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곽예 묘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사용자 4명의 중간 판 8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CHfull
+
{{문화유산정보
|사진 =  
+
|사진=청주곽예묘소.jpg
|지정지역 = 충청북도
+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300200000 청주 곽예 묘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지정유형 = 기념물
+
|대표명칭=청주 곽예 묘소
|지정번호 = 20
+
|영문명칭=Tomb of Gwak Ye
|지정년 = 1977
+
|한자=淸州 郭預 墓所
|지정월 = 12
+
|주소=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산20-1번지
|지정일 = 06
+
|소장처=
|지정명칭 = 연담공 묘소
+
|지정번호=충청북도 기념물 제20호
|한자명칭 = 蓮潭公 墓所
+
|지정일=1977년 12월 6일
|영문명칭 = Tomb of Gwak Ye
+
|분류=유적건조물/무덤/무덤/기타
|분류 = 묘소
+
|소유자=
|세부분류 =  
+
|관리자=
|건립제작 =  
+
|시대=
|건립제작세기 =
+
|제작시기=
|건립제작시대 =
+
|수량/면적=일원
|소유자 =  
+
|웹사이트=[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300200000 청주 곽예 묘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관리자 =  
+
|위도=36.656195
|연락처 =
+
|경도=127.529228
|주소도 =
 
|주소시 =  
 
|주소구 =  
 
|주소면 =  
 
|주소길 =
 
|주소번호 =
 
|주소번지 =
 
|위도 =
 
|경도 =  
 
|웹사이트 =  
 
|관계1 =
 
|관련기사1 =
 
|관계2 =
 
|관련기사2 =
 
|관계3 =
 
|관련기사3 =
 
|관계4 =
 
|관련기사4 =
 
|관계5 =
 
|관련기사5 =
 
|관계6 =
 
|관련기사6 =
 
|관계7 =
 
|관련기사7 =
 
|관계8 =
 
|관련기사8 =
 
|관계9 =
 
|관련기사9 =
 
|관계10 =
 
|관련기사10 =
 
|국문 = 고려 후기의 문신인 연담공 [[곽예]](郭預,1232~1286) 선생의 묘소이다. 본래 묘소는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있었으나, 1975년 이곳으로 옮겼다. 최익현(崔益鉉)이 지은 묘표(墓標)와 김복한(金福漢)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 곽예 선생은 자를 선갑(先甲), 호는 연담이라 했으며, 본관은 청주이다. 1255년(고려 고종 42)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286년(충렬왕 12)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어 원나라 황제의 생일 축하사절로 가는 도중에 55세로 사망하였다. 연담공은 사람됨이 겸손하고 온화하여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대하고, 글을 잘 지었다. 또한 명필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서법을 본받았다. 『동문선』에 「감도해(感渡海)」등 여러 편의 시가 전해오고 있다.
 
|영문 = This is the tomb of Gwak Ye (1232-1286), a scholar official of the Goryeo Dynasty (918-1392). In 1255, Gwak placed first in the state service examination and served several important posts afterwards. He was a renowned poet and master calligrapher, with a number of followers of his calligraphy style. Some of his poems were recorded in Dongmunseon, Anthology of Korean Literature, published in 1478 during the Joseon Dynasty (1392-1910). Gwak was known as modest, harmonious, and kind to everyone. He died on the way to China in a mission to congratulate the Yuan emperor for his birthday. At the tomb, there are also a tombstone and a stele, with the epitaphs composed by prominent Confucian scholars Choe Ik-hyeon and Kim Bok-han, respectively.  
 
 
}}
 
}}
==위치 Location==
 
<googlemap width="600" height="300" lat="{{{경도|}}}" lon="{{{위도|}}}" type="normal" zoom="15" icon="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
 
{{{경도|}}}, {{{위도|}}}, [[{{PAGENAME}}]]
 
</googlemap>
 
  
==갤러리 Gallery==
+
=='''해설문'''==
<gallery mode=packed-hover heights=250px">
+
===국문===
파일:noimageavailable.png|Caption
+
====2015====
파일:noimageavailable.png|Caption
+
고려 후기의 문신인 연담공 곽예(郭預,1232~1286) 선생의 묘소이다. 본래 묘소는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있었으나, 1975년 이곳으로 옮겼다. 최익현(崔益鉉)이 지은 묘표(墓標)와 김복한(金福漢)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 곽예 선생은 자를 선갑(先甲), 호는 연담이라 했으며, 본관은 청주이다. 1255년(고려 고종 42)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286년(충렬왕 12)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어 원나라 황제의 생일 축하사절로 가는 도중에 55세로 사망하였다. 연담공은 사람됨이 겸손하고 온화하여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대하고, 글을 잘 지었다. 또한 명필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서법을 본받았다. 『동문선』에 「감도해(感渡海)」등 여러 편의 시가 전해오고 있다.
파일:noimageavailable.png|Caption
 
