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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성전암 목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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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성전암 목조여래 좌상
진주 성전암 목조여래 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진주 성전암 목조여래 좌상
한자 晉州 聖殿庵 木造如來 坐像
주소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장안리 802
지정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0호
지정일 2000년 1월 31일
분류 유물/불교조각/목조/불상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좌(座)
웹사이트 진주 성전암 목조여래 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성전암 목조여래좌상은 성전암의 본당에 모셔져 있는 목조아미타여래부처이다. 여래좌상은 높이 60㎝ 폭 43㎝의 비교적 작은 목조여래좌상으로 아미타부처의 아홉 가지 손 모양[구품인]* 중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하고 있다. 불상을 만들 때 배안에 넣었던 유물[복장유물]*의 조성기(造成記)에 따르면 1644년(인조 22)에 만든 것으로 확인된다.

불상의 크기는 작지만 만든 연대가 정확하여 17세기 목조 불상의 연구자료로 가치가 있다.


  •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 : 아미타불이 대중의 높낮이에 맞춰 설법을 하기 위한 손의 모양으로 상・중・하의 세 단계에 각 단계별로 상생・중생・하생 의 세 가지를 더해 아홉가지 손모양이다.
  • 복장 유물 : 불상 등을 조성할 때 조각상의 몸속에 넣었던 유물로 주로 조성기(造成記), 후령통, 경전 등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불상은 아미타불을 나타낸 것으로, 불상 안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1644년에 제작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아미타불의 공덕을 기리고 그의 이름을 염(念)하는 모든 중생들은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불상은 오른손은 손가락을 맞댄 채 어깨까지 들어 올려 손바닥이 보이도록 했고, 역시 손가락을 맞댄 왼손은 무릎 위에 두었다.

특히 한국전쟁 때의 폭격과 2010년의 방화로 사찰의 전각들이 대부분 사라졌을 때에도 이 불상만은 손상 없이 무사히 살아남아 지금까지도 제작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성전암은 879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조선 16대 임금 인조(재위 1623-1649)가 왕이 되기 전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경내에 지금도 인조의 위패를 모신 전각이 남아있다.


  • 머리는 소라 모양의 머리카락으로 덮여 있고 정상에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가 솟아 있다. 이마와 눈썹 사이의 구슬 모양은 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빛나는 털을 나타낸 것이며, 부처의 자비가 온 세계에 비춘다는 뜻을 담고 있다. 목에 새겨진 삼도는 번뇌, 업, 고통을 상징한다. 양쪽 어깨에 걸친 불상의 옷주름은 깊고 자연스럽게 표현되었으며, 다리의 폭이 비교적 넓고 높게 조각되어 있다.
  • 복장 유물 발견 시점 및 구체적으로 발견된 유물 종류 등 정보 확인 어려움.

참고 자료

  • 두 번의 ‘화마’를 딛고 일어선 천년명찰 ‘성전암’, 불교신문, 2014.10.2.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381 -> 한국전쟁과 2010년 화재 관련 사건 개요(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전각들이 모두 무너진 자리에 이 불상만 온전하게 남아있었다고 하며, 2010년 방화로 인해 전각 대부분이 불에 탔을 때 총무 스님이 당시 대웅전에 뛰어들어가 이 불상을 구했다.) / 인조와의 인연 소개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 능양군(綾陽君) 시절에 외갓집 인근의 여항산 성전암에 머물며 100일 기도를 올렸다. 성전암에는 인조대왕지위(仁祖大王之位)라는 위패가 봉안됐고, 인조대왕각(仁祖大王閣)이 만들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