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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801330000 합천 대야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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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합천 대야성
 
|대표명칭=합천 대야성
|영문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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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Daeyaseong Fortress, Hapcheon
 
|한자=陜川 大耶城
 
|한자=陜川 大耶城
|주소=경남 합천군 합천읍 죽죽길 72-5 (합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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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죽죽길 72-5 (합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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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경상남도 기념물 제133호
 
|지정번호=경상남도 기념물 제1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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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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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yaseong Fortress, Hapcheon'''
  
 
===영문 해설 내용===
 
===영문 해설 내용===
대야성은 매봉산(취적산, 해발 90m) 정상부터 능선을 따라 길쭉한 모양으로 쌓은 성이다.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565년에 축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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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성은 취적산(해발 90m) 정상부터 능선을 따라 흙과 돌을 이용하여 쌓은 성이다. 당시 합천은 신라와 백제 사이의 치열한 접경지역이었으며,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565년에 이 성을 축조했다고 한다. 대야성은 양국 길목에 자리한 군사적 요충지이자 적을 방어하는 데에 결정적인 여러 지리적 요건을 갖춘 곳이었기 때문에, 이 성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지금은 대부분 훼손되어 원형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3차례에 걸친 시굴조사를 통해 구릉 남쪽에 잔존하는 성벽 일부와 추정 문지, 건물지, 배수시설, 적을 막기 위해 세운 울타리 등 성과 관련한 유구들이 확인되었다. 성벽은 돌과 흙을 섞어 쌓았으며,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1.5m 내외이다.
 
 
 
합천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이자 신라 서부지역의 거점이었다. 특히 대야성은 양국 길목에 자리한 군사적 요충지이자 적을 방어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는 여러 지리적 조건을 갖춘 요새였기 때문에 이 성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642년 백제 장군 윤충의 공격으로 성이 함락되었을 때에는 당시 성주였던 김품석과 그의 부인인 김춘추의 딸이 죽고 많은 신라인들이 백제의 포로가 되었다. 920년 후백제에 의해 함락당하기도 했으며, 접전 끝에 936년 고려가 이 성을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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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년 백제 장군 윤충의 공격으로 성이 함락되었을 때에는 당시 성주였던 김품석과 그의 부인(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의 딸)이 죽었고, 천여 명의 신라인들이 백제의 포로가 되었다. 이후 김춘추는 대야성 남쪽 석벽위에 연호사라는 사찰을 건립하여 당시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2003년, 2004년, 2009년에 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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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성 둘레는 약 2km 내외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성벽이 다 허물어지고 약 500m 정도가 남아 있다. 성의 동쪽 산기슭에는 642년 전투 때 끝까지 성을 지키다 전사한 신라의 장수 죽죽을 기리는 비석(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8호)이 세워져 있다.
*성 동쪽에는 642년 전투 때 끝까지 성을 지키다 전사한 신라의 장수 죽죽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합천 죽죽비 항목 참조) / 김춘추는 대야성 남쪽 석벽위에 연호사(烟湖寺)를 건립하여 당시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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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대야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596 -> 2017년 원고 업데이트됨.
 
*대야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596 -> 2017년 원고 업데이트됨.
 
*지자체 제공 조사자 의견 참조 -> 경상남도 합천군 해발 90m의 매봉산 정상을 둘러쌓은 대야성은 흙과 돌을 이용하여 쌓은 성이다. 이곳은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 서부지방의 접경지대로, 신라 진흥왕 25년(565)에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았다 한다. / 삼국시대 백제와의 접경지대인 신라 서부지방의 요지로서 642년(신라 진덕여왕11년, 백제 의자왕 2년)에 백제장군 윤충(允忠)의 공격으로 함락된 적이 있고 이때에 도독(都督) 김품석(金品釋)과 그 부인(김춘추의 딸)도 죽어 신라는 한때 큰 타격을 받고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기도 했다. 경명왕(920)때 에는 후백제 견훤(甄萱)에 게 다시 함락되기도 했다. 강변에 연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토석혼축 했으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출처-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조사연구자료) / 현재 대야성내에는 충혼탑과 관개시설 및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성벽은 구릉의 동남쪽에 일부 남아 있고, 높이는 1.5m 정도이다. 사격자문호편, 타날문호, 와편, 뚜껑편, 파상문호편 등이 수습되었다.  
 
*지자체 제공 조사자 의견 참조 -> 경상남도 합천군 해발 90m의 매봉산 정상을 둘러쌓은 대야성은 흙과 돌을 이용하여 쌓은 성이다. 이곳은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 서부지방의 접경지대로, 신라 진흥왕 25년(565)에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았다 한다. / 삼국시대 백제와의 접경지대인 신라 서부지방의 요지로서 642년(신라 진덕여왕11년, 백제 의자왕 2년)에 백제장군 윤충(允忠)의 공격으로 함락된 적이 있고 이때에 도독(都督) 김품석(金品釋)과 그 부인(김춘추의 딸)도 죽어 신라는 한때 큰 타격을 받고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기도 했다. 경명왕(920)때 에는 후백제 견훤(甄萱)에 게 다시 함락되기도 했다. 강변에 연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토석혼축 했으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출처-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조사연구자료) / 현재 대야성내에는 충혼탑과 관개시설 및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성벽은 구릉의 동남쪽에 일부 남아 있고, 높이는 1.5m 정도이다. 사격자문호편, 타날문호, 와편, 뚜껑편, 파상문호편 등이 수습되었다.  
 
