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진성이씨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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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진성이씨(眞城李氏) 대종택(大宗宅)으로 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脩)가 지었다고 전한다. 이자수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10년(1361) 홍건적의 난에 공을 세워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어 송안군에 봉해졌으며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를 역임하였다.

금학산 (琴鶴山) 기슭에 낮게 깃들인 남향집으로 본채는 정면 9칸, 측면 7칸이고, 정침 외에 별당, 사당,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口’자형이며 전면 좌측에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에는 ‘고송류수각(古松流水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별당인 경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익공식(翼工式) 건물로 기둥은 원형인데 일부에 배흘림이 남아 있어 주목된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이 지역 사대부가의 면모를 골고루 갖추고 있는 종택 건물이다. 당호인 경류정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지었다고 한다.

수정 국문

이곳은 진성이씨 가문의 종택이다. 종택은 한 가문의 맏이가 대대로 살아온 집을 말한다. 14세기에 안동 지역에 정착한 송안군 이자수(松安君 李子脩)가 지었다고 전하며, 이자수의 7대손인 이훈(李壎, 1467~1538)이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이자수는 진성이씨의 시조 이석(李碩)의 아들이고 고려시대의 문신이다. 충숙왕 17년(1330)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고,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 원래 진보(眞寶, 지금의 청송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마라촌(磨羅村, 지금의 안동 풍산읍 마애리)에 정착하였다가 만년에 주촌(周村, 지금의 와룡면 주하리)로 이주하였다.

종택은 본채, 별당, 사당, 행랑채, 방앗간채로 구성되었다. 본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고, 성리학적 생활 규범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생활 공간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본채 뒤편에 있는 사당은 내삼문이 있는 담장을 둘러 독립적인 공간을 갖췄다. 이와 같은 종택의 구조는 조선시대 사대부 주택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본채 왼쪽에 있는 별당은 이자수의 6대손인 이연(李演)이 성종 23년(1492)에 지었다고 한다. 별당의 이름은 ‘경류정(慶流亭)’으로 조선시대 대학자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이 지었다고 전한다. 별당 앞마당에는 나이가 600년 정도로 추정되는 뚝향나무(천연기념물)가 있어 이 종택의 역사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