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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陜川 嶽堅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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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성리 산43,산44,산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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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gyeonsanseong Fortress, Hapcheon'''
  
 
===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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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견산(해발 634m) 정상부를 중심에 두고 돌을 이어 쌓은 이 산성은 1439년에 축조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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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견산(해발 634m) 정상의 험준한 암벽 사이에 돌로 쌓은 성이다.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 지역 지리지에 따르면, 성은 조선시대인 1439년에 쌓았다. 임진왜란 때인 1594년에 당시 성주 목사였던 곽재우(1552-1617)가 성곽을 보수하였으며, 합천 지역의 선비들이 왜적과 싸우기 위해 모은 의병들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인 1594년에 당시 성주목사였던 곽재우(1552-1617)가 성곽을 보수했다고 하며, 합천 지역의 선비들이 왜적과 싸우기 위해 모은 의병들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악견산성은 정상부까지 이어지는 커다란 바위 사이에 작은 돌들을 쌓아 성곽을 이은 조선시대 산성의 축성 기술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상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에 두 곳의 성터가 남아있으며, 이곳에서는 건물지로 추정되는 자리도 확인할 수 있다.
 
 
 
성의 둘레는 약 660m이며, 보존상태가 좋은 곳의 석축의 높이는 최대 2.7m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에서 의병들이 왜적과 싸울 때 옆의 금성산 정상부와 악견산 사이에 줄을 이은 후 삿갓을 쓰고 붉은 옷을 입은 허수아비들을 매달아두니, 밤에 이것을 본 왜적들이 겁에 질려 도망쳤다고 한다.  
 
  
*허수아비를 곽재우로 오해했다고도 하고(기존 국문), 산신령으로 오해했다고도 함(경남일보 기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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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이곳에서 왜적에 대항하여 치열하게 싸웠지만, 적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장기전이 이어지자 의병들은 바로 옆의 금성산과 악견산 사이에 줄을 맨 뒤, 붉은 옷을 입힌 허수아비를 갈밤에 띄웠다. 허수아비는 마치 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보였으며, 이를 본 왜적들이 겁에 질려 도망쳤다고 한다.
*‘정상부를 둘러 쌓았다(기존)’ 보다는 정상부까지 성벽을 연결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함. 정상부는 암벽부로 바위들이 험준하게 있어 성을 짓기 어려우며, 산행 관련 지도를 보면 정상에서 금성산 방향으로 약간 내려온 곳에 2개의 성터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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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호와 창의사를 조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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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은 일부 허물어진 곳도 있으나,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성의 둘레는 약 660m이며, 보존상태가 좋은 곳의 석축의 높이는 최대 2.7m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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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달밤에 허수아비를 띄워 왜적을 격퇴하다 - 아름다운 합천호수의 전경을 즐길 수 있는 임진왜란 유적 악견산성, 오마이뉴스, 2016.03.17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89618 -> 창의사 맞은편 등산로 입구가 출발점으로 제격이다. 이 길을 걸으면 산성 흔적을 가장 뚜렷하게 확인하고, 또 합천창의사와 합천댐 일원의 경치를 황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장점까지 누리게 된다. 악견산성의 성곽 흔적은 비전문가에게도 커다란 바위들 사이에 작은 돌들을 쌓아 성곽을 이은 조선의 산성 축성 기술을 알게 해준다. 문화재청 누리집이 경상북도 구미 천생산성을 두고 '험준한 암벽의 사이를 돌로 이어 쌓아 우리나라 특유의 산성 형식을 띠고 있다'라고 해설한 대목이 이곳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달밤에 허수아비를 띄워 왜적을 격퇴하다 - 아름다운 합천호수의 전경을 즐길 수 있는 임진왜란 유적 악견산성, 오마이뉴스, 2016.03.17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89618 -> 창의사 맞은편 등산로 입구가 출발점으로 제격이다. 이 길을 걸으면 산성 흔적을 가장 뚜렷하게 확인하고, 또 합천창의사와 합천댐 일원의 경치를 황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장점까지 누리게 된다. 악견산성의 성곽 흔적은 비전문가에게도 커다란 바위들 사이에 작은 돌들을 쌓아 성곽을 이은 조선의 산성 축성 기술을 알게 해준다. 문화재청 누리집이 경상북도 구미 천생산성을 두고 '험준한 암벽의 사이를 돌로 이어 쌓아 우리나라 특유의 산성 형식을 띠고 있다'라고 해설한 대목이 이곳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명산플러스 <106>합천 악견산, 경남일보, 2014.12.4. http://www.g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8728 -> 출발 30여분 만에 만나는 첫번째 악견산 성터. 오백년의 세월, 몇개의 기단만 남은 채 허물어졌고 일부 성돌은 나뒹굴고 있다. 성터라기보다는 집터나 돌무더기같다. 다시 20여분 정도 오르면 낡은 로프와 수직으로 곧추선 철제사다리가 기다린다. 1970년대 설치한 것으로 동시대 산을 즐겼던 사람들의 추억을 간직한 소재다. 2번째 성터는 규모가 제법 크다.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길고 높다. 기단부는 산의 지형에 의지해 돌을 채우는 산탁(山托)공법을 썼고 윗부분은 안팎에 두겹으로 쌓은 협축(夾築)공법이다. 보존상태가 좋은 곳은 석축 높이가 2m 정도 남아 있다. 조선시대 특유의 성 축조법이라는데 관리되지 않고 있는 것이 아쉽다. 임진왜란 때 권양, 박사겸, 박엽 등 의병들이 축성해 주민과 함께 왜적에 맞서 목숨을 건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전하는 얘기. 전투가 길어지자 의병들은 옆에 있는 금성산과 악견산 사이에 줄을 매달았다. 그들은 줄에다 삿갓과 붉은 옷차림을 한 허수아비를 띄웠다. 달밤에 둥실 뜬 허수아비는 산신으로 보였고, 이를 목격한 왜적은 겁에 질려 패주했다 한다.
 
