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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있었던 중간받침돌에 대한 정보 확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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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지는 임진왜란 이후 이 지역에 터를 잡은 정문부(1565~1624)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면서부터 해주 정씨 문중의 사유지로 바뀌었고, 지금은 해주 정씨 문중의 재실이 있다.
 
*용암사지는 임진왜란 이후 이 지역에 터를 잡은 정문부(1565~1624)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면서부터 해주 정씨 문중의 사유지로 바뀌었고, 지금은 해주 정씨 문중의 재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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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탑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셔 놓은 일종의 무덤이다. 덕망 높은 스님이 입적하고 나면 제자와 신도들이 스님을 기려 승탑과 탑비를 세웠으며, 탑비에는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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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팔각형의 승탑은 용암사 터에 파손된 채로 있던 것을 1962년 원래의 위치로 옮겨 복원했다. 누구의 승탑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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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된 기단과 몸돌, 지붕돌, 머리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구름무늬 안에 불법을 수호하는 천부상(天部像)을 새겼고, 기단의 일부와 몸돌은 파손되어 복원할 때 새로 만들었다. 머리장식 부분은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으며, 불꽃으로 감싼 구슬 모양의 장식 등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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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는 통일신라시대 승려 도선국사(827∼898)가 지었다고 전한다. 고려 말까지도 왕실의 후원을 받아 운영될 만큼 흥성한 사찰이었으며, 임진왜란 전까지도 존속했던 것으로 보이나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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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30일 (월) 14:50 판


진주 용암사지 승탑
Stupa at Yongamsa Temple Site, Jinju
진주 용암사지 승탑,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진주 용암사지 승탑
영문명칭 Stupa at Yongamsa Temple Site, Jinju
한자 晉州 龍巖寺址 僧塔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산31번지
지정번호 보물 제372호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시대 고려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진주 용암사지 승탑,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용암사 터 서북쪽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2년에 원래의 위치로 옮겨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몸돌, 중간받침돌, 바닥돌은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의 중간 받침돌에는 용과 구름무늬가 있었으나 새 것에는 간략하게 8각모서리에 기둥만이 새겨졌다.

아래 받침돌의 8면은 꽃잎모양으로 움푹하게 파고 구름무늬를 바탕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천부상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꼬지에서 8각의 모서리로 내려오는 선을 약하게 새겼고 끝은 꽃을 조각해 마감하였다. 지붕돌 꼭대개의 장식은 석탑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상징적 의미가 있는 조각들이 차례로 올려져 있다.

누구의 사리탑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잘 맞는 비례와 8각의 기본형으로 되어 있어 고려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리탑의 주위에는 석불, 석등, 석탑 등의 부재가 용암사 터를 지키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용암사 터의 서북쪽에 파손된 채로 있었던 것을 1962년 원래의 위치로 옮겨 복원했다.

누구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2층으로 된 기단과 몸돌, 지붕돌, 머리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닥돌과 중간 받침돌(중대석), 몸돌은 복원할 때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구름무늬 안에 불법을 수호하는 천부상(天部像)이 조각되어 있다.

중간 받침돌에는 원래 용과 구름무늬가 있었다고 하나, 새로 만들면서 모서리기둥만 간략하게 새겼다.

지붕돌은 꼭대기에 연꽃무늬가 얇은 띠로 둘러져 있고 처마 끝에 꽃을 돌출시켜 조각하였다.

머리장식 부분은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으며, 불꽃으로 감싼 구슬 모양의 장식 등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구조물들을 올렸다.

용암사는 통일신라시대 승려 도선국사(827∼898)가 지었다고 전한다. 고려 말까지도 왕실의 후원을 받아 운영될 말큼 흥성한 사찰이었으며, 임진왜란 전까지도 존속했던 것으로 보이나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원래 있었던 중간받침돌에 대한 정보 확인 필요
  • 용암사지는 임진왜란 이후 이 지역에 터를 잡은 정문부(1565~1624)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면서부터 해주 정씨 문중의 사유지로 바뀌었고, 지금은 해주 정씨 문중의 재실이 있다.

1차 수정

승탑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셔 놓은 일종의 무덤이다. 덕망 높은 스님이 입적하고 나면 제자와 신도들이 스님을 기려 승탑과 탑비를 세웠으며, 탑비에는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을 새겼다.

이 팔각형의 승탑은 용암사 터에 파손된 채로 있던 것을 1962년 원래의 위치로 옮겨 복원했다. 누구의 승탑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2층으로 된 기단과 몸돌, 지붕돌, 머리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구름무늬 안에 불법을 수호하는 천부상(天部像)을 새겼고, 기단의 일부와 몸돌은 파손되어 복원할 때 새로 만들었다. 머리장식 부분은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으며, 불꽃으로 감싼 구슬 모양의 장식 등을 올렸다.

용암사는 통일신라시대 승려 도선국사(827∼898)가 지었다고 전한다. 고려 말까지도 왕실의 후원을 받아 운영될 만큼 흥성한 사찰이었으며, 임진왜란 전까지도 존속했던 것으로 보이나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