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산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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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조선 선조(宣祖)와 광해군(光海君) 연간에 관직을 수행한 호봉(壺峯) 이돈(李燉, 1568~1624)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마애에 돌아와 학문에 정진하고 후진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그의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선조 3년(1601)에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지평, 예조정랑을 지냈으며 영해부사로 좌천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1610년에 산수정을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오랜 세월이 흘러 건물이 퇴락하였지만, 동야(東埜) 김양근(金養根, 1734~1799)이 쓴 상량문(上樑文)이 남아있어 1780년에 중건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최근에도 보수한 흔적이 남아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 지붕으로 툇마루 전면 3칸에 모두 난간을 설치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산수정은 조선시대의 학자 이돈(李燉, 1568-1624)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가문의 후손들과 지역의 자제들을 가르치기 위해 광해군 4년(1612)에 지은 정자이다.

이돈은 선조 34년(1601) 과거에 합격했고, 광해군 2년(1611) 경상도 영해부사로 좌천당하자 사직한 후 귀향해 이로당과 산수정을 짓고 10여 년 동안 후학을 양성했다. 이후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영천 군수로 부임했으나, 이듬해에 병으로 죽었다.

세월이 흘러 퇴락한 건물을 정조 4년(1780)에 중건했으며, 김양근(金養根, 1734~1799)이 쓴 상량문(上樑文)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건물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고, 건물 전면에 시설한 툇마루는 바닥을 살짝 띄우고 난간을 둘러 누각의 느낌이 나도록 꾸몄다.

정자는 낙동강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마애리는 진성이씨 중 안동에 처음 들어 온 이자수(李子修)가 처음 정착했던 곳이자, 진성이씨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 건물이 최근에도 보수되었다(기존 문안) -> 언제인지 확인 필요.(검색 안됨)
  • 정자의 건립 시점을 ‘1610년 경’으로 적었으나, 이돈의 행적 및 안동 이로당의 설명을 참고하면 1612년으로 보아야 타당함.
  • 이돈은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선조 34년(1601) 과거에 합격했다. 광해군 2년(1611) 정인홍을 논척하다가 좌천되자 사직 후 귀향하였고, 1623년 부모 봉양을 위해 영천 군수로 부임해 이듬해에 죽었다. (고전종합 DB 제공 문집 해제 內 행력 참조)
  • 툇마루 양 끝에 나무판으로 된 문을 달아 출입문의 기능을 하게 했다.

1차 수정

산수정은 조선시대의 학자 이돈(李燉, 1568~1624)이 가문의 후손들과 지역의 자제들을 가르치기 위해 광해군 4년(1612)에 지은 정자이다. 산수정이 위치한 마애리는 고려 말의 문신인 이자수(李子修)가 정착한 뒤 진성이씨 후손들이 대대로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이돈은 선조 34년(1601) 과거에 합격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광해군 2년(1611) 경상도 영해부사로 좌천되자,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산수정과 이로당(문화재자료)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정자 안에는 조선시대의 문신 김양근(金養根, 1734~1799)이 쓴 상량문이 남아있으며, 이를 통해 정조 4년(1780)에 중건했음을 알 수 있다. 정자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고, 앞쪽의 툇마루는 바닥을 살짝 띄우고 난간을 둘러 누각의 느낌이 나도록 꾸몄다. 툇마루 양 끝에는 나무판으로 만든 문을 달아 출입문으로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