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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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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ndsey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10월 9일 (수) 17:39 판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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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선생 묘
Tomb of Yi Hang-bok
=이항복선생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이항복선생 묘
영문명칭 Tomb of Yi Hang-bok
한자 李恒福先生 墓
주소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산4번지
지정번호 시도기념물 제24호
지정일 1975년 9월 5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이항복선생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李恒福,1566~1618)의 묘이다. 이항복의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 또는 백사(白沙)이고, 본관은 경주이다. 한음 이덕형(李德馨)과 깊은 우정으로 잘 알려진 ‘오성과 한음설화’에서 오성대감으로 유명하다. 선조13년(1580) 문과에 급제했으며 정여립(鄭汝立) 사건을 잘 다스려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1592)이 발발하자 임금의 비서인 도승지로써 선조를 의주까지 호송한 공을 인정받아 영의정에 임명되고 오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이항복은 광해군 때 영창대군을 구하려 끝까지 노력하였고, 인목대비(仁穆大妃) 김씨를 왕비의 자리에서 몰아내는데 반대하다가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역은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에 위치하고 있다.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무덤은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와의 합장묘이다. 무덤 앞에는 묘갈과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이 있고, 그 앞의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이 각각 한 쌍씩 놓여있다.

묘역 앞쪽 아래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영당(影堂)이 있고, 오른쪽에는 효종3년(1652)에 건립된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은 신흠(申欽)이 짓고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글씨와 김상용(金尙容)의 글씨를 썼다.

국문 수정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항복(李恒福, 1566~1618)의 묘이다.

이항복은 1580년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589년 정여립이 일으킨 역모 사건을 잘 다스려 선조(재위 1567~1608)의 신임을 얻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으며, 전쟁을 지휘하여 국난 극복에 힘썼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영의정이 되고, 1604년 공신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재위 1608~1623) 때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를 몰아내는 데 반대하다가, 1618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역에는 봉분이 2개 있으며, 왼쪽의 묘가 이항복의 무덤이고 오른쪽의 묘가 부인 안동권씨의 무덤이다. 무덤 앞에는 묘비,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그 앞의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한 쌍씩 자리하였다. 우측으로 10여 m 떨어진 곳에는 둘째 부인 금성오씨의 무덤이 따로 조성되어 있다.

묘역 앞쪽 아래에는 이항복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이 있고, 영당 오른쪽에는 1652년에 건립된 신도비가 있다. 비문은 신흠이 짓고 김집과 김상용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서는 이항복에 대해 ‘당파에 휩쓸리지 않고 중립을 취하여 누구도 그를 헐뜯지 않았다’고 하였다.

영문

Tomb of Yi Hang-bok

This is the tomb of Yi Hang-bok (1556-1618), a civil official and scholar of the mid-Joseon period, and his first wife Lady Gwon.

Yi Hang-bok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80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In 1589, he skillfully handled the rebellion started by Jeong Yeo-rip, which helped him gain the trust of King Seonjo (r. 1567-1608). When the Japanese invaded in 1592, he escorted King Seonjo (r. 1567-1608) and the royal family members to refuge near the northern border of the Korean Peninsula, and later greatly contributed to fighting back the Japanese and stabilizing the country in the midst of the crisis. In recognition of his contributions, he was bestowed the title of meritorious subject in 1604. However, in the midst of political turmoil during the reign of King Gwanghaegun, he was exiled to Bukcheong, Hamgyeong-do (in today's North Korea), where he eventually died.

The twin tomb mounds are for Yi Hang-bok and Lady Gwon on the left and right, respectively. In front of the tomb are a tombstone, a stone spirit seat, a stone table, two stone pillars, and two stone statues of civil officials. The tomb of his second wife Lady O is located 10 m to the right.

Near the tomb, there is a shrine with Yi’s portrait inside, to the right of which is a stele erected in 1652. The inscription on the stele says, “He never took sides between political parties and kept neutrality so that no one could dispraise him.”

영문 해설 내용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항복(1566~1618)의 묘이다.

이항복은 1580년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589년 정여립이 일으킨 역모 사건을 잘 다스려 선조(재위 1567~1608)의 신임을 얻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으며, 전쟁을 지휘하여 국난 극복에 힘썼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1604년 공신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재위 1608~1623) 때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를 몰아내는 데 반대하다가, 1618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역에는 봉분이 2개 있으며, 왼쪽의 묘가 이항복의 무덤이고 오른쪽의 묘가 부인 안동권씨의 무덤이다. 무덤 앞에는 묘비,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그 앞의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한 쌍씩 자리하였다. 우측으로 10여 m 떨어진 곳에는 둘째 부인 금성오씨의 무덤이 따로 조성되어 있다.

묘역 앞쪽 아래에는 이항복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이 있고, 영당 오른쪽에는 1652년에 건립된 신도비가 있다. 비문은 신흠이 짓고 김집과 김상용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서는 이항복에 대해 ‘당파에 휩쓸리지 않고 중립을 취하여 누구도 그를 헐뜯지 않았다’고 하였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