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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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12월 1일 (일) 04:5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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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대첩 閑山大捷
Goto.png 종합안내판: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해설문

국문

한산대첩은 선조 25년(1592)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의 정예 수군을 무찌른 전투이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7월 8일과 10일에 각각 한산도 앞바다와 안골포*에서 왜군을 크게 이겼다. 한산도 앞바다에서는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수군을, 안골포에서는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의 수군을 쳐부수었다.

한산대첩에서 이순신이 큰 승리를 거둔 데는 학익진**과 거북선***, 판옥선**** 이 큰 역할을 했다. 이 전투에서 왜적의 배 47척을 격침시키고 12척을 빼앗았으며 20여 척을 불태웠다. 조선 수군은 한산대첩의 승리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북진을 막았고, 곡창지대인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켰다.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이 패배 이후 더 이상 경솔하게 조선 수군과 대적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

한산대첩은 김시민(金時敏) 장군의 진주대첩, 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으로 불리고 있으며, 세계 해전사에서도 4대 해전에 속하는 유명한 해전으로 알려져 있다.


  • 안골포(安骨浦):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동동에 있었던 포구
  • 학익진(鶴翼陣):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반원의 형태이기 때문에 적을 포위하면서 공격하기에 적합한 진법이다.
  • 거북선: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이순신 장군이 복원한 군함으로 그 크기는 판옥선과 비슷하였으나 돌격선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 사천해전과 한산해전에서 왜적의 배를 격파하고 해상권을 장악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3척 정도가 있었으나 1595년 이후에는 5척 정도가 되었다.
  • 판옥선(板屋船): 널빤지로 지붕을 덮은 2층 구조의 전투선으로 명종 10년(1555)에 만들었다. 노를 담당하는 병사는 아래층에, 공격을 담당하는 병사는 위층에 배치하여 서로 방해를 받지 않고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선체가 높아서 위에서 아래로 활이나 대포를 쏘면 명중률이 높았고, 적병이 기어오르기에 힘든 구조였다. 승선 인원은 125명~130명 정도가 되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200명까지 탈 수 있었다고 한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한산대첩은 1592년 8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의 정예 수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이다.

당시 일본군은 통영과 거제 사이의 좁은 해협인 견내량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곳은 물살이 세고 암초가 많아 배들이 서로 부딪힐 수 있는 위험이 있었고, 일본 수군에게는 육지 쪽으로 도망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지형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먼저 판옥선 5-6척으로 일본 수군을 공격하는 척하였고, 반격에 나선 일본 수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했다. 일본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숨어있던 조선 수군의 함대가 나타났고,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형태로 배치된 조선 수군의 배들이 일본의 배를 포위하면서 집중 공격하였다. 조선 수군은 총과 포를 쏘면서 돌격했고, 전투 결과 일본 수군의 배 47척을 격침시키고 12척을 빼앗았으며 20여 척을 불태웠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하였고, 곡창지대인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켰다. 또한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일본 육군의 활동에도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산도에서의 패배 이후 더 이상 경솔하게 조선 수군과 대적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