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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노참판댁 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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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7월 2일 (금) 00:4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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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노참판댁 고가
함양 노참판댁 고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함양 노참판댁 고가
주소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길 34-2 (개평리)
지정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60호
지정일 2004년 10월 21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1곽(2490㎡)
웹사이트 함양 노참판댁 고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개평리 노 참판 댁 고가는 풍천 노씨 가문의 노석규(盧錫奎)가 개평 마을로 이주하였을 때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노 참판 댁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의 아들인 노광두(盧光斗)가 호조 참판을 지냈기 때문이다.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마을 주민들은 고마움의 표시로 노광두의 집에 사랑채를 짓겠다고 청하였고, 노광두는 주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초가집으로 짓도록 하였다.

현재 이 집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은 1830년 노광두가 지었고, 안채는 1945년에 고쳤다. 초가로 지었던 사랑채는 지금은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이 집은 노광두의 증손 사초 노근영(史楚 盧近泳)이 태어나 자란 곳이기도 하다. 노근영은 일제 강점기에 많은 일화를 남긴 바둑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집은 풍천노씨 가문의 노석규가 개평마을로 이주한 18세기 중반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노참판댁이라 불리는 이유는 노석규의 아들인 노광두(1772-1859)가 호조참판을 지냈기 때문이다.

노광두는 1814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지내다 1851년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참판으로 재직하던 당시 흉년이 들어 함양 지역 백성들의 살림이 어려워지자, 세금을 탕감해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마을 주민들은 고마움의 표시로 노광두의 집에 사랑채를 짓겠다고 청하였고, 노광두는 주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초가집으로 건립하도록 하였다.

현재 이 집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은 1830년 노광두가 지었고, 안채는 1945년에 중수하였다. 초가로 지었던 사랑채는 지금은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이 집은 노광두의 증손자이자 일제강점기 바둑계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던 노근영(1875-1945)이 태어나 자란 곳이기도 하다.

문맥요소

N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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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