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용인 고초골 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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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용인 고초골 공소’의 뿌리는 ‘고초골 교우촌’이다. 교우촌이란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산중에 모여들어 형성된 마을을 가리킨다. 한국천주교는 1784년에 선교사 없이 책을 통하여 평신도들에 의해 이 땅에 태어났다. 당시 유교사회이던 조선은 천주교를 사악한 종교로 여겨 약 100년 동안 박해를 하여 1만 여 명의 순교자를 내었다. 살아남은 천주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산속 또는 외딴 곳으로 가 교우촌을 형성하여 숨어 살았는데, ‘고초골 교우촌’은 그 중 하나로서 용인 문수산 기슭에 1820년대 경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종 3년(1866) 병인박해가 일어나 고초골 교우촌 천주교인들은 한양에서 파견된 포졸들에게 붙잡혀가 순교하였고 그들이 살던 고초골 마을은 불타 폐허가 되었다.

그 후 고종 23년(1886) 조선과 프랑스의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에 선교의 자유가 허락되자 고초골에 다시 천주교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들은 ‘지하교회 시대’가 지나고 ‘지상교회 시대’가 왔음을 깨닫고 앞을 내다보며 발 빠르게 공소 건물을 지었으니 이 건물이 ‘용인 고초골 공소’이다. 이 건물에서 종교의식과 공동체적 기도생활 그리고 자라나는 자녀들에 대한 종교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그로 인하여 고초골 공소 공동체는 그 후 번성하였다.

이 건물은 현존 수원교구 한옥 공소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상량묵서를 통해 볼 때, 이 공소는 1891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건물은 인근 마을 문촌리의 이주국 장군 고택[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6호]의 부속 건물인 잠실(누에 기르던 집)을 옮겨다 지은 것으로서 민가 건물을 옮겨 종교 건물로 변화시켰다는 특징이 있다. 지금도 교인들은 이 건물을 애용하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천주교 수원교구의 공소로 1891년 이후에 지어졌다. 공소란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본당보다 작은 교회를 말한다.

이곳은 1820년경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산중에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한 교우촌으로 “고초골 교우촌”으로 불렸다. 이후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하여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있었는데, 이곳에 숨어살던 천주교인들은 붙잡혀가 순교하였고 이 마을은 불타 없어졌다.

그 후 1886년 조선과 프랑스의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에 선교의 자유가 허락되자 이곳에 다시 천주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당시 교우촌의 규모가 확대되고 신도가 증가하면서 예배 및 집회장소가 필요하게 되자 근처에 있는 이주국장군 고택의 부속건물을 옮겨 공소 를 지었다.

이 건물은 현존하는 수원교구의 한옥으로 된 공소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또한 민가의 건물을 옮겨 종교 관련 건물로 변화시켰다는 특징이 있다.

1차 수정

이 건물은 천주교 수원교구의 공소이다. 공소란 주임 신부 없이 신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작은 규모의 천주교 예배소를 말한다.

고초골은 1820년경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산중에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한 교우촌이다. 이후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하여 이곳에 숨어 살던 천주교인들은 붙잡혀가 순교하였고 마을은 불타 없어졌다. 그 후 1886년 조선과 프랑스의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에 선교의 자유가 허락되자 이곳에 다시 천주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교우촌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고 신도가 증가하면서 예배 및 집회장소로 사용할 공소를 마련하였다.

이 공소는 1891년 이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인근에 있는 이주국장군 고택(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6호)에서 누에를 치는 데 쓰던 건물을 옮겨서 지었다고 한다. 1970년대 후반쯤 효율적인 공간 사용을 위해 내부 구조를 약간 변경하였으며, 현재도 예배당으로서의 기능을 이어가고 있다.

자문의견

  1. 건축, 근대 위원1
    • 적절함
  2. 건축, 근대 위원2
    • 문화재 명칭이 맞고, 사실관계가 객관적임
    • 전문적이고 정확한 의미전달이 필요한 한자어에는 ( )안에 한자를 기입할 필요가 있음
    • 첫 문장 ‘이 건물은....’→ ‘고초골 공소는’으로 표기에 대해 검토 요망.
    • 문화재의 독창성이나 문화재가‘한옥공소’라는 건축적 특징이 갖고 있음이 표기될 필요가 있음.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기존 문안에 비해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쉬워졌으나 문장이 깁니다. 문장이 늘어져서 내용이 길면 가독성이 떨어지므로 분량을 줄이는 게 좋을 듯합니다.(예를 들면 두 번째 단락 마지막 문장인 “그리고 교우천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고 신조가 증가하면서~공소를 마련하였다”는 삭제해도 무방)
    • 산중에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한 교우촌이다->산중에 모여들면서 생긴 교우촌이다 / 병인박해가 발생하여->병인 박해로 /붙잡혀가 순교하였고->붙잡혀 순교하였고 / 이 공소는-> 현재 공소 건물은 / 1970년대 후반쯤->1970년 후반 /효율적인 공간 사용을 위해-> *이 부분은 삭제해도 무방

2차 수정

고초골 공소는 천주교 수원교구의 공소이다. 공소란 주임 신부 없이 신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작은 규모의 천주교 예배소를 말한다.

고초골은 1820년경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산중에 모여들면서 생긴 교우촌이다. 이후 1866년 병인박해로 이곳에 숨어 살던 천주교인들은 붙잡혀 순교하였고 마을은 불타 없어졌다. 그 후 1886년 조선과 프랑스의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에 선교의 자유가 허락되자 이곳에 다시 천주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교우촌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고 신도가 증가하면서 예배 및 집회장소로 사용할 공소를 마련하였다.

현재 공소 건물은 1891년 이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인근에 있는 이주국장군 고택(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6호)에서 누에를 치는 데 쓰던 건물을 옮겨서 지었다고 한다. 1970년대 후반 내부 구조를 약간 변경하였으며, 현재도 예배당으로서의 기능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