*명산플러스 <106>합천 악견산, 경남일보, 2014.12.4. http://www.g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8728 -> 출발 30여분 만에 만나는 첫번째 악견산 성터. 오백년의 세월, 몇개의 기단만 남은 채 허물어졌고 일부 성돌은 나뒹굴고 있다. 성터라기보다는 집터나 돌무더기같다. 다시 20여분 정도 오르면 낡은 로프와 수직으로 곧추선 철제사다리가 기다린다. 1970년대 설치한 것으로 동시대 산을 즐겼던 사람들의 추억을 간직한 소재다. 2번째 성터는 규모가 제법 크다.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길고 높다. 기단부는 산의 지형에 의지해 돌을 채우는 산탁(山托)공법을 썼고 윗부분은 안팎에 두겹으로 쌓은 협축(夾築)공법이다. 보존상태가 좋은 곳은 석축 높이가 2m 정도 남아 있다. 조선시대 특유의 성 축조법이라는데 관리되지 않고 있는 것이 아쉽다. 임진왜란 때 권양, 박사겸, 박엽 등 의병들이 축성해 주민과 함께 왜적에 맞서 목숨을 건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전하는 얘기. 전투가 길어지자 의병들은 옆에 있는 금성산과 악견산 사이에 줄을 매달았다. 그들은 줄에다 삿갓과 붉은 옷차림을 한 허수아비를 띄웠다. 달밤에 둥실 뜬 허수아비는 산신으로 보였고, 이를 목격한 왜적은 겁에 질려 패주했다 한다.

2021년 1월 19일 (화) 04:29 판


합천 악견산성
Akgyeonsanseong Fortress, Hapcheon
합천 악견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합천 악견산성
영문명칭 Akgyeonsanseong Fortress, Hapcheon
한자 陜川 嶽堅山城
주소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성리 산43,산44,산45
지정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제218호
지정일 1999년 8월 6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일원(一圓)
웹사이트 합천 악견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악견산성은 성벽을 험준한 자연암벽 사이를 돌로 이어쌓아 만든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은 일부 허물어진 곳도 있으나,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1439년(세종 21)에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악견산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008척(약 660m)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인 1594년(선조27)에 당시 성주목사였던 곽재우(1552~1617)가 성곽을 보수하였으며, 권양, 권해, 박사겸, 박엽 등 합천의 선비들이 의병을 모아 이곳에서 왜적과 싸웠다.

악견산성에 얽힌 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의병이 악견산성에서 치열하게 싸웠지만, 왜군이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옆의 금성산 바위에 구멍을 뚫어 악견산과 줄을 이어 곽재우 장군과 같이 붉은 옷을 입힌 허수아비를 띄웠는데, 왜군이 이를 보고 곽재우 장군으로 오인하여 도망쳤다고 한다.


  • 『경상도속찬지리지 (慶尙道續撰地理志)』: 1469년(예종 1)에 편찬. 경상도지리지의 속편으로 조선 전기의 경상도지역 사정을 체계적으로 전해준다.
  •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1481년(성종 12)에 편찬. 각 도의 지리, 풍속, 인물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영문

Akgyeonsanseong Fortress, Hapcheon

영문 해설 내용

악견산(해발 634m) 정상의 험준한 암벽 사이에 돌로 쌓은 성이다.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 지역 지리지에 따르면, 이 성은 조선시대인 1439년에 쌓았다. 임진왜란 때인 1594년에 당시 성주 목사였던 곽재우(1552-1617)가 성곽을 보수하였으며, 합천 지역의 선비들이 왜적과 싸우기 위해 모은 의병들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이곳에서 왜적에 대항하여 치열하게 싸웠지만, 적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장기전이 이어지자 의병들은 바로 옆의 금성산과 악견산 사이에 줄을 맨 뒤, 붉은 옷을 입힌 허수아비를 갈밤에 띄웠다. 허수아비는 마치 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보였으며, 이를 본 왜적들이 겁에 질려 도망쳤다고 한다.

