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중

"정순왕후생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22번째 줄: 22번째 줄:
  
 
=='''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
===국문===
경주 김씨(慶州 金氏) 일명 한다리 김씨가 16대를 이어 살아온 이 터전은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소실되고 현 건물만 남아있다. 이 가옥은 조선조 효종이 문신 김홍욱(金弘郁) 선생의 노부(老父) 김적(金積)공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내려준 목조(木造)의 기와집이다. 따라서 가옥의 건축시기는 효종 재위시인 단기 3982~3992년(서기 1649~1659년) 사이에 건축된 가옥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이 고택은 조선의 21대 왕 영조(1724~1776 재위)의 두 번째 왕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가 태어난 곳으로 경주김씨 가문의 사람들이 대대로 살아온 집이다. 효종(1649~1659 재위)은 가깝게 지내던 신하 김홍욱(金弘郁, 1602~1654)이 늙은 아버지 김적(金積)을 봉양하고 있음을 듣고, 그 효심에 감동하여 1650년경 이 가옥을 하사했다고 한다. 김홍욱은 충청도관찰사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으며, 서산 성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이곳에서 김홍욱 선생의 4대손인 국구(國舅) 김한구(金漢耉)의 장녀로 단기 4078(서기 1745년) 영조 21년에 태어났는데, 단기 4092년(서기 1759년) 영조 35년에 왕비에 책봉되어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되었다.
+
정순왕후는 이 집에서 김한구(金漢耉, 1723~1769)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집 주변에 상서로운 기운이 맴돌고 아름다운 새들이 날아들어 마을 사람들이 ‘장차 큰 인물이 될 징조’라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1759년(영조 35)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구조는 측면 2칸, 정면 5칸의 몸채 좌우로 각각 3칸씩 달아내는 ‘ㄷ’자형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측면 1칸, 정면 5칸의 별채를 배치하여 ‘ㅁ’자형의 평면구조를 하고 있다. 서쪽의 대청 양옆으로 방과 부엌을 두고 마당을 향한 곳에 뒷마루를 두었으나 동쪽의 별채에는 바깥으로 뒷마루를 두었다. 지붕은 모두 홑처마 맞배지붕을 하였다.
+
이 고택은 후에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투신한 김용환(1892~1919)이 태어나 자란 곳이기도 하다.
  
===수정 국문===
+
집의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을 갖춘 형태이다. 안채는 중앙에 넓은 대청이 있고,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두고 있다.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는 건물의 앞부분에 있는데, 다른 양반가의 사랑채에 비해 작은 편이다. 원래 큰 규모의 사랑채가 있었는데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들만 남아 있다고 한다.
====초고====
 
조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1745~1805)가 태어난 집이다. 정순왕후가 태어나자 집 주변에 상서로운 기운이 맴돌고 아름다운 새들이 날아들어, 마을사람들이 ‘장차 큰 인물이 될 징조’라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정비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1759년(영조 35)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생가는 서쪽으로 소심산이 자리하고 동쪽으로 농경지와 낮은 구릉이 펼쳐져 있는 평지 마을에 위치해있다. 이곳은 한다리마을이라 불리는 경주김씨 집성촌이었다. 이 집은 학주 김홍욱이 늙은 아버지(김적)를 봉양하고 있음을 들은 효종이 그 효심에 감동하여 하사한 돈으로 1650년경에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집의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가 완벽한 ㅁ자형을 갖춘 형태이다. 본래 여러 채의 건축물이 있었으나,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만 남아있는 것이라고 한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좌우로 각각 3칸씩의 건물을 달아내어 ㄷ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중앙 3칸은 넓은 대청을 두고 우측에 고방과 안방·부엌이 이어져있고, 좌측에 제실·건넌방·광 등이 있다. 광 옆으로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중문을 냈다. 사랑채는 다른 양반가에 비해 작은 편으로, 주로 남자들이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대문은 평문으로 되어있다.
+
===영문===
 +
'''Birthplace of Queen Jeongsun'''
  
====문맥요소====
+
===영문 해설 내용===
*김홍욱 – 최초의 주인 - 조선 효종 때 승지와 예조참의 등을 지냈다. 김한구의 고조부이다.
+
이 집은 조선의 21대 왕 영조(재위 1724-1776)의 두 번째 왕비인 정순왕후(1745-1805)가 태어난 곳이며, 경주김씨 가문의 사람들이 대대로 살아온 집이다.  
*영조 – 계비 - 본관은 경주(慶州). 오흥부원군 김한구(金漢耉)와 원풍부부인 원씨의 딸이다.
 
