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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즙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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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11월 17일 (일) 04:1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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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즙 신도비
Stele of Sim Jip
대표명칭 심즙 신도비
영문명칭 Stele of Sim Jip
한자 沈楫 神道碑
주소 인천광역시 서구 경명대로 725-26 (공촌동)
지정번호 시도유형문화재 제32호
지정일 1995년 11월 15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기타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 127.5㎡
웹사이트 심집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운 비석을 가리킨다.

심즙 신도비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 심집(沈諿, 1569~1644)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심집의 자는 자순(字順), 호는 남애(南崖),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심집은 28세 때인 조선 선조 30년(1597)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형조, 공조,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또한 그는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왕을 호위한 공으로 호종공신(扈從功臣,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공을 세운 신하)이 되었던 인물이다.

심집의 묘는 원래 경기도 시흥시에 있다가 1970년 인천시 서구 공촌동에 청송 심씨(靑松沈氏) 묘역을 조성하여 이장하면서 신도비도 함께 옮겨져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비석은 사각형의 받침돌(비대 碑臺) 위에 길쭉한 직사각형의 몸돌(비신석 碑身石)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비개석 碑蓋石)을 올린 모습이다. 비의 전체 높이는 1.9m이고, 너비는 0.85m, 두께는 0.53m이다.

이 비석에는 심집의 선조와 관련한 내용, 심집의 일생과 공적에 관한 내용, 심집의 후손과 관련한 이야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기에는 심집의 후손 심유가 비문(碑文)을 완성하고 조선 영조17년(1741)에 ‘심집’이라는 시호(죽은 뒤에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호)를 받아 신도비를 세우게 된 과정도 함께 기록해 놓고 있다.

이 신도비의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홍봉조가 썼으며, 이를 비에 새기는 것은 유척기가 하였다.


  • 현재 문화재 지정명칭이 ‘심즙 신도비’임.
  • 심집이 문과에 급제한 것은 1596(선조 29)년임.
  • 심집이 이름이고 시호는 ‘효간(孝簡)’임.
  • 신도비의 비문은 송시열이 지은 것인데, 심유가 비문을 완성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 1741년이 시호를 받은 해인가, 아니면 신도비를 세운 해인가?

영문

Stele of Sim Jip


영문 해설 내용

이 비는 조선시대의 문신인 심집(1569-1644)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비이다.

심집은 1596년에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인조대에는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역임하였고, 1624년 반란이 일어났을 때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피난을 떠난 왕을 호종하였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1639년에 공신이 되었다.

신도비의 비문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대학자인 송시열(1607-1689)이 지었고, 글씨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홍봉조(1680-1760)가 쓰고 유척기(1691-1767)가 새겼다.

비의 전체 높이는 1.9m이고 너비는 0.85m, 두께는 0.53m이다.

십집의 묘는 원래 경기도 시흥시에 조성되었다가, 1970년 인천광역시 서구에 청송심씨 묘역을 조성하면서 이장하였다. 신도비도 이때 함께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