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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상당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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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상당산성
Sangdangsanseong Fortress, Cheongju
청주 상당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청주 상당산성
영문명칭 Sangdangsanseong Fortress, Cheongju
한자 淸州 上黨山城
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28-2
지정번호 사적 제212호
지정일 1970년 10월 1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936,574㎡
웹사이트 청주 상당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산성은 적의 침입에 대비해 전투에 유리한 산을 이용하여 쌓은 성을 말한다. 상당산성은 청주시 동쪽에 솟은 상당산을 감싸는 포곡식산성*으로, 돌로 쌓은 성벽의 둘레는 4.25km에 달한다. 현재 상당산성은 동문·서문·남문의 3개문과 동암문·남암문의 2개 암문,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남아 있다.

산성이 처음 건축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상당’이라는 이름이 백제시대 청주의 지명인 상당현(上黨縣)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며, 김유신의 아들 김원정이 쌓은 서원술성과 연계하여 통일신라 초기에 건축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조선시대로, 1596년(선조29) 임진왜란 중 원균이 산성을 급히 고쳐 쌓았으며, 이후 1716년(숙종42)부터 1747년(영조23)까지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 상당산성의 군사적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었다. 청주 읍성에는 충청도의 군사책임자인 병마절도사(兵馬節制使)*가 머물고, 상당산성에는 종3품의 무관 병마우후(兵馬虞候)*가 머물며 산성을 운영하고, 청주읍성의 배후를 방어하였다.

성 안에는 병마우후가 근무하는 관아건물을 비롯하여 포루, 군기고 등 300칸이 넘는 건물들이 있었으며, 성을 유지 보수하는 승병(僧兵)을 위한 사찰도 3곳 있었다. 당시 상당산성의 모습은 1764년(영조40)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구례 운조루 소장 《상당산성도》를 통해 상세히 알 수 있다.

상당산성은 영호남과 서울로 통하는 통로를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통일신라 이후 석축산성 문화의 기술적 총체를 보여주는 문화재이다.


  •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 : 성벽이 계곡을 감싸는 산지의 능선을 따라 축조하는 성.
  • 병마절도사 : 조선 시대, 각 지방의 군대를 통솔하고 경비를 담당하던 종이품 무관직
  • 병마우후 : 조선시대 각 도의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종3품 외관직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상당산성은 청주 동편에 위치한 상당산(해발 491.2m)의 정상부와 주변 골짜기를 둘러 쌓은 석성이다. 성벽의 둘레는 약 4.25km이고, 성벽의 높이는 3~4.7m이다.

산성이 처음 건축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백제 때부터 이곳에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의 이름인 ‘상당’은 백제 때 이 지역을 부르던 지명에서 유래했다.

서쪽으로 청주·청원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북쪽으로는 미호천평야와 증평평야까지 조망이 가능한 자리에 위치한 이 성은 청주 읍성의 배후를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로 조선시대에도 중요하게 이용되었다.

임진왜란 중이던 1596년 원균(1540-1597)이 성벽 일부를 고쳐 쌓았고, 1716년부터 1719년까지 충청도병마절도사 유성추의 감독으로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졌다. 이후 1747년까지 몇 차례의 개·보수가 더 이루어졌다.

성의 서쪽과 동쪽, 남쪽에 각각 성문을 냈으며, 아군의 비밀통로인 암문도 2곳 확인된다. 이곳은 1970년대부터 꾸준한 시굴 및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성 안에서 지휘관이 사용하던 관청 건물을 비롯해 창고 등의 건물이 있던 자리가 곳곳에서 확인되었으며, 연못 5곳, 절터 3곳, 수구 3곳, 치성 3곳 등 다양한 시설의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여러 시기에 걸쳐 만들어진 기와 및 토기 조각과 같은 유물들도 다수 출토되었다.

또한 조사결과를 토대로 곳곳을 복원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77년부터 1978년까지 동쪽의 성문과 문루, 남쪽의 문루를 복원하였고, 1992년 동쪽 장대를 복원하였으며, 2014년에는 서쪽 장대를 복원하였다.

  • 전라남도 구례 운조루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8호)에 1764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상당산성의 지도가 남아있어, 조선시대 당시의 산성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다.
  • 현재 성 안쪽에 있는 저수지는 홍수로 유실된 수문 자리에 1943년 조성한 것이다.
  • 건물터 관련 -> 통일신라때의 유구 3곳과 조선시대의 유구 6곳 + 북벽 쪽의 건물지 2개소 등 여러 장소에서 여러 시기의 유구가 따로따로 확인됨.