성벽은 일부 허물어진 곳도 있으나,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성의 둘레는 약 660m이며, 보존상태가 좋은 곳의 석축의 높이는 최대 2.7m이다.

참고자료

  • 달밤에 허수아비를 띄워 왜적을 격퇴하다 - 아름다운 합천호수의 전경을 즐길 수 있는 임진왜란 유적 악견산성, 오마이뉴스, 2016.03.17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89618 -> 창의사 맞은편 등산로 입구가 출발점으로 제격이다. 이 길을 걸으면 산성 흔적을 가장 뚜렷하게 확인하고, 또 합천창의사와 합천댐 일원의 경치를 황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장점까지 누리게 된다. 악견산성의 성곽 흔적은 비전문가에게도 커다란 바위들 사이에 작은 돌들을 쌓아 성곽을 이은 조선의 산성 축성 기술을 알게 해준다. 문화재청 누리집이 경상북도 구미 천생산성을 두고 '험준한 암벽의 사이를 돌로 이어 쌓아 우리나라 특유의 산성 형식을 띠고 있다'라고 해설한 대목이 이곳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 명산플러스 <106>합천 악견산, 경남일보, 2014.12.4. http://www.g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8728 -> 출발 30여분 만에 만나는 첫번째 악견산 성터. 오백년의 세월, 몇개의 기단만 남은 채 허물어졌고 일부 성돌은 나뒹굴고 있다. 성터라기보다는 집터나 돌무더기같다. 다시 20여분 정도 오르면 낡은 로프와 수직으로 곧추선 철제사다리가 기다린다. 1970년대 설치한 것으로 동시대 산을 즐겼던 사람들의 추억을 간직한 소재다. 2번째 성터는 규모가 제법 크다.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길고 높다. 기단부는 산의 지형에 의지해 돌을 채우는 산탁(山托)공법을 썼고 윗부분은 안팎에 두겹으로 쌓은 협축(夾築)공법이다. 보존상태가 좋은 곳은 석축 높이가 2m 정도 남아 있다. 조선시대 특유의 성 축조법이라는데 관리되지 않고 있는 것이 아쉽다. 임진왜란 때 권양, 박사겸, 박엽 등 의병들이 축성해 주민과 함께 왜적에 맞서 목숨을 건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전하는 얘기. 전투가 길어지자 의병들은 옆에 있는 금성산과 악견산 사이에 줄을 매달았다. 그들은 줄에다 삿갓과 붉은 옷차림을 한 허수아비를 띄웠다. 달밤에 둥실 뜬 허수아비는 산신으로 보였고, 이를 목격한 왜적은 겁에 질려 패주했다 한다.
  • 합천 악견산성, 문화콘텐츠닷컴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9&cp_code=cp0208&index_id=cp02080349&content_id=cp020803490001&search_left_menu=8 -> 합천읍에서 남서쪽으로 15㎞ 지점에 솟은 악견산(491m) 꼭대기의 바위를 연결하여 자연석으로 쌓은 성이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는 1439년에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있던 곽재우(郭再祐)가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의 명령을 받아 보수하고 이용하였다. 보존이 잘된 곳의 석축은 높이 2.7m 정도 남아 있고, 산꼭대기의 평지에는 건물터가 남아 있다.
  • 임진왜란 초 열세 만회, 이들의 공이 컸다 - 악견산의 호위를 받으며 웅장하게 서 있는 경남 합천 창의사, 오마이뉴스, 2016.3.3.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84069 -> 악견산은 창의사 터를 임진왜란 의사 추모 성지로 인정하게 만드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게다가 악견산 정상부에 있는 악견산성(경상남도 기념물 218호)은 그냥 산성이 아니라 임진왜란 유적이다. 둘레 약 660m, 높이 평균 2.7m의 악견산성은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산꼭대기 부분을 빙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7년전쟁 중인 1594년(선조 27) 당시 성주목사였던 곽재우(1552~1617)가 성곽을 보수했다. 1469년(예종 1)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는 이 산성이 1439년(세종 21)에 축성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악견산으로 오르는 길 중 합천군 창의사(아래, 창의사)에서 가장 가까운 등산로의 출발점은 성리(城里)이다. 산성 아래에 있다고 해서 성리라는 이름을 얻은 이 마을은 창의사 정면에서 똑바로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