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원주변씨 간재종택 및 간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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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2016 국문

조선 중기의 학자인 간재(簡齋) 변중일(邊中一, 1575~1660)의 종택과 정자이다. 종택의 건립시기는 알 수 없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 직후 변희예(邊希乂)․변희리(邊希李) 형제가 금계에 입향한 것으로 보아 그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종택과 정자는 19세기 전후한 시기의 건축양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종가의 품위와 규모를 잘 갖추고 있다. 특히 산골짜기에 정침 및 별당, 사당, 정자가 위로부터 자연지형에 순응하면서 각기 기능에 적합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 사대부가의 공간영역을 구비한 드문 사례에 해당된다.

변중일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뛰어났으며,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의 휘하에서 종사하는 등 국난 극복에 힘을 쏟았다. 이로 인해 1686년(숙종 12)에 나라에서 특별히 정충효각(旌忠孝閣)을 하사하였다. 한 사람이 충과 효를 겸비하여 정려를 받은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이다.

2021 국문

초안

이곳은 조선시대의 학자 간재 변중일(簡齋 邊中一, 1575~1660)의 후손들이 살아온 종택과 뒷산 언덕 위에 자리한 정자이다. 종택이란 한 문중에서 맏이로 이어 온 가족이 대대로 사용해온 집을 말한다.

변중일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 등을 도와 의병 활동을 하며 공을 세웠고, 집까지 쳐들어 온 왜병도 그의 효심에 감탄해 조모와 모친을 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할 만큼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나라에서는 그의 행적을 인정해 숙종 12년(1686) 정충효각(旌忠孝閣)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종택 건물은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고, 지금의 건물들은 1949년에 중수되었다고 한다. 집은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 날개채로 연결한 정침(正寢), 별당, 사당, 정자 간재정(簡齋亭)으로 이루어져 있다. 별당은 사랑채의 좌측에 있으며, 종택 뒷편 동쪽에 담을 쌓아 별도의 영역으로 구분한 사당이 있다.

정자는 변중일이 만년에 임진왜란으로 인한 울분을 달래고 학문에 정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현재의 건물은 고종 11년(1874) 변중일의 8세손 변석찬(邊錫瓚)·변석하(邊錫夏) 등이 중건한 것이다. 산을 평평하게 깎아 만든 터 위에 지어진 건물은 중앙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했으며, 건물 전면에 난간을 두른 마루를 덧달아 누마루 형식으로 꾸몄다.

  • 사랑마당에서 볼 때 정면 우측에 배치되어 약간 돌출된 곳이 사랑채로, 난간을 두른 누마루가 시설되어 있다. 집의 가장 안쪽에는 안채가 자리한다. 부엌과 고방이 있는 좌익사(左翼舍)와 중문간채가 연결되어 있고, 사랑채와 연결된 우익사(右翼舍)에는 책방과 부엌이 배치되어 있다.
  • 특히 산골짜기에 정침 및 별당ㆍ사당ㆍ정자가 위로부터 자연지형에 순응하면서 각기 기능에 적합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 사대부가의 공간영역을 구비한 드문 사례에 해당된다. ->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음;;;

1차 수정

간재종택은 조선시대의 학자 간재 변중일(簡齋 邊中一, 1575~1660) 가문의 종택이고, 간재정은 종택 뒷산 언덕 위에 있는 정자이다. 종택이란 한 문중에서 맏이로 이어 온 가족이 대대로 사용해온 집을 말한다.

변중일은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하며 공을 세웠고, 집까지 쳐들어온 왜병도 그의 효심에 감탄해 조모와 모친을 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할 만큼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나라에서는 그의 행적을 인정해 숙종 12년(1686) 정충효각(旌忠孝閣)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종택은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고, 지금의 건물들은 1949년에 중수되었다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 날개채로 연결한 정침(正寢), 별당, 사당, 정자인 간재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은 종택 뒤편 동쪽에 담을 쌓아 별도의 영역으로 구분하였다.

간재정은 변중일이 만년에 임진왜란으로 인한 울분을 달래고 학문에 정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11년(1874) 변중일의 8세손 변석찬(邊錫瓚)·변석하(邊錫夏) 등이 중건한 것이다. 산을 평평하게 깎아 만든 터 위에 지어진 건물은 중앙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했으며, 건물 전면에 난간을 두른 마루를 덧달아 누마루 형식으로 꾸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