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풍산류씨 금계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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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국문집필

초고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문신 류중영(柳仲郢, 1515~1573)의 묘를 돌보고 선조들의 제사를 지내는 풍산류씨 가문의 재사이다.

류중영은 선정(善政)으로 칭송받았던 류운룡(柳雲龍, 1539~1601)과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서 혼란스러운 정국을 잘 이끌었던 류성룡(柳成龍, 1542~1607) 형제의 아버지이다.

재사는 2층 누각으로 지어진 영모루와 소루, 숭실재와 동부속채, 대문간채, 동재 건물이 전체적으로 튼 ‘ㅁ’자를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동재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은 서로 연결되며, 류중영의 묘소 방향인 남동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숭실재는 재사의 중심 건물로, 1987년 보수공사 때 조선 영조 12년(1736)에 작성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이에 따르면, 풍산류씨 문중에서 1560년 능효사(陵孝寺)라는 절의 건물을 인수한 이후, 1558년의 중수와 1622년의 보수를 거쳐 가문의 재사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벽체 구성이나 창호의 형태, 공포(栱包) 양식 등에 17세기 이전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비교적 잘 남아있어 재사 건축의 변천사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경내의 다른 건물들은 18세기 초반부터 점차 지어졌으며, 정면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영모루는 1706년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한다. 두 누각은 모두 아래층은 전면에 나무판자로 벽을 세웠고,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안마당 쪽을 난간으로 처리하였다.

풍산류씨 문중은 유교적 제례 관습을 세워나가는 과정에서 문중 내부적으로 족회소를 만들고 문서를 작성해 조상의 묘를 관리하고 숭배하는 일련의 과정을 후손들도 그대로 시행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부계친족 뿐만 아니라 모계의 친족성원에게도 제사를 올리는 외손봉사의 관습도 그대로 전승하고 있다. 금계재사는 문중의 이러한 전통이 오늘날까지 수행되도록 하는 중심공간으로서 유교 이념의 확립에 따른 조상 숭배 의식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 공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 재사가 위치한 안동 서후면 성곡리는 안동권씨 능동재사, 권태사 신도비, 권태사 권형 묘사 등 재사와 묘소가 모여 있어 ‘능골’로 불린다.
  • 숭실재는 건물에서 지붕의 하중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는 공포(栱包)가 처마를 받친 기둥 위에만 간결하게 얹어져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지어졌다. 기둥 사이를 건너지르며 기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인방(引防)을 숨긴 벽체 구성을 보여주며, 창호는 창틀 중앙에 기둥을 세운 영쌍창을 달았다. 이러한 요소들은 임진왜란 이전 시기의 건축에서 채택하는 것들로, 건축사적 가치가 있다.
  • 숭실재는 건너편에 있는 영모루 높이만큼 쌓은 석축 위에 세워졌다. 부엌을 기준으로 동편은 원래의 건물이고, 서편의 부속채는 후대에 증축한 것이다. 동편 본채는 칸을 나눈 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전면에는 난간을 단 좁을 툇마루를, 배면에는 전면보다 넓은 툇마루를 덧달았다.
  • 재사의 이름 및 각 건물의 명칭과 관련해서는 특별한 기록이 보이지 않음. 재사이기 때문에 영모루, 숭실재 등의 의미는 다른 곳과 그 이름 뜻이 같을 것으로 보이며, 류성룡이 남긴 글 중 "내가 상을 당하여 금계산(金溪山)에서 상주 노릇 할 때에..."라고 언급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무덤이 있는 곳의 지명을 따서 지은 것으로 보임.
1차 수정

금계재사는 조선시대의 문신 류중영(柳仲郢, 1515~1573)의 묘소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재사에서 남동쪽으로 약 450m 떨어진 언덕에 류중영의 묘소가 있다.

류중영은 학문과 어진 정치로 칭송받았던 류운룡(柳雲龍, 1539~1601)과 임진왜란 당시 혼란스러운 정국을 잘 이끌었던 명재상 류성룡(柳成龍, 1542~1607) 형제의 아버지이다.

재사는 앞에서부터 영모루와 소루, 대문간채, 동재, 숭실재와 동부속채 건물이 ‘ㅁ’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재사의 중심 건물인 숭실재는 제관들이 머물며 제수를 준비하고 음복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원래 능효사라는 사찰에 속한 건물이었는데 풍산류씨 문중에서 인수하여 재사로 사용하다가 1558년에 중수하였다. 이후 1706년 영모루를 짓는 등 18세기 초부터 다른 건물들을 짓기 시작하였고, 금계재사는 전면에 2개의 누를 둔 흔치 않은 큰 규모를 이루게 되었다. 벽체 구성, 창호의 형태, 공포 양식 등 17세기 이전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풍산류씨 문중은 조상을 모시는 제사를 담당하는 족회소(族會所)를 조직하였고, 묘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올리는 과정을 문서로 남겨 후손들에게 전승할 수 있게 하였다. 영모루에 걸려 있는 ‘족중입의(族中立議)’는 류운룡이 작성한 것으로, 제사를 모시는 후손들의 책임과 의무를 정리한 7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