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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금광리 심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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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2월 14일 (금) 04:5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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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금광리 심원정
Simwonjeong Pavilion from Geumgwang-ri, Yeongju
대표명칭 영주 금광리 심원정
영문명칭 Simwonjeong Pavilion from Geumgwang-ri, Yeongju
한자 榮州 金光里 心遠亭
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지정번호 문화재자료 제578호
지정일 2010년 10월 28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영주 금광리 심원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심원정은 장간은과 장금리가 조상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로, 인동 장씨 집성촌인 금강 마을 중앙에 있어서 마을을 대표하는 건물인 동시에 마을 사람들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장여화가 금광 마을에 처음 들어와 터를 잡고 정자를 건립하기 위해 한석봉에게 현판 글씨를 받았으나 정자를 짓지 못하였다. 이후 100여 년이 지난 뒤 그의 후손들이 정자를 세웠고, 순조 25년(1825)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심원정은 기와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 반 크기의 건물이다. 중앙에 마루가 있고 양쪽에 각각 방을 두었다. 마당에는 후대에 시멘트와 철근으로 만든 연못과 다리가 있어서 이색적인 풍경을 이룬다. ‘심원’은 중국의 시인 도연명의 ‘음시’ 구절인 “사람들 사는 틈에 초가집 짓고 살아도 수레와 말의 시끄러움이 없다. 물어보니 그대는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마음이 멀리 있으니 머무는 땅 또한 자연히 외지다.”라는 글귀에서 유래하였다.

심원정에는 한석봉이 쓴 현판과 함께 ‘전계초당’이란 현판이 있다. 전계초당은 장여화가 예전에 전계 마을에서 살 때 거처했던 집의 이름이다. 전계초당 글씨는 조선 중기의 명필로 알려진 황기로가 갈필(칡뿌리를 잘라 끝을 두드려 모필(毛筆) 대신 쓰는 붓)로 썼다고 한다. 심원정은 조선 후기 정자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현판 글씨 또한 가치가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영주댐 건설로 현재 위치로 옮겼다.

영문

Simwonjeong Pavilion from Geumgwang-ri, Yeongju

  • 도연명의 시구(心遠地自偏) 번역 참고
    • When the heart is far away, the locale naturally becomes remote.
    • When the heart stays afar, the place becomes remote.
    • When the heart is far away, the land bends there of itself.
    • When a heart is remote, the place naturally is secluded.

영문 해설 내용

이 정자는 금광리의 인동장씨 집성촌인 금강마을에 있던 것이다. 마을 중심부에 위치하여 마을을 대표하는 건물인 동시에, 마을 사람들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입향조 장여화(1506~1621)는 금강마을에 정착한 후, 세속에서 벗어나 서책을 벗 삼아 지내기 위해 정자를 짓고자 하였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명필인 한호(1543-1605)로부터 현판에 쓸 글씨까지 받았지만, 미처 정자를 짓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후손들이 약 100년 동안 현판과 정자의 터를 지켜오다가, 장여화의 뜻을 기려 정자를 세웠고 1825년에 재건하였다.

정자는 중앙에 마루가 있고 양쪽에 각각 온돌방을 두었다. 정자 앞쪽에는 후대에 시멘트와 철근으로 만든 연못과 다리가 있어 이색적인 풍경을 이룬다.

정자의 이름 ‘심원’은 중국의 시인 도연명의 “마음이 멀리 있으니 머무는 땅 또한 자연히 외지다.(心遠地自偏)”라는 시구에서 따온 것으로, 속세의 번다함에서 벗어나 은거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심원정에는 ‘전계마을의 초가집’이라는 뜻의 ‘전계초당’이라고 적힌 현판도 걸려있다. 전계마을은 장여화가 금강마을에 자리잡기 전에 살았던 곳이다. 현판의 글씨는 명필로 이름난 황기로(1521-1575)가 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