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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100560000 이대원장군 묘 및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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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원(李大源, 1566~1587)의 묘와 그의 공적이 기록된 신도비이다. 이곳 희곡리는 함평이씨의 세거지로, 이대원은 이곳 함평이씨 가문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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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이대원(李大源, 1566~1587)의 묘와 그의 공적이 기록된 신도비*이다. 이곳 희곡리는 함평이씨의 세거지로, 이대원은 함평이씨 가문의 사람이다.
 
 
이대원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선조 20년(1587)에 남해안에 출몰한 왜구를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손죽도 해상에서 적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으나 끝까지 항거하다 전사하였다.
 
 
 
이 묘역에는 봉분이 3기가 있는데, 가운데가 이대원의 묘이다. 전란 중에 시체를 수습할 수 없어 죽기 전에 하인에게 남겨 전해온 속적삼*으로 가묘*를 조성했다고 한다. 좌우의 묘는 부인들의 묘이다.
 
 
 
묘역 아래에 있는 신도비는 숙종 25년(1699) 이대원의 후손인 이항발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비문은 남구만이 짓고, 조상우가 글씨를 썼으며, 비의 제목 글씨는 김진규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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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이대원(李大源, 1566~1587)의 묘와 그의 공적이 기록된 신도비이다. 이곳 희곡리는 함평이씨의 세거지로, 이대원은 함평이씨 가문의 사람이다.
 
  
 
이대원은 선조 16년(1583)에 무과에 급제한 후 전라도 지역에 부임하였다. 선조 20년(1587)에 남해안에 출몰한 왜구를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같은 해에 왜구가 다시 전라도 고흥 지역을 침범하자 손죽도 해상에서 적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고, 끝까지 항거하다 전사하였다.  
 
이대원은 선조 16년(1583)에 무과에 급제한 후 전라도 지역에 부임하였다. 선조 20년(1587)에 남해안에 출몰한 왜구를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같은 해에 왜구가 다시 전라도 고흥 지역을 침범하자 손죽도 해상에서 적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고, 끝까지 항거하다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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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아래에 있는 신도비는 숙종 25년(1699) 이대원의 후손인 이항발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비문은 남구만이 짓고, 조상우가 글씨를 썼으며, 비의 제목 글씨는 김진규가 썼다.
 
묘역 아래에 있는 신도비는 숙종 25년(1699) 이대원의 후손인 이항발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비문은 남구만이 짓고, 조상우가 글씨를 썼으며, 비의 제목 글씨는 김진규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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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
 
*속적삼: 전통복식에서 저고리 속에 입는 옷
 
*속적삼: 전통복식에서 저고리 속에 입는 옷
 
*가묘: 정식으로 묘를 쓰기 전에 임시로 쓰는 묘
 
*가묘: 정식으로 묘를 쓰기 전에 임시로 쓰는 묘
  
 
===영문===
 
===영문===
'''Tomb of Admiral Yi Dae-won and Stele'''
 
 
 
This is the tomb of Yi Dae-won (1566-1587), a military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and a stele commemorating his distinguished achievement.  
 
This is the tomb of Yi Dae-won (1566-1587), a military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and a stele commemorating his distinguished achie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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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are three mounds in this tomb: the one at the center is for Yi Dae-won, and the others are for his wives. The stele, standing at the tomb entrance, was erected in 1699 by one of his descendants, Yi Hang-bal. The epitaph was composed by Nam Gu-man (1629-1711) and calligraphed by Jo Sang-u (1640-1718) and Kim Jin-gyu (1658-1716), all of who were eminent politicians and scholars of the period.
 
There are three mounds in this tomb: the one at the center is for Yi Dae-won, and the others are for his wives. The stele, standing at the tomb entrance, was erected in 1699 by one of his descendants, Yi Hang-bal. The epitaph was composed by Nam Gu-man (1629-1711) and calligraphed by Jo Sang-u (1640-1718) and Kim Jin-gyu (1658-1716), all of who were eminent politicians and scholars of the period.
  
===영문 해설 내용===
 
  
 
===참고===
 
===참고===

2019년 7월 18일 (목) 23:30 판

이대원장군 묘 및 신도비
Tomb of Admiral Yi Dae-won and Stele
"이대원장군 묘 및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이대원장군 묘 및 신도비
영문명칭 Tomb of Admiral Yi Dae-won and Stele
한자 李大源將君 墓 및 神道碑
주소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희곡리 산83-6
지정번호 시도기념물 제56호
지정일 1980년 6월 2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일원5,643㎡
웹사이트 "이대원장군 묘 및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대원장군은 선조 16년(1583)에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쳐 전라도 녹도에서 종4품 무관직인 만호가 되었다. 선조 20년(1587)에 남해안에 출몰한 왜구를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다시 왜구가 흥양에 침입하자 군사 100여 명을 이끌고 출병하여 손죽도 해상에서 적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으나 끝까지 항거하다 전사하였다.

묘지는 봉분이 3기인데, 가운데 장군의 묘가 있고 좌우에 부인의 묘가 있다. 가운데 봉분 앞에는 묘비, 향로석, 제물을 차려 놓기 위한 상석이 있으며, 사당 입구에는 숙종 25년(1699)에 건립한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에는 왜구를 물리친 장군의 공적이 잘 기록되어 있다.



  • 신도비 :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

국문 수정안

조선 중기의 무신 이대원(李大源, 1566~1587)의 묘와 그의 공적이 기록된 신도비*이다. 이곳 희곡리는 함평이씨의 세거지로, 이대원은 함평이씨 가문의 사람이다.

이대원은 선조 16년(1583)에 무과에 급제한 후 전라도 지역에 부임하였다. 선조 20년(1587)에 남해안에 출몰한 왜구를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같은 해에 왜구가 다시 전라도 고흥 지역을 침범하자 손죽도 해상에서 적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고, 끝까지 항거하다 전사하였다.

이 묘역에는 봉분이 3기가 있는데, 가운데가 이대원의 묘이다. 전란 중에 시체를 수습할 수 없어 죽기 전에 하인에게 남겨 전해온 속적삼*으로 가묘*를 조성했다고 한다. 좌우의 묘는 부인들의 묘이다.

묘역 아래에 있는 신도비는 숙종 25년(1699) 이대원의 후손인 이항발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비문은 남구만이 짓고, 조상우가 글씨를 썼으며, 비의 제목 글씨는 김진규가 썼다.

  • 신도비: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
  • 속적삼: 전통복식에서 저고리 속에 입는 옷
  • 가묘: 정식으로 묘를 쓰기 전에 임시로 쓰는 묘

영문

This is the tomb of Yi Dae-won (1566-1587), a military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and a stele commemorating his distinguished achievement.

In 1587, he meritoriously served to defeat Japanese invaders in the southern coastal area. In the same year, he was captured by the Japanese during a battle near Sonjukdo Island in today’s Yeosu, Jeollanam-do and was killed by the enemies as he refused to surrender. His body was lost, and this honorary tomb was built in his hometown Pyeongtaek. A piece of his undershirt, left to his servant, was buried inside.

There are three mounds in this tomb: the one at the center is for Yi Dae-won, and the others are for his wives. The stele, standing at the tomb entrance, was erected in 1699 by one of his descendants, Yi Hang-bal. The epitaph was composed by Nam Gu-man (1629-1711) and calligraphed by Jo Sang-u (1640-1718) and Kim Jin-gyu (1658-1716), all of who were eminent politicians and scholars of the period.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