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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봉서정, 도촌별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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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봉서정‧도촌별묘
합천 봉서정‧도촌별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합천 봉서정‧도촌별묘
한자 陜川 鳳棲亭⋅陶村別廟
주소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압곡리 716 봉서정과 도촌별묘
지정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5호
지정일 1983년 8월 12일
분류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서당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2동
웹사이트 합천 봉서정‧도촌별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봉서정은 오계 조정립(梧溪 曺挺立, 1583~1660)이 정주목사(定州牧使)와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후 고향으로 돌아와 1623년(인조1)에 지은 건물로, 후학을 양성하고 인근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지낸 곳이다. ‘봉이 머무르는 정자’라는 뜻의 봉서정은 경치를 바라보기 위해 벽을 두지 않는 정자(亭子)의 형태가 아니라, 남부지방의 ‘일(ㅡ)’자형 민가와 비슷하다.

도촌별묘는 도촌 조응인(陶村 曺應仁, 1556~1624)과 그의 아들 조정립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별도의 담장을 둘러서 경계를 구분하고, 봉서정 뒤쪽에 계단을 두어 중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공부하는 봉서정이 앞에 있고, 사당이 뒤에 있다. 건물의 배치 형태로 미루어 자연을 감상하고 심신을 휴양하는 정자의 역할보다 조상을 모시고 학문을 닦으며 후학을 지도하는 서원의 성격이 크다. 이 건물들은 본래 이곳에서 4㎞ 정도 떨어진 금봉천 변에 있었다. 그러나 합천댐의 건설로 그곳이 물에 잠기게 되자, 1988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봉서정은 조정립(1583-1660)이 말년에 생활하던 건물이다. 1644년에 지어졌으며, 건립 당시에는 ‘금봉서사’로 불렸다.

조정립은 1605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1642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후학을 양성하고 인근 학자들과 교류하기 위해 이 건물을 지었다.

‘봉황이 머무르는 정자’라는 이름과는 달리 건물의 평면은 一자형의 민가에 가깝다.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으며, 건물 정면과 좌우에 각각 툇마루와 쪽마루를 달았다.

도촌별묘는 조정립이 아버지인 조응인(1556-1624, 호 도촌)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조정립이 죽은 후에 그의 위패도 함께 봉안되었다.

별도의 담장을 둘러 영역을 나누고 봉서정 뒤쪽의 중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게 했으며, 건물에는 ‘청덕사’라 적힌 현판이 달려있다.

강학 기능이 있는 봉서정이 앞에 있고, 제향 기능이 있는 도촌별묘가 뒤에 있는 이곳의 건물 배치는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는 서원과 유사하게 되어 있다.

본래 금봉천 인근에 있었으나 합천댐 건설로 인해 1988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 조응인은 임진왜란 때 합천 지역에서 의병을 규합해 활약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왕자의 스승을 지내기도 했다.

참고 자료

-> 1644년 건립으로 확인됨. 귀향 후 잠시 다시 벼슬을 했다 해도 조정립이 남긴 서간문의 내용 등을 토대로 하면 1642년에 귀향한 것으로 봐야 하며, 귀향 후 지은 건물이므로 기존 국문의 1623년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음. 
  • 합천 봉서정과 도촌별묘(경상남도 유형문화재 235호), 여행&사진,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dbsqkqh/2166 -> 실제 답사 사진(2012) ; 벽에 나무판 벽을 세운 건물 사진이 있는데, 어떤 건물인지 알 수 없음.
  • 봉서정과 도촌별묘, 닥마들,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shinh-k791104/4920 -> 옮긴 위치 지도 표시, 실제 답사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