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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흥향교 대성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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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701980000 의흥향교 대성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701980000 의흥향교 대성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의흥향교 대성전
 
|대표명칭=의흥향교 대성전
|영문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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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Daeseongjeon Shrine of Uiheunghyanggyo Local Confucian School
 
|한자=義興鄕校 大成殿
 
|한자=義興鄕校 大成殿
 
|주소=경북 군위군 의흥면 읍내리 217
 
|주소=경북 군위군 의흥면 읍내리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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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국문===
 
===국문===
향교는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고 지방민을 교화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세운 교육시설이며,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신 향교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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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국가에서 설립하여 유학을 가르치고 인재를 기르는 지방 교육 기관으로, 지금의 중・고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시나 문장을 짓는 법과 유교의 경전과 역사를 가르쳤고, 중국과 조선의 성현에게 제사를 올렸다. 갑오개혁 이후 교육 기능은 사라졌으며, 봄가을에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고 초하루와 보름에 향을 피운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전각으로, 향교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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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흥향교는 1398년(태조 7) 의흥면 읍내동에 창건(創建)*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건물이 불타고 있을 때 위패(位牌)*를 숨겨 위패는 온전하였다. 1601년(선조 34)에 중건하였고, 1614년(광해군 6)에 하리촌으로 옮겼다가 1641년(인조 19) 현 위치로 다시 옮겼으며 대성전은 이때 건립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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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흥 향교는 태조 7년(1398) 의흥면 읍내동에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려 선조 34년(1601)에 다시 지었다. 인조 19년(1641)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대성전은 이때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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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이다. 평면은 앞쪽에 기둥만 있는 반 칸 폭의 툇간(退間)*을 두고, 뒤편에 6칸 크기의 위패를 모시는 넓은 공간을 두었다. 출입문은 두 짝 판자로 만든 널문이다. 지붕 골격을 이루는 뼈대는 둥근 모양의 도리가 5개로 짠 지붕틀로 지은 5량가(五樑家)이고, 천장은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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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 안에 모시고 있는 위패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 27분의 위패인데, 임진왜란 때 선암산 바위굴에 피난시켜 8년간 모시다가 선조 34년(1601) 다시 현 위치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위패는 6·25 피난 때도 옮겨졌다. 경상북도의 향교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건립 당시의 위패이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5칸이다. 평면은 앞쪽에 기둥만 있는 반칸폭의 툇간(退間)*을 두고, 뒤편에 6칸 크기의 위패를 봉안(奉安)*하는 넓은 공간을 두었다. 둥근기둥 위에는 지붕의 무게를 받치기 위한 공포(栱包)*를 설치하였으나 세부수법은 앞, 뒷면 간에 차이를 두어 정면을 강조한 듯하다. 벽체는 출입문이 있는 전면을 제외하고 모두 가는 나무를 발처럼 엮은 바탕에 양쪽으로 흙을 바른 뒤 석회, 모래와 물을 적절히 배합해 얇게 바른 회사벽이다. 출입문은 두 짝 판자로 만든 널문이다. 지붕 골격을 이루는 뼈대는 둥근 모양의 도리가 5개인 5량가이다. 보 위에는 여러 장의 판재를 겹치고 연꽃과 연잎을 초각한 파련대공으로 도리를 받쳤다. 실내 바닥은 전돌을 깔았고, 공자를 비롯한 성현 27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천장은 서까래가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기둥머리 밑으로는 무늬 없이 바탕색만 칠해져 있고, 그 이상은 부재의 끝부분에 여러 색으로 칠해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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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創建) : 건물을 처음으로 세우거나 만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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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툇간(退間): 집채의 원 칸살 밖에 딴 기둥을 세워 붙여 지은 칸살. 바라다보는 위치에 따라 달리 불린다.
*위패(位牌) : 단(壇), 묘(廟), 원(院), 절 따위에 모시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
 
*툇간(退間) : 건물의 앞이나 뒤로 반칸정도로 확장한 공간. 주로 앞은 툇마루, 뒤는 반침을 두어 책장 등으로 사용됨
 
*봉안(奉安) : 불상, 신주(神主)나 화상(畫像)을 받들어 모심
 
*공포(栱包) : 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주두, 소로, 첨차, 제공, 한대, 살미 등의 부재를 짜넣은 것
 
*연등천장 :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
 
  
 
===영문===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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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seongjeon Shrine of Uiheunghyanggyo Local Confucian School'''
  
 
===영문 해설 내용===
 
===영문 해설 내용===
 
대성전은 향교에서 유교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공간이다. 향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지방에 설립된 국립교육기관으로,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역 학생들에게 유교를 가르쳤다.
 
대성전은 향교에서 유교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공간이다. 향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지방에 설립된 국립교육기관으로,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역 학생들에게 유교를 가르쳤다.
  
