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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2020 한중연 안내문안 작성'''== ===국문=== ====2018==== 이 건물은 예문관 검열을 지냈으며 의병장이던 김해(金垓)의 아들 매원(梅園) 김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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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본래 김번(金璠, 1479-1544)이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1520년경에 지은 집이다. 이후 1618년경에 김번의 증손인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이 집을 중건하여 누각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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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락정은 의병대장 김해(金垓, 1555~1593)의 아들인 김광계(金光繼, 1580~1646)가 1608년에 세운 정자이다. 원래 예안면 오천리 낙동강 근처에 있었는데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1974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당시 예조 판서로서 남한산성에서의 굴욕적인 화의에 반대하다가 청나라 심양(瀋陽)에 6년간 인질로 끌려갔다. 그는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와 함께 귀국하였고, 이후에는 남양주의 석실에서 은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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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계는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의 제자이며, 젊어서부터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다.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인조(1623~1649 재위)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군사를 해산시켰다. 이후에는 고향에 은거하며 말년을 보냈다.  
  
청원루라는 이름은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지은 「애련설(愛蓮說)」〉 ‘향원익청(香遠益淸)’, 즉 ‘향기가 멀리 갈수록 더욱 맑아진다.’는 것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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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락정은 학문을 강론하거나 시를 짓기 위한 모임을 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대청 안쪽에는 ‘운암정사(雲巖精舍)’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정사’는 수양과 공부의 장소로 지은 건물을 말하고 ‘운암’은 김해의 증조할아버지인 김연(金緣, 1487~1544)의 호이다.
 
 
본래 두 채의 건물로 41칸이나 되었으나, 1934년 홍수로 한 채가 허물어져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몸채 부분은 기단을 높게 한 단층 다락집 형태이며,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
 

2020년 9월 24일 (목) 08:00 기준 최신판

2020 한중연 안내문안 작성

국문

2018

이 건물은 예문관 검열을 지냈으며 의병장이던 김해(金垓)의 아들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가 조선 현종(顯宗) 13년(1672)에 건립하여 의병 출신의 선비들을 모아 회의를 열던 정자이다. 매원은 광해군(光海君)의 어지러운 정치를 피해 이 곳에 숨어 지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인데 중앙의 마루를 중심으로 온돌방 2칸이 배치되어 있다. 정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사에 가까운 평면구조를 보인다. 대청 뒤쪽에 운암정사(雲巖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2020 초고

침락정은 의병대장 김해(金垓, 1555~1593)의 아들인 김광계(金光繼, 1580~1646)가 1672년 세운 건물이다.

김광계는 한강 정구의 제자이며, 외할아버지가 퇴계 이황의 조카인 이재(李宰)이다. 김시양(金時讓), 이경여(李敬輿) 등 당대 조정 대신들이 칭찬할 정도로 학문의 성취가 높았다. 병자호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켜 구원하러 올라가는 길에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군사를 해산시켰다.

정자는 보통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마루로만 구성된 경우가 많다. 이 건물은 정자라고 보기에는 규모도 크고 온돌방도 배치되어 있으며, 일반 집에 가까운 평면구조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이 공간에서는 학문을 강론하거나 시를 짓기 위한 모임을 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이에 따라 운암정사(雲巖精舍)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래 예안면 오천리 낙동강가 근처에 있었는데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2020 1차 수정

침락정은 의병대장 김해(金垓, 1555~1593)의 아들인 김광계(金光繼, 1580~1646)가 1608년에 세운 정자이다. 원래 예안면 오천리 낙동강 근처에 있었는데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1974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김광계는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의 제자이며, 젊어서부터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다.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인조(1623~1649 재위)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군사를 해산시켰다. 이후에는 고향에 은거하며 말년을 보냈다.

침락정은 학문을 강론하거나 시를 짓기 위한 모임을 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대청 안쪽에는 ‘운암정사(雲巖精舍)’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정사’는 수양과 공부의 장소로 지은 건물을 말하고 ‘운암’은 김해의 증조할아버지인 김연(金緣, 1487~1544)의 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