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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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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조선 숙종 40년(1714) 건립한 철비이다. 숙종 10년(1684) 서당인 노암재를 세우고 학계를 결정했는데, 이후 운영에 관한 사항을 철비에 기록하였다. 앞면에는 학계에 참여한 사람 이름(11명)과 학문을 격려하는 글이 있고, 뒷면에는 학전(學田)을 모은 경위와 현황 등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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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철비는 칠전리 주민들이 서당 운영을 위한 계를 조직하고 이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조선 숙종 40년(1714)건립한 것이다.  
  
철비는 높이 140cm, 너비 47.5cm, 두께 6.5cm 규모이다. 일제강점기의 철물 공출 때에도 학계원들이 결사적으로 보존해 지금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다. 매년 음력 3월 6일에는 철비 앞에서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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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4년 주민들은 서당인 노암재(露岩齋)를 세우고 서당 운영에 필요한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학계(學契)를 결성하였다. 비의 앞면에는 학계에 참여한 11명의 이름과 학문을 격려하는 글이 있고, 뒷면에는 학전(學田) 15필지 52,947㎡를 모은 내력을 기록하였다. 높이 140cm, 너비 47.5cm, 두께 6.5cm이며 머리 부분에 간소한 장식이 있다.
  
철비는 오늘날 그 역사를 더듬을만한 문적이 남아있지 않는 3백여 년 전 도서벽지 사람들의 교육열을 보여주는 기념물이다. 또한 조선후기 향촌사회사 및 교육사를 살피는 데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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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철물 공출 때에 주민들이 결사적으로 철비를 보존했으며, 후에 비각을 지어 보호하였다. 비각의 이름인 유후각(裕後閣)은 '교육을 통해 후손을 넉넉하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6일에 철비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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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철비는 조선 후기 향촌 사회사 및 교육사를 살피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초고====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에 있는 쇠로 만든 철비이다. 1684년(숙종 10) 칠전리 주민들이 서당인 노암재(露岩齋)를 세우고서 학계(學契)를 결성하고, 1714년(숙종 40) 학계 운영에 관한 사항을 기록해 두기 위해 철비를 건립하였다. 높이 1.4m, 너비 47.5㎝, 두께 6.5㎝이다. 상단의 장식 외에 별 특징은 없다. 앞면에는 학계에 참여한 11명의 이름과 학문을 격려하는 글이 있고, 뒷면에는 학전(學田) 15필지 52.947㎡를 모은 내력이 적혀 있다. 일제강점기의 철물 공출 때 학계원들이 결사적으로 이를 보존했으며, 철비를 보호할 목적으로 유후각(裕後閣)이란 이름의 58㎡짜리 비각을 지었다. 매년 음력 3월 6일에 철비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칠전리 학계철비는 조선 후기 향촌사회사 및 교육사를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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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노암재 - 장소 - 칠전리 산 173번지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학계 – 사건 - 박윤순의 아들 6형제가 중심이 되어 시작한 뒤 인척 5명이 참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검토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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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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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철비는 칠전리 주민들이 서당 운영을 위한 계를 조직하고 이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1714년에 건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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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4년 칠전리 주민들은 서당인 노암재를 세우고, 서당 운영에 필요한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계를 결성하였다. 비의 앞면에는 계에 참여한 11명의 이름과 학문을 격려하는 글이 있고, 뒷면에는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52,947㎡의 토지를 모은 내력을 기록하였다. 높이 140cm, 너비 47.5cm, 두께 6.5cm이며 머리 부분에 간소한 장식이 있다.
  
===2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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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전쟁에 사용할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 수탈정책을 실시했을 때, 주민들이 결사적으로 이 철비를 지켜냈으며 보호각을 지었다. 비각의 이름 유후각은 '교육을 통해 후손을 넉넉하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6일에 철비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칠전리 주민들이 서당 운영을 위한 계를 조직하고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 철비이다. 쇠로 만든 비를 철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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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비는 조선 후기 향촌사회사 및 교육사를 살피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1684년 칠전리 주민들은 서당인 노암재(露岩齋)를 세우고 서당 운영에 필요한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학계(學契)를 결성하였으며, 이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1714년 철비를 건립하였다.
 
 
 
비의 앞면에는 학계에 참여한 11명의 이름과 학문을 격려하는 글이 있고, 뒷면에는 학전(學田) 15필지 52.947㎡를 모은 내력이 적혀 있다. 높이 1.4m, 너비 47.5㎝, 두께 6.5㎝이며 머리 부분에 간소한 장식이 있다.
 
 
 
일제강점기의 철물 공출 때 주민들이 결사적으로 이 비를 보존했으며, 철비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지었다. 비각의 이름 유후각(裕後閣)은 교육을 통해 후손을 넉넉하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6일에 철비 앞에서 제사를 지낸다.
 
 
 
칠전리 학계철비는 조선 후기 향촌사회사 및 교육사를 살피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자료'''==
 
  
  

2020년 6월 5일 (금) 04:34 판


진도칠전리학계철비
진도 칠전리 학계철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진도칠전리학계철비
한자 珍島七田里學계鐵碑
주소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 173번지
지정번호 전라남도 기념물 제202호
지정일 2002년 4월 19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진도 칠전리 학계철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 철비는 칠전리 주민들이 서당 운영을 위한 계를 조직하고 이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조선 숙종 40년(1714)에 건립한 것이다.

1684년 주민들은 서당인 노암재(露岩齋)를 세우고 서당 운영에 필요한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학계(學契)를 결성하였다. 비의 앞면에는 학계에 참여한 11명의 이름과 학문을 격려하는 글이 있고, 뒷면에는 학전(學田) 15필지 52,947㎡를 모은 내력을 기록하였다. 높이 140cm, 너비 47.5cm, 두께 6.5cm이며 머리 부분에 간소한 장식이 있다.

일제 강점기 철물 공출 때에 주민들이 결사적으로 이 철비를 보존했으며, 후에 비각을 지어 보호하였다. 비각의 이름인 유후각(裕後閣)은 '교육을 통해 후손을 넉넉하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6일에 철비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철비는 조선 후기 향촌 사회사 및 교육사를 살피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철비는 칠전리 주민들이 서당 운영을 위한 계를 조직하고 이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1714년에 건립한 것이다.

1684년 칠전리 주민들은 서당인 노암재를 세우고, 서당 운영에 필요한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계를 결성하였다. 비의 앞면에는 계에 참여한 11명의 이름과 학문을 격려하는 글이 있고, 뒷면에는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52,947㎡의 토지를 모은 내력을 기록하였다. 높이 140cm, 너비 47.5cm, 두께 6.5cm이며 머리 부분에 간소한 장식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전쟁에 사용할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 수탈정책을 실시했을 때, 주민들이 결사적으로 이 철비를 지켜냈으며 보호각을 지었다. 비각의 이름 유후각은 '교육을 통해 후손을 넉넉하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6일에 철비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철비는 조선 후기 향촌사회사 및 교육사를 살피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