참고자료

  • 청주의 옛이름을 단 상당산성, 지역N문화 역사문화유산, https://ncms.nculture.org/castle-road/story/2254 -> 청주 시내의 북부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산 위의 8부 능선을 타고 사행하는 서벽이 올려다 보인다. 이 산성은 1716년(숙종 4) 돌로 고쳐쌓고, 그 후 몇 차례에 걸쳐 증축, 보축, 개건한 석성이다. 이 산성은 상당산의 8부 능선에서 시작하여, 성안의 골짜기에 주요시설인 운주헌, 관아사, 군기고, 군향고, 동·서창 등이 있었다. 이 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서쪽의 연맥과 동쪽 지맥의 등성이를 타고 사행하다가 남동의 수구를 향하여 꺾여서 합쳐져 있다.임진왜란 중인 1596년(선조 29)에 수축된 이후, 1716년(숙종 42)에서 1719년까지 충청도병마절도사 유성추의 감독으로 대대적인 성벽개축이 이루어졌고, 이듬해 성내에 구룡사와 남악사의 2개 사찰과 암문이 마련되었는데 이것은 성문 무사석의 기록에 남아 있다. 그 후 여러 번의 수축이 이루어져 성내의 여러 시설인 관아사, 군기고, 창고, 수구, 장대, 포루 등이 완성되었다.
  • 청주의 영원한 지킴이 청주 상당산성과 것대봉수, 디지털청주문화대전 http://cheongju.grandculture.net/cheongju/toc/GC00202410 -> 청주 상당산성은 1970년대부터 꾸준한 발굴조사와 복원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청주대학교 이원근 교수와 충북대학교 박물관은 각각 1978년과 1982년에 지표조사를 하였는데, 모두 간략한 조사에 그쳤다. 본격적인 발굴 조사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 시작되었다. 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는 1994년에 동장대의 옛터를 시굴 조사하여 보화정을 복원하였으며, 1995년도에는 발굴조사를 통해 서장대의 규모와 위치가 확인되었다. 2000년에도 성벽보수구간을 중심으로 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그와 동시에 산성 복원도 꾸준히 이루어져 어느 정도 조선시대의 산성 원형을 되찾을 수 있었다. 2002년에는 청주시의 의뢰를 받은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북벽의 수구에서 미호문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 결과 미호문 밖 고석축을 포함한 성벽구간, 옛 산성으로 추정되는 성벽과 북벽 수구의 집수시설, 건물지 2개소가 밝혀졌다. 청주 상당산성에는 진동문, 미호문, 공남문의 3개문과 동암문, 남암문의 2개 암문,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있었다. 현재의 저수지는 본래 수문이 홍수로 없어진 후 1943년에 보다 확장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성벽의 둘레는 4.2㎞로, 바깥쪽은 네모지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고 성벽 안쪽은 돌을 깨뜨려 틈을 메운 뒤 흙을 채우고 다져놓았다. 옛 성벽이 가장 잘 남아있는 서벽과 동벽의 높이는 3~4m에 이른다.
  • 청주를 수호하는 상당산성의 동장대, 보화정(輔和亭), 충청타임즈, 2020.10.4. http://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629462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청주가 교통로상·군사상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충청병영이 옮겨오자 상당산성은 병마우후(兵馬虞侯)가 주재(駐在)하는 군사 요충지가 되었다. 1716년(숙종 42)부터 4년간에 걸쳐 성벽을 석축으로 개수하였으며, 남문 등의 성문과 성벽에 당시 공사 관계자들의 이름과 관직명 등이 새겨져 있다. / 보화정(輔和亭)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 충북참여연대 ‘상당산성 동장대, 전면 해체 후 정밀복원하라’, 뉴시스, 2021.6.16. https://newsis.com/view/?id=NISX20210616_0001478725 -> 지난 1992년 복원한 동장대는 별도의 발굴조사 기록이 없어 무엇을 근거로 했는지, 장대 건축양식은 맞는 것인지 의문"이라며 "복원 29년 밖에 되지 않은 목조건물이 붕괴 위험에 처한 원인을 규명한 뒤 정밀 발굴조사와 연구를 거쳐 장대 본연의 모습을 건립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2014년 복원된 상당산성 서장대(제승당)는 1995년 발굴조사 후 잔존 유구를 토대로 원상에 가까운 규모와 모습으로 지어졌다"며 "동장대는 그 위치를 확인하는 정도의 수준에서 복원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 [ http://excavation.co.kr/bookList/view?idx=6920 청주 상당산성-운주헌지 발굴조사 보고서], 중원문화재연구원, 2013 -> 통일신라 건물지 3동, 조선시대 건물지 6동과 담장, 축대 등이 확인되었다.
  • 상당산성, 산성』, 문화재청, 2008, pp.206-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