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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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성주사지 금당지 뒤의 3기의 석탑 중 동쪽에 있는 탑이다. 2중 기단(二重基壇) 위에 만들어진 3층 석탑으로 면석(面石)과 몸돌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撐柱)가, 지붕돌에는 4단의 층급 받침이 새겨져 있는 등 통일신라 말기 9C의 전형적인 3층 석탑 양식을 띠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문 그림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고리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이 탑은 승탑으로 추정되었으나 성주사 사적기에 적힌 바에 따르면 정광·가섭·약사여래사리탑 중의 하나이며, 발굴 조사 결과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밝혀졌다.

수정 국문

초고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이다. 모든 탑이 진신사리를 모신 것은 아니지만, 상징적으로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이 된다.

성주사지(聖住寺址)의 금당 자리 뒤편에 3기의 삼층석탑이 있고 금당의 전면에는 오층석탑이 있는데, 이 석탑은 뒤편의 3기의 석탑 가운데 동쪽에 위치해 있다. 건립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

성주사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로도 알려져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朗慧和尙, 801~888)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절 이름도 성주사로 바꿨다고 한다.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절터만 남아 있다.

이 석탑은 2단의 바닥돌부 위에 3층의 몸돌부를 올린 형태로, 머리 장식부는 멸실되었다. 1971년에 해체하고 수리하였으나 사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바닥돌부 상부에 별도의 돌로 만든 받침석, 1층 몸돌의 전면과 후면에 문고리와 자물쇠가 표현된 문짝 모양이 조각된 점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 석탑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1차 수정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이다. 실제 유골이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상징적으로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다.

이 석탑은 왼쪽에 있는 중앙삼층석탑(보물 제20호), 서 삼층석탑(보물 제47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세 탑의 구조와 기법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장인 집단에 의해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있으며,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1층 몸돌의 앞면과 뒷면에 문고리와 자물쇠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탑 안에 부처의 유골을 모신 공간이 있음을 상징한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알맞고, 잘 가공된 석재가 정교하게 조립된 작품이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이다.’ → ‘~ 사리를 ~’
    • 14세기 무렵 다른 곳에서 이전해온 것이란 설명 추가 필요.
    • ‘같은 장인 집단에 의해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 → ‘같은 장인 집단이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불탑은 부처의 사리 즉 유골을 모신 건축물로, 불상과 함께 예배의 대상이자 그 자체가 불심 혹은 부처를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 이 탑은 성주사지에 남아 있는 4기의 탑 가운데 하나이다. 금당 정면 1기와 금당 뒤에 3개의 석탑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왼쪽에 있는 중앙삼층석탑(보물 제20호), 서 삼층석탑(보물 제47호)과 함께 통일신라후기(9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세 탑은 구조와 기법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장인 집단에 의해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
    • 잘 가공된 석재로 정교하게 조립되었으며,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비례로 우수한 조형성을 갖추고 있다.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첫 문장에는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의 기본 정의가 기술되어야 할 것.
    •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은 금당 뒤편에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석탑 중 동쪽에 있는 탑이다.
    • ‘불탑’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석탑이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는 특징도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함.
    • 1층 탑신석 아래 별석 받침 설명 추가 필요.
    • 전체적으로 균형이 알맞고, 잘 가공된 석재가 정교하게 조립된 작품이다. → 석탑 자체에 대한 특징을 설명했다기보다는 ‘가치 있다’는 인상을 주기위한 상투적인 문구로 보임.
    • 뛰어난 작품임을 강조하기 보다는, 함께 건립된 중앙, 서 삼층석탑과의 비교, 3기의 석탑을 함께 나열한 독특한 사례라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음. 특히 서탑과 동탑을 비교하여 서로 다른 점을 명시한다면 흥미를 유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됨. 또한 발굴조사 결과 원래 이곳이 원위치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점 등을 부가 설명해야 함. 세 탑은 개별 문화재로 지정되었지만 한 세트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동탑, 서탑, 중앙탑의 안내판을 통합하여 조성하는 것도 방법으로 생각됨.

2차 수정

불탑은 부처의 사리, 즉 유골을 모신 조형물이다. 실제 유골이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상징적으로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다.

이 탑은 성주사지에 남아 있는 4기의 탑 가운데 하나로, 왼쪽에 있는 중앙삼층석탑(보물 제20호), 서 삼층석탑(보물 제47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세 탑은 구조와 기법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장인 집단이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있으며,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1층 몸돌의 앞면과 뒷면에 문고리와 자물쇠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탑 안에 부처의 유골을 모신 공간이 있음을 상징한다. 잘 가공된 석재로 정교하게 조립되었으며,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비례로 우수한 조형성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