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운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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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이곳은 당곡 정희보 선생을 모신 사당으로 1353년(철종4)에 창건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패령으로 철거되었으나 1874년(고종11)에 남해군과 인근 사림이 다시 지은 것이다.

당곡선생은 삼남의 대학자로서 정주학을 깊이 연구하고 개척한 선각자였다. 그러나 당곡은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제안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평생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이다 생을 마치었다. 이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내삼문·외삼문이 있고 돌담을 갖추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1853년에 창건한 정희보(鄭希輔, 1488~1547)를 모신 사당이다. 이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으나, 1874년에 남해군과 인근에 있는 사림들이 다시 지은 것이다.

정희보는 17세에 남해에서 함양으로 옮겨 당곡에 살면서 자호를 당곡(唐谷)이라 하였다. 그는 정주학(程朱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제안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평생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영남과 호남 선비의 절반이 그의 문인이었다고 할 정도로 당시 사화(士禍)로 인하여 침체된 함양 지역의 학풍을 다시 진작시켜서 후학을 가르친 훌륭한 지방 교육자로 평가되고 있다.

이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내삼문·외삼문이 있고 돌담을 갖추고 있다.

1차 수정

운곡사는 조선시대의 학자인 정희보(鄭希輔, 1488~1547)를 모신 사당이다.

정희보는 남해 출신으로 17세에 함양으로 옮겨 당곡에 살면서 호를 당곡(唐谷)이라 하였다. 학문과 글솜씨로 명성이 높아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제안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평생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영남과 호남 선비의 절반이 그의 문인이었다고 할 정도로 훌륭한 지방 교육자로 평가되고 있다.

운곡사는 1853년에 창건되었으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874년에 다시 지었다.

자문의견

  1. 사적, 매장 위원1
    • 두 번째 단락에서 정희보의 문인 가운데 뛰어난 인물은 없는지, 있다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몇 명 제시하면 좋을 듯함.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874년에 다시 지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874년에 다시 지었다.
  2. 사적, 매장 위원2
    • “벼슬을 제안했지만” → “벼슬을 제수했지만” 또는 “벼슬을 내렸지만” / “학문연구” →“학문 연구“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 정확히 표기함.
    • 기존 문안에 있는 사당의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내삼문·외삼문이 있고 돌담을 갖추고 있다.”라는 내용을 삽입하면 좋겠음. 단, 현재의 상태를 확인하여야 함.

2차 수정

운곡사는 조선시대의 학자인 정희보(鄭希輔, 1488~1547)를 모신 사당이다.

정희보는 남해 출신으로 17세에 함양으로 옮겨 당곡에 살면서 호를 당곡(唐谷)이라 하였다. 학문과 글솜씨로 명성이 높아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내렸지만, 이를 거절하고 평생을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영남과 호남 선비의 절반이 그의 문인이었다고 할 정도로 훌륭한 지방 교육자로 평가받고 있다.

운곡사는 1853년에 창건되었으며,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874년에 다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