</gallery>
 
  
==주석==
+
====2021====
<references/>
+
이곳은 고려 후기의 문신 곽예(郭預, 1232~1286)의 묘소이다. 본관은 청주, 자는 선갑(先甲), 호는 연담(蓮潭)이며, 고려 고종 42년(1255)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국자감 대사성, 감찰대부 등의 관직을 지냈다. 원종 4년(1263)에는 왜구에게 납치된 백성들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하여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충렬왕 12년(1286) 원나라 황제의 생일 축하 사절로 가던 중 의주에서 5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곽예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소박해 높은 지위에 올라서도 늘 한결같았고, 글을 잘 짓고 글씨에도 능하여 당대의 명필가로 이름을 떨쳤다.
 +
 
 +
곽예 묘소는 본래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있었으나, 1975년 이곳으로 옮겼다. 묘소 앞에는 상석, 좌우 문인상, 2개의 묘비가 있으며, 묘소로 올라가는 산 입구에는 신도비와 시비(詩碑)가 있고, 묘소의 아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곽예의 사당인 청원사(淸原祠)가 있다.
 +
 
 +
===영문===
 +
* '''Tomb of Gwak Ye'''
 +
 
 +
====2015====
 +
This is the tomb of Gwak Ye (1232-1286), a scholar official of the Goryeo Dynasty (918-1392). In 1255, Gwak placed first in the state service examination and served several important posts afterwards. He was a renowned poet and master calligrapher, with a number of followers of his calligraphy style. Some of his poems were recorded in Dongmunseon, Anthology of Korean Literature, published in 1478 during the Joseon Dynasty (1392-1910). Gwak was known as modest, harmonious, and kind to everyone. He died on the way to China in a mission to congratulate the Yuan emperor for his birthday. At the tomb, there are also a tombstone and a stele, with the epitaphs composed by prominent Confucian scholars Choe Ik-hyeon and Kim Bok-han, respectively.
 +
 
 +
====2021====
 +
This is the tomb of Gwak Ye (1232-1286), a civil official of the Goryeo period (918-1392). It was originally located about 9 km to the north in Daeyul-ri Village but was moved to its current location in 1975.
 +
 
 +
Gwak Y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with the highest passing mark in 1255 and went on to serve various official posts. In 1263, he visited Japan as a royal envoy to demand the repatriation of kidnapped Koreans. In 1286, he died in Uiju on the way to Yuan China (1271-1368) in a mission to congratulate the emperor for his birthday. He was a plain man of great integrity, skilled at composing texts, and distinguished as a prominent calligrapher.
 +
 
 +
In front of the burial mound are various stone structures such as a table, an incense table, a pair of civil official statues, and two tombstones. At the entrance of the path leading to the tomb, there is a stele commemorating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Gwak Ye, as well as a shrine named Sangdangsa built for the veneration of members of the Cheongju Gwak Clan, including Gwak Ye.
 +
 
 +
===영문 해설 내용===
 +
고려시대의 문신 곽예(1232-1286)의 묘이다. 본래 북쪽으로 약 9km 떨어진 대율리에 있었는데, 19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
 
 +
곽예는 1255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지냈다. 1263년에는 납치된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해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286년 원나라 황제의 생일 축하 사절로 가던 중 의주에서 사망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소박하였고, 글을 잘 짓고 당대의 명필로도 이름을 떨쳤다.
 +
 
 +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 문인상 1쌍, 묘비 2기가 세워져 있다. 묘소로 올라가는 산 입구에는 곽예를 포함한 청주곽씨 인물들을 모신 상당사와 곽예의 신도비가 있다.
 +
 
