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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 대산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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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 대산종가
한산이씨 대산종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한산이씨 대산종가
한자 韓山李氏 大山宗家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537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8호
지정일 2001년 11월 1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일제강점기
수량/면적 3동
웹사이트 한산이씨 대산종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주택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태어난 집으로 8대손인 용원(龍遠, 1915~1959)이 17세에 결혼 한 후 3~4년 뒤에 규모를 조금 줄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상정은 본관이 한산이며 목은 이색의 후예로 퇴계 이황의 학문적 정통을 계승하여 유림의 종사로 인정받았으며,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이 집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口’자형 평면구조의 목조 기와집이다. 안채와 마주하는 방 2칸은 제례 시에 사용하는 방으로 구성하였다. 일반적으로 안채는 여성의 공간으로 사용되는데 반해 대산종가에서는 남성과 조상을 위한 공간으로 마련한 것이 특이하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조선시대의 학자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1711~1781) 가문의 종택이다. 종택은 한 집안의 대를 잇는 후손이 대대로 사는 집이다. 이상정이 태어난 집이기도 한 이 집은 8대손인 이용원(李龍遠, 1915~1959)이 결혼 후 1930년대에 규모를 줄여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건립했다고 한다.

이상정은 안동 일직면에 한산이씨 중 처음으로 정착한 입향조 이홍조(李弘祚, 1595~1660)의 현손(玄孫)이다. 그는 안동에 기반을 둔 조선시대의 저명한 유학자 이황(李滉, 1502~1570)의 학문을 계승한 학자로, 벼슬을 사양하면서 고향에서 제자를 양성하는 것에 힘썼다.

집은 대문채, 본채, 안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 공간은 정면에 계자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앞마당 쪽으로 돌출하여 시설해 대청을 대신하도록 하였으며, 다른 공간보다 높은 지붕을 얹어 공간의 위계를 나타냈다. 안채 대청 우측에 있는 온돌방 중 가장 위쪽은 이상정이 출생한 방이라 하여 ‘태실(胎室)’이라 부른다. 바로 이어지는 방은 제례 때 사용하는 빈소방으로, 일반적으로 안채가 여성의 공간으로 사용되는데 비해 남성과 조상을 위한 공간으로 마련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

  • 담장을 두른 별도의 영역 안에 자리한 사당에는 이상정 내외의 위패와 제사를 올릴 4대조까지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현재 숙박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1차 수정

참고자료

  • 한산이씨 대산종가,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982 -> 한산이씨 대산 종가는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태어난 집으로, 후에 이상정의 8세손인 이용원(李龍遠, 1915~1959)이 규모를 조금 줄여 새로 건립하였다. 한산이씨 대산 종가는 원래 큰 규모의 집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3년가량 집을 비워 두어 퇴락하자 이상정의 8세손인 이용원이 1930년대에 규모를 조금 줄여 새로 건립하였다. / 정침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완전 ‘ㅁ’자형 건물이다. 정면의 가운데 칸에 중문간을 두고, 우측에 사랑방 2칸통을 앉혔으며 좌측에는 광 2칸을 배열하였다. 사랑 공간은 정면에 툇마루를 앞마당 쪽으로 돌출하여 시설하고 다른 공간보다 높은 팔작지붕을 얹어 사랑 공간의 위용을 드러내게 하였다. 사랑 공간에 사랑 대청을 두는 것이 전형적인 모습인데, 한산이씨 대산 종가는 툇마루를 넓게 하여 사랑 대청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툇마루 전면에는 계자각(鷄子脚) 난간이 설치되어 있고, 우측면으로는 쪽마루가 시설되어 있다. 안채는 중문간에 들어서면 안마당 건너에 앉아 있다. 안방 좌측에는 1칸 식방(食房)과 1.5칸 부엌, 그리고 1칸 창고와 반 칸 통래간이 뻗어 좌익사(左翼舍)를 이루고 있으며, 안대청 우측에는 중사랑방 1칸과 빈소방 2칸, 그리고 통래간 1칸이 연이어져 우익사(右翼舍)를 이루고 있다. 중사랑방은 이상정이 출생한 방이라 하여 ‘태실(胎室)’이라 부르며, 빈소방은 제례 때 사용하는 방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 부분이 여성의 공간으로 사용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안채의 배면과 우익사 주위에 동선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쪽마루를 비교적 많이 깔아 놓았다. 한산이씨 대산 종가는 정면의 중문간 외에 우측면에도 출입문을 두었는데, 문얼굴이 우측면의 것이 훨씬 크고 높아 주 출입구임을 알 수 있으며 현재도 이 문을 주로 이용하고 있다. 1900년대 이후부터 주 출입구가 측면으로 옮겨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한산이씨 대산 종가는 이전 시기의 중문간 수법을 준용한 과도기적 유형에 속한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박공지붕집이다. / 한산이씨 대산 종가는 이전에 존재하였던 종택을 본보기로 삼아 1930년대에 건립한 근세 한옥으로, 드물게 전통 양식에 따라 건립하여 보존할 가치가 높다.
  • [종가] 35.안동 한산 이씨 대산 종택, 경북일보, 2016.11.14.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6290
  • 한산이씨대산종가 (韓山李氏大山宗家),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4080000,37&pageNo__=5_1_1_0&pageNo=1_1_2_0
  • 이상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611 -> 1735년(영조 11)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39년 연원찰방(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9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짓고 제자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1755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 그 이후로는 오직 학문에만 힘을 쏟아 사우들과 강론하고, 제자를 교육하는 데 전념하였다. 이상정은 이황(李滉) 이후 기호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된 영남학파에서 이황의 계승을 주창하고 일어난 이현일·이재로 이어진 영남 이학파의 중추적 인물이다. 이상정은 외할아버지 이재를 통해 영남 이학파의 학풍을 계승하는 한편, 그 근원이 되는 이황의 사상을 계승하고 정의하는 입장에서 사상적 터전을 마련하였다. 이상정의 학문적 흐름은 동생 이광정(李光靖)과 남한조(南漢朝)를 통해 유치명(柳致明)으로 이어지고, 이진상(李震相)에 이르러 유리론(唯理論)으로 전개되었으며,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곽종석(郭鍾錫)으로 계승되었다.
  • (참고)대산종택 예약페이지 https://daesanjongtaek.modoo.at/?link=8g6ffrz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