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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리 지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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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연구팀


자작리 지석묘
Dolmen in Jajak-ri
대표명칭 자작리 지석묘
영문명칭 Dolmen in Jajak-ri
한자 自作里 支石墓
주소 경기도 포천시 호국로 1007
지정번호 포천시 향토유적 제2호
지정일 1986년 4월 9일
소유자 포천시



해설문

기존 국문

지석묘의 형식은 탁자식으로 평지에 조성되었으며, 하부는 지표 아래에 약간 매몰되어 있지만 원형을 그대로 살필 수 있다.

상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방형으로 규모는 420cm×347cm크기에 두께는 45~50cm이다.

지석은 4매가 모두 있으나 남쪽 단벽은 중간에 잘려져 나간듯하다. 장벽의 규모는 서쪽이 265cm ×144cm × 33cm이며, 반대편의 동쪽은 220cm × 144cm × 31cm로 화강암 재질의 판석이다. 단벽의 규모는 북쪽이 105cm × 144cm × 28cm로 장벽사이에 끼워져 있다. 남벽은 110cm × 85cm × 20cm의 규모로 약 15cm만 지류 위에 올라와 있다.

지석묘의 하부구조로 피장자가 안치되는 곳인 묘실은 180cm × 122cm이며, 현재의 묘실 바닥에서 상석 하단부까지의 높이는 144cm, 지표까지의 높이는 70cm로 바닥에는 부식토가 깔려있다.

지석묘 내부의 유물은 모두 도굴을 당하였으나 지석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덤이다. 받침돌 위에 큰 덮개돌을 고여 놓았다고 하여 고인돌이라 한다.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大石蓋墓)라 하고,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라 한다. 무덤으로 보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고인돌은 생김새에 따라 땅 위에 책상처럼 세우는 탁자식[북방식],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이거나 받침돌 없이 평평한 돌을 얹는 바둑판식[남방식]으로 나뉜다.

자작리 고인돌은 받침돌이 길게 올라와 있는 탁자식 고인돌이다. 받침돌 4개로 직사각형 모양의 무덤방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하고, 그 위에 판판한 덮개돌을 올려놓아 만들었다. 받침돌 4개 중 하나가 없는데, 이는 누군가가 그 받침돌 하나를 빼서 무덤방을 열고 도굴하면서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밖에 모든 부재가 처음 만들었을 때 모양 그대로 있어, 고인돌 연구의 좋은 자료라 할 수 있다. 덮개돌은 두께가 거의 일정하여 마치 사람이 고르게 다듬은 듯하다. 껴묻거리는 확인되지 않았고, 그래서 정확히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문맥요소

  • 자작리 : 소재지
  • 지석묘 : 고인돌의 다른 이름
  • 북방식 : 형태
  • 받침돌 : 구성요소
  • 덮개돌 : 구성요소

1차 수정

지석묘는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덤이다. 받침돌 위에 큰 덮개돌을 고여 놓았다고 하여 고인돌이라도 한다. 무덤으로 보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고인돌은 생김새에 따라 땅 위에 책상처럼 세우는 탁자식[북방식],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이거나 받침돌 없이 평평한 돌을 얹는 바둑판식[남방식]으로 나뉜다.

자작리 지석묘는 받침돌이 길게 올라와 있는 탁자식 고인돌이다. 받침돌 4개로 직사각형 모양의 무덤방을 만들어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하고, 그 위에 판판한 덮개돌을 올려놓았다. 받침돌 4개 중 하나가 없는데, 이는 누군가가 그 돌 하나를 빼서 무덤방을 열고 도굴하면서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덮개돌은 두께가 거의 일정하여 마치 사람이 고르게 다듬은 듯하다.

무덤 속에 다른 유물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언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덤을 이루는 돌들이 대부분 처음 만들었을 때 모양 그대로 있어서 고인돌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문맥 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자작리_지석묘 유적 자작리_지석묘
지석묘 개념 지석묘
고인돌 개념 고인돌
청동기_시대 시간 청동기_시대
탁자식_고인돌 개념 탁자식_고인돌
바둑판식_고인돌 개념 바둑판식_고인돌
받침돌 개념 받침돌
덥개돌 개념 덥개돌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지석묘 청동기_시대 ~시대의_유산이다
고인돌 지석묘 ~의_이칭이다
지석묘 탁자식_고인돌 양식_~이_있다
지석묘 바둑판식_고인돌 양식_~이_있다
자작리_지석묘 탁자식_고인돌 ~에_속한다
자작리_지석묘 받침돌 구성요소_~이_있다
자작리_지석묘 덥개돌 구성요소_~이_있다



참고 자료

창성 부원군(昌城府院君) 성여완(成汝完)이 졸하였다. 여완은 본관이 창녕(昌寧)으로 판도 총랑(版圖摠郞) 성군미(成君美)의 아들이다. 지원(至元) 병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의 검열(檢閱)이 되고, 여러 번 옮겨 군부 정랑(軍簿正郞)·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상서 우승(尙書右丞)·지형부사(知刑部事)·어사 중승(御史中丞)·전법 판사(典法判事) 등을 역임하였다. 그 중간에 해주(海州)·충주(忠州)의 두 목사(牧使)로 나갔고, 첨서 밀직(僉書密直)·정당 문학(政堂文學) 등 직에 승진되었다. 개국초에 나라의 기로(耆老)로서 검교 문하 시중(檢校門下侍中)에 임명, 창성 부원군이 되었다. 나이 89세에 병으로 졸하니, 미두(米豆) 1백 석을 내려 주고 예장(禮葬)으로 장사하였으며,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 여완은 그 성품이 간결(簡潔)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아들을 가르치는 데도 법도가 있었다.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올라, 맏아들 성석린(成石璘)은 지금 의정부 좌정승이고, 다음 성석용(成石瑢)은 개성 유후(開城留後)이며, 그 다음 성석인(成石因)은 호조 판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