*대야성, 길공구의 고려사 http://gil092003.egloos.com/v/551168 -> 대야성은 정말 특이한 성입니다. 일단 성 자체는 산성입니다. 산성인듯 싶으면서도 남쪽 후방엔 낙동강의 지류중 큰강에 속하는 황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북쪽에는 2~3천병력은 충분히 먹여살릴 곡창지대가 있습니다. 또 그위에는 또다른 낙동강의 지류인 합천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산성의 장점인 높은 방어력의 이점을 지닌 동시에 산성의 약점인 장기간 농성에 따른 물자,식수 곤란등의 문제가 쉽게 해결될수 있는 지리적으로 천혜의 요새였지요. 합천은 경남일대의 주요 거점 5군대로 모두 향할수 있는 중간지점에 있습니다. 또 자급자족 및 수성이 용이한 성이라 2~5천의 정규 병력을 어떤 조건하에서도 주둔시킬수가 있었고, 유사시에는 대군의 주둔지, 보급로가 되기도 하였지요. 다른 인근의 호족들의 성이야 함락을 시켜도, 안시켜도 별상관은 없지만 대야성을 함락시키지 않고 그대로 진군한다면 퇴로가 막히고 기습을 당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동서가 분열하던 삼국시대부터 수비에도 용이하고 공격형 대병력이 주둔할수도 있는 대야성의 가치가 높아진 것이지요.
 
*대야성, 길공구의 고려사 http://gil092003.egloos.com/v/551168 -> 대야성은 정말 특이한 성입니다. 일단 성 자체는 산성입니다. 산성인듯 싶으면서도 남쪽 후방엔 낙동강의 지류중 큰강에 속하는 황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북쪽에는 2~3천병력은 충분히 먹여살릴 곡창지대가 있습니다. 또 그위에는 또다른 낙동강의 지류인 합천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산성의 장점인 높은 방어력의 이점을 지닌 동시에 산성의 약점인 장기간 농성에 따른 물자,식수 곤란등의 문제가 쉽게 해결될수 있는 지리적으로 천혜의 요새였지요. 합천은 경남일대의 주요 거점 5군대로 모두 향할수 있는 중간지점에 있습니다. 또 자급자족 및 수성이 용이한 성이라 2~5천의 정규 병력을 어떤 조건하에서도 주둔시킬수가 있었고, 유사시에는 대군의 주둔지, 보급로가 되기도 하였지요. 다른 인근의 호족들의 성이야 함락을 시켜도, 안시켜도 별상관은 없지만 대야성을 함락시키지 않고 그대로 진군한다면 퇴로가 막히고 기습을 당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동서가 분열하던 삼국시대부터 수비에도 용이하고 공격형 대병력이 주둔할수도 있는 대야성의 가치가 높아진 것이지요.
*[참고] 합천 대야성은 대양면과 율곡면에 걸쳐 있는 대야성산 자락에 있었다, 조찬용 합천사랑,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antlsguraud/220696847039 -> '''해당 안내판이 세워질 자리의 성은 대야성이 아니라는 의견''' - 지금의 대야성은 대가야의 축성 방식으로 조성되었으며, ’황강 남동쪽‘에 있다는 과거 기록 기준으로도 현 위치는 아님. / 지도 및 사진으로 이곳이 대야성임을 비정하는 경우(길공구의 고려사)도 있음. 해당 블로그이 의견을 참고할 필요는 있으나, 지자체에서 수용하지는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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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합천 대야성은 대양면과 율곡면에 걸쳐 있는 대야성산 자락에 있었다, 조찬용 합천사랑,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antlsguraud/220696847039 -> '''해당 안내판이 세워질 자리의 성은 대야성이 아니라는 의견''' - 지금의 대야성은 대가야의 축성 방식으로 조성되었으며, ’황강 남동쪽‘에 있다는 과거 기록 기준으로도 현 위치는 아님. / 지도 및 사진으로 이곳이 대야성임을 비정하는 경우(길공구의 고려사)도 있음.  
 
   
 
   
  

2021년 1월 19일 (화) 03:10 판


합천 대야성
Daeyaseong Fortress, Hapcheon
합천 대야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합천 대야성
영문명칭 Daeyaseong Fortress, Hapcheon
한자 陜川 大耶城
주소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죽죽길 72-5 (합천리)
지정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제133호
지정일 1993년 12월 7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시대 신라
수량/면적 42,050㎡
웹사이트 합천 대야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 성은 해발 90m의 취적산(吹笛山) 정상과 5~6부 능선을 따라 흙과 돌을 이용하여 쌓은 성이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 사이에 치열한 접경지역으로서 진덕여왕 11년(642년)에는 백제장군 윤충(允忠)의 공격으로 함락되어, 성주(城主)인 도독(都督) 김품석(金品釋)과 그 부인[무열왕 김춘추의 딸]이 죽고, 신라인 1천여 명이 포로가 된 곳이다. 통일신라 말기인 920년에는 견훤(甄萱)이 이끄는 후백제군이 여러 차례에 걸쳐 이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후 고려가 점령하였다가 다시 후백제에게 넘어가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다가 936년에 최종적으로 고려가 차지하였다.

