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이사검 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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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문

초고

조선 전기의 무신 이사검(李思儉, 1381~1446)과 부인을 합장한 묘.

1405년(태종 5) 무과에 급제하여 사직을 지냈고, 1408년 양녕대군이 명나라에 갈 때 수행하였으나, 그의 난잡한 행동을 충고하였다가 미움을 받았다. 1418년(태종 18) 태종의 셋째아들 충녕대군(뒤의 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태종의 명을 받아 그를 보좌하였다.

1419년(세종 1) 황해도첨절사에 임명되어 왜구토벌에 앞장섰고, 같은 해 조전절제사로 황해도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중 왜구가 교묘한 술책을 쓰자, 강력하게 물리치지 않은 죄를 물어 변방으로 보내졌다가 다음해 풀려났다. 이듬해 상호군으로 진응사가 되어 명나라로 가는 도중 요동에 이르러 매가 죽자, 죽은 매를 가지고 북경의 대궐에 가서 명나라 황제 영락제에 대한 조선왕의 예를 그르쳤음을 사죄하니, 황제가 가상히 여겨 장군모를 하사하였다. 이후 좌군첨총제, 경상좌도처치사를 지냈고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판의금부사, 중추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묘역은 계체석에 의해 3단으로 조성되어 있고, 봉분 뒤쪽의 사성(莎城)은 낮게 되어 있다. 상계에는 사각형으로 호석을 두른 봉분과 함께 이사검과 부인 이천 서씨의 묘비 2기와 상석 2기가 나란히 놓여 있으며, 상석 사이에는 향로석이 있다. 중계에는 장명등의 윗부분에 얹혔던 팔각지붕형의 옥개석이 남아 있다. 하계에는 장군모에 융복(戎服)을 갖춰 입고 검을 왼손에 쥐고 검집을 좌측 허리에 찬 무인석 1쌍이 좌우측 끝에 자리하고 있다. 묘비 뒷면에는 1447년 2월 28일에 비석을 세웠다는 글이 각각 음각되어 있다.

수정

조선 전기의 무신 이사검(李思儉, 1381~1446)과 부인 이천서씨의 합장묘다.

이사검은 태종 5년(1405) 무과에 급제하였다. 태종 8년(1408) 양녕대군이 명나라에 갈 때 수행하였으나, 그의 난잡한 행동을 충고하다가 미움을 받았다. 태종 18년(1418) 충녕대군(뒤의 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그를 보좌하였다. 그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묘역은 3단으로 구획되었다. 봉분은 네모지게 호석을 둘러 고려~조선 전기에 유행한 전형적인 무덤 형태를 보여준다. 봉분 앞에는 1447년에 세운 이사검과 부인의 묘비가 있고, 상석이 나란히 놓였으며, 그 사이에 향로석이 있다. 장명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머리에 얹었던 팔각지붕형의 옥개석만 남아 있다. 아래쪽에는 무인석 1쌍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