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김해 수로왕비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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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김해시내 북단에 위치한 이 곳은 가락국(駕洛國, 金官伽倻) 수로왕비(許王后)의 능이다.

분산(盆山)에서 구지봉(龜旨峯)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위치하며, 동쪽 100m 지점에는 구산동 고분군이 있다.

조선시대 1446년에 수로왕릉과 함께 정화되었는데, 능비와 상석은 1647년에 설치된 것이다. 원형 봉분의 규모는 지름 16~18m, 높이 5m 정도로 봉분을 두르는 호석은 없다. 능 주위는 네모나게 돌담을 둘렀으며, 앞쪽으로는 낮은 단의 축대가 있다. 능비에는 ‘가락국수로왕비보주태후서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라 새겨져 있다.

경내에는 숭보재, 외삼문, 홍살문 등의 건물이 있으며, 능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파사석탑(婆娑石塔)이 있다. 이 석탑은 김해시 중심에 있었던 호계사(虎溪寺)에서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삼국유사에는 서기 48년에 수로왕비가 인도에서 올 때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해 배에 싣고 왔던 것으로 기록하였다. 파사석은 우리나라에는 없는 돌로 닭 벼슬의 피를 떨구면 굳지 않는다고 하는데, 김해의 향토사학자가 이를 확인하였다고 한다.

수정 국문

초고

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왕비였던 허왕후의 무덤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왕비의 이름은 허황옥으로 인도 아유타의 공주였는데 16세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되었으며, 10명의 아들 중 2명이 왕비의 성을 물려받아 지금까지 그 후손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묘역은 분산(盆山)에서 구지봉(龜旨峯)으로 내려오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사각형으로 얕은 돌담을 세웠고, 앞쪽에 낮은 축대를 쌓았다. 원형 봉분의 규모는 지름 16~18m, 높이 5m 정도이다.

무덤 앞의 비석은 1647년 묘역을 다시 정비할 때 상석과 함께 세운 것이다. 비석에는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라는 글씨가 2줄로 새겨져 있다.

1446년 수로왕릉과 함께 정비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홍살문과 정문인 구남문(龜南門)을 지나 묘역에 들어서면 오른편에는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건물인 숭보재가 있고, 왼편에 있는 전각에는 파사석탑(婆娑石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7호)이 있다. 이 석탑은 서기 48년 왕비가 인도에서 올 때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해 배에 싣고 왔던 것이라고 한다.

  • 파사석탑 : 질지왕이 김해시 중심에 세웠던 호계사(虎溪寺)에 있었다고 전한다. 1873년 절이 폐사되자 김해부사 정현석이 탑의 부재들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하며, 1993년 이 자리으로 옮기고 보호각을 세웠다. (현재 석탑 안내판 사진 참고)
  • 문화재청 설명문안에는 아들 9명이라고 되어 있으나, 다른 전설들을 비교해보면 아들은 10명으로 봐야함. : 아들 10명 중 1명은 아버지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7명은 외삼촌 장유화상을 따라 출가했으며, 2명이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았다고 전한다. (해인사 영지 내용 중 확인)
  • 임진왜란 도굴 -> 수로왕릉과 함께? / 내부 구조를 수로왕릉과 유사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 듯 -> 이 경우 『지봉유설』기록에 따른다면 능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석실묘)으로 추정 / 근거 확인 필요.

1차 수정

가야의 시조 수로왕(42~199 재위)의 왕비였던 허왕옥(?~188)의 무덤이다.

허황옥은 인도 아유타의 공주였는데 16세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되었으며, 10명의 아들 중 2명이 왕비의 성을 물려받아 지금까지 그 후손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묘역은 분산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오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원형 봉분의 규모는 지름 16~18m, 높이 5m 정도이다. 1446년 수로왕릉과 함께 정비되었으며, 무덤 앞의 비석은 1647년 묘역을 다시 정비할 때 상석과 함께 세운 것이다.

홍살문과 정문인 구남문을 지나 묘역에 들어서면 오른편에는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건물인 숭보재가 있고, 왼편에 있는 전각에는 파사석탑(婆娑石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7호)이 있다. 이 석탑은 서기 48년 왕비가 인도에서 올 때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해 배에 싣고 왔던 것이라고 한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허왕옥의 무덤이다.->허황옥의 무덤으로 전한다.
    • 현재 내부 구조나 시기는 불명이다. 그러나 주변에 분포하는 구산동 고분군을 고려할 때 7세기 이후 조성된 횡혈식석실일 가능성이 높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가야의 시조 수로왕(42~199 재위)의 왕비였던 허왕옥(?~188)의 무덤이다.
    •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허황옥은 인도 아유타의 공주였는데 16세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10명의 아들 중 2명이 왕비의 성을 물려받아 지금까지 그 후손이 이어져 온다고 한다.
    • 능은 분산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오는 언덕에 위치한다. 봉분의 규모는 지름 16~18m, 높이 5m 정도인 원형이다. 1446년 수로왕릉과 함께 정비되었으며, 무덤 앞의 비석은 1647년 능을 다시 정비할 때 상석과 함께 세운 것이다.
    • 홍살문과 정문인 구남문을 지나 묘역에 들어서면 오른편에는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건물인 숭보재가 있고, 왼편의 전각에는 파사석탑(婆娑石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7호)이 있다.
    • 이 석탑은 서기 48년 왕비가 인도에서 올 때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해 배에 싣고 왔던 것으로 전한다.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수정의견 없음

2차 수정

가야의 시조 수로왕(42~199 재위)의 왕비였던 허왕옥(?~188)의 무덤이다.

허황옥은 인도 아유타의 공주였는데 16세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10명의 아들 중 2명이 왕비의 성을 물려받아 지금까지 그 후손이 이어져 오고 있다.

묘역은 분산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오는 언덕에 위치한다. 봉분의 규모는 지름 16~18m, 높이 5m 정도이다. 1446년 수로왕릉과 함께 정비되었으며, 무덤 앞의 비석은 1647년 묘역을 다시 정비할 때 상석과 함께 세운 것이다.

홍살문과 정문인 구남문을 지나 묘역에 들어서면 오른편에는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건물인 숭보재가 있고, 왼편에 있는 전각에는 파사석탑(婆娑石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7호)이 있다. 이 석탑은 서기 48년 왕비가 인도에서 올 때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해 배에 싣고 왔던 것이라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