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중

"이석엽, 이재연 부자 정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진행중}} {{문화유산정보 |사진= |사진출처= |대표명칭=이석엽·이재연 부자 정려 |영문명칭= |한자= |주소=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 형산리...)
 
4번째 줄: 4번째 줄:
 
|사진출처=
 
|사진출처=
 
|대표명칭=이석엽·이재연 부자 정려
 
|대표명칭=이석엽·이재연 부자 정려
|영문명칭=
+
|영문명칭=Commemorative Pavilion of Yi Seok-yeop and Yi Jae-yeon
 
|한자=
 
|한자=
 
|주소=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 형산리 163
 
|주소=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 형산리 163
31번째 줄: 31번째 줄:
  
 
===영문===
 
===영문===
 
+
'''Commemorative Pavilion of Yi Seok-yeop and Yi Jae-yeon'''
 
 
  
  
 
===영문 해설 내용===
 
===영문 해설 내용===
 +
이석엽과 이재연 부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내려진 정려를 모신 건물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
이석엽은 효심을 다해 부모를 모셨고, 이재연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재연이 13세 때 어머니가 위독해지자, 이재연은 어머니 변의 맛을 보아 병세를 헤아리고 지성으로 간호하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목 놓아 울면서 3년간 무덤 옆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아버지가 병이 났을 때도 지극하게 모셨다. 부자가 모두 효행으로 정려를 받아 그 의미가 크다.
  
 
+
* 정려 받은 시기나 정려각 세운 시기 모두 확인 안됨.
 
 
=='''참고자료'''==
 
 
 
 
 
 
 
 
 
  
  

2021년 5월 8일 (토) 01:02 판


이석엽·이재연 부자 정려
Commemorative Pavilion of Yi Seok-yeop and Yi Jae-yeon
대표명칭 이석엽·이재연 부자 정려
영문명칭 Commemorative Pavilion of Yi Seok-yeop and Yi Jae-yeon
주소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 형산리 163
지정번호 청양군 향토유적 제31호
지정일 2019년 5월 31일
수량/면적 1동



해설문

국문

이석엽・이재연 부자 정려는 이석엽과 이재연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세운 건물, 또는 그런 일을 뜻하는 말이다.

이석엽은 효심을 다해 부모를 모셨고 그의 아들 이재연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재연이 13세에 어머니가 위독하자 변의 맛을 보고 병세를 헤아리는 등 지성으로 간호하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어른과 같이 목 놓아 울면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아버지가 병이 났을 때도 어머니와 같이 지극하게 모셨다. 부자가 모두 효행으로 정려를 받아 그 의미가 크다.


  • 시묘살이: 부모의 상중에 3년간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사는 일.

영문

Commemorative Pavilion of Yi Seok-yeop and Yi Jae-yeon


영문 해설 내용

이석엽과 이재연 부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내려진 정려를 모신 건물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이석엽은 효심을 다해 부모를 모셨고, 이재연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재연이 13세 때 어머니가 위독해지자, 이재연은 어머니 변의 맛을 보아 병세를 헤아리고 지성으로 간호하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목 놓아 울면서 3년간 무덤 옆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아버지가 병이 났을 때도 지극하게 모셨다. 부자가 모두 효행으로 정려를 받아 그 의미가 크다.

  • 정려 받은 시기나 정려각 세운 시기 모두 확인 안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