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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해인사 용성선사 승탑 및 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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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해인사 용성선사 승탑 및 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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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해인사 용성선사 승탑 및 탑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합천 해인사 용성선사 승탑 및 탑비
영문명칭 0
한자 陜川 海印寺 龍城禪師 僧塔 및 塔碑
주소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길 144-19 (가야면, 용탑선원)
지정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92호
지정일 2009년 12월 3일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시대 일제강점기
수량/면적 부도1기, 탑비1기
웹사이트 합천 해인사 용성선사 승탑 및 탑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백용성(白龍城, 1864-1940)선사는 3ㆍ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의 대표로서 부처님의 정법을 전수한 명안조사이다. 한문경전을 최초로 한글로 번역 출간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왜색화된 계율을 불교 본래 모습으로 회복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큰스님이 1940년 2월 입적 후 승탑이 조성되었고 1941년에 사리탑비가 조성되었다.

부도는 고려시대의 강원도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 사리탑(1388년) 2기 외에는 없는 희소한 형식의 불탑형 부도(승탑)이고, 비슷한 높이의 이중 기단이나 3층의 탑신 형식 등은 해인사 경내의 길상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탑비는 전체 높이가 약 341㎝이며 이주 지대석 위에 귀부(龜趺)ㆍ비신(碑身)ㆍ이수(螭首)를 올려놓았다. 귀부는 웅크린 채 네 다리에 힘을 주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윗면에는 귀갑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수는 반룡 두 마리가 마주 보게 장식되어 있다.

비는 조선시대의 전통을 잘 계승하는 조각 형태와 수법을 갖추고 있으며, 비신의 우측면에는 ‘용운근찬(龍雲謹撰) 오세창전(吳世昌篆)’이라 되어있어, 찬문(撰文)은 한용운(韓龍雲)이 비문을 짓고, 비신의 두전(頭篆) 전액(篆額) 오세창선생, 비문(碑文)은 최종한(崔宗澣)이 썼음을 알 수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승탑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셔 놓은 일종의 무덤이며, 스님의 사후에 승탑과 탑비가 함께 조성된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1명이었던 백용성(1864-1940) 선사의 승탑과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탑비이다. 용탑선원 입구에 나란히 서 있다.

백용성(1864∼1940) 선사는 전라북도 장수군 출신으로, 16세에 해인사 극락암으로 출가했다. 최초로 한글로 번역된 불교 경전을 출간하는 등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서도 앞장섰던 선사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참여하였으며, 개항 이후 일본 불교의 침투로 변질되어 가던 한국 불교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선사가 입적한 그 해에 조성된 승탑은 불탑과 동일한 외형으로 조성되어 2층으로 된 받침돌과 모서리 기둥이 새겨진 몸돌, 지붕돌과 머리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인사 길상탑을 모방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탑 형식으로 만들어진 부도는 1388년에 조성되었다고 하는 강원도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 사리탑 2기 외에는 없는 희소한 형식이다.

탑비는 2층의 바닥돌,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몸돌, 용 두 마리가 마주보는 장식이 되어있는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고, 1941년에 제작되었다.

몸돌에는 용성선사의 출생부터 입적까지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으며, 오른쪽 측면에 비석을 만든 사람들의 정보를 적었는데, 비문을 지은 한용운과 전서로 된 비석 제목을 쓴 오세창은 모두 용성선사와 함께 민족대표 33인 대표자로 이름을 올렸던 사람들이다.

  • 해인사 길상탑 모방 - 기존 안내문안 내용. / 근거 확인 어려움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