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성산산성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창녕 성산산성
Seongsansanseong Fortress, Changnyeong
창녕 성산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창녕 성산산성
영문명칭 Seongsansanseong Fortress, Changnyeong
한자 昌寧 城山山城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성산리
지정번호 문화재자료 제86호
지정일 1983년 12월 20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수량/면적 31,967㎡
웹사이트 창녕 성산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창녕 성산산성은 큰당메산(해발 194.3m)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구릉의 끝자락(해발 73.6m)에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산성의 둘레는 541m이다.

성산산성이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관련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 없지만 신라 진흥왕 때인 562년 초계, 의령 방면의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신라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성 안에서 삼국시대 토기가 다수 발견되어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이 왜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성산산성은 북벽, 동벽, 남벽의 일부 구간은 돌로 성벽을 쌓았고, 나머지 구간은 돌과 흙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문은 3곳으로 추정되며, 성내에는 집수지**와 다수의 건물 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성산산성은 창녕의 중심지였던 창녕읍 일대에서 낙동강을 건너 합천 지역으로 가기 위한 교두보로서 군사 및 교통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주변에 펼쳐진 곡간평야와 주변에 형성된 촌락을 관할하는 치소***로서의 역할도 같이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산봉우리 중턱쯤에 한 바퀴 휘돌아 쌓는 것
  • 성 내 군사들의 식수와 방화수로 사용하기 위해 물을 모아두는 시설물
  • 조선 시대 각도 관찰사가 집무하던 관청인 감영이 위치한 곳

영문

Seongsansanseong Fortress, Changnyeong

Seongsansanseong is a fortress encircling the peak of Seongsan Mountain (73.6 m above sea level). According to records, the fortress was built in 562 by the Silla kingdom to deflect attacks from forces in the neighboring areas.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the fortress was used by a civilian army led by Gwak Jae-u (1552-1617) to fight off enemy attacks.

The fortress was built to the northeast of the meeting point of Topyeongcheon Stream and the Nakdonggang River. This suggests that it played an important military and logistic role due to its convenient location. It is also presumed that the fortress served as a point of control over nearby villages.

Some parts of the northern, eastern, and southern sections of the fortress wall were built with stone, while the remaining sections were built with both stone and earth. There were presumably three gates. The fortress measures about 541 m in perimeter.

영문 해설 내용

성산산성은 성산(해발 73.6m) 정상부를 둘러 쌓은 산성이다. 562년 신라가 창녕 지방을 점령하던 당시 초계, 의령 방면의 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하였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때 의병장인 곽재우(1552-1617)가 이곳에서 왜군을 격퇴했다고도 한다.

산성의 남쪽과 서쪽에는 낙동강과 토평천의 합류점이 있어서 군사 및 교통상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이며, 주변 촌락을 관할하는 치소로서의 역할도 같이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은 북벽, 동벽, 남벽의 일부 구간은 돌로 쌓았고, 나머지 구간은 돌과 흙을 이용하여 쌓았다. 성문은 3곳으로 추정된다. 성곽의 둘레는 541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