 +
=='''참고자료'''==
 +
*청주 곽씨와 전주 최씨의 인연, 충청투데이, 2012.6.14.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05702 -> 연담 곽예 선생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고종 42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주사직을 시작으로 관직에 올랐다. 충렬왕 12년에 지밀직사 감찰대부가 되어 원나라 황제의 생일축하사절로 가는 도중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묘표는 최익현이, 신도비는 김복현이 지었다. 원래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었으나 1975년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는 것이다. 청원군에 있던 묘소를 이장해 왔다는 말에 생각나는 게 있었다. 충청일보 편집국장을 하면서 '인맥천년'이란 책을 펴낸 이재준 씨였다.  그의 저서 '인맥천년'에 청주 곽씨와 전주 최씨의 인연이 기록되어 있다.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는 원래 밤이 많이 나는 곳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속칭 대삐미라고도 불리는 마을 입구에는 '전주최씨 세거지'란 표석이 있고, 주변엔 병자호란 때 영의정을 지낸 지천 최명길을 비롯한 선조의 묘가 산재해 있다. 이들은 청주 곽씨를 외가로 부르고 있는데 그 연유가 흥미롭다. 청주 곽씨의 중시조인 연담 곽예 선생이 전주에서 사직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최득평이란 선비를 만나게 되었다. 그 인물됨을 높이 평가한 곽예는 사위로 삼았고 득평은 상주 목사와 김해 도호부사 등 벼슬을 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대빼미에 정착하게 된 것도 처가인 청주 곽씨 때문으로 지천 최명길을 비롯한 명곡 최석정 등 기라성 같은 후손을 배출하였다.
 +
*곽예 신도비 – 충북 청주[12], 문화재?문화재!!,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mallarmel/221265155708
 +
*청주 연담공 곽예묘소 석물 – 충북 청주[15], 문화재?문화재!!,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mallarmel/221271114138 -> 묘표 비문 사진 상세
 +
*곽예신도비와 연담공 곽예 묘소 위치, 가는 길 – 충북 청주, 문화재?문화재!!,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mallarmel/221261510729
 +
 
 +
 
 +
[[분류:문화유산해설문]]
 
[[분류:청주시 문화유산]]
 
[[분류:청주시 문화유산]]
 +
[[분류:시도기념물]]
 +
[[분류:묘]]
 
[[분류:2015 영문집필]]
 
[[분류:2015 영문집필]]
 +
[[분류:2021 영문집필]]

2021년 9월 14일 (화) 08:55 기준 최신판

청주 곽예 묘소
Tomb of Gwak Ye
청주 곽예 묘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청주 곽예 묘소
영문명칭 Tomb of Gwak Ye
한자 淸州 郭預 墓所
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산20-1번지
지정번호 충청북도 기념물 제20호
지정일 1977년 12월 6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기타
수량/면적 일원
웹사이트 청주 곽예 묘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2015

고려 후기의 문신인 연담공 곽예(郭預,1232~1286) 선생의 묘소이다. 본래 묘소는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있었으나, 1975년 이곳으로 옮겼다. 최익현(崔益鉉)이 지은 묘표(墓標)와 김복한(金福漢)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 곽예 선생은 자를 선갑(先甲), 호는 연담이라 했으며, 본관은 청주이다. 1255년(고려 고종 42)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286년(충렬왕 12)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어 원나라 황제의 생일 축하사절로 가는 도중에 55세로 사망하였다. 연담공은 사람됨이 겸손하고 온화하여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대하고, 글을 잘 지었다. 또한 명필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서법을 본받았다. 『동문선』에 「감도해(感渡海)」등 여러 편의 시가 전해오고 있다.

2021

이곳은 고려 후기의 문신 곽예(郭預, 1232~1286)의 묘소이다. 본관은 청주, 자는 선갑(先甲), 호는 연담(蓮潭)이며, 고려 고종 42년(1255)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국자감 대사성, 감찰대부 등의 관직을 지냈다. 원종 4년(1263)에는 왜구에게 납치된 백성들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하여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충렬왕 12년(1286) 원나라 황제의 생일 축하 사절로 가던 중 의주에서 5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곽예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소박해 높은 지위에 올라서도 늘 한결같았고, 글을 잘 짓고 글씨에도 능하여 당대의 명필가로 이름을 떨쳤다.

곽예 묘소는 본래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있었으나, 1975년 이곳으로 옮겼다. 묘소 앞에는 상석, 좌우 문인상, 2개의 묘비가 있으며, 묘소로 올라가는 산 입구에는 신도비와 시비(詩碑)가 있고, 묘소의 아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곽예의 사당인 청원사(淸原祠)가 있다.

