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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장군덕천군사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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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4500060000 장군 덕천군사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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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장군 덕천군 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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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Yi Hu-saeng’s Shrine in Janggun-m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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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세종특별자치시 태산길 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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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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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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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덕천군 사우는 조선 정종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의 위패를 모신 사우(부조묘, 不祧廟)*이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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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군은 효심이 깊고 우애가 있었으며, 평소 가난한 백성의 구호를 위해 힘써 ‘덕을 쌓은 어른’이라는 의미의 ‘적덕공(積德公)’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초고====
 
덕천군(德泉君, 1397∼1465)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덕천군은 정종(1398∼1400 재위)의 열 번째 아들로, 이름은 이후생(李厚生)이다. 어머니인 성빈 지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공을 낳았다고 한다. 효심이 깊고 우애로워 정종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뒤 칸에는 제단을 설치하였고, 앞 칸에는 참배 공간을 두었다. 처음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있던 건물이 낡아 1739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고종(1863~1907 재위)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사우 보수와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1960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원래 세종시(구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지었으나, 건물이 낡아 영조 15년(1739)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고종 때 후손 이건창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사우를 보수하였고, 1960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1차 수정====
 
조선 정종(1398~1400 재위)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 1397~1465)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덕천군은 어머니인 성빈 지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낳았다고 한다. 효심이 깊고 우애로워 정종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
현재 사우 옆에는 1974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옮겨온 덕천군 묘와 신도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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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조묘(不祧廟): 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위패는 왕의 허락으로 4대가 지나도 옮기지 않고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뒤 칸에는 제단을 설치하였고, 앞 칸에는 참배 공간을 두었다. 원래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지었으나, 건물이 낡아 1739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고종(1863~1907 재위) 때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사우 보수와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1960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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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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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 Hu-saeng’s Shrine in Janggun-myeon'''
====자문의견====
 
#분야별 자문위원1
 
#*조선 제2대 임금 정종(1398~1400)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 1397~1465)을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덕천군은 어머니 성빈 지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낳았으며, 효심이 깊고 우애로워 아버지 정종이 ‘후(厚)’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가난한 백성의 구호를 위해 힘썼으며, 왕자의 신분에도 직접 농사를 지었다. 여름 홍수로 수백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적극 구제하는 등 덕을 쌓은 어른이라는 의미의 ‘적덕공’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사우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앞에는 참배 공간을 뒤에는 제사 공간을 두었다. 처음에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지었으나, 1739년(영조 15)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고종(1863~1907) 때 덕천군의 후손 이건창(李建昌, 1852~1898, 본관 ; 전주)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사우 보수와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1960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분야별 자문위원2
 
#*장군 덕천군사우 (將軍 德泉君祠宇) → 덕천군사우 (德泉君祠宇)
 
#** 수정이유: 세종시의 시각에서는 장군이라는 소재지 지명이 필요할 수도 있겠으나, 전국적인 관점에서 그 지명을 밝혀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정식 명칭을 이름으로 써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함.
 
#* 효심이 깊고 우애로워 정종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厚)’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 효심이 깊고 우애로웠다. (정종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厚)’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 삭제)
 
#** 수정이유: 상식적으로 본다면 이름을 지을 당시 이미 효심이 깊고 우애로움이 확인되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음. 사실을 확인한 문안을 다시 작성할 필요 있음.
 
#*뒤 칸에는 제단을 설치하였고, 앞 칸에는 → 뒤칸에는 제단을 설치하였고, 앞칸에는 참배 공간을 두었다. (또는 이 구절 삭제)
 