지금은 성벽이 다 허물어지고, 약 500m 정도가 남아 있는데 성 둘레는 약 2km 내외로 추정된다. 성의 동쪽 산기슭에는 642년에 이 성이 백제에 함락 당할 때 끝까지 성을 지키다 전사한 신라 장수 죽죽(竹竹)을 기리는 유적비가 서 있다.

영문

Daeyaseong Fortress, Hapcheon

영문 해설 내용

대야성은 취적산(해발 90m) 정상부터 능선을 따라 흙과 돌을 이용하여 쌓은 성이다. 당시 합천은 신라와 백제 사이의 치열한 접경지역이었으며,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565년에 이 성을 축조했다고 한다. 대야성은 양국 길목에 자리한 군사적 요충지이자 적을 방어하는 데에 결정적인 여러 지리적 요건을 갖춘 곳이었기 때문에, 이 성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642년 백제 장군 윤충의 공격으로 성이 함락되었을 때에는 당시 성주였던 김품석과 그의 부인(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의 딸)이 죽었고, 천여 명의 신라인들이 백제의 포로가 되었다. 이후 김춘추는 대야성 남쪽 석벽위에 연호사라는 사찰을 건립하여 당시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원래의 성 둘레는 약 2km 내외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성벽이 다 허물어지고 약 500m 정도가 남아 있다. 성의 동쪽 산기슭에는 642년 전투 때 끝까지 성을 지키다 전사한 신라의 장수 죽죽을 기리는 비석(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8호)이 세워져 있다.

참고자료

  • 대야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596 -> 2017년 원고 업데이트됨.
  • 지자체 제공 조사자 의견 참조 -> 경상남도 합천군 해발 90m의 매봉산 정상을 둘러쌓은 대야성은 흙과 돌을 이용하여 쌓은 성이다. 이곳은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 서부지방의 접경지대로, 신라 진흥왕 25년(565)에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았다 한다. / 삼국시대 백제와의 접경지대인 신라 서부지방의 요지로서 642년(신라 진덕여왕11년, 백제 의자왕 2년)에 백제장군 윤충(允忠)의 공격으로 함락된 적이 있고 이때에 도독(都督) 김품석(金品釋)과 그 부인(김춘추의 딸)도 죽어 신라는 한때 큰 타격을 받고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기도 했다. 경명왕(920)때 에는 후백제 견훤(甄萱)에 게 다시 함락되기도 했다. 강변에 연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토석혼축 했으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출처-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조사연구자료) / 현재 대야성내에는 충혼탑과 관개시설 및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성벽은 구릉의 동남쪽에 일부 남아 있고, 높이는 1.5m 정도이다. 사격자문호편, 타날문호, 와편, 뚜껑편, 파상문호편 등이 수습되었다.
  • 대야성, 길공구의 고려사 http://gil092003.egloos.com/v/551168 -> 대야성은 정말 특이한 성입니다. 일단 성 자체는 산성입니다. 산성인듯 싶으면서도 남쪽 후방엔 낙동강의 지류중 큰강에 속하는 황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북쪽에는 2~3천병력은 충분히 먹여살릴 곡창지대가 있습니다. 또 그위에는 또다른 낙동강의 지류인 합천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산성의 장점인 높은 방어력의 이점을 지닌 동시에 산성의 약점인 장기간 농성에 따른 물자,식수 곤란등의 문제가 쉽게 해결될수 있는 지리적으로 천혜의 요새였지요. 합천은 경남일대의 주요 거점 5군대로 모두 향할수 있는 중간지점에 있습니다. 또 자급자족 및 수성이 용이한 성이라 2~5천의 정규 병력을 어떤 조건하에서도 주둔시킬수가 있었고, 유사시에는 대군의 주둔지, 보급로가 되기도 하였지요. 다른 인근의 호족들의 성이야 함락을 시켜도, 안시켜도 별상관은 없지만 대야성을 함락시키지 않고 그대로 진군한다면 퇴로가 막히고 기습을 당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동서가 분열하던 삼국시대부터 수비에도 용이하고 공격형 대병력이 주둔할수도 있는 대야성의 가치가 높아진 것이지요.
  • [참고] 합천 대야성은 대양면과 율곡면에 걸쳐 있는 대야성산 자락에 있었다, 조찬용 합천사랑,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antlsguraud/220696847039 -> 해당 안내판이 세워질 자리의 성은 대야성이 아니라는 의견 - 지금의 대야성은 대가야의 축성 방식으로 조성되었으며, ’황강 남동쪽‘에 있다는 과거 기록 기준으로도 현 위치는 아님. / 지도 및 사진으로 이곳이 대야성임을 비정하는 경우(길공구의 고려사)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