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하회 충효당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해설문

기존 국문

이 집은 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종택으로 17세기에 지어졌다. 류성룡은 벼슬을 마치고 귀향한 후 풍산현에 있던 작은 초가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의 손자와 제자들이 생전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충효당’은 평소에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을 강조한 데서 유래한다. 12칸의 긴 행랑채는 류성룡의 8세손인 류상조柳相祚가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부하 군사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2020 초고

충효당은 17세기에 류성룡(1542~1607)의 종택으로 지어진 집이다. 류성룡의 형인 류운룡의 종택인 양진당과 함께 하회마을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조선 중기의 명재상이자 학자였던 류성룡은 벼슬을 마치고 귀향한 후에 풍산현에 있던 작은 초가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의 손자와 제자들이 생전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이 집은 사랑채, 안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당은 사랑채 동쪽에 따로 위치하고 있다. 사랑채는 제사가 있을 때 제청으로 사용했고, 평상시에는 손님을 접대하거나 문중 회의를 하는 곳이다. 12칸의 긴 행랑채는 류성룡의 8세손인 류상조가 병조판서에 임명된 뒤 부하 군사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충효당’은 류성룡이 평소에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을 강조한 데서 유래한다. 현판은 이름난 서예가 허목(1595~1682)이 썼다.

2020 1차 수정

충효당은 조선 중기의 재상이자 학자였던 류성룡(1542~1607) 가문의 종택이다. 류성룡의 형인 류운룡(1539~1601)의 종택인 양진당과 함께 하회마을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은 벼슬을 마치고 귀향한 후에 풍산현에 있던 작은 초가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의 손자와 제자들이 생전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이 집을 지었다고 한다.

이 집은 사랑채, 안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당은 사랑채 동쪽에 따로 위치하고 있다. 사랑채는 집안의 제사가 있을 때 제사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12칸의 긴 행랑채는 류성룡의 8세손인 류상조가 병조판서에 임명된 뒤 부하 군사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이 집의 이름인 ‘충효당’은 류성룡이 평소에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고 강조한 데서 유래하였다. 현판의 글씨는 이름난 서예가 허목(1595~1682)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