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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망우당 곽재우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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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은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11월 3일 (일) 09:2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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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익공 망우당 곽재우 유허비
Stele of Gwak Jae-u
창녕 망우당 곽재우 유허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충익공 망우당 곽재우 유허비
영문명칭 Stele of Gwak Jae-u
한자 忠翼公 忘憂堂 郭再祐 遺墟碑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931번지
지정번호 문화재자료 제23호
지정일 1983년 7월 20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219㎡
웹사이트 창녕 망우당 곽재우 유허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창녕 망우당 곽재우 유허비*는 곽재우가 망우당에서 여생을 보낸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곽재우는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의령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창녕ㆍ함안ㆍ영산 등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인물이다.

1599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을 때 군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탄핵을 받아 전라도 영암으로 귀양을 갔다. 1602년 귀양에서 풀려난 후 비슬산에 머물다가 영산의 낙동강 변 창암에 정자를 짓고 죽을 때까지 살았는데 이 정자가 바로 망우정이다.

망우당 곽재우 유허비는 곽재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고을의 유림인 조언성(趙彦城), 이기성(李基成), 신영복(辛永馥), 신계동(辛啓東) 4명이 세웠으며 ‘숭정기원후3기유4월(崇禎紀元後三己酉四月)**’이라고 적힌 것으로 보아 1789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 선현의 자취가 남아 있는 옛터에 세운 비석
  • 숭정 연호가 시작된 1628년부터 세 번째 기유년

영문

Stele of Gwak Jae-u

This stele was erected in 1789 by a group of local Confucian scholars to honor Gwak Jae-u (1552-1617), a civil army leader of the mid-period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Gwak Jae-u was born in Uiryoeng where his mother’s family lived. H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85, but this was canceled due to the fact that his answer displeased the king. Determined to lead a secluded life, he went back to his hometown. However, when the Japanese invaded in 1592, he raised the first civil army in the Uiryeong area and defeated the Japanese invaders in battles at Changnyeong, Hamnan and Yeongsan. Gwak was nicknamed as the “Red Clothes General” because he wore in red at every battle. Later, he built a pavilion near Nakdonggang River and spent the rest of his life there. The name of the pavilion, “Mangujeong,” means a pavilion where worries are forgotten.

The name of the stele was inscribed on the front; on the back, the time of erection and names of those who made this stele were recorded.

영문 해설 내용

이 비는 조선 중기 의병장이던 곽재우(1552~1617)를 기리기 위해 마을의 유림들이 1789년에 세운 것이다.

곽재우는 외가가 있던 의령 지역에서 태어났다. 1585년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그가 쓴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었고, 이후 그는 고향에서 은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 지역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고, 창녕, 함안, 영산 등지의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겼다. 이때 그가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싸웠기 때문에 ‘홍의장군’이라고 불렸다. 말년에는 이곳 낙동강 근처에 정자를 짓고 살았다. 정자의 이름은 망우정으로 ‘근심을 잊고 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앞면에는 비의 제목이, 뒷면에는 세운 시기와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