  
====검토의견====
+
효종(재위 1649-1659)은 가깝게 지내던 신하 김홍욱(1602-1654)이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고 있음을 듣고, 그 효심에 감동하여 1650년 경 이 가옥을 하사했다고 한다. 김홍욱은 충청도관찰사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으며, 서산의 성암서원에 제향되었다.
* 계비의 뜻 + 정순왕후에 대한 설명 더 필요할 듯
 
* 등장하는 인물들간의 관계 설명. 예) 김홍욱? - 김한구의 고조부?
 
  
# 정의
+
정순왕후는 이 집에서 김한구(1723-1769)의 첫째딸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집 주변에 상서로운 기운이 맴돌고 아름다운 새들이 날아들어, 마을 사람들이 ‘장차 큰 인물이 될 징조’라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1759년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 정순왕후 소개
 
# 집의 연혁
 
# 건축적 특징
 
  
====1차 수정====
+
이 집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투신한 김용환(1892-1919)이 태어나 자란 곳이기도 하다.
경주 김씨 가문의 사람들이 대대로 살아온 집으로, 조선의 21대 왕 영조(1724~1776 재위)의 두번째 왕비인 정순왕후(1745~1805)가 태어난 집이다. 이 집은 1650년 경, 효종(1649~1659 재위) 임금이 그와 가깝게 지내던 신하 김홍욱(1602~1654)이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고 있음을 듣고, 그 효심에 감동하여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김홍욱은 충청도관찰사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으며, 서산의 성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정순왕후는 집에서 김한구의 첫째딸로 태어났다. 그때 집 주변에 상서로운 기운이 맴돌고 아름다운 새들이 날아들어, 마을 사람들이 ‘장차 큰 인물이 될 징조’라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1759년(영조 35)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 집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투신한 김용환(1892~1919)의 생가이기도 하다.
+
집의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가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중앙에 넓은 대청이 있고,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두고 있다. 사랑채는 집의 앞부분에 있는데, 다른 양반가의 사랑채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다. 원래 큰 규모의 사랑채가 있었는데 소실되고 현재의 규모로만 남았다고 한다.  
  
집의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을 갖춘 형태이다. 안채는 중앙에 넓은 대청이 있고,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두고 있다.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는 건물의 앞 부분에 있는데, 다른 양반가의 사랑채에 비해 작은편이다. 원래 큰 규모의 사랑채가 있었는데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들만 남아 있다고 한다.
 
 
====자문의견====
 
#사적, 매장 위원1
 
#*효종(1649~1659 재위) 임금이 → 효종(1649~1659년 재위)이
 
#*정순왕후는 이 집에서 김한구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그때 집 주변에 상서로운 기운이 맴돌고 아름다운 새들이 날아들어, 마을 사람들이 ‘장차 큰 인물이 될 징조’라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1759년(영조 35)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 정순왕후는 이 집에서 김한구의 첫째 딸로 태어났으며, 1759년(영조 35)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태어날 때 집 주변에 상서로운 기운이 맴돌고 아름다운 새들이 날아들어, 마을 사람들이 ‘장차 큰 인물이 될 징조’라 하면서 기뻐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집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투신한 김용환(1892~1919)의 생가이기도 하다. → 사족과 같은 느낌이 든다. 아니면 좀 더 보완하여 마지막 단락으로 두는 것이 좋을 듯.
 
#*생가의 건축사적 특징과 문화적 가치 등 보완
 
#사적, 매장 위원2
 
#*“김홍욱은 충청도관찰사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으며, 서산의 성암서원에 제향되었다.”라는 내용은 불필요해 보임.
 
#* “앞 부분” → “앞부분”
 
#*“작은편” → “작은 편”
 
#*“원래 큰 규모의 사랑채가 있었는데 소실되고 건물들만 남아 있다고 한다.”는 ‘소실되고 무엇이 남았다는 말인지 의미가 모호함. 소실된 뒤 작은 사랑채를 지어서 현재의 건물만 남았다는 것인지?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는 건물의 앞부분에 있는데, 다른 양반가의 사랑채에 비해 작은 편이다. 원래 큰 규모의 사랑채가 있었는데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들만 남아 있다고 한다.
 