의흥향교는 1398년 처음 세워졌으며, 임진왜란 때 건물이 불에 타 1601년 중건하였다. 1641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면서 대성전 건물을 세웠고, 이후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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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흥향교는 1398년 의흥면 읍내동에 처음 세워졌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1년에 다시 지었다. 1641년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대성전 건물을 새로 지었고, 이후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쳤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 27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이들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이곳의 위패들은 향교가 세워졌을 당시에 안치했던 위패를 그대로 모신 것으로, 임진왜란 때 전란을 피해 선암산의 바위굴에 8년 동안 피난시켰다가 다시 봉안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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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 27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경상북도의 향교 중 유일하게 건립 당시의 위패 그대로를 모시고 있다. 임진왜란 때 선암산 바위굴에 피난시켜 8년간 모시다가 1601년에 다시 원래대로 모셨다. 제사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지낸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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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군위문화원  http://gunwicc.kr/gwcc/board.php?bo_table=cultural&wr_id=8&page=1&sfl=&stx=&sst=wr_hit&sod=desc&sop=and&page=1    -> 임진왜란 당시 돈암 손기남(豚岩 孫起南)선생이 선암산(船岩山) 바위굴에 피난시켜 8년간 모시다가 1601년 10월 5일 현 위치에 위패를 모시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도내에서 유일하게 당초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군위문화원  http://gunwicc.kr/gwcc/board.php?bo_table=cultural&wr_id=8&page=1&sfl=&stx=&sst=wr_hit&sod=desc&sop=and&page=1    -> 임진왜란 당시 돈암 손기남(豚岩 孫起南)선생이 선암산(船岩山) 바위굴에 피난시켜 8년간 모시다가 1601년 10월 5일 현 위치에 위패를 모시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도내에서 유일하게 당초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문화해설사와 함께하는 경북의 재발견 - 57. 군위 의흥향교, 경북일보, 2010.2.17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7623&sc_serial_code=SRN220  -> 중수 관련 이력들 확인 가능 (1601년(선조 34)에 중건했다. 그 뒤 1614년(광해군 6)에 하리촌(下里村)으로 옮겼다가 1641년(인조 19) 현 위치로 다시 이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대성전은 1957년·1968년·1977년에 각각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6, 7명이 운영하고 있다.)
 
*문화해설사와 함께하는 경북의 재발견 - 57. 군위 의흥향교, 경북일보, 2010.2.17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7623&sc_serial_code=SRN220  -> 중수 관련 이력들 확인 가능 (1601년(선조 34)에 중건했다. 그 뒤 1614년(광해군 6)에 하리촌(下里村)으로 옮겼다가 1641년(인조 19) 현 위치로 다시 이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대성전은 1957년·1968년·1977년에 각각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6, 7명이 운영하고 있다.)

2020년 10월 1일 (목) 06:10 판


의흥향교 대성전
Daeseongjeon Shrine of Uiheunghyanggyo Local Confucian School
의흥향교 대성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의흥향교 대성전
영문명칭 Daeseongjeon Shrine of Uiheunghyanggyo Local Confucian School
한자 義興鄕校 大成殿
주소 경북 군위군 의흥면 읍내리 217
지정번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8호
지정일 1985년 10월 15일
분류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향교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의흥향교 대성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향교는 국가에서 설립하여 유학을 가르치고 인재를 기르는 지방 교육 기관으로, 지금의 중・고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시나 문장을 짓는 법과 유교의 경전과 역사를 가르쳤고, 중국과 조선의 성현에게 제사를 올렸다. 갑오개혁 이후 교육 기능은 사라졌으며, 봄가을에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고 초하루와 보름에 향을 피운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전각으로, 향교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의흥 향교는 태조 7년(1398) 의흥면 읍내동에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려 선조 34년(1601)에 다시 지었다. 인조 19년(1641)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대성전은 이때 세워졌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이다. 평면은 앞쪽에 기둥만 있는 반 칸 폭의 툇간(退間)*을 두고, 뒤편에 6칸 크기의 위패를 모시는 넓은 공간을 두었다. 출입문은 두 짝 판자로 만든 널문이다. 지붕 골격을 이루는 뼈대는 둥근 모양의 도리가 5개로 짠 지붕틀로 지은 5량가(五樑家)이고, 천장은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다.

대성전 안에 모시고 있는 위패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 27분의 위패인데, 임진왜란 때 선암산 바위굴에 피난시켜 8년간 모시다가 선조 34년(1601) 다시 현 위치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위패는 6·25 피난 때도 옮겨졌다. 경상북도의 향교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건립 당시의 위패이다.


  • 툇간(退間): 집채의 원 칸살 밖에 딴 기둥을 세워 붙여 지은 칸살. 바라다보는 위치에 따라 달리 불린다.

영문

Daeseongjeon Shrine of Uiheunghyanggyo Local Confucian School

영문 해설 내용

대성전은 향교에서 유교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공간이다. 향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지방에 설립된 국립교육기관으로,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역 학생들에게 유교를 가르쳤다.

의흥향교는 1398년 의흥면 읍내동에 처음 세워졌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1년에 다시 지었다. 1641년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대성전 건물을 새로 지었고, 이후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쳤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 27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경상북도의 향교 중 유일하게 건립 당시의 위패 그대로를 모시고 있다. 임진왜란 때 선암산 바위굴에 피난시켜 8년간 모시다가 1601년에 다시 원래대로 모셨다. 제사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지낸다.

참고자료

  • 군위문화원 http://gunwicc.kr/gwcc/board.php?bo_table=cultural&wr_id=8&page=1&sfl=&stx=&sst=wr_hit&sod=desc&sop=and&page=1 -> 임진왜란 당시 돈암 손기남(豚岩 孫起南)선생이 선암산(船岩山) 바위굴에 피난시켜 8년간 모시다가 1601년 10월 5일 현 위치에 위패를 모시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도내에서 유일하게 당초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 문화해설사와 함께하는 경북의 재발견 - 57. 군위 의흥향교, 경북일보, 2010.2.17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7623&sc_serial_code=SRN220 -> 중수 관련 이력들 확인 가능 (1601년(선조 34)에 중건했다. 그 뒤 1614년(광해군 6)에 하리촌(下里村)으로 옮겼다가 1641년(인조 19) 현 위치로 다시 이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대성전은 1957년·1968년·1977년에 각각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6, 7명이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