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김씨 학봉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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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김씨 학봉종택
Hakbong Head House of the Uiseong Kim Clan
의성김씨 학봉종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의성김씨 학봉종택
영문명칭 Hakbong Head House of the Uiseong Kim Clan
한자 義城金氏 鶴峰宗宅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856번지
지정번호 경상북도 기념물 제112호
지정일 1995년 12월 1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3,458㎡
웹사이트 의성김씨 학봉종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학봉 종택은 조선 중기 때 문신이었던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과 그 종손들이 살던 집이다.

김성일은 이황(李滉)의 수제자로 경상도 지역 유림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1590년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일본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여 임진왜란 초에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곧 사면되고 다시 경상도 초유사*에 임명되었다. 경상도 지역에서 의병을 모으고 군량미 확보에 힘썼으며, 곽재우 등 의병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진주대첩 승리(1592)의 기반을 만들었다. 그러나 1593년 진주성에서 계속 항전 중에 병사했다.

원래 의성김씨 종가가 있는 안동 천전리에 살았는데, 1582년 처가가 있던 이곳 금계로 분가하였다. 학봉 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으나, 지대가 낮아 침수 피해가 잦았기 때문에 1762년 15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 자리로 옮기면서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남겨 두어 소계서당으로 쓰도록 하였다.

학봉 종택은 사랑채와 안채로 이루어진 정침**, 사당, 별채인 풍뢰헌, 유물관인 운장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근년에 유물을 전시하고 보관하려고 지은 운장각에는 김성일이 사용했던 안경, 칼, 벼루 등의 유품과 고서 및 고문서 등이 있다.


  • 초유사(招諭使) :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타일러 경계하는 일을 맡아 하던 임시 벼슬.
  • 정침(正寢): 주택의 중심이 되는 집 또는 방.

영문

Hakbong Head House of the Uiseong Kim Clan

This is the head house of the family of Kim Seong-il (1538-1593, pen name: Hakbong),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A head house is a residence passed down among the male successors of a family lineage.

Kim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68 and served various high official posts. As one of the distinguished disciples of the renowned Confucian scholar Yi Hwang (1501-1570), he played a pivotal role among scholars of the Gyeongsang-do area. In 1590, Kim visited Japan as an envoy and reported back that Japan had no intentions to invade Korea. However, just two years later, his remarks proved incorrect. To make up for his mistake, he desperately devoted himself to fighting against the Japanese. He urged people to join civilian armies and dedicated himself to providing food for the troops. He died from illness during a battle against the enemy at Jinjuseong Fortress.

Kim originally lived in the Andong area, in the Uiseong Kim clan’s village, called Cheonjeon-ri. But in 1582, he moved to Geumgye-ri Village to be closer to his in-laws. In 1762, the house was moved 150 m northwest due to the frequent water damage. In 1964, the women’s quarters of the house was moved back to its original location, while the men’s quarters was left at its current location to be used as a village study hall.

The house consists of a main quarters, which includes a men’s and women’s quarters, a shrine, a detached quarters, and a museum. The museum holds a collection of Kim’s belongings, including his glasses, sword, inkstone, as well as old manuscripts and documents.

영문 해설 내용

이 집은 조선시대의 문신 김성일(1538-1593, 호:학봉) 가문의 종택이다. 종택이란 한 집안의 종가가 대대로 사는 집이다.

김성일은 1568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황(1501-1570)의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경상도 지역 유림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1590년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 온 후, 일본이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였지만, 2년 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김성일은 자신의 과오를 씻기 위해 경상도 지역을 돌며 의병 활동을 독려하고 군량미 확보에 전념하는 등, 침략군과의 전쟁에 투신하였다. 진주성에서 항전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김성일은 원래 의성김씨 집성촌인 안동 천전리에 살았는데, 1582년 처가가 있던 이곳 금계리로 이주하였다. 집이 위치한 곳이 침수피해가 잦았기 때문에 1762년 북서쪽으로 150m 정도 옮겼다가, 1964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재 위치로 옮겼다. 이때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남겨 두어 서당으로 쓰도록 하였다.

학봉종택은 사랑채와 안채로 이루어진 정침, 사당, 별채, 유물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물관에는 김성일이 사용했던 안경, 칼, 벼루 등의 유품과 고서 및 고문서 등이 있다.

참고자료