 
====2차 수정====
 
경주김씨 가문의 사람들이 대대로 살아온 집으로, 조선의 21대 왕 영조(1724~1776 재위)의 두번째 왕비인 정순왕후(1745~1805)가 태어난 집이다. 이 집은 1650년 경, 효종(1649~1659 재위)이 그와 가깝게 지내던 신하 김홍욱(1602~1654)이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고 있음을 듣고, 그 효심에 감동하여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김홍욱은 충청도관찰사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으며, 서산의 성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정순왕후는 이 집에서 김한구의 첫째딸로 태어났다. 그때 집 주변에 상서로운 기운이 맴돌고 아름다운 새들이 날아들어, 마을 사람들이 ‘장차 큰 인물이 될 징조’라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1759년(영조 35)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 집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투신한 김용환(1892~1919)의 생가이기도 하다.
 
 
집의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을 갖춘 형태이다. 안채는 중앙에 넓은 대청이 있고,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두고 있다.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는 건물의 앞부분에 있는데, 다른 양반가의 사랑채에 비해 작은 편이다. 원래 큰 규모의 사랑채가 있었는데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들만 남아 있다고 한다.
 
  
 
[[분류:문화유산해설문]]
 
[[분류:문화유산해설문]]
84번째 줄: 50번째 줄:
 
[[분류:시도기념물]]
 
[[분류:시도기념물]]
 
[[분류:가옥]]
 
[[분류:가옥]]
 +
[[분류:2020 영문집필]]

2020년 8월 13일 (목) 01:52 판


정순왕후생가
Birthplace of Queen Jeongsun
대표명칭 정순왕후생가
영문명칭 Birthplace of Queen Jeongsun
한자 貞順王后生家
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한다리길 39
지정번호 충청남도 기념물 제68호
지정일 1988년 8월 30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탄생지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정순왕후생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 고택은 조선의 21대 왕 영조(1724~1776 재위)의 두 번째 왕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가 태어난 곳으로 경주김씨 가문의 사람들이 대대로 살아온 집이다. 효종(1649~1659 재위)은 가깝게 지내던 신하 김홍욱(金弘郁, 1602~1654)이 늙은 아버지 김적(金積)을 봉양하고 있음을 듣고, 그 효심에 감동하여 1650년경 이 가옥을 하사했다고 한다. 김홍욱은 충청도관찰사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으며, 서산 성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정순왕후는 이 집에서 김한구(金漢耉, 1723~1769)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집 주변에 상서로운 기운이 맴돌고 아름다운 새들이 날아들어 마을 사람들이 ‘장차 큰 인물이 될 징조’라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1759년(영조 35)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 고택은 후에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투신한 김용환(1892~1919)이 태어나 자란 곳이기도 하다.

집의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을 갖춘 형태이다. 안채는 중앙에 넓은 대청이 있고,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두고 있다.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는 건물의 앞부분에 있는데, 다른 양반가의 사랑채에 비해 작은 편이다. 원래 큰 규모의 사랑채가 있었는데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들만 남아 있다고 한다.

영문

Birthplace of Queen Jeongsun

영문 해설 내용

이 집은 조선의 21대 왕 영조(재위 1724-1776)의 두 번째 왕비인 정순왕후(1745-1805)가 태어난 곳이며, 경주김씨 가문의 사람들이 대대로 살아온 집이다.

효종(재위 1649-1659)은 가깝게 지내던 신하 김홍욱(1602-1654)이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고 있음을 듣고, 그 효심에 감동하여 1650년 경 이 가옥을 하사했다고 한다. 김홍욱은 충청도관찰사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으며, 서산의 성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정순왕후는 이 집에서 김한구(1723-1769)의 첫째딸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집 주변에 상서로운 기운이 맴돌고 아름다운 새들이 날아들어, 마을 사람들이 ‘장차 큰 인물이 될 징조’라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1759년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 집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투신한 김용환(1892-1919)이 태어나 자란 곳이기도 하다.

집의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가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중앙에 넓은 대청이 있고,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두고 있다. 사랑채는 집의 앞부분에 있는데, 다른 양반가의 사랑채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다. 원래 큰 규모의 사랑채가 있었는데 소실되고 현재의 규모로만 남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