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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 + | 조선 숙종(재위 1674-1720)이 문신 조지서(1454-1504)를 추모하며 1718년에 하사한 제문을 1857년에 돌에 새겨 세운 비석이다. |
− | 조지서는 | + | 조지서는 1474년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며, 폭군 연산군(재위 1495-1506)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다. 연산군은 조지서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엄히 가르친 것을 싫어하였고, 1504년 사화 때 참수하였다. 1506년 신원되었으며, 1710년 진주 지역 선비들이 조지서를 기리는 서원을 세웠다. 1718년 숙종이 신당서원이라 사액을 내렸고, 제문을 지어 하사했다. 신당서원은 1871년에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졌고, 지금은 서원 마당에 세워졌던 이 비석만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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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장흥리 숙종사제문비, 닥마들,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shinh-k791104/6605 -> 현지 안내판 사진 | *진주 장흥리 숙종사제문비, 닥마들,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shinh-k791104/6605 -> 현지 안내판 사진 | ||
*진주 남강이 만든 그윽한 배후습지의 풍경, 지역에서 본 세상, 개인 블로그 https://100in.tistory.com/3515 -> 1718년에는 당시 임금 숙종이 편액을 내리고 제문(祭文)까지 몸소 지어주었다. / 지금도 서원못 바로 앞 길가 공터에 이 제문을 새긴 빗돌(진주장흥리숙종사제문비)이 있다. 신당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1871년)으로 헐리어 없어졌고 지금은 1857년 마당에 세워졌던 이 사제문비만 남아 있다. | *진주 남강이 만든 그윽한 배후습지의 풍경, 지역에서 본 세상, 개인 블로그 https://100in.tistory.com/3515 -> 1718년에는 당시 임금 숙종이 편액을 내리고 제문(祭文)까지 몸소 지어주었다. / 지금도 서원못 바로 앞 길가 공터에 이 제문을 새긴 빗돌(진주장흥리숙종사제문비)이 있다. 신당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1871년)으로 헐리어 없어졌고 지금은 1857년 마당에 세워졌던 이 사제문비만 남아 있다. |
2020년 12월 13일 (일) 04:16 판
진주 장흥리 숙종사제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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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진주 장흥리 숙종사제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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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晋州 長興里 肅宗賜祭文碑 |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장흥리 795 |
지정번호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05호 |
지정일 | 2006년 7월 20일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기 |
웹사이트 | 진주 장흥리 숙종사제문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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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숙종사제문비는 연산군이 세자 시절에 시강원에서 벼슬을 한 지족당(知足堂) 조지서*(1454 ~1504)에게 숙종이 내려 준 치제문(致祭文)을 새긴 빗돌이다.
이곳은 1718년(숙종44)에 신당서원(新塘書院)이라 사액하고 예조좌랑 이안국을 보내 제를 올리게 하였다.
신당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고 사제문 빗돌만 남아 있다.
- 조지서(趙之瑞) : 본관은 임천, 호 지족당(知足堂) 1474(성종5) 식년시 별과로 급제하고 1479년 문과 중시에 1등으로 급제해 좌랑, 정당, 창원부사 등을 지냈다 1504년 갑자사화에 휩쓸려 죽었는데 뒤에 회복되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조선 숙종(재위 1674-1720)이 문신 조지서(1454-1504)를 추모하며 1718년에 하사한 제문을 1857년에 돌에 새겨 세운 비석이다.
조지서는 1474년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며, 폭군 연산군(재위 1495-1506)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다. 연산군은 조지서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엄히 가르친 것을 싫어하였고, 1504년 사화 때 참수하였다. 1506년 신원되었으며, 1710년 진주 지역 선비들이 조지서를 기리는 서원을 세웠다. 1718년 숙종이 신당서원이라 사액을 내렸고, 제문을 지어 하사했다. 신당서원은 1871년에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졌고, 지금은 서원 마당에 세워졌던 이 비석만 남아있다.
참고자료
- 진주 장흥리 숙종사제문비, 닥마들,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shinh-k791104/6605 -> 현지 안내판 사진
- 진주 남강이 만든 그윽한 배후습지의 풍경, 지역에서 본 세상, 개인 블로그 https://100in.tistory.com/3515 -> 1718년에는 당시 임금 숙종이 편액을 내리고 제문(祭文)까지 몸소 지어주었다. / 지금도 서원못 바로 앞 길가 공터에 이 제문을 새긴 빗돌(진주장흥리숙종사제문비)이 있다. 신당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1871년)으로 헐리어 없어졌고 지금은 1857년 마당에 세워졌던 이 사제문비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