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의성김씨 운암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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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한중연 안내문안 작성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세째 아들 운암(雲巖) 김명일(金明一)의 종택이다. 운암의 일기에 따르면 조선 명종(明宗) 5년(1550)에 그가 이 곳 신덕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주택은 안대청 상량문에 있는 ‘건륭 19년 갑술(乾隆 十九年 甲戌)’ 이라는 기록을 통해 영조(英祖) 30년(1754)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口’자형의 안채와 그 정면에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중앙에 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 책방을 두고 벽장을 달았다. 사랑채 남쪽에는 안채로 통하는 중문을 달았다. 안채는 정면과 측면이 모두 5칸인데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2칸 부엌이 배열되어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조선 중기의 학자 운암 김명일(金明一, 1534∼1570)의 종택이다. 김명일의 본관은 의성이며 김진(金璡, 1500~1580)의 3남이다.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의 형으로 형제 모두 이황(李滉, 1501~1570)의 제자이다. 1564년(명종 19) 김명일은 생원시에, 동생 김성일과 김복일은 진사시에 나란히 급제하였다. 1569년(선조 2) 김명일은 문과 1차 시험인 향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2차 시험인 회시를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가 병이 심해져서 귀향 중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1709년(숙종 11) 운암종택 인근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아버지 및 형제들과 함께 모셔졌다. 저술로 『운암일기』가 있으며, 아버지와 김명일 5형제의 시문을 함께 엮은 『연방세고(聯芳世稿)』에도 저술이 전한다.

운암종택은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되었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안채는 정면 5칸·측면 5칸의 ‘ㅁ’자 기와집이다. 사랑채는 안채 우측 아래에 붙어 있고, 정면 3칸·측면 2칸 반이다. 안채의 상량문의 기록(건륭 19년 갑술 乾隆十九年甲戌)을 통해 1754년(영조 30)에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1차 수정

이 집은 조선 중기의 학자 운암 김명일(金明一, 1534~1570) 가문의 종택이다. 종택은 한 가문의 맏이가 대대로 살아온 집을 말한다.

김명일은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의 형으로 형제가 모두 이황(李滉, 1502~1570)의 제자였다. 1564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1569년 문과 1차 시험인 향시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2차 시험인 회시를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가 병이 심해져서 귀향 중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1709년운암종택 인근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아버지 및 형제들과 함께 모셔졌다.

운암종택은 1754년에 중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ㅁ자형의 안채와 안채 오른쪽에 별도로 지어진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안방과 부엌을 두었고 오른쪽에는 안사랑방을 두었다. 사랑채는 가운데에 마루방을 두고 양옆에 각각 사랑방과 책방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