#** 수정이유: 뒤칸, 앞칸은 하나의 단어이므로 붙여 쓰거나, 뒤에 제단을 두고 앞에 참배 공간을 둔다는 당연한 사실을 따로 밝힐 필요가 있을지 의심스러움.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덕천군은 어머니인 성빈 지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낳았다고 한다.(덕천군은 어머니인 성빈 지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낳았다고 한다. -> 어머니인 성빈 지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덕천군을 낳았다고 한다.) 효심이 깊고 우애로워 정종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厚)’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2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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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shrine is dedicated to Prince Deokcheongun, born Yi Hu-saeng (1397-1465), the 10th son of King Jeongjong (r. 1398-1400)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조선 정종(1398~1400 재위)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 1397~1465)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어머니인 성빈 지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덕천군을 낳았다고 하며, 효심이 깊고 우애로웠다. 가난한 백성의 구호를 위해 힘썼으며, 왕자의 신분에도 직접 농사를 지었다. 여름 홍수로 수백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적극 구제하는 등 ‘덕을 쌓은 어른’이라는 의미의 ‘적덕공(積德公)’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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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ce Deokcheongun was known for his filial and brotherly devotion and his dedication to helping people in need. For that reason he was also called Jeokdeokgong, which means “Lord of Amassed Virtue.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뒤에는 제단을 설치하였고, 앞에는 참배 공간을 두었다. 원래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지었으나, 건물이 낡아 1739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고종(1863~1907 재위) 때 덕천군의 후손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사우 보수와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1960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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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rine was first built in Bangchuk-ri Village of Yeongi, but was rebuilt in 1739 in the current location after the original building had deteriorated over time. During the reign of King Gojong (r. 1863-1907), the shrine was repaired by Yi Geon-chang (1852-1898), a descendant of Prince Deokcheongun, when he visited the area as a secret inspector. In 1960, the building was repaired again, and in 1974, the tomb and stele of Prince Deokcheongun were relocated here from Gwangju, Gyeonggi-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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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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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종(재위 1398-1400)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1397-1465)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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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군은 효심이 깊고 우애가 있었으며, 평소 가난한 백성의 구호를 위해 힘썼다. ‘덕을 쌓은 어른’이라는 의미의 ‘적덕공(積德公)’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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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는 원래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지었으나, 건물이 낡아 1739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고종(재위 1863-1907) 때 덕천군의 후손 이건창(1852-1898)이 암행어사로 이곳에 왔을 때, 사우를 보수하였다. 1960년에 대대적으로 다시 중수하였다. 현재 사우 옆에는 1974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옮겨온 덕천군 묘와 신도비가 있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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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세종시대전  http://sejong.grandculture.net/sejong/toc/GC07700901  -> 산 중턱에 3단의 층대를 쌓은 다음 서남향으로 대지를 조성하여 삼문과 담장을 시설하고 사우를 배치하였다. / 1873년(고종 10)에 증직(贈職)[종2품 벼슬아치의 부친·조부·증조부나 충신·효자 및 학행(學行)이 높은 사람을 대상으로 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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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특별자치시 공식블로그,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sejong_story/222032790841  ->덕천군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데 좌우에는 1873년 내려진 교지가 있다. 왼쪽은 덕천군의 부인을 군부인으로 봉하는 추봉교지이고, 오른쪽은 덕천군을 종친부의 종2품 급의 관직에 봉하는 교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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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군이 받은 교지는 대원군의 왕권강화정책과 관련, 종친을 우대하는 과정에서 내려진 것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종정경’ 참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3007)
 
*장군 덕천군사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3414500060000 ⇒ 사우 기본 내력과 이건에 대한 내용 참고
 
*장군 덕천군사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3414500060000 ⇒ 사우 기본 내력과 이건에 대한 내용 참고
 
*덕천군,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6JOa_A1397_1_0017467&curSetPos=0&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 덕천군에 대한 이력 참고
 
*덕천군,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6JOa_A1397_1_0017467&curSetPos=0&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 덕천군에 대한 이력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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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0 영문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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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2020 국문집필]] [[분류: 2020 국문초안지원사업]]

2021년 2월 5일 (금) 16:34 기준 최신판

장군 덕천군 사우
Yi Hu-saeng’s Shrine in Janggun-myeon
장군 덕천군사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장군 덕천군 사우
영문명칭 Yi Hu-saeng’s Shrine in Janggun-myeon
한자 將軍 德泉君 祠宇
주소 세종특별자치시 태산길 93-6
지정번호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6호
지정일 2012년 12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76.5㎡
웹사이트 장군 덕천군사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장군 덕천군 사우는 조선 정종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의 위패를 모신 사우(부조묘, 不祧廟)*이다.

덕천군은 효심이 깊고 우애가 있었으며, 평소 가난한 백성의 구호를 위해 힘써 ‘덕을 쌓은 어른’이라는 의미의 ‘적덕공(積德公)’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원래 세종시(구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지었으나, 건물이 낡아 영조 15년(1739)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고종 때 후손 이건창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사우를 보수하였고, 1960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현재 사우 옆에는 1974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옮겨온 덕천군 묘와 신도비가 있다.


  • 부조묘(不祧廟): 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위패는 왕의 허락으로 4대가 지나도 옮기지 않고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영문

Yi Hu-saeng’s Shrine in Janggun-myeon

This shrine is dedicated to Prince Deokcheongun, born Yi Hu-saeng (1397-1465), the 10th son of King Jeongjong (r. 1398-1400)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Prince Deokcheongun was known for his filial and brotherly devotion and his dedication to helping people in need. For that reason he was also called Jeokdeokgong, which means “Lord of Amassed Virtue.”

The shrine was first built in Bangchuk-ri Village of Yeongi, but was rebuilt in 1739 in the current location after the original building had deteriorated over time. During the reign of King Gojong (r. 1863-1907), the shrine was repaired by Yi Geon-chang (1852-1898), a descendant of Prince Deokcheongun, when he visited the area as a secret inspector. In 1960, the building was repaired again, and in 1974, the tomb and stele of Prince Deokcheongun were relocated here from Gwangju, Gyeonggi-do.

영문 해설 내용

조선 정종(재위 1398-1400)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1397-1465)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우이다.

덕천군은 효심이 깊고 우애가 있었으며, 평소 가난한 백성의 구호를 위해 힘썼다. ‘덕을 쌓은 어른’이라는 의미의 ‘적덕공(積德公)’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사우는 원래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지었으나, 건물이 낡아 1739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고종(재위 1863-1907) 때 덕천군의 후손 이건창(1852-1898)이 암행어사로 이곳에 왔을 때, 사우를 보수하였다. 1960년에 대대적으로 다시 중수하였다. 현재 사우 옆에는 1974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옮겨온 덕천군 묘와 신도비가 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