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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성군 신도비 및 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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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성군 신도비 및 무석
익성군 신도비 및 무석”, 디지털논산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익성군 신도비 및 무석
한자 益城君 神道碑 및 武石
주소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용산리 산93-3
지정번호 시도유형문화재 제86호
지정일 1979년 7월 3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3기/5457
웹사이트 익성군 신도비 및 무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익성군 신도비 및 무석은 익성군(益城君) 이향령(李享齡)의 묘 앞에 세운 비석과 무관 형상을 한 돌이다. 익성군은 중종의 손자 하원군(河原君) 정(鋥)의 둘째 아들이다. 신도비를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향령은 13세에 익성정(益城正)이 되었고, 1597년(선조 30)에 익성군에 책봉되었다.

비문은 조익이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으며, 익성군신도비명(益城君神道碑銘)이라는 두전(頭篆)*은 여이징(呂爾徵)이 전서체로 썼다. 신도비의 높이는 320cm이며 비의 받침돌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비의 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신도비는 중국식의 이수** 대신에 우리 고유의 형식인 가첨석(加檐石)***으로 점차 바뀌어 가는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이수 앞면은 옛 모습인 반용(蟠龍)****이 조각되어 있고, 옆면과 뒷면에는 구름무늬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받침은 거북 모양의 받침돌 대신에 네모난 모양의 농대석(籠臺石)을 사용하였다.

익성군의 묘 양쪽에는 화강암으로 된 한 쌍의 무석이 서 있다. 무석은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양손은 가운데로 모아 칼을 휘어잡고, 허리에는 칼집이 있다. 이는 당시 조선시대 무인의 복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 비석의 머리 부분에 돌려 가며 쓴 전자
  • 용 모양의 비석 머릿돌
  • 지붕 모양의 비석 머릿돌
  • 아직 승천하지 못한 용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 종친이었던 이향령(1566-1614)의 묘 앞에 세워진 신도비와 무인석 1쌍이다.

이향령은 조선 중종(재위 1506-1544)의 증손자이자 선조(재위 1567-1608)와는 사촌이다.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하였다. 1612년 정쟁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신원되었다.

신도비는 1643년에 세워졌으며, 비의 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머릿돌의 앞면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고 옆면과 뒷면에는 구름무늬가 돋을새김 되어있다. 사각형의 받침돌은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높이는 3.2m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무인석은 묘 양쪽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다.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양손은 가운데로 모아 칼을 잡고 허리에 칼집을 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