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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외토리 쌍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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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802910000 합천 외토리 쌍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802910000 합천 외토리 쌍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합천 외토리 쌍비
 
|대표명칭=합천 외토리 쌍비
|영문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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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Twin Steles in Oeto-ri, Hapcheon
 
|한자=陜川 外兎里 雙碑
 
|한자=陜川 外兎里 雙碑
|주소=경남 합천군 삼가면 남명로 57 (외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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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남명로 57 (외토리)
 
|소장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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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1호
 
|지정번호=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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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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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n Steles in Oeto-ri, Hapcheon'''
  
 
===영문 해설 내용===
 
===영문 해설 내용===
이곳에는 2기의 비석이 비각 안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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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비는 크기와 모양이 같은 2기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왼쪽의 비는 이 마을에 살던 효자 이온(?-1379)을 기리기 위해 1383년에 세운 것이다. 오른쪽의 것은 글씨가 마모되어 언제, 어떤 목적에 의해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 2기 모두 받침돌, 비몸, 꽃봉오리 모양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오른쪽의 것은 글씨가 마모되어 언제, 어떤 목적에 의해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  
 
 
 
왼쪽의 것은 1383년에 이온(?-1379)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비석 뒷면에 이온의 행적과 비석이 세워진 정황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온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으며, 이성계가 이온의 효행을 듣고 왕에게 보고해 나라에서 비각과 함께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원래 몸돌만 있었는데, 1686년에 연꽃 모양을 장식한 받침돌과 머릿돌을 새로 만들어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조성했으며,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원동마을 입구에 옮겨 세워졌었다가 일제강점기에 원래 자리였던 이곳으로 다시 옮겨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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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의 비 앞면에는 '효자 마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 새긴 비문에는 이온의 효행과 비석을 세운 내력을 기록하였다. 이온은 부친상을 당한 뒤 3년 동안 묘소 근처에 움집을 짓고 산소를 돌봤다고 한다. 고려의 장군이자 이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1335-1408)가 이 마을을 방문했을 때, 이온의 효행을 듣고 왕에게 보고하여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또한 비문에 따르면, 원래 비몸만 있었는데 1686년에 받침돌과 머릿돌을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문화재명은 ‘쌍비’이지만, 여기에서 설명하는 내용은 전부 왼쪽 비석에 한정한 것으로 봐야할 듯. 오른쪽 비석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이므로 언제부터 두 비석이 같이 서 있었는지 알 없으며, 따라서 1686년에 부재를 새로 조성한 일이나 비석의 위치가 옮겨진 내력이 오른쪽 비석도 해당되는지는 확인 필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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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인근 원동마을 입구로 옮겨 많은 사람들이 볼 있도록 하였다가, 20세기 전반에 원래 자리였던 이곳으로 다시 옮겨왔다고 한다.  
*오른쪽 비석은 빗돌이 마모되어 내용이 보이지 않아 ‘백비(白碑)’라고도 불린다.
 
*비각 새로 세운 시점 확인 안 됨 ; 비각은 단청이 화려하며, 지붕 좌우에는 바람을 막기 위한 풍판이 덧달아져 있다.
 
*옆에 붙어있는 건물의 용도나 건립 시점 확인 어려움.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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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합천 외토리 쌍비, 여행은 행복이다,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ohmark/221493242627 -> 답사 사진
 
*합천 외토리 쌍비, 여행은 행복이다,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ohmark/221493242627 -> 답사 사진
 
*외토리 쌍비 고려, 申祺丞의 伸天之路,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sws8007/16155157 -> 비석 상세 사진
 
*외토리 쌍비 고려, 申祺丞의 伸天之路,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sws8007/16155157 -> 비석 상세 사진

2021년 1월 25일 (월) 03:36 판


합천 외토리 쌍비
Twin Steles in Oeto-ri, Hapcheon
합천 외토리 쌍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합천 외토리 쌍비
영문명칭 Twin Steles in Oeto-ri, Hapcheon
한자 陜川 外兎里 雙碑
주소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남명로 57 (외토리)
지정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1호
지정일 1993년 1월 8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2기
웹사이트 합천 외토리 쌍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외토리 쌍비'는 비각(碑閣)에 두 비석이 나란히 서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왼쪽의 비는 이 마을에 살던 영모재 이온(永慕齋 李榲, ?~1379)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고려 말 이성계가 영남지방을 순시할 때 그의 효행을 듣고 왕에게 보고하여 1383년(우왕 9)에 나라에서 세운 것이다.

비석의 앞면에는 이온이 효행을 행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孝子里’라 새기고, 뒷면에는 부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한 기록이 있다. 이 비석은 1383년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남아있는 흔하지 않은 고려시대 효자비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오른쪽의 비는 풍화되어 글씨가 거의 마모되었지만, 왼쪽 비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효자비로 추정된다.

원래 비신만 남아있던 것을 1686년(숙종 12) 이수(螭首)와 대석(臺石)을 새로 조성했다고 하며, 이후 세상 사람들의 귀감으로 삼기 위해 비석을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원동마을 앞으로 옮겨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원래의 자리인 이곳으로 다시 옮겨왔다고 한다.

영문

Twin Steles in Oeto-ri, Hapcheon

영문 해설 내용

쌍비는 크기와 모양이 같은 2기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왼쪽의 비는 이 마을에 살던 효자 이온(?-1379)을 기리기 위해 1383년에 세운 것이다. 오른쪽의 것은 글씨가 마모되어 언제, 어떤 목적에 의해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 2기 모두 받침돌, 비몸, 꽃봉오리 모양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온의 비 앞면에는 '효자 마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 새긴 비문에는 이온의 효행과 비석을 세운 내력을 기록하였다. 이온은 부친상을 당한 뒤 3년 동안 묘소 근처에 움집을 짓고 산소를 돌봤다고 한다. 고려의 장군이자 이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1335-1408)가 이 마을을 방문했을 때, 이온의 효행을 듣고 왕에게 보고하여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또한 비문에 따르면, 원래 비몸만 있었는데 1686년에 받침돌과 머릿돌을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인근 원동마을 입구로 옮겨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가, 20세기 전반에 원래 자리였던 이곳으로 다시 옮겨왔다고 한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