영문

  • Tomb of Gwak Ye

2015

This is the tomb of Gwak Ye (1232-1286), a scholar official of the Goryeo Dynasty (918-1392). In 1255, Gwak placed first in the state service examination and served several important posts afterwards. He was a renowned poet and master calligrapher, with a number of followers of his calligraphy style. Some of his poems were recorded in Dongmunseon, Anthology of Korean Literature, published in 1478 during the Joseon Dynasty (1392-1910). Gwak was known as modest, harmonious, and kind to everyone. He died on the way to China in a mission to congratulate the Yuan emperor for his birthday. At the tomb, there are also a tombstone and a stele, with the epitaphs composed by prominent Confucian scholars Choe Ik-hyeon and Kim Bok-han, respectively.

2021

This is the tomb of Gwak Ye (1232-1286), a civil official of the Goryeo period (918-1392). It was originally located about 9 km to the north in Daeyul-ri Village but was moved to its current location in 1975.

Gwak Y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with the highest passing mark in 1255 and went on to serve various official posts. In 1263, he visited Japan as a royal envoy to demand the repatriation of kidnapped Koreans. In 1286, he died in Uiju on the way to Yuan China (1271-1368) in a mission to congratulate the emperor for his birthday. He was a plain man of great integrity, skilled at composing texts, and distinguished as a prominent calligrapher.

In front of the burial mound are various stone structures such as a table, an incense table, a pair of civil official statues, and two tombstones. At the entrance of the path leading to the tomb, there is a stele commemorating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Gwak Ye, as well as a shrine named Sangdangsa built for the veneration of members of the Cheongju Gwak Clan, including Gwak Ye.

영문 해설 내용

고려시대의 문신 곽예(1232-1286)의 묘이다. 본래 북쪽으로 약 9km 떨어진 대율리에 있었는데, 19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곽예는 1255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지냈다. 1263년에는 납치된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해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286년 원나라 황제의 생일 축하 사절로 가던 중 의주에서 사망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소박하였고, 글을 잘 짓고 당대의 명필로도 이름을 떨쳤다.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 문인상 1쌍, 묘비 2기가 세워져 있다. 묘소로 올라가는 산 입구에는 곽예를 포함한 청주곽씨 인물들을 모신 상당사와 곽예의 신도비가 있다.

참고자료

  • 청주 곽씨와 전주 최씨의 인연, 충청투데이, 2012.6.14.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05702 -> 연담 곽예 선생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고종 42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주사직을 시작으로 관직에 올랐다. 충렬왕 12년에 지밀직사 감찰대부가 되어 원나라 황제의 생일축하사절로 가는 도중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묘표는 최익현이, 신도비는 김복현이 지었다. 원래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었으나 1975년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는 것이다. 청원군에 있던 묘소를 이장해 왔다는 말에 생각나는 게 있었다. 충청일보 편집국장을 하면서 '인맥천년'이란 책을 펴낸 이재준 씨였다. 그의 저서 '인맥천년'에 청주 곽씨와 전주 최씨의 인연이 기록되어 있다.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는 원래 밤이 많이 나는 곳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속칭 대삐미라고도 불리는 마을 입구에는 '전주최씨 세거지'란 표석이 있고, 주변엔 병자호란 때 영의정을 지낸 지천 최명길을 비롯한 선조의 묘가 산재해 있다. 이들은 청주 곽씨를 외가로 부르고 있는데 그 연유가 흥미롭다. 청주 곽씨의 중시조인 연담 곽예 선생이 전주에서 사직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최득평이란 선비를 만나게 되었다. 그 인물됨을 높이 평가한 곽예는 사위로 삼았고 득평은 상주 목사와 김해 도호부사 등 벼슬을 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대빼미에 정착하게 된 것도 처가인 청주 곽씨 때문으로 지천 최명길을 비롯한 명곡 최석정 등 기라성 같은 후손을 배출하였다.
  • 곽예 신도비 – 충북 청주[12], 문화재?문화재!!,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mallarmel/221265155708
  • 청주 연담공 곽예묘소 석물 – 충북 청주[15], 문화재?문화재!!,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mallarmel/221271114138 -> 묘표 비문 사진 상세
  • 곽예신도비와 연담공 곽예 묘소 위치, 가는 길 – 충북 청주, 문화재?문화재!!,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mallarmel/22126151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