~1584), 성혼(成渾, 1535~1598)에 대한 탄핵의 부당함을 지적하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천으로 피난하는 도중에, 노모와 가족이 적에게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형은 멀리 떠나고 두 동생은 모두 순절하였으며 노모마저 돌아가셨으니,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살아남으리오” 하면서 절벽 아래로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숙종 29년(1703)에 효자 정려를 내리고 정각을 세웠다. 당초 무등산 아래에 세웠으나 6·25 전쟁 때 소실되어 1980년에 현 위치에다 재건립했다. 5대손 신윤하(申胤夏)도 부모에 대한 효행으로 고종 2년(1865)에 효자 정문을 받아, 현재 같은 곳에 